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숙명

이름 없는 이

미니 스토리브릿지2023-08-22

이산묘에서 사가는 족장의 참회를 들으며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낭떠러지 아래, 치우바이는 이름만이 죽어버린 소년을 구하게 된다.

등장 오퍼레이터: 사가, 치우바이, 멀베리, 윈드차임스


조급한 아이

어떻게 됐어?

거친 아이

가져왔어……

조급한 아이

족장님한테 안 들켰지?

거친 아이

족장님은 집에 안 계셔. 조상님에게 드릴 공물을 바꾸러 이산묘에 가신 것 같아……

조급한 아이

다행이다, 아니면 또 혼났을 텐데…… 얼른 꺼내 봐.

조급한 아이

이건 뭐 하는 버튼이지? 여기 동그란 부분은 꼭 손전등을 끼워 넣은 것 같네…… 이게 진짜 전달자 누나가 말한 카…… 뭐 그거야?

거친 아이

'카메라'잖아.

거친 아이

확실해. 전에 전달자 누나가 우리한테 보여준 잡지에 이 기계 광고가 있었거든……

거친 아이

어제 사람들이 그 형한테서 이걸 발견했을 때, 내가 단번에 알아챘지.

조급한 아이

이 '카메라'가 진짜 사람을 빨아들이는 거야?

거친 아이

뭘 '빨아들인다'는 거야? 그건 '촬영'이라고 하는 거야!

조급한 아이

그래, 그래. 안에 뭘 촬영했는지 어서 켜 봐.

거친 아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

거친 아이

어제 토석류에 휩쓸리면서 물이 들어가서 망가졌나 봐……

조급한 아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은. 내가 해 볼게!

거친 아이

뺏어가지 마, 하지 말라고……

???

아얏……

???

내 머리!

사가

두 시주는 왜 돌멩이로 소승을 때리는 게요?

거친 아이

……

조급한 아이

……

사가

하나도 안 아프니 그리 걱정하진 마시오…… 두 사람을 탓할 생각은 없으니.

조급한 아이

그거 돌려줄래?

사가

돌려줬다가, 또 누군가한테 던지면 안 되지 않겠소.

조급한 아이

그건 돌멩이가 아니라 카메라야!

사가

……

사가

아하, 이게 바로 카메라군. 소승이 극동에 있을 때 사형들로부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소. 이렇게 작은 게 보고 들은 것을 영상으로 영원히 남길 수 있다니.

사가

소승이 주지 스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염국을 돌아다닐 때, 어느 선생의 두루마리 속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진기한 경치와 물건을 수도 없이 봤지만, 다시 볼 수 없어 아쉬움만 남았었소.

사가

그때 만약 이런 기계가 있었다면 소승은 다시 볼 수 없는 물건이나 만나기 힘든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오.

사가

소승이 이 카메라를 잠깐 봐도 되겠소?

거친 아이

봐, 어차피 망가졌으니까.

사가

이렇게 작은 화면을 한 바퀴 빙 돌릴 수 있다니, 얼마나 정교한 제작인가……

사가

오…… 뒷면에 있는 뚜껑은 열 수 있는 것 같군.

사가

……

사가

앗, 화면이 밝아졌군……

거친 아이

켜졌어? 어떻게 한 거야……

조급한 아이

뭐가 나와?!


당신은 여기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해 본 적도 없으면서, 대체 무슨 근거로 거들먹거리며 우리 삶을 평가한다는 거예요? 대체 무슨 근거로 '변화' 같은 소리를 하냐고요?

말끝마다 '관심'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그건 우월감에 찌든 동정에 불과하잖아요.

더 이상 따라오지 말아요!


화면에 비친 사람이 갑자기 눈을 깜빡이자, 그제야 사가는 그게 본인 얼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영상은 이미 끝났고, 다시 빛을 반사하는 화면이 되었다.

조급한 아이

이게 다야?

거친 아이

네가 억지로 켜서 고장 난 게 아니고?

사가

음……


방돌쇠

이거 놔…… 놓으라고!

초조한 촌민

쉿, 조용히 있어, 이놈아!

방돌쇠

크앙……

긴장한 촌민

으억……

긴장한 촌민

물지 말라고……

방돌쇠

나를 산으로 데려온 목적이 뭐야?

긴장한 촌민

창고에 종일 갇혀 있었으니 네가 답답할 것 같아서 그랬다. 산에서 바람이나 좀 쐬라고……

방돌쇠

누가 세 살짜리 어린애인 줄 아나……

방돌쇠

역시 관청에서 사람이 온 거지?

초조한 촌민

……

긴장한 촌민

……

방돌쇠

내 말이 맞았구나.

방돌쇠

나 내려갈래.

방돌쇠

너희들이 무슨 추악한 짓을 했는지 관청 사람에게 알릴 거야.

긴장한 촌민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뭔데? 꼭 모두의 살길을 끊어야 만족하겠어?

방돌쇠

양심도 없는 인간들이, 감히 나를 꾸짖어?

긴장한 촌민

양심이 없다고? 다들 너를 잘 돌봐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양심이 없는 거야? 만약 이 주육이라는 이름으로 돈과 식량을 바꿀 수 있다면……

초조한 촌민

야야,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할 필요 없어.

초조한 촌민

이미 이틀 동안 실컷 도리를 설명했잖아. 좋은 말 나쁜 말 다 했지만, 지금 저 녀석 귀에는 하나도 안 들어간다고.

초조한 촌민

방돌쇠, 아무튼 지금 넌 반드시 산으로 가야 한다. 아무 데도 못 가.

방돌쇠

……

초조한 촌민

야, 잡아, 잡으라고!

긴장한 촌민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딜 도망치려고?

긴장한 촌민

괜히 힘 빼지 마. 뒤에는 낭떠러지야. 멋대로 날뛰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방돌쇠

착한 척 그만 해!

긴장한 촌민

너……

초조한 촌민

방돌쇠, 우릴 자극하지 마.

긴장한 촌민

야, 주사, 너 설마……

긴장한 촌민

족장님이 우리한테 그렇게까지 하라고는……

초조한 촌민

그럼 어떡해? 저 녀석이 계속 소란 피우다가는 다들 몰려오게 생겼는데.

긴장한 촌민

아무리 그래도……

방돌쇠

오늘 반드시 산에서 내려가겠어.

방돌쇠

오늘 너희들이 내 입을 막고 그 돈을 받는다고 해도, 내가 언젠가는 너희들이 한 짓을 다 까발릴 거야.

방돌쇠

이 몸은 '죽어'도 다시 '부활'하니까! 자신 있으면 나를 밀어보든가!

초조한 촌민

이제야 확실히 알겠네. 방돌쇠, 넌 길들일 수 없는 야수 같은 녀석이란 걸.

초조한 촌민

3년 전에 이산묘를 폭파해서 마을의 기맥을 끊어놓은 것도 모자라, 3년이 흐른 지금 또다시 마을 사람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지!

방돌쇠

뭐, 뭐 하는 거야……?

초조한 촌민

……

???

그만!

긴장한 촌민 & 초조한 촌민

으윽……

방돌쇠

협객 누나, 아직 안 간 거야?!


멀베리

사가 씨,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멀베리

족장님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대체 왜……

사가

소승이 방금,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소. 멀베리 시주, 들어보겠소?

멀베리

……네.

사가

예전에 한 포졸이 있었는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늘 성실하게 일했소. 가난하긴 했지만 평화로운 삶을 살았지.

사가

한번은 그 포졸이 명을 받고 산속에서 도적 무리를 체포했는데, 동굴에 가득 쌓인 보물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안 좋은 마음을 품게 됐소.

사가

그래서 포졸은 순금을, 그것도 딱 두 개만 몰래 빼내 자기 주머니에 넣었소.

사가

그런데 결국 동료에게 들켰고, 동료는 그걸 빌미로 협박하며 순금을 나누자고 했소.

사가

분한 마음이 든 포졸은 홧김에 동료를 죽여버렸고, 현장을 도적의 소행처럼 꾸며놓고는 홀로 돌아가 보고하려 했소.

멀베리

사,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사가

그렇지, 소승도 여기까지 듣고 멀베리 시주와 똑같은 반응이었소……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소.

사가

포졸이 막 산에서 내려왔을 때 마침 동료의 아내를 만나게 됐소. 왜 하필 지금 이곳에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포졸은 당황스럽고 수상한 느낌이 들었지.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라며 동료의 아내마저 죽여버렸소.

사가

그리고 피 묻은 칼을 본 포졸은 두려우면서도 막막한 나머지 황급히 집으로 도망쳤소.

사가

하지만 살인 사건은 금세 세상에 알려졌고,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고 생각한 포졸은 가족을 데리고 도적 무리에 가세하게 됐소.

사가

그 뒤로 포졸이 어떻게 대도가 되어 곳곳에 화를 입혔고, 또 어쩌다 시체마저 찾을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자세히 얘기하지 않겠소.

멀베리

겨우 순금 두 개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사가

그러니까 말이오.

사가

주지 스님께서 이르시길, '악념'은 마치 사람 마음속에 갇힌 맹수와도 같아서,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늘 다스려야 한다고 했소. 그러니까 소승의 임무는 절에 종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오.

사가

탈출한 맹수를 다시 우리에 가두는 건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니.

객승은 허리를 숙여 화약 재가 묻은 진흙을 한 줌 움켜쥐었다.

사가

이런 말이 있잖소. 날씨의 변덕스러움은 마치 사람의 마음처럼 종잡을 수 없다고.

사가

비바람은 언제나 규칙이 없고,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피해를 보지 않을지는 멀베리 시주와 같은 전문가에게 달렸소. 소승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요.

사가

이제 슬슬 하산해야겠소.


방돌쇠

……

치우바이

네 목숨을 구한 건 이번이 두 번째야.

치우바이

세 번째는 없길 바랄게.

???

후우……

???

하아, 하아, 아가씨 잠시만, 기다리게……

사냥꾼

도, 돌쇠는……

방돌쇠

……

겨우 숨을 가다듬은 사냥꾼은 조금 큰 바위를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사냥꾼

하아, 산길을 조금 걸었다고 체력이 이렇게 달릴 줄이야.

사냥꾼

젊었을 때, 탈피비스트를 만난 적이 있었네. 화살을 잘못 쏴서 엉덩이에 꽂혔지. 자극받은 녀석은 화살이 꽂힌 채로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사냥꾼

그렇게 토실토실한 탈피비스트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워서 숨도 안 쉬고 바로 쫓아갔었네. 결국 풀숲에 있던 둥지에서 녀석을 잡아 저녁에 아주 배불리 먹었지.

하지만 지금은 병이 들어 활도 못 당기고 괭이도 못 휘두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식마저도 못 구할 뻔했어.

방돌쇠

아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사냥꾼

……무사하면 됐다, 그거면 됐어.

사냥꾼

치우바이 아가씨, 이 사람들은……

치우바이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기절한 거예요.

치우바이

깨어나서 열흘이나 보름 정도 머리가 아플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요.

사냥꾼

……

치우바이

그래도 벌인 짓이 있는데, 어느 정도 벌은 받아야겠죠.

사냥꾼

그럼, 그럼……

방돌쇠

아빠, 사람들이 아빠한테도 무슨 짓 했어?

사냥꾼

아, 아니다……

방돌쇠

그럼 다행이네.

방돌쇠

그 망할 놈들이 지금 마을에서 뭐 하고 있을까? 관청 사람을 무덤 앞에 데려가서 눈물을 질질 짜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방돌쇠

……이 몸도 이제 자유를 얻었으니, 놈들이 멋대로 하게 두진 않아!

소년은 씩씩거리며 산에서 내려갔다. 가는 길에 기절한 사람을 걷어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소년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버렸다.

한 손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고, 옷 너머로 스친 손바닥의 굳은살 때문에 소년은 통증을 느꼈다.

소년이 고개를 숙이자 노인은 더 힘을 줬지만, 소년의 눈길은 피하고 있었다.

방돌쇠

……

사냥꾼

돌쇠야, 잠시만……

방돌쇠

아빠는 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 나를 막으러 왔구나.


제사상 앞에 청석 타일 두 개가 깨져 있었다. 전에 왔을 때 노인은 깨진 조각을 치웠지만, 미처 새로 갈아 넣지는 못했다.

바닥 밑의 흙은 축축해서 청석 타일보다 더 차가웠다. 노인은 이마로 그 냉기를 느끼고 있었다.

조상의 상은 입을 열 수 없으니 노인이 먼저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까?

조상님, 다 제 잘못입니다.

노족장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노족장

저는 조사원이 마을에 올 줄을 정말 몰랐습니다……

노족장

제가 방돌쇠 그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 줄을 정말 몰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켜봐 온 아이인데……

노족장

그리고 3년 전에 마을을 떠나 생사도 불분명했던 아이가 하필이면 이때 돌아올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노족장

제가 뭐에 홀렸는지, 어쩌자고 아이의 이름을 이용해 보상금을 받아내자는 그 말에 동의했을까요……

노족장

폭우가 내리던 한밤중에 하필이면 치도 주변을 지나가는 소년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노족장

전 그저…… 치도가 무너지면 보수 공사가 일 년이나 반년쯤은 더 지연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두세 달만이라도 좋으니……

노족장

그렇게 공사가 지연되면 다들 임금을 더 받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 수확도 안 좋은데 하늘이 도와줄 때까지 기다릴 순 없잖습니까.

노족장

예전에는 이산묘가 마을 중앙에 있었지만, 지금은 마을 입구로 옮겨졌습니다. 조상님께서 후손을 위해 산을 파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셨으나, 최근 몇십 년은 그 산이 다시 우리의 보금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노족장

이 산과 이 땅에 의지해서는 더 이상 이산묘조차 지키지 못할 지경이란 말입니다.

노족장

그래서 제가……

노족장

그래서 제가 몰래 폭약을 심었습니다. 초봄에 폭우를 핑계 삼아 사고로 위장하려고……

노족장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저도 이런 떳떳하지 못한 방법은 안 썼을 겁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하늘은 도대체 왜 이렇게 무심할까?

???

족장 시주, 그 말은 눈앞에 있는 조상에게 하는 변명이오? 아니면 자신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말이오?

노족장

……


사냥꾼

아들아, 조금만 더 기다리자……

방돌쇠

아빠, 저놈들이 아까 나를 벼랑에서 떨어뜨릴 뻔했다니까!

방돌쇠

놈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못 하는 짓이 없다고!

사냥꾼

……관청의 조사원이 하루 일찍 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사냥꾼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다들 당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방돌쇠

……

사냥꾼

이 아비도 안다. 아까는 마을 사람들이 너무 심했어. 며칠 후 족장님께 꼭 해명해 달라고 하마.

사냥꾼

하지만 지금 하산하면 안 된다……

방돌쇠

아빠, 이렇게 된 마당에 아직도 그놈들 편을 들고 있는 거야?!

사냥꾼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치우바이

전에 제가 물었었죠.


치우바이

하지만 마을에 남는다고 무조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사냥꾼

사람들이 돌쇠를 어떻게 하진 않을 것이네……

사냥꾼

어제, 이산묘에서 족장님과 온 마을 사람들이 조상의 상 앞에서 내게 약속했지……

치우바이

그저 말뿐인 약속이지 않나요?

사냥꾼

……

치우바이

잘 아시겠지만 방돌쇠 성격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 예전에 두 사람의 땅을 지켰던 것처럼 본인 이름도 지키겠죠.

치우바이

아니면 계속 아이를 가둬둘 건가요?

치우바이

만에 하나, 걔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난동을 부려서 계획 자체가 틀어질 위기에 처하면, 마을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요?

사냥꾼

……

치우바이

악행은 일단 한번 고개를 들면, 쉽게 멈출 수 없습니다.


치우바이

그때 제가 그랬죠. 모선 마을의 이 일은 제가 예전에 겪었던 일 못지않게 황당하다고요. 그래서 간섭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처지도 아니라고요.

치우바이

하지만 전 당신들을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사냥꾼

치우바이 아가씨, 설마……

사냥꾼

아가씨가 단번에 주사와 주육을 기절시키는 걸 나도 봤네.

사냥꾼

자네가 정말 이번 일에 나설 생각이라면, 마을 사람을 모두 제압해서 관청에 넘길 생각이라면, 우리도 저항할 수 없겠지.

치우바이

……그런 방법까지 쓸 생각은 없습니다.

사냥꾼

아가씨 말에도 일리가 있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고, 달리 방법이 없다고 해도 그걸 핑계로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되지.

사냥꾼

하지만 아가씨는 손에 검이 있고 무공도 강하니까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고, 아가씨가 원하는 걸 지킬 수도 있지 않나……

사냥꾼

아가씨는 진정으로 속수무책인 궁지에 빠질 일이 없을 걸세. 결국 아가씨는 우리와 다르니까……

사냥꾼

하지만 이 두메산골에서 검은 아무런 소용이 없지. 농작물이 안 자라는 땅을 구할 수 없고, 날씨가 변덕스러운 하늘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며, 백여 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을 도울 수도 없네…… 그리고 우리 부자도 말이야.

사냥꾼

우리는 그냥 비 오는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다시 조상님 같은 유능한 사람이 나타나 살길을 찾아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고.

사냥꾼

치도가 더 많이 생기고, 이동도시가 더 많이 생겨 다들 그곳으로 옮겨 평화롭게 살게 될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단 말이네.

사냥꾼

그런데 이 끝도 없이 드넓은 땅에 우리 같은 두메산골이 또 얼마나 많겠나……

사냥꾼

치우바이 아가씨, 내가 두서없이 말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하네.

치우바이

이해하기 때문에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겁니다.

사냥꾼

하아……

사냥꾼

부디, 부디 우리를 좀 내버려 두지 않겠나.

방돌쇠

누나, 그쯤 해둬.

방돌쇠

이건 우리 부자의 일이니까 내가 직접 말할게.


노족장

자네는 조사원 아가씨와 함께 산에 올라간 거 아닌가? 어째서 여기……

사가

후우…… 족장 시주, 탁자 위에 있는 과일을 소승이 먹어도 되겠소?

사가

오늘 아무것도 못 먹은 데다 아까 산에까지 다녀온 바람에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러오……

노족장

……

사가

이 조상도 분명 자비로운 분일 테니, 과일 하나쯤은 신경 쓰지 않으실 거요.

노족장

자네, 설마 내가 한 말을 다 들은 건가?

사가

으음~ 과일이 부드럽고 새콤달콤한 게 정말 맛이 있구려.

사가

그리고, 아까 한 말 말고도 며칠 전에 이곳에서 시주께서 한 말도 다 들었소.

노족장

……

사가

정말 아무도 모르길 바랐다면 말린 과일을 지하실에 보관하면 되듯이, 시주도 굳이 이 절을 찾아올 필요는 없잖소.

사가

다만, 종잇장으로는 영원히 불을 감쌀 수 없소이다.

사가

그러니 소승이 들었건 말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오.

노족장

……

노족장

그럼, 그 조사원 아가씨도 알고 있다는 건가……?

노족장

자네가 여기 있다는 건……

사가

으음~

노족장

생각해 보니 소평과 소안에게 카메라를 켜 준 것도 자네겠군. 내가 이산묘에 두 번 찾아온 것도 모두 봤을 테고……

노족장

설마 조상님께서 내게 경고하려고 자네를 모선 마을로 보내신 건가……

노족장

사람도 늙고 이제 노망까지 나서 너무 늦게 깨달았구나……

사가

족장 시주, 소승은 염국 경내를 떠돌다가 마침 이곳까지 발길이 닿아 며칠 머물게 된 것이오.

사가

소승이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나타났을 거고, 다른 일도 발생했을 것이오.

노족장

지난 몇십 년 동안, 나는 모선 마을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다들 친절하게 나를 '족장'이라고 불러줘서……

노족장

그냥 모두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일세.

노족장

하지만 하늘의 뜻을 사람이 예측할 수는 없다더니, 결국 자신이 망가지고 남을 해치는 꼴이 되고 말았네.

노족장

두 사람의 목숨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사가

시주의 계획은 애초에 주도면밀하지 못했소. 심지어 허술할 정도였지.

사가

그런데 지금 시주께서 후회하는 걸 보면 어째 '더 꼼꼼하게 계획'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 같소?

노족장

……

노족장

내 말은 자네가 조금 더 일찍 모선 마을에 왔더라면 좋았다는 뜻이네.

노족장

조금 더 일찍 자네를 만났더라면 나도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안 했을 거고, 이런 짓을 저지르지도……

사가

하아, 족장 시주, 아까도 말했다시피 소승은 그저 방랑하다 여기까지 온 것이오.

사가

게다가, 마음속에 악념을 품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소?

노족장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권선징악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자네 같은 승려의 마음속에 만약 악념이 있다면, 그건 수행을 망치는 거잖나?

사가

시주께서는 어째서 악념을 품으면 수행을 망친다고 생각하시오?

시의 두루마리에서 떠나기 전 소승은 어쩌다 노름꾼으로 변한 자신을 볼 수 있었소.

그 소승은 주사위의 유혹에서 차마 벗어날 수 없어, 목어를 전당포에 팔고 전 재산을 털어 노름했으며, 제멋대로 행동하고 악한 자와 결탁하며 도리에 어긋나는 수많은 만행 저질렀소.

또한, 예전에 절을 떠나기 전 주지 스님은 소승을 불러 각자 곤봉을 잡고 제대로 한 판 싸워보자고 한 적도 있소.

기운 달이 떠올랐을 때부터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까지, 소승은 주지 스님이 왜 나를 몰아붙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이게 대련보다는 목숨을 건 결투 같다는 느낌이 들었소.

그 싸움의 결과는 이미 잊어버렸지만……

그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소. 마지막에 소승의 곤봉이 주지 스님 머리 위에서 멈췄을 때, 그 순간 소승의 머릿속에 그대로 내려치려는 생각이 번뜩이지 않았는지.

사가

수많은 악념은 대부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싹이 트며, 그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오.

노족장

자네……

사가

비단 두루마리나 꿈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오.

사가

전에 소승이 몹시 굶주렸을 때, 새끼를 밴 암컷 짐승을 만난 적이 있었소. 그때 딱 든 생각이 '수컷보다 더 토실토실하겠구나'였소.

사가

소승도 뜻하지 않게 포로 신세가 될 뻔했을 때, 하마터면 등 뒤에 있는 나기나타를 쓸 뻔했소.

사가

하지만 지금의 소승은 여전히 시주 눈에 비친 그 소승 그대로임에는 변함이 없소.

노족장

……

사가

주지 스님께서 이런 경문을 자주 외우셨소. “굶주림과 갈증은 악을 낳는다.” 피할 수 없지만, 그걸 마음에 둔들 무슨 방해가 된단 말이오!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는 거잖소.

노족장

그냥 속으로 생각…… 하는 것인가?

사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소승이 전에 한 검객을 알게 됐소.

사가

그 검객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었소. 세상에서 가장 좋고 날카로운 검을 바라면서 마음이 착해서 더는 살생을 저지르고 싶지 않아 했지.

사가

그 검객이 산중에 오두막을 지었는데 소승이 거기서 꼬박 석 달을 함께 지냈소. 화롯불을 지폈다가 끄고 또다시 지피고, 검을 단조하다 녹이고 또다시 단조하기를 반복하는 나날들이었소.

사가

그러다 검객은 마침내 원하는 검을 만들어 냈소. 그 모양은 마치 흐르는 구름 같았고 눈이 부시게 빛났지만, 정작 날은 세우지 않았소.

노족장

날을 세우지 않았다고?

사가

날을 세우지 않으면 사람에게 상처를 줄 염려도 없으니까.

노족장

……

사가

그러나 상처를 주는 건 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잖소.

노족장

자네는…… 뭔가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 같군.

노족장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네처럼 달관하거나, 생각이 행동으로 변하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잖나.

사가

소승은 오히려 그걸 다스리는 게 쉽지 않기에, 그걸 풀어버리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사가

오랜 세월 매일 같이 제시간에 종을 치고 경서를 읽다 보면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가 분명 있을 것이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멈추거나 종을 치지 않으면, 그전까지의 수행은 모두 의미를 잃게 되잖소.

노족장

……

사가

하늘에 단 한 방울의 비만을 바랐지만, 결국 산사태를 불러일으키고 말지. 세상에 그런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사가

악념과 악행은 단 한 글자 차이지만, 그 결과는 천지 차이요. 시주로 인해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결국 어떻게 마무리될지, 생각이 현실이 되는 순간 더는 시주가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이오.

사가

그러니,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찌 '정말 몰랐다'는 그 한마디 말로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이오?


사냥꾼

돌쇠야, 이 아비는 마을 사람을 돕는 거지만, 동시에 우리를 돕는 거기도 하단다……

사냥꾼

우리는 오랫동안 모선 마을에 살았고 이젠 이곳의 주민이야……

방돌쇠

……

방돌쇠

아빠, 아빠는 예전에 황야를 떠돌아다니며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고생을 많이 해서, 지금은 비바람을 피할 곳을 바란다는 거 나도 알아.

방돌쇠

그리고 간신히 찾은 이 모선 마을에서, 몇 년 동안 모은 전 재산을 털어 '삼무삼'을 사서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아.

방돌쇠

아빠는 이곳에, 이 집에 미련이 많이 남았을 거야. 남에게 기대 살다 보니 무슨 일이 생기면 최대한 양보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고.

방돌쇠

엄마가 도망가면서 사람들이 우리만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망할 절간을 '삼무삼'으로 옮기겠다고 억지 부릴 때, 아빠는 허락했어.

방돌쇠

지금은 내 이름을 빼앗아서 죽은 사람으로 바꾸려고 해. 아빠는 그것도 허락했지.

방돌쇠

그런데 나중에 또 무슨 재난이 닥치거나, 우리의 밭, 우리의 집, 심지어 우리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해도 아빠는 허락할 거야?

방돌쇠

살길은 스스로 만드는 거지 남이 주는 게 아니잖아.

사냥꾼

나도 안다……

사냥꾼

하지만 지금 네가 내려가서 조사원에게 마을 사람이 한 짓을 밝히면, 그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사냥꾼

나는 앞으로 몇 년 밖에 살 수 없으니 상관없지만, 넌 이제 겨우 15살이다. 이 마을에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방돌쇠

꼭 이 마을에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사냥꾼

……

방돌쇠

이 마을을, 이 산을 떠나 이동도시에 정착하면 되잖아.

방돌쇠

농사를 못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동도시에는 일자리가 많으니까. 내가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고, 무공도 배울 거야. 나중에 치우바이 누나처럼 강해지면 더 많은 돈을 벌어 아빠도 치료할 수 있어.

방돌쇠

제발 나를 믿어줘…… 지난 3년 동안 나는 각지를 떠돌며 온갖 일을 다 해 봐서 잘 알아.

사냥꾼

너는 꼭 네 엄마를 닮았구나.

방돌쇠

……

사냥꾼

그때, 마을 사람들이 조상님이 개척한 이 땅을 지키며 하늘에 의지해 살아가려고 할 때……

사냥꾼

유독 네 엄마만 이 산을 떠나 옥문에, 상촉에, 용문에 가려고 했다…… 심지어 듣도 보도 못한 이동도시에 가서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서.

사냥꾼

네 엄마가 나랑 결혼한 것도 내가 여러 곳을 다녀본 사냥꾼이었기 때문이긴 했다만……

사냥꾼

내가 전 재산을 털어 '삼무삼'을 사고 널 낳은 뒤 늙어버린 버든비스트처럼 거처를 옮길 생각이 없어 보이자…… 네 엄마는 그제야 내가 이 마을에 잠깐 쉬려고 온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단다.

사냥꾼

그 행상인이 네 엄마를 구슬려 마을을 떠나던 날, 난 황야까지 쫓아가서 겨우 너만 데려올 수 있었다.

방돌쇠

……

그 여자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보낸 한 통의 편지는 몇 달이 지나서야 내 손에 도착했다.

편지 봉투에는 돈만 들어 있었고, 그 돈은 그녀가 돌쇠에게 남겨주는 사망 보상금이라고 했다.

행상인을 따라 이동도시에 가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반년 후 다시 황야에 돌아갔다고 한다.

소식은 전달자 대여섯 명을 거쳐 전해 들은 거라, 정확히 어떤 사정이었는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가여우리만큼 얇은 봉투를 만지면서 나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돈은 마을에 기부해 돌쇠가 폭파한 이산묘를 수리하는 데 썼다.

사냥꾼

돌쇠야, 이동도시에서 사는 게 정말 이 모선 마을에서 사는 것보다 좋다면, 너는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았겠지.

사냥꾼

3년 동안 큰일은 고사하고, 네가 정말 재주를 배워서 정정당당하게 살았다면…… 왜 치우바이 아가씨한테 잡혀서 여기까지 끌려온 것이냐?

방돌쇠

그건……

사냥꾼

난 이곳이나 이 집에 미련이 있는 게 아니다.

사냥꾼

아빠는 이미 다 준비했어. 보상금만 받으면 너를 찾아가려고 했다. 모선 마을의 집은 이제 없는 셈 치고 말이다.

사냥꾼

그런데 하필 네가 돌아왔다! 그것도 치우바이 아가씨한테 붙잡혀서!

네가 돌아왔으니 나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너를 다시 보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마을 태생이 아니다. 나도 바깥세상에서 살아봐서 알지만…… 과연 그러한 삶이 정말 이 마을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삶의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난 그저 네가 남은 생을 평온하게 보내길 바랄 뿐이다.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니까.

방돌쇠

아빠가 말하는 평온한 삶이라는 게 내 이름마저 빼앗겨야 하는 삶이라면, 나는 싫어!

사냥꾼

이름으로 식량과 돈을 바꿀 수 있고, 평온한 여생을 바꿀 수 있는데……

방돌쇠

아빠, 나는 싫어……

방돌쇠

나 방돌쇠는 산에서 자란 잡초도, 황야에서 태어난 짐승도 아니야.

방돌쇠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소년은 목이 터지라 소리쳤다. 흥분한 나머지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뒷걸음질 치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앳되고 쉰 목소리는 산꼭대기에 부는 강풍에 가로막혀 일그러졌지만 또렷하게 전해졌다.

사냥꾼

정말 고집불통이구나. 어차피 내가 널 설득할 수도 없고, 나를 용서하길 바라지도 않아……

사냥꾼

하지만 나는 널 여기서 보낼 순 없다. 네가 내려가면 난 낭떠러지로 뛰어내릴 테니까.

사냥꾼

……

방돌쇠

……

사냥꾼은 고개를 숙였다. 진정된 듯 보이는 소년은 뭔가 말하려다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고운 모래가 얼굴에 부딪혀 온다. 이 산의 봄바람은 여전히 메말랐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검객은 조용히 낭떠러지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방돌쇠

아빠, 고개 들어.

사냥꾼

(고개를 젓는다)

방돌쇠

아빠, 방돌쇠가 죽어야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거지?

사냥꾼

그래……

사냥꾼

'방돌쇠'는 살아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어렸을 때 소년은 낭떠러지에서 돌멩이를 걷어차며 돌이 굴러떨어지는 소리를 조용히 듣는 걸 좋아했다.

그와 그의 이름은 꼭 그 돌멩이들 같았다.

그는 지금 진정한 의미의 돌멩이가 되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은 것 같았다. 소년은 심지어 치우바이와 숲속에서 만난 그 짐승과 그 짐승의 죽기 전의 눈빛이 떠올랐다.

얼마나 분하고 얼마나 두려우며, 또 얼마나…… 해방된 기분이었을까?

바람인가?

바람이 소년의 등을 떠받쳤다.


봄바람이 불어오며 먼지가 흩날렸다. 해도 높고 마침 따뜻한 시간이었지만, 낡은 절은 오히려 한기가 감돌았다.

노인의 구부정한 등은 푸르르 떨렸지만, 그는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객승은 노인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노족장

지금 돌이켜보면 지난 며칠 동안 일어난 모든 것들이 어른어른한 게, 마치 꿈을 꾼 것 같네……

노족장

산에 폭약을 묻은 사람, 관청에 손수 신청서를 쓴 사람, 그리고 아까 조사원에게 거짓말을 한 사람…… 이 모든 사람이 정말 나란 말인가?

노족장

이 모든 게 정말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가

“어리석은 자 앞에서는 꿈을 논하지 말라.”고 하던데, 지금 족장 시주가 반성하고 있다는 건, 스스로 어리석은 자라고 여기는 것이오?

노족장

말하자니 웃음만 나오는구먼……

노족장

3년 전, 방돌쇠는 이산묘를 폭파하고 마을을 떠났지. 그런데 그날 밤 내가 썼던 게 바로 그 아이가 만든 폭약이라니.

사가

음……

노족장

그때 사냥꾼의 집으로 달려가 방돌쇠의 방에서 남은 폭약을 찾아냈어. 원래는 다른 사람이 또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그저 압수하려고 했는데……

노족장

그걸 내가 쓰게 될 줄이야.

사가

훗, 그런 과거가 있었군.

사가

족장 시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시주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노족장

하아……

노족장

난 죽어도 마땅하네. 다만, 모두에게 미안할 뿐이지.

노족장

방돌쇠는 고집이 세고 좀 무모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쁜 아이는 아닐세. 전에 이 절을 폭파한 것도 다 자기 아비를 위한 것이었으니.

노족장

게, 게다가 이번 일은 원래 방돌쇠와 아무 상관이 없잖나. 겨우 15살밖에 안 되는 어린애를…… 죽음으로 몰아가다니……

노족장

그 소년은 어디에서 왔고 산에는 뭐 하러 왔는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집에 돌아가지 못했으니, 가족은 가슴이 찢어질 듯 눈물을 흘려도 소식을 듣지 못하겠지……

노족장

내가 아무리 조상님 앞에서 소년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해도, 그 소년을 '방돌쇠'라고 부를 수밖에 없어……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이런 영혼은 영원히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이 모선 마을을 떠도는 건 아닌지……

노족장

더 이상 다가오지 말게.

사가

그날 우연히 이곳에서 시주의 기도를 들은 뒤로, 요 며칠간 소승은 시간 날 때마다 그 소년의 영혼을 위해 경을 외웠소.

사가

주지 스님께 정식으로 경문을 배운 적은 없지만…… 마음을 다했으니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오.

노족장

……

노족장

이미 일이 드러난 이상, 관청에서 두 사람의 목숨에 대해 추궁하면 나 때문에 마을 사람 백여 명이 휘말려 버리겠지……

노족장

조상님, 제가 큰 죄를 지었으니 용서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만……

사가

하앗……

사가

그릇된 생각을 베어버리겠다!

노족장

……

사가

후우……

사가

그게 마지막 폭약이오?

노족장

계속 품에 품고 있어서 들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노족장

자네가 오기 전에 이미 자결했어야 했네. 그런데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도저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노족장

3년 전, 그 어린 방돌쇠가 여기서 도화선을 당겼는데, 이 늙은이의 배짱이 아이만도 못하다니……

사가

설마 시주는 자결하면 발생한 일이 전부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 것이오?

사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오!

노족장

……

사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시주는 죽음으로 모든 걸 정리하고 싶겠지만……

사가

그날 소승의 존재를 모르고 조상님께 자초지종을 털어놓을 때, 시주는 그저 모든 것이 마을을 위한 일이라고만 했지, 폭약과 그 소년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밝히지 않았소!

노족장

……

노족장

내가……

사가

그날 밤, 만약 그 이름 모를 소년이 산기슭을 지나치지 않았고, 폭약이 그저 토석류를 일으켜 치도만 파괴했다면, 시주는 지금처럼 자결을 시도하려 했을 것이오?

사가

그 소년이 아니라 우연히 날아가던 파울비스트가 마침 착지해 깃털을 정리하다가 토석류에 깔려 죽었다면, 시주는 그 사실을 알 수나 있었겠소?

노족장

……

사가

이렇게 된 이상, 치도는 어떻게 되고, 이 절은 어떻게 되고, 또 이 마을은 어떻게 되겠소?

사가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시주는 내리지 말았어야 할 비를 위해 잘못을 뉘우쳐야 하오.

노족장

……

노족장

내, 내가 관청에 모든 일을 자백하겠네……

사가

하아……

노인은 뜯긴 도화선과 두 동강이 난 폭약을 앞에 놓았다.

너무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던 탓에 두 다리는 감각이 없었고, 노인은 다시 이마를 땅바닥에 댔다. 차가운 기운이 순식간에 이마에 닿았고, 더는 일어날 수 없었던 노인은 더 바짝 엎드렸다.

......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도 조상님의 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진흙으로 빚어진 조각상의 눈에 흙이 몇 조각 떨어져, 조각상이 대들보를 바라보는지, 절 밖의 공터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구름이 맑고 바람이 따스하다. 그야말로 봄이다.


???

정신이 들었어?

치우바이

눈빛이 좀 멍하긴 해도 의식이 있는 걸 보니…… 머리는 안 다쳤나 보네.

치우바이

전에는 네가 죽는 건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목숨까지도 막 내던지는구나.

......

치우바이

이걸로 널 구한 게 세 번째야.

치우바이

저렇게 높은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릴 줄이야. 내가 무슨 파울비스트도 아니고, 하마터면 내 목숨마저 위험할 뻔했어……

고마…… 워……

치우바이

고마울 거 없어. 너를 데려온 이상 너를 지키는 것도 당연하니까. 다만 네가 진심으로 뛰어내릴 줄 몰라서, 반응이 좀 늦었어.

......

치우바이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치우바이

걸을 순 있지? 난 마을에 돌아갈 생각 없어.

치우바이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일단 나랑 같이 가자.

……응.

[CG: 35_mini03]
치우바이

전에 내 사연을 물어봤지? 지금이라면 얘기해 줄 수 있을 것 같네.

치우바이

그 해, 관군이 강제 수채를 공격했을 때, 아빠와 다른 수적들이 전부 죽임을 당했지만 난 도망쳤어. 이 나라에서는 나도 이름이 없는 사람이야.

치우바이

이 땅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아주 많아. 나나 너처럼, 그리고 하마터면 '방돌쇠'가 될 뻔했던 그 소년도.

치우바이

물론 한 사람에게 이름은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본인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달렸어.

치우바이

세상에 나가 자립하면서 불공평이나 불의에 대항하는 게 과연 네 신분과 상관있을까? 이름이 없으면 오히려 더 큰 목소리를 내고,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어.

치우바이

무의미한 집념을 내려놓아야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지.

치우바이

지금 네가 내 말을 이해할 거라고 생각 안 해.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계속 너를 곁에 둘 수도 없고. 하지만 네가 정말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당분간 가르쳐줄 수는 있어.

치우바이

네게 자립할 능력이 생기거나, 생각이 정리되어 이 세상에 나갈 수 있다면 언제든지 떠나도 좋아.

치우바이

하지만 나락으로 떨어졌거나, 힘을 좀 얻었다고 악의 길로 빠지는 사람도 많아. 네가 그렇게 된다면 내가 직접 너를 죽일 거야.

......

치우바이

강호 사람들이 자주 하는 다른 말을 알려줄게. '강호에서 다시 만나세.'랑 비슷한 말이야.

......

치우바이

전도가 유망하구나.

이해했어?

……응.

그럼 서둘러.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