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숙명

출입이 평안하길

미니 스토리브릿지2023-08-22

모두가 일이 계획대로 진행될 거라고 생각하던 때, 멀베리와 전달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며 이성마저 잃어버렸고, 치우바이가 그들 앞에 나선다.

등장 오퍼레이터: 멀베리, 사가, 치우바이, 윈드차임스


고즈넉한 마을에 파울비스트 울음소리만 울려 퍼지며 오늘도 해가 산 위로 고개를 드러냈다.

해는 날마다 안색이 변했다. 어제는 반짝반짝 빛나더니 오늘은 힘없이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두툼한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져 내린 빛이 마을의 공터를 회백색으로 물들였다.

휠체어에 앉은 한 노인이 눈앞의 창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거나 사람이 뛰쳐나오면 크게 소리치라고 누군가 당부했다.

그는 이미 늙은 데다 걷는 것도 부축받아야 해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노인은 조만간 마을에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 일만 이루어지면 다들 편하게 살 수 있다고.

그걸 성사하기 위해서는 절대 창고 안에 있는 사람이 나오면 안 된다고 했다.

이미 늙었지만,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마을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아침 바람이 불쑥 몰아치자 노인이 어깨에 덮었던 담요가 바닥에 떨어졌다.

도와달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부탁받은 일도 아닌데 겨우 이런 일로 모두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때, 누군가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집어 들고는 먼지를 털어 노인의 어깨에 덮어줬다.

나이 지긋한 노인

고맙네……

나이 지긋한 노인

뉘 집 자식인가?

???

신경 쓰지 마세요.

나이 지긋한 노인

관청에서 왔나? 저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 데려가는가? 그 '일'은 성사됐나?

???

안에 갇혀있는 게 누군지 모르세요? 다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시나요?

나이 지긋한 노인

뭐라고? 난 귀가 안 좋아서 크게 말해야 해!

???

......

나이 지긋한 노인

그래, 알겠네. 난 꼼짝하지 않고 여기서 지키고 있겠네.

나이 지긋한 노인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게. 젊은이는 바쁠 텐데 어서 가서 할 일을 하게나……

나이 지긋한 노인

안심하게. 내가 지켜보고 있잖나. 안에 있는 사람은 도망 못 가.

나이 지긋한 노인

난 평생 힘들게 살았지만, 젊은이들도 그렇게 살게 둘 수는 없네. 내가 맡은 일은 제대로 해내야지.

검객이 휠체어를 몇 걸음 앞의 양지바른 곳까지 밀고는 조용히 떠났다.


멀베리

이쪽이 서쪽 맞을 텐데, 틀리진 않았겠지……

멀베리

저 커브 길을 지나서 계속 앞으로 가다가 세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멀베리

그런데 대체 어디가 갈림길이라는 거야……

멀베리

앗, 다행이다. 드디어 사람을 만났네!

멀베리

저기, 안녕하세요…… 혹시 이 근처 마을에 사세요?

지나가던 촌민 A

그래, 그런데 당신은 누구지?

멀베리

저는 재난 구조대 대원이에요. 며칠 전에 여기서 산사태가 일어났다고 해서 피해 상황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제 지도가 뭔가 잘못된 것 같아서요……

멀베리

혹시 주변에 피해를 본 마을이 있다는 얘기 들으셨나요?

지나가던 촌민 A

여기 산길은 다들 알아서 기억하고 다녀. 지도를 본다는 얘긴 처음 들어 봐.

지나가던 촌민 A

너 혹시 모선 마을을 말하는 거 아니야? 내가 거기 살거든.

지나가던 촌민 A

이틀 전에 연달아 폭우가 쏟아진 바람에 치도 한 구간이 파괴됐어…… 마을에는 아무런 피해도 없지만.

멀베리

다행이다, 방향이 틀리진 않았네. 이 방향이 맞구나……

멀베리

저기 아저씨, 여기서 모선 마을까지 어떻게 가야 하나요?

지나가던 촌민 A

이 길을 따라 계속 앞으로 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북쪽으로 가. 아마 반나절쯤은 더 가야 할걸.

멀베리

감사합니다!

지나가던 촌민 B

족장님 말씀대로 근처에 함정을 다 설치했어…… 그래도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지나가던 촌민 B

그 여자도 평소에 늘 마을 일을 도와줬으니,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게 해야지. 마을에 접근하지 못하게만 하면 돼.

지나가던 촌민 A

어차피 난 힘쓰는 역할이니까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지나가던 촌민 B

하아,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나? 애초에 누구도 모르는 일인데, 하필이면 그 융통성 없는 전달자를 만나다니.

지나가던 촌민 B

참, 방금 얘기하던 아가씨는 누구야? 뭐 하러 왔대?

지나가던 촌민 A

아, 무슨 구조대에서 산사태를 조사하러 나왔나 봐.

지나가던 촌민 B

그런데 그냥 보내줬다고?!

지나가던 촌민 A

족장님은 전달자를 막으랬지, 구조대는 무슨 상관인데?

지나가던 촌민 B

이 바보야! 여기서 전달자를 막으라는 건 외부 사람이 우리 일을 망칠까 봐 그런 거잖아.

지나가던 촌민 B

구조대면 관청에서 보낸 게 아닌가?

지나가던 촌민 B

마을 쪽은 아직 준비가 안 끝났는데, 관청에서 미리 사람이 와서 일을 망치면 어떡할 건데?

지나가던 촌민 A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지…… 그럼 이제 어쩌지?

지나가던 촌민 B

뭘 어째? 얼른 지름길로 마을에 돌아가서 족장님께 알려야지!

지나가던 촌민 B

방돌쇠를 철저하게 숨기라고, 절대 들키면 안 되니까!

지나가던 촌민 A

그걸…… 내가 어떻게 말하지……

지나가던 촌민 B

됐다, 내가 보고하러 갈 테니까 넌 여기나 지켜!

지나가던 촌민 A

잠깐……

지나가던 촌민 A

뭘 저리도 급하게 가. 함정을 어떻게 쓰는지 설명은 해 주고 가야지.

지나가던 촌민 A

꽤 그럴듯하게 설치해 놨네. 얼핏 봐서는 어디가 함정인지도 모르겠……

전달자

무슨 일이지……?

전달자

저기…… 도움이 필요합니까?


촌민

족장님! 큰일입니다! 관청 사람이 벌써 왔어요!

노족장

어떻게 된 거야? 관청에서 일정을 앞당기기도 하나?

촌민

자세한 건 저도 모르죠.

촌민

마을 입구에서 전달자를 막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복 그 녀석이 관청 사람을 만나고도 어리숙하게 길을 알려줬지 뭐예요. 전 지름길로 돌아와서 알려드리는 거예요!

노족장

무슨 소리야, 왜 갈수록 일만 더 생기는지……

노족장

됐네, 어차피 올 사람이었으니 늦는 것보다야 낫지.

노족장

다들 당황하지 말고 할 일을 하게. 내가 준비하고 마을 입구에 나가서 기다리겠네.

촌민

족장님,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노족장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이미 다 생각해 뒀네.

노족장

방돌쇠가 소란 피우지 않도록 잘 감시하게. 이따 관청 사람이 사냥꾼네 집을 방문할지도 모르니.

촌민

네, 또 말썽을 피우려고 하면 일단 마을 밖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촌민

사냥꾼 쪽도 사람을 보내뒀어요.

촌민

그동안 계속 꾸물거렸는데 이제는 묘비를 세워야죠.

노족장

……

노족장

그래, 우선 그렇게 하지.

노족장

조상님, 부디 이번 일이 무사히 넘어가도록 지켜 주십시오……


멀베리

안녕하세요……

노족장

어서 오십시오. 모선 마을의 족장입니다.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노족장

나리께서도 바쁘실 텐데, 이 외지고 먼 곳까지 오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멀베리

나리……?

멀베리

족장님, 안녕하세요…… 며칠 전에 여기서 토석류가 발생했다고 해서 상황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노족장

물론입니다. 큰일이 일어났으니 자세히 알아보셔야겠죠…… 저희도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노족장

지금 바로 안내할까요?

멀베리

준비라면……

멀베리

음…… 일단 알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족장

(이상하군. 관청에서 왜 이렇게 젊은 아가씨를 보냈지?)

노족장

(메고 온 가방도…… 백만 원은 안 들어갈 것 같은데.)


기고만장한 촌민

방돌쇠, 가자.

방돌쇠

뭐야?!

기고만장한 촌민

됐으니까 얌전히 따라오기만 해.

방돌쇠

아하, 황급하게 찾아온 걸 보니 밖에서 누가 왔나 봐?

방돌쇠

잘됐네, 지금 당장 뛰쳐나가서 너희들이 벌인 나쁜 짓을 싹 다 까발려 줄까!

기고만장한 촌민

얌전히 있어! 소란 피우지 말고!

기고만장한 촌민

이게 사람을 들이받아?

기고만장한 촌민

다들, 와서 밧줄로 녀석을 묶어버려!


촌민

사냥꾼, 이제 시간이 다 됐어.

촌민

같이 가서 묘비를 세우면 이번 일도 다 끝나.

사냥꾼

왜 이렇게 서두르나? 관청에서는 내일 온다더니……

촌민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와 있어.

촌민

그래서 우리도 서둘러야 해.

사냥꾼

하지만 묘비에 아직 글자도 못 새겼는데.

사냥꾼

어찌 됐든 엄숙한 물건인데 너무 대충하면 안 되지……

촌민

시간이 없다고! 어차피 연극인데, 그딴 거 누가 신경 쓴다고?!

사냥꾼

알았네…… 알았다고……

사냥꾼

따라가면 되잖나.


노족장

며칠 전 밤에 토석류가 발생했을 때 그 아이는 마침 치도 공사 현장에 있었습니다.

노족장

방돌쇠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모두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왔죠. 어렸을 때부터 아주 착한 아이였는데.

노족장

산길을 수리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이 공사가 마을에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아이였습니다.

노족장

아마도 공사 자재를 지키려다가……

멀베리

이번 재난으로 사상자까지 나온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군요……

멀베리

재난은 인정사정없지만, 재난이 발생한 곳에는 언제나 도와주려는 사람이 있죠……

노족장

맞는 말씀입니다, 나리……

노족장

방돌쇠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는 없습니다. 마을을 위하려다 사고를 당했으니 우리가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노족장

일이 끝나면 여기 있는 절에 아이의 이름을 남길 생각입니다.

노족장

아이의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도 마을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도울 겁니다……

멀베리

족장님은 참 좋은 분이네요.

노족장

아닙니다…… 다들 저를 '족장'이라고 부르니 저도 최선을 다해 모두를 위해 뭐라도 해야죠.

노족장

나리…… 얘기가 길어진 것 같은데,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시는 게……

멀베리

그게 무슨……?

노족장

외람되지만 제가 먼저 여쭙겠습니다. 나리 쪽에서 확인이 끝나면 보상금은 언제쯤……

멀베리

보상금요?

노족장

나리, 농담도 참……

노족장

방돌쇠의 죽음은 공사 중에 발생한 사고라, 이치대로라면 보상금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노족장

제가 돈을 밝혀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중요한 돈이라서 그럽니다……

멀베리

족장님,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멀베리

공사 중 불의의 사고로 인한 보상금에 관해서 저는 잘 모릅니다. 그건 아마 관청에서 담당자를 보낼 거예요.

멀베리

저는 '춘건'이라는 재난 구조대 대원이에요. 그리고 이번 토석류가 발생한 원인을 조사하러 온 거고요.

멀베리

이미 일어난 비극은 저도 가슴 아프고 되돌릴 순 없겠지만, 앞으로 이런 재난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저희가 최선을 다해야 해요.

노족장

아니…… 그게……


허둥대는 촌민

(고통스러운 신음)

전달자

움직이지 마세요. 제가 한번 볼게요……

전달자

다행히 뼈는 안 다쳤네요.

전달자

어때요? 걸을 수 있겠어요?

허둥대는 촌민

고마워……

전달자

어떻게 된 거예요? 산길에 왜 사냥용 함정이 있죠?

허둥대는 촌민

그게…… 저기……

허둥대는 촌민

봄이 되면서 이틀 전에 마을에 야생 짐승이 쳐들어왔는데, 방호 조치를 하다 보니……

전달자

그렇다고 사람이 다니는 길에 함정을 설치하면 안 되죠. 너무 위험하잖아요…… 보세요. 짐승은커녕 오히려 그쪽이 다쳤잖아요.

전달자

하아, 일을 끝내고 나면 제가 도와줄게요. 짐승을 쫓는 건 저도 잘하니까요.

전달자

일단 전할 물건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허둥대는 촌민

잠깐!

전달자

무슨 일 있어요?

허둥대는 촌민

모선 마을로 가는 거야?

전달자

네, 그런데요?

허둥대는 촌민

저기…… 마을에 가면 안 돼.

전달자

왜요?

허둥대는 촌민

왜냐하면……

허둥대는 촌민

참! 너는 모르겠지만 이틀 전에 여기 토석류가 발생해서 길이 다 막혔어!

전달자

길이 막혔다면 당신은 어떻게 나왔죠?

전달자

당신이 나올 수 있으면 저도 들어갈 수 있어요. 산 타는 건 별문제 없으니까요.

허둥대는 촌민

안 돼, 기다려!

전달자

……또 무슨 일이죠?

허둥대는 촌민

그게…… 아아아…… 에잇!

허둥대는 촌민

난 거짓말 못 한다고 했는데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을 시켜서는.

허둥대는 촌민

하아,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난 너를 막으러 온 거야.

허둥대는 촌민

너를 속이든 설득하든 아니면 싸우든, 어떻게든 너를 마을에 들여보낼 순 없어!

전달자

그럼 그렇지……

전달자

아까부터 계속 이상하더라니까.

전달자

당신들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예요?


노족장

아이고, 참…… 제가 늙어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노족장

하아…… 토석류가 궁금하신 거라면 사실 별거 없습니다……

노족장

토석류가 발생한 곳은 마을 사람이 사는 곳과 거리가 좀 돼서 피해를 본 사람이 없거든요.

노족장

힘들게 여기까지 오셨지만, 마을은 멀쩡하니 조사할 것도 없을 겁니다……

멀베리

족장님, 잠시만요. 확인하고 싶은 일이 더 있는데요……

멀베리

이 계절에 산사태가 일어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만……

멀베리

원래대로라면 산길을 관통하는 치도 공사는 양쪽 산체를 보강하기 위해 사전에 방호 공사를 진행합니다. 이번과 같은 재난을 막기 위해서요.

멀베리

뭔가 예상 밖의 일이 아니라면 토석류에 무너지는 일은 없을 텐데……

노족장

……

멀베리

방호 공사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면, 아마 보강할 때 질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었을 겁니다.

멀베리

그렇다면 또다시 토석류가 발생할 경우, 치도뿐만 아니라 마을도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죠……

멀베리

그래서 저는 산에 올라가서 자세히 조사하면서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노족장

산에 올라간다고요……?

멀베리

족장님, 괜찮으시다면 산으로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

노족장

그건……

노족장

솔직히 아가씨한테 협조 안 하려는 게 아니라, 요즘 한창 농번기라 집마다 농사짓느라 바쁩니다. 길을 안내해 준다면 밭일할 사람이 빠진다는 건데……

멀베리

시간이 없으시다면 대략적인 방향을 알려주셔도 됩니다. 저 혼자 찾아갈게요.

노족장

여기 산길은 험하고 갈림길도 많아서 혼자서는 아마 힘들 겁니다만……

???

걱정하지 마시오. 소승이 이 시주한테 길을 안내하겠소.

노족장

자네는……

노족장

사가 씨, 왜 아직 여기에……

사가

소승이 방랑하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요 며칠 마을에 꽤 신세를 졌소.

사가

소승이 농사를 잘 몰라서 마을을 도울 순 없지만, 길을 안내하는 정도는 할 수 있소.

노족장

스님, 하필 이런 때에……

멀베리

족장님, 이해가 잘 안 가네요.

멀베리

왠지 저를 산에 보내기 싫으신 것처럼 보여요……

노족장

……

멀베리

아까는 이번 재난으로 마을이 엄청난 손해를 봤다고 강조하셨잖아요……

멀베리

그런데 왜 재난이 다시 발생할 위험은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 같죠……

촌민

족장님, 사냥꾼 쪽은……

촌민

(귓속말) 족장님…… 아무래도……

노족장

내가 같이 가보겠네……


촌민

오늘은 방돌쇠가 편하게 잠드는 날입니다.

촌민

여기 있는 모두가 그걸 지켜봤고요.

촌민

나이 든 이가 어린 이를 먼저 보낸다는 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천명이 정해진 이상 우리도 어찌할 도리가 없죠.

촌민

……아이는 마을을 위해 목숨을 잃었으니, 마지막 순간까지 선행을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음 생에는 부디 이런 두메산골이 아닌 좋은 곳에서 태어나길.

촌민

오늘부로 방돌쇠는 죽은 사람입니다.

사냥꾼

……

촌민

사냥꾼, 아비로서 직접 아들을 위해 묘비를 세워주게.

사냥꾼

잠깐, 궁금한 게 있는데……

사냥꾼

돌쇠가 마을을 위해 죽은 거라면서, 마지막도 마을에 묻히길 원하는데……

사냥꾼

다들 정말 돌쇠를 마을 사람으로 생각하긴 한 건가?

사냥꾼

이번 일이 끝나면 정말 돌쇠를 마을에서 살게 할 건가……?

촌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촌민

경고하는데 관청 사람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니 소란 피우지 마!

사냥꾼

내가 무슨 소란을 피운다고 그러나…… 내가 반쯤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거 다들 잘 알잖나……

사냥꾼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네. 내가 바라는 건 돌쇠만…… 내 아들만 평온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뿐이야……

촌민

그 얘기는 이미 다 끝났잖아. 족장님이 이산묘에서 맹세도 했고. 이번 일만 끝나면 마을에서 자네 부자를 잘 돌봐줄 거야. 또 뭐가 걱정인데?

촌민

사냥꾼! 뭘 꾸물대는 거야?

사냥꾼

내가 걱정하는 건……

사냥꾼

지금이야 우리 부자에게 부탁하는 입장이겠지만, 돈을 받고 나면 또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 어떻게 장담하나……

사냥꾼

그러고 보니 어제 누가 내게 이런 말을 해주더군.

사냥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사냥꾼이 손을 놓자 묘비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먼지가 일었다.

촌민

너……!

촌민

돈을 받으면 마을까지 살리는데, 뭐 하러 자네를 해치겠나? 족장님 말도 못 믿겠어? 왜, 우리 모두가 조상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맹세해야 믿겠나?

사냥꾼

그런 뜻이 아니라……

촌민

시간 없어.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자네 멋대로 하게 둘 순 없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더니 남자의 팔을 잡고 묘지 쪽으로 향했다.

누군가 바닥에 떨어진 묘비를 주워 억지로 남자 손에 쥐어 주었다.

남자는 인파 가운데서 묘비를 끌어안고 길들여진 버든비스트마냥 고개를 축 늘어트렸다.

글자도 다 새기지 못한 묘비는 사람들 손에 의해 조금씩 땅속에 들어갔다.

[CG: 35_mini02]

순간, 검 빛이 번쩍이더니 묘비는 이내 두 동강이 났다.

도적, 강도, 베테랑 장군, 희대의 고수…… 격투든 대련이든 소녀는 수많은 사람을 향해 검을 뽑았고, 매번 지금보다 멋들어지게 검을 휘둘렀었다.

하지만 이번은 힘조차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사방으로 나무 부스러기만 날리고, 묘비의 절단면도 고르지 못했다.

옥문을 떠나기 전, 소녀는 그 사람에게 말했었다. “이 검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을 거예요.”

하지만 무기도 없는 사람들을 향해 검을 뽑는 게 무슨 협객이란 말인가?

과연 그녀는 검을 뽑았어야만 했는가? 또 이번 일을 막을 명분은 있는가?

그렇다고, 불의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검을 드는 이유 또한 있을까?


치우바이

이 묘비를 세우면 두 목숨을 모욕하는 겁니다.

사냥꾼

치우바이 아가씨……

촌민

다…… 당신 아직 안 간 건가?!

치우바이

이 황당한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정도가 될까 봐 걱정돼서요.

치우바이

……정말 제가 예상했던 그대로군요.

촌민

다, 당신이 어떻게……?

치우바이

명백하게 알고 있죠.

촌민

그럼 우리도 살길을 위해 이러는 걸 잘 알겠군……

치우바이

이틀 동안 그 말을 수도 없이 들었어요.

치우바이

시체, 이름, 돈. 당신들의 살길은 다른 사람의 존엄을 짓밟아야만 얻을 수 있나요?

소녀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전전긍긍하며 자신을…… 그리고 손에 든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이 검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의 운명을 끝낼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많으니까.

어쩌면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이 검일지도 모른다. 황야의 지푸라기가 바람과 서리 말고 더 겪어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검의 빛은 금세 물러갔다. 그녀도 검을 거두고 더 이상 사람들을 겨누지 않았다.

촌민

아가씨…… 아니, 협객 님……

촌민

이건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잖아…… 협객이 원래 사람을 잘 돕는다는 거 알아. 하지만 당신은 용감한 협객이고, 우리는 그저…… 당신이 뭘 알겠어?!

치우바이

저와 당신들은 다를 게 없습니다.


엄마…… 아빠 보따리에서 관청의 고지서를 찾았어.

“강제 일대가 수적과 결탁하여 백성들의 고초가 말이 아니다…… 조만간 숙청할 예정이니, 자수하면 처벌은 가벼이 이뤄질 것이다……”

엄마, 아빠를 좀 설득해 봐.

여보, 딸을 봐서라도 그만 하세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

말이야 쉽지. 관청에 자수하면, 그다음은?

그래도 강에서 장사하는 행상인이나 식량을 운반하는 짐꾼들은…… 아무런 죄가 없잖아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탓하려면 산이 높고 물살이 거센 걸 탓해.

하지만……

딸이나 잘 보살펴.


누군가는 부자나 고위층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아간다. 누군가는 살 곳을 찾아 헤매며 먹이를 따라 이동하는 짐승처럼 살아간다. 누군가는 변변치 못한 삶을 살아가며 다음 끼니를 걱정할 여유도 없다.

늘 재앙의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이 대지는 어딜 가든 똑같은 광경이다.

이 세상에 진정한 의로움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데, 왜 강변의 잡초나 황야의 돌멩이에는 도리어 그것을 지키라고, 그것을 준수하라고 요구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불의에 가세해도, 그것을 받아들여도 된다는 게 아니다……

치우바이

강제에서 옥문까지 5년, 그리고 또 5년, 그동안 나는 이런 변두리를 수도 없이 헤맸습니다. 누군가 한마디만 더 했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마가 끼었더라면 저 또한 산해중 같은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

우리, 아빠처럼.

치우바이

당신들이 힘든 건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그게 불의를 저질러도 될 이유는 아니에요.

치우바이

절대로.

강물은, 결국 우리 자신마저 삼켜버릴 수 있으니.

치우바이

저도 원래는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치우바이

당신들은 대체 어디까지 해야 만족할 겁니까?!

겁먹은 촌민

그럼 방돌쇠는……

치우바이

방돌쇠가 왜요?

촌민

주사와 주육이 아마 마을 뒤편에 있는 산으로 데려갔을 건데……

치우바이

산에요?

촌민

녀석이 소란을 피울까 봐 그저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을 뿐인데……

사냥꾼

……

치우바이

아직 늦지 않았어요.

갑자기 내린 눈이 또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듯 검객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

잠시 멍하니 있던 사냥꾼도 이내 전력을 다해 성큼성큼 쫓아갔다.

두 동강 난 묘비, 바닥에 흐트러진 나무 부스러기,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

사람들은 무덤 주변에 둘러싸여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뭔가를 떠올린 것 같기도, 뭔가를 잊은 것 같기도 했다.

노족장

망했다…… 다 망했어……


멀베리

사가 씨는 여기 승려인가요? 이곳 지리를 잘 아시네요.

사가

소승은 여기저기 방랑 중이오. 요 며칠 마침 근처에 왔다가 사고가 발생한 걸 목격했을 뿐.

사가

멀베리 시주는 재난 구조 전문가였군. 산사태가 일어난 원인도 조사하고, 앞으로 마을에 재난이 닥치지 않도록 예방할 수도 있으니, 아주 멋진 일이오.

멀베리

사가 씨, 안내해 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계속 못 가게 붙잡고 있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사가

멀베리 시주는 사람들이 왜 못 가게 붙잡았는지 아시오?

멀베리

설마, 이번 사고에 무슨 숨겨둔 사정이라도 있다는 건가요……?

사가

사람의 힘은 결국 한계가 있는 법이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본다고 해도 그저 우리 속의 짐승을 바라보는 격이지. 재앙인지 인재인지, 과연 숨겨진 사정이 있는지는 소승이 함부로 논할 순 없소.

사가

멀베리 시주를 산으로 안내한 건 소승도 이해하지 못한 일들이 있기 때문이오.

사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현장에서 직접 가보면 알게 될 것이오.

멀베리

흠……


멀베리

여기가 바로 산사태가 발생한 가장 높은 지점이구나……

벼랑 끝까지 다가간 멀베리는 무심코 쭈그리고 앉았고, 까만 진흙 때문에 치마가 더러워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사태 발생 지점에 쌓인 토사는 마치 누군가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다. 선명하게 그어졌던 생명선이 그 부채에서 끊어지면서 엉망이 되어버렸다.

사가

어떤가? 멀베리 시주, 뭐 발견한 게 있소?

멀베리

……

사가

멀베리 시주, 안색이 안 좋은데……

멀베리

……

멀베리

과연…… 이 산사태는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사가

이곳은 며칠 내내 폭우가 쏟아졌소. 소승도 급히 비를 피하느라 이 마을에 온 것이지.

멀베리

염국 서북쪽은 산이 많고 늘 건조해요. 특히 최근 2년은 더 심해졌죠. 몇 안 되는 강우도 봄, 여름에 집중되어 있고, 전에 이 근처에서 발생한 재앙 때문에 기후 변화가 더욱 악화되고 있어요.

멀베리

이 근처 산은 식생이 드물고 재배도 어려워서 대부분은 민둥산이 되었어요. 바위가 노출되고 토질도 푸석푸석한데, 단시간에 집중 호우까지 내렸으니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겠죠.

멀베리

그렇지만…… 사가 씨, 저쪽을 보세요……

사가

음?

멀베리

저쪽 무너지지 않은 부분이요.

사가

저건…… 방호 공사인가?

멀베리

염국에는 수만 갈래의 치도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재앙이 빈번한 황야나 산지를 많이 관통해요. 그렇기 때문에 자주 보수하고 재건해야 하며, 아울러 초기 공사에 더 공들이죠.

멀베리

지형이 복잡한 구간일수록 시공 범위도 넓어져요.

멀베리

도로 자체 외에도 공사팀은 치도 양측에 있는 산체를 보강하고 입체적인 방호 공사를 세워 치도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사가

이해했소. 치도 양쪽에 있는 산은 더 단단해야 하는 거군.

멀베리

더 중요한 건……

멀베리

화약 잔류물을…… 발견했어요.

사가

화약이라니……

사가

치도 공사팀이 산에서 방호시설을 구축하면서 구멍을 뚫거나 폭파할 때 남긴 흔적은 아니겠소?

멀베리

음……

멀베리

제가 '춘건'에서 실습할 때, 치도 공사팀과 협력해서 탐사나 건설, 그리고 구조 활동을 여러 번 한 적이 있거든요.

멀베리

치도 공사팀은 시공할 때 '정밀 통제'에 가장 신경 씁니다. 공사팀이 구멍을 뚫고 폭파할 때 사용하는 건 모두 공부 주조실에서 개발한 제식 공사 폭약이에요.

멀베리

하지만 제가 발견한 잔류물로 봤을 때, 이건 상당히 허술하게 제작한 화약들이에요……

멀베리

마치 구식 수제 폭약이랄까……

사가

구식 수제 폭약이라…… 소승도 여기 오면서 사냥꾼들이 직접 만든 폭약으로 샌드비스트 둥지를 막는 걸 보았소.

사가

하지만 이런 아무것도 없는 산꼭대기에 도대체 누가 폭약 따위를 묻는단 말이오?

객승은 무심코 돌멩이 하나를 걷어찼다.

돌멩이는 비탈길을 따라 굴러떨어졌고, 결국 깔끔하게 파인 흔적이 남은 구덩이에 빠졌다.

그녀는 나기나타로 잡초를 베어냈고, 구불구불 이어진 구덩이는 이미 모래바람에 거의 파묻힌 정도였다.

사가

……

멀베리

사가 씨, 왜 그러시나요?

그건 차량의 바퀴 자국이었다.


노인은 지친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마을 밖으로 향했다.

해는 점점 서쪽으로 기울었고 붉게 물든 노을은 유달리 아름다웠다. 하루의 끝자락인 이 시간은 덥지도 춥지도 않아 늘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이 시간은 하루 일과를 마친 직후거나,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농번기 때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오늘 하루가 이렇게 긴 적이 없었다.

노인은 그렇게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더는 걸을 수 없자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전달자

족장님……?

노족장

자…… 자네가 어떻게 들어왔나?

노족장

자네는 지금쯤……

전달자

족장님, 돈을 전하러 왔습니다.

노족장

뭐…… 라고……?

녹초가 된 전달자가 소포를 바닥에 내려놓자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일어난 먼지는 노인의 얼굴을 가릴 뻔했다.

전달자

잊으셨어요? 2년 전에 관청에 신청하셨잖아요.

전달자

줄곧 기다리시던 보조금이 드디어 도착했어요……

전달자

소식을 듣자마자 제가 달려갔거든요.

전달자

참, 올해 춘분 파종이 끝나면 마을도 가장 좋은 관개 시설을 쓸 수 있겠네요. 집마다 새로운 물건도 사들일 수 있고.

전달자

관청은 모선 마을을 잊지 않았어요…… 재앙 때문에 조금 늦어졌지만……

전달자

족장님……?

노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을 벌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돈이 들어있는 소포는 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노인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마치 천 년 전, 선조들이 치워놓은 그 산이 다시 돌아와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노족장

어서……

노족장

어서 가서 방돌쇠를 풀어주게……

촌민

족장님……

촌민

방돌쇠가…… 산에서 뛰어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