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8-5추위, 감각으로부터 느껴지는
어둠과 음모가 잉태한 영웅과 우르수스 역사에 등장하는 악의 화신, 운명적 대결 속에서 파란만장한 역사가 시작된다.
그 일은 지금도 그녀에게 가장 인상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그날은 그녀의 '귀족 생활'이 끝나는 날이었다.
돌아왔군.
……
그 검을 좋아하지 않는다더니 어째서 들고 다니는 거지?
그냥요.
흠……
흙냄새만 나는군. 피비린내도, 탄 냄새도 나지 않아. 씻지도 않고 옷도 그대로 입은 채 날 급히 찾아왔다고 네 메이드가 그러던데…… 내 추측이 맞는다면 아직 놈을 처치하지 않았나 보군.
더 좋은 방법이라도 찾았나, 탈룰라? 그 눈엣가시를 없앨 더 좋은 방법을 찾아서 내가 시킨 대로 하지 않은 거겠지?
당신의 목적은 안토니오 소령이 아니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한 아이를 죽이려고 날 끌어들인 거지.
카셰이…… 그 아이는 아버지와 여행 중이었어. 당신은 날 이용해 안토니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뒤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그를 헌병을 동원해 죽이려 했지. 그렇게 되면 아이도 살지 못할 테니까.
안토니오의 주특기는 엄호술이다. 그 아이가 그자의 아들이 아니란 건 너도 알아챘을 텐데.
큭……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더 중요한 목표를 앞에 뒀을 때는 양심과 자원을 버리는 건 불가항력이라고 말이야.
네가 안토니오를 놔줬으니, 다음에는 그를 빅토리아의 어느 특무관 관저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군.
역겨운 필라인 놈들은 우리 네 도시의 이듬해 항로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떠들겠지……
……그걸 핑계로 우리의 무역 파트너를 지정하고, 물자의 출처를 조사할 게다. 우리의 수출입 경로를 파악하는 건 물론, 수비 루트도 샅샅이 뒤져보겠지.
그 서류는 태워버렸어.
잘했군! 아주 잘했다. 역시 해낼 줄 알았어!
하지만 안토니오가 그 서류를 보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셈이지, 탈룰라?
서류의 내용을 모른다면서 그걸 왜 가지고 간 게냐?
그렇다면 안토니오가 당신의 공작령과 우르수스를 배신했다는 걸 당신은 어떻게 증명할 셈이지? 왜 직접 물어보거나 체포하지 않는 거야? 직접 해치우면 되잖아?
내가 그걸 증명할 필욘 없다. 내가 물어보면 놈에게 처벌을 피할 기회만 줄 뿐이거든. 놈의 행동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어.
녀석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와 우르수스, 그리고 법령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그 녀석은 '그렇게' 나오진 않겠지.
……안토니오는 이미 처리했다. 네가 문서를 파괴하면 내 뱀 비늘들이 일을 마무리할 거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당신이라면 그를 절대 놔줄 리 없으니까.
더 나은 네가 되도록 계속 기회를 줬는데 또다시 날 실망시켰군. 지난번보다 형편없구나, 탈룰라.
슈바타 회의에서는 정말 멋지게 활약했었지. 게다가 너도 어느 정도는 즐겼지 않느냐?
최고의 자리에 서는 그 기분을 말이다.
날 모욕하지 마. 그런 식으로는 내 화를 돋울 뿐이니까.
그렇다는 건, 완벽주의자로서의 기분을 더 만끽하고 싶다는 거로군.
네가 뭘 걱정하는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난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뱀 비늘들은 아들 행세를 하던 그 소년을 풀어줬다.
어때, 탈룰라? 혼자서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 아이는 안토니오의 아들이 맞아, 맞다고!
아닐 수도 있지.
아이가 어른이 되면 아버지를 위해 복수하겠다며 당신을 찾아올 거야.
그렇다면…… 넌 언제쯤 네 아버지를 위해 복수할 셈이냐?
탈룰라, 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여전히 잘 지내고 있더구나.
……
네 손으로 복수할 기회를 얻도록 널 훈련시켜주겠다고 약속했었지. 그런데 지금의 넌…… 아직도 부족하구나.
……닥쳐, 카셰이!
으음…… 그런 거 아니더라도, 혹은 네 부탁이 아니더라도, 난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단다.
당신이 말하는 그 훌륭한 사람이란 건 대체 어떤 거지? 살인귀? 헌병 우두머리, 귀족군관, 아니면 반역자, 그것도 아니면 살육을 즐기는 캐스터?!
이런 이런…… 그런 게 아니야, 탈룰라.
내가 필요한 건 후계자다.
……
당신 입에서 그런 역겨운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네.
그러니까…… 흥, 미안해, 공작님.
당신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어.
흠……
꽤 흥분한 것 같구나, 말해 봐라.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거지?
반년 전, 광산에서 오리지늄 조각을 하나 주웠지. 그걸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난…… 그걸 내 팔에 박아 넣었어.
……으흠?
아주 끝내주더군.
그래서 지금은 감염자가 됐지.
카셰이 공작, 난 감염자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당신의 계획과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될 거야. 더는 당신한테 이용당하지 않을 거라고.
내 모든 건 당신이 계획했지. 하지만 더는 아니야.
정말이지…… 예상 밖의 방법이로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기분은 어때?
난 우르수스와 대륙이 가장 경멸하고, 가장 증오하는 감염자가 됐어…… 도시, 툰드라나 황야에서도 가장 비천한 존재가 되었다고.
네 가족들이 지금의 널 보면 퍽이나 기뻐하겠군.
이 비겁한……
네가 작심하고 내게 맞서게 된 원인이 뭘까, 사랑하는 내 딸아?
……바로 당신이지.
당신은 날 속였어. 웨이 옌우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라고 했지만 두 사람이 함께 당신을 용문에서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알려주지 않았지.
아버지의 죽음에서 당신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내게 말해주지 않았어. 웨이 옌우가 아버지를 죽였으니 죽어 마땅하긴 하지만……
죄를 피할 수 없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야.
겉으로만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다른 마을을 도시 주변에 배치해 감염자에게 안정적인 거처를 제공했지……
하지만 당신은 일부러 감염자와 민간인들이 전혀 다른 삶을 살도록 꾸몄어. 민간인이 우월감을 느끼도록 감염자를 이용했지.
시민에 대한 도시의 착취가 의무로 미화되면서, 시민들은 감염자와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일로 위안을 얻었잖아!
이게 당신의 공작령인가? 이게 당신이 그리는 도시와 통치의 모습이야?
불평등으로 거짓을 만들고, 그 거짓으로 힘을 키우려는 건가?
더는 참지 않겠어. 당신의 거짓 위선과 뒤틀린 양심은 둘째치고, 그럴듯한 사탕발림과 꾸며낸 미소는 역겨워서 도저히 못 봐주겠으니까!
내가 가르쳐 줬을 텐데, 탈룰라.
이렇게 지나치게 평화로운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평등한 관계를 원하지 않아.
우리가 이 평범한 날들을 끝내지 않는 이상 말이다.
너와 난 모두 컬럼비아와 시라쿠사의 시민처럼 자치적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저들 자신은 어떻겠느냐?
아마도 저들은 또 다른 집정관과 귀족을 선발할 것이다. 저들은 타인을 존중하지는 않지만, 권력과 폭력만은 두려워하거든.
그뿐만 아니라, 저들은 자신보다 더 용감하고 똑똑하거나, 더 착하고 자비로운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다…… 네가 그들의 공작이나 국왕이라도 되면 모를까.
넌 저들을 동정하고, 내 영지민들을 가엽게 여기지. 세리와 관료들에게 핍박당해 도망칠 곳이 없는 시민들을 말이다.
그것까진 괜찮다.
게다가 네가 감염자를 모욕하는 단어를 내뱉도록 너 자신을 계속 몰아붙인다고 해도…… 난 한 가지 사실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지.
넌 저들을 보호하려고, 시민들의 분노까지 사면서 내 정책을 계속 조정해왔다.
하지만 난, 저들을 달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단다.
난 그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아!
그래, 넌 저들을 사랑하고 있지.
뭐… 뭐라고?!
탈룰라, 네가 저들을 소중히 여긴다니 정말 기쁘구나. 점점 날 닮아가는 게 역시 내 딸다워.
……어떻게 그런 뻔뻔한 말을 입에 또다시 올릴 수 있는 거지?
하지만 네 그 얄팍한 수법은 통하지 않을 거다.
내가 뭘 하려는지 어떻게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당신에겐 그런 힘이 없어……
모두들 좋은 결과를 얻으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지.
탈룰라, 그건 저들이 바라는 좋은 결과와 네 꿈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에겐 하나의 행동만 강요할 순 없는 법이다. 그러니 저들의 갈등과 충돌, 혼란은 피할 수 없지.
살카즈는 어떻게 산크타를 맞서야 하겠느냐? 카시미어인은 또 어떻게 우르수스인을 상대해야 할까? 건장한 체구를 지녔지만 가난한 곰은, 오만하기만 하고 무능한 히포그리프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이런 걸 어떻게 일일이 가르치겠느냐? 그거야말로 오만한 생각이란다, 내 딸아! 지금의 모습과 신분으로 저들에게 네 이야기가 먹힐 것 같으냐?
아, 물론 네가 할 수 있다는 건 안다.
탈룰라, 넌 네게 지배받게 될 사람들을 다스리게 될 거다. 넌 검은 뱀의 지혜와 붉은 용의 피를 타고 났지. 곰의 영토를 밟고, 히포그리프의 역사를 읽은 너다.
지배받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없어.
하지만 저들은 네가 통치해주길 바라고 있지. 너 같은 사람이 자신들을 지배해 주기를 평생 기다렸단다. 우르수스는 너로 인해 전율하게 될 거다, 내 딸아!!
타인을 지배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더 강한 사람에게 지배되는 법이야, 카셰이.
아, 그것도 내 가치의 일부이지. 탈룰라, 마지막 수업을 해주마.
……뭐?
탈룰라, 이제 우리는 속세에 물든 찰나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될 거다.
선황께서는 돌아가셨지만, 그분의 그림자는 아직 이 땅에 남아있다. 선황의 의지와 사고는 이미 시대를 뛰어넘었지.
진정한 우르수스 제국을 계승하신 선황께서 우르수스 영토를 기름지게 만드시고, 우르수스의 사람들이 그 위에서 삶을 이어나가도록 하실 것이다.
하지만 태양을 잃으면 우르수스의 무성한 나뭇잎은 시들어 버리고, 이 땅에는 살기 위해 살육을 일삼는 저급한 생명과 썩은 것들만 남게 되겠지.
네가 본 사람들은……
폭력적이고, 살육을 일삼으며 자신을 학대하지. 겁도 많은 주제에 이기적이야……
그런 그들을 넌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들은 네 말 따위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단다……
그들은 이 땅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며 자신들만의 뿌리 깊은 생활 방식을 따르며 살아왔지. 그들의 삶에 넌 느닷없이 뛰어든 이방인에 불과하다.
통치자, 귀족, 군인…… 그저 힘을 지닌 사람, 좋은 환경을 타고난 사람, 훈련을 받은 사람에 불과하단 말이다.
영지는 바뀔 수 있고, 군대는 재조직될 수 있어. 통치도 언젠가는 붕괴하기 마련이지……
그 어떤 통치도 영원히 지속될 순 없는 법이다. 누군가를 따르겠다는 우르수스 사람들의 의지 외엔 그것만이 무엇에도 지배되지 않은 채 영원히 나아갈 뿐……
……네 그 작은 호의는 기껏해야 순종과 허황된 기대감만 가져다줄 뿐이야.
지배되도록 태어났다는 걸 어떻게 알아? 우르수스가 사람들을 저렇게 만든 거라고!
당연히 알고 있지, 그것도 무척 잘……
그들이 널 따를 거라고 생각하나? 빵 한 조각, 감자 한 알, 깨끗한 물과 모닥불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냐?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배가 고파지면 가장 먼저 널 뜯어먹으려 들 거다.
그들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을 심어준다면 넌 저들을 미워하게 될 거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카셰이, 난 당신이 아니야.
당신과 하나도 닮지 않았어.
아니, 넌 나와 다르지 않다.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뿐이지.
사실 넌 네 손에 쥐어진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있단다.
목표를 세웠으면 가서 이루어라. 공포로 공포를 내리누르고, 목숨으로 목숨을 지배해라. 희생은 또 다른 희생으로 이어지고, 무지는 무지를 낳지. 고통 역시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 낸다.
그걸 다 배웠으니, 그것들은 네 무기가 될 거다. 이제부터 네가 해야 하는 건,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어떻게 능숙하게 다룰 건지를 배우는 것이다.
네가 아끼는 사람들이 나라와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달을 때까지 말이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이건 모두 사실이란다, 이제 곧 네가 마주해야 할 현실이지.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니? 넌 나를 믿지 않지.
나와 내기라도 하나 하는 건 어떻겠느냐?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네 몸에 심어둔 오리지늄 아츠도 이미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겠지. 이제 그 결실을 볼 때가 된 것 같구나.
그, 그게 무슨……?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금껏 네가 지켜오던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이 들거나, 네가 형제라고 부르는 자들, 그리고 자유를 누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원한이 생긴다면……
우리의 내기를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거다. 그때의 넌 내가 가르쳐 준 길을 걷게 될 거야.
어쩌면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운 좋게도 이런 상황을 겪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넌 계속 동화 같은 세상에서 살게 될 테고.
허나, 네가 마주치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지내야 할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변에서 이해해 주거나 인식하게 되겠지……
나도, 이 나라도 기다려 주마. 3년, 5년, 10년, 설령 100년이 지난다 해도 넌 같은 답을 얻게 될 거다. 감염자이니 오래 살지는 못하겠지만 언젠간 그날이 올 거란 걸 알 수 있을 거다.
우르수스 제국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터널을 지나고 있어. 척박한 땅에서는 희망의 싹이 자라지 않고, 어둠의 땅에서는 부패의 꽃만 피울 뿐이지.
넌 네가 아끼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너로 인해 친구가 죽는 광경을 보게 될 거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새 사라졌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왜냐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네 신분에서 비롯된 무게를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모든 것이 희생될 수 있고, 모두들 이웃보다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겠지. 네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투쟁의 상징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될 거다.
네 모든 걸 쏟아부었던 대륙이 널 원치 않는다는 걸 직접 보게 될 거다.
네가 꿈꿨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네가 존경하던 것을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을 보게 될 거야. 생명, 존엄과 이념 모두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는 거지.
왜냐면 그들은 네가 말하는 고상하기 짝이 없는, 걸어 다니는 시체에 불과하거든.
내가 겪었던 일을 너도 겪게 될 거다.
나를…… 굴복…… 시키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난 오리지늄 아츠를 쓰고 있단다. 널 속이려는 것도, 위협하는 것도 아니야.
아쉽게도 내 아츠가 약한 게 흠이지만, 네게 알려주었던 모든 것들은 아츠를 구성하는 뼈대란다.
네가 나를 부정할 때, 아츠는 어떤 작용도 일으키지 않을 거다.
하지만 네가 나를 인정하고, 나를 이해하고, 어떤 땅 위에 자신이 서 있는지 깨닫는 순간……
똑딱…… 똑딱…… 하며 시곗바늘은 천천히 돌아가, 잠들어 있던 시한폭탄의 스위치가 눌리게 되겠지.
그럼 그때 넌, 내가 되는 거야.
우르수스의 미래는 그 순간부터 네 손에 쥐어지게 되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야?
방금 그 말…… 그게 무슨 뜻이지?
의식을 조종하고 사고를 암시한다고? 정말 미쳤군! 아츠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영혼의 오리지늄 아츠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가르쳐준 건 바로 당신이었잖아!
아니.
내가 왜 소중한 내 후계자에게 비열하고 해로운 아츠를 사용하겠느냐?
내 아츠는 그저 과정을 가속할 뿐이다. 네가 이 세상을 알아가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의심하는 것, 자신을 미워하면서 자신을 똑바로 다시 마주하는 과정을 말이다.
아츠가 없이도 모든 건 결국 일어나게 될 것이다. 아츠는 그저 속도를 높여줄 뿐이지.
도시에서 멀쩡한 척 살아가는 사람들도 모두 자기 최면에 빠져 있다.
그들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데 능숙하지. 규칙과 양심으로 자신을 길들이고, 실패자라는 초라한 가면으로 잔혹한 현실에 쉽게 상처받는 자신의 나약한 인격을 숨기고 말이다……
하지만 난 네게 갑옷과 무기, 그리고 자아를 주었다.
그 덕에 너는 자신을 의심하고 괴롭히는 과정을 건너뛰고, 고통과 몸부림에서도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시간도 아끼고, 현실 속에서 넘어져도 다시 빠르게 일어설 수 있었지.
자신을 부정하는 데 힘들일 필욘 없어.
네게 가르쳐 준 모든 건 네 머릿속에서 다시 잉태되어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듯 새로운 지식으로 하나씩 엮어내겠지.
무지한 미신을 버리고, 구불거리지만 울창한 지혜의 화원에서 종착점이 있는 길을 찾게 될 거다.
탈룰라, 우르수스의 운명은 너와 얽혀 있다.
검은 뱀은 너와 함께할 거다. 영원불멸의 의지는 결코 시들지 않아……
그건……
지금 날 저주하는 건가?
당신 자신을 이용해…… 날 만들려고 하는 건가?
아니, 이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란다.
네게 축복을 내리마,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네가 인간성에 대한 헛된 환상에서 깨어날 때, 세상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우리가 왜 싸워야 했는지 넌 알게 될 거다.
닥쳐!! 헛소리 작작해!
염국의 그런 저속한 욕설 따위 네게 가르친 적 없는데…… 뭐, 배워둬서 나쁠 것 없지. 나중에 네가 그런 역할을 맡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흥, 그렇겠지. 이미지 관리한답시고 공식적인 자리에선 절대 이런 말을 입에 담지도 못하게 했으니까.
……네 출신을 숨기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난 언제나 네 생각뿐인데, 넌 내 제안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날 모욕하는 말만 내뱉다니…… 내가 가르쳐준 걸 모두 기억하고 있으면서 왜 도망가려고만 하는 것이냐?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넌 결국 이 길을 걷게 될 테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원한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지. 원한은 권력을 만들고, 사랑은 증오를 낳는다. 방황은 원한을 낳고, 동경 속에서 증오가 생겨나지.
원한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어, 그 때문에 두 사람만 있어도 권력이 생겨나게 되지. 나처럼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아끼는 사람이 아닌 이상……
탈룰라, 내가 원망스럽느냐? 난 세상이 네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했을 뿐이다.
당신이 한 일은 모두 나완 상관없어…… 나와는 무관하다고.
조금도 상관없어, 조금도!
아…… 역시 내 딸답구나.
이름도, 권력도 물려받지 않고, 지위도 이용하지 않겠다니 역시 뛰어난 재목이다. 실로 자랑스럽구나.
네 손으로 직접 네 길을 개척해 보려무나. 영지와 정치적 배경, 재산과 권력 모두 물려받고 싶지 않다니, 역시 대견하구나.
네 스스로 해내는 거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또한 내 바람이기도 하고.
내 바람을 맘대로 정하지 마!
그래,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기억해 두렴, 그 어떤 카셰이도 '선물'을 달갑게 받지 않으리라는 걸 말이다. 그건 성실하고 자존심이 강한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니까!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 건 다 가르쳐줬다.
무엇을 쥘 수 있을지는 모두 네게 달렸다.
탈룰라, 내 아이야…… 넌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로구나.
그동안 누리던 모든 걸 모두 포기하고 전혀 다른 길을 가려고 하다니……
감염자로 사는 삶은 네게 또 다른 길을 열어 줄 거다. 네가 이제 우르수스에서 해야 하는 일은 딱 하나뿐인 듯하구나.
(검을 뽑아 들며)
이 일 때문에 당신의 그 역겨운 궤변을 온종일 듣고 있어야 할 줄은 몰랐어……
아, 드디어 그날이 온 건가?
웨이 옌우가 날 죽이지 못했으니, 그 곁의 누군가가 날 죽이러 올 거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게 너일 줄이야…… 아니 역시 너였구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네 원수에게 원수를 죽이게 하다니 참으로 아름다운 결말이구나.
네 살육으로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게 증명될 테니 순순히 죽어주마. 나의 사랑하는 딸 탈룰라, 네 행동은 진리로 향하는 다리가 될 것이고, 내 죽음은 네 반석이 될 것이다.
난 당신의 딸이 아니야…… 아니라고!
당신을 죽이려는 건, 당신의 악행을 막기 위해서일 뿐이야.
그렇다면 넌 악행을 저지르게 될 거다, 탈룰라.
닥쳐.
그런 뒤에 선행을 베풀겠지. 그땐 내 선행을 인정하게 될 거다.
아, 이 검…… 집사에게 맡겨두는 걸 깜빡했군…… 난 이 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넌 아츠보다 검을 더 많이 사용하니…… 그 검을 가져도 좋다.
이 검이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일깨워줄 테니……
하아아아아!!!!!
……그리고 너와 나의 길을 증명할 것이다.
내가 미우냐, 탈룰라?
절대 안 속아! 이 간사한 늙은이, 네 목숨도 여기까지다!
컥, 크헉, 커허헉……
폐, 폐가……
너…… 손이 미끄러진 거냐…… 잘못 찔렀구나……
당신을 원망하진 않아, 카셰이.
원한이란 게 당신의 싸구려 궤변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내가 미워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일 뿐이야.
불쌍히 여겨주지. 당신의 죽음은 당신의 외로움을 증명할 뿐이니까. 그리고 당신의 망상은 물거품이 될 거야.
당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을 했는지 내가 증명해 보이겠어. 물론 당신에게는 그걸 볼 기회가 없겠지만.
하, 하, 조…… 좋다……
내가 죽으면 웨이도……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겠지……
기대되는군…… 그때가 되면…… 네…… 후회와…… 원망을……
기, 기억해라……
탈룰라, 잊지 말거라.
네 끝은 결국 나라는 걸……
탈룰라는 공작의 가슴에서 검을 천천히 뽑아들었다.
그녀의 사고는 이미 멀리 떠내려가, 성과 도시를 떠나, 추격병을 따돌렸다……
이미 뿌리를 내린 씨앗은, 싹이 트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곁에 온 거였구나.
아주 오래전의 일이야.
……카셰이가 죽은 뒤 성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네게 위험한 일도 생기지 않고?
또다시 무슨 일이 생겼다면 이곳에 올 기회도 없었을 거야.
도시는…… 내가 떠난 뒤 카셰이의 영토와 재산은 제4군단에 의해 분할됐다고 들었어.
나에 대해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어. 제 발로 사라져 버린…… 신입한테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후후.
아주 먼 길을 걸었어. 정신을 차려 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시는 집 문 앞이었지.
그때의 나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서 도중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할머님 말로는 그날 넌 피투성이였대. 여러 번 빨아도 옷에 스며든 핏자국이 지지 않는다고 하셨어.
우리 마을에서 누군가가 널 몰래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왜냐면…… 넌 분명 생각해봤을 것 같아서.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할 것 같진 않았어. 수확물도 풍성하고, 춤추다 꺼져버린 모닥불 흔적도 보였지. 외양간을 가득 채운 가축과 장식물을 걸어 둔 집들도 보였어……
고되게 보였지만 그래도 모두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것 같았어.
너희가 날 죽이려 했다면 마음 편히 춤을 추진 못 했을 거야.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끔찍한 괴물이나 다름없어, 그것도 무척 보기 드문……
너무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거 아냐?
난 수많은 악행을 지켜봐 왔지. 그중 많은 일은 사람들이 선택해서 자행된 게 아니었어.
선택할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사람이 되는 쪽을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
카셰이는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카셰이는 모든 사람이 악당이라고 했어, 네가 선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들을 결국 미워하게 될 거라면서.
……정말 끔찍한 저주야, 이보다 더 지독한 말은 없을 것 같아.
그래서 난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 거야. 사람들의 행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까.
내가 지켜봤으면 하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내가 없을 땐 어쩌려고? 아무래도 너만의 방법을 찾는 게 낫겠어.
그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야, 우리 세대의 감염자들도 결국엔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게 되겠지.
남은 시간 동안 우리의 삶에 의미를 더하는 일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쉽진 않겠지만 난 감염자들끼리 다시 뭉쳐야 한다고 생각해.
일단 우르수스에서 머물 곳부터 되찾아야 해. 가능하다면 대륙 역시 자신의 행동을 살펴봐야 할 거야.
그다음에는 감염자…… 감염자뿐만 아니라……
우르수스, 빅토리아, 라이타니엔…… 국적, 인종, 신분 등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을 무너뜨려야 해.
우리 모두 사랑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해. 누군가가 그걸 방해한다면 우리의 것을 되찾아 오면 되는 거야.
그렇게 하고 싶다면 일단 한 번 해보자.
완전히 실패할 수도 있어.
어쨌든 네 첫 도전 목표는 우르수스인 거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은 우르수스에 도전하게 될 거야.
하지만 대가를 치렀다면 당연히 얻는 것도 있어야겠지. 우리 모두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너처럼 비관적인 타입은 아니지만…… 내가 기억하는 대지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진 않았던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탈룰라, 넌 뭔가를 얻기 위해 값을 치르는 거야?
……
……알리나! 그런 게 아냐, 네 말은…… 너무……
알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 봐.
아니, 그렇지 않아. 절대로 아니야.
우리가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이유는 간단해. 모두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대지의 생령들 역시 그런 결과를 누릴 가치가 있어.
……응, 좋아. 가자.
유격대랑 합류할 생각이야?
그러려면 유격대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해.
쉽지 않겠네.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수는 없지.
누님! 여긴…… 저희를 도와준 사람들입니다!
긴장할 것 없어.
하아, 후우……
여긴 소문대로 정말 춥네. 눈의 악마들은 겨울이 되면 이곳 날씨보다도 차갑다던데……
네가 지휘관인거야?
감염자?
그래.
어째서 우르수스 군복을 입고 있는 건지 설명해 봐.
여러 버전의 거짓말을 준비했는데 어느 걸로 들려줄까?
해치워.
잠깐! 농담이라고, 농담! 네가 눈의 악마 소대를 이끄는 대장이야?
왜 안 죽이는 거지?
하지만…… 방금…… 우리를 도와줬어요, 정말이에요, 누님……
맞아. 너희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너희를 도와주려고 온 거야.
……우릴 돕는다고?
악수 먼저 할까? 눈의 악마를 이끄는 지휘관, 성의를 표하고 싶다면 나도 평등하면서도 존엄한 방식이 좋으니까.
서로 예의를 지키며 차분하게 이야기했으면 해.
아니.
……일단 한 번 해보자고. 네가 누군지 생각났어.
눈의 악마들이 짊어지고 있는 오리지늄 결정이 네가 지닌 아츠의 원동력이지?
후후.
네 얼음을 내가 녹이면 내 이야기를 들어줄래?
……허튼 소리하지 마, 절대 못할 테니까.
두고 보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