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불이 없으면 빛도 없나니
폐허 밑에 같힌 프로스트노바는, 함께 같힌 박사에게 자신의 과거와 가족,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들은, 작은 내기를 하나 하게 되는데……
- 정신차려!
정신차려!!
......?
일어나라… 제발 눈 좀 떠봐!
서둘러, 아담! 따뜻한 물 좀 가져와라!
아빠……
어……
살아있구나! 정말 다행이다, 아직 살아있어! 애가 아직 살아있다고! 아이고 조상님 감사합니다!
아담! 빨리 움직여라!
아… 빠…?
아빠?
…나다 …그래! 아빠다!
그래, 그래! 아빠 여깄다!!!
자지 마렴, 자면 안 된다! 아빠 손 잡아, 놓으면 안 돼!
아빠… 나… 너무 추워…
잠들면 안 된다, 딸아, 내 딸아! 살아야 한다!
체온이 떨어지고 있다! 미시카, 어떻게 좀 해봐!
몸에 따뜻한 물을 부어도 소용이 없나?
추워…! 아빠! 나 너무 추워!
딸아… 내 딸! 참아야 한다!
아빠, 싫어… 날 떠나지 마…
10:48 A.M.
버려진 도시, '제14구역' 폐허
지반층 상부
……
- 정신차려!
- ……
- 미안한데 제발……
이미 일어났다.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죽이지 않은 건, 자신감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인가?
- 이런 일이 예전에도 있었나 보군……
- 나한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
- 그래도 되나?
어쨌든 간에, 넌 그렇게 하지 않았다.
- 네 잠꼬대 때문일 수도 있지.
- ……
- 네 과거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
……
정신을 잃은 날 죽이지 않았으니, 지금은 나도 널 죽이지 않겠다. 이걸로 서로 빚은 없는 거다.
왜 그런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거냐?
내가… 잠꼬대를 했기 때문인가?
보아하니, 정신을 잃고 별로 즐겁지 않은 말을 했나 보군.
기억이란 게 참 그래, 잊고 싶어도 잊히지가 않아.
이 주위를 조사해봤나?
출구는 찾을 수 없었겠지.
한동안은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군.
……
내가 아버지라 불렀던 건 과거 우르수스군의 장교로 있었던 사람이다. 이름은 불드록카스티.
하지만 진짜 아버지는 예전에 돌아가셨다.
희미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엔, 어떤 남자가 화살을 맞으며 한 여자를 보호하고 있던 장면이 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나를 품에 안고 등으로 두 번째 화살을 막았지.
- 직접 봤던 거군……
당시 나는 눈앞에서 발생한 일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기억만은 잊혀지지 않는다.
나중에서야 내 할머니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셨지.
나는 할머니를 찾아가 그 기억에 대해 여쭤봤고, 더 이상 둘러댈 수 없었던 할머니께선 내게 말씀해주셨다.
내 친부모는… 죽기 전까지 날 지켜줬던 거라고.
우스운 건, 난 그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다. 내 머릿속엔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거든. 오직 그 장면 하나만 빼고.
내 친부모는 그렇게 점차 잊혀갔다. 지금은 둘에 대해 무슨 감정을 갖고 있는지 말하기조차 쉽지 않아.
……
- 그래서 할머니께서 널 길러주신 거로군.
반은 그렇다고 봐야겠지. 나머지 반은 우르수스 감염자의 피였다.
- ……뭐라고?
흠……
나는 북서쪽 툰드라에 있는 한 광산에서 태어났다.
외딴 지역에 있던 광산은 규모도 크지 않았고, 어떤 도시에도 속해있지 않았던 탓에 주변엔 마을도 없었지. 일 년 내내 눈을 제외하곤 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광산은 형무소처럼, 죽음과 노역의 본보기를 위해 지어진 것이었다. 설원에 그런 광산은 셀 수도 없이 많았지.
나의 친부모님은 바로 그 광산의 광부셨다.
할머니께선 내가 말을 배울 때까지 길러주셨지만, 부모님께서 무슨 죄를 지어 그곳에서 복역했는지는 말씀해주시지 않았었다.
나중에 머리가 좀 차고 나서, 광산 주변을 수소문한 끝에야… 내 부모님이 우르수스 황제의 전시 작전에 반대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분이 체포된 것도 사실은 우연한 사고였다고 하더군. 당시 사건을 조사하던 어느 조사관이, 체포 명단 가장 아래쪽에 있던 두 줄이 비어있는 걸 보고, 문패를 보다 그냥 눈에 들어온 이름을 적당히 적은 것이었다고……
재판도 없이 나의 부모님께서는 이름도 잃어버린 채, 작고 따뜻한 도시에서 추운 북쪽 땅으로 끌려가 수백 년의 노역형을 받게 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수백 년을 살겠나. 광산을 살아서 나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나의 할머니께서는, 부모님을 숨겨준 죄로 공범이 되셨고, 똑같이 광산 노동형을 선고받아 그 광산으로 끌려가셨다.
그 광산의 모든 광부들은 사실 다 비슷한 처지였지.
나의 부모님은 결국 그렇게 오리지늄을 채굴하다 광석병에 감염되셨다. 거기 있던 광부들 중에 광석병에 안 걸린 사람은 없었어.
만약 네가 광부라면, 설령 광산에서 탈출했다 하더라고 누가 네 말을 믿어주겠나. 감염자의 말을, 그것도 가장 무섭고 가장 악독하고 가장 심각하다는 광석병 환자의 말을 말이야.
광산을 감독하던 우르수스 주둔군은 감염자의 자연사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놈들은 제비를 뽑아 광석병 환자의 운명을 결정했고, 심심풀이로 사람을 죽여댔다.
어쩌면 그치지 않는 새하얀 눈이… 광부들보다 군인들을 먼저 미치게 만든 걸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라면, 그 군인들은 감염자를 애초부터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걸지도 모르고.
나의 부모님께선 내가 다섯 살 때 뽑혀가셨다.
나의 할머니께선 내가 열 살 때 뽑혀가셨지.
그리고 열한 살 때는 내가 뽑혔지만, 이미 제비뽑기 따윈 그들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광산을 폐기할 생각이었으니까.
당시 광산의 모든 젊은 환자는 이미 죽은 뒤였고, 황제의 새로운 처리 방식 때문에 광산의 인력이 부족한 참이었다.
그래서 우르수스의 감독관들은, 명령에 따라 마지막 감염자들의 처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엔 감염된 아이들도 있었고.
그들은 감염자들을 전부 처리한 다음, 광산을 폭파시켜 무너뜨리고, 감염자들과 함께 그들의 죄악을 전부 덮어버릴 생각이었던 거다.
나중에 군생활을 하며 알게 되었지. 그들은 언제나 그래 왔다는 걸.
나는 분했다. 그리고 고통스러웠다.
나는 수도 없이 많은 오리지늄을 깨부수며, 광산의 다른 아이들과 친형제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 원통하게 죽어가고 있지.
나의 부모님과 할머니의 죽음이 눈에 선했고, 더욱 강렬한 감정이 내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리고 형이 집행될 때, 내 몸속에서 폭발하듯이 튀어나온 아츠가 형을 집행하던 사관 넷을 죽였다.
물론, 나한테 상황을 역전시킬 능력 따윈 없었지.
감독관의 눈에 아이들은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칼과 튼튼한 갑옷으로 무장한 군인이었다. 우린 꼬리에 달린 작은 침으로 공격하는 작은 벌레들처럼, 그들을 쏘아붙이는 게 고작이었어.
그들이 날 쓰러뜨리고 마지막 학살을 시작하려던 때, 그리고 형제자매들의 울음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 그때……
한 무리의 유격대가 도착했다.
바로 불드록카스티의 부대였지.
북서쪽 툰드라에서 감염자를 관리하던 그 우르수스 군인들은 악몽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을 거야. 유격대는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악몽이니까.
- 너는…… 그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군.
만약 할 수만 있었다면, 난 기꺼이 그렇게 했을 거다.
그들은 우리 앞에 있는 도살자들을 철저히 없애버렸고, 광산에 있던 감염자 아이들은 도망쳐버렸지.
하지만……
그 비정한 백색의 대지 위에서, 불행한 나의 동료들 몸속에 흐르는 피는 우르수스 군인들 몸속에 암홍색으로 흐르는 피와 함께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저 우르수스 병사들도 애초에 명령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것을. 그들의 몸속에도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세상을 뒤덮은 언론은 사람들 마음속에 적의를 새겨놓았고, 그로 인해 사람들 마음속엔 잔인함과 냉혹함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건, 바로 우르수스였다.
쓰읍… 으윽…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내 외투 왼쪽 주머니에 사탕이 몇 개 있다. 하나 가져다줄 수 있겠나.
…너도 먹고 싶다면, 하나 맛봐도 좋다.
- (사탕을 1개 가져온다)
- (사탕을 2개 가져온다)
……독이라도 들었을까 봐?
네가 사탕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먹어보는 게 좋을 거다. 용문에서는 맛볼 수 없는 사탕이니까.
우르수스 특산이지,몇 개 없는 거다.
사탕을 가져다준 답례다, 한 번 먹어보라고.
흐음, 너도 간식을 꽤 좋아하는 것 같군.
미리 말해두는데, 이 사탕은 네가 여태까지 먹었던 사탕과는 차원이 다를 거다.
인생은 어차피 짧아,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새로운 것에 도전해봐야 하지 않겠어?
- 그다음에는?
사탕을 내 입 안에 넣어줘. 피부에 닿지 않게 조심하고.
- 우린 그래도 서로 적인데……
- ……
- 이렇게?
손끝에서 목까지, 전신이 마비되었다. 지금 목 위만 움직일 수 있어.
하지만 내가 혀를 약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널 즉시 얼려 죽일 수 있다.
그러니까 다른 일은 걱정하지 말도록. 만약 네가 정말 무례한 짓을 저지른다면, 그땐 바로 죽여버릴 테니까.
- (프로스트노바에게 사탕을 준다)
고마워.
- (사탕을 먹는다)
- (사탕을 먹는다)
- (사탕을 먹는다)
(맵다)
(굉장히 맵다)
(무서울 정도로 맵다)
……
- ......
네 표정……
후후……
미안, 왠지 장난을 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
내 주변 사람들은 하도 많이 당해서 그런지, 아무도 걸리지 않거든.
이제야 겨우… 장난칠 기회를 찾은 거지. 미안하다, 정말…… 정말 참을 수 없었어.
- 왜 이런 사탕을 먹는 거지?
……
내 체온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방금 네게 조심하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내 피부에 닿았다면, 분명 심각한 동상에 걸렸을 거다.
만약 좀 전에 네가 나를 건드렸다면, 네 반응을 보고 알 수 있었겠지. 네게 살의가 없었다고 해도 말이다.
- 현존하는 학술 자료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군.
내 몸에서는 겨울보다 찬 냉기가 뿜어져 나온다.
외부의 열기는 결국 내 몸을 감싼 냉기를 뚫을 수 없지. 그래서 난 뜨거운 음료를 좋아한다. 그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따라 위에 들어가면, 음료의 온도를 느낄 수 있으니까.
물론 내장이 뜨거운 음료에 화상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은 슬프지만.
알코올과 자극적인 조미료를 섞고, 거기에 약간의 당분을 가미한, 이 사탕만이 내 남은 유일한 즐거움이지.
비록 잠깐의 눈속임 같은 따뜻함이지만, 내게 기쁨을 주거든.
조금 전엔 장난쳐서 미안했다.
- 그러니까 네가 아까 춥다고 한 이유가……
……광석병이 내 몸을 이토록 무섭게 만들었지.
하지만 그때, 불드록카스티는 따뜻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 몸을 꽉 끌어안아 주었다.
갑옷을 두르지 않은 양팔이 나 때문에 거의 괴사할 뻔했는데도,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당시 그의 감정이 내게 전달된 덕분인지…… 난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결국 살아남았어.
- 그래서 불드록카스티는……
내 가족인 셈이지. 어린 시절의 나는 그를 가족처럼 대했다.
말했다시피, 난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무의식중에 그 거대한 야수 같은 사람을 가족으로 간주한 게 아닐까. 잘은 모르겠지만.
불드록카스티는, 생긴 거랑은 달리 굉장히 감상적인 사람이었다. 어떤 면에선 고집불통인 모습도 있었고. 그런 사람이 과거 우르수스의 살인 병기였다니… 웃기지 않나?
안 웃긴가? 뭐 그래, 나도 웃음은 안 나오니.
과거 우르수스의 전쟁 영웅이었던 그는, 나이가 들은 후 어느 도시를 지키게 되었다.
- 우르수스의 군인인 그가 오히려 감염자를 위해 싸웠다고?
만약 네가 우르수스 쪽 말만 믿는 게 아니라면, 그런 사람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을 거다. 물론 감염자들이 '패트리어트'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 사람 한 명뿐이지만.
그의 아내는 일찍 세상을 떴고, 그는 아들과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그는 살카즈다. 살카즈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부류지. 하지만 그의 아들은 웬디고 학자가 되었는데…… 어쩌면 우르수스 역사상 첫 번째일지도 모르겠군.
불드록카스티는 마지막으로 참가한 전투에서 광석병에 감염되었다.
그의 병사들은 그가 병세를 숨길 수 있게 도와주었고, 그 역시 자기 아들에게 사실을 숨겼다. 아들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던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어느 외진 곳에서 홀로 죽을 생각이었다더군.
그렇지만 '대반란' 때, 그의 아들은 감염자의 권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부자간의 연락은 끊긴 지 오래였기에,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여전히 우르수스의 앞잡이인 줄 알았던 거지.
하긴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어. 명령을 받은 불드록카스티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어떠한 대가를 감수하더라도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병사들에게 무기 사용을 허가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예전의 그는, 그런 사람이었지.
그 후 그는 거리에서 아들을 발견했지만, 그의 아들은 이미 싸늘히 식어 있었다…
그가 나를 껴안았던 그때, 그는 그의 아들을 떠올렸던 걸까?
그의 아들은 자신 주변에 있는 감염자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죽인 것이 된 셈이나 다름없었지.
그는 부대와 함께 떠났고, 이후 북서쪽 툰드라엔 감염자를 학대하는 우르수스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유격대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되었다.
……
그 늙은 야수는, 내게 이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해준 적이 없다.
어쩌면 그는, 나를 정말 자신의 딸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그 사람한테 직접 들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이 모든 건 그의 부하한테 들은 거다. 불드록카스티는 이런 얘길 나한테 전혀 안 해주니까.
그 고집 센 괴물 같은 노인네도, 마음은 여렸던 거지.
그가 우리 감염자 아이들을 구하기 전에, 그의 부대는 이미 광산을 네 군데나 더 거쳐왔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부대가 전에 마주쳤던 감염자들은 우리만큼 운이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른 광산에 있던 감염자들은, 이미 전부 우르수스 부대에게 처형당했었다더군. 물론 우르수스 부대는 종적을 감춘 상태였고.
그는 내게서 뭘 얻었던 걸까? 혈육의 정? 구원? 아니면 약간의 심리적 위안?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
콜록, 콜록……
- 기침과 내출혈도…… 네 감염 증상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아츠를 너무 많이 써서 이런 거다. 별거 아니야.
오늘 전투는 꽤 거칠었으니까. 이런 적은 전에도 한 번밖에 없었는데.
의식불명, 전신마비, 깨어나고 나서 몸이 안 움직이는 것도… 전부 겪어본 증상이다.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 이제 오리지늄 아츠는 쓰지 마.
내가 아츠를 쓰지 않으면, 설마 네가 날 대신해서 싸워주기라도 하려고?
로도스 아일랜드의…… 너를 뭐라 불러야 하지?
- 로도스 아일랜드의 오퍼레이터들이 부르듯이 부르면 된다.
{@nickname} 박사?
{@nickname} 박사.
……나도 너희 로도스 아일랜드가 괜찮은 전사라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난 여전히 너희를 믿을 수 없어. 너희가 원래는 제약회사라는 것도 수상하고.
- 로도스 아일랜드에겐 해야 할 일이 많다.
전투 이외의 일은 나와는 상관없다.
체르노보그에서 너희가 싸우는 모습을 봤다. 너희의 입장은 확고했고, 난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봤어. 하지만 너희의 선악을 판단할 수 없었지.
……너희 손에 알렉스가 죽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난 너희가 의심스러워.
이제 난 너희가 이 버려진 도시를 떠나게 둘 수 없다. 너희를 내버려둔다면, 더 많은 리유니온의 감염자들이 다칠 테니까.
하지만 넌 내 수다를 잘 들어주었지……
감염자들이 너희를 무서워하며 하는 말이 전부 다 맞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그 감염자들은 단지 무서워서 그런 거다.
죽음을 가져오는 사람들인데, 당연히 두려워하겠지.
{@nickname} 박사, 지금의 넌 공포를 느끼고 있나?
- 그래.
- 잘 모르겠다.
- 아니.
공포를 느끼는 건 당연한 거야.
아직 세상에 미련이 남아있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남아있다는 뜻이니까.
정말 네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있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네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네게 아무런 욕망도, 아무런 바람도 없다는 거겠지.
재미있네. 무섭지 않은 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난 언제나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지……
나는 과연 죽음을 무서워하고 있는지를.
듣자하니 우르수스 주둔군은 나를 '눈의 악마 소대의 공주'나, '겨울의 사신'이라 부른다더군.
사실 우리는 그저 툰드라를 전전하며 겨우 연명하는 초라한 부대일 뿐인데.
내 아츠가 강력하단 건, 적과 아군에 의해 검증된 사실이다.
물론 나의 몸은 네가 본 것처럼, 한낱 광석병 환자에 불과하지만.
내 처지가 특수한 건, 병 때문이 아니라 나의 서리가 가져오는 그 감각 때문이라 생각해.
나는 이 능력을 일종의 축복이라 여기고 있지만, 불드록카스티 그 고집불통 영감은 오히려 저주라고 하더군.
우리가 늪지대를 헤쳐나가고, 얼음물이 다리를 적셔도, 난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그 영감은 지금도 우리가 전장에 나서는 걸 허락하지 않지만, 그때 그의 병사들 중 상당수는 이미 죽거나 다친 상태였어.
그는 램프에 불을 붙이고, 혼자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지. 난 그가 울고 있다 생각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어. 그리고 그를 위로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었다.
5년째 되던 해에, 난 처음으로 적 앞에서 냉기를 불러냈다.
병사 하나는 그대로 얼음 덩어리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그 위에 넘어져 둘 다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전투에 나서면 병사들은 경외심을 담은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형제자매들은 날 자랑스러워하며 다른 감염자들에게 말하지……
"저분이 우리의 누님이시다. 누님께서 우리 모두의 목숨을 구해주셨다……" 라고.
내 아츠가 정말 누군가를 구해준 걸까?
광산에서 나온 아이들은 내가 만들어낸 오리지늄을 짊어졌고, 우린 '눈의 악마 소대'가 되었다.
우린 그 냉기를 내뿜는 오리지늄으로, 감염자의 원수에게 서리와 복수를 안겨주었지.
하지만 그건 결국 냉기일 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는 겨울의 추위일 뿐이었다.
난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 형제자매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 평범한 사람들과 공존할 생각은 안 해봤나?
평범한 사람이라……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지?
체르노보그에서 비무장 상태였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감염자를 바라보다 처형당한 시민? 아니면 광산에서 즐거움을 위해 감염자에게 총을 쏘던 우르수스 군인?
그 감독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난 화가 나서 이가 갈려. 녀석들의 목을 찢고 피를 마시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
난 우르수스인을 증오하지 않는다.
우리 유격대가 설원을 누빌 때나 산골짜기에서 후퇴할 때, 심지어 우르수스 군대의 추격을 받을 때도……
술 몇 잔을 창가에 올려두던 사람들 역시 우르수스인이었다.
우르수스인이 무슨 냉혈동물이라는 건 아니다. 나의 적은 감염자를 사지로 몰아넣은 '우르수스 제국'일 뿐.
나는 평범한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감염자를 증오하도록 교육받은 우르수스인 역시, 증오에 눈이 멀기 전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우린 그저, "적은 서로 죽여야 한다"라는 원칙 때문에 싸울 뿐이지. 그게 전부다.
나는 감염자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지… 하지만 예전에는 나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 지금의 리유니온은?
……나와 불드록카스티가 어긋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최선을 다해 감염자 단체를 지키기 때문이다.
"리유니온, 감염자가 들을 수 있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첫 번째 이름."
"리유니온이, 어떤 행위를 하든, 우리는, 리유니온을 막아서는 안 된다. 리유니온의 해체는, 감염자들에게 있어서, 투쟁의 마음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 영감은 계속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믿고 있지.
- 왜 뚝뚝 끊어서 말하는 거지?
원래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난 그저… 콜록 콜록, 그의 말투를 따라 한 것뿐이다.
{@nickname} 박사, 어째서 로도스 아일랜드가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알고 있나?
너희는 공식 석상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너희가 무대 앞으로 나서게 된다면, 너희 역시 지금의 리유니온처럼 변해버리겠지.
너희도 같은 길을 걷게 될 거다.
- 그럴지도 모르지.
- ……
- 정말 그렇게 될까?
흥.
툰드라를 돌아다닌 지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감염자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여자는 "나와 함께하자, 우리가 모든 속박을 부숴버리는 거야"라고 말했지.
생각해 봐라, 우리는 전장이 되어버린 옛 도시의 폐허에서 만났지. 그녀는 혼자였고, 명단과 연락처 말고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한 말을 생각해 보니, 우스울 정도로 황당하더라고.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우리에게 "나와 함께 하자"고 말했지.
그녀는 우리와 함께 싸웠고, 온갖 발상과 능력을 지닌 그녀는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설원을 떠나 우르수스의 도시로 향했지.
그녀가 고심 끝에 한 말에서도, 나와 대련을 하며 휘두른 검에서도, 그녀가 짊어진 힘이 얼마나 진실되고 무거웠는지 느낄 수 있었다.
부상당한 전사를 치료할 때도, 감염자에게 책략과 그녀의 학설을 설명할 때도, 그리고 우르수스 부대를 섬멸할 때도…… 그녀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우린 심지어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신분을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런 그녀의 눈빛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의 부대는 커져갔고, 우리의 우정은 깊어졌다. 그녀가 연락한 사람들은 모두 베테랑에 좋은 사람들이었지.
그때 난 그녀를 친구로 삼았다. 그녀는 묵묵히 내가 사탕 만드는 걸 도와줬다. 뭐, 솜씨가 좋지 않아 만들어낸 사탕은 영 볼품없었지만.
그녀가 사탕을 먹었을 땐 정말 이상한 표정을 짓더군. 그래도 그녀는 내게 웃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애써 버티고 있는게 티가 다 나는데, 그 표정이 너무 웃기더라고. 결국 나까지 소리 내서 웃고 말았지.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너도 봤듯이 체르노보그는 재앙으로 파괴되었고, 많은 비감염자가 죽거나 새로운 감염자가 되었다.
그들의 눈빛 속에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다.
만약 이게 바로 그녀가 원한 거라면… 우린 처음부터 그녀를 따라가선 안 됐던 거야.
한 가지 비밀을 알려주지……
지금 그녀는 용문을 탈취할 준비를 하고 있다. 듣기론 이번엔 체르노보그와는 다를 거라더군. 감염자들은 거대한 폐허가 아닌 자신들의 도시를 갖게 될 거라 했다.
너는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있겠나?
만약 이걸 말해준 게 일종의 속임수라면, 장담하건대 세상 누구라도 속일 수 있을 거다.
단 한 가지, 줄곧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내가 만약 그녀와 정면 대결을 한다면, 내게 과연 승산이 얼마나 있을까?
만약 우리가 결별하고, 그녀가 감염자들을 속였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다면, 아니면 남몰래 감염자에게 해가 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난 그녀와 싸울 거다. 그녀에게 배신의 대가가 뭔지 알려줄 거야.
우르수스와의 수많은 사투 속에서, 난 내 능력을 갈고닦았고, 내 생각을 더욱 견고히 했다.
그래서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그녀를 이길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녀를 저승길 동무로 함께 데려갈 수는 있다고.
그 고집불통 영감은 내 생각에 찬성하지 않을 거다. 그는 너무 오래 싸워왔고, 더 늙어서 쓸모가 없어지면, 결국 희생을 강요받게 되겠지.
- 나는 네 아버지의 방법에 동의할 수 없다.
그는 적을 상대할 때는 강경하고, 친구를 대할 때는 성실한 사람이다. 그가 그 사람들을 지켜줘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는 분명 그 친구들의 현실을 마주하게 될 거고, 그게 결국 그를 나약하게 만들겠지.
한평생 타인을 믿은 노인네…… 그 고집불통인 노인네는, 배신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생각해 본 적 없을 거다.
어쩌면 그런 쓰라린 경험을 삼키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배신당한 고통을 혼자 끌어안고, 아무 말도 안 하면서 말이야.
리유니온에는 소문을 듣고 가입한 감염자부터, 자기가 저질렀던 짓을 전부 받아줄 거라 생각하고 가입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감염자들이 모여있다.
그래서 리유니온의 내부는 분열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리더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지. 심지어 그걸 묵인하기까지 하고 있어.
용문에서의 일이 끝나면, 난 반드시 체르노보그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그때는 반드시 그녀를 만나야겠어.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난…… 형제자매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기로 약속했다. 죽기 전까지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 왜 이런 걸 내게 말해주는 거지?
네 눈빛이 내게 말해줬거든. 넌 남들 같은 망나니가 아니라고 말이야.
- 그럴지도 모르지, 뭐 어쩌겠어?
- ……
-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자신을 의심하는 게 가장 좋은 거다. 그래야만 무언가에 대한 믿음으로 고집만 부리지 않게 될 테니까.
……바깥에 소리 들려?
위쪽 폐허를 파헤치고 있는 것 같다.
내 몸도 이제……
좋아… 이제 손가락이 움직인다.
고마워.
- 왜?
- ……
- 내가 뭘 했다고?
시간 때우는 걸 도와줘서 고마워.
{@nickname} 박사, 너와 내기 하나 하고 싶은데.
……
만약 네 팀원이 먼저 우리를 발견한다면……
난 너희 모두를 순식간에 죽여버리겠어.
그리고 만약 내 형제자매들이 먼저 발견한다면, 네 목숨은 여기까지인 거고.
어때? 한 번 걸어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