WR-1깨어남
라바 일행이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다 들었을 땐, 이미 기이한 마을에 도착한 뒤였다. 그간의 각종 기괴한 일들로 인하여, 문득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곤경에 빠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번 이야기를 이어나가지. 절름발이 서생은 실망하여 돌아가고, 좌절로 낙심하게 되는데……
어떤 일 때문에 그리되었느냐고?
그야 당연히 그림 때문 아니겠는가.
무슨 그림이냐고?
친구를 잃고 몹시 절망한 그 서생은, 그렇게 십수 년 동안 일어나지 못하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아, 모든 걸 쏟아부어 필생의 역작을 완성할 것을 맹세하였지.
뭘 그렸느냐고?
보지 못했던 것을 그리려는 게지.
어떻게 그리려는 거냐고?
그야,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해야겠지.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벌써 재미있지 않은가. 다들 알다시피 사람의 상상의 한계는 결국 보았거나 알고 있는 것들에 의해서 결정되지. 그러니 상상만으로 알지 못하는 사물을 그려낸다는 건, 자신마저 속여야 하니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울 수밖에.
헌데 이 세상에,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백지를 마주하고 십수 일을 더 고심한 서생은, 피골이 상접하는 지경까지 야위어 가뜩이나 절름발이인 그 꼴이 더 흉측하기 그지없었더랬지.
때는 한겨울이라 식량은 진작에 떨어졌고, 이웃마저도 그 흉측한 몰골 때문에 가까이할 엄두조차 못 낼 정도였으니.
그러던 어느 날, 절름발이 서생은 몇 번이나 몽롱한 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다네. 팔다리는 나른했지만 머리는 오히려 맑았지.
서생은 자신의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 허나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너무 가난하여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 아니겠나.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 사방이 텅 빈 것을 보며 정말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고 하더군.
눈이 쌓여 얼어붙은 땅바닥이 점점 가물가물해져갔고,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눈보라 소리도 점점 희미해져 갔지. 눈을 깜빡거렸더니 혼란스러워지면서, 벽은 점점 멀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졌고, 책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붓과 종이와 벼루는 연기처럼 보이는 게 아니겠나.
어느 순간, 그는 창밖의 함박눈이 몇 개인지를 전부 헤아릴 수 있게 되고, 달빛의 각도와 구름의 진리를 알게 되었네. 서생은 손을 뻗어 밤의 장막을 더듬다 실수로 고꾸라졌지만, 땅은 더 이상 그의 발에 장애가 되지 않았지. 서생은 땅 밑으로 떨어지다가, 또 먼 하늘로 날아가기도 했다네.
서생은 눈을 떴지만 볼 수 없었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었다네. 주변은 온통 어둠에 잠겨 있을 뿐…… 그런데 그는 오히려 미친 듯이 기뻐하는 게 아니겠나. 다른 방해가 전혀 없는 이 상황에서만, 이 서생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모사와 모독이 아니라, 진정한 창작을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게지.
서생은 어둠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기다렸고, 마침내 자신의 마른 육체마저 느낄 수 없게 되자 생각하기 시작했지…… 만물이 더는 존재하지 않고, 의식만이 깨어 있을 때, 그는 비로소 잠깐이라도 자신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었네.
서생의 상상은 더는 구속받지 않게 되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해냈다네…… 서생의 머릿속엔 별의별 괴상한 일들이 일어나 현실을 덮어버렸지.
그날 늦은 밤, 옆집에서 밤을 지새우던 노인은 절름발이 서생의 초가집에서 새어 나오는 현란한 불빛을 보았네. 형상이 기이하고 색채가 다양한 데다 생전 처음 듣는 각종 소리를 내는 것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지. 노인은 용기를 내어 담 너머로 그 초가집을 훔쳐보았지.
허나 살짝 훔쳐보기만 했을 뿐, 더 자세히 못 보고 급히 집으로 돌아온 노인은, 그날 오랫동안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고 하네.
다음 날, 초가집 앞으로 몰려온 이웃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때는, 서생의 유해 말고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네. 모두 그가 얼어 죽었다고 생각했지. 촌장이 다가가 보니, 서생 앞에 펼쳐져 있는 백지에는 서리만 잔뜩 끼어 있고,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네.
그 일 이후, 사람들은 서생이 과거를 놓지 못해 그림 앞에서 죽었다고 여겼지. 서생이 일찌감치 괴질에 걸려, 자신의 아츠를 제어하지 못해 이런 괴이한 일들을 해냈다는 설도 있었고.
유일하게 진상을 목격했던 그 이웃 노인은 줄곧 이 일에 대해 말을 아끼다가, 임종 직전에야 자기 아들에게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이름조차 잊힌 그 절름발이 서생은 진정한 천고의 대가”라고만 말했다더군.
그건 왜 그런 거요?
왜냐하면 그 절름발이 서생이 그날 밤 약속을 지켜, '세상에 있지 않았던 것'을 확실히 그려냈기 때문이지.
왠지 책에 쓰인 내용과 좀 다른 것 같지 않소?
노인은 이유가 무엇인지 말할 겨를이 없었거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 채 숨을 거둔 거겠지.
그래서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로는, 의기양양해 하던 그 절름발이 서생이 넋이 나갔다는 부분까지 밖에 전해지지 않지.
진실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아마 아무도 모를 걸세.
그런데 세상에 없는 것 그리기가 뭐 그리 어려운가? 가서 대충 아무 그림이나 한 장 그리면,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것 아뇨?
허허…… 그렇게 말하면 아니 되네. 자네가 지금까지 큰 호수를 본 적은 없어도, 비 온 후에 고인 물은 본 적이 있지 않나. 호수는 고인 물이 아주 많이 모여서 생긴 것이니, 결국 자네는 호수를 본 적이 있는 게 되는 셈이 되지.
이 절름발이 서생의 대단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네.
당신 말대로라면, 그는 도대체 뭘 그린 거요?
누가 알겠나.
이런 복잡한 얘긴 그만하십시다, 별로 듣고 싶지도 않은데…… 다른 이야기는 도대체 언제 하는 거요?
저는 지난번의 '홀로 고독히 하늘로 향해, 한 쌍의 검으로 천하를 가르는 이야기'의 결말을 듣고 싶어요!
그래그래, 아무렴. 세간의 이야기는 끝이 없단다. 내게 백 년도 안되는 수명으로 모든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달라는 건 욕심이 과한 게 아니겠느냐.
다들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내 다음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줌세.
좋아요!
관례대로 내 이야기는 공짜라네. 아, 물론 찻값 정도는 내줄 수 있겠지?
오늘은 새로운 얼굴이 몇 명 보이는 것 같군그래. 어때, 여기 계신 손님 세 분께선 이 진기한 이야기에 만족하셨는지?
……
……
……실제 이야기입니까?
어떤 서생이 광석병에 걸려, 소원을 이루기 전에 우울하게 죽었다…… 전 실화라고 확신하지요.
자고로 이야기엔 조미료를 가미해야 제맛 아니겠습니까.
일리가 있군요!
감사합니다.
허나 이런 기이한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이런 방면에 흥미가 있을 뿐……
전 정식 이야기꾼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 마을에서 이야기를 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제 헛소리를 듣길 원하는 사람도 여기 몇 사람이 전부지요.
세 분은 처음 뵙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크흠…… (눈짓을 보낸다)
아…… 네, 그렇습니다. 여기 두 친구는 먼 곳에서 왔습니다. 사람을 찾으러요.
그런데 이 두 친구가 염국이 익숙지 않다고 하여, 제가 길 안내를 도와드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저희가 어떻게 불러드려야……
저는 집을 떠난 지 여러 해가 되어 옛 이름을 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왕년에 글재주가 좋아 자호를 '자산거사'라 하였고, 염치없지만 지금까지도 이 호를 계속 사용하고 있지요.
대단한 경지에 오르셨군요! 공교롭게도 저 역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지금도 '우요우'이란 이름을 빌려 쓸 수밖에 없는 처지지요. 절 그냥 '우' 동생이라고 불러 주시겠습니까?
(지어낸 이름이었던 거야!?)
(쉿……)
(크루스? 뭔가 발견한 거야?)
(어? 아~ 아니. 난 그냥 저 사람이 매번 억지로 둘러대는 게 너무 재밌어서~)
(……)
이거 이거, 우리 모두 세상의 떠돌이였군요. 헌데, 세 분이 찾으려는 사람은 누구신지……
옛말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정말 공교롭게도, 저희가 찾고 있는 사람 역시 화가랍니다.
……화가? 이 크지 않은 마을에 화가가 있단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인가요?
어…… 은인님?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여성이요. 어, 머리에 특이한 뿔이 나 있고, 기이한 아츠도 쓸 줄 알고…… 그리고…… 화가예요.
그게 다인가요?
……그게 다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흠, 이상하네요…… 설마 두 분이 찾는 사람이 여길 떠난 걸까요?
이 마을은 방문객이 아주 적다 보니, 만약 그 말 대로라면 그 기인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더는 폐를 끼치지 않도록, 저희는 이만……
이만……?
우요우 씨?
이봐, 왜 그래?
아, 헤헤, 우리…… 어느 쪽에서 들어왔죠?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이 오솔길을 따라가면, 정원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아마 세 분은 사람들을 따라 이곳에 오다가 길을 헤맸을 겁니다. 하하, 이 정원은 크지도 작지도 않지만, 길이 많이 복잡하니, 하인에게 물어보시면 될 겁니다.
하…… 이렇게 멍청할 수가, 왜 기억이 안 나지.
만약 그 화가에 대해 단서를 찾는 데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전 이만 일이 있어서, 송구하오나 따로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 대단히 감사합니다. 배웅은 괜찮습니다. 은인 두 분, 우리도 이만 갈까요?
잠깐……
이제 우리 어디를 가볼까요? 이 찻집과 객점, 정원까지 다 가봤는데, 어디에서 또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지?
음,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거죠? 대략…… 이삼일 정도?
확실해?
아하하, 아마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자서 그런지, 조금 헷갈리네요.
라바~
응…… 느낌이 오긴 하는데…… 근데 좀 애매해…… 마치……
이럴 땐 직감을 따라가야지~
안 그래도 지금 내 직감이 말해주고 있어. 지금은 매우 성가신 상황이라고.
무슨 정신적인 오리지늄 아츠인 건가?
흠…… 아츠라면……
은인님들? 뭘 그리 속닥거리십니까? 더 지체하다간 곧 어두워질 겁니다.
무슨 소리야, 하늘은 아직……
……
……하늘…… 이?
우리가 하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분명 고개만 들어도 알 수 있을 텐데…… 정말 이상한데.
은, 은인님, 이게 무슨 일이죠? 저쪽 좀 보세요. 마치…… 달이 뜬 것 같은데요!?
지금은 아직 대낮인데, 저쪽 다리에는 왜 등불을 켜놓은 거죠?
뒤를 봐……
에?
저쪽 하늘 말이야…… 저건…… 태양이야?
아~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면 하루가 '지나게' 되는 셈이 되는 건가~?
이건 정말…… 신기하네. 항상 니엔이 염국은 땅이 넓고 자원이 풍부하다고 그랬지만…… 이런 경관까지 있을 줄은……
어, 잠깐만, 내 주머니에 뭔가 있는 것 같아……
이건 니엔이 내게 준 부적이잖아……?
잠깐…… 잠깐! 아니, 틀렸어!
'이런 경관'이라니,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아……
우요우!
에……? 전 여기입니다, 여기요!
여기, 진짜 니옹 마을이 맞아!?
그…… 그거야…… 어……
자, 자세히 보니 뭔가 좀 잘못된 것 같은데요. 이 근처에 다른 마을은 없어요!
역시 아니야…… 틀렸어.
크루스, 우린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출발해 우선 구오성에 도착했고, 보급 후 다음 날 오전에 성을 떠났어.
그런 다음 우린 회제산의 황야에서 부서진 차 한 대를 보았지……
……그런 다음 두 분이 저를 그 짐승들에게서 구해주신 거군요?
그냥 그것들을 둥지를 틀기 좋은 새 보금자리로 옮겼을 뿐이라구~ 다들 먹고 살기 힘들 테니까~
그런 다음엔?
그런 다음 우린……?
응응, 그런 다음 우린 바로 회제산에 올라가 초가집 하나를 찾았잖아~
내가 열었어, 그곳의……
문을……?
종소리? 어디에서 나는 종소리지?
종이 울렸어? 종이 울렸다! 이봐, 빨리 가서 가족들을 모두 불러 내! 어서!
무슨 일이야! 이미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왜 하필 오늘!
잠시……! 무슨 일이야?
당, 당신들은 외부인인가? 종을 친다는 건 서쪽 산에서 괴물이 온다는 소리야!
그 괴물들은 빛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햇빛이 있는 곳으로 피하면 안전할 거야!
괴, 괴물!? 무슨 괴물이……
아이고, 당신들이랑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 없어! 비켜, 난 아내를 이곳까지 데려와야 한다고!
엄마! 엄마!
다 왔나? 안 온 사람 없나?! 빨리 확인해!
은인님, 은인님, 우리도 빨리 가서 숨어요!
햇빛이 있는 곳으로 도망가면 괜찮다고 그랬죠? 그럼 우리 어서…… 은인님?
……크루스.
준비됐어~
좋아.
……은인님!? 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 정신이 없는 상태이니, 일단 피하고 다시 이야기하시죠!
어! 어어! 왜 바로 공격하는 겁니까! 아이고! 은인님들…… 잠깐만요, 좀 기다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