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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퍼레이터 레코드브릿지

어린 시절의 크세니야는 인생의 모든 소중한 순간을 기록할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수년이 흐른 뒤 과거를 되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등장 오퍼레이터: 스네구로치카, 크라운슬레이어, 켈시


???

없어, 없잖아…… 아무리 봐도 없어.

빈 비디오테이프가 하나도 없었다. 이건 아니고, 저것도 이미 사용한 거고…… 캐비닛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그녀는 새 테이프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

좀 더 일찍 알아차려야 했다.

어쩌면 이제 근방 백 리 안에선, 이렇게 먹을 수도 없고 사용할 수도 없는 비필수품을 파는 곳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들이 곧 들이닥칠 것이다.

???

잠깐, 어쩌면……

그녀는 한쪽에 어지럽게 쌓인 비디오테이프들을 바라보았다. 테이프마다 번호와 날짜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어서, 그 안에 기록된 세월을 알려주었다.

그중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 그것들을 지우고 새로운 내용을 녹화하면 될 것이다.

???

그래, 이렇게 하자.

번호 '1'이 적힌 비디오테이프가 마침 그녀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카메라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나이 든 교사

어디 보자, 이렇게 쓰는 건가? 이런 최신식 물건은 도통 어떻게 쓰는지를 잘 모르겠단 말이지…… 아! 이미 녹화가 시작된 모양이로구나.

나이 든 교사

흠흠, 오늘은 매우 기념할 만한 날입니다. 비록 남작님께서 직접 참석하시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대신 벨랴코프 준위님을 표창 수여식에 참석하라 보내셨습니다…… 보세요, 준위님이 오셨습니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인, 오래된 화면이 한 차례 흔들리더니, 그리 멀지 않은 야외 운동장에 설치된 작은 시상대를 비췄다.

찬바람 속에 겨울옷을 껴입은 아이들은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두꺼운 군복 차림의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군인

지난 수년 동안 남작 각하께서는 폐하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응하여, 재능은 있으나 가난한 출신으로 인해 고생하는 아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고, 조국의 기둥이 될 인재를 육성하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셨습니다.

군인

폐하의 크나큰 은혜 아래…… 크세니야 마르코브나 넬류도바 학생이 우리나라 최고 명문인 제국 이공대학에 합격했음을 자랑스럽게 알리는 바입니다!

군인

남작 각하의 후원을 받은 수십 명의 천재 소년 소녀 중에서도, 이 소녀는 단연코 가장 뛰어난 인재입니다. 아이야, 앞으로의 네 목표는 무엇이니?

소녀

저는 최고의 연구소에 들어가서, 우르수스 전체를 이롭게 할 성과를 연구하고, 그걸 바탕으로 위대한 우리나라를 더욱 아름답고 강하게 만들 거예요!

앳되지만, 단단한 소녀의 목소리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고, 그녀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교장

좋구나, 아주 좋아! 라구노프 선생님께서 모두를 대표해 이 소녀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위로 모시겠습니다.

단상 위에 있는 사람의 안내에 따라 카메라 렌즈는 앞으로 이동했고, 이내 화면에 붉게 상기된 한 얼굴이 나타났다.

나이 든 교사

받으렴. 이건 선생님들이 함께 네게 사주는 거란다. 우리가 너의 선생님이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 어쩌면 이건 내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겠구나.

나이 든 교사

아이야, 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단다. 앞으로도 이런 순간을 많이 맞이하게 될 테니, 그때 이걸로 그런 의미 있는 순간들을 기록해 두렴.

나이 든 교사

사용법은 알고 있니? 여기를 누르면 녹화 시작이고, 그건…… 어이쿠, 안 돼! 그건 정지……


화면이 끊겼다. 이후 짜증 나는 잡음만이 적막한 실내에 울려 퍼졌다.

???

이건…… 누구지?

???

아, 그래, 그렇구나……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이런 구식 카메라엔 비디오테이프 안의 내용을 지우는 기능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지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모터 소리와 테이프 마찰음이 멈추길 기다린 뒤,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기존의 내용이 전부 덮어씌워졌다. 깜빡이던 'REC' 표시등이 꺼지자, 그녀는 마침내 빈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손에 넣게 되었다.

???

이렇게 하면 돼.

그녀는 곁눈질로 산처럼 쌓인 나머지 비디오테이프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

……다른 테이프에도, 이거랑 같은 게 있을지도 몰라.

내용에 아무런 의미도 없고, 자리만 차지할 뿐인 것들.

그녀는 또 다른 테이프로 손을 뻗었다.


둥근 얼굴의 소녀

크세니야, 그 이상한 기계 그만 좀 만지작거리면 안 돼? 그러다가 실수로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울 거잖아!

화면 밖의 목소리

괜찮아, 안 떨어지게 꽉 잡고 있으니까. 너야말로, 체육 대회 때처럼 또 뒤로 자빠져서, 어렵게 산 새 옷 더럽히지 않게 조심해.

흔들리는 화면 속에 눈 덮인 마을이 나타났다. 등에 장작을 잔뜩 진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한 움큼 집어 던졌다.

둥근 얼굴의 소녀

또 그 일을 가지고 놀리다니! 올해는 키가 많이 컸으니까, 다시 붙으면 너한텐 절대 안 질 거야!

화면 밖의 목소리

그래? 그럼, 한번 붙어볼까?

둥근 얼굴의 소녀

붙어보자고! 네 가느다란 팔다리 좀 봐…… 거기 이공대학인지 뭔지에선 밥도 안 줘?

화면 밖의 목소리

그럴 리가. 거기 식당에선 매일 흰 빵이랑 따끈한 고기 수프가 나와! 그냥…… 가끔 바빠서 못 먹을 뿐이야.

둥근 얼굴의 소녀

다른 학생들은 모두 도시에서 온 데다, 나이도 너보다 많지? 혹시 걔들이…… 너 따돌리진 않아?

화면 밖의 목소리

상관없어. 원래도 걔들이랑 어울리는 거 안 좋아하니까. 오히려 책 볼 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 좋은걸.

둥근 얼굴의 소녀

넌 아직도 그렇게나 책 보는 걸 좋아하는구나. 그러다 눈이 나빠져서, 교장 선생님처럼 엄청 두꺼운 안경 쓰지 않게 조심해.

화면 밖의 목소리

도저히 안 볼 수가 없어. 거기엔 대단한 사람들이 많단 말이야.

둥근 얼굴의 소녀

너보다 더 똑똑해? 그럼 너 이제 전교 1등 아니야?

화면 밖의 목소리

그건…… 아직 모르겠어. 올해 종합 평가 순위가 아직 안 나왔거든…… 대신 교수님이랑 함께 교외 연구에 참여하는 자리를 하나 땄어, 전교에서 나만 말이지!

화면 밖의 목소리

그래서 다음 방학에는 못 돌아올 거 같아…… 아, 너희 집 도착했다.


순간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카메라가 촬영자의 주머니에 급하게 들어간 듯, 겨울의 맑은 하늘을 올려 비추고 있었다.

화면 밖의 목소리

자, 여기 내 장작도 같이 가져가.

둥근 얼굴의 소녀

왜 그래?

화면 밖의 목소리

헛간이 텅 비었잖아, 그냥 가져가. 네 할아버지도…… 살아 계실 적에 우리 집을 많이 도와주셨어.

둥근 얼굴의 소녀

그럼 너희 쓸 건 충분해?

화면 밖의 목소리

걱정하지 마. 난 에너지 전공이잖아, 절대 얼어 죽을 일은 없어.

화면 밖의 목소리

몇 년만 지나면, 내가 지금보다 훨씬 안전하고 값싼 새로운 에너지를 사용하는 난로를 연구해 낼 거야. 그러면 더 이상 산에 장작 주우러 가지 않아도 되고, 집도 늘 따뜻할 거고, 아무도 추위에 떨지 않게 될걸.

둥근 얼굴의 소녀

……그건 네가 그냥 귀족들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화면 밖의 목소리

음, 일부는 그렇긴 해. 그 사람들이 우리 같이 배경 없는 애들 후원해 주는 건, 사실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듣고 그걸 갖다가, 윗사람한테 자기의 공인 양 보고하기 좋아서니까……

화면 밖의 목소리

그래도 다 빈말인 건 아니야. 왜냐하면, 난 엄청 대단하니까…… 후훗, 이런 건 분명 나중엔 식은 죽 먹기일 거야.


???

역시, 이것도 똑같네.

정지, 되감기, 녹화.

이내 내장돼 있던 모터가 멈추며, 이 비디오테이프에 담겼던 내용도 깔끔히 지워졌다.

???

……

창밖에서는 북풍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녀는 재차 다른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필라인 연구원

데이터는 다 확인했어. 확실히 우리가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난 이쪽 변수를 조정해 보는 걸 제안하는데…… 음?

멀리서 다른 연구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가 무언가를 느낀 듯, 카메라 쪽을 바라봤다.

앳된 목소리

……앗!

카메라 렌즈는 잘못하다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방향을 틀었고, 당황한 모양새로 허겁지겁 각종 장비 사이를 가로지르며, 여기저기 널브러진 전선들을 뛰어넘어갔다. 그러다가 결국 외진 구석에서 멈춰 섰다.

앳된 목소리

아…… 크세니야.

화면에 벽 모퉁이 그림자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소녀가 나타났다.

그 소녀는 리베리였다. 생김새는 첫 번째 비디오테이프의 시상대 위 소녀와 매우 닮았지만, 키가 훨씬 컸고, 콧대에는 검은 테 안경이 걸려 있었다.

소녀

류다? 무슨 일이야…… 그건 또 왜 꺼낸 거야? 당장 내려놔! 여기선 촬영 금지야, 소장님한테 들켰다간 우리 모두 욕먹는다고!

그러자 렌즈는 순순히 바닥을 향했고, 소녀의 붉어진 눈가가 화면에 잠깐 스쳐 지나갔다.

앳된 목소리

혹시 또 꾸중을 들은 거야? 아빠가 그러던데, 네가 무슨…… 권한을 뺏겼다면서?

소녀

급하게 성과를 내려다…… 잘못을 저질렀거든.

소녀

난 지금 학교로 돌아가서 일리아 선생님 대신 자료 하나를 가져와야 해. 돌아오면 놀아줄 테니까, 그동안 얌전히 있어. 알겠지?

앳된 목소리

심부름 가는 거야?

소녀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뛰어나고, 훨씬 더 중요한 일을 맡고 있으니까.

앳된 목소리

근데 그 사람들은 다 어른이잖아! 우리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면서! 이건 그냥 괴롭히는 거 아니야?

어린 촬영자는 분을 참지 못하고 카메라를 마구 흔들었고, 흔들리는 화면 속에 소녀의 씁쓸한 웃음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소녀

아니야. 어떤 격차는…… 나이랑은 그다지 상관없어.

소녀

예전엔 주변 사람들이 나더러 천재라며, 자기들이 본 애 중 제일 똑똑하다고 했어. 나는 그 말을 믿었거든.

소녀

하지만 우르수스는 넓고, 나보다 더 똑똑한 천재는 얼마든지 있어. 사실…… 난 거기에 끼지도 못해.

잠시 후, 화면 밖의 소녀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

……뭐, 심부름이라도 좋아!

소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도움이 된다면야 그걸로 충분해.


???

하…… 정말 웃기네.

정지, 되감기, 녹화…… 그녀의 손놀림은 점점 능숙해졌다.

지워진 비디오테이프는 대충 한쪽에 던져졌고, 또다시 새로운 테이프가 슬롯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

오늘은…… 얼굴은 안 찍을래. 요 며칠 관리를 제대로 못 했더니, 꼴이 말이 아니야.

소녀

혹시라도 소식을 놓칠까 봐, 아직 지난번 여관에 머물고 있어. 그런데 돈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내일은 짐을 싸서 나가야 해.

소녀

여전히 아무한테도 연락이 닿지 않고, 신청도 통과되지 않아. 그 사람들은 매번 같은 변명만 되풀이하지…… 기밀이라면서 말이야.

소녀

……돌아가는 것도 허가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도 허가되지 않아. 딱 나한테만.

소녀

확실히 나는 다른 사람들보단 못해. 하지만 하찮은 잡일이라도, 하다 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게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소녀

내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

소녀

……

소녀

어쩌면 이게 더 나은 걸지도 몰라. 이젠 내 주제를 파악하고, 다음을 위해 준비를 해야지. 그렇지만 류다한테는 좀 미안하네…… 앞으로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소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고, 창밖에서 스며든 햇빛이 그녀의 두 눈이 다시금 빛나도록 비추었다.

소녀

결심했어. 내일 짐을 정리하고, 아르툠 씨가 소개해 준 그 실험실에 갈 거야.

소녀

그 사람들의 자료를 봤는데, 켈시 소장님이 계신 곳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은 곳 같아.


희미한 외침

……!

문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외침이 구슬픈 바람 소리에 섞여 귀를 파고들었다.

다시 한번…… 정지, 되감기, 녹화.

점점 무감각해지고 기계처럼 반복되는 작업 속에서, 또 하나의 지워진 비디오테이프가 한쪽에 던져졌다.

???

……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짧은 잡음이 들린 뒤, 화면에 어두운 방과 여윈 체형의 여성이 비쳤다.

비록 그녀의 시선은 흔들리고 얼굴은 창백했지만, 두 뺨에는 희미하게 붉은 기가 감돌았다. 방구석에 굴러다니는 빈 병들이 그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젊은 여성

나도 알아…… 내가 기록을 남기지 않은 지 꽤 오래됐단 걸…… 최근 몇 년 동안은 찍을 만한 게 정말 없었거든.

젊은 여성

연구소를 옮긴 게…… 벌써 다섯 번째야. 여기 온 지도 반년이나 지났네.

젊은 여성

내 연구 과제가 힘들게 승인됐을 때만 해도, 여기라면 뭔가 다를 줄 알았어…… 결국, 무엇도 다르지 않았지만.

젊은 여성

어제부로 내 연구가 중단됐어. 경비가 부족하니까, 더 중요한 프로젝트에 예산을 써야 한다고 하더라.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걸 해왔는데……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다가, 옆에 있던 액체를 한 컵 들이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젊은 여성

더 중요한 프로젝트라니…… 군대에 쓸 수 있는 것이라든가, 쓰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라든가…… 그 정도 차이겠네.

젊은 여성

지나이다는 떠났어. 더 이상 일을 감당 못 할 것 같다고 하면서…… 사실 알고 있어. 자기 연구가 결코 사람 죽이는 데 쓰이는 걸 원치 않아서라는 걸.

젊은 여성

나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 부모님은 이제 연세도 많으신 데다가, 여전히 내가 돈을 보내주기만을 기다리고 계신걸.

젊은 여성

그 숲이 남작의 사유지가 된 뒤로는, 숲에서 땔감을 줍는 것마저 큰 죄가 되어버렸어. 요즘 숯값이 얼마나 비싼데…… 내겐 이 돈이 꼭 필요하단 말이야.

그녀는 또 한 잔을 들이켰다.

젊은 여성

난 내일부터 새로운 연구팀에 가서, 그런…… 예산을 받을 수 있는 연구를 하게 되겠지.

젊은 여성

당분간은 더 이상 기록을 남기지 않을 것 같아.


분노에 찬 외침

없어…… 아무도 없다고! 그 자식들 전부 도망쳤어!

위엄 있는 목소리

쫓는 건 나중에 하고, 일단 흩어져서 보급품 같은 게 있는지부터 찾아보자.

위엄 있는 목소리

여기 먹을 게 있어, 양이 꽤 된다!

다급한 외침

난 위층 올라가서 약이 있는지 좀 보고 올게!

처음 그녀는, 고질병이 또 도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소리가 점점 또렷해지자, 이내 그것이 환청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이 왔다.

???

서둘러…… 서둘러야 해.

그녀는 꿈에서 깨듯 정신이 들었다. 지금은 이렇게 많은 빈 비디오테이프가 있으니,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두 마디 말을 남기는 것쯤은 충분할 것이다.

???

그런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

……

테이프를 넣으려던 손이 다시 힘없이 내려왔다.

그녀는 아무런 갈피도 잡지 못했고, 이제는 그 사실을 똑바로 마주해야 할 때였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시간을 질질 끌며, 낡은 테이프를 돌려보는 데 매달린 것도 결국 그 때문이었다.

이 카메라를 처음 손에 넣었을 때, 그녀는 카메라를 손에서 쉽사리 놓지 못했고,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전부 기록했었다. 한동안은 부모님이 몇 번씩 재촉한 뒤에야 겨우 내려놓고 식탁에 앉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자신이 카메라를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마지막으로 찍은 게…… 언제였지?

그녀는 테이프 더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과거라는 이름의 바닷속에서, 그녀는 날짜가 비교적 최근인 테이프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촬영한 마지막 비디오테이프였다.


여자

아, 화면이 나오네. 짐을 계속 화물칸에 넣어두는 바람에, 혹시 얼어서 망가진 건 아닐지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여자

여기는 브레스크 관할의 크라이니 세베르 중앙 광산지구 연구소인데, 내가 와 본 곳 중에서 최북단이야. 실은 내가 여기 온 지도 벌써 한 달은 됐는데, 그동안은…… 기록을 남길 기분이 아니었어.

여자

이런 곳엔 누구도 오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그 여대공이 각 연구소에 연락해서 인재 교류를 제안해서, 그렇게…… 하, 나 같이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다 묶어서 여기로 보내버린 거겠지.

여자

여긴 정말 아무것도 없어. 놀거리 같은 건 전혀 없고, 보급물자가 정기적으로 오긴 하지만 늘 같은 것뿐이야. 게다가 집으로 보내는 편지조차 몇 달은 걸리고.

여자

물론, 이건 다른 사람들이 나누는 잡담을 들은 거긴 해…… 난 이제 부모님이 안 계시니, 편지를 쓸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

여자

여기엔 중요한 연구 프로젝트는 하나도 배정되지 않아. 예산도 불쌍할 정도로 적은 데다가, 대부분은 심지어 우리 손에 실제로 들어오지도 않지. 그래서 난 최악의 상황도 각오하고 있었어.

여자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어…… 어쩌면, 이건 오히려 전화위복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그녀는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눈가에 잡힌 주름이 흘러간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자

여기는 연구소라기보단, 광산지구에 딸린 병원 겸 영안실에 더 가까워.

여자

여기로 보내진 사람이 아직 살아있는 상태라면, 어느 정도 뭔가를 해볼 순 있어. 지난 몇 년간 억지로 공부한 여러 분야의 지식에 감사함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야.

여자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라면…… 시신에 무해화 처리를 해야 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데 가담하는 것보단 나아.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여자

여기 연구원들은 누가 어떤 학파 출신인지, 어떤 집안에서 왔는지, 우르수스인지 아닌지 같은 건 따지지 않아…… 그저 자기 월급이 제때 지급되는지만 신경 쓸 뿐.

여자

자유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육지의 고립된 섬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까지 중 가장 큰 자유를 얻었어.

여자

광산이 가까이에 있으니까, 적어도 오리지늄이 모자랄 걱정은 안 해도 돼. 월급으로 경비를 보탤 수도 있고…… 중단했던 연구도 다시 이어갈 수 있어.

여자

여기저기 많은 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내 생각엔…… 바로 이곳인 것 같아.

여자

나도 과연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해봐야지. 어쩌면 여기서 성과를 내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있을지도 몰라……


???

그만…… 그만해, 그만!

이번 영상은 끝까지 재생되지 않았다.

그녀는 거의 미친 것처럼 비디오테이프를 슬롯에서 거칠게 꺼내서는, 플라스틱 케이스를 부숴버렸다.

그 과정에서 동상으로 갈라진 손가락이 날카로운 부분에 베여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봐봐! 그런…… 그런 건…… 완전히 악마나 할 짓거리라고!

???

그런데, 여기는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했었다니…… 어떻게 다를 수 있겠어? 어디든 똑같아! 어디든 다 똑같다고!

하나둘씩 비디오테이프가 찢겨 나갔다. 길게 잡아 뜯기며 나온 비디오테이프가 스며 나오는 피에 물든 모습은 마치 몸속에서 검은 내장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흐느꼈다.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태우듯 흘러내렸다. 그러다……

쿵!

심장을 내리치는 듯한 충격음이 울렸다.

놀란 목소리

어라, 이 문 잠겨 있어!

분노한 목소리

아직 사람이 있는 거야? 그 *우르수스 욕설* 놈들이 아직 남아 있어?

쿵쿵쿵!

분노한 목소리

문 열고, 당장 기어 나와!

분노한 목소리

아래에 도구가 있어! 내가 가져와서, 문을 부숴버릴게!

크세니야

아……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보라,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젠 모든 게 너무 늦어버렸다. 자신을 위해 몇 마디 유언을 남기는, 그런 사소한 일조차도 아직 하지 못했는데, 이미 분노한 감염자 광부들이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는 유령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크세니야

……됐어, 이거면 된 거야.

이대로 끝나도 괜찮으리라.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기다리는 동안, 문밖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층 목소리

야! 아래에 일손이 모자라! 빨리 와서 좀 도와줘!

문밖의 목소리

그럼, 이 방은?

아래층 목소리

렌킨이 신경 쓰지 말래, 그 겁쟁이들은 분명 다 도망갔을 거라고! 그보단 빨리 물자를 가져가는 게 우선이야!

문밖의 목소리

……그렇긴 하지, 지금 갈게!

그녀는 문밖의 사람이 떠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후, 모든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졌다.

크세니야는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 연구소는 마치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크세니야

하…… 하하……

크세니야

결국, 모든 게 내 뜻대로 흘러가진 않네.

결국, 그녀 스스로 직접 끝을 내야 할 것 같았다.

오랫동안 먼지투성이였던 카메라가 다시 켜졌고, 화면은 바닥에 얽힌 복잡한 선들을 스치듯 비췄다.

크세니야

……준비는 다 끝났어. 그 사람들이 창고의 폭약은 못 찾았나 봐…… 이제 내가 불만 붙이면, 여기서 있던 모든 잘못은 연기처럼 사라질 거야.

크세니야

지난 수십 년 동안 잘못으로 가득 찬 내 삶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거지.

크세니야

……

크세니야

라구노프 선생님이 내게 이 카메라를 주신 건, 나한테 '의미 있는 순간'을 기록하라는 뜻이었고…… 내가 끝내 뭔가를 이룰 거라고 믿으셨기 때문이었겠지……

크세니야

그런데 결국 이 카메라는 내가 일평생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만 증명하게 됐네.

크세니야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마 나겠지…… 왜냐하면, 결국 내가 탓할 수 있는 사람도, 본래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었던 사람도, 오직 나뿐이었으니까.

크세니야

더 많이 해야 했는데, 더 노력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 아니, 아니야! 아니야!

그녀는 갑자기 경련이 일어난 듯 몸을 떨더니,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채 울부짖었다.

크세니야

또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잖아!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어!

크세니야

결과가 분명 눈앞에 놓여 있고, 이미 완전히 실패했는데도, 자꾸 실낱같은 희망을 찾으면서 자신에게 발버둥 칠 구실을 만들어 주려고 하잖아!

크세니야

만약이란 건 없어,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의미 없어, 전부 다…… 의미 없는걸.

이미 할 말은 다 남겼다. 그런데 왜 자신은 아직도 이렇게 시간을 끌며 쓸모없는 소리나 하고 있는 걸까?

이젠 끝내야 할 때였다. 이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카메라가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더니, 기억이 가득 쌓인 무덤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마이크에 잡히는 소리가 멀어지며 흐릿해졌다. 여전히 '녹화 중'인 화면 속으로 희미하게 불꽃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보여줄 생각 없는 유서를 불태우려는 촛불이었다. 그 불은 곧 도화선이 되어 모든 것에 마침표를 찍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밝은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

크세니야! ……너 크세니야 맞지?


로도스 아일랜드 신기지, 오퍼레이터 숙소

크라운슬레이어

도착했어. 여기가 네 방이야.

스네구로치카

네, 고마워요.

스네구로치카

저기, 잠깐 앉을래요? 아직 방 정리는 하나도 못 했지만……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이야기를 좀……

크라운슬레이어

다음에. 난 곧 다른 임무가 있어서, 오래 있지 못해. 짐은 여기 둘게…… 음?

서류와 잡동사니가 가득한 종이상자 속, 낡은 휴대용 카메라가 구석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크라운슬레이어

이거 기억나…… 어릴 때 내가 가지고 놀기도 했었는데, 아직도 갖고 있을 줄 몰랐네.

스네구로치카

사실 버릴 생각이었는데, 크라이니 세베르를 떠날 때…… 끝내 버리지 못하고 챙겨 왔어요.

크라운슬레이어

그러고 보니, 후방 지원부 사람이 네가 구형 비디오테이프 몇 개를 구매 신청했다고 하던데. 여기에 쓰려는 거야?

크라운슬레이어

뭘 찍으려고?

스네구로치카

그게……

크라운슬레이어

그냥 물어본 거야.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크라운슬레이어

……그냥 네가 예전 취미를 다시 시작한 것 같아서, 어쩐지 좀 그리운 마음이 들었을 뿐이야.

스네구로치카

……이걸 다시 켜게 될 줄은 몰랐어요.

스네구로치카

며칠 전에 Mon3tr 씨와 박사님이 그때 있었던 일을 전부 알려줬어요. 설마…… 선생님들께서 정말로 돌아가셨을 줄은.

스네구로치카

예전엔 좀 더 치욕스러운 생각도 했었죠. 사실은 모두 무사히 잘 지내고 있는데, 그저 짐만 되는 저를 쫓아낼 구실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하고요.

스네구로치카

이후 소문을 듣고 나서는 휘말릴까 봐 겁이 나서, 매일 불안에 떨었죠. 심지어 엄청난 행운마저 도리어 제게 끈질기게 따라붙는 불운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조금만 벽에 부딪히면 남 탓, 세상 탓을 일삼기 시작했어요……

스네구로치카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이 카메라를 들었을 때는, 분명 죽으려고까지 했었고요.

스네구로치카

하지만 그때의 사람 중 오직 저 하나만 살아남은 이상…… 이 목숨은 이제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과 모두가 못다 한 연구를 완성 시키기 위해서라도, 전 꼭 살아가야만 해요.

스네구로치카

뻔뻔한 생각이라는 건 알아요. 아무것도 해낸 게 없는 제가, 무슨 근거로 감히 그 위대한 영혼들의 의지를 계승하겠다는 망언을 할 수 있겠어요?

스네구로치카

우습다는 것도 알아요. 이건 그저 제가 또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 구실일 뿐이겠죠.

스네구로치카

하지만 지금 전 아직 살아있으니…… 그냥 이렇게 생각하려고 해요.

스네구로치카

켈시 소장님이 남긴 연구가 조금 있는데, 운 좋게도 제가 그중 미완성한 일부를 이어받게 됐어요.

스네구로치카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컬럼비아의 학술지가 있는데, 나중에 논문을 완성하면 거기로 보내서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해 볼 생각이에요.

스네구로치카

저도 그쪽에서 답장이 올지, 또는 이 모든 게 정말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아까 류다가 뭘 찍을 거냐고 물었을 때도 대답하지 못했어요.

스네구로치카

그래도 저는, 어찌 됐든 간에……

스네구로치카

카메라로 계속 기록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