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조용한 기다림
노포트 구에 있는 글래스고는 새로운 리더 카도르의 지도하에 그들의 복싱장을 힘겹게 지키고 있다. 감시받는 골딩은 몰리에게 부탁해 자경단에게 당장 이동하라고 경고할 수밖에 없다.
좋아, 여긴 당분간 안전해.
카도르, 밖이 난리야. 우리는 런디니움에 있지 않은 게 확실해. 오래된 하역탑 정상에 오르면 구역 밖 상황을 볼 수 있을 텐데, 봉쇄 구역 밖에 있어서 접근할 수가 없어.
본다고 해도 별 의미는 없겠지만. 살카즈의 감시가 아주 살벌하거든. 인원도…… 꽤 많고.
……알았다.
저 사람은 뭐야?
흥, 살카즈랑 협상하려고 하더라.
결과는?
직접 봐.
상처는 다 치료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고마워…… 다들 고마워.
맙소사, 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무슨 일이겠어? 살카즈는 벌써 4년째 런디니움 안에 있었다고.
설마 아직도 그놈들을 불쌍한 캐번디시가 초대해서 온 손님으로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들은 여태 한 번도……
여태 한 번도 뭐?
외출이라곤 하지 않는 귀족 나리신가 보네. 아침으로 먹는 치스티밀크도 하인이 식탁 위에 올려줘야 하고. 아니, 그런 사람이 왜 우리 노포트 구에 온 거지?
아니, 난 학자야. 그냥 경제적으로 좀 문제가 생겨서…… 지금 작업 중인 원고만 마치면 아마……
빌어먹을, 서재에서 원고를 꺼내올 겨를도 없었어!
베어드, 넌 정말 궁상맞은 사람을 찾는 데는 일인자라니까.
말조심해. 순조롭게 풀리면 난 로열 사이언스 아카데미의 차기 아카데미션이 될 가능성이 크니까!
“가능성이 크다”라, 흥.
도저히 이해가 안 가. 뉴스에서는 늘……
“모든 게 평온하다”. 그럼 방송에서 무슨 말을 듣길 바란 거야? “시민 여러분, 안타깝게도 현재 런디니움은 그야말로 똥통입니다”?
몇 년 전에 각 신문사와 방송국에 파견한 '특별 지도 요원'이 놀고먹기만 하는 건 아니라고.
하이버리 구의 군수 공장들 위에서 어떤 깃발이 휘날리는지 못 봤어? 오슈테리그 구에서 며칠 전에 발생한 대형 화재 사건은 기억하겠지?
하지만 전쟁이라니…… 방위군은? 대공작들은? 런디니움 주위에서 우릴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살카즈들은 대공작을 못 이기잖아, 그렇지? 마족 놈들은 황무지에 웅크리고 있는 야만인일 뿐이지만, 빅토리아는 이 대지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잖아!
누가 그래? 집에서 달달한 빵이나 먹다가 혼자 갑자기 깨닫기라도 한 거야?
아무튼 난 경찰한테 벽에 눌려서 수색당할 때 한 번도 그런 걸 못 느꼈어.
됐고, 이제 그만 가, '차기 아카데미션' 씨. 넌 우리랑 어울리지 않아.
그…… 그렇지만 어디로 가란 말이야?
내 아파트는 봉쇄 구역 밖에 있고, 충실한 하인도 행방을 알 수가 없어…… 여기에는 아는 이가 하나도 없다고.
쳇.
너 뭐 할 줄 아는 거 있어? 의료, 재봉, 수리, 아니면 다른 거라도 좋아.
내, 내 연구 방향은 문장학이야……
너희들은 공기를 스테이크로 만드는 학문은 연구 안 하는 거냐?
그건…… 내 학술 방향은 아니지만, 좀 어려울 것 같아……
베어드, 저런 녀석들 좀 그만 데려와. 농담도 못 알아듣잖아.
우리의 비축 물자도 한계가 있어.
하아…… 아니면 델핀을 도와서 창고를 관리하라고 할까?
베어드! 또 성가신 일을 나한테 떠넘기려는 거지!
하지만 거리에서 그냥 죽게 두고 볼 수는 없잖아.
이런 때일수록 더 단결해야 해.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그만큼 힘이 커지는 거니까.
'단결'은 무슨…… 하아.
의회와 대공작들이 너희의 그런 점을 배웠으면 우리가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 사람들 단결력이 얼마나 대단한데. 국왕을 죽게 만드는 일에 아주 똘똘 뭉쳤잖아.
그때는…… 하아, 됐다.
도움이 될 만한 점이 있길 바랄게, '차기 아카데미션' 씨.
최선을 다할게! 그런데…… 너희는?
우리?
좋아, '어퍼컷' 복싱장에 온 걸 환영해!
글래스고라고 부르면 돼.
하이디, 잘 지내?
사실 난 요즘 네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서점을 연 아담스 씨가 돌아가신 뒤로 한동안 너와 연락이 닿지 않았으니까.
우리 일을 그만둔 지도 아주 오래됐어.
날 용서해 줘, 사랑하는 친구야. 절대로 네게 숨기는 건 없어.
하지만 난 정말이지…… 막막해.
네가 그랬지. 평화는 반드시 다시 올 거라고……
하지만 난 더 이상 거짓된 희망으로 날 속이지 못하겠어. 더는 방에 숨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여전히 의미 있는 것처럼 굴지 못하겠다고.
그래, 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역사의 차원'을 볼 수도 있겠지……
물론 평화는 올 거야. 결국 오고 말겠지.
그러면 전쟁은 반드시 더 잔인하게 평화를 깨부술 테고.
난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여전히 그러길 바라고 있어.
그런데 하이디, 만약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결국 자기 위로와 위안일 뿐이라면……
아니, 만약은 없어. 어쩌면 이미 사실일지도 모르지……
여기 있는 책들과 책상, 위태롭게 서 있는 학교가…… 어떻게 시대에 대항할 수 있을까?
하이디, 난 더는……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골딩 씨, 괜찮으세요?
몰리…… 돌아왔군요.
편지 쓰고 계셨어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예전이 읽었던 소설들이 갑자기 생각나서요.
주인공은 언제나 호방한 장교예요. 단정하게 군복을 차려입고 입에는 담뱃대를 문 채 전방으로 달려가죠.
하지만 어느 전쟁터인지, 참호 안의 냄새는 어떤지 작가는 절대 알려주지 않아요.
주인공을 연모하는 남자나 아가씨들이 모여서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정교하게 만들어진 다과를 먹기도 하고요……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이건 문학적인 기교일 뿐이고 결말은 언제나 해피엔딩이에요.
욕심이 있는 작가는 이곳의 평론가들에게 '깊이가 있다'라는 평을 들으려고 분위기를 만들기도 해요.
이야기 속에 통제 가능한 죽음을 넣는 거죠. 보통은 주인공의 전우가 영웅을 지키려다가 전방의 참호에서 쓰러지는 모습이에요.
결국 흉악한 적들이 주인공의 손에 죽임을 당하며, 다시 한번 정의와 도덕이 드러나요.
전우의 비통한 장례식에서 명예를 상징하는 꽃잎이 관 위에 가득 뿌려지고, 사람들은 엄숙하게 그들의 위대한 업적을 총정리한 추도사를 바치죠.
이때가 최고로 감동적인 장면이에요. 주인공들은 손을 맞잡고 눈물을 닦으며 하늘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꿋꿋하게 바라보는 거죠……
그리고 이렇게 말해요. 끝내 희망은 찾아오고 모든 희생은 값진 것이다.
자, 작가는 여기에서 멈춰요. 진정으로 행복한 미래는 독자들이 상상하게 두는 거죠. 마지막의 엄숙한 분위기로 충분히 만족스러울 테니까요.
그런 소설을 읽으셨다니 의외네요.
아주 오래전 일이에요.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잖아요.
제가 아직 소녀였을 때 한동안 이런 책에 푹 빠져 있었어요…… 주인공들에게 감정 이입하기보다는 그런 죽음에 빠졌었죠.
가끔은 스스로를 업적을 위해 목숨 바치는 영웅이라 상상하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눈물을 머금고 제가 만들어 낸 시대를 칭찬하거나 최소한 제 희생을 칭송하는 거죠……
하, 참 유치했죠.
그러다가 저는 제가 설탕에 둘러싸인 환상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신 차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차츰…… 저와 그때의 제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예전에 아이들에게 죽음은 엄숙한 화제라고 하셨잖아요.
……훗, 그런가요? 기억이 안 나네요.
제가 습관처럼 말하는 진부한 설교였겠죠.
오늘 구매는 순조로웠나요?
괜찮았어요. 거리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상점 물건도 값이 오르지 않았고요. 다만 방위군이 예전보다 많아진 것 같아요. 살카즈 병사들도…… 더는 숨지 않고요.
근데 다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어요. 단 하나…… 원래 노포트 구였던 곳에 지금은 주변 구역에서 뻗어온 지지대만 남았어요.
……그곳들은요?
몰리,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당신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면 안 됐어요. 하지만…… 레토가 이미 절 주목하고 있고, 외출할 때마다 의도가 불순한 사람들이 따라와서요.
몰리는 아직 그들의 감시 명단에 없길 바라며 시도해 볼 수밖에 없었어요.
아니요, 런디니움의 모두를 위해 힘을 보탤 수 있어서 기쁜걸요.
다만 골딩 씨가 말씀하신 곳들은 지금 썰렁해요. 접선 암호를 다 써 봤는데 아무도 반응하지 않더라고요.
어쩌면…… 다들 이미 포기한 거 아닐까요?
아니요, 그 사람들은 저보다 훨씬 강해요.
제가 편지 한 통을 찾았는데 골딩 씨에게 남긴 걸 거예요. 뜯어 보지는 않았어요.
이건…… 아니요, 이건 그 사람들의 필적이 아니에요.
……편지에 자경단 정보 교환소의 거의 모든 정보가 자세히 적혀 있네요.
뭐라고요?! 하지만, 어떻게……
이건 위협이에요.
그 사람들은…… 우리를 뼛속까지 파악하고 있어요.
그럼…… 골딩 씨, 우리는 어쩌면 좋죠?!
……
몰리, 제가 거점 목록을 하나 더 드릴게요.
제가 직접 가 본 건 아니지만 정보의 흐름을 분석해 봤을 때 그 사람들은…… 아마 거기에 있을 거예요.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업무 수칙을 어기면 안 되지만……
자경단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인 거 맞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렸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죠.
……몰리, 제가 가르쳤듯이 그 어떤 미행자도 조심해야 해요. 미행하는 사람이 살카즈든 아니든 긴장을 늦추면 안 돼요.
거기서 클로비시아라는 여자아이나 클로비시아와 연락이 닿는 사람을 찾아요. 그리고 정보망 전체가 노출되었으니 당장 이동하라고 전하세요!
골딩 씨는 어디 가시려고요?
레토의 사무실에요.
……제가 최대한 시간을 벌어 볼게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전 괜찮을 거예요. 전……
제가 상상한 것보다 더 강해지고 싶거든요.
……
박사님, 꿈을 꿨어요.
꿈에서…… 먹구름이 이 도시를 감쌌고 피 묻은 살카즈 깃발이 모든 건물 위에서 펄럭였어요. 그리고 도시 밖은…… 눈 닿는 모든 곳에 오리지늄 무더기가 빼곡히 자라 있었어요.
대지 위에는 녹슨 왕좌가 우뚝 솟아 있었고 사람들은 검은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절했어요. 왕좌에 앉은 사람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고 절규하는 소리가 하늘을 통째로 찢어놓았죠.
그러다 왕좌의 그림자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어요……
전 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복잡하고 답답했어요……
전 가장 표면에 떠오른 감정만 알아볼 수 있었어요. 고통과……
……원한이었어요.
……
왕좌에 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건 살카즈 영혼들이 예견한 미래일까요? 아니면 마왕의 사명일까요?
테레시아 씨도 이런 꿈을 꾼 적 있었을까요? 혹시 이것이야말로…… 지금 테레시아 씨가 바라는 광경일까요?
아니요, 아닐 거예요.
박사님, 이 꿈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죠?
- 네가 요즘 너무 피곤해서 그래.
- 꿈은 그저 꿈일 뿐이야.
……고마워요, 박사님.
맞아요, 그건 그저…… 꿈일 뿐이죠……
아미야, 박사.
켈시 선생님은 좀 괜찮아지셨어요?
괜찮아진 건 아니야. 원래 몸이…… 약하고 상처가 심하니까.
샤이닝이 여러 방법을 써 봤는데 효과가 제한적이라 아직 깨어나지 못했어.
Mon3tr는 천천히 스스로 복구 중인 것 같아. 정말 회복할 수 있을지, 어느 정도까지 회복할 수 있을지는 우리도 몰라.
제가……
……박사님, 방위군 사령탑에서 제가……
- 다들 이미 최선을 다했어.
- 거기에 테레시스가 나타날 거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켈시 선생님이……
켈시 선생님이 이 정도로 심하게 다치게 되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언제나 여유롭게 모든 문제를 처리하고 우리에게 가장 타당한 조언을 해주시니까요.
전 켈시 선생님이 피곤해하시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
박사님……
- (아미야의 손을 잡는다.)
알아요, 제 몫은 반드시 해낼 거예요. 이곳에서 로도스 아일랜드의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켈시 선생님을 다시 보러 가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침대 곁에 잠시 앉아만 있어도 좋아요.
두 사람, 지금은 중상자 곁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텐데.
클로저가 방위군 사령탑의 데이터들을 모두 분석했다고 전해달래.
클로비시아는 회의를 소집하고 있어.
런디니움의 상황을 다시 평가해야 해.
- 전쟁이 터졌어.
- 우리의 초기 계획은 실패했어.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