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갑옷
음모가 발각되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기사단장 츠시보르는 일을 강행하려 하지만, 무에나가 한발 앞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등장 오퍼레이터: 무에나
무에나, 그 두 사람한테서 연락이 끊기다니, 믿을 수 없어. 너희 니어 가문의 사람들은,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해.
하, 내 생각도 그래. 그 두 사람이 사라져 버리다니, 너무 이상하지.
바운티 헌터들이 수집한 정보는 대략 삼 년 전 황금 평원을 끝으로 끊겼어. 그 뒤로는 두 사람을 봤다던 사람들도 없고.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넌 돌아가서 키릴 씨를 보살펴 드려야 하는 거겠지?
……최근 몇 년간, 많은 사람들이 니어 가문을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 자들은 나의 형제가 세운 공을 질투하고,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방랑자인 내게 원한을 품고 있지.
하지만 네 형, 스니츠는 이 시대 최고의 군인이야, 모두가 이를 똑똑히 보았을 텐데……
질투하더라도 그 능력을 부인할 수 있을까? 전쟁에서 이기고 싶지 않다는 건가?
그들이 보기에 전쟁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뜻이겠지. 아니, 이 이상의 전쟁을 두려워한다는 표현이 적당하겠군.
그러니 자신들의 가장 날카로운 검을 봉인한 것이겠지…… 겸사겸사 내가 그랜드 나이트 영지로 복귀하도록 압박을 주었고.
……하지만 넌 절대 돌아가서는 안 돼!
말했잖아. 니어 가문의 사람이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뭐야, 츠시보르.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또 잠을 설쳤어? 어제 우리가 구해 낸 사람들이 다시 잡혀갈까 봐 걱정이야?
아니, 난 그저……
……암살을 계획 중이다 보니, 생각이 좀 과했던 모양이야.
……암살?
꿈이었던 건가.
……
시작하지.
12월 1일 2:15 A.M.
즈보넥 외곽
하지만……
도시에 잠복 중인 초병에게 명령을 전해라, 시작하라고.
전원, 행군을 준비하라.
하지만 대기사장님의 명령이 우선이니, 더 이상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카봐렐리엘키에선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몇 마디로 기사의 창을 꺾을 수 있을 것 같나? 아니면 너희들의 시위에 걸린 화살이 부스러지기라도 했나?
공황에 빠진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출정 기사다, 이 사실에 틀림이 있는가? 라이타니엔이 이빨을 드러낼 때, 감정회는 군사 지원을 보내지 않고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정회가 부정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즉시 움직이도록…… 명령이다.
……죄송합니다, 츠시보르 님께는……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습니다.
기사단의 지휘권은 이미 감정회에 반환되었고, 이 사실 역시 이미 각 분대장과 장인단 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저희는 기사단의 지위를 위해, 출정 기사에게 있어야 할 존중을 되찾기 위해 거사를 준비한 것이지만……
대기사장님께선 이 모든 것을 거부할 권한이 있으십니다.
……따를 생각이 없는 건가?
그럼, 내가 직접 하도록 하지.
윽…… 당신……
……즈보넥 내부로의 지령은 이미 내려졌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한다.
이의가 없는 자는 나를 따라오도록.
검붉은색으로 물든 검을 칼집에 넣은 기사단장은 주둔하고 있던 천막을 성큼성큼 빠져나갔다.
밤새 대기하던 수십 명의 정예 출정 기사들이 정렬해 있었지만, 그가 지나가는 길옆에서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도, 막는 사람도, 경례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두 분, 안녕하십니까. 최근 잦은 사고로 인해 자정부터 아침 6시 사이에 승강기 플랫폼을 거쳐 도시를 나가는 차량을 검사하고 있습니다. 식별 코드와 관련 서류를 제출해 주세요.
여기.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참고로 즈보넥 특산품인 허브맛 스톡비스트 육포를 판매 중인데, 기념품으로 최고랍니다.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
그는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검사원은 그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라이타니엔의 문장을 보셨겠지요. 그렇게 자세히 검사할 필요가 있습니까?
……으음?!
지금 시간이라면, 목격자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 여론 따위는 더더욱 신경 쓸 필요 없고.
만약 화살이 저 고탑 캐스터에게 막히면…… 투창의 사용을 허가한다.
……결과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직까지 출정 기사의 기술을 기억하는 도시는 없으니까.
……
훗, 옛 친구여.
역시 내 길을 막아서려는 건가.
과연 이를 기뻐해야 할까?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이제라도 무언가를 하려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네가 여기에 나타난 이상, 오늘 밤 즈보넥 부근에선 두 신원 미상자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겠군.
바운티 헌터와 출정 기사, 어느 쪽도 이동 도시에 쉬이 접근해도 될 사람은 아니니까.
……그저 약속대로 검을 받으러 왔을 뿐이다.
그런 것치곤, 빈손으로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
그러면 너는? ……너를 따르는 자들은?
네가 제일 잘 아는 거 아니었나?
네가 원하던 대로, 그랜드 나이트 영지에서 간섭해 왔다. 충성스러운 기사들은 긴급 명령에 복종했고.
기사들의 질서와 영광을 위해, 보다 더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그들의 출정에 덧씌워질 거짓될 명예를 위해.
그랜드 나이트 영지에서 벌써……?
……아아, 표정을 보아하니, 이건 몰랐던 모양이군.
……감정회의 시야는 카시미어의 구석구석에 뻗어 있지, 그들과 나는 무관하다.
아아, 미안하군…… 너일 리가 없었겠지. 감정회에게, 대기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아니니 말이야.
아무튼 나에게 그만두라 설득하러 온 거겠지.
모든 계획은 감정회에게 들통났고, 대기사장이 명령을 내렸다면 이제 되돌아갈 길 따위는 없어.
게다가 작전 개시 명령을 내리기 위해 날 막은 부하의 피를 보기까지 했거든.
이제야 알겠어, 결정한 것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그때의 널 더욱 존경하게 되었어.
……네가 무슨 자격으로 네 독단적 행동과 내가 해온 일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거지?
내가 도발한 대상은 확실히 너보다는 적지.
네가 한 짓은 도발 따위가 아니야…… 그저 저열한 수법이라 말하고 싶군.
만약 스스로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면, 왜 군부의 정보가 유출된 것처럼 가장하고 나와 라이타니엔의 방문객을 서로 적대하게 만든 것이지?
내 수법이야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그저…… 너와 카시미어에게 똑같이 실망했을 뿐이니까.
그리고.
감정회에선 출정 기사에 관한 부정적인 소식이 기록에 남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겠지, 그러니 만약 정말 명령에 따랐다 한들……
복귀하는 중 질병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처리되든, 그 빌딩의 밑에 연금되어 영원히 입을 다물게 되든 하지 않겠나? ……마치, 지금의 너처럼 말이야, 어느 쪽이 될 거라 생각하나?
네 입장으로 내 삶을 판단하려 하지 마라, 츠시보르.
만약 네가 스스로의 아집을 꺾지 않고, 수많은 이들이 나서게 될 전장을 멋대로 결정하려 든다면 이는 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평민을 대신하여 전장에 나서는 건 출정 기사의 의무지.
전쟁에서 가장 먼저 버려지는 것은 무력한 평민들이란 걸 모르나?
……너라면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그 선택이 본대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더 '현명한' 판단? 그 현명한 판단이라는 게 설마 이대로 카시미어에서 도망치는 건가? 만약 떠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믿는 거면 왜 넌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는 거지?
아니면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 할까, 이게 나의 마지막 기회라고 해도?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카시미어에 필요한 것은 진정한 폭력, 세상을 뒤엎을 전쟁이라는 것을!
……아니.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
그런가.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를 안다고 여겨왔건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게 오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다시 옛날처럼, 숲속의 널따란 공터에서 모닥불을 앞에 두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던 그때처럼 제대로 대화를 나눠봐야겠어.
……만약 지금 내가 가는 길을 가로막으려 드는 게 아니었다면, 옛날처럼 적당한 나뭇가지를 골라 창에 꽂았을 거다.
……머리를 조금 식힐 필요가 있겠군.
주인님, 몸을 숙이십시오! 주변에 궁수가 여럿 있습니다!
……대체 누구입니까?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계속 저를 노리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알로이시아, 가죠! 이 검문소는 가짜입니다!
검사원 씨, 다치고 싶지 않으시다면 부디……
이봐, 그만해! 제발 부탁이니까 앞으로 튀어 나가지는 말라고.
길을 막고 있는 녀석들도 우리가 기절시켰어. 그러니까 그쪽 둘도 아츠를 잠깐 멈추고, 진정해.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는 함정들이 있어서 말이지, 차가 고장이라도 나면 라이타니엔으로 돌아가는 길이 불편할 거잖아.
당신 어느 틈에……
으으음……
주인님!
아이고, 미안해.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쪽의 고귀한 분을 데려가고 싶은데, 협조 가능할까?
하아, 진지하게 부탁했던 건데 말이야. 자칫해서 함정이 터지면 여기 있는 모두가 저세상행이라고.
그리고 네 실력이 뛰어난 건 알겠는데 그래도 혼자서 여기 있는 모두를 상대하는 건 무리잖아. 차라리 내 조건을 들어보지 그래?
대화는 없다, 용병.
오우, 설마…… 일부러 폭발을 유도해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날려 버려서라도, 저 멀리에 있는 주인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겠다는 건가?
하아, 예전부터 너희같이 미치광이 고탑 캐스터들은 상대하기가 참 껄끄러웠단 말이지.
……진정하라고. 우리 둘 다 목숨 걸 필요까지는 없어.
검사원도 우리 쪽 사람이 아니야, 주변에 매복 중인 궁수들도 마찬가지고.
……계속해라.
아아,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이쪽 일을 하다 보면 말이야, 여러 곳에서 한 목표를 쟁탈하는 상황이 자주 있단 말이지. 그런데 누군가의 임무는 목표를 잠시 맡아두는 것뿐인 반면, 누군가는 목표를 깔끔하게 날려 버리는 걸 원한다 이거지.
잘 생각해 보라고.
그리고, 여기서 도시를 나가 동남쪽으로 삼십 분쯤 가면 길옆에 작은 마을이 있어. 거기 가장 높은 건물에는 곧 떨어질 것만 같은 방패 모양의 문양이 걸려 있고.
거기에서 기다려 준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 같은데 말이야.
……그리운 아츠의 빛이군, 진정한 니어다워.
책에서 키릴의 전설을 읽어본 적이 있어. 거리 광고에서 '빛의 기사'란 거룩한 칭호도 보았고, 네가 얘기해 준 형님분의 눈 부신 빛도 들었지.
하지만 내가 잘 아는 니어는 지금 내 눈앞의 것뿐이다.
마치 그날 반역을 꾸미던 연회에서처럼…… 문을 열면 피가 강처럼 흐르는 광경을 보게 될 줄 알았건만, 도리어 빛의 폭포가 나를 감쌌었지.
……이미 오래전 일이다.
그래. 과거의 일로 칭찬받는 것 자체가 가여운 일이지.
지난 몇 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지? ……검술은 여전하나, 빛은 예전보다 조심스럽군.
하지만 검신에 응축된 힘은 이 창의 전력의 일격을 받아내기에 충분하겠지.
이미 답을 내렸으면서 왜 나에게 묻는 거지?
……네가 무력했다는 걸 믿지 않기 때문이다.
셀리나가 그랜드 나이트 영지로 압송되어 국민원의 판결을 받을 때, 네가 그녀의 누명을 밝힐 수 없을 정도로 무력했다는 걸 믿지 않는다. 말 한마디면 끝나는 일이었을 테니까.
그녀가 그토록 조용히 사라졌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너는 그녀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
……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무수히 많다.
네가 그런 일에 발목을 잡히리라 생각하진 않는데.
국민원 앞에서 그녀의 무죄를 증명하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린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
과거의 너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지. 국민원이 미처 살피지 못한 공정함이 있다면, 이를 법전에 새겨 넣기 위해 투쟁했을 거라고.
……연루된 세력이 지나치게 많았다. 피고인만 열셋이었지. 법률 하나로는 무고한 이들에게 공정함을 가져다줄 수는 없었어.
그러니까 그들에게 씌워진 누명은 너의 삶을 걸고 싸워볼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가.
……이제는 죽음이 두려워진 거고? 아니면 더 이상 목숨만큼 중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출정 기사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무거웠다.
그의 창은 본디 갑옷과 방패를, 성벽과 강철을 향해야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자신의 오갈 곳 없는 분노로 보이지 않는 적을 찌르고 있었다.
……균형이 흐트러졌군, 츠시보르.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마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다면 네 갑옷에 금이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훗……
서로 무기를 맞대본 적이 꽤 오랜만이긴 하네. 어쩌면 지금의 난 네 기억 속의 나보다 더 저돌적일지도 모르겠어.
넌 어떻지? ……그때는 우리가 아무리 말려도 검을 집어넣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또 한 번의 충돌.
창이 대지를 내려찍자 바위가 산산조각 난다. 흩어지는 돌조각들이 아츠의 광휘에 부딪혀 불꽃을 자아낸다.
……잘 피했네.
그때 넌 염치없는 귀족이나 상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지. 수도의 저 높은 곳에서 온 경고에도 신경 쓰지 않았고, 이 모든 것들이 헛수고로 끝날 수도 있다는 걱정 또한 하지 않았어.
넌 영원히 그랜드 나이트 영지에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정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불살라도 좋다는 듯이 행동했지.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
만약 네가 할 수 없는 거라면 날 지켜봐라.
내가 대신해서 네가 할 일을 할 테니까.
……네 신념을 근거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판단하는 건가?
니어가 검을 휘두르는 동작은, 그저 검신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는 것처럼 가벼웠다.
타오르는 황금빛 불꽃이 출정 기사의 갑옷에 떨어지며 그을음을 남겼다.
희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며, 목숨을 푼돈처럼 판돈으로 걸고 베팅하는 그까짓 신념으로?
……네가 이렇게 죽는 건 원하지 않는다.
네 계획은 실현되어선 안 되며, 실현될 수도 없다. 넌 아직까지 무엇에 집착하는 거지?
쿨럭, 쿨럭……
아, 일어나셨군.
미안하게 됐어. 부탁을 받은 게 있어서 그쪽을 좀 귀찮게 했네.
일단 얘기해 주자면, 우린 지금 약품 수송차량 위에 있어. 깨진 유리는 그 뭐냐, 어쩌다가 화살에 맞은 거고.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애 좀 먹었지만, 그래도 지하의 물류 통로에 진입했으니 조금 쉬어도 될 거야.
여기는 새벽이 가장 혼란스러운 시간이야. 밀수, 뒷거래에 사고로 위장한 차량 전복에……
뭐…… 뭘 원하는 겁니까? 알로이시아…… 알로이시아는?!
아, 호위? 만약 협조적이라면 아마 지금쯤 도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쪽에서도 주의를 좀 분산해 줘야 해서 말이야.
안심해, 유능한 캐스터이니 궁수가 추적해 봤자 별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우리는…… 도와주러 온 건 맞는데 돈은 좀 받아야겠어. 의뢰인이 제시한 돈이 영 형편없거든.
우리 형제들 몇이 다치기도 했고, 그 피 값이라 치고 어디 그쪽 몸값을 한번 얘기해 보자고.
……슬슬 그 스태프는 내려놓으면 안 될까? 예전부터 라이타니엔에서 도망쳐 온 캐스터들이랑 맞서는 건 질색이었는데.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의 몸값은 지불하겠습니다. 또한 당신의 어떠한 정보를 엿듣지도, 나중에 이를 문제 삼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지요.
이대로 평화적인 협상을 이어 나갈 수 있으면 좋겠군요.
어우, 그래야지. 뭐 우리도 그저 의뢰를 받은 것뿐이야. 이 수송차가 화물을 지정 위치까지 운반한 다음 조금만 기다리면……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컨테이너는 텅 빈 것처럼 들립니다만.
아아, 너 같은 분이 화물이란 얘기는 아니야.
수송차는 임대한 거고, 통행 허가증도 빌린 거야. 대충 그럴듯하게 갖춰야 눈속임을 하기에 좋거든.
……그리고 만에 하나 그쪽의 호위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 외국 기업의 통행 허가증이 있으면, 널 무사히 카시미어 외부로 보낼 수 있어.
……당신들은 왜……
아닙니다,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하죠.
잘 생각했어. 시간이라도 때울 겸 돈 얘기나 할까?
나에게…… 무엇을 고집하고 있냐고 했나?
이 사회에는 명확한 규칙이 있다. 모든 것에 값어치가 매겨진 삶에선, 정확한 선택을 내리는 데에는 계산기조차 불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현명한' 선택을 고르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나는 알고 있다. 감정회에선 널 초청했겠지, 마치 다른 니어들을 초청했던 것처럼.
기사들을 경기장 속에 몰아넣고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상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
넌…… 놀랄 만한 부와 권력, 지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너 또한 본인의 고집대로 하면서, 왜 나를 설득하려는 거지?
내가 출정 기사로 돌아와 다시 귀족 가신의 길을 걷기로 선택한 것은, 같이 걸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오해하지 말아줘, 무에나. 나는 전쟁을 원하는 것이 아니야. 전쟁은 언젠가 닥칠 것이고, 기사는 본래 이를 짊어져야 할 뿐이니까.
많은 이들이 라이타니엔 고탑의 그림자를 본 적도, 북풍과 함께 들려오는 통곡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지. 그렇기에 그들은 경기장에 흩뿌려지는 선혈을 보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거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기사의 정신은 출정 기사에게 있어 빛나는 것이지, 칼끝에서 빛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 또한 폭력도, 황야의 해골과 먼지도 아니야.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사람은 타인을 약탈하고, 짓밟고, 해할 수 있지만…… 타인을 위한 희생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기사의 피는 이를 위해 흘러야 하지.
……기사의 영광은, 누군가가 보아야만 빛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전쟁에 운명을 맡기면서…… 기사의 정신을 지킨다고 말하는 건가?
네가 걸어갈 길을 위해 피 흘린 이들을 위해 너는 예전처럼 눈물을 흘리고 슬픔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빗방울이 창끝에 떨어졌다.
마치 부슬비가 내리는 새벽이 조금 일찍 찾아온 듯, 숲을 뒤덮은 밤안개 속 빛무리가 퍼져나갔다.
……아아, 드디어 아츠를 온전히 펼쳐 보이는군.
하지만 완전 무장을 한 나에 비해 넌 방어구 하나 갖추지 못했어. 이것을 공정한 결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출정 기사가 내지르는 혼신의 일격을 막을 수 있는 갑옷이 있기나 한가? 상대가 너라면 더더욱.
훗, 그렇다면 다행이군.
잠깐, 당신은……
눈썰미가 좋군.
내가 아는 어떤 귀족은, 우리랑 두 달을 거래하고서야 눈치채던데 말이야.
뭐 첫눈에 알아봤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언급조차 하지 않는 녀석도 있었지만.
……살카즈 용병이군요. 카시미어의 상업 기구는 당신 같은 사람들도 수중에 두는 건가요?
과찬의 말씀인데. 우리를 뭘로 취급하든 신경 쓰지는 않겠지만, 여기 숨어 있는 건 살카즈 뿐만이 아니야.
카시미어에서는 확실히 우리를 평등하게 보고 있기는 하지. 그런데 그건 누구를 버릴지 결정하는 순간에 한한달까.
……
아, 놀랐어?
유일하게 살카즈가 특별한 점이라면, 대부분의 카시미어 사람들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는 점이려나? 그리고 나도 아직 나름 젊은 편이고.
……비록, 옛 친구들은 하나씩 줄어가고 있지만.
콜록……
부슬부슬 내리는 비, 은빛 파편.
부서진 갑옷 속에서 배어 나오는 핏물.
……여기까지. 네 패배다.
아니……
내가 누구에게 패배했다고 하길 바라는 거냐?
……
출정 기사는 다시 창을 움켜쥐고 전방을 향해 찌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내딛히지 않았다.
……누구에게, 패배했다고 하길 바라는 것이냐?
한 걸음 휘청거리고선 땅에 주저앉은 기사의 뺨을 타고 금빛의 빗물이 흘렀다.
그는 고개를 들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니어를 직시했다.
……감정회의 건물 안에 앉아, 비열한 술수와 거짓된 명예에 심취해 있는 귀족들에게 말인가?
아니면 우스꽝스러운 거짓말로 평화를 가장하고, 왜곡된 욕망을 카메라 앞의 유머로 꾸며내는 장사치들한테?
아니면 내가, 저 촘촘히 얽힌 권세에 대항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카시미어를 떠나, 지금까지의 투쟁을 포기하고 우리가 적대했던 모든 것들에게 고개 숙여 화해라도 하라고?
쿨럭……
……나는 그저, 달리 걸을 만한 길을 찾지 못했을 뿐이야.
이 유일한 가능성조차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거라면 너의 검으로 증명해 봐라.
……만약, 내가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대상이 너라면, 그건 받아들이겠다.
난 권력과 돈, 구차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나 헛되이 보낸 시간에 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무에나는 검을 거두었다.
여명이 오기 전, 서늘한 밤빛 속에선 오로지 광휘를 머금은 빗물만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네가 이렇게 죽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그는 상대가 멈추기만을 바랐다.
……훗.
……무에나, 어째서 넌 그렇게 담담할 수 있는 거지?
너의 분노는 나보다도 뜨거우며, 내가 보아 온 모든 것들 또한 너도 알고 있었지 않나?
……
네가 보지 못했을 리가 없어……
상업연합회는 진작부터 출정 기사에게 간섭하게 됐고, 갈수록 더 많은 기사들이 명예를 팔아 돈을 벌고자 했어. 심지어 사병을 긁어모으려는 야심 찬 장사치들을 위해 몸을 던지는 기사들도 있었지.
라이타니엔…… 위치킹의 탑이 무너진 지도 충분한 세월이 흘렀지. 나는 그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어. 그곳엔 오직 공포뿐이었고, 낭만이란 없었지.
그 어떤 시대라도, 수많은 사람들은 황야를 헤매야 해…… 재앙, 전쟁과 도시의 발전 모두가 이들을 밖으로 내몰고 있지.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검을 뽑으려 들지 않는 거지?
그의 흐릿해진 시야로는 상대의 표정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그저 무에나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무엇을 망설이는 것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이지?
빗속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희미한 황금빛만이 그의 시야에 녹아들 뿐.
그는 온 힘을 다해 숨을 쉬었고, 생명이 싸늘한 갑주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상을 위해 투신한 모든 열의의 마지막은, 저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퍼지는 비웃음이던가.
그것은 역경에 처한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때, 옆에서 조소하던 무심한 구경꾼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들을 보며 느끼는 슬픔은, 죽고 다친 이들을 보며 느끼는 슬픔과 동등하니.
그것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을, 나의 필사적인 몸부림에도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던 그들의 비웃음이다.
몸이 박살 나 가루가 될 때까지 부딪혀도, 그 이외의 반향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
비는 그칠 줄 몰랐으며, 그는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였다.
그는 여름의 소나기를, 비에 젖은 숲을, 개울에 흘러가는 들꽃 화환을 떠올렸다.
그 나날 속에서 마지막으로 꾸었던 단꿈을.
니어여. 그는 생각했다. 너는 이렇게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그 길고도 헛된 여정의 끝에…… 네가 결국 그랜드 나이트 영지로 돌아가야만 했던 순간 같군.
무에나, 네가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가장 빛나던 순간에, 마치 심연에 빠진 불꽃처럼 갑작스레 지워진 그 두 이름.
15년간, 감정회는 너의 추궁에 무대응으로 일관했지.
니어 가문의 이들이, 그토록 빛나던 이들이 카시미어에게 거부당했어…… 이 어두운 밤 속에 가라앉은 이 나라는, 그들의 한 줄기 광휘마저도 용납할 수 없었던 거야.
이에 넌 무척이나 실망했겠지……
너는…… 그들이 저 먼 이국땅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지조차 모르겠군.
……뭐라고?
훗……
몇 년 전, 라이타니엔에 잠입했을 때…… 그들을 우연히 만났다.
……
톡.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에선, 잉크가 한 방울 번져 있었다.
20년에 달하는 의문, 그에게는 편지 한 통을 보낼 기회조차 없었다.
20년의 침묵 끝에, 그는 이것이 출정 기사에게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른 이들에게, 이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나?
……
츠시보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기나긴 침묵 속에서, 무에나는 이어질 비난의 한마디를, 혹은 그보다 더 오랫동안 기다려 온 후회 한 마디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한숨과도 같은 무거운 숨소리와 이를 뒤따르는 가벼운 금속음뿐이었다.
출정 기사의 몸이, 지면에 깊숙이 박힌 창에 기대어졌다.
마치 그들이 황야에서 수없이 많이 보아 왔던 텅 빈 갑옷처럼.
곧이어, 무에나는 빗속에서 무릎을 꿇고 한때 같은 길을 걸었던 자에게 기사의 예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