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9도약, 불꽃
홀로 비행선에 들어간 이네스는 파프리카를 인질로 삼았고 맨프레드에게 포위된다. 몸을 날려 비행선에서 뛰어내린 이네스는 공작들에게 경고를 보낸다.
훗, 후회되기 시작하네.
여기 들어온 건…… 역시 좋은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아.
높은 곳일수록 더 완전하고 거대한 그림자를 찾을 수 있어.
그래도 여기는…… 좀 너무 높은 거 아닌가?
……저 좀 놔줄래요?
안 돼, 꼬마 아가씨.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말라고.
이 배는 너무 커. 그래서 귀여운 여자아이가 날 위해 어느 복도에서 튀어나올지 모를 병사들을 감시하며 망을 봐준다면 너무 기쁠 것 같거든.
……
당신도 스스로 빅토리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살카즈예요?
아니, 난 카즈델의 살카즈야.
이해가 안 가요…… 카즈델의 살카즈요? 그런데 왜……
맨프레드 장군 일행과 군사위원회에 충성하는 거 아니에요?
난 나한테만 충성해.
배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
아이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은데.
저…… 저도 몰라요……
진짜 모른다고요!
……넌 이 배에서 어떤 직위를 맡고 있어?
음…… 살카즈 용병요?
훗, 사람을 한 번도 죽여 본 적 없는 살카즈 용병이라.
넌 심지어 사람한테 붙잡혔을 때, 몰래 무기를 꺼내는 것도 할 줄 모르잖아.
맨프레드는 여기서 뭘 하려는 거야? 유치원이라도 차리려는 건가?
맨프레드 장군께서는 저보고 전쟁이 뭔지 배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배웠어?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거요.
축하해, 우리의 의견이 일치하네.
……배 한번 진짜 높이 나네.
장군께서 이 배는 레버넌트의 몸이기 때문이랬어요.
쳇, 레버넌트, 어쩐지.
그래서 그때 아스카론이 그렇게 고통스러워했구나. 놈들이 주의를 돌려서 다행이지.
……배가 아직도 고도를 높이고 있어.
운행하는 방향은…… 전장이 아니야. 이 배는 런디니움으로 돌아가고 있군.
너희 배는 런디니움에서 출발해서 공작 군함을 한 번 공격하고 노포트 구에 며칠간 멈춰 있었잖아.
이제 공작들의 전함이 거의 도착했는데, 또 돌아간다고?
맨프레드에 대한 인상을 바꿔야겠네. 아이를 돌보는 데 빠진 것도 모자라서 소풍까지 즐기기 시작한 거야?
저는……
됐어,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이름이 뭐야?
파프리카요.
네가 파프리카구나? 보고서에서 네 이름을 봤어. 네가 11번 군수 공장의 노동자들을 풀어주고 맨프레드한테 붙잡혔다며.
……
살카즈 용병한테 이건…… 별로 영광스럽지 않은 일이죠?
살카즈 용병에게 영광은 가장 치욕스러운 거야.
그렇군요.
카즈델에 가 봤나요? 카즈델은 어떤 곳이에요?
예전 대장님이 거긴 살카즈의 집이라고 그러더라고요.
넌 어디서 자랐어?
컬럼비아요.
그럼 그렇지.
카즈델에 안 가 본 살카즈는 다들 거기가 사랑스럽고 즐거운 곳인 줄로만 알아.
그건 그저 너희들의 바람일 뿐이야.
네가 아는 형용사 중에 가장 더럽고 역겹고 거지 같은 걸 찾아서 100배 확대하면 그게 바로 카즈델이야.
……듣고 보니 좋아할 마음이 안 생기네요.
그럼 왜…… 그 많은 살카즈가 거길 집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 사람들한테는 집이 필요하니까.
집만 있으면 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거든. 살카즈에 대한 멸시와 학대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살카즈들이 다시 가슴을 펼 수 있을 줄 알지.
훗, 멍청하리만큼 순진하다니까.
어쩌면…… 당신이 살카즈가 아니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
궁금한 게 아주 많네, 꼬마 아가씨. 그건 전장에서 좋지 않은 습관이야.
저…… 전 그냥 얘기한 거예요! 화내지 마세요!
……너무 궁금해서요.
여기에는 저랑 얘기할 사람이 거의 없어요. 맨프레드 장군도 아주 바쁘시고요.
다들 본인이 위대한 일에 헌신하고 있다며 잔뜩 흥분했어요…… 그런데 왜 전 그런 느낌이 안 들까요?
제 눈에 보이는 건 그저 익숙한 얼굴이 한 명씩 죽고, 새로운 얼굴이 바로 그 자리를 대체하는 거예요. 그런데 새로운 얼굴이 익숙한 얼굴이 되면……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져요.
전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
살카즈인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해?
다들 널 살카즈라고 생각한다면 뿔을 깎고 진짜 살카즈인 척하는 게 최고의 선택일 거야.
왜냐하면 너는 살카즈로 살 수밖에 없으니까.
살아가는 것 앞에서 본인의 감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그래서 당신은 살카즈의 전쟁에 참여한 거예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도 가르치지 않은 걸 보니 넌 맨프레드 옆에 더 오래 있어야겠네.
맨프레드 장군께서 《살카즈 전쟁사》라는 책을 빌려주셨어요.
……
그 작가랑 아는 사이야. 외드레르라고, 멍청한 녀석이지.
'살카즈의 전쟁', '빅토리아의 전쟁', '공작의 전쟁', '왕정의 전쟁',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다 멍청이야.
전쟁이 자기 거라고 떠들어댈 정도로 거만한 사람이 어디 있어? 적어도 난 안 그래.
전쟁은 그냥 전쟁이야. 그게 다라고.
당신은 이번 전쟁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군요…… 그럼 뭘 믿는 건가요?
내가 믿는 건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며, 팔을 오래 흔들면 아프고 여기서 뛰어내리면 죽는다는 거야.
난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것만 믿어.
의미를 따지는 건 모든 고통의 근원이거든.
마찬가지다. 난 이익은 사람을 충동적으로 만들고 공포는 사람을 초조하게 하며, 이글거리는 불길은 쉽게 꺼지지 않고 무르익은 싸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믿지.
이네스, 손님으로 찾아왔으면 나한테 먼저 인사하러 왔어야지.
맨프레드,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다.
괜찮으면 여기 남아서 우리랑 같이 감상하지.
곧 폭풍이 몰아칠 거거든.
이네스와 맨프레드는 함께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먼지가 일며 여러 대의 고속 전함 편대가 빠르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높이 날아오른 이 비행선은 이미 주위에 정박해 있던 공작 부대의 모든 주의를 끌었다.
비행선의 그림자 속에서 곤충처럼 뒤쫓아 오는 작은 전함을 보자, 이네스의 마음속에 한 가지 깨달음이 지나갔다.
……너희가 원하는 건 불씨구나.
아니, 불씨는 이미 붙었지. 너희는 그저…… 이 비행선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장작으로 쓸 생각인 거야.
캐스터, 웰링턴, 윈더미어, 어쩌면 노르망디까지……
이 탐욕스러운 공작들의 대변인이 모두 이 구역에 모여 있어. 그 주인의 함대는 다른 경쟁 상대의 동향을 살피며 이쪽으로 오고 있고.
이 비행선의 속도가 아주 느린 건 너희가 그걸 기다리며 유인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대공작들은 비행선이 견고한 런디니움 성벽으로 돌아가서 숨어버리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 여기서 모이겠지……
그리고 너희가 기다리는 건 바로 그 순간일 테고.
최고의…… 더 샤드 빌딩의 사격장.
외드레르에게 아주 날카로운 파트너가 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는 건가?
안타깝게도 넌 눈치를 좀 늦게 챘군.
병사들, 저 여자를 붙잡아라.
저 여자가 너한테 무슨 말을 했지, 파프리카?
……
전쟁은 그냥 전쟁일 뿐, 그게 다라고 했어요.
훗……
맞아, 그게 다지.
하지만 시야를 더 넓혀서 보면 전쟁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 또 얼마나 될까?
반드시 이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이네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위원회가 아주 훌륭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있었다.
공작들의 힘은 더 샤드 빌딩이 몰고 온 재앙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또한 공작들은 살카즈의 머리 위뿐만 아니라 각자 상대에게 보복을 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폭풍을 불러올 수 있는 빅토리아의 힘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 이 땅의 모든 국가는 공포를 느끼며 분노할 것이다.
각 세력은 이 힘을 무너뜨리거나 아예 가지려고 할 것이다.
이때, 변방을 지키는 공작들이 서로 싸우다가 몰락한다면?
라이타니엔, 우르수스, 카시미어, 더 나아가 옛 가울 지역까지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게 바로 최초의 불덩이일 것이다.
곧 막을 수 없는 불길이 빠르게 대지 전체를 휩쓸 것이다.
이네스는 알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늦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 시간이 있다.
이 정보를 전달하기만 한다면……
복도 끝, 그림자가 가까워지고 있다. 그건 본인의 그림자가 아니라 이 육체의 주인이었다.
이네스는 예전에 오랜 파트너에게 레버넌트의 전설을 들은 적이 있다. 본인이 진짜 살카즈가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 그림자가 있었지.
해가 떠오르며 길었던 밤이 드디어 끝났다. 발밑의 이동 구역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래.
충분히 높은 곳을 찾은 나한테 감사해야겠어.
……떨어지면 정말로 죽겠어.
……
훗, 언제나 죽음에서 돌아오던 이네스가 드디어 완전히 죽게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외드레르랑 W는 날 엄청 비웃을 거야.
두 사람이 참혹한 내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네.
……후우.
그녀의 몸이 떨어지고 있다. 광풍에 머리카락이 휘날려 거의 눈을 뜰 수 없다.
하지만 이 정도 높이어야만 노포트 구 전체의 그림자를 모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 높이여야만 그녀의 눈길이 닿는 거대한 그림자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다.
이네스는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단 몇 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눈앞의 그림자 속으로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바로 지금이다.
죽음은 이미 문밖에서 배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