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8-11눈꽃, 까맣게 영토를 물들인
탈룰라는 우르수스에서 가장 두렵다고 알려진 황제의 근위병을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죽음과 공포, 그리고 그림자 깊은 곳에서 안부를 전해왔다.
훼이지에에게
눈은 녹지 않았어. 봄도 오지 않았고.
이번 봄은 아무래도 오지 않을 것 같아.
고개를 들고 촛불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불을 껐다가 어둠 속에서 또다시 불을 붙이곤 해.
겨울이 어서 지나가야 할 텐데. 이대로 겨울이 끝나버리지 않으면, 우리 모두 이 눈에 묻혀버릴지도 몰라.
어서, 어서 지나가 주길……
2월 21일
탈룰라, 무슨 일이야?
……
뭐라고?
요 근래 부쩍 풀이 죽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너희들과 함께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예전의 너는…… 좀 더 활발했다고 하던데.
어깨에서 힘을 뺀 탈룰라는 좀처럼 보기 어렵지. 방금 한 말을 대위님한테 해보는 건 어때, 적당히 말이야.
엄두가 안 나는데.
패트리어트도 말처럼 그렇게 무서운 분이 아니야. 방패병들은 원래 저러니까 신경 쓸 것 없어.
말을 아끼신 것도 목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니까……너희에겐 무언의 압박이 됐을지도 모르겠네.
내 상태라면…… 걱정하지 마.
……그저 생각할 게 많아서 그런 것뿐이니까. 우르수스 도시들에 가까이 접근하다 보니 좀 더 고민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거든. 생각할 게 많아져서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나 보네……
맞아, 물도 식량도 부족하고 일손도 충분하지 않아,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버틸 수 없을 거야.
맞아, 그래서 외부 세력의 움직임에 좀 더 촉각을 세워야 해.
현지 감염자 마을과 세력에 최대한 빨리 연락해 볼 생각이야.
우리의 행적을 추적하려는 자들 또한 분명 있을 거야…… 자칫해서 놈들의 덫에 걸렸다간 설원을 영원히 떠나야 할지도 몰라.
듣기만 해도 끔찍하군.
그렇겠지. 하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꼼꼼히 세운다면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는 피해를 줄이는 게 급선무다.
부대를 분산시키면 좀 더 은밀히 움직일 순 있겠지만 대신 통신이 쉽지 않을 거야.
맞아, 빼앗아온 우르수스의 통신 설비를 쓸 수도 없고, 놈들의 송신 설비는 손에 넣을 수 없으니.
그렇게 되면 아군의 연락책과 정찰대원이 불필요한 위험에 빠지게 될 거야.
유격대의 암호를 배우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연락 설비를 모두 갖추려면 우리는 반드시 프로토타입을 손에 넣어야 해……
탈룰라…… 탈룰라! 정찰대원이 당했어!
별거 아니잖아, 그런 건 알아서……
시끄러, 지금까지와는 달라! 적을 알아내기도 전에 아군이 쓰러졌단 말이다!
정찰대원의 위치를 파악한 후 정확히 공격했어. 이건 보통 감염자 감시팀의 실력이 아니야……!
전우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사소한 것도 지나칠 순 없지.
눈의 악마, 현장으로 안내해.
방패병, 아무래도 상대는 우르수스 군단 소속의 부대 같아. 날 따라와.
알겠다!
명심해, 선발대라도 신중히 행동해야 해. 어설프게 처리하면 더 큰 화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된다!
명심하지!
통신병, 패트리어트에게 이 소식을 알려라!
가서 프로스트노바 누님을 불러…… 윽! 커헉……!
콘드라샤!!
너 이 자식!
눈의 악마!
윽!!
이, 이건 뭐야……?! 다, 당장 내려놔! 빌어먹을 창을 뽑아야 해!
(……검은색 창이 몸에서…… 자라 나고 있어?!)
(아, 아냐. 그럴 리 없어…… 어떻게, 제국이 키운 괴물이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지?!)
스으으으……
으, 윽…… 으윽!
허튼짓하지 마!
천벌을 받을 놈! 갈기갈기 찢어주마!
안돼……!
뭐 하는 거야? 왜 막는 건데!
넌 모른다…… 우리가, 우리가 누구를 상대하는지! 그것도 모르면서 개죽음 당하겠다는 거냐?
스으으으…… 후우우우……
겁먹은 건가? 아군이 이렇게 많은 데도?
(방패를 땅에 세게 내리친다.)
윽?!
죽고 싶은 거냐?!!
……저건……
우르수스 황제의 근위병이야!! 우린 다 **된 거라고!
……군단의 방패병마저 타락하다니.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명예롭게 죽을 기회를 주마.
진영을 재정비해라! 다른 전사들을 보호해!
모두 명심해라! 놈에게 한 치의 틈도 내줘선 안 된다!
스으으으……
공기 속에 공포심이 넘쳐흐르는구나.
네 곁의 감염자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
……난……
두려워하지 마라! 놈을 두려워할수록 놈은 더욱 강해진다.
놈은 언제든지 공격해 올 수 있다. 눈 크게 뜨고,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라!
……
또 허탕이로군. 이곳 도시들의 통신망을 몽땅 제거해야겠어. 쓸모없는 것들.
감염자.
으, 으윽……! 뭘 그리 우쭐대는 거냐! 너……
현지 주둔군에게 항복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네놈들의 입과 코를 베어 가겠다.
이, 이…… 입과 코를 베다니. 그건……
……데몬…… 얼굴을 망가뜨리는 데몬이냐! 소…… 소문이 사실이었어……!
저 녀석들이 데몬이라고? 사람을 죽이고 얼굴을 베어가서, 이름 없는 시체를 만든다는 그 데몬 말이야?!
대체 얼마나 오래 살길래…… 그 전설대로라면……놈들은…… 놈들은 데몬이 틀림없어!
아니, 놈들은 전설이나 페이 괴담에 나오는 데몬이 아니라, 살인자, 학살자일 뿐이야!
놈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거야? 평범한 인간인 우리가 대체 뭘로 놈들과 싸워야 하냐고!
감염자 스스로 사람이라 칭하다니……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이야.
후우우…… 허허.
너…… 너 이 자식!
사…… 살려……
도망치면 안 돼!
한 명도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는 순간, 죽음이다!
하지만 저, 저건 사람이 아니라고! 우리가 뭘 어떻게……
도망치는 자는 살려두지 않겠다!
뭐?!
너희들의 목숨은 다른 사람들과 하나로 묶여 있다. 방어선이 무너지면 모두 끝장이야!
너희 생각처럼 그리 대단한 놈들이 아냐, 우리와 똑같은 몸뚱아리를 지녔을 뿐이지! 놈들도 방패병으로 세워진 우리 방어선을 쉽게 뚫지는 못할 거다……
……하지만 너희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하는 순간, 너희는 놈들의 첫 제물이자, 희생양이 될 거다!
똑같은 우르수스의 무장 조직으로, 감염자와 한패가 되어 우리에게 맞서는 쪽을 선택하다니 어리석기 그지없군.
정말이지 불행하기 짝이 없는 시대라니까.
녀석이 검을 뽑는다! 방패병, 방패를 들고! 버텨라!
……
……
스으으…… 후우우……
……공격을…… 하지 않는 건가?
……타는 냄새가 나는군.
뭐지…… 몸이 따뜻해지고 있어……?
……서, 설마, 그녀가 온 건가!
왔다, 그녀가 왔어! 모두 안심해, 제아무리 데몬이라도 그녀의 불길 앞에서는 한 줌 잿더미가 될 뿐이니까!
……방심하지 마라! 황제의 근위병은 그렇게……
누굴, 뭘 어쩌겠다는 거지?
후우우우……
우리의 동료를 네가 해쳤다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면 우리도 똑같이 상대해 주마……
폭력으로……
……
찾았다.
3, 7, 22, 36. 【암호】, 【암호】.
……우르수스 황제의 근위병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후우우우……
탈룰라…… 이렇게 먼저 오면 어쩌잔 거야, 대위님을 먼저 모셔왔어야……!
우리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궁금하겠지.
그 이유는 너 때문이다, 공작의 딸. 널 찾고 있었지, 현황을 평가해야 하거든.
눈송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뭐?
공작의 딸. 네 신분을 고려해 좀 더 문명화된 이름으로 우릴 불러주기 바란다.
뭐, 뭐야?
……누가 누구의 딸이라는 거냐?
사실을 터무니없이 부인하려고 하는군.
내가 어떻게 그 뱀의 딸이라는 거지?!
분노. 괴로움에서 나오는 분노……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건가?
……'황제의 칼날'…… 퉤! 네 녀석은 날 조롱하려고 온 것이냐? 아니면 날 죽이려는 것이냐?
스으으으……
……탈룰라를 호위해!
(이봐, 모두 잘 들어! 황제의 근위병이 아무리 대단해도 혈혈단신일 뿐이다. 탈룰라가 공격과 지휘를 맡고 우리가 버티고 있으니 제때 지원 나오면 분명히……)
(……어이, 어떻게 된 거야?)
……
(공작의 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스으으으……
그들에게 네 진짜 정체를 아직 사실대로 알리지 않았나 보군.
이것도 네 계획인가?
……계획이라니?
날 모욕하는 거냐?!
이간질을 하려면 사람 봐 가면서 해라 이 살인마야. 우리 모두의 일과 나의 신분은 아무런 관계가 없어.
이간질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믿음이 있어야지, 저들과의 사이에 믿음이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럽군.
난 그저 궁금할 뿐이야…… 저들이 네 신분을 알게 된 뒤에도 널 계속 믿을 수 있을지 말이야.
우르수스 제국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육을 일삼은, 정체불명의 악당을 과연 누가 믿으려 할까?
말이 거칠군…… 자신감도 넘치는 것 같고.
만약 지금 상황도 네 계획대로인 거라면…… 현황을 재평가해야 할 것 같군.
여기서 그만 헤어지도록 하지. 명심해 둬라,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걸.
나와 네 곁에 있는 사람들 모두 널 믿지 않아. 우리로부터 일말의 신뢰라도 얻으려면 네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거다.
……
멈춰.
스으으으…… 질문이라도 있나.
넌 내 동료를 해쳤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도 알고 있었지.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돌아가서 누구에게 밀고할 셈인 거냐?
후우우우……
밀고라…… 어떤 비밀을 말하는 거지?
놈이 우리의 위치를 폭로하게 해선 안 돼.
(탈룰라, 너…… 근위병을 이길 자신이 있는 거냐?)
(안 그러면 우리는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 …… 감시팀에다 제국군까지 쳐들어오면 우리만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거다!)
(황제의 근위병도 우리의 행동에 반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눈앞의 상대를 재빨리 제압해야만 후퇴와 전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어. 선택할 때는 꾸물거려선 안 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만 놈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 놈은 공포의 대변인일 뿐이야, 불평등에 대한 분노 앞에서 공포는 쉽게 무너지지.
……그래, 유격대는 저 제국의 살인마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
감염자의 창과 방패가 되어서, 무섭다고 벌벌 떨 면 안 되지. 아무리 대단해도 혼자서는 하나로 똘똘 뭉친 우릴 상대할 수 없다. 놈은 일개 살인자일 뿐이다!
혼자라…… 그건 아니지.
너희 뒤에 하나 더 있다.
……
탈룰라가 지나온 길에, 외투를 걸친 '사람'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잿빛 하늘에서 떨어지던 새하얀 눈송이는 그의 코트에 닿는 순간, 검게 변하더니 산산이 조각난 채 바닥을 더럽혔다.
둘이라고……?!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고작 둘이서 수십 명의 우리를 막겠다고? 터무니없는 소리!
카셰이의 딸, 네 신분 때문에 저들이 널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는 건가?
우리가 그 결과를 입증해 주지. 네 판단이 틀렸다면 네 아버지가 우리에게 했던 약속을 없던 일로 쳐주겠다.
뭐야, 그건……?
……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정신 바짝 차려, 놈들이 원하는 건 탈룰라의 목숨만이 아니야!
……뭐?!
탈룰라가 죽은 뒤에 저놈들의 손에서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아?
탈룰라를 지켜야 해!
아니…… 전사들을 지켜라!
첫째, 놈들을 퇴각시킨다! 둘째, 퇴로를 확보한다! 셋째, 자신을 지킨다!
이제부터 전진 같은 건 잊어버려! 남은 체력을 유지해 살아남아라!
……살아있으면 뭐라도 할 수 있지만,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반드시 살아남아라!
네 아버지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군.
……어쩌면 우리를 실망시킬지도 모르겠어, 북툰드라 감염자의 지휘관.
난 지휘관 같은 게 아니다.
그저…… 감염자일 뿐, 너희의 기대 따윈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