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6갈림길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은 노시스가 꾸며낸 연극이었고, 묀히는 이에 실망한다. 한편, 박사는 사건 개입을 결정했고 라타토스는 홀로 처리하기를 마음먹는다.
병력을 보내 두 가문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만주원을 지켜낼 뿐이라……
정말이지, 대단한 수호자 납셨군.
이런 모양새라면, 엔시오데스가 이제 만주원을 지배할 정당한 이유가 생긴 셈이군.
- 판을 보면 그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다.
-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이니까.
후우, 하기야 그렇겠지.
이쯤 되니 나도 엔시오데스가 뭘 노렸는지 알 것 같아.
권력을 내려놓겠다는 건 미끼에 불과했고, 처음부터 판을 뒤엎을 작정이었던 것이군.
- 쉐라그인들은 신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도 힘들걸.
- 엔시오데스는 신이 없어도 어떻게 사는지 잘 알겠지.
- 이건 쉐라간드의 문제는 아니야.
그래. 그가 쉐라간드에 대한 쉐라그인들의 신앙을 꺾을 수 있으리라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애초에 이를 시도할 것이라고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대장로, 라타토스, 아크토즈, 심지어 나까지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지.
물론 그도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항상 궁금했던 것이 있어.
신과 함께하지 않기 위해서는, 꼭 신을 부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머, 나는 그저 감상에 젖었을 뿐이지, 침울해진 건 아니야.
신앙은 갈수록 걸림돌이 되어가고 있으니까…… 적어도 쉐라그인이 쉐라간드께 대해 가지는 신앙은 그렇다고, 옛적부터 느끼고 있었어.
그래도 신경 써 줘서 고마워.
……하아. 그래도 나와 같이 성녀를 모시기만 할 뿐인 일개 시녀장과는 상관없는 이야기겠지.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아직도 박사 당신을 따라다니고 있는지 궁금해할 줄 알았는데.
- 사람이 방관을 택하는 데 필요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당신이 도움을 주는 데 필요한 이유도 얼마든지 있는 것처럼 말이지?
……고마워, 박사.
나는 내 선택을 믿고 나아갈 거야, 박사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랄게.
박사, 임무는 끝났다.
- 다른 사람들은?
- 수고했어.
쉐라그의 가주 둘을 붙잡아 두긴 힘들더군. 라타토스는 네게 감사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지만, 따로 생각하는 게 있는 모양인지 먼저 돌아갔다.
아크토즈도 본거지로 돌아가는 중이다. 아마 병력을 모아 엔시오데스와 사생결단을 낼 모양이다.
박사, 저들을 돌려보내는 게 정말 더 많은 희생을 막는 길일까?
- 각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 건 오직 저 둘 뿐이다.
- 지금의 상황이 이미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박사가 하고 싶은 말은, 저 둘이 여기서 잡혔다면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그대로 처형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군.
이를 피했다 하더라도, 재판이 기다리고 있었겠지.
비록 지금은 두 사람이 반역자로 몰렸다곤 하지만, 두 가문. 특히 페일로쉬 가문의 충성스러운 가신들은 아마 쉽사리 믿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분쟁이 나든 집안싸움을 하든 쉐라그는 무조건 크나큰 혼란에 휩싸이게 되겠지.
하지만 엔시오데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되든 명분은 자신이 틀어쥐고 있는 형세가 될 거야.
그에게 어느 정도의 혼란은 대수도 아니겠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다고 해도, 결국엔 수습할 자신이 있다는 거다.
……
- 그래도, 아마 완전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을 거야.
동의한다, 엔시오데스가 지금의 국면을 공들여 만들어 낸 것만 봐도, 대중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지.
내가 카란 무역회사에서 '손님' 노릇을 할 때 파악한 바로는, 임직원들이 하나같이 그 통찰력을 높이 사더군.
그런 자가 사람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이렇게 일을 벌였다는 건, 그 손에 남은 최선의 수가 이런 하이 리스크를 동반한 방식뿐이라는 추측이 타당하겠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실버애쉬 가문은 과거 브라운테일 가문과 비교적 밀접했으니, 아마 적지 않은 수의 체스 말들을 심어 놓았을 거다. 유사시 혼란을 억제할 정도는 되겠지.
문제는 페일로쉬 가문이다. 비록 장비와 교리는 낙후되었어도, 규모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니까.
글쎄, 실버애쉬 가문과 페일로쉬 가문은 항상 사이가 삐걱거렸지.
게다가 페일로쉬 사람들의 충성심은 남다른 편이라, 이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을 등질 사람은 거의 없을걸……
때문에 나는 박사가 저 둘을 돕기로 한 결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문은 가주가 있어야만 한데로 뭉칠 수 있지. 다시 말해, 가주에게 영향을 줄 수만 있다면 이들을 통해 대국을 짜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야.
허나, 내가 굳이 짚어 주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만……
쉐라그는 지형이 험하고 교통 또한 불편하다. 박사,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 우선 그 두 명과 만나 보도록 하지.
라타토스 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런 시기에도 나를 도와주다니 고마운걸.
아닙니다. 저는 결국 브라운테일의 일원이니, 이런 시기야말로 라타토스 님의 편에 서야지요.
엔시오데스가 한 말, 너는 믿어?
그럴리가요. 당연히 모함이겠죠.
……
준비하라 일러둔 것은 어떻게 됐어?
실버애쉬의 영지에서 브라운테일로 돌아가는 길이 가깝지는 않습니다만, 차량은 준비됐고, 말도 해뒀습니다.
가주님과 시우루스 님이 준비되는 대로 모시겠습니다.
……영지의 상황은 어때?
소문이 퍼지자 변경의 마을 몇몇은 즉시 실버애쉬 쪽으로 전향했다고 합니다.
중앙에 가까운 쪽은 아직 별다른 동향이 없지만……
됐어, 엔시오데스가 브라운테일에 심어 놓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일일이 세려다간 날이 새 버릴걸.
엔시오데스 쪽은?
실버애쉬 가문의 전사들이 성산의 기슭과 중턱에 주둔 중입니다.
흥,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군.
근방의 주민들은 다들 놈들을 환영한다더군요, 부끄러움도 모르는 것들.
아크토즈의 반란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니까.
오히려 녀석의 '범행'을 목격한 주민들이야말로 아크토즈를 가장 불신하는 이들이겠지.
아크토즈는 됐고, 너는? 엔시오데스에게서 얼마나 받아 챙겼지?
제…… 제가 어찌 감히……
됐어, 연기도 못하는 주제에.
……다들 나오도록, 라타토스를 포박해라.
……
……?!
끄윽……
이런 함정도 눈치 못 채면 가주라는 직함이 아깝지.
라타토스, 차량이 준비됐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야?!
네가 보기엔 어떤데?
……우리를 팔아넘길 셈이었나?
우리 동생, 그래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은가 보네.
이럴 때라도 좀 그만 비꼬면 안 돼?
……아직 우리 편에 남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지?
얼마나? 그러게, 과연 얼마나 남았을까……
시우루스, 네가 얼마나 큰일을 망쳐 놨는지 알기나 해?
나는……
나는, 이렇게 될 거라고는……
……하아. 네가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니.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나는 그저, 나도 브라운테일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그저……
널 돕고 싶었을 뿐인데……
……
라타토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은 거야?
안 괜찮다면?
……
됐어. 알았다니까! 누군가는 매듭을 지어야 할 일이다, 그거지?
내가 친 사고니까 내가 해결할게! 유카탄이랑 내 부하들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를 마당에 뭘 더 기다리겠어?!
잠깐, 어디를 가려고!
엔시오데스 그 망할 놈 보러 간다! 가서 모든 일은 나 시우루스 개인의 일탈이니, 브라운테일과는 관계없다고 말할 거야!
나는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 그래, 하지만 내 사람만은…… 절대로 빼앗을 수 없어!
……
언니, 언니! 할아버지가 또 혼낸 거야? 이미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언니가 가주가 되려면 더 혼나야 한다고……?
그, 그럼 내가 가주 할게! 가서 할아버지한테, 내가 가주 할 테니까 언니 대신 나를 혼내라고 할게!
히히, 괜찮아. 나야 뭐 유카탄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 걔랑 항상 같이 놀기로 약속했는걸. 유카탄은 분명 날 도와줄 테니까 말이야. 걔 공부도 엄청 잘 해!
게다가……
게다가, 언니는 혼나도 울지 않는걸.
언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는데 왜인지 모르게, 볼수록 가슴이 먹먹해져서……
하, 하하……
뭔데?!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내가 웃겨?!
푸하핫! 하하…… 하……
(시우루스, 바보 같은 내 동생아……)
……방금 속으로 또 내 욕했지?
아마도?
진짜……!
됐어, 이리 와. 엔시오데스에게 갈 생각은 하지 말고. 너는 이쯤에서 빠지는 게 좋겠다…… 일이 생각보다 복잡하거든.
시우루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수다 떨었던 게 언제였지?
우리가 수다를 떤 적이 있기나 해?
……그럴지도.
됐어,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좀 하고 있을 테니까, 너는 가서 네 일이나 봐.
맞다, 가는 길에 조심해. 가다가 잡히지나 말고.
무슨 소리야, 넌 안 돌아가려고?
아크토즈는 아마 아직 영지로 복귀하지 않았겠지.
녀석은 숨을 돌리고 나면, 아마 분명 다시 엔시오데스와 싸우려 들 테고.
그 전에 뭘 좀 해 놔야겠어.
……조심해, 유카탄이랑 다른 사람들이 아직 엔시오데스 쪽에 있다는 걸 잊지 마.
그리고…… 너도.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브라운테일의 가주는 내가 돼 버리는 거니까, 이, 잊지 말라고!
……
브라운테일의 가주를…… 시우루스가 맡게 될 수도 있다라……
……뭐 나쁘지 않을지도.
저기 봐, 아크토즈 님의 부대야……
아크토즈 님이 대장로님을 독살하려 했다던데……
다들 입 닥쳐! 생각을 좀 해 봐라, 아크토즈 님이 독이나 탈 사람으로 보이냐!
그게…… 하지만……
페일로쉬 가문의 사람이면서, 감히 아크토즈 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야?!
히익!!
……됐다, 굴로.
애꿎은 저들에게 화를 풀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하지만 아크토즈 님……!
엔시오데스의 모함이든 아니든, 일이 일어난 이상 아무리 말해 봤자 그 누가 믿어주겠나.
그래도, 이렇게 울분을 참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참는다고? 그럴 리가 있겠나!
엔시오데스 놈이 재주를 좀 부리긴 했지. 하지만 녀석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가 뭔지 아나?
그건 바로 날 그 자리에서 죽이지 못한 거다.
복귀하는 대로 전사를 소집해라, 가서 그놈과 한 판 붙어야 하니까.
엔시오데스에게 똑똑히 각인시켜 주자고, 녀석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말이야.
옙!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아크토즈님.
발레?!
네 뒤의 사람들은…… 너 정말로 페일로쉬를 배신한 거냐!
……발레, 우리 페일로쉬가 너를 박하게 대한 적은 없다고 자신하건만, 왜 이러는 거냐?
박하게 대한 적이 없다라……
아크토즈 님, 아직도 기억나는 게 없으십니까?
기억나다니? 나 아크토즈는 언제나 만사에 공명정대했다 자부한다만, 도대체……
이, 이건?
두려워하지 말거라, 발레.
대장로님의 영약을 마시고 사기를 몰아낸다면, 네 아비는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거다.
네 아비는 신성한 사냥 도중에 우리를 감싸려다 몸을 다치고 말았지.
대장로님이 말씀하시기를, 낙오된 네 아비는 전설 속의 설산귀에게 습격을 당한 것 같다고 한다.
지금은 기력이 많이 쇠한 듯하니…… 자, 내가 떠먹여 주도록 하마.
왜 아버지께서 일어나지 못하시는 거죠? 아버지 입가의 이 초록색은 또……
이미 사악한 독이 골수까지 스며들었다. 쉐라간드께선 네 아비가 더 이상 곁에 머무르는 걸 용납하지 못하시는가 보구나.
네 아비는 전부터 만주원과 부딪히곤 했지. 아마 그때부터 설산귀의 독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결국 오늘 있던 사냥 도중 완전히 독에 당해 버린 게 아닌가 싶구나.
이 영약마저도 그의 믿음과 의지를 돌려놓지 못했다면, 이 또한 그분이 내린 심판이 아닐는지.
……
설마 대장로님께서 마신 술이?!
네.
당시 대장로님이 제 아버지를 찾아뵈었을 때, 가져왔던 그 영약을 잃어버리셨죠. 아직 기억하시나요?
죄송합니다, 주인님. 저도 그저 반신반의했습니다만, 대전이 진행되는 도중 대장로님이 쓰러지는 그 순간 저는 확신했습니다……
……
나…… 나, 아크토즈가 설마 총애하던 장군을 직접 죽이다니……
주인님, 저는 주인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쉐라그에는 정말로 변화가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니, 부디 막아서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더 이상, 쉐라그에 충성을 다한 전사들이 그러한 최후를 맞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아크토즈가 중간에 위험에 빠지는 것을 막는다라…… 이번에도 박사의 추측이 맞았군.
하지만……
이럴 줄 알았다면 블레이즈와 함께 올 걸 그랬어. 정면 전투에 능한 오퍼레이터 중에선, 블레이즈만큼 험한 산지에서의 기동성이 좋은 오퍼레이터가 없는데 말이야.
열차가 없는 쉐라그의 교통망은 참 불편하군.
하아, 어쩔 수 없지.
……
꼭 가야만 하는 거야?
응. 엄마 아빠 말로는, 쉐라그는 더 이상 우리 가족을 품을 수 없대.
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너와는 더더욱 상관없고.
……과연 그럴까?
무슨 말이야?
엄마 아빠가 정말로 결백한지, 그리고……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범이 되지는 않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럴지라도, 나는 용서할 수 있어.
너만큼 우리 아빠를 존경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거든.
……엔시오데스. 우리의 꿈, 아직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지.
둘이서 함께 쉐라그를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로 만들기로 했잖아.
……비록 너는 이렇게 가 버리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정말?
응, 엄마 아빠는 빅토리아로 갈 준비를 하고 있어. 나도 거기서 학교를 다닐 거고.
오히려 좋은 기회지. 빅토리아에서 최고의 지식을 배운 다음, 돌아와서 너를 도와주면 되는 거니까.
……헤헤, 너란 녀석은 정말.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도 내 계획을 알려줄게. 이건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거야.
뭔데?!
엔야와 엔시아가 다 크면, 나도 쉐라그를 떠날 거야.
너처럼, 가서 많은 것들을 배운 뒤에 다시 돌아오려고.
……미래의 가주이면서, 쉐라그를 오랫동안 떠나 있어도 되는 거야?
때가 되면, 내가 널 찾아갈게.
야, 노시스. 밥이다.
……
쯧, 입을 다물고 있는다고 해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라.
실버애쉬 가문의 모두가 네게 이를 갈고 있으니까 말이야.
감히 엔시오데스 님과 성녀님께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엔시오데스 님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밥은커녕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했을 거다.
……
먹지도, 마시지도, 말하지도 않겠다는 건가?
오히려 잘 됐군, 그대로 여기서 확 죽어 버려라!
……
노시스, 많이 변했군.
예전의 너는 그런 식으로 웃지도 않았고, 사람의 면전에 대고 가치가 없다며 평가를 내리지도 않았지.
그래도 너만큼 변했을까.
옛날의 너는 신분을 무기로 삼은 적도, 빙빙 돌리는 수사법을 쓰지도 않았지.
귀족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익혀야만 하더군.
연구를 위해서라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무슨 연구를 하는 중이지?
생명과학, 그리고 오리지늄 분석.
복잡하게 들리는군.
그쪽은 어때? 이곳의 귀족 사회에서 나름 자리를 잡은 것 같던데.
네가 쉐라그를 떠날 때, 우리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나?
……
나는 내가 우물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 참으로 기쁘다, 노시스.
밖에 나오고서야 알게 되었지, 이제는 더 이상 문을 걸어 잠그고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지난 백 년간, 무수히 많은 국가 간의 교류와 갈등이 있었다. 컬럼비아는 충돌 속에서 부상했으나, 한때 강대국이었던 가울은 결국 완전히 스러져 버렸지.
테라 각국이 재앙에 의해 단절되던 시대는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교류를 거부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
만약 쉐라그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빗장을 걸어 잠근 채로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일 거다.
고요한 평화는 이제 끝이다. 남이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 주리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쉐라그는 바깥세상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아직 주도권이 손에 남아 있을 때 어떻게든 움직여야만 해.
나를 도와다오, 노시스.
……흠.
하아, 귀찮아 죽겠네.
그만 좀 하지, 나까지 화가 나려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어째서 주인님이 노시스를 그냥 가둬 놓기만 하라고 지시하셨는지.
나 같으면 말이지, 이런 역도의 목 따위 싹둑 베어버렸을 텐데 말이야.
무슨 소리, 겨우 목을 베는 걸로 충분하겠어?
주인님이 노시스 이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감히 배신하다니 말이야.
곱게 보내 줄 수는 없지.
그것도 맞는 말이네. 하지만 곧 다른 두 가문과 싸울 판이기도 하잖아, 나는 빨리 전장에 나가고 싶다고.
쯧, 전투에 환장한 놈.
주인님.
노시스의 상태는 어떻나?
입에 아무것도 대지 않은 지 하루가 지났습니다.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내가 가서 얘기해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야, 네가 보기엔 주인님이 노시스랑 무슨 얘기를 할 것 같냐?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리 그래도 옛날에는 주인님의 측근이었으니, 내가 보기엔 자비를 베풀어 독약이라도 주시지 않을까 싶은데. 죽어도 곱게 죽을 수 있도록 말이야.
소설을 너무 읽은 거 아냐?
그래도 뭐……
라타토스는 이미 대장로 쪽에 선 것 같더군.
너도 알다시피 시간문제였지.
네가 한 모든 행동이 쉐라그를 위해서라곤 믿을 수 없었을 테니 말이야.
회사 측 사람들도, 자기들은 카란 무역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데.
……전쟁을 일으키는 건 항상 최후의 수단이어야만 한다.
너는 신경 쓰는 게 너무 많아.
나머지 두 가문을 무너뜨린 다음 재건하는 쪽이, 네가 지금 생각 중인 '떳떳한' 방법들보다 훨씬 쉬울 텐데.
내가 폭력만을 이용해 권력을 휘어잡는다면, 쉐라그는 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내가 하면 되겠네.
너에 비하면 내가 걱정해야 할 것이 훨씬 적으니까.
……네가 뭘 하겠단 얘기지?
모르는 척하기는.
너도 고려해 봤던 일이잖아.
이 노시스라는 죄인, 카란 무역회사의 악당을 앞세워서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키는 거지.
……
엔시오데스, 나는 네 체스 말이 아니다. 네 부하는 더더욱 아니고.
나는 네 파트너다.
네가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강행할 거다.
오히려 네가 거부한다면 더 좋지, 연극이 한층 더 그럴듯해지니 말이야.
쉐라그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어. 나도 그걸 받아들이든 말든 상관없고 말이야.
그저 오명을 조금 더 짊어지게 될 뿐이니, 나는 신경 쓰지 않아.
……
……
……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생각이라. 네가 사실 이십 년 전과 딱히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어떤 면에서?
완벽주의와 자부심.
너는 항상 최고의 결과만을 원하지, 그리고 항상 그걸 정말로 얻어 낼 수 있다고 믿고.
최고의 결과라 하면, 아크토즈와 라타토스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지 않는 것이 되겠지.
대장로도 쉐라그에 일어나야 할 변화를 받아들이고, 자연스레 모든 것이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
그건 완벽한 결과가 아니야. 너도 잘 알듯이, 기껏해야 그저 완벽한 망상일 뿐이야.
우리가 본 것들을 저들은 보지 못했어.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사고방식을 기대하지 마라.
우리의 사고방식도 같지는 않다만.
내가 말했을 텐데, 엔시오데스. 나는 네 체스 말이 아니야. 네 부하는 더더욱 아니고.
나에게는 나만의 기준이 있어. 그리고 우리의 기준 사이에는 충분히 많은 공통점이 있지.
그게 아니라면, 지금 우리의 연극을 사실로 만들어 나라는 역도를 심판하러 온 건가?
……
어두운 조명 아래에, 엔시오데스가 노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저 네가 나의 벗이라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
잠시 침묵하던 노시스 또한 손을 내밀어, 엔시오데스의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그저 오명이 좀 더 늘어날 뿐이야. 익숙하다고.
그때처럼.
아크토즈는 이미 병력을 집결시키는 중이다.
라타토스는?
이걸 봐라.
엔시오데스에게
브라운테일 가문은 예로부터 실버애쉬 가문과 괜찮은 관계를 유지해 왔지. 최근의 갈등은 그저 쉐라그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일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해.
그 누구도 쉬이 부정할 수 없을 거야, 오늘날 쉐라그의 민심은 실버애쉬 가문을 향해 기울었다는 것을.
현재 변혁이 필요한 시기에,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쉐라그의 평화를 위해……
나 라타토스는 브라운테일 가문을 대표하여, 실버애쉬 가문에 굴복하겠다.
지난날의 앙금을 털기를 원한다면, 부디 이쪽으로 한번 찾아와 주기를 바라.
네 부모님의 죽음에 관한 진상 또한 알려 줄 테니.
라타토스가.
……뻔한 함정이로군.
하지만 갈 가치는 있다.
아직 네가 의미 없는 위험을 무릅쓸 만큼 우위를 점한 건 아니야.
우린 이미 승리했다, 노시스.
페일로쉬와 브라운테일 두 가문이 쉐라그의 반역자가 된 지금, 우리의 본래 목적은 이미 달성됐다.
브라운테일 가문에 심어 둔 사람들이 여론을 조성할 거다. 그리고 페일로쉬 쪽은…… 고집이 세지만, 그만큼 정직하기도 하지.
아크토즈가 저지른 '범죄'를 확실히 알게 된다면, 페일로쉬 가문의 문은 자연스레 우리를 위해 활짝 열릴 것이다.
또한 우리에겐 마무리를 할 시간도 충분하지.
아크토즈와 라타토스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라타토스와 만나야 한다는 거다.
만약 그 해 라타토스가 나와 함께 빅토리아로 향했다면, 지금 그 실력은 나보다 떨어지지 않았을 거다.
그런 사람이 이런 조건을 내걸었으니, 내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지.
언젠가는 네 자만심에 큰코다칠 날이 올 거야, 엔시오데스.
그렇다 해도, 그게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아크토즈 쪽도, 전혀 변수가 없는 건 아니다. 이것도 지금 너를 내보내는 이유 중 하나지.
그 지성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남자가 뭘 더 할 수 있겠나?
아크토즈는 몰라도, {@nickname} 박사라면 충분하지.
그는 이 대국에서 가장 큰 변수다. 경계할 가치는 충분해.
{@nickname} 박사라.
그자가 쉐라그에 온 뒤로 예상치 못한 일을 몇몇 저질렀다는 건 인정하지만, 네가 이렇게까지 관심을 둘 정도로 중요한가?
쉐라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자가, 순식간에 무대 한복판까지 올라서서 우리의 계획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
만약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아마 불가능했겠지.
또한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다음 수는 뭐가 될지, 뭘 할 수 있을지. 물론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나조차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해낼 가능성 또한 있다.
흥. 내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 지는 것이 두렵다면, 도전을 즐기는 듯한 태도는 삼가라고.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그 카시미어에서 왔다는 보디가드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나는 항상 이렇게 반박해 왔지. 지는 걸 꺼리는 것과 게임을 즐기는 것은 딱히 모순되는 일이 아니라고.
게임의 즐거움이란 결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향한 모든 과정에서 오는 것이지.
그만하지,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네가 스스로의 자만심으로 인해 죽기 전에, 너를 구해낼 기회가 있기만을 바랄 뿐이야.
그럼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어쨌든 간에, 내가 라타토스와 만나러 가는 동안 지휘권은 네게 넘기겠다.
카란 무역회사에서 아직 내 말을 따를 자가 남아 있나?
바이스, 마터호른.
이 둘이 네 명령을 전달해 줄 거다.
노시스, 사정은 이미 들었다. 수고 많았어.
나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게 다 연기였다니……
인사치레는 이쯤 하지.
쯧, 드디어 혼자 조용히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내 연구도 정체된 지 오래이니, 갇혀 있는 동안 책이라도 좀 읽을까 했는데……
우리는 파트너 사이 아닌가. 이건 우리의 협력 사업이니, 연구는 나중으로 미뤄 두도록.
……네가 몸 성히 돌아온다면야.
갈 시간이다, 엔시오데스.
그럼 네게 맡기겠다, 노시스.
……
……
궁금한 게 있는데, 대전 의식에서는 진심이었어?
그렇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연습이 더 필요하겠네.
예전보다는 못한 느낌이야.
괜한 참견이다.
기억 속의 너는 그래도 내 절반 정도는 따라올 수 있었지. 조금 더 신경 쓴다면 괜찮은 여흥이 될 것 같은데.
캐스터는 부업일 뿐이다.
네가 조금 더 강했다면, 연극도 좀 더 실감 나게 할 수 있었겠다만.
……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네가 격양된 모습은 보지 못한 것 같군.
연기, 나쁘지 않았어.
진심인 것처럼 보였지만.
……
노시스 씨, 이제……
……묀히는 어디에 있지?
……묀히는 다른 방에 갇혀 있습니다. 안내해드릴까요?
묀히는 알고 있나?
주인님께서는 노시스 씨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앞장서.
……
노시스 님……
묀히가 신발 속에서 숨겨 두었던 단검을 꺼낸다.
노시스가 바쁜 시간을 쪼개어 묀히를 위해 만들어 준 선물이다.
흐린 눈을 한 그녀는, 가볍게 단검을 어루만졌다.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둬라, 묀히.
……
……다치시진 않은 모양이네요.
다행이에요……
나는 무사하다.
고생한 건 너지.
저…… 저는, 다짐했어요.
노시스 님의 분부라면, 무엇이든 따르겠다고……
……
……표정을 보니, 사건의 전말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나 보군.
이 모든 건, 나와 엔시오데스의 계획이었다.
……
역시, 그런가요……
절벽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실버애쉬 가문의 바이스에게 구해진 뒤로, 계속 고민하고 있었어요.
만약 이 모든 게 연극이었다면, 제가 그 연극에서 맡은 배역은 과연 무엇일지에 대해서요.
노시스 님을 보고서야 확신이 서네요……
……
미안하다.
……지금도, 앞으로도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묀히, 네게는 너만의 신념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 또한 해야 할 말은 스스로 판단한다.
……
나와 엔시오데스 사이의 균열, 그리고 내가 카란 무역회사를 떠나 라타토스에게 접촉한 것, 모두가 계획의 일부였다.
계획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탓에, 네게는 말을 해 주지 못했어.
……
우리 둘 다 이 계획에 걸린 리스크가 크다는 걸 알고 있었지.
따라서 모든 일에 만전을 기하고, 모든 세부 사항을 통제 하에 두어야만 했다. 평소의 실험과는 달리……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없을 테니까.
만약 이로 인해 네게 불쾌함을 안겨줬다면, 나는 네게 사과해야만 해.
……
아니에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
어째서……
뭐지?
노시스 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든, 어떤 계획이 있든, 저는……
……저는 항상 노시스 님 편인걸요.
……
저를, 어째서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저를 좀 더 믿어 주셔도 괜찮을 텐데……
……
묀히, 알아줬으면 한다.
나는 너를 완벽히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네게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맡겼던 거야.
나는 너를 믿는다. 내 가장 뛰어난 부하로서, 우리의 계획에 완벽히 따라와 줄 수 있을 거라고.
……
너무 고민하지는 말도록, 이번 일은 훌륭했다. 다 끝났으니 조금 더 편히 있도록 해.
앞으로 당분간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테니.
……
……아직 대화할 기분이 아닌 모양이군.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하지.
……
저를 믿는다고요……?
저를 신뢰한다던 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
노시스 님……이번에도, 제가 노시스 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