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4오로지 순탄한 길뿐
렌킨은 자신을 따라 마을을 떠난 광부들과 함께 초소 인근의 갱도에 들어가, 초소를 우회하는 탈출구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갱도 안에 출구는 없고, 일행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오래도록 참고 견뎌온, 저항할 의지를 가진 수많은 동포들을 만나게 된다.
춥고도 긴 밤.
벌거벗은 땅 위로 서리가 겹겹이 내려앉았고, 하얀 서리 위로 어지러운 발자국이 태양이 사라진 저 멀리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대지와 밤하늘이 맞닿은 경계에서, 듬성듬성한 검은 점들이 한 줄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네바 호수가…… 벌써 얼어붙었네.
젠장, 올해 날씨는 유별나게 추워. 아직 겨울이 오지도 않았는데…… 왜 웃어?
31년 겨울이 생각나서 웃었어. 이고리 대제가 바로 이 네바 호수에서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를 수비하던 마지막 부대를 물리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히포그리프 왕국의 멸망을 선포했지.
그래서? 너도 우리를 이끌고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로 돌진하게?
닉토, 아직은 때가 아니야…… 적어도 지금은.
흠…… 내가 떠올린 건 다른 얘기였는데.
150년쯤이었을 거야. 당시 아주 유명한 극작가가 이고리 대제가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로 입성하기 전의 이야기를 소재로 각본을 썼어.
그의 의도는 이고리와 당시 식자라고 할 수 있었던 히포그리프 귀족 미하일 사이의 우정을 찬양하려는 거였어. 둘은 히포그리프 왕국을 무너뜨린 봉기에서 전우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 각본은 우르수스 각계각층의 거센 비판을 받았어. 이고리가 히포그리프 귀족에게 '타협'해 일부 권력을 내주고, 그 대가로 소수 귀족의 지지를 얻었다는 내용이 있었으니까.
그런 줄거리를 당시 우르수스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건 이고리 대제를 향한 악의 가득한 모욕이나 다름없었거든.
결국 그 극작가는 자신이 '역사적 사실'이라 주장한 줄거리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했어.
그가 죽고 수년이 지난 후, 이고리와 히포그리프 귀족이 맺은 협정의 원본이 세상에 공개되었고, 그제야 사람들은 그게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지.
재밌는 이야기네.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가 숭배하는 전설적인 인물이 그저 날조된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고리 대제조차도 순리를 따를 줄 알았다는 거야.
렌킨, 우리는 계속 가면 안 돼.
조금만 더 가면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야.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 주변의 경비 병력은 크라이니 세베르랑은 차원이 달라!
그러다 발각되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감시팀이 아니라 군단이라고!
계속 우회하면 제때 국경에 도착할 수 없어. 그러면 우린 황야에서 겨울을 맞이하게 될 거야.
우르수스의 겨울을 견디는 것보단 순찰대 한두 개를 상대하는 게 더 낫지.
그런데, 꼭 우-카 접경지로 가야 해? 그 소문으로만 듣던 '리유니온'을 꼭 찾아야겠어?
너도 그게 얼마나 먼 길인지 잘 알잖아. 가다가 적을 마주칠 수도 있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어. 게다가 이 사람들, 우리의 식량, 우리의 옷차림을 좀 봐. 겨우 이걸로 그 여정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해?
좋아, 백번 양보해서 우리가 우-카 접경지에 도착했다고 치자. 그런데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게 감염자들의 농장이 아니라, 또 다른 광산이라면? 그럼 또 어떻게 할 건데?
……그럼, 네가 말해 봐. 우리에게 다른 길이 있어?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냐고?
방법이야 어떻게든 있겠지……
그래…… 동쪽으로 가면 되잖아! 니콜리스크로. 그 오래된 도시는 거의 버려진 거나 다름없어. 주변 마을에 사람도 적을 거고.
그쪽으로 가면 돼. 사람들에게 흩어져서 각 마을에 숨으라 하고…… 그래야만 우린 살 수 있어.
그렇게 남은 삶을 계속 노예처럼 살려고?!
닉토, 나는 너에게, 모두에게 선택할 기회를 줬어.
적어도 난 함께하기로 한 사람들이 모두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줄 알았어.
하지만 모두의 목숨을 그 허황한 목표에 걸 순 없잖아……
렌킨, 내가 보고 왔어.
앞에 있는 초소에 사람이 있고, 탐조등도 켜져 있어…… 아직 완전히 버려진 게 아니더라고.
이 길로 가지 못하면, 우리는 그럼……
렌킨, 들었어?
탐조등…… 몇 개를 봤다고 했지?
기…… 기억이 잘 안 나. 2…… 아니, 3개였나?
잘 생각해 봐, 도대체 몇 개야!
두 개! 맞아, 생각났어! 동쪽이랑 서쪽에만 불빛이 있었어. 두 개가 맞을 거야!
두 개라면…… 경비병 규모는 백 명 남짓일 거야. 어쩌면……
렌킨!!
……
렌킨, 뒤를 좀 봐…… 우리에게 남은 사람은 이제 이게 전부야……
이 사람들은 네가 원하는 군대가 아니야. 그저 살고 싶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설마 너도 그 광산 주인들처럼, 사람들을 돌아오지 못할 갱도로 내몰려는 거야?
렌킨은 뒤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램프 불빛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의 표정이 또렷이 보였다……
고통, 피로, 체념, 그리고 공포……
어쩌면 닉토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옷은 너무 얇았다. 이대로라면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은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니……
나는 그 어떤 동료의 목숨도 가볍게 여기지 않아. 불가피한 희생이 생긴다 한들, 절대로 그 어떤 희생도 무의미하게 만들진 않을 거야……
이제 우린 절대 돌아갈 수 없어. 다시 누군가의 노예였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날 따라와…… 다른 길이 있어.
이 밑에 이렇게 긴 갱도가 있었어……?
렌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여기 갱도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몇 년 전, 누군가 이런 구상을 내놓은 적이 있어.
크라이니 세베르에는 수천 개의 광산이 있고, 광산마다 수백 명의 광부가 있어. 하지만, 광산끼리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아…… 만약 우리가 이 광산을 연결한다면?
우리가 직접 통로를 뚫어…… 툰드라 밑에 연결망을 펼쳐 모두를 이어준다면, 서로 부족한 걸 나누며 서로 도울 수 있잖아. 우리보다 지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너…… 그동안 계속 이걸 준비해 온 건 아니겠지? 설마 일찍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미래를 내다보는 선지자가 아니야. 난 단지 우리끼리 뭉쳐서 서로를 도와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을 했을 뿐이야.
처음으로 이 생각을 해냈을 때, 설득할 수 있는 건 고작 주변에 있던 열 몇 명이 다였어. 더 먼 곳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지.
하지만 그 후, 다른 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일을 했다고 들었어…… 적어도 눈앞의 이 갱도는 안전해 보이긴 해. 뜻밖의 행운인 셈이지.
이건 어디로 통하는데?
남쪽과 가장 가까운 볼그라드 광산지구,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의 남동쪽이야. 갱도를 통해 그곳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 경비망을 피할 수 있어.
……
그래도 군대가 우리 뒤꽁무니를 쫓아오지 않기를 기도해. 안 그러면 우린 진짜 끝장이니까.
위험하지 않은 길은 없어.
잠깐…… 알코올 냄새가 나.
여기 술이 있을 리가……
엎드려!
한 줄기의 차갑고 날카로운 빛이 어둠을 뚫고 나와, 유일하게 켜져 있던 램프를 부숴버렸다.
어떻게 된 거야……
다들! 엎드려! 움직이지 마! 반격하지도 마!
*우르수스 욕설*, 들킨 것 같아!
빨리! 지원을 요청해!
……?
잠깐! 멈춰! 우린 적이 아니다!
렌킨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광산 깊숙한 곳까지 울려 퍼졌다.
너희는……
감시팀이…… 아니구나?
마침,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할 참이었는데…… 답은 알 것 같군.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이 거점도 발각된 줄 알았는데!
너희는 어디서 왔어?
중앙 광산지구.
중앙 광산지구?! 거기에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구나!
세상에…… 호위병들이 학살을 저질러서 거기 있는 사람들이 몰살당했다고 들었는데!
훗, 그런 소문이 퍼진 이유를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우린 아직 살아있어. 감시팀을 물리치고 도망쳐 나왔지. 우린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야! 최근에 들은 것 중에 제일 좋은 소식이네!
잠깐만……
저기 친구, 우리가 이 갱도를 통해 남쪽의 볼그라드 광산지구로 가려고 하는데, 이쪽으로 가면……
남쪽? 안 돼. 남쪽으로 가는 갱도가 무너졌어.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여기 머물러 있진 않았겠지.
역시……
또야, 렌킨, 또! 왜 우리가 가려는 길은 죄다 막혀 버리는 거야!
……
잠깐…… 렌킨? 네가 렌킨이야?
네가 어떤 렌킨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이름이 렌킨인 건 맞아.
네가 렌킨이구나! 중앙 광산지구의 렌킨이 실존 인물이라니…… 심지어 살아있어!
내 이름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줄은 전혀 몰랐는데……
아니다! 일단 얘기는 이쯤하고, 우리 생활 구역으로 안내할게.
너희,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인다고. 우리한테 먹을 것과 물이 있어. 넉넉하진 않지만, 함께 나눌 수는 있어.
생활 구역이라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많아?
그래……
아주 많아.
일행은 램프의 미약한 불빛을 따라 갱도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어둑한 동굴 안쪽에 서서히 불빛이 나타나더니, 이윽고 대화 소리도 들려왔다.
갱도 모퉁이를 돌자, 좁은 공간에 꽉 들어차 있는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충 봐도 몇백 명은 돼 보였다.
그들 중엔 광부 작업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얇은 옷을 걸친 사람도 있었으며, 노인과 아이도 있었다…… 주위에는 허름한 생활용품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곳은 그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너희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야? 너 순찰하러 간 거 아니었어? 어쩌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왔어? 이 사람들은 누구야?
다들 주목! 소개할게, 이쪽이 바로 그 렌킨이야!
렌킨! 이 친구가 렌킨이라고!
렌킨, 그 이름 들어본 적 있어! 네가 바로 각지의 광산을 연결하자고 한 그 사람이잖아!
소문만큼 덩치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하구먼……
아저씨는 카시미어인이랑 싸워본 적 있죠? 숲의 수호자가 진짜로 있나요?
……
사람들이 앞다퉈 다가와 이 전설 속의 인물을 훑어봤다. 존경, 기쁨, 그리고 상상과의 괴리,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결국 그 이름에 대한 격렬한 환호가 되었다.
렌킨, 렌킨.
그만, 이젠 그만해. 어려운 일을 겪고 온 친구들이니, 일단 좀 쉬게 해주자.
조야, 창고에서 빵 좀 가져와. 큰 걸로. 인색하게 굴지 말고.
……너희는 왜 여기서 살고 있어?
얘기하자면 긴데……
3년 전, 네바 저수지가 무너지는 바람에 인근 광산들이 쓸려나갔어. 광산 관리자는 우리가 인근 도시로 도망갈까 봐 지하를 못 떠나게 했지.
그러다 우리가 있던 갱도마저 무너지면서 절반은 물에 휩쓸려 죽었어. 우리는 그나마 운이 좋았고……
……
그렇게 우리도 여기서 죽을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지하에서 다른 광산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발견한 거야.
그렇게 다른 광산에서 먹을 걸 가져왔지. 그런데 밖으로 나갈 용기가 없어서, 이 지하에서 쭉 살고 있었어……
여기서 쭉 살았다고? 그럼 생계유지는 어떻게……
각 광산의 화물 운송을 좀 도왔어.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먹을 걸 나눠주기도 했고. 아, 감시팀 놈들의 물자를 털기도 했지…… 무스비스트처럼, 하하.
그리고 우린 계속 통로를 개척했어. 동쪽으로는 우랄, 서쪽으로는 크라스, 수많은 광산을 연결했지.
나중에는 다른 광산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도 받아줬어.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사람만 천 명이 넘을 거야.
여기…… 아이도 있네.
맞아요…… 겨우 2살이에요. 아직 햇빛을 본 적도 없어요……
*우르수스 욕설*!
어찌 됐든, 우리는 살아남았어. 우리는 살아있어! 이게 다 네 덕분이야, 렌킨!
네가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우린 진작에 죽었을 거야!
아니……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고마워할 필요도 없어. 너희는 스스로 살길을 찾은 거야.
하지만 너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거야……
하지만, 렌킨…… 그렇다면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우리도 이런 곳에서 한평생 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광산을 떠나면, 어디로 갈 수 있지?
……
……나랑 같이 가자.
어디로?
남쪽으로.
우-카 접경지로 가서, 감염자들을 위한 농장을 찾아 우리만의 땅을 개척하는 거야.
우리랑 같이 가자.
진정해…… 렌킨.
잊었어? 바로 앞이 네바 호수 초소야.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놈들의 코앞을 지나가겠다고?
우리가 초소를 점령하면 되지.
너 미쳤어……
닉토,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나는 자신이 있어.
네바 호수 초소의 병력은 고작 100명이야. 중무장도 없고.
300명, 석궁과 곡괭이를 들 수 있는 300명만 나와 함께 싸운다면, 우리는 네바 호수 초소를 점령할 수 있어. 놈들이 지원 신호를 보내기 전에 섬멸하는 거야.
보름 후, 보급품 부대가 그들의 시체를 발견할 때면, 우린 이미 광활한 바톤 평원에 도착해 있을걸!
그때쯤이면 목적지는 바로 우리 코앞에 있을 것이고, 그 무엇도 우릴 막을 수 없어.
아니…… 넌 미친 게 분명해.
정말 모르겠어…… 어째서 넌 항상 무모한 길만 선택하는 거지? 어째서……
렌킨은 옆 사람의 반대를 무시하고, 돌아서서 몰려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렌킨, 나도 네 생각에 동의해. 나는 너와 함께 초소를 공격하겠어.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널 따르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거니까.
말을 마친 광부는 렌킨과 악수한 뒤, 그의 뒤에 가서 섰다.
렌킨과 함께 초소를 공격할 사람은 이쪽으로 와.
인파 속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청년이 다가와 렌킨의 뒤에 섰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거나, 가족에게 옷자락이 붙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널 따르겠어, 렌킨.
네가 말한 우-카 접경지에 있는 감염자들의 땅이 어떤 곳인지 모르겠지만, 여기보다 더 나쁘지는 않겠지.
우린 널 믿어. 넌 렌킨이니까, 모두를 하나로 뭉친 영웅이니까. 결과가 어떻게 되는……
렌킨은 손을 들어 동료의 말을 멈췄다. 그는 고개를 숙여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다시 고개를 들어 모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기, 혹시 우르수스의 봄을 본 사람이 있나?
침묵이 흘렀다.
나는 봤어. 내가 국경에서 복역하던 시절에.
눈이 녹으면 땅에서 다시 풀이 자라나고, 떠나갔던 파울비스트는 다시 우르수스로 돌아와.
가끔은 오랫동안 지지 않는 태양 때문에 눈이 부셔 미칠 것 같은 때도 있어. 그럴 때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써야 겨우 잠이 들지.
햇살, 풀, 파울비스트, 산들바람…… 이런 것들은 갱도 안에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가질 자격이 없는 게 아니야!
이것들은 결코 사치가 아니야. 이것들은 너와 나, 우리의 아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평범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다!
렌킨의 연설은 쩌렁쩌렁 울렸고, 깊은 갱도 안에서 오랫동안 메아리치며 모두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물론, 이건 위험한 싸움이야. 나는 거짓말할 생각도 없고, 강요할 생각도 없어.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야 해. 희생 없는 저항도 없고, 낙오 없는 행군도 없어.
희생이든 낙오든, 용기든 두려움이든, 부디 곁에 있는 사람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우리는 서로를 부축했고, 같은 고통을 함께 나누었으니까.
우리는 영원한 동료이자, 영원한 전우니까.
오늘 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겠지. 그렇다면 살아남은 사람은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살길을 개척하는 거야.
그때가 되면 우리는 초소에 횃불을 밝힐 거야. 희생자를 기리는 동시에, 생존자들에게 기억하게 하고, 억압하는 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만 출발하기에 앞서, 나는 너희에게 내 생각을 털어놓고 싶어.
난 모두가 나에게 힘을 보태주기를 바라고 있어.
왜냐하면, 이 한 걸음을 내디뎌야만 우리는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고, 햇살을 누릴 수 있고, 다시 평범한 사람의 삶을 살 수 있으니까!
렌킨의 가슴은 거칠게 들썩였고, 피가 끓어오름과 동시에 강한 힘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그의 두 팔은 연설과 함께 힘차게 휘둘렸다.
동시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마치 그가 중앙 광산지구의 깊숙한 갱도 안에서 처음 사람들에게 호소했을 때처럼.
형제자매들이여,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비인간적인 삶을 떠올려 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백비스트처럼 갱도 안으로 내몰리지만, 그들이 목숨으로 캐낸 오리지늄은 정작 다른 이의 이부자리를 데우는 데 쓰이지. 이건 법 같은 게 아니야, 살인이지.
그래, 살인이야. 그들은 우리의 입을 막으려 했고, 우리를 죽을 때까지 가두려 했고…… 우리를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지,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어 짐승과 다를 것 없이 만들려고 했어.
다행인 건, 우리는 저항을 잊어버리지 않았어. 갱도를 통해 우리는 여러 광산을 연결했고, 계엄령이 내려진 후에도 봉쇄를 뚫고 죽음의 땅에서 벗어났지.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해. 우리는 도망만 다닐 순 없어. 우린 반드시 적과 맞서야 해.
그러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어보겠지. “우리가 뭘 해야 하지, 렌킨?”
정말 어렵지만, 아주 간단하기도 해. 우선, 첫걸음부터 내디디는 거야.
우린 오늘 밤 전투를 첫걸음으로 삼아, 더 많은 이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리고, 우리처럼 억압받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에게 알릴 거야. 다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마. 겁먹을 필요도 없어. 그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놈들은 결코 강한 게 아니야. 강한 건 우리니까!
우리는 목숨 말고는 더 잃을 것도 없어…… 만약 그들이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주지 않겠다면, 우리는 목숨으로 쟁취하면 돼!
만약 누군가가 “우리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라고 묻는다면?
억압하는 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고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줬어. 만약 그 징벌이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이고, 모든 것을 불태울 만큼의 분노가 필요하기 때문이야.
이고리 대제는 높이 날던 히포그리프의 날개를 꺾어버렸어. 그러나 오늘날, 그의 후손들은 히포그리프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지.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이 그놈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려야 해!
결국 우리의 무기는 다시 한번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의 금빛 성문을 열어젖힐 것이고, 우리의 곡괭이는 이 대지를 가를 것이고, 사람을 삼키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그 사악한 얼굴을 찢어버릴 것이다!
결국…… 우르수스 전체가 우리를 보게 되고, 우리를 두려워할 것이며, 우리를 인정하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우리에겐 빛나는 미래가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