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흉조의 소용돌이 · 에피소드 13

13-18가슴을 펴고

메인 스토리작전 후2024-04-16

런디니움에서 레토는 자신의 전우에게 작별의 말을 전하고, 영원히 올드 가디언이 될 수 없었던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 후 그는 뱀파이어 생귀나르의 앞에 서게 되는데, 레토는 그를 죽일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비열한 피를 그에게 흩뿌리기로 한다.


내 옷장에는, 훈장만을 보관하기 위한 서랍이 하나 있다.

씰 군사 학원을 졸업하면서 받은 기념장, 방위군 15년 복무 훈장, 그리고 4년 전 도시 내의 혼란이 가라앉은 뒤 시의회에서 수여한 런디니움 자유 훈장.

서랍의 더욱 깊은 곳에는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시대의 유물들이 있다. 올드 가디언의 코케이드, 링고네스의 벽돌 조각, 코르시카 1세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황금 잔.


그 황금 잔은 반으로 조각났고, 양각된 무늬도 흐릿해졌지만 나는 아직도 꽃무늬 하나하나의 모양과 조각된 사람 하나하나의 표정을 기억한다.

그것은 나의 부모님, 나의 숙부와 숙모들이 항상 마음에 품고 있던 영광이다. 가울의 영광, 결코 빼앗길 수도, 빛바래지도 않을 찬란함.


레토 중령

……그 황금 잔은 무게가 꽤 나가니, 아마 가져다 팔면 돈을 꽤 만질 수 있을 거야. 가울의 예술품은 항상 시세가 괜찮았으니까.

레토 중령

그냥 녹여서 금덩이로 만들어 팔더라도, 어느 도시에서든 가장 비싼 지역에 집 한 채 사기엔 충분할 테지.

레토 중령

이건 내 숙소의 열쇠니까 잘 챙겨두도록. 물건들은 장롱 안에 있다.

레토 중령

다른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해. 올해 있었던 일들은 그저 어쩌다 꾼 악몽 정도로 치부해도 되니까.

전 방위군 병사

중령님, 살카즈에게 쫓겼을 때 저를 도와준 것도, 방위군의 집무실에 저를 숨겨준 것도, 모두 당신입니다.

전 방위군 병사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진작에 방위군 소속도 아닌 데다가, 당신과 같은 가울인도 아닌데……

전 방위군 병사

중령님께서 굳이 이렇게……

레토 중령

받아.

레토 중령

방에서 다른 괜찮은 물건이 보이면 다 가져가도 좋다. 그런 기념품들은, 이제 내게 더는 의미가 없으니까.

레토 중령

상황이 안정되기 전까진 계속 여기에 숨어 있는 게 좋을 거다.

레토 중령

군사위원회에선 이미 방위군의 무장을 해제했으니, 그 살카즈들이 보기에 넌 빅토리아의 시민과 별 차이가 없을 테지.

전 방위군 병사

하지만 제 전우들이 아직 밖에 있습니다. 조금, 음, 불온한 녀석들이라서, 될 수 있으면 구해오고 싶은데……

레토 중령

그들이라면 전부 잡혔다.

전 방위군 병사

……

레토 중령

내가 직접 잡아서 군사위원회에 넘겼지.

전 방위군 병사

당신……

그의 눈 속에서 끓어오르던 분노는, 끝까지 차오르기도 전에 맥없이 식어갔다.


내가 옛적에 내린 평가처럼, 그는 겁쟁이었다. 전투 중에는 용기가 아주 조금이라도 샘솟았을지 몰라도, 결국엔 겁쟁이일 뿐이다.


여기서 나와 함께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그는, 살카즈에게 맞서는 전사들에겐 영원히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영원토록.

……


나는, 비할 수 있을까?

하하.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진작부터, 신경 쓰지 않았다.

전 방위군 병사

중령님, 이젠…… 어디로 가실 예정이십니까?

레토 중령

나?

레토 중령

뱀파이어 생귀나르가 이미 오래전부터 날 기다리고 있다.

레토 중령

여기서 머무르다가, 모든 게 끝나면 그때 떠나도록 해.

레토 중령

살고 싶다면, 나중에 문을 열었을 때 밖에서 환호하는 이들이 마족 놈들이 아닌 빅토리아인이기를 기도해야 할 거야.


……


환호하는 빅토리아인이라……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그래도 빅토리아의 승리라니.

아니, 그저 타성에 젖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난 테레시스가 이기길 바란다, 그것이 그가 내건 가울 재건의 전제조건이니까.


내 모든 희생과 배반, 그리고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들은, 전부 가울을 위해서다.


그래, 가울을…… 위해서다.


부디 그랬기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살카즈 군대에게 압송되어, 멀리 보이는 성벽을 향해 간다.


살카즈들이 런디니움을 그들의 요새로서 공고히 굳히려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마지막 결전이 목전에 다가온 것 같다.


이 빅토리아의 수도를 사수해낼 생각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사람들 중 일부가 내게 증오의 눈빛을 보내왔다. 아는 이들이다. 한때…… 서로 술잔을 주고받았던 자들이다.


아무도 날 막지 않았다. 살카즈들은 내가 어디로 가든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다.


사육되던 파울비스트에게 새장 문을 열어준다 해서, 과연 어디로 날아갈 수 있을까?


???

르네 레토?

???

이렇게 당신과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클로비시아

괜찮은 조짐일 수도 있겠어, 적어도 당신이 아직 살카즈한테 살해당하지는 않았으니까.

클로비시아

잠깐, 얘기 괜찮을까?

레토 중령

……

레토 중령

그래, 알겠군…… 자네는, 자경단의 그 꼬마 리더 클로비시아였나?

레토 중령

자경단의 거점은 이미 우리가 깔끔히 소탕했고, 남은 사람들도 아마 전부 런디니움에서 철수했을 텐데, 자네는 왜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지?

클로비시아

방위군이 사정을 봐준 덕분에. 캐스터가 약속을 지켜 준 덕도 있고.

클로비시아

곧 죽게 될 이 도시에서 자경단이 순조롭게 철수할 수 있도록, 캐스터의 '회색 모자'들이 보장을 해 주더라고.

레토 중령

캐스터 공작이라……

레토 중령

……진작부터 자네의 신분에 대해선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만, 이제 와선 자네가 어느 귀족님의 하인이든 꼭두각시든 내 알 바 아니지.

레토 중령

자네가 믿는 구석이 얼마나 든든할지는 몰라도, 지금의 런디니움은 반항기 넘치는 어린아이가 노닐기에 좋은 곳이 아니야.

레토 중령

전에 숨었던 곳으로 돌아가. 아직 살카즈에게 잡히지 않은 지금이라면 못 본 척 해 줄 수 있으니까.

클로비시아

……레토.

클로비시아

런디니움에 숨어있은 지 충분히 오래됐잖아.

레토 중령

……

클로비시아

자경단이랑 흩어진 뒤에, 난 최대한 빠르게 런디니움에서 새로운 작전 목표를 찾아냈어.

클로비시아

우리도…… 배신을 겪었지. 심지어 아직 누가 배신자인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클로비시아

하지만 그런 것들을 생각할 시간도 없어. 도시 내의 상황은 '이동 도시의 점령'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아득히 벗어났으니까.

클로비시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역사책을 뒤져봐도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야.

레토 중령

잘 알고 있어, 그 누구보다도.

클로비시아

바깥의 상황을 본 적이 있어?

클로비시아

나는 살카즈의 마법진에서 붉은 빛이 하늘로 치솟는 걸 봤어. 다른 나라들의 제식 장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수준의, 수많은 종류의 전쟁 장치들도.

클로비시아

주술사들이 공중에 뜬 채로, 모든 드론과 오리지늄 아츠를 무효화시키고 하늘을 지배하는 것도 봤지.

클로비시아

예전에는 살카즈 군대와 그 소위 '나흐체러르'에 관한 전설들은, 그저 공포감을 키우기 위한 문학적인 과장이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했었어.

클로비시아

더는 아니야.

클로비시아

죽음 그 자체가 문을 활짝 열 때, 우리는 어떠한 지옥을 맞이하게 될까?

레토 중령

공작들은?

클로비시아

……공작들의 군대는 굳건하고 강력해. 하지만……

클로비시아

공작들은 지평선 저 너머에 있으니, 여기에는 닿지 않지.

레토 중령

……

클로비시아

내가 맞춰볼게.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슬프고 괴롭지만, 또 조금은 자랑스럽기도 하겠지?

클로비시아

수많은 잔인한 선택을 내렸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레토 중령

……

클로비시아

테레시스에게 거래를 제안했겠지, 테레시스는 수락했을 테고. 한때 가울의 것이었던 이동도시와 관련해서 말이야.

클로비시아

런디니움은 너무 작아, 살카즈의 야심을 담기엔 부족하지. 테레시스는 그저 이곳을 이용해 테라 각국들의 야심을 자극할 뿐이야.

클로비시아

테레시스가 정말로 당신과 당신의 가울에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해?

클로비시아

런디니움은 지금 완전히 함락되었지만, 당신도 멍청이가 아니니 알아챘을 거야.

클로비시아

카즈델 군사위원회는 애초에 빅토리아를 점령할 계획 같은 게 없었단 걸.

레토 중령

물론이지. 나는 단 한 순간도 테레시스의 약속에 희망을 건 적이 없다.

클로비시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동족상잔의 비극에 몸을 담았고.

클로비시아

기회를 만들고 싶었던 거야? 지금 살카즈들이 카즈델을 위해 하는 것처럼.

클로비시아

어쩌면, 모든 공작들의 힘을 쭉 빼놓을 이 전쟁이 바로 가울의 유령이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올 기회일 수도 있겠지.

클로비시아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클로비시아

……중요한 건 당신, 르네 레토가 정말로 그걸 믿느냐지.

레토 중령

……

레토 중령

내가 그럼 뭘 더 믿을 수 있지?

레토 중령

나는 이미 내 나약함을 인정했다. 자네는 여기에 더해 내 우둔함, 절망, 무의미함까지도 인정하라는 건가?

레토 중령

내게 뭘 원하는 거지?

클로비시아

협력.

클로비시아

자경단, 그리고 살카즈에 맞서, 빅토리아의 웃기지도 않는 귀족들 틈바구니에서 삶을 거머쥐고자 노력하는 자들. 모두에게 아직 기회는 있어.

클로비시아

그리고 당신이 추구하고 있는 그 '가울' 조차도, 어쩌면 그 기회 속에 있을 수도 있다고.

레토 중령

……가울, 가울이라.

레토 중령

자네는 아직도 맞서 싸우려는 부류의 사람인가 보군.

레토 중령

자네 같은 사람들에겐, 먼지 속에 파묻힌 폐허라도 요새의 주춧돌이 될 수 있는 법이지.

레토 중령

모두 그런 사람들이야. 자네, 그리고 군사위원회……

레토 중령

그토록 강대하니, 국가를 뒤흔들고, 역사를 갈아엎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으니…… 나 같은 사람의 운명 하나 정도야 따로 논할 것도 없겠지.

클로비시아

자학은 그만둬. 지옥이 강림하기 전까진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

클로비시아

이걸 속죄로 여기든, 또 다른 항쟁의 시작으로 여기든 나는 신경 안 써.

클로비시아

레토, 나는 우리가……

레토 중령

그럼, 대단하신 자네에게 하나 묻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레토 중령

내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클로비시아

……

레토 중령

거 봐, 자네도 모르잖아.

레토 중령

이만 비켜 줘.

클로비시아

정말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야?

레토 중령

그래.

클로비시아

……그럼 나도 당신을 축복하지 않겠어.

클로비시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내 동료들의 죽음을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끔찍한 결정을 내릴 줄이야.

클로비시아

르네 레토!

레토 중령

됐어. 어서 도망이나 쳐, 살카즈가 곧 올 테니까.

레토 중령

나는 아직…… 작별 인사도 못했으니까.


링고네스가 우리의 눈물에 스며드네♪


전장에는 땀과 눈물이 가득하지만♪


그날은 결국 찾아온다네♪


침략자에게 사형을 선고할 그날이♪


침략자에게 사형을 선고할 그날이♪

레토 중령

……

도시에 살고 있는 한 '올드 가디언'.


이 순간, 어째서 그가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일까?

???

……관등, 성명, 을 대라!

레토 중령

허리춤에 들이댄 곤봉에 여전히 힘이 넘치시는군요, 장관님.

???

닥, 쳐라! 관……등 성명을 대라! 병사!

레토 중령

……

레토 중령

링고네스 영 가디언 제2 근위도약병단, 레토 하사입니다!

노망난 노인

내, 부대인가?

레토 중령

그렇습니다.

노망난 노인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레토 중령

분명 본 적이 있으십니다, 장관님, 그저 잊으셨을 뿐이죠.

노망난 노인

그런가……

노망난 노인

황제 폐하께서, 여기서 요양을 하라고, 명령하셨지만, 그래도 전황을, 알고 싶군.

노망난 노인

사악한, 위치킹은 우리의 함대가, 해치웠는가?

노망난 노인

TV에서, 빅토리아의 터, 터, 털보 공작의 군대를 보았다!

노망난 노인

노, 놈들도 이 틈을 타, 황제 폐하에게 거역하려는 것인가!

레토 중령

아닙니다, 런디니움은 이미 함락되었습니다.

노망난 노인

좋군!

노망난 노인

나는…… 올드, 가디언에, 발탁되겠지! 자네는 아, 아직 아니야! 스, 스스로를 증명, 해야 해!

곧 90살이 되어가는 그는, 진작에 거의 모든 걸 잊어버렸을 정도로 정신이 흐려졌다.


수십 년 동안, 그의 기억은 가울인들이 코르시카 1세를 따라 라이타니엔을 정벌하던 황금기에 머물러 있다.


요양사는 늘 그가 내년이면 목숨이 다할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그는 지금까지 버텨 왔다.


가울이 역사가 되어버린 지금까지.


런디니움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지금까지.

……


내가 방위군에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내린 명령은 이 요양원의 안전을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내 기나긴 방위군 복무 동안, 나 스스로를 위해 행한 단 하나의 일이었다.

레토 중령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링고네스산 랭스 샴페인을 가져왔습니다. 앉으시죠.

노망난 노인

음……

노망난 노인

훌륭한, 술이군. 하사. 으음……

노망난 노인

링고네스가 우리의 눈물에 스며드네♪

노망난 노인

전장에는 땀과 눈물이 가득하지만♪

노망난 노인

침략자에게 사형을 선고할 그날이♪

레토 중령

그 노래를 부르실 때면, 마치 그 모든 고통과 노환이 애초에 없었던 것만 같아 보이십니다.

노망난 노인

……우리의 깃발은 영원히 찬란하리♪

레토 중령

저는 링고네스를 본 적이 없습니다.

레토 중령

저한테 수십 번은 말씀하셨던 그 위대한 궁전도, 그 발전한 도로망도……

레토 중령

……혹시 골딩을 기억하십니까? 꽤 오래 전에, 저와 함께 여기에 찾아왔었던 여자아이 말입니다.

레토 중령

죽었습니다.

레토 중령

이 잔혹하고, 냉혹한, 피투성의의 시대를 위해서요.

레토 중령

그리고 저는, 이 모든 걸 야기한 범인 중 하나입니다.

레토 중령

저는 골딩을…… 아니, 모르겠습니다.

레토 중령

하지만 골딩은 이미 죽었습니다. 제 시야에서 사라졌고, 다시는 절 바라보지 않게 됐습니다.

레토 중령

저는…… 두렵습니다, 장관님.

레토 중령

아미야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제게 말하더군요, 제가 저지른 모든 일들은 나약함 때문이었다고.

레토 중령

예전에 저는 골딩에게 자백했습니다. 전 그저 잇달아 닥쳐오는 파멸 속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라고.

레토 중령

하지만 그래도 저는……

레토 중령

그저 변명일 뿐일지라도,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레토 중령

그 폐허 속에서, 새로운 가울인이 일어나기를……

레토 중령

아니, 아닙니다.

레토 중령

저는 골딩이 햇빛과, 꽃향기 속에서 계속 그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길 바랐습니다.

레토 중령

그 신념은 참으로 아름다웠죠.

레토 중령

그러나, 그러나 저는 결국…… 저는……

레토 중령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했습니다.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장관님.

레토 중령

저희에게, 아직 미래가 있는 것일까요?

……


……

그는, 이미 잠든 지 오래였다.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한때 가울인의 것이었던 검을.


어쩌면…… 살카즈가 이곳까지 쳐들어오기 전에, 꿈속에서 눈을 감도록 해 주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 꿈은 찬란한 꿈일 테니.


……하지만 나처럼 비열한 인간에게, 이를 더럽힐 자격이 있을까……


……


늙어버린 영 가디언의 피가, 내 두 손에 가득 묻었다.


피를 다스리는 군주, 뱀파이어 생귀나르. 그는 빅토리아 궁전의 호화로운 장식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고요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다.

뱀파이어 생귀나르

왔군요, 레토.

뱀파이어 생귀나르

어딘가에 숨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레토 중령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레토 중령

당연히 당신을 찾아뵈어야죠, 생귀나르 공.

뱀파이어 생귀나르

오늘은 꽤나 기운차게 차려 입었군요, 좋아요. 당신은 알고 지내던 그 가울 교사가 죽은 뒤로 항상 우울한 모습이었거든요.

뱀파이어 생귀나르

제 아이들과 내기까지 했었지요, 아이들은 당신이 곧 죽을 거라고 말하더군요.

뱀파이어 생귀나르

하지만 저는 당신을 믿었답니다, 레토.

뱀파이어 생귀나르

저랑 한잔 하시죠. 당신의 숙적, 빅토리아라고 불리는 이 국가의 죽음을 축하하며.

뱀파이어 생귀나르

제가 직접 의식을 거행할 예정이랍니다. 빅토리아에게 가장 오래된 저주,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선사하기 위해서.

뱀파이어 생귀나르

이제 곧 출발할 예정입니다. 제 후예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영광이니, 그대는 참으로 운이 좋군요.

레토 중령

……

레토 중령

생귀나르 공, 당신도 아실 겁니다.

레토 중령

제가 태어났을 때, 가울의 수도는 이미 웰링턴 공작과 그의 비열한 공모자들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한 도시가 멸망했다, 마치 한 번의 탄식과도 같이.

레토 중령

그리고 지금, 당신은 런디니움에 같은 일을 저지르려고 하시는 것 같군요.

뱀파이어 생귀나르

그게 당신에게 슬픈 일인가요?

레토 중령

전 그저…… 생각지 못했을 뿐입니다.

뱀파이어 생귀나르

웰링턴 공작은 링고네스를 해체하고, 도시의 섹터들을 나누어 가졌지요. 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재미없는 빅토리아인들.

뱀파이어 생귀나르

당신은 원수를 직접 갚고싶은 건가요? 훌륭하네요, 그 집착.

뱀파이어 생귀나르

물론 당신에게 그러한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레토 중령

감사드립니다, 생귀나르 공.

나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내 위에 머무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뱀파이어 생귀나르

아아…… 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뱀파이어 생귀나르

비열하고, 줏대 없고, 독선적이면서도 나약한.

뱀파이어 생귀나르

공포에 휩싸여 자비를 빌더니, 이젠 또 절망에 빠져 자멸을 택하다니.

뱀파이어 생귀나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궁금하답니다. 레토, 나의 친구여.

뱀파이어 생귀나르

당신의 티끌같은 삶 속에서, 우리도 벌써 적잖은 시간을 함께해 왔군요.

뱀파이어 생귀나르

……정말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레토?

뱀파이어 생귀나르

아니요, 그럴 수 있을 리가요.

내 피가, 내 심장을 움켜쥐었다.

레토 중령

……

뱀파이어 생귀나르

어쩌면 이 살카즈는 어찌 이리 오만한지, 어찌 이리 자신을 멸시하는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죠.

뱀파이어 생귀나르

실은 그 반대랍니다…… 레토.

뱀파이어 생귀나르

제가 곧 보게 될 것 때문에, 저는 당신을,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여기고 있답니다.

뱀파이어 생귀나르

당신은 확실히 우둔하고, 비열하지요. 자신의 피를 소중히 여기세요.

뱀파이어 생귀나르

원래는 말이죠, 좀 더 재밌는 곳에 쓰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뱀파이어 생귀나르

하아, 우리의 인연이, 이토록 다급하게 끝을 맺게 되다니.

가울인의 검…… 나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비열한 자의 검을.

뱀파이어 생귀나르

불쌍한 사람. 좀 더 노력하세요, 좀 더 발버둥치세요. 곧 검자루가 손에 잡힐 테니.

레토 중령

……내가……

레토 중령

내…… 하사하마……

뱀파이어 생귀나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레토 중령

내 말은……

칼날이 내 목을 그었다. 차갑고, 시렸다.


내 더러운 피가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진홍빛 액체가 그의 옷자락에, 얼굴에 튀었다.


하.

레토 중령

네놈에게, 내 피를 네게 '하사'하겠다는 거다, 이 더러운 거머리 같은 놈아!

레토 중령

이제 다시는 네놈의 순결한 피를 자랑할 수 없을 거다!

레토 중령

왜냐하면, 이 비열한 르네 레토가 그 피를 더럽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