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교전 시야 확인
테레시아가 남긴 잔향을 듣게 된 W는 마침내 테레시아가 살카즈의 영혼들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그녀는 테레시아를 마주할 준비를 한다.
찾았다.
……
미친놈…… 그 녀석들이 말처럼, 너는 미친놈이야.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네. 그럼 나한테 잡힌 사람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도 잘 알고 있겠지?
말해 봐. 카즈델 근처 어디에 배치했지? 이 간단한 전투 뒤에 무슨 비밀을 숨겨놓은 거야?
테레시스가 도대체 무슨 일로 카즈델을 버렸는지는 귀찮아서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날 바보 취급하면 안 되지.
너도 내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네가 무릎 꿇고 제발 용서해 달라고 애걸복걸할 때까지는 버티겠지.
하.
용병……
너는 항상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누구나 죽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말이야.
죽음이 스쳐 지나간 행운아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너도, 그 여자도 도망칠 수 없다…… 애써봤자 전부 헛수고일 뿐이야.
그러는 너는?
나? 나는 이만 퇴장해야지.
잘 들어라, 살카즈. 연약함과 작별을 고해라.
새로운 시대가, 우리의 시대가 찾아왔다.
그 '우리' 속에 내가 없다고 해도 말이야.
……
W! 방금은…… 너, 손이…… 메딕 오퍼레이터! 여기 응급처치 좀 해 줘!
젠장, 스스로 수류탄을 터트렸어.
늪은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썩은 내는 강풍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황야는 왜 이렇게 어두운 걸까?
불안감이 점점 강해져 간다.
살카즈 전사들이 죽기 전에 지은 표정들은 매우…… 경건해 보였다.
그런 놈들이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을까?
본함이랑 연락해 봤어?
소대 간의 통신은 일부 회복됐어.
하지만 본함과의 통신은 아직 방해받고 있는 걸 보니, 근처에 활성 오리지늄 환경이 퍼져있는 것 같아.
걱정할 것 없어. 본함이 습격당했다는 소식도 없고, 게다가 본함에는 전하와 그 박사도 있잖아.
곧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거야.
……
차는 어디에 있어? 지금 당장 돌아가자.
하지만 다음 작전 명령을 아직 받지 못했는걸.
멋대로 움직이면 박사의 계획을 망칠 수도 있어.
잠깐만, W! 지금 통신이…… 스카우트야!
스카우트가……
……
……
…………
W는 줄곧 바벨은 그저 목적지에 불과하며, 전과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 왔다.
바벨은 언제든지 깨끗한 음식과 물이 제공되는 곳이며,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를 쉽게 버리지도 않고, 재미있는 녀석들도 몇 명 정도 있는 곳이다.
하지만 결국 쉴 수 있는 곳이면 전부 똑같은 곳이다.
외드레르나 이네스와 함께 행동하기까지, W가 자신의 거처를 잃은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돌아오니 캠프가 불에 타 있는 경우도 있었으며, 때로는 자신의 손으로 캠프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W는 그 어떤 살카즈도 평화와 안녕을 진정으로 누릴 수 없으며, 파괴야말로 일상이며, 혼란이야말로 즐거움을 가져다준다고 여겼다.
하지만 무너진 기둥과 복도에 흩뿌려져 있는 피, 그리고 소리를 지르며 명령을 내리는 의사를 본 W는……
자신이 무너졌음을 깨달았다.
여긴……
비켜! 부상자가 지나간다!
서둘러! 응급실을 전부 비워 둬!
……
비키라고!
전하는?
몰라. 모든 보안 시스템이 무력화됐어. 닥터 켈시도 지금…… 조심해!
……
……너희들 짓이냐?
살카즈는……
이미 끝났다.
그딴 헛소리는 집어치우시지 그래.
그렇군.
그 여자의 피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었군.
너……
다시금 시야가 어두워졌다. 저주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어둠은 모든 빛을 감싸 안았고, 어둠은 모든 빛을 삼켜버렸다. 그 누구도 어둠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전투는 끝났으며, 분쟁 역시 그 끝을 맞이했다.
잘 들어라, 살카즈. 승리자는……
……윽.
날카로운 칼날이 뿔이 없는 자객의 가슴을 꿰뚫었다.
W, 바벨에서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을 텐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규칙 위반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지금?
……
아스카론은 W를 바라보았다.
아스카론은 W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싸워왔으나, W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았다. 이 얼음으로 빚어진 듯한 암살자가…… 이렇게나 슬픈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니.
……아스카론, 스카우트 말이 사실이야?
너는 지금 돌아와서는 안 됐어.
……
전하는 어디 있어?
W, 배 안에 숨어든 적들을 전부 처리해.
로도스 아일랜드는 여전히 위험한 상태고, 닥터 켈시는 긴급하게 처리할 사항이 있어. 지금 나설 수 있는 건 우리뿐이야.
테레시아 전하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물었잖아?
우선 동력층으로 가 줘. 놈들이 가장 먼저 숨어든 곳은 거기일 거야.
야, 귀먹었냐?
전하께서 돌아가셨다면서. 내가 이 두 눈으로 직접 봐야……
잘 들어, 살카즈 용병 W.
테레시아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바벨이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네 할 일을 하도록 해.
아……
하! 이 쓰레기들 같으니라고! 너희들은 전부 쓰레기들이야!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내가 너희들을 믿었다니, 너희들이 전하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다들 대단한 녀석들이잖아? 이 배에 탄 녀석들 전부 엄청난 녀석들이었잖아?
매일 엄청난 소원에 대해서 장황하게 떠들어 대고, 원대한 이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어떻게 사람 한 명 지키지 못할 수가 있지?
그렇다면 놈들이 말하던 것들은,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결국 정말로 멍청했던 건 나였다.
나는……
나는 보았다.
피가 가득 흩뿌려져 있는 의장실에는 발자국이 난잡하게 찍혀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어둠은 이렇게나 짙다. 어둠은 항상 이렇게 짙었다.
테레시아 전하는 죽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전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전하? 전하가 어째서 여기에……
……
문이 아직도 여기에…… 이걸 언제 고친 거지?
하하, 클로저 녀석도, 조금은 쓸모가 있네.
할망구는…… 전하가 떠나고 로도스 아일랜드가 해산하지 않은 건, 할망구와 토끼가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었지.
그리고 나는…… 나는…… 전하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어. 런디니움에 오고 나서 언제 볼 수 있을까 하고……
전하, 사실 전부터 이해할 수가 없었어. 전하가 왜 계속…… 자신을 그렇게…… 그렇게나……
전하가 부서진 문을 왜 그렇게나 신경 썼는지 이해를 못 한 것처럼 말이야……
테레시아는 이미 떠났어.
뭐라고?
그럼 내 앞에 서 있는 건 도대체 누구…… 아니지, 전하랑 대화를 나누다니, 이건 꿈이 분명해. 나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건가?
살카즈에게는 이루지 못한 일이 남아 있어. 나는 그 길에서 나 자신을 바칠 거야.
모두가 편안한 꿈을 꿀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 말이야.
잘 모르겠지만, 전하를 믿고 싶어.
그럼 전하는 어떻게 할 거야……?
……
테레시아는 몸을 돌려 문을 밀었다.
문이 열렸다.
테레시아가 발걸음을 떼자, 수많은 그림자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목소리는 메아리쳤으며,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살카즈는 구원받지 못하리라.”
“우리가 고통을 겪었기에, 그 누구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우리가 증오했기에, 그 누구도 증오를 떨쳐버릴 수 없으리라.”
“모든 무의미한 죽음과 헛되이 낭비된 모든 희망이여…… 낙원은 어디에 있는가? 안녕은 어디에 있는가?”
테레시아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다.
W는 입을 벌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던 차에 W는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대화는 그저 전하가 남긴 잔향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W는 참지 못하고 그림자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전하가 살아있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전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거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 너희들은 나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을 거야.
어떻게 해야 더 멀리 갈 수 있는데……?
전하를 죽인다면, 전하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테레시아도, 그림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나도 느린 발걸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테레시아는 점점 멀어져갔다.
전하!
오랫동안 억눌려 있었던 목소리가 뛰쳐나왔다.
영혼이든 고통이든 다 꺼지라 그래!
전하를 위해서 평온함을 되찾아 주겠어. 아니, 어쩌면 전하는 진정한…… 하지만…… 아아악! 알 게 뭐야!
전부 다…… 끝내주겠어.
전하, 내가 전부 끝내버리겠어.
테레시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춘 것처럼 보였지만, W는 확신할 수 없었다.
테레시아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지다 한 줄기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다시금 어둠이 몰려왔다.
저건 도대체 뭐지?
마왕이 남긴 잔향을 들었구나.
아직도 살아있었나!!
칼리초아가 어느새 W의 등 뒤에 나타났다. 폭탄과 낙석은 칼리초아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칼리초아는 W의 옆으로 걸어가 천천히 문을 닫았다.
그 전하는 이미 먼 곳으로 떠났다.
네 집을 터트렸는데, 아직도 꽤나 침착하네?
이 오래된 유적은 언젠가는 먼지로 변하기 마련이다. 단지 빠르고 늦음의 차이일 뿐이지.
통이 큰 녀석이네. 재미있는 녀석이야. 너한테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겠는걸.
너 엄청 대단한 거 아니야? 전에 있던 마왕들은 널 가지고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안 해 봤나?
내가 모시는 전하는…… 키사르투슈타지다. 역사를 초월한 영웅이자, 기나긴 시간의 강 속 거인이나 다름없는 분이지.
나는 그분을 따라 출정했으며, 그분께서는 나를 무기로 다루었다. 이 몸은 본디 그분의 목숨을 연장하는 데 사용됐어야 했다.
하, 제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충성심 가득한 추종자는 있기 마련이구나.
실험은 실패했다. 나는 스스로의 사명을 이어나갈 수 없었기에, 자신을 유배시킬 수밖에 없었다.
쓸모없는 사람은 그저 영웅들의 파편을 수집하여 저장하고 과거를 추모하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미래의 문을 여는 사람을 기다려 왔다.
나는 지금까지 그 문을 여는 사람은 테레시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너……
말라비틀어진 모습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제단의 파편을 주워 잘게 빻아 가루로 만들었다. 곧이어, 어두운색의 가루를 뺨을 따라 바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눈물 자국을 연상케 했다.
테레시아 전하는 이미 떠났으니, 마지막 잔향은 네가 수습하거라.
마왕의 옛 부하인 젊은 살카즈여. 네가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해신부의 소굴을 발견했으니, 뭐라도 남겨놓고 가야지.
칼리초아가 고개를 숙이자, 발밑에는 다수의 폭탄이 놓여 있었다.
너는 어째서……
내가 아는 늙은이들 중에 너는 그래도 제법 재미있는 편이었어.
하지만 고해신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니만큼, '선물'을 좀 주고 가야겠어.
용병,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테레시스의 묘비에서 찾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