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지
황무지에 간 제시카에겐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고,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이 있었다.
등장 오퍼레이터: 제시카, 제시카 더 리버레이티드, 콜드샷
끼었나 봐요. 다리가 만져지는 거 보면……
끌어내자.
어미가 다치진 않을까요?
녀석들은 우리 생각보다 강해!
그럼, 당길게요!
당겨!
입과 코에 묻은 점액을 닦았더니 이제 숨을 쉬네요. 하지만 발굽이 너무 말랑해서 일어나 우유를 마실 수 없나 봐요. 우디 씨, 이제 어쩌죠?
기다려보자고.
아, 네……
……어떡해요, 아직도 못 일어서고 있어요.
너무 일찍 태어난 거야. 오늘 일만 아니었어도 원래 어미 배 속에서 보름 정도는 더 있었어야 했는데.
됐다, 우선 데려가자. 한동안 우리가 보살펴주면 돼.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일어서지 못하면요?
녀석의 운명을 함부로 가정하지 마, 제시카. 아까 얘기했지? 녀석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고.
……
우드로 씨! 우드로 씨! 캠프에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돌아와 주세요!
무슨 일이야?
싸, 싸움이 났어요!
제시카, 난 이 버든비스트들을 울타리 안으로 몰아야 하니 네가 먼저 가 봐.
제시카 씨를 보내시려고요? 캠프가 아수라장이라 제시카 씨가 가기엔 조금……
맞아요. 제가 가도 아마……
괜찮아. 이 녀석들만 해결하고 뒤따라갈 테니 어서 가 봐.
하지만 혹시……
제시카, 먼저 가보고 나서 얘기해. 너도 내가 방목하러 캠프를 떠나 황무지로 갈 때를 대비해서, 혼자 돌발 사건을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지.
봐주지 말고 시원하게 주먹을 날려.
어이쿠, 이번 발길질은 제법 아프겠는데.
잠시만 지나갈게요. 선생님들, 여기 모여 계시면 안 돼요.
제시카 씨, 조심해. 저, 저 사람들은 싸우기만 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다칠지도 몰라……
걱정 마세요. 그런데 왜 싸우는 거예요?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거죠?
나, 나도 잘 모르겠어.
이를 어쩐다……
이곳 일은 제가 알아서 해볼 테니까 먼저 돌아가 계세요.
(사람이 많이 몰려 있어서 무작정 뛰어들 수는 없겠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위에서라면……
소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낮은 오두막과 차량,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장작과 비계발판, 캠프 중심에 세워진 급수탑 등 캠프 내부 환경을 재빠르게 머릿속에 그렸다.
그리고는 이내 복잡한 건물들 사이로 선명한 '길'을 보게 됐다.
옆에 있는 텐트에서 밧줄을 풀어낸 그녀가 비계발판 위로 올라섰다. 그녀는 밧줄을 높은 곳에 묶은 후 가뿐하게 캠프 중심의 급수탑으로 이동했다.
몸을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혼란스러운 상황이 순식간에 명료해졌다.
아무래도 가운데 있는 두 사람이 사건의 주범인가 보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어쩌다 휩쓸려서 싸우는 것 같고.
저 두 사람만 제압한다면, 이 난투를 끝낼 수 있겠지.
탑 위에서 몸을 날린 소녀가 정확하게 인파 정중앙에 착지했다. 그녀는 옆쪽에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며 손목을 낚아채 상대를 제압했다.
소녀는 아래쪽에 깔린 상대를 꾹 누르며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멈추세요!!!
저기…… 저희 앉아서 대화로 해결하는 게 어떨까요?
이러시면 안 돼요. 황무지에 오셨으니 서로 힘을 모으고, 어떤 갈등이나 마찰이 생기더라도 서로 이해해야죠.
흥……
쳇……
크흠, 그래서 말인데…… 두 분이 캠프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면서 싸우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보세요. 누가 옳고 그른지 제가 대신 판단해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아가씨가 확실하게 누가 맞는지 판단해줘야 해.
네, 물론이죠.
두 달 전 얘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두 달 전…… 원한이 오랫동안 쌓인 모양이야. 하여간, 나도 참 둔하지. 진작 눈치챘어야 하는데.)
우리는 시장을 구경하며 결혼 후에 파울비스트를 키워 그 알을 팔지, 버든비스트를 방목하며 돈을 벌지 상의 중이었어.
두 분…… 결혼을 앞둔 사이셨어요……?
그래, 당연히 이맘때쯤 결혼해야 하지 않겠어? 더 늦었다간 아이가 내년 겨울에나 태어날 텐데!
그러니까…… 결혼 후에 파울비스트를 살지, 버든비스트를 살지 고르다가 싸우신 거예요?
그래!
그게 싸우면서까지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인가요?
당연하지!
약간 혼란스러워서 그런데…… 조금만 더 자세히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말 못 할 고충이 있을지도 모르니…… 얘기를 더 들어보자.)
내 생각엔 버든비스트를 키우는 게 맞아. 파울비스트로 몇 푼이나 벌겠어?
무슨 소리! 당연히 파울비스트를 키워야지! 버든비스트는 황무지에 가서 방목해야 하는데, 어떻게 널 혼자 캠프에 두고 가라는 거야!
내가 내 몸 하나 못 지킬 것 같아?!
일어나지 마시고…… 하실 말씀이 있으면 앉아서……
남자도 거뜬히 이겨 먹는 여자를 누가 걱정한다고!
선생님, 지, 진정하세요. 일어나지 마시고 앉아서……
입씨름할 게 뭐 있어. 싸워서 이긴 사람 말에 따르면 되잖아!
싸워라, 싸워라!
다들 소리 지르지 말고 진정하세요. 어쩌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을까……
설마…… 당신, 당신이 나가 있는 동안 내가 배신할까 걱정하는 거야?
그게 무슨 헛소리야!
화내지 마시고 대화를……
(다시 싸우면 안 되는데……)
그럼 도대체 왜 그러는데?!
(이런, 역시 싸움을 피할 수는 없는 건가……)
젠장, 몰라서 물어?
음……
두 사람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서로를 째려보자, 소녀는 긴장한 듯 손을 꽉 쥐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거야 당연히……
오랫동안 밖에 나가 있으면 당신이 보고 싶을 테니까!
어?
진심 어린 말이네. 아주 감동적이야.
문제를 해결해줬으니 이제 대가를 치를 차례겠지? 캠프가 입은 손해는 어떻게 보상할 건가?
제시카, 네 생각은 어때?
그……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좀 울고 싶어요……
제시카……?
두 분이 헤어지기 싫어서…… 흑…… 싸웠다니…… 정말 이상하고 혼란스러운 광경인 건 맞지만……
하지만 저, 저는……
으아앙……
왜, 왜 울고 그래? 자기야, 이를 어쩌지?
알겠어, 더는 안 싸울게! 에고, 부탁이니 제발 울지 마…… 봐, 우린 이미 화해했어!
그래! 맞아! 이렇게 손을 꼭 잡고 있잖아!
안 되겠어요…… 화해한 모습을 보니 누, 눈물이 더 쏟아질 것 같아요……
흐윽……
자, 수건으로 눈물 좀 닦아……
……죄송해요, 우디 씨. 울기만 하느라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네요.
괜찮아. 조급해할 필요 없어. 아직 여기서 배울 게 많으니 천천히 하면 돼.
들어오자마자 울고 있는 제시카를 보게 되다니. 하여간 너도 참. 애들을 혼낼 땐 그렇게 몰아세우면 안 된다니까.
마일스 씨…… 전 그것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그게……
울고 싶으면 울어. 마일스, 울타리 일은 어떻게 됐어?
확장 공사는 마쳤어. 어미와 새끼에게 '스위트룸'을 내주고 둘 다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여물을 아주 엄청 두껍게 깔아줬지.
지금 보러 가도 될까요?
저녁부터 먹고 가. 밥 먹으면서 우리에게 네 '영웅담'을 들려줘야지.
듣기로는 씩씩하게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밧줄을 타고 인파 속에 착지해 순식간에 모두를 제압했다고 하던데.
요, 용병일 때 배웠던 것들인데…… 왠지 그 방법이 통할 것 같았거든요.
어머, 내가 들은 건 다른 버전인가 보네. 사람들이 핏대를 세우며 싸우는데, 네가 눈물 몇 방울 흘리니까 다들 싸우던 걸 멈추고 널 달랬다던데.
어쩐지 눈이 빨갛더라니. 그게 네 비장의 무기였구나?
그, 그땐 저도 모르게 그만…… 역시 그러지 말아야 했어요.
사실 옆에서 파울비스트를 사야하냐, 버든비스트를 사야하냐 싸우는 걸 들으면서도 전혀 끼어들 수가 없었어요. 제게는 전부 낯선 내용이었거든요……
제가 잘 판단했다면 싸움도 더 빨리 끝났을지도 몰라요.
됐어, 네가 그런 걸 어디서 배울 수 있었겠어? 넌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된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간단해. 총을 꺼내서 하늘을 향해 두 번 쏘는 거야. 그럼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네 눈치를 살필걸.
아, 이거 우디 이야기 아니야? 예전에 네 식당에서 그런 적이 있었잖아.
맞아, 우디 말고 누가 그런 행동을 하겠어?
어떤 방법이든 간에 사건만 해결하면 그만이잖아.
우디 씨, 마지막에 그 사람들과 무슨 얘기를 했나요? 일언반구도 없이 돈을 보상해주고 조용히 떠났잖아요.
주제 파악하고 캠프에 남든지, 아니면 황무지에 가서 알아서 입에 풀칠하라고 했지.
그, 그건 너무 독단적이잖아요?
제시카, 캠프의 이런 사소한 일들은 하나하나 따지기가 어려워. 그러니 우디처럼 단칼에 해치우는 게 좋은 방법이지.
그렇군요……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다음에는…… 저도 우디 씨의 방식대로 해볼게요.
관둬.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넌 내가 아니잖아.
……맞아요, 전혀 비교할 바가 못 되죠. 우디 씨는 이곳에 오래 계셨잖아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 됐다.
그만들 해. 밥상에선 인상 쓰는 거 아니다? 자, 제시카. 식기 놓는 것 좀 도와줘.
앗, 네……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나가 남네?
헬레나 씨, 남는 식기는 제가 다시 갖다 놓을게요.
무슨 소리야. 내가 제대로 세어봤는데. 우리 다섯 명이잖……
……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인다)
헬레나 씨, 그……
……
하아…… 옛날 버릇이 나왔네…… 얼른 먹자.
휴…… 어서 일어나야지, 아가야……
이번 달이 지나면 우디 씨가 황무지로 방목하러 갈 거란 말이야. 이렇게 약해서 무리를 쫓아갈 수 있겠어?
제시카? 늦었는데 왜 아직도 여기 있나?
금방 갈 거예요.
정말로? 지난번에도 금방 간다고 해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있었잖아.
헬레나 씨는…… 주무세요? 아까는 제가 눈치가 없어서. 정말 잘못 가져온 줄 알고……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 아직도 밥 먹을 때 있었던 일을 생각 중이었어?
헬레나 씨는 제가 황무지에 온 이후로 늘 잘 챙겨줬어요. 하지만 전 친구라면서 헬레나 씨의 기분을 눈치채거나, 감정을 헤아려주지 못했죠……
리온 씨와의 이별이 모두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지 제일 잘 알면서도……
들어와. 헬레나는 괜찮아. 그리고 그게 네 탓도 아니잖아?
우디 씨…… 정말 다음 달에 떠나는 거예요?
그래, 계절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하지만, 전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다고 생각해요……
두 달뿐이야. 그동안 다들 널 도와줄 테고.
그렇지만…… 주변 사람의 감정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캠프 사람들을 돌볼 수 있겠어요……
제시카…… 그렇게 걱정된다면 떠나기 전까지 더 많이 가르쳐줄게. 앞으로 더 많은 임무를 맡길 테니 마음의 준비나 단단히 해.
전 당연히 괜찮지만…… 그럼 우디 씨가 매일 처리해야 할 일이 늘어나잖아요……
걱정하지 마. 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잠이 많지 않으니까.
우디 씨……
할 말이 있으면 얘기해.
잠을 적게 주무시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진 몰랐어요.
아쉽게도 이참에 나쁜 소식을 전해야겠어. 내가 떠나면 너도 매일 이 시간부터 순찰하고, 소등하고, 설비를 점검해야 해…… 캠프에는 네가 걱정할 일이 산더미일 테지.
우디 씨…… 전 정말 걱정돼요. 제가 이 일을 잘해낼 수 있을까요?
음…… 그건 이번 달 네가 보여주는 거에 달렸지. 용병 생활을 그만둔 후로 오랫동안 그 총을 잡지 않은 것 같던데. 어색하진 않고?
그…… 숲에서 매일 연습했어요.
황무지의 전투는 네가 블랙스틸에서 겪었던 전투와는 천차만별일 거야. 기존의 훈련법은 적절치 않지. 게다가 캠프에는 블랙스틸처럼 엄청난 장비도 없고.
우디 씨는요? 우디 씨는 어떻게 했어요?
앞을 봐.
으음……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자세히 봐.
저건……
늪은 어둠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신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이 들어왔다.
……유리네요.
맞아. 한 방랑 메딕으로부터 빈 앰플 병 몇 개를 받아와 과녁을 만들었지. 맞힐 수 있는지 한번 시도해 봐.
저는……
소녀는 쥐고 있던 총을 들고 숲에서 어른거리는 희미한 빛을 향해 어렵게 조준했다.
후……
좋아. 이번엔 더 멀리 있는 걸 맞혀봐.
네……
연속적인 총소리와 함께 숲에선 유리 깨지는 소리가 잇따라 어렴풋이 들렸다. 머지않아 반짝이는 불빛은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얼마나 빠르게 흔들리는지 조준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소녀는 숨을 죽인 채 마지막 사격을 준비했다.
제시카……
네?
진심으로 내가 맡긴 일을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할 이야기가 있는 거라면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우디 씨.
나도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요즘 네 고민으로 어렴풋이 느꼈달까. 넌 네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것뿐이라는 걸.
……우디 씨,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제시카, 이곳 생활은 지금껏 네가 겪은 일과 완전히 달라. 그러니 적응하기 어려운 게 당연해.
지난 몇 달간 캠프 사람들과 교류할 때, 넌 노련한 개척자처럼 보이고 싶어 했지. 우리와 대화할 때도 넌 오랜 친구처럼 행동하려 했고.
하지만 제시카, 넌 여기 온 지 반년밖에 안 됐어. 우리를 알게 된 것도 고작 반년이라는 거고.
제가 이곳 생활에 하루라도 빨리 적응할 수 있게 성장하길 바라시는 거 아니었나요?
성장한다는 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거지,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야.
삶은 퍼즐이 아니야, 제시카. 적응한다는 것 역시 남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 아니지.
우디 씨, 그 평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지금껏 제가 해온 일을 전부 보셨잖아요.
……그럼 마지막 병을 쏴봐.
우디 씨……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는걸요.
우선 훈련부터 마치자고.
우디 씨……
알겠어요…… 우디 씨 뜻에 따를게요.
소녀가 다시 숲 속의 유리병을 조준했지만, 몇 번의 시도에도 유리병을 명중시키지 못했다.
그 순간, 병이 반사해낸 희미한 빛에 그녀의 동공이 수축했다.
……
실패했군.
우디 씨…… 이번엔 실수였어요. 다음엔 꼭 맞혀보일게요.
제시카, 너도 내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잖아. 난 네 사격 수준에 맞게 과녁을 배치했어. 평소대로라면 모든 과녁을 명중시켰어야 했지.
하지만 넌 그러지 못했어.
우디 씨의 말에 제가 동요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럼 아닌가?
……
제시카, 난 걱정이 돼. 네가 강인해서 자신이 겉돈다는 사실을 고집스레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개척지에 온 너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인지 모르겠어.
어쩌면…… 넌 개척지에서 생활할 준비가 된 게 아니라, 그저 더 이상 블랙스틸에 남고 싶지 않았을 뿐일 지도 몰라.
저……
저는…………
노인은 주머니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 높이 던진 후, 재빠르게 손등 위로 잡아챘다.
그 동전으로 뭘 하려는 거예요?
머리로는 널 네 가족에게 돌려보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네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하늘에 운명을 맡긴 거야.
앞면인지 뒷면인지 맞혀봐.
앞면이면 어떻게 되는데요?
앞면이면 계속 이곳에 남는 거야. 뒷면이면 네가 돌아갈 수 있도록 사람을 붙여줄게.
이건 너무해요, 우디 씨. 이런 걸 저 대신 결정하는 게 어딨어요?
내가 아니라 동전이겠지.
……그게 그거잖아요.
어서 골라, 제시카. 내가 한다면 하는 성격인 건 너도 알잖아.
싫어요…… 저는……
……
맞아요……
우디 씨 말대로 좌절을 느낀 건 사실이에요.
제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도 인정할게요. 개척지 생활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해서 저에겐 완전히 새로운 일이나 다름없었어요.
버든비스트를 키우고, 울타리를 고치고, 새끼들을 돌보는 일 중…… 제가 잘하는 건 하나도 없어요. 수년간 블랙스틸에서 배운 기술들은 이곳에선 거의 도움이 안 됐고요.
후회하는 거야, 제시카?
아뇨, 우디 씨. 전 후회하지 않아요. 그리고 앞면이든, 뒷면이든……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이 세상에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슨 일을 겪든 물러서지 말자고 저 자신을 다독이는 것뿐이에요.
사람은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해요. 제가 남기로 한 이상 전 남을 거예요. 그 작은 동전이 제 결정을 대신해줄 수 없어요.
게다가…… 저는……
뭔데?
저는…… 여러분과 좀 더 함께하고 싶어요.
네 할아버지가 인생에서 사라졌다 해서, 꼭 다른 사람으로 채워 넣을 필요는 없어.
죄송해요……
……
제시카, 넌 참 바보 같다니까.
우디 씨……
이건 단순한 작은 동전이 아니야.
노인이 팔을 들어 올린 후에야 소녀는 그 손등에 올려져 있는 금속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아침 햇살 아래, 중앙에 별이 조각된 도톰한 둥근 금속품이 찬란하게 빛났다.
컬럼비아에서 개척자들은 침입과 위협으로부터 캠프를 지키기 위해 신뢰하는 사람에게 이 금속품을 주었다.
그건…… 우디 씨의 보안관 배지잖아요?
이젠 네 거야. 넌 네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넌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어.
네……?
절대 물러서지 않는 것. 그거야말로 미래를 위한 유일한 준비물이니까.
이리 와. 내가 달아주지.
……제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우디 씨?
물론이지. 그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람만이 그들을 위해 싸울 수 있는 법이니까.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난 알고 있었어.
우디 씨, 우디 씨가 떠나 있는 동안 캠프의 모두를 잘 챙기겠다고……
약속할게요. 반드시요.
소녀는 가슴팍의 배지를 만지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숲에서 들려오는 짐승 울음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깊은 숲에서부터 한 무리의 버든비스트 행렬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의 가장 끝엔 비틀거리지만 무척이나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새끼 버든비스트 한 마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