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0들끓는 피바다
뱀파이어 생귀나르는 전장으로 나아가, 일족이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니고 있었던 '티카즈의 피'를 사용하여 의식의 마지막 단계를 수행한다. 더 샤드 빌딩의 상공에 무언가가 강림하려는 가운데 아미야와 로고스가 그에게 맞선다.
참으로 시시하군요.
그렇게 하면 저를 도발하고, 모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러면 제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당신의 시체를 걷어차고, 주제넘는 행동에 욕설이라도 내뱉을 것이라 생각했나요?
그럴 리가요, 레토. 르네 레토.
하찮은 레토…… 제 눈앞의 이 대지와도 같이 지긋지긋하군요.
당신의 그 행동들이, 당신의 비참한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스스로가 뭐라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그 태도는 여전하군요, 레토.
저는 그런 당신에게, 단 한순간의 시선도 주지 않을 겁니다.
……테레시스.
뱀파이어.
만약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의 거짓된 '군사위원회'에서 저도 어떤 직책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관련 전황 보고를 마지막으로 받아본 지가 언제였던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군요.
그건 당신이 군사위원회의 회의에 거의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겐 여전히 상응하는 지휘권이 있을 텐데.
“지휘권”이라.
제 아이들은 지휘할 필요가 없답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저의 것이었고, 그들이 섬기는 왕정에 속해 있으니까요.
……
그럼, 그들을 좀 더 잘 관리할 필요가 있겠군.
전쟁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고, 당신의 부하는 더욱 중요한 일을 맡아야 하건만 그들의 방종함은 참으로 골치가 아프더군.
서부 전선에서 너무 시간을 많이 끌었다.
의식에 필요한 일이었다고 해 두지요.
그만한 피와 눈물이 없었다면, 그토록 많은 주술 소재들을 비축하기란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당신과 테레시아가 제게 그랬었죠. 그 상처투성이인, 오래된 문을 찾아냈다고요.
살카즈가 겪어 온 고난의 근원, 운명의 시발점이 정말 그 문 뒤에 있나요?
의식의 준비는 이미 마쳤다.
하지만 이에 필요한 거점 중 하나인, 브렌트우드라고 불리는 마을이 지금 우리의 적들에게 공격 당하고 있다.
지금 제게 그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하는 건가요, 테레시스?
흠, 덕분에 떠오르는 게 하나 있군요. 군사위원회의 명망 높은 '섭정왕'이시여……
군사위원회에서 그 '중요한' 마을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어째서 그럴듯한 대비를 하지 않은 건가요?
수의로 몸을 감싼 캐스터, 뼈와 살로 이뤄진 꼭두각시, 혹은 어떤 주술로 강화되어 피육을 휘두르는 덩치같은 것들로 말이죠.
……
……제가 당신과 당신 동생의 행위를 용인한 이유는, 그대들에게 강대하고 눈부신 영혼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연약한 살카즈들은 그대를 섭정왕이라 부르고, 당신의 곁으로 모여든 고해신부들은 테레시아까지 데려왔어요.
섭정왕, 죽음에서 돌아온 '마왕'. 당신들은 참으로 재미있는 남매죠.
하지만. 이는 당신들의 행동과 힘 때문이었지…… '지위' 때문은 아니에요.
'힘'이라.
흥.
가장 웅대한 저주를 내리기 위해, 저는 이미 이 전장에 축복을 깔아두었답니다.
가장 오래된 왕정 중 하나로서, 저는 자비를 베풀어 살카즈의 핏줄 속에 잠재되어 있던 힘을 불러냈지요.
그럼, 테레시스, 당신은 과연 이를 느꼈나요? 제가 베푼 은혜에 기뻐하고 있나요?
그 불순한 피에서, 어느 정도나 되는 힘이 흘러나올 수 있을까요?
……
결말이 가까워지니, 당신의 기분도 들뜨고 있나 보군.
약점을 잘 숨기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내가 굳이 이를 상기시켜 주길 바라나?
훗.
당신을 위해 의식의 마지막을 완성해 드리지요, 오만한 섭정왕이시여.
하지만 이는 당신 남매의 왜소한 포부를 위해서가 아니랍니다. 당신들은 항상 그 카즈델이란 허명을 지닌 이동도시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이는 그저 기나긴 고통의 길 중간에 있는 또 하나의 쉼터일 뿐이지요.
테레시아는 준비되었다.
더 샤드 또한 빅토리아가 상상조차 못할 힘을 발휘해 낼 예정이고.
그 해골은 외부 캠프의 허브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거기를 통해 브렌트우드로 갈 수 있을 거다.
……흥분되는군요, 그렇지 않나요? 테레시스, 당신은 항상 그토록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군요.
저는 이미 보았답니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솟아오르는 검은 빛이, 마치 흑요석으로 된 벽처럼 진정한 성을 쌓아가는 것을.
……
……훗. 당신은 저를 조급하다고 비웃지만, 당신이야말로 침묵으로 속마음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닌가요?
늦지 않게 돌아와, 그 성대한 장면을 목도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만약 당신이 정말로 이 대지를 다시 빚어낼 힘, 살카즈가 처음으로 접촉했던 그…… '오리지늄'을 찾아낼 수 있다면 말이죠.
그럼 저는 기꺼이 당신을 위해, 카즈델의 이름을 제가 닿는 모든 땅에 뿌려 드리지요.
살카즈, 나의 동포들, 자신의 과거를 외면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분노하고, 저주한다. 그들은 우리의 적들에게 보복을 가하려 한다.
이 어찌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의 동포들은 심지어 핏줄의 기원조차도, 선조의 이름조차도 잊었다.
그들은 무감각과 비탄 속에서 교접해, 추하고 더러운 피를 지닌 자손들을 낳아갔다.
그들은 스스로 이동도시의 그림자 속에 뛰어들어, 골목길에 몸을 숨기고 침략자들에게 음식을 구걸했다.
나는 빅토리아인의 피에 대해 갈수록 흥미를 잃어갔으며, 나는 이에 만족하고 투쟁할 의지를 잃은 살카즈들에게…… 더욱 분노했다.
살카즈가 스스로를 살카즈라고 부른 그 순간부터, 이 '세계'가 그들을 소외하려는 것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내 분노는 가라앉은 적이 없다.
뱀파이어 생귀나르시여, 베헤모스의 표류가 곧 종료되고, 저희는 브렌트우드 부근의 기착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마을은 이미 빅토리아인들에게 함락되었고, 군주님의 피조물들은 지금 그들에게 소탕당하고 있습니다.
……피조물?
그 미개한 버러지들은 그저 선혈의 왕정을 섬기는 아이들이 결정에 주문을 그리려 할 때, 무심코 흘린 몇 방울의 피에 불과하답니다.
빅토리아인들이 자신의 '승리'를 마음껏 축하하도록 두지요.
제가 오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군주시여.
나는 군사위원회의 소령인 살카즈를 흘깃 바라보았다.
테레시스는 자신이 구축해 낸 이 시스템 속에, 왕정 바깥을 떠돌던 수많은 아이들을 배치해 놓았다.
울술라라고 했었나요?
……그렇습니다, 군주시여.
당신의 혈액 속에는 알코올이 너무 많이 섞여 있군요. 그 탐욕과 향락은 용서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망설임은, 정말이지 실망스럽군요.
저라면 그 망설임을 씻겨내 줄 수 있습니다, '소령'.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뱀파이어 생귀나르시여. 저 스스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녀는 긴장하여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 혼혈아들은 맞서 싸울 줄은 안다. 덕분에 그 우둔함을 조금이나마 벌충할 수 있을 것이다.
울술라…… 울술라.
시간 도둑 울술라.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요.
하, '울술라'가 이 해골의 고삐를 잡는다니, 재밌네요.
우연일 뿐입니다, 군주시여. 제가 스스로의 이름을 지을 땐, 정말로 영웅처럼 이렇게 될 줄은……
영웅?
울술라는 겁쟁이였답니다.
심지어 이 베헤모스의 두 눈을 직시할 수조차도 없었고, 그저 베헤모스가 일으킨 난류 속에 숨어 환상에 빠진 사람 몇몇을 간신히 깨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저는 그에게 그런 임무를 주었답니다. 물론, 그렇기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냈죠”.
……
공허한 속삭임이 흘러와, 온 공간에서 메아리쳤다.
드디어 저를 알아본 건가요?
죽음과도 같은 적막.
그것의 지식은 진작에 박리당했다, 남아 있는 것은 그저 자극에 대한 반사밖에 남지 않은 빈 껍데기일 뿐.
곧 도착합니다, 뱀파이어 생귀나르시여.
다소간의 환각이 있을 수 있으니……
따로 알려 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자와는, 당신보다 훨씬 오래 교제해왔으니까요.
회백색의 카즈델이 다이아볼릭에 의해 파멸한다.
화염이 모든 씨족의 텐트를 짓밟는다.
나는 화염의 포효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화염의 탄식을 들을 수 있었다.
어째서 우리는 아직도 굴복하는가! 어째서 우리는 여전히 나약한 것인가!
그대들은 이걸로 만족하는가?
그대들은 이걸로 만족하는가?!
그럼,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
폐허 속에서, 옛 동포가 무릎을 꿇고 흐느낀다.
마왕이 죽었다.
마왕이 마왕을 죽였다.
난 그가 그저 물결 속의 환상이라는 걸 안다.
이게 바로 우리들의 고쳐 쓸 수 없는 역사라는 것 역시.
……
(고대의 살카즈어) 그대들은 피땀을 흘려 이 회백색의 카즈델을 지어 올린 덕분에, 살카즈는 다시 한번 고향을 얻었지요.
(고대의 살카즈어) 그러나 그대들은 고향의 협소함 때문에 분노한 적이 있지 않나요?
(고대의 살카즈어) 이종족의 침략으로 인해 티카즈는 고향을 잃었지요. 그리하여 그대들은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대들의 고향이라 부를 수 있던 것들을 점점 축소시키고 왜곡하면서요.
(고대의 살카즈어) 평원으로 내몰릴 때까지, 지정된 땅에서만 살아야 할 때까지, 그 이름으로만 자신들의 도시를, 마을을 부르기에 이르기까지.
(고대의 살카즈어) 그것이 바로 살카즈가 나약해지기 시작한 시발점입니다.
(고대의 살카즈어) 그리고 지금, 저는 그 종착점 앞에서 과거를 돌아보았습니다.
환상이 끝났습니다.
이 해골은 이미 둥지로 돌아왔군요.
……뱀파이어 생귀나르시여. 한 가지, 말씀드려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브렌트우드의 핵심 마법진을 장악한 부대가 아직도 근처에 있습니다.
놈들 또한 해골이 이동할 때 남긴 흔적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니, 저희의 귀환은 이미 발각됐으리라 생각됩니다.
군주님의 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적들 중에는 어쩌면……
상관 없습니다.
우리의 적이 의식의 노드를 파괴했단 말인가요?
이 해골이 전장에 투하한 마법진들은, 애초부터 그저 진홍빛 왕정이 뻗은 촉수의 말단이었을 뿐입니다.
됐습니다, 이미 끝에 다다랐으니……
그럼, 제가 친히 이 고대 의식의 중심이 되도록 하지요……
아침 해가 떠오른다. 기착지의 부서진 동굴 사이로 핏빛 햇살이 스며든다.
새로운 하루.
하지만 오늘은, 이전까지의 모든 비통한 나날들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추방자'여, 관을 쓴 사냥꾼이자, 우리의 첫 마왕이시여.
만약 일만 년 전 당신의 영혼이 아직도 살카즈의 영혼에 깃들어 있다면……
더 샤드라 불리는 높은 탑의 꼭대기에는 충분한 양의 먹구름이 몰려 있다.
허나 어리석은 빅토리아인들은 이 폭풍을 그저 던져낼 수 있는 투창으로 여길 뿐이다.
이 얼마나 천박한 일인가, 그들의 태생부터 글러먹은 습성 속에는 오로지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눈을 감고, 핏빛 결정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을, 이 전쟁으로 인해…… 아니, 우리가 스스로를 살카즈라 폄하한 이후로부터 이 땅에 흘렀던 모든 피를 느낀다.
그 피는 나의 연민에 전율하고, 나의 부름에 끓어오른다.
만약 당신께서 여전히 저희를 지켜보고 계신다면, 여전히 무너진 고향의 후손들을 지켜보고 계신다면……
만약 그 번번히 왜곡되고 덧칠되어 온, 요원한 전설이 허구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부디 그 요람 속의 고난을 다시 강림시켜 주소서.
부디 저희로 하여금…… 티카즈의 잃어버린 운명을 되찾을 수 있게 하소서.
선혈 한 방울이 내 눈에 맺혀 떨어진다.
그것은 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
……
참으로 멀리 떨어진 소리가 내게 응답하고 있다.
마치 벌써 손에 닿아 있는 것만 같다.
일찍이 흙먼지에 삼켜진 문이 천천히 열린다.
런디니움의 폭풍이 새로운 악장을 연주한다.
으음, 뭔가 아직 부족한 것 같은데……
굉음.
……예상대로, 빅토리아인들이 현재 이곳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의식을 완성할 시간을 벌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뱀파이어 생귀나르시여.
빅토리아인? 훗.
테레시스, 제게 참으로 예상치 못한 기쁨을 남겨 두셨군요.
아니, 아니에요. 울술라라 불리는 레이디여. 우리가 마주해야 할 것은 '빅토리아인' 같은 게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을 목도하기에 걸맞는 우리의 손님이지요.
또 다른 순수한 피를 가진 자, 아직 성숙하지 못한 종.
그리고, 찬탈당한 '마왕'.
……그것이 누구든, 군사위원회의 계획은 필히 실행되어야 합니다.
베헤모스와 저 사이의 연결을 강화하여, 저들이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최대한 막도록 하겠습니다.
뱀파이어 생귀나르시여, 부디……
그대에겐 아직 제게 제안을 할 자격이 없어요.
아, 정말로 보고 싶군요…… 그들이 이번에는 과연 제게 어떤 진부한 헛소리들을 내뱉고, 또 어떠한 절망의 순간을 보여줄지.
그럼, '소령'. 당신은 여기에 남도록 하세요.
그대의 그 딱히 중요하지 않은 일은 이미 끝났습니다.
이 텅 빈 해골이 채워지지 않은지 과연 얼마나 흘렀을까? 사백 년? 아니면 오백 년?
그때, 나는 아직 선혈의 왕정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아직 부패한 전쟁의 왕의 오만한 중얼거림을, 디얄의 주인이 밤의 장막을 향해 휘두르는 채찍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비록 뱀파이어가 한때 그들과 적대했을지라도, 증오와 믿음이 들끓는 강대한 영혼은 여전히 나의 마음을 벅차게 했다.
그때의 살카즈는 이미 고향을 잃은, 뿔뿔히 흩어진 부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여전히 자랑스러운 영혼들의 잔재를 볼 수 있었다.
'파멸'.
피바다가 주문을 삼킨다.
당신은 아직도 그 가여운 문장과 거짓된 주문을 붙잡고 있군요, 밴시.
왜 진정으로 당신에게 속한, 진정으로 당신의 피에 쌓인 권력을 직시하지 않는 거죠?
그대가 노래할 수 있는 엘레지는 지금쯤 더욱 감미로워졌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당신은 침묵했죠, 당신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어요'.
뱀파이어.
지금 도대체 무엇과 이어지려 하는 거지?
이건 절대 살카즈의 문헌에 기록된 의식이 아니다.
지금 깨어나고 있는 저건, 도대체…… 뭐죠?
저건…… 제게 보이는 건, 한 알의…… '씨앗'이에요.
당신들은…… 만 년 전의 주술로 씨앗을 깨워내, 전장에 그려진 마법진으로 영양을 공급하고 더 샤드의 폭풍으로 이를 부릴 생각이겠죠.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런디니움이 완전히 파괴될 거라고요! 오리지늄밖에 남지 않은 폐허가 될 거란 말이에요!
아니, 거기서 끝이 아니에요…… 이 정도 규모, 이 정도의 힘이라면……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살카즈의 복수가 온 테라를 심연으로 끌어내릴 거예요.
……'복수'라.
카우투스, 당신은 여전히 스스로를 살카즈의 마왕이라 주장하지만, 그 관점은 정말이지 편견으로 가득 찼군요.
이백 년 전, 테라 각국은 연합하여 카즈델을 한 차례 멸망시켰죠.
그리고 지금, 그대는 저희가 빅토리아의 수도를 고통과 파멸에 바치려는 것이 그저 이백 년 전의 복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하아…… 또 다시 저를 실망하게 만드는군요.
검은 왕관은 여전히 그대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지요, 이는 분명 '마왕'이 저지른 또 하나의 터무니없는 짓입니다.
적 하나를 살해하는 것과 국가 하나를 도륙하는 것, 도시 하나를 파멸시키는 것과 문화 하나를 지워버리는 것엔 아무런 차이가 없답니다. 살카즈에게, 이러한 것들은 저항이라고 불리기엔 아직 한참 멀었죠.
저희가 이 런디니움이란 이종족의 수도에 온 것은, 애초부터 이런 '반격'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씨앗'이라고요? 나쁘지 않은 표현이로군요.
그 씨앗이 어떠한 광경을 불러올지 지켜보도록 하세요.
편협한 건 바로 너다, 뱀파이어.
무슨 말로 치장하든, 너희들이 저지른 일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내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걱정 마라, 뱀파이어. 이제 들을 수 있을 테니.
“결박하라, 무거운 형틀이 네 육체에 떨어질 것이다.”
아미야!
칠흑의 왕관이 이종족의 머리 위에 떠오른다.
칠흑의 장창이 내 어깨를 꿰뚫는다.
어째서, 이렇게 간단히……
……아니, 뭔가 잘못됐어요!
아…… 선혈이 쏟아진다. 마왕이 나를 위해 상처를 열어주었다.
이는 나와 내 선조들이 만 년에 걸쳐 계승해 온 선혈이다.
나는 그 속에서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또 골라냈다.
지금껏 선혈의 왕정을 다스렸던 이들은, 모두 매일같이 핏속에 혹시라도 존재할 티끝 같은 불순물을 찾아 걸러내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순수한 이유는, 이 피가 단 한 번도 소실되지도, 더럽혀지지도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마침내, 찾아냈다.
피 한 방울을.
만 년의 세월을 겪어 지금까지 계승되어 온……
티카즈의 피를.
대지는 침묵하고, 하천은 멈췄으며, 공기는 슬피 운다.
온 세계가, 그것의 앞에서 예를 갖춘다.
내가 뻗어낸 손을 따라, 피가 천천히 내 앞으로 떠올랐다.
피는 그저 위로, 또 위로……
……저 자의 피가!
의식의 마지막 단계를 완성하려고 하고 있어요!
……
티카즈의 피는 세계 속으로 사라졌다.
……! 런디니움에 남겨진 주문이 방금 그 순간 흔적도 없이 붕괴했다.
런디니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미야, 어서 전투를 끝내라. 무언가가 느껴……
너무 서두르지 마시지요, 손님 여러분들.
혈액이 해골 위를 기어간다……
말라 비틀어진 해골 위에서 핏자국이 솟는다.
마침 이토록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말이에요.
최초의 저주가 지켜보는 아래…… 어쩌면 저희는 오늘……
마지막 '마왕'을, 송별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