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박스 여행
다른 두 오퍼레이터의 동행으로 첫 외근 작전에 나선 오퍼레이터 그레이. 사실 그에겐 함선 밖의 낯선 세계를 마주하기 위한 준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2:42 P.M. 날씨/흐림
림 빌리턴 변경, 재앙 경보 구역
안전벨트는 잘 맸지?
잠깐 기달……
잘 맸네, 뭐. 간다!
뒷좌석의 측정기는 둘째치고, 적어도 뒷좌석의 승객이라도 좀 생각해라!
와오~! 엔진 소리 죽이는데. 역시 긴급 임무용으로 배급된 거라…… 파워가 빵빵해!
너 때문에 망가지기라도 하면 일 년 치 급여가 날라가게 된다. 그리고 에너지 소비도 좀 신경 쓰라고.
뭔 소리야! 빠르면 20시간 뒤에는 폭풍이 형성될 거야. 재앙이 도달하기 전까지 대피하지 못하면, 우리는 차째로 모래와 활성 오리지늄 먼지에 생매장돼버릴걸.
게다가 우리한텐 저장 탱크도 있잖아. 여기 캐스터가 두 명이나 있으니, 에너지 소비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렇지, 뒷좌석의 꼬마 캐스터님?
네…… 하지만 저도 운전면허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제가 버기카를 몰았으면 더 빠르고 편했겠죠?
그건 안 돼.
엥?
맞아. 너 아마 이런 구조 임무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지?
이동도시에서 벗어난 외근 임무에는, 언제나 뭐가 됐든 귀찮은 일이 닥치는 법이야. 그러니까 네게 단독 행동을 시킬 수는 없어. 조력자가 있는 편이 좋아.
“재앙 경보 구역에서 작전을 펼칠 때는 반드시 재앙정보전달자와 동행해 여러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번에 받은 구조 신호는, 림 빌리턴 지방 도시의 방식으로 암호화된 거거든. 휴…… 심경이 복잡한걸.
동포들이 보낸 신호라서…… 인가요?
그건 아냐.
아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림 빌리턴은 말이지…… 흐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잡생각하지 마. 앞에 파인 곳이 있다.
으앗?!
아이고 승객님들, 시간이 없어서 승객 여러분의 승차감까지 신경 쓰지 못하는 점은 미리 양해 바랍니다~! 혀 안 깨물게 조심해!
너, 처음에 이 임무를 반대했었지 않나……
죄, 죄송해요! 제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에휴…… 네 탓이 아니다. 탓하려면 가장 먼저 튀어나와 자기가 함께 가면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한 어떤 재앙전보전달자겠지.
내가 안 갔어도 다른 누군가가 갔을걸!
앞에 돌출부가 있다, 다들 조심해!
윽!
아…… 저어, 고맙습니다!
설마하니 저번에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네 무기에 앰프를 붙여준 뒤로, 사람을 지탱하는 업무까지 가능해질 줄은 몰랐는걸.
필요하다면 밧줄로 적을 돌돌 묶고 매듭까지 매줄 수도 있다.
진심이야?
시험해볼까?
됐어. 네 그 보물에 전기라도 흘렸다간, 내 머리가 하늘까지 솟을 거라구. 차라리 콩깍지 까는 법이나 연구해서 사람들한테 네 취향을 어필하는 게 어때?
이제…… 슬슬 본론으로 돌아갈까. 그레이, 네 옆좌석에 놓인 상자의 측정기 바늘 좀 봐줄래?
네! 황색 부분에 거의 근접하긴 했지만, 아직은 녹색 부분이에요. 수치는…… 윽, 눈금이 엄청 많네요. 어딜 봐야 할지……
아, 그것까진 안 봐도 돼. 어차피 이미 이 일대에 들어와 버렸으니까 말이야. 현재로서는 아직 재앙 구름이 형성될 기미도 없고, 전방의 길 상황도 나쁘지 않아. 다만……
그만둬. 이런 임무에서 그런 불길한 예언은 금물이다.
나 원…… 재앙정보전달자인 이 몸이 온 이상, 불길하다느니 예언한다느니 해봤자 소용없다고.
애초에 재앙정보전달자 자체가 제일 불길한데 무슨.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앗, 죄송해요. 제 말은, 재앙정보전달자는 사람들에게 다가올 위험을 알려주는 좋은 사람……이 아닌가요?
문제는 바로,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라는 점이다.
도시로서는 재앙의 피해에 따른 대가를 감당할 수 없다. 재앙정보전달자의 경고를 받은 이상, 즉시 도시를 대피시켜야만 하지.
이동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상당 부분의 오락 활동, 심지어는 일상적인 활동까지도 중지해야 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피 루트를 짜고, 오락 설비 내지 공공 설비에서 에너지를 추출하고, 도시 구역의 분단 및 연결을 계획하고……
그리고 이 평화롭던 일상을 어지럽힌 것은, 모두 '불길'한 재앙정보전달자의 메시지 한 통이지.
대피 후, 만약 정말로 재앙의 강림이 관측되면, 사람들은 살아남은 것에 환희하며 이를 경축하지.
심지어는 환희에 빠진 나머지, 당시에 누가 광석병에 감염될 위험을 무릅쓰고, 이상이 감지된 황야를 관측해 데이터와 정보를 가지고 돌아와 그들이 재앙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는지 마저 잊어버리곤 해.
그리고 또 하나의 가능성은……
대피에 성공한 뒤, 몇 주, 몇 개월이 지났을 때.
그때까지도 여전히 재앙의 징조나 정보가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서서히 자신의 정상적인 생활 리듬을 망가뜨린 악운의 전달자를 멸시하기 시작한다.
몇 년 후 그 재앙정보전달자가 마침내 재앙을 정확히 예보할 때까지, 혹은 그가 기나긴 세월 동안의 멸시와 냉대에 견디지 못하고, 다른 도시로 떠나 버리거나 위기 협약의 위험한 임무에 몸을 던질 때까지 말이다……
어이, 에이어스. 그건 특수 사례잖아.
림 빌리턴에서 재앙정보전달자에 대한 대우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 심지어는 광석병에 걸려도 생활이 다소 불편해질 뿐, 밥벌이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고 말이야.
그럼 네가 기껏 채굴선을 떠나 재앙 경계권 내의 도시에 대피하라고 알렸을 때, 누군가 네게 악수라도 건넸나?
……
……그거랑은 다르지. 누가 거기서 할 짓 없이 악수나 해주고 있겠냐!
그곳이 림 빌리턴이었고, 네 몸에도 결정이 없었고, 사람들이 신뢰하는 채굴팀의 재앙정보전달자였으니 망정이지. 다른 데라면 돌팔매질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걸?
(이런 얘기, 그만할까?)
으음, 괜찮아요. 모두 유용한 이야기인걸요. 더 알려주세요!
그냥 넌 염국의 한 도시에서 운전기사가 되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봤어야 했어, 레온하르트.
그럼 넌 운전기사의 보디가드나 하려고? 세상에 어떤 기사가 보디가드를 고용하고 살아? 호송차?
풉…… 헤헤, 하지만 호송차의 뒷자리에는 일반 승객에게…… 음, 어, 그러니까 '수다'를 떨 자리는 없겠죠?
엥? 너 그런 말도 들어봤어?
네! 초대형 이동도시에서는 조그만 택시를 몰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염국의 일부 도시 기사들은 고객에게 엄청나게 친절하다고 들었어요. 맞죠!
로도스 아일랜드의 선생님들께서는 수업 시간에 가끔씩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해주면서 분위기를 푸시기도 하거든요.
다만 수업 시간에 우리에게…… 감염자의 생활에 관련된 이야기는 그다지 안 해주는 것 같지만요.
사실 수업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감염자이기 때문에…… 아마 저희 부모님처럼, 선생님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런 현실을 직면하게 하지 않으시려는 거겠죠……
하긴, 확실히 모두의 앞에서 대놓고 상처를 들춰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것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감염자의 처지'란, 수업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거지.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의료기구에 보내져 치료를 받은 아이들은, 감염자가 되기 전까진 감염자가 뭔지도 제대로 몰랐을걸.
기껏해야 부모님에게 격리구역에 있는 '나쁜 아이'와는 같이 놀지 말라는 얘기를 들은 정도겠지.
심지어 부유한 동네에서 풍족한 생활을 보내는 평론가들은, 일부 희극에 드물게 출현하는 감염자의 비극을 보며 작가들이 병에 걸리지도 않은 주제에 앓은 소리를 낸다며 비웃기도 해…… 쳇.
극장의 단골들은 귀족 나리가 비감염자 가난뱅이를 향한 연정에 목숨을 바치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감염자가 지금까지 모은 돈을 몽땅 털어 사기꾼에게 수상한 약을 사 먹고 목숨을 잃는 진부한 장면에서는 오히려 비웃고는 하지.
그들에게 있어서, 감염자란 그저 추잡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소문 속의 불량배에 불과해. 감염자의 아픔은 마치 페이 전설처럼 멀게만 느껴지고, 심지어는 자업자득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어쩔 수 없어. 사람은 원래 자기 일밖에 모르는 법이니까. 알지 못하는 일은, 이 땅 위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마치 일부 사람들이 라테라노의 총기에서 발사되는 것이 아츠 에너지가 아니라 실체 오리지늄 제품이라는 사실에 의혹을 품으면서, 사실은 전자야말로 모조품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처럼 말이야.
엥? 그걸 모를 수도 있나요?
하하하, 이게 바로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좋은 예시야. 그레이는 자유분방하고 종잡을 수 없는 라테라노인과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총을 본 적이 있잖아.
어떤 캐스터라도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을걸? 총을 모방한 아츠 유닛은 '형태'밖에 베끼지 못했을 뿐, 출력 효율의 손실을 대가로 캐스터가 아츠의 에임과 집속 테크닉을 간소화 했을 뿐이야.
하지만 라테라노인의 총기는 그것과는 정반대지. 요구되는 것은 아마도, 충분한 양의 에너지가 아니라 사용자의 정교한 컨트롤일 거야. 뭐, 이건 그냥 내 억측에 불과하지만……
네가 아츠를 써서 구조를 알아본 거지.
쉿! 그건 말하면 안 돼!
이해해요. 캐스터라면 다들 서로의 아츠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크흠! 됐어, 이 이야기는 이제 끝!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이걸 핑계로 다른 사람의 전기 아츠를 궁금해할 테니까 말이야.
쳇.
에헤헤.
원래부터 황폐하던 창밖의 경치는, 짙은 색의 유리창 너머로 한층 더 어둑어둑하게 흐려 보였다.
이따금 밖에는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짐승들이 보였다. 재앙에 훨씬 민감한 짐승들의 움직임은, 다시금 어린 페로의 마음에 불안을 싹 틔웠다.
음…… 하지만 저는, 모르는 것에만 호기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저, 저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여러분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계신지 알고 싶어요!
음, 물론 오퍼레이터의 수첩이나 강의에도 참고가 되는 글이나 영상 자료들은 있지만, 그래도 역시 이 눈으로 직접 보고, 직접 가서 느껴보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임무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거로군.
그렇게 물으면 너무 딱딱하잖냐.
괜찮아요! 맨 처음 구조대의 오퍼레이터 형 누나들한테 구조되고 나서, 지금까지 줄곧 여러분에게 과보호 받고 있다고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늘 생각하고 있어요…… 함선 밖의 일이나 고향의 일, 엄마 아빠의 일…… 그리고 저는……
저도 여러분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응? 너는 지금까지 함선의 전력 설비를 관리해서 의료비를 공제받았던 거 아니었어?
네, 그렇긴 한데요…… 하지만……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요! 나를 거둬준 로도스 아일랜드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에 아빠 엄마를 찾았을 때……
하지만…… 혹시 그 내전이 계속된다면……
……
……
(뭐라고 말 좀 해봐. 난 이런 건 잘 못 한단 말이야. 쟤 기분 좀 풀어줘 봐.)
그냥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
우리는 성인군자도 아니고, 전지전능하지도 않아. 그리고 그건 로도스 아일랜드도 마찬가지다. 로도스 아일랜드가 원하는 일을 네가 해냈으니, 그쪽에서 네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생명을 구하는 의사는 물론 숭고하지만, 그들도 물자 지원 없이는 환자를 구할 수 없어.
그들이 먹고살기 위한 급여도, 치료에 필요한 기구들도, 모두 공짜는 아니야.
그들이 숭고한 이유는, 오직 타인의 행복을 위해 분투하는 사업에 자신의 생명과 열정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너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했고, 얼마나 위대한 성과를 냈는지가 아니라, 네가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다. 그 신념 자체가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 점에서는, 네가 우리보다 우수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단지 지금까지 몸에 익힌 생존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그 이상의 뭔가를 생각하는 게 아니다.
내 입장까지 그렇게 단언하기냐!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에게 있어서 재앙정보전달자란 사실 재앙에 맞서는 직책이라기보단, 취향에 맞는 생활방식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이런 생활방식 속에서, 나와 에이어스는 여러 가지를 보고 들을 수 있었어. 다행히 이런 무미건조한 삶 속에서도 조금의 즐거움을 찾아 시시덕거릴 수 있는 거지.
아…… 저는 줄곧 재앙정보전달자는 타인을 위해 행동하려는 마음과 투철한 사명감을 가져서 재앙에 맞서는 줄만 알았어요.
재앙에 맞서? 그런 건 됐어.
나는 소위 “재앙이 일으키는 피해와 인류에게 가져오는 공포감을 없앨 수만 있다면, 더 끔찍한 인재가 벌어져도 상관없다”는 무리의 재앙정보전달자와는 조금 다르거든.
엥? 그렇게 과격한 사람들도 있나요……
어쩌면 '맞선다'는 표현은 그런 사람들에게야 말로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몰라. 단순히 정보를 입수해 전달할 뿐인 우리들의 행동은 그에 비하면 사소하지.
아까도 말했듯이, 재앙정보전달자의 기능은 확실히 중요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적지 않아. 일반적으로 관련 지식이나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보통 실험실이나 기관 따위에 속하길 바라지.
이 일을 하는 나머지 간 큰 녀석들은, 씀씀이가 큰 고용주를 만났거나, 나처럼 단순히 다른 선택사항이 없었거나, 신념이 너무 강해서 재앙에 멋모르고 덤벼드는 녀석들뿐이야.
그리고 그 오버하는 녀석들 중엔 인류를 위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승화한 녀석도 있고, 재앙 자체에 원한을 품거나 도전심에 사로잡힌 녀석도 있지.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들은 주동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희생해 더 많은 생명을 구하고, 심지어는 재앙의 흉터를 없애고자 생명을 구하는 일마저 포기하기도 해.
하지만 이건 분명 네가 생각한, 타인을 위하는 범주에는 속하지 않지?
음…… 하지만 로도스 아일랜드도 비슷한 임무를 받아서 참여하지 않았었나요……? 방금도 말했던, 뭐더라, 위기 협약이었던가요?
맞아. 하지만 그것도 보통은 재앙 경보 구역의 작은 이동도시를 습격하는 초라한 용병단을 처치하는 수준의 의뢰야.
어쨌든 로도스 아일랜드는 재앙 자체에 맞서기 위해 목숨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는 임무는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물론, 그것이 더 숭고하다고 자만하며 다른 이의 선택에 간섭할 수는 없어. 설사 그것이 자신의 고용인일지라도 말이야.
재앙정보전달자의 본질적인 적은 재앙이지 죽음이 아냐.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이 직무를 이행할 수 있지. 너 역시 네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오퍼레이터로서의 직무를 다할 수 있어.
아니면 반대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네가 있는 자리에서 적합한 기회를 찾아 나가는 거다.
로도스 아일랜드로서는 임무에 대해 경중의 구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 역시 성과에 대한 크기를 나눌지도 모르지. 그러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원한 일의 방식을 실현하는 것만큼 숭고한 일은 없어.
음…… 그런 사고방식도 있군요……
제가 너무 조급하게 굴었던 걸까요……
너는 그저 행동하기 위해, 책임을 핑계로 자신을 짓누르고 있을 뿐이야. 너뿐만이 아니라, 재앙에서 구해진 수많은 사람이 그랬지. 재앙정보전달자에겐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다.
그 자체로는 나쁜 일이 아냐. 하지만 맹목적으로 더 무겁고 많은 책임을 짊어지려 해봤자, 그게 자신과 타인이 더 큰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누군가는 지금도 네게 보다 나은 삶을 주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들을 저버리는 것을 너 자신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대가로 삼아서는 안 돼.
으…… 그렇게 말씀하시니, 의료부의 형 누나들에게 너무 죄송한걸요……
넌 나보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는 주제에, 어떻게 그런 궤변들이 술술 나오는 거야!
너는 실용적 가치라곤 전혀 없는, 시시한 발명 따위나 소개하는 컬럼비아 잡지 좀 그만 봐라. 그리고 네 입으로 궤변을 논하다니, 웃기는군.
흥, 내 얘기는 경험담이라고. 너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일 얘기였나?
그러고 보니 에이어스 넌 직업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림 빌리턴의 몰인정하고 비열한 졸부 놈의 보디가드가 됐다거나 하는 일 따윈 해본 적 없잖아?
글쎄다. 행여 다음에 네가 새 버기카를 사기 위해 빚이라도 지는 날엔, 그런 것도 고려해볼 수밖에 없겠지?
정말이야?! 너무 자상한걸, 마침내 너도……
우선 돈부터 충분히 모은 뒤에 사고 싶은 걸 사라는 뜻이다!
그리고, 빚지는 것도 금지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나저나 그레이, 너도 참 간도 크다. 첫 외근 임무로 이런 재앙 경보 구역의 구조 임무라니.
공교롭게도 이번 임무의 내용이 전력 설비가 고장 나 좌초된 이동도시를 돕는 거니까요. 평소의 전투 관련 임무는 여러분의 발목을 잡을까 봐 걱정돼서 받지 않았어요……
전 아무리 오퍼레이터 시험을 통과했대도, 실전 경험이 전무하잖아요. 실전에서 정말로 '적'을 마주하게 되면…… 분명 훈련용 표적과는 완전히 다르겠죠……
아,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겠어요. 전투 임무든 내근 업무든, 모두 자신이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한 기회니까요……
전력 설비도 잘 관리하면서 단련도 열심히 해서, 여러분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요!
말은 그렇게 해도, 함선에서 전력 설비의 관리만 해도 충분히 바쁘지 않아? 의사와 환자부터 전투에 참여하는 오퍼레이터들까지, 모두 전기 없이는 살 수 없으니까 말이야.
언제 한 번은 박사의 서류 정리를 돕다가 피로로 쓰러졌다면서? 기겁한 박사가 서둘러 의사를 불러 의무실에 보냈다가 잔뜩 혼났다던데.
아…… 그 일은 말하자니 부끄러운데……
결재가 필요한 새로운 오퍼레이터의 전력 사용 요청서를 같이 정리해 드리기로 박사님과 약속했는데, 그 전날 밤에 갑자기 변압기 하나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응? 그건 전기 엔지니어의 일 아냐?
아, 변압기의 수리 부분이라면 그런데요.
캐스터 엔지니어에게 오리지늄 유닛의 출력 공률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해 달라고 할 필요도 있었고, 엔지니어링 캐스터가 에너지 전환 과정도 확인해야 했거든요. 그리고 냉각용……
(어, 이런 얘기를 하니까 눈이 반짝거리네.)
(이게 프로라는 거겠지.)
……의 합류 파이프 점검도 필요했어요. 어쨌든 상당히 복잡하지만, 전부 기록해뒀거든요!
아, 그나저나 클로저 씨가 설계한 이 전력 시스템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아니면 전력 공급 설비를 만지기 좋아하는 누군가가 너무 애썼다고 해야 할지……
하긴, 여기엔 전기로 자신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녀석도 있었지.
풉……
이 차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한 클로저 아가씨'께서 만든 데이터 기록 장치가 탑재되어 있다. 녹음 기능도 있다던데.
헉?! 저기…… 클로저 님, 소인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제발 제 측정기와 아츠 유닛에는 장난치지 말아 주세요……
장난이다.
……언제부터 네 유머 센스가 나보다 끔찍해진 거야. 어디서 저런 이베리아의 바닷바람처럼 썰렁한 농담을 배워와선……
우리가 언제 이베리아에서 바닷바람을 쐬어본 적이나 있나?
꿈속에서다 왜. 내가 아츠도 못쓰게 되고, 바닷바람에 목소리까지 다 갈라지는 꿈을 꿨었거든. 넌 무슨 이상한 검술을 배운다면서, 무기로 둥근 궤적을 그리며 공격하는 초식을 연습하던데.
듣기만 해도 비실용적이군.
꿈속에서도 똑같이 말했어. 단순히 교과서대로 검을 휘두르는 건 결코 전투 기술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실전에 맞게 변화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검술이라고 말이야.
누군가와 싸웠나요?
긴 옷을 입은, 조금 제정신이 아닌 듯한 사람이었지, 아마. 기억은 잘 안 나, 꿈이잖냐.
아, 도착했다. 내리자.
어라? 하지만 근처에 도시가 없는데요?
목표 지점까지는 3천 미터 정도 남았는데, 이제부터는 차로 가기는 어려워서 말이지. 그레이, 미안한데 휴대용 단말기 좀…… 아, 고마워.
음……
진부한 표현이지만,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있어.
좋은 소식은, 오는 길에 수집하고 업데이트한 데이터에 따르면, 대피할 시간은 아주 충분하다는 거야.
어쩐지 절반쯤 왔을 때부턴 별로 서두르지 않더라니…… 그런데, 어떻게 운전 중에 아츠를 쓴 거지?
째려보지 마, 에이어스. 사실 이 핸들은 장인이 특별히 개조한 아츠 유닛이라고. 내가 설마 아츠 유닛도 없이 아츠를 쓰겠어?
너희들도 알다시피, 구역 주변 데이터에 기반해서 내린 예측은 정확도가 떨어져. 그래서 재앙정보전달자가 경보 구역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상세한 데이터를 가지고 수정해야 하지.
이 부근의 오리지늄 반응은 포화 상태까지는 아직 한참 멀었어. 적어도 반 개월 정도는 떠날 준비를 할 여유가 있지.
나쁜 소식은 말이지, 이번 임무 보고의 주제를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야.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어느 쪽으로?
글쎄, 둘 다일지도.
네?
응? 전에 말하지 않았나?
어떻게 설명해 줄지 고민하다 말았잖아.
그랬나.
림 빌리턴의 일이라면 우리는 채굴팀에서 지겹도록 봤었지만, 그레이 너는 아마 처음이겠지.
이 구조 신호 말인데, 우선 정말 곤경에 빠진 도시에서 보내온 게 아닐지도 몰라. 폭도들의 함정일 가능성도 있어.
그리고 설령 신호가 진짜라고 해도, 아까 보낸 신호로 인해 분명 이 틈에 한탕 노리려는 녀석들이 몰려들었을 거야.
가장 난감한 상황은, 폭도 무리가 판 함정에 다른 폭도들까지 몰려든 경우지.
오는 길에 수집한 반향을 봤을 때, 목표 지점의 생명체 수와 분포가 어쩐지 심상치 않아.
도시라고 하기엔, 인구도 적고 상대적으로 너무 밀집되어 있어. 하지만 또 대량의 오리지늄 제품과 건축물도 명확하게 감지된단 말이지. 주민들이 납치되거나 한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 하지만 '녹슨 망치' 같은 귀찮은 녀석들만 아니면, 우리끼리 충분히 대처할 수 있어!
게다가 아직 거리도 멀어서, 아무리 차재 장비로 증폭했다고는 하지만 내 오리지늄 아츠가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어. 어쩌면 주민들이 모여 전력 장치를 어떻게 수리할지 연구하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어떤 결과를 마주하게 되더라도, 지금의 너라면 이미 준비는 되어 있겠지?
……
넋 놓고 있지 마. 이것 역시 네가 알고 싶어 했던, 집을, 함선을 떠난 후에 마주하게 되는 생활의 일부니까.
아니면 혹시 이제 이 임무에 필요한 게 네 전투력이 아니라 지식이진 않을까 기대하기 시작한 거야? 하지만 사실 '오퍼레이터'에겐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라구!
나쁜 놈들은 어디에나 있어. 그들은 네가 고향에서 쫓겨날 때 봤던 나쁜 놈들보다 전혀 나을 게 없는 놈들이지. 하지만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넌 언제든 남을 위해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거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