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희망을 품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위기로 인해 박사와 아미야는 컬럼비아 황야에 내던져진다. 예상 밖의 조력자, 예상했던 음모, 하지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많다.
5:20 P.M. 날씨 / 맑음
컬럼비아 도시, 티카론토
내 이름은 딜런. 로도스 아일랜드의 저공 비행체 조종사이다. 나는 지금 도시의 거리에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원래라면 나는 비행체 조종석에 앉아 조종 레버를 잡고 있어야 하며, 업무 중 마주해야 하는 건 지형과 난기류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잡고 있는 것은 반으로 잘린 전자동 돌격 석궁으로, 이놈의 제품번호도 오늘에야 알았다. 비록 반밖에 남지 않았다지만, 석궁은 놀라울 정도로 무겁다.
손에 땀이 흥건하다. 만약에 내가 전쟁터에 나가게 된다면 전쟁터는 지상이 아닐 것이며, 컬럼비아의 이런 어두운 뒷골목길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만약 나에게도 선택권이 있다면, 부디 나의 적은…… 하아……
딜런, 내가 지금 좀 바빠서 그러는데, 여기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대신 봐줄 수 있어?
경찰이라고 적혀있어요, 블레이즈 씨. 티카론토의 '경찰'이요.
이 녀석이 먼저 공격했어.
하지만 이 경찰공무원증은…… 진짜는 아닌 것 같아요. 너무 허술해 보이는데요.
그나마 얘는 유니폼이라도 경찰 같아 보이잖아. 아침에 옥상에 있던 그 녀석들도 그렇고. 유니폼조차 준비하지 않은 녀석들보다는 훨씬 그럴듯해.
다시 한번 물어보자, 질문과 동시에 전자동 돌격 석궁을 쏘는 경찰이 정말 있다고 생각해?
컬럼비아?
장난치지 마. 이 사람 경찰이 아닌 것 정돈 알잖아. 적어도 우리가 아는 그런 경찰은 아니야.
나는 고개를 들어 반대편 골목에 쓰러져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본 뒤, 다시 고개를 숙여 손에 든 반 토막 난 무기를 보았다.
석궁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가슴을 겨누고 있었지만, 지금은 두 동강이 나 있다.
이 '경찰'은 의식을 잃었다. 블레이즈가 공격을 할 때 박사의 지시를 떠올렸다면 그는 아직 숨은 붙어있을 것이다.
로도스 아일랜드의 대표단은 어제 티카론토시에 도착했다.
몇 번을 경험해도, 그 속도는 나 같은 조종사조차 경악을 금할 길이 없다……
로도스 아일랜드가 아직 그랜드 나이트 영지를 향해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이미 날아서 서부 황야를 횡단했다. 저 광활한 서부 황무지를 말이다.
계획대로라면 박사와 아미야가 일 처리를 마친 뒤 우리가 왔던 길을 따라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그랜드 나이트 영지는 아직 도시 조립을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건 카시미어 기사 특별 토너먼트 기간에 로도스 아일랜드가 초대받아 방문한다는 것뿐, 자세한 시간이나 목적은 모른다. 그래도, 아무래도 빨리 가서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이 대도시에서 며칠 휴가를 보낼까 했는데…… 지금은 그럴 마음 없다.
이제…… 안전한 건가요?
아직이야, 티카론토를 나갈 때까지는…… 최악의 경우 컬럼비아를 나갈 때까지 안전하지 못할 수도 있어.
잠깐 나 대신 이 녀석들 아직 숨이 붙어있나 봐줘. 만약 숨이 붙어 있다면 계속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고.
아……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전자동 석궁은 처음 봤어요. 컬럼비아에서는 보급화된 무기인가요?
이런 전자동식 무기는 컬럼비아의 특색이기도 하지.
박사님은 어떻게 됐을까요……
박사와 아미야라면 습격당했을 때 차를 타고 떠났어. 클로저가 말한 자율주행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제대로 당했군요. 박사와 아미야 씨조차 예측하지 못했어요.
박사와 아미야도…… 사람이니까. 가끔은 잘못 판단할 수도 있어.
그 사람들이 호텔을 점거하고, 저희가 남긴 약품 샘플을 전부 빼앗아 갔어요……
뭐, 그 얘기는 일단 접어두자고.
먼저 안전하게 이동할 방법을 생각해 보자, 이 도시를 나가야만 해.
지금까지 우린 모든 것을 잃었지만, 당신은 여전히 내 곁에 서지 않았어.
그렇다면 당신이 해 온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지?
단지, 아주 작은 희망을 남기기 위해서?
하지만, 희망이라고?
희망?
그거 알아? 희망을 품는다는 건 아주 잔인한 일이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막다른 길에 들어섰을 때.
희망은 선량한 사람마저도 미치게 만들지.
- 하지만……
당신은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몸을 가눌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마치 허공에 떠있는 것 같았다. 눈앞의 모든 게 너무나 익숙했고, 또 아득히 먼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기억이다, 파편처럼 당신과 함께 떠도는 기억.
당신은 수없이 많은 생각과 함께 떠있으며, 눈앞의 익숙한 여인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눈을 뜨자 눈앞에는 끝없는 황량한 사막이 펼쳐져 있었고, 흉측하고 괴상한 철통 모양의 헬멧이 있었다.
괴상한 모습을 한 사내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투박한 철통 모양 헬멧을 보고서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10:43 A.M. 날씨 / 맑음
가스파르 황야
굿모닝, 굿애프터눈, 그리고 굿이브닝! 친구!
말을 할 수 있겠나?
- 당신은? 당신은 누구지? 여긴 어디야?
친구가 깼다, 꼬마 토끼.
박사님!
당신은 자신의 허리를 누군가 꼬옥 껴안는 것을 느꼈다.
포옹의 따뜻함을 느끼기 전에, 등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바위의 감촉과 머리의 통증이 당신에게 말해준다. 아직 많은 것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
너무 다행이에요! 깨어나셔서…… 혹시라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괜찮으신가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나요?
- 괜찮아…… 머리만 조금 아플 뿐.
- ……문제없어.
- 난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
머리가 아프다고요? 어디 부딪힌 걸까요? 제가 한번 볼게요.
박사님, 정말 괜찮으세요? 제가 부축해 드릴까요?
박사님…… 그래도 신중하셔야 해요. 지금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니까요.
걱정하지 마, 꼬마 토끼. 이 '박사'는 별문제 없어. 적어도 신체적으론 말이지.
다만 정신적으론 별로 좋지 않아. 조금 전까지 중얼중얼 잠꼬대를 하더군. 하지만 안심해.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까.
- ……당신은?
아, 내 소개를 깜빡했군. 실례했다.
보다시피 장사꾼이다.
캔낫이라고 불러줘. 아니면 미스터 굿이너프라든가. 좋을 대로 해.
사실 아까 그 장면은 정말 엄청났어. 요즘 시대에 벼랑에서 떨어지면서 오리지늄 아츠 퍼포먼스까지 펼치는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니까.
- 벼랑에서? 우린 좀 전에……
- ……클로저의 자율주행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구나……
여기는 컬럼비아의 황야 같네요…… 동부 쪽인가……
맞아, 꼬마 토끼. 여긴 가스파르 황야야. 자네들은 운이 좋았어.
운이 좋다뇨?
그래, 운이 좋았지. 남쪽으로 2킬로 정도 더 갔다면 독가스 늪지대에 처박혔을 거야. 차가 빠지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었을 테지.
- 다른 사람들은 무사할까……
- ……
- 다른 사람들은?
다른 오퍼레이터라면 저희와 따로 행동하고 있어요. 블레이즈 씨가 그들을 지켜줄 거라고 믿어요……
다만 지금으로선 그들과도, 그리고 다른 사무소와도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어요.
- 잠깐, 그럼 통신기는?
- 잠깐, 그럼 다른 보급품은?
전부 '나쁜 녀석들'호에……
통신 설비뿐만 아니라 식량, 물조차도 챙길 여유가 없었어요.
뭔가 상당히 절망적인 것 같군, 친구?
하지만 어떻게든 될 거야, 자네만 괜찮다면……
- 지금은 안 괜찮을 것도 없지.
이 구역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 가장 가까운 전달자 거점까지 데려다 줄 수 있어. 거기서 동료들과 연락할 수 있을 거야. 이변이 없다면 말이다.
- 우리가 누구한테 습격당한 거지?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더는 입을 열 수가 없게 됐다.
통조림 같은 헬멧을 쓴 남자가 근처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엔 짙은 연기를 내뿜는 특이한 무장차량이 있었고, 그 차는 사고당한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다.
용병이에요. 우리가 도시를 떠난 뒤로도 저 사람들은 계속하여 우리를 쫓아왔어요.
열심히도 하는군.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말이야.
솔직히 말해 컬럼비아 용병은 제각각이지만, 이 정도의 용병을 고용할 만큼 돈이 많은 녀석은 손에 꼽아.
자네에게 무척이나 관심이 있는 눈치더군, 친구. 대체 어쩌다가 저 대기업가들의 원한을 산 거야?
역시 그들이었어……
그러니까, 아미야 씨. 정말 고려하지 않으실 겁니까?
컬럼비아에서, 우리 마마존스보다 더 적합한 파트너를 찾긴 무척 어려울 겁니다. 우리라면 로도스 아일랜드의 약품 판매에 상당히 후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을 텐데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희의 이번 목적은 어디까지나 기술 교류입니다. 로도스 아일랜드는 현재, 그 이상의 비즈니스 제휴는 계획에 없습니다.
게다가 저희가 가져온 광석병 진통제는 아직 시험 중이라, 기술적으로 검증만 되었을 뿐 완성품은 아닙니다.
광석병 치료의 연구 과정은 매우 길고 복잡하니, 협력할 기회라면 앞으로도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네, 물론입니다. 제휴할 기회라면 얼마든지 있겠지요, 하하하.
이 습격은 처음부터 계획된 거였군요……
- 먼저 경찰에 신고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신고라고? 친구, 자넨 이곳에 대해 너무 모르는군.
마마존스는 티카론토 최대의 지역 기업이다. 경찰서 서장도 그 회사 이사장과 찍은 사진을 책상에 올려놓는 것으로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고 있을 정도인걸. 다른 방법을 고려하는 게 나을 거다.
놈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너희들의 물건을 빼앗으려 했다는 것은, 애초에 자네들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뜻이지.
제 실수예요…… 그 사람들 말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 아니야. 저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
- ……
- 아니, 나도 책임이 있어, 아미야. 나도 경계했어야 했어.
저기…… 미스터…… 굿이너프?
오, 왜 그러지? 토끼 아가씨.
아까 저희를 데리고 이 황야를 빠져나갈 수 있다고 하셨죠?
그래, 토끼 아가씨.
어떻게요? 전에 재앙정보전달자 일을 했었나요?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돼.
내가 이 황야에서 수년간 장사를 하다 보니, 재앙을 피하는 비결 정도는 터득하고 있거든.
물론 약간의 안내비는 받아야겠지. 정제된 오리지늄각뿔 2개, 지금 상황이라면 적당할 거다.
지금은 컬럼비아 수표밖에 없어서, 본함과 연락을 취한 후에야 보수를 지불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문제없다! 친구들.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희끼리 어떻게든 도시로 돌아가 블레이즈 씨 일행과 합류하는 방법도 있어요.
- 리스크가 너무 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네.
- 미스터 굿이너프가 이미 방법을 정해준 것 같네, 그렇지?
꼭 그렇지만은 않아. 우리 삶엔 항상 여러 선택지가 있지. 물론, 그중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도 있고.
- 그럼 앞으로 며칠 동안…… 잘 부탁드린다고 해야겠지?
나야말로, 친구!
분명 유쾌한 여행이 될 거라고 믿는다.
5시간 뒤
……아까도 말했지만, 이 황야의 최대 위협은 강도가 아니야. 예전에 아주 배짱 두둑한 본토인을 알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무려……
박사님, 제 손을 잡으세요.
자, 올라오세요.
- 산을 얼마나 넘어온 거지?
이제 두 번째예요, 박사님.
- 조금…… 쉬게 해줘……
- (침묵하면서 숨을 크게 내쉰다.)
- 아무래도 평소에 신체 단련을 너무 게을리했던 것 같아……
하하, 박사님 우선 여기 앉으세요.
친구, 지금 그 속도라면, 최소한 하루는 더 걸어야 할 거다.
박사님의 몸 상태로는 지금처럼 빨리 걸어서는 안 돼요.
천천히 가도 되지만……
천천히 가면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리 내가 황야의 장사꾼이라지만, 식량과 물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진 못 해.
만약 이보다 더 천천히 간다면, 물과 식량이 떨어지는 건 불가피할 거다.
그런 거라면…… 캔낫 씨?
응?
지금 이 근처에 숲 같은 곳이 있나요? 컬럼비아 동쪽에는 황야의 오아시스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있긴 하다만, 어쩔 작정이지?
밤, 황야, 어두운 골짜기.
마른 나뭇가지가 불길 속에서 탁탁 튀는 소리, 그리고 나무 국자가 반합과 부딪히는 소리가 아미야의 흥얼거리는 소리와 섞여 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여기 몇 가지 나물이나 버섯은 기본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에요. 익히기만 하면 괜찮을 거예요.
이것들은…… 약간 독성이 있지만, 비상식량으로 사용할 수는 있어요.
……다시 봤는걸, 토끼 아가씨.
솔직히 말해서, 이동도시에서 생활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야외 생존 능력이 없거든. 내 지인들만 봐도, 평생 황야에 발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지.
그런데 너는 꽤 익숙한 것 같구나. 어디 출신이지? 림 빌리턴 사람인가?
정말로 림 빌리턴 사람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지……
이것들은 전부 박사님이 가르쳐준 거에요, 몇 년 전에……
- 어? 내가?
……네. 그때……
박사님…… 이거 먹어도 되나요?
이 몇 가지 나물이랑 버섯은 기본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이야. 익히기만 하면 문제없어.
……너무나 힘들었지만, 행복한 나날이었어요.
- ......
무엇인가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같더니, 다시금 서서히 흐릿해져 갔다.
그 광경을 다시금 떠올려 보려 했지만, 흐릿한 기억은 가끔 수면 위로 떠오르는 물거품처럼 이내 사라져 버렸다.
박사님?
- 그건…… 옛날 일인가?
아, 아니요. 분명 몇 년 전의 일입니다만,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미야는 고개를 숙여 다시 반합을 저었고,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크, 크흠. 그러고 보니, 좋은 야영지를 골랐구나. 여기라면 불을 피워도 쉽게 눈에 띄지 않겠어.
- 이 근처에 도적이라도 있는 건가?
- ……
- 누군가에게 발견될 수도 있다는 건가?
도적, 바운티 헌터, 거기다 수많은 '녹슨 망치' 놈들까지, 여긴 골치 아픈 일들이 항상 따라다니지.
……'녹슨 망치'라…… 이전에 들어 본 적이 있어요. 흉악한 떼강도 맞죠?
그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녹슨 망치'는 아주 느슨한 조직이라서 말이야, 내부엔 크고 작은 다양한 단체들이 소속되어 있지.
예를 들면 살카즈인들로만 구성된 악마파나, 재앙 추종자인가 뭔가 하는, 재앙을 신으로 숭배하는 이상한 무리도 있고.
재앙을 숭배한다고요?
- 재앙을 추종한다고? 미친 거 아닌가.
- ……
- 살카즈? 악마파?
이전에 들은 이야기지만, 사르곤에는 자칭 '아다크리스의 악마'라는 '녹슨 망치' 조직이, '거대한 뿔을 가진 아다크리스의 군신'을 찾는다더군.
전에 컬럼비아에서 온 오퍼레이터가, '녹슨 망치'는 원래 작은 조직에 불과했으나, 최근에 수가 급격히 늘어 우르수스 산악지대부터 컬럼비아 황무지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다고 했었어요……
세상은 평화롭지 않아, 친구.
게다가 황야란 본래 그런 장소다. 무슨 괴상한 사람이든 사건이든 만날 수 있지.
하지만 너희도 언젠가는 익숙해질 거다.
자, 박사님, 저녁이요!
- 고마워, 아미야.
허허, 흐뭇한 광경이로군.
캔낫 씨!
켁, 콜록콜록…… 농담이야, 농담. 죽자고 덤비지 말라고.
이대로 가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을 거야.
당신은 외톨이가 되어 모든 것을 잃겠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외로움은 마음을 좀먹는 독인데…… 당신은 얼마나 예상했던 거야?
당신이 깨어나면 당신 곁에는 아무도 없을 거야. 아무도 당신의 희생을 알지 못하고, 기억조차 하지 못하겠지. 그게 당신이 기대했던 미래야?
당신이 깨어나자,
붉은빛이 아득히 먼 지평선에서 떠오르며, 그림자 달이 남겼던 어둠이 서서히 걷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찬바람이 뺨을 스쳐온다. 테라의 대지는 이렇게, 또 다른 여명을 맞이한다.
일찍 일어났네, 친구.
- 아침 공기가 시원하네.
꼬마 토끼는? 아직 안 일어났나?
- 좀 더 자게 둬. 당신은 뭘 하는 거지?
- 아침 식사 냄새에 이끌려 일어날지도 몰라.
숏테일 파울비스트다. 살은 별로 없지만, 허기를 달랠 아침 식사로는 충분하지.
이 녀석은 컬럼비아 황야의 특산품이야. 안심해, 이번 한 끼는 돈을 안 받을 테니까.
테라 황야의 새로운 하루, 지금은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굿모닝이다, 친구!
어젯밤 또 잠꼬대를 하던데, 친구. 정신적으로 계속 불안정한 것 같은데, 조심하는 게 좋겠어.
- 뭘 들었지?
나는 성실한 사람이라, 자세한 내용은 듣지도 않았고, 잠꼬대를 기억할 생각도 없어. 게다가 웅얼웅얼 말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말이야.
하지만…… 매일 밤 꼬마 토끼가 자네 잠꼬대를 걱정하더군.
괜한 참견이라며 원망하진 말게. 여하튼 계속 같이 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인상에 남는 것이 있잖나. 자네는 기억상실인가?
- ......
아, 말하고 싶지 않다면 못 들은 걸로 해. 이 질문은 확실히 실례였어. 나도 그냥 호기심이 들었을 뿐이니까.
- 나는…… 사고를 당해서 일부 기억을 잃었어.
- ……어쩌면 대부분의 기억일지도……
- 하지만 가끔 기억이 떠올라…… 아주 작은 조각처럼.
- 그래, 가끔도 아니야. 사실 몇 번 되지도 않아.
친구, 이렇게 한 번 가정을 해보는 건 어떻겠나.
자네 기억을 펼친 신문지라고 가정해 보자고. 지금은 누군가에 의해 페인트가 부어진 상태지.
그 페인트 사이로 아주 조금의 내용밖에 안 보여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는 거지.
- 절묘한 표현이네. 나는 내 자신이…… 정말 낯설어.
- 그 표현이 정확한지 모르겠네. 난…… 모르겠어.
한마디로는 정리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군, 친구.
하지만 나도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서 말이야, 힘이 되어 주지는 못할 것 같군그래.
- 나도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어떤 사람일까 자주 생각해.
- 나는 내가 누군지 몰라. 사람들의 말을 듣고 상상할 수밖에 없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 친구.
우리의 존재란 항상 누군가의 인지로 이루어져 있지. 자네의 모든 것은 타인의 청각, 시각과 서로의 감정을 통해 받게 될 피드백에 따라 변화할 거야.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사회적인 관점에서, 남들이 어떤 자네를 필요로 하는지 스스로도 잘 알잖아.
- 금방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그런 물건은 없나?
- 내가 진짜 기억을 되찾으려고 한다면, 뭔가 방법이 있나?
- 내겐 결정을 내리고 바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 걸지도……
있기는 있다만, 추천하진 않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우리 생활은 바지 끈 같은 거야. 한쪽을 당기면 다른 한쪽이 짧아지지.
자네가 '바로' 기억을 되찾으려 한다면, 여러 가지 제어할 수 없는 결말을 짊어져야 할 거야.
그 기묘한 머리만으로는 고통을 다 견딜 수 없어. 게다가, 이 방법은 가장 일반적인 '기억 상실'에만 적용되는 거라서.
자네 자신을 위해서라도, 또 자넬 소중히 여기는 꼬마 토끼를 위해서라도, 천천히 하는 게 좋을 거야.
꼬마 토끼 얘기를 하니까 꼬마 토끼가 일어났네.
박사님…… 좋은 아침이에요.
- 좋은 아침이야, 아미야.
얘기들 나누라고. 나는 장작 좀 주워 올라니까.
아미야는 조용히 당신 곁에 서서, 저 멀리 천천히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봤다.
햇살에 황야의 차가운 색조가 옅어져 갔고, 암석 사막은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환해졌다.
당신과 아미야는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광활한 테라의 대지 어딘가를 함께 걸었던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일찍이, 인적이 드문 이 대지에 발자취를 남겼었다.
이건 본래 당신의 인상, 당신 기억의 조각이어야 한다…… 하지만 진실은, 켈시로부터 들은 당신에 대한 '이야기' 밖에 없다.
상쾌한 아침의 찬바람 속에서, 당신은 필사적으로 흐릿한 기억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아침 햇살, 황야의 찬바람, 당신과 아미야, 아미야와 당신…… 기억날 듯,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미야가 당신의 손을 잡았다.
박사님, 괜찮으세요?
- ……괜찮아.
그때도 이랬어요. 우린 황야에서 처음 밤을 보냈고, 지금처럼 이렇게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했죠.
그때의 박사님은 제게 여러 가지 이상한 걸 물었어요……
헤헷……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 꼭 방금 일어난 일 같네요.
- ……미안해, 아미야…… 난……
괜찮아요, 박사님.
박사님이 여기 이렇게 있는 한, 언젠가는 다 좋아질 거예요.
1일 후
2:39 P.M. 날씨 / 맑음
전달자 거점
암석 사막 위, 거대한 작업 차량과 무장한 운반 차량 수십 대가 임시로 지어진 판잣집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발전기의 번잡한 소음과 오리지늄 보일러가 가동하는 굉음이 멀리서도 들려왔고, 여행객과 전달자들이 큰 소리로 대화하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전달자 거점, 황야 생태 오아시스 밖 문명의 오아시스, 그곳이 바로 당신들의 목적지였다.
드디어! 무사히 도착했다.
큰 문제도, 재앙도 없이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운이 좋군, 친구!
왼쪽에서 세 번째 차량이 이곳 전달자의 연락소로, 동료들과 연락을 취할 수 있을 거다. 여기 전달자 거점은 가격 면으로는 양심적이거든.
그런데…… 저기 판잣집에 마마존스의 로고가 있어요. 정말 괜찮은 걸까요?
자네들이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괜찮을 거야. 여긴 전달자 거점이라서, 여기가 아무리 컬럼비아 땅이라도 전달자와 사이가 틀어지고 싶은 기업은 거의 없거든.
박사님…… 여기서 잠깐 기다려 주세요. 저는 박사님보다 눈에 덜 띄니까, 제가 연락소에 다녀올게요.
캔낫 씨, 조금만 더 박사님 옆에 있어 주실 수 있나요? 금방 돌아올게요.
안심해, 꼬마 토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부터 사람을 숨겨 주는 건 내 주특기거든. 아무 문제없을 거다.
- ......
안심해, 친구. 저기 무장차량과 대기갑 발리스타 보이지? 날 믿어. 여긴 아주 안전해.
자, 이것 좀 마셔.
현지 작은 양조장에서 만든 특산품이야. 마셔봐.
- 이건…… 맥주인가?
맞아. 그걸 만든 양조장 주인은 감염자라던데, 예상 밖이지? 컬럼비아 개척자 중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 지금은 축배를 들 때가 아니야.
알겠다. 그럼 뉴스라도 들으면서 긴장 좀 풀자고.
자네도 알다시피 컬럼비아의 가장 좋은 점은, 어떤 개척 거점이든 방송 기지국이 있다는 거야. 어디서나 라디오로 뉴스를 들을 수 있단 뜻이지.
거의 모든 나라에 시내 라디오 방송이 있지만, 개척 거점까지 기지국이 있는 곳은 전 테라에서도 여기뿐이야. 관광 왔다 치고 한번 들어 보자고.
……티카론토 북부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이 진정되고 있으며, 경찰 측은 현장에서 대량의 석궁을 이용한 교전 흔적을 발견했으나, 아직 용의자는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티카론토 경찰은 이번 충돌의 한편엔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외국기업의 일원이 관련되어 있다고 공표했으며, 본 방송국은 해당 조직의 상세정보를 아직 파악하지 못 했습니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해당 외국기업과 현지 기업의 비즈니스 관계에 불화가 생겼다고 하지만, 현지 기업의 대변인은 이에 관련하여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 측은, 티카론토에 대한 테러 행위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이번 무력충돌을 상세히 조사해 나갈 방침입니다……
박사님.
꼬마 토끼, 돌아왔어?
전달자 연락소 직원이 오후 2시가 돼야 출근한다고 해서,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아까 그 뉴스는……
아무래도 자네 동료들은 무사히 철수한 것 같군. 좋은 일이야.
하지만 아무래도 마마존스 쪽도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나 봐. 아쉽게 되었어.
- 우리가 피해자인데, 지금은 오히려 경찰의 조사 대상이 되었어.
- ……
- 음모로 따지자면, 여기도 카시미어와 크게 다르지 않네.
훗, 이런 건 컬럼비아에선 일반적인 일이지. 놈들은 움직임이 빨라서, 미리 뒤를 깨끗이 닦아 놓는다고.
생각한들 소용없어, 친구.
자네들은 곧 여기를 떠날 텐데, 지금 그런 고민을 하기엔 늦었지 않아?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지.
- 하지만, 놈들은 미완성품인 진통제 샘플을 빼앗았어. 대체 무슨 의도지?
- 그 전에, 놈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고 있나?
좋아…… 이제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는 것 같군.
컬럼비아의 기업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지금까지 놈들과 왕래해 본 적은 있고?
로도스 아일랜드는 컬럼비아의 일부 과학기술 기업들과 간단한 업무상 왕래가 있었어요.
흠, '간단한 업무상 왕래'라, 아마도 체면적인 사업이겠지.
하지만 친구, 떳떳하지 못한 일은 대부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법이야.
따라 와 보게. 재미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지.
자, 다음 분!
아…… 안녕하세요. 이번 달 약을 받으러 왔습니다.
네, 확인 좀 할게요……
데이브 씨군요. 아, 신청서는 봤어요. 이번 달 작업 상과가 아주 훌륭했네요. 여기 이번 달에 배급할 약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기, 다음 달 배급할 분의 약을…… 미리 주실 수는 없나요? 저희 집사람의 병세가 심해져서, 약이 조금 더 필요……
데이브 씨, 회사 규정에 따라 약의 선배급은 불가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저희는 상시 추가 약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옆쪽으로 가면 필요한 만큼 광석병 억제제를 직접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하, 하지만……
데이브 씨, 이는 기업의 규정입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다음 분!
여…… 여기는 뭐죠?
쉿, 목소리 낮춰. 여긴 마마존스의 변방 개척대 사무소야.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는 마라.
그들이 감염자에게 약을 배급하고 있나요?
컬럼비아는 전 테라에서도 유일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일이 많고도 많아.
이 개척자들로 예를 들자면…… 개척자들은 컬럼비아가 서쪽으로 개척하기 위한 명맥이고, 컬럼비아 황야 이야기의 저자이며, 컬럼비안 드림의 주역들이지.
이들은 마마존스와, 황야에서 땅을 개척해 컬럼비아와 기업을 위한 거주지를 만들기로 계약을 맺었어.
그리고 기업은 이들의 작업 상황에 따라 임금과 같은 형식으로 의료나 물자를 보급해주고 있지.
자, 받아.
- 고체와 액체가 반씩 포장되어 있군. 이게 그들이 나눠주는 약인가?
- ……
- 이…… 이게 무슨……
이게 감염자에게 나눠주는 약이야. 넌 전문가니 내 설명은 필요 없겠지.
이건 광석병 억제제가 아니에요.
그래.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거야. 하나는 진통제이고 다른 하나는 영양제다.
……이유가 뭐죠?
이유 따윈 없다. 정말 모르겠어? 놈들은 진짜 억제제를 팔 필요가 없다고.
저 개척자들, 각지에서 온 감염자들은 진짜 광석병 억제제를 본 적도 없을 거다.
그걸로 광석병 자체를 억제할 수는 없지만, 발병 시 증세를 호전시킬 수는 있거든. 마마존스가 주는 약이 나름 효과가 괜찮으니, 이들에겐 충분했던 거야.
……'억제제'라는 게 이곳에서는 원래 새로운 개념이야. 그들이 모르는 건 당연해.
- ……진통제를 제조할 수 있으니, 진짜 억제제는 필요 없다는 건가.
- 그럼 왜 로도스 아일랜드의 기술을 탐내는 거지?
하하하…… 그 속내는 더욱 재밌어.
아는지 모르겠는데, 마마존스는 대기업이 되기 전엔 그냥 도넛 파는 체인점에 불과했어. 그런 그들이 약품 생산 기술 같은 게 있었을 리 만무하지.
마마존스가 소유하고 있는 의약품 생산 라인은 모두 다른 기업으로부터 사들인 것들이야. 파라솔, 타워마운틴 바이오, 라인 랩 등……
지금 마마존스가 진통제를 억제제로 내세워, 큰돈을 벌고 있는 상황을 다른 의약품 회사가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마마존스는 다른 회사로부터 제재도 받았지만, 그만큼 꾀도 늘어갔어. 놈들은 아예 자신의 파트너를 버린 거야. 아주 전형적인 컬럼비아 스타일이지.
너희의 그 샘플을 가져갔다면, 이런 싸구려 약도 곧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대체될 거라고 본다.
약효도 더 좋고 진통 작용도 더 강하다면, 더 많은 사람이 그걸 '광석병 억제제'로 믿게 될 테니까.
그건 안 돼요! 로도스 아일랜드의 그 샘플은 광석병 억제제가 아니에요. 아직 안전성 테스트조차 끝나지 않았고, 많은 부작용이 발생할지도 몰라요. 우리도 아직……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내가 알려 주마.
마마존스는 너희 기술로 원가가 더욱 저렴한 '억제제'를 만들어 낼 거야.
당연히, 저 불쌍한 개척자들이 실험체가 되겠지.
그럼 저들은 죽게 될까? 사실을 말하자면, 마마존스가 없어도 이들은 결국 죽는다……
컬럼비아의 변경은 개척자의 피와 생명으로 개척한 것…… 이들의 평균수명은 원래도 그리 길지 않아.
하지만 남은 사람, 그러니까 개척 도중에 죽지 않은 사람들은, 회사를 위해서 더 기꺼이 일하며 '억제제'를 받으려고 할 거다.
이 약이면 잠깐이지만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고, 어쩌면 진짜 몇 년은 더 살게 해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이후 컬럼비아의 각 대도시에서 발간되는 신문은 놈들의 위대한 공적을 일면에 장식하겠지. 난 그 기사의 헤드라인까지 상상이 가는걸.
“마마존스 의료업계 진출, 감염자에게 새로운 희망이!”
완벽한 시나리오지.
그리고 진실 말인데, 실제 진통 효과 앞에서, 진실 따윈 하나도 중요치 않아.
네가 지금 이 불쌍한 사람들한테 “그 억제제는 광석병을 고칠 수 없어. 그건 그저 값비싼 진통제 혹은 플라시보 효과일 뿐이야”라고 알려주면 뭐가 달라져?
그리고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사실 최고의 광석병 억제제로도 완전히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없으며, 평생 아픔을 동반하며 살아야 한다고.
광석병에 관해서는 확실히 로도스 아일랜드가 이 대륙에선 선두에 있어. 그건 사실이지. 근데 과연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줄까?
이게 컬럼비아다, 친구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모든 게 합리적이지.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컬럼비아로 와서, 희망 속에 가치를 만들어 내며, 희망 속에서 죽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로도스 아일랜드를 이용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순……
봐라. 그런 게 현실이다.
꼬마 토끼도, 자네도, 아무도 이들을 구할 수 없어. 더욱이 지금은 자네들 스스로를 지키는 것조차 어렵지.
희망을 품은 감염자에게 희망이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어. 이건 자네들이 더 잘 알겠지.
그러니 서둘러 자네 동료에게 연락해서, 어떻게든 여기를 벗어날 생각부터 해.
- 맞는 말이야, 캔낫 씨.
- ……
- ……인정하기 싫지만, 눈앞에 있는 게 현실이야.
박사님……
나도 알아. 희망을 품는다는 건 아주 잔인한 일이지.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
희망은 완전무결한 사람조차 미치게 할 수 있어.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고, 그걸로 마음의 위로를 얻으니까.
당신은 아미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귀는 천천히 아래로 처졌고, 슬픔으로 가득했던 두 눈에는 안타까움마저 묻어났다.
당신과 아미야는 이미 많이 봐왔고, 앞으로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당신도 알고, 아미야도 알고 있었다. 사실 이 황야의 장사꾼이 다시 설명해 줄 필요조차 없었다.
저 멀리, 황야와 하늘의 경계선에서 해가 천천히 지고 있다.
테라의 황야의 하루가 곧 저문다. 빛은 사라지고, 두 개의 달이 태양을 대신해 하늘에 걸릴 것이다.
태양은 내일도 뜨겠지만, 모든 감염자가 내일의 햇빛을 맞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설령 지금 이곳에 광석병 억제제가 충분하다 해도, 이미 많은 사람에겐 너무 늦었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 하지만…… 캔낫 씨.
- 희망을 품는 것이 고통을 가져올지라도,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
- 희망을 포기한다면, 우리가 살아온 삶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
박사님……!
오! 사람을 분발시키는 말이군, 친구.
설득이 되진 않지만, 애초에 날 설득시키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진심이 느껴졌다.
난 자네들처럼 현실을 안 후에도 이에 고개 숙이길 거부하는 사람이 좋아. 뭐, 솔직히 말하면, 자네들 처지는 이미 충분히 딱하지만.
정의의 연설은 일단 접어두고, 자네들이 사실은 굉장히 현실적이라는 건 알아. 그러니 현실적인 질문 하나 하지. 진짜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자네는 지금 국경의 전달자 거점에 있고, 곧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걸세.
왔던 길로 되돌아갈 건가? 그런 다음은?
솔직히 말하는데 친구, 그들에게서 자네들 물건을 빼앗아올 방법이 없다면, 사건을 수습하긴 어려울 거야.
설마 혼자 맞설 생각인가? 그렇다면 버든비스트를 한 마리 빌려주지. 그러면 컬럼비아 부족의 전설에 나오는 골짜기의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다.
아,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 근데 자네, 싸움 못 하잖아.
캔낫 씨, 박사님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 아니야, 아미야, 캔낫 씨의 말이 맞아.
- 가끔은 무력을 쓰지 않아도 될 때가 있어.
- 그들의 방법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자…… 마침 실천도 해봤으니.
- 로도스 아일랜드가 무사히 여기서 탈출하려면, 꾀를 써야 해.
그 말은, 놈들과 한 판 해보겠다 이건가?
4일 후
4:01 P.M. 날씨 / 맑음
컬럼비아 구치소
됐다, 그만 가봐.
- 정말 감사합니다.
박사님!
- 어땠어, 아미야.
다음부터 이러지 마세요! 정말…… 정말 걱정했다구요!
좋은 계책이었어, 친구. 아주 교묘했다고.
자네들을 안내한 것도, 밖에서 며칠을 기다린 것도 헛되지 않았어. 솔직히 다시 봤다.
하지만 이젠, 자네가 약간은 무서워지려고 하네, 친구.
-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 ……별것 없어.
- 솔직히 눈 뜨자마자 철통 모양의 헬멧이 보였을 땐 나도 무서웠어.
저…… 전 아직도 무슨 일인지…… 이해를 못했어요.
간단히 말해서…… 이 총명한 친구가 컬럼비아 국경관리국에 자수했어. 자신이 소속된 기업이 컬럼비아에 광석병 관련 약품을 밀수했다고 말야.
자네가 컬럼비아의 법을 잘 안다면, 광석병 관련 약품은 의료품 중에서도 가장 엄격히 관리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당시 이 법을 추진한 기업이 컬럼비아의 약품 시장을 독점하려고 적잖이 고생했다더군.
이 친구가 제공한 정보라면 분명 컬럼비아 주류, 담배, 아츠 유닛 및 오리지늄 제품 관리국을 떠들썩하게 할 거야. 놈들은 만만한 상대는 아니거든.
관례대로라면, 관리국 보안팀이 곧 도착할 거고, 밀수한 모든 물품을 압수할 거다.
하지만 그 사람들과 맺은 협력에는 완벽한 계약과 신청 보고서가 있어요. 조사해 보면 금방 나올 거라고요……
하하하하, 바로 그거야.
토끼 아가씨, 그들이 너희에게 손을 쓰려고 한 이상 허점을 드러낼 생각은 추호도 없을 거다. 증거가 나오지 않도록 이번 계약의 모든 자료를 폐기하겠지.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에서 기업이 어떠한 거래 증거도 남기지 않으려고 할까?
당연히 남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비즈니스를 할 때야.
그래서 컬럼비아 정부가 샘플을 전부 압수했던 거군요……
정부측은 법에 따라 밀수품을 폐기할 거다. 그런 다음엔? 다음이란 없어. 이 일대를 주름잡는 마마존스가 만약 컬럼비아 전체까지 세력을 확장한다면?
컬럼비아 주류, 담배, 아츠 유닛 및 오리지늄 제품 관리국, 이건 뭐 부르기도 어려운 이름이네. 아무튼, 그렇게 되면 관리국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호시탐탐 마마존스를 노리게 되겠지.
그렇군요…… 하지만 그런 거라면, 로도스 아일랜드도 전과가 있는 회사가 되진 않을까요?
하하하, 여기는 컬럼비아야. 뒤가 깨끗한 기업 같은 건 없어.
벌금을 내고, 개선 의견 문서와 보증서에 사인하면, 얼마 안 지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어쩌면 이미 신경 쓰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마마존스는 이번 파장을 막아야 해. 그러기 위해서라도 로도스 아일랜드를 숨겨 주고 있을지 몰라…… 만약 관리국이 진짜 로도스 아일랜드를 찾아가게 된다면, 귀찮아지는 건 오히려 놈들일 테니까.
물론, 네 박사는 관리국 구치소에 3일을 갇혔으니, 이것도 대가라고 할 수 있지.
저는 이 일에 대해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박사님……
켈시 선생님도 분명 화내실 거예요.
- 분명 화내겠지. 하지만 내가 아는 켈시라면……
- 사실 이 수법은 켈시에게 배운 거야.
나라면 닥터 켈시 앞에서 그런 말 못 할 거야……
- 아, 블레이즈, 다들 왔구나.
덩치 좋은 필라인 오퍼레이터가 어쩔 수 없다는 눈으로 당신을 보고 있었다.
박사, 이번엔 변명의 여지도 없을 텐데……
벌금, 추가 배상, 구류, 컬럼비아 정부가 개입한 부당 상업 행위의 조사……
네가 마지막에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난 모르겠지만, 하마터면 닥터 켈시한테 직접 연락할 뻔했다고……
돌아가서 닥터 켈시한테 뭐라고 설명할 건데!
- 그건…… 어떻게든 될 거야.
- ……
- 음, 용서를 구해야지.
박사님! 다신 이런 무모한 행동하지 마세요. 본함에 연락해서 구조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구요!
그리고 로도스 아일랜드에는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 완벽한 긴급 대처 방안도 있는걸요.
- ……어쨌든 이번 황야 여행은 즐거웠어. 그렇지?
즐겁긴…… 했지만……
박사님! 말 돌리지 마세요!
돌아가면 켈시 선생님에게 다 설명해야 할 테니, 보고서 작성은 제가 도와 드릴게요.
- ……그래.
- ……부탁할게.
이제 슬슬 헤어질 때가 되었다, 친구.
전에도 말했지만, 아주 유쾌한 여행이었어.
- 응. 아주 즐거웠어. 캔낫 씨, 정말 고마워.
- 고마웠어. 인연이 있으면 또 보겠지.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때까지 몸조심하고, 다음에 또 만나자고.
누구야 저 사람…… 느낌이 뭔가 수상한데.
박사님?
- 응?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때 캔낫 씨에게 좀 도와달라고 했잖아요. 구체적으로 뭐였나요?
3일 전
3:27 P.M. 날씨 / 맑음
황야의 모처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그래, 친구.
이거 좀 악질적인 수법인걸.
그래서 내가 뭘 도와줘야 하는 거지?
-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이 선택사항은 일단 보류다.
- 무사히 탈출할 때까지 당신의 동료들이 아미야를 보호해줬으면 해.
- 아마 당신의 동료라면 로도스 아일랜드가 직접적인 무력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겠지.
- 혹여라도 나한테 일이 생긴다면, 당신의 동료가 나 대신 뒤처리를 해주었으면 좋겠어.
헉! 잠깐, 잠깐만.
내 동료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 캔낫 씨, 지금만큼은 서로 솔직했으면 좋겠는데.
- 지금까지 계속, 누군가 우리 뒤를 밟고 있었어. 아니야?
- 당신 말대로 우린 운이 좋았어. 하지만 정말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
그 기묘한 남자는 침묵했다. 당신은 두껍고 무거운 철통 모양의 헬멧 밑에 숨어 있는 그의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이 침묵이 분노나 불만이 아님을 느낄 수는 있었다.
훌륭하군, {@nickname} 박사.
나는 내 친구들이 잘 숨어 있고, 자넨 그저 다정다감하고 총명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지 뭐야.
자넨 참 경이로운 인물이로구먼.
그렇다면, {@nickname} 박사.
그 정도는 당연히 도와줄 수 있다. 물론 아미야 정도의 실력이라면 내 도움이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을 테지만.
하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야. 난 무엇을 얻을 수 있지?
- 당신이 우리 차량에서 가져간 그 서류에 대해서 눈감아줄게.
- 이 정도면 거래가 될까?
하하하……
완벽한 거래다, 친구. 이로써 협상 성립이야.
- 모든 게 순조롭다면, 3일 뒤에 다시 만나지.
아무렴, 친구. 모든 게 순조롭길 바란다.
……
됐어. 이제 나와도 돼.
벌써 갔나? 이걸로 끝이야?
아주 끝난 건 아니야. 앞으로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거다.
저 녀석, 아주 위험해. 이대로 보내선 안 돼.
로도스 아일랜드는 우리의 적이 될 수도 있는데, 왜 저들을 구한 거지?
날 믿어. 저런 조직이 존재한다는 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다.
저런 사람이 오래 살아야 이 땅이 더 재밌어지지.
가자, 얘들아. 해야 할 일이 아직 산더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