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4담장을 사이에 두고
나탈리야는 동분서주하며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파블로비치를 지원하는 핵심 인사인 트레플레프 공작을 찾아간다. 그녀는 공작이 파블로비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수밖에 없도록 그를 협박한다.
“……그 후, 저는 명단을 대조하며 학생들을 차례차례 만났습니다.”
“소냐와 달리, 그 학생들은 성벽 근처 사무실로 보내져 저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대부분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진짜 못 참겠네! 중재자님, 제국의 청문회에서 결백한 귀족을 모욕하는 이런 터무니 없는 소리를 용인해도 됩니까?
그분은 폐하께서 친히 봉하신 추밀관이었습니다. 정말로 나탈리야 씨의 진술과 같은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그런 영예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건 제목만 참회문이지, 실상은 비난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알 수 있습니다. 더는 이런 유언비어에 끌려다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현장에는……
파블로비치 씨의 '관리 비결'을 얼마나 좋게 평가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탈리야가 눈물로 쓴 이 글을 유언비어로 몰아가진 마세요.
우리가 지금 따뜻한 실내에서 대화하고 있다고 하여, 바깥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이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겁니다.
물론, 당신의 생각대로라면 당신은 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고통이 있는데, 우르수스가 어떻게 수백 년간 번영을 누릴 수 있었겠냐고 말하겠죠?
조야 씨, 말씀 주의하세요. 청문회는 열사의 자녀인 조야 씨의 신분을 존중하고, 신뢰와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야 씨의 대리 증언을 허락한 것이지, 귀족을 모욕하라고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현명하신 중재위원회는 제가 진짜 귀족을 옹호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죠. 저는 누구도 감히 '유언비어'라는 말로 나탈리야 씨를 모욕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무슨 황당한……
조용히 하세요!
조야 씨, 조야 씨가 할 일은 나탈리야 씨를 대신해 진술하는 것입니다. 사실 판단은 중재위원회의 몫입니다.
……죄송합니다, 중재자님.
만약 여러분께서 '참회'에 대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다음 내용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계속 낭독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재자님.
명심하세요. 또다시 귀족의 의견을 평가하려고 든다면, 더 이상 조야 씨의 발언을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계속하세요.
“제가 시내로 돌아와 학부모들에게 상황을 보고할 때, 일부 학부모는 자녀의 상황을 더 알고 싶어하며 제게 더 오래 머물러 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봉쇄 구역 내의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더 큰 조력자를 찾아야 했습니다.”
“결국, 저는 몇몇 학부모를 개인적으로 만났고, 학생들이 처한 심각하고 비참한 사정을 의도적으로 부풀려 말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본인의 외아들이 억류된 귀족을 찾았고, 그분은 저를 곧바로 자신의 상사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봉쇄 구역 안에서 보았던 실상의 전부입니다.
파블로비치 씨의 행동을 계속 방관하고, 중화기까지 사용하게 둔다면, 머지않아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탈리야 씨, 말씀을 들어보니 의회가 파블로비치의 죄를 공표해 관직을 박탈하고 파면까지 해주길 바라고 계시는 것 같군요.
저는 그 사람을 막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의원님, 직설적인 발언에 미리 사과드리죠. 저는 의회를 평가할 생각도 없고,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합니다. 다만 이 일이 얼마나 많은 저항에 부딪힐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요구대로 봉쇄 구역의 제거 결의를 잠시 유예하는 것도 방법이겠군요. 그러면 약속대로 학생들을 풀어줄 테니까요.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저는 파블로비치 씨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의원님께서 저에게 그 질문을 하신 이유도 의원님 또한 파블로비치 씨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하, 정말 영리하시군요. 어쩌면 제 딸아이와도 말이 잘 통할 것 같네요.
제 부하들에게서도 보고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봉쇄 구역에서 돌아온 후, 그 사람의 요구대로 봉쇄 구역 유지를 위해 다른 학부모들을 선동하지 않았더군요.
오히려 학부모들의 신분, 상황, 그리고 성향을 파악한 다음 저를 찾아왔죠.
당신은 제가 이 일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핵심 인물이고, 접촉할 수 있는 사람 중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판단한 거겠죠.
정확하십니다. 저의 미숙한 계산들이 의원님 눈에는 모두 낱낱이 보이는군요.
그렇지만 의원님, 저는 친구들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대화하는 이 순간에도, 그 친구들은 봉쇄 구역에서 고통받고 있고, 매 순간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거기에, 제 생각이 비현실적이라는 것 때문에 의원님이 우려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지금 당장 파블로비치 씨를 처벌해 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최소한 봉쇄 구역 학생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그곳의 중화기 무장만이라도 해제해야 합니다.
……유감이지만, 지금의 의회는 그런 요청을 들어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파블로비치 씨 말로는 의회 안에 본인을 지원하는 귀족 친구가 많다던데요.
아무래도 '구'자를 빠뜨리신 것 같군요. 아니면 '군사 귀족'이라든가요.
솔직하게 말씀해 드리자면, 우르수스 귀족들 사이의 진영 대립은 볼리바르 사람들도 다 아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조심하실 필요는 없어요.
최근의 혼란으로 인해 모든 결의, 규정, 오늘 의회에서 말솜씨를 뽐낸 사람, 내일 폐하께 칭찬받을 사람, 온 사방이 파벌 싸움이고, 반드시 승자와 패자를 가려야 하는 상황이죠.
제국 의회에 있는 의원만 해도 400명이 넘어요. 대부분 가문도 출중하고 공훈도 대단한 분들이죠.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에 거주하며 《귀족 계보》에 성씨를 올린 세습 귀족만 해도 800명 가까이 됩니다.
영향력 있는 명예시민들까지 합하면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저마다 입장이 복잡한 상황이죠.
세상일이 다 빵 자르듯 정확하게 반으로 가를 수 있는 것이었다면…… 우르수스가 지금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 말씀은……
신귀족 중에도 파블로비치 씨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군요. 지금 그 사람을 막지 못하는 것도, 권력 있는 지지자들이 많기 때문이고요.
그래서 저도, 심지어 의장조차도, 이 일에서는 대중의 의견을 뒤로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의원님과 이렇게 대화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미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 목표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소냐와 봉쇄 구역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파블로비치 씨를 최대한 막을 거예요.
판단은 좋군요. 하지만 판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람이 젊을 때는 무엇에 반대해야 하는지까진 쉽게 깨달아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까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탈리야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사람들이 각자 파블로비치 씨를 지지하는 이유를 조사해서 잠재적인 '아군'을 찾을 거예요……
의원님께서 사람들의 입장이 저마다 복잡하다고 일깨워주셨죠. 다르게 말하자면, 설령 구귀족이나 그 사람의 동맹이었던 사람이라 한들, 특정 상황에서는 입장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죠.
제 말을 '일깨움'으로 받아들이시다니, 당신은 정말……
일이 마무리되면 꼭 한번 다시 들러주세요. 알로다가 제 일 때문에 바쁘지 않을 때 와주세요. 어쩌면……
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탈리야 씨, 한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위트 의장이 발설을 금했지만, 이미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고 있는 소식입니다.
동계 무도회가 끝난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폐하께서 궁전으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
지금까지 의장이 암암리에 사람을 보내 조사했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했어요. 모든 곳을 배제하고 나니 딱 한 곳만 남더군요.
지금은 조사하기 어려운 곳이죠.
조사하기 어려운 곳이요? 설마……
폐하께서 혹시 봉쇄 구역에 계실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의장님조차 수색할 수 없는 건가요?
현재 국면을 고려하면, 더 큰 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폐하의 실종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일부 귀족들은 오히려 이 상황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 같더군요. 당신이 얘기해준 상황과도 꼭 맞아떨어지고요.
……이익 교환, 암묵적인 편 들기, 아니면 자신들의 머리를 짓누르는 가장 큰 걸림돌을 이 기회에 영원히 해결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겠죠.
게다가 하필 지금 시점에, 폐하를 보호하기 위해 즉시 발동되어야 하는 특별한 조치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소식이 딱히 적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입수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특수한 조치가 발동되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친구들이 마주한 문제를 계속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특수한 조치가 발동된다면……
당신 친구들은 알아서 살길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특별한 조치라면……
그게 발동되면 폐하께서 반드시 안전하게 궁전으로 돌아오신다는 것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
다만 조금 안심시켜 드릴 수 있는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위트 의장이 봉쇄 구역 관련 결의를 잠시 멈춰둔 상태입니다. 적어도 1주일 안에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저희에게 소중한 정보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친구들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감사 인사드립니다.
……정리하자면, 어떤 의원이 나탈리야 씨에게 일부 신귀족이 폐하께서 봉쇄 구역 안에서 해를 당하거나, 목숨의 위협까지 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렸다는 겁니까?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본 청문회는 귀족의 존엄성을 고려하여 이름을 가리는 데 찬성했지만, 추후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니, 그게 누굽니까? 대체 누가 그 지경까지 미쳐버린 거죠? 증인은 지금 즉시 그 짐승 같은 작자들의 이름을 공개하세요!
돈에 환장한 그 작자들을 당장 끌어내서 정말로 우르수스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나탈리야 본인이 아니라 여기 등장하는 분들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나탈리야가 유서 깊은 귀족의 저택을 상당히 많이 찾아다닌 듯하나, 그 주인들 또한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돈에 흔들리지 않는 고고한 분들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요.
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누구라도 이름을 대야지, 그렇지 않으면……
왜 잡아당기는 겁니까?
귀족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휘둘렀고, 손뼉이 부딪히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청문회 자리에 겨우 감돌고 있던 엄숙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쏠린 곳에는 방금 귀족을 말리려고 했던 동료가 있었고, 그는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어색하게 쓴웃음을 지어냈지만, 성급하고 경솔한 귀족을 향해 매섭게 눈을 번뜩였다. 그러자 상대는 멋쩍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럼, 계속 낭독해도 될까요? 이 이후로 누군가가 나탈리야에게 군사 귀족의 명단을 건넸으며, 명단은 문서 뒤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서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 귀족들은 아무런 검증도 거치지 않고 폐하의 실종을 단순 유언비어라 단정했으며, 나탈리야를 이용해 자녀가 체포된 학부모를 상대로 갈취를 시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특히 12월 29일 오후, 신원을 밝히길 꺼리는 어떤 신사는 나탈리야에게 직접 금전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잠깐만요, 귀족들의 구체적인 신상을 공개해서는 안 됩니다.
전 요청대로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행동을 평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특정하는 것도 피하셔야 합니다. 제가 정확히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사실만, 사실 그 자체만 말씀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중재자님.
그 후로 나탈리야가 일부 학부모의 지지를 얻기는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건 어느 중요한 귀족 인사의 저택을 찾아간 일이었습니다.
그 귀족은 장기간 파블로비치 씨를 지지한 분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을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시종일관 주장해 왔습니다……
……저희의 뜻에 동조해 주신다면, 봉쇄 구역 내의 교전 강도를 최대한 낮출 수 있습니다.
로스토프 가문의 딸…… 돌아가게. 사태가 긴박하다는 자네의 말만 아니었더라면, 체르노보그 귀족과 얼굴을 마주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네.
공작님, 이 일은 폐하의 안위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우르수스가 국난에 처하면 그 책임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국난?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요 몇 년간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에서 그런 말을 하는 미치광이들은 늘 있었다네…… 물론 자네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닐세.
자네가 말한 그 충격적인 소식에 대해서는, 내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게. 내 이성이, 이 또한 그 졸부들의 자작극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거든.
제가 잘못 이해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공작께서는 저희가 폐하의 안위를 가지고 연극 따위를 벌이고 있으며, 위험이 닥쳤을 때의 결과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시는 것 같군요.
아니, 나는 협박에 응하지 않을 뿐이라네. 자네가 단정하고 품위 있는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 귀족처럼 보인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지금의 우르수스에서 사상이 더럽혀진 젊은이들을 교화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네.
만약에, 황제마을…… 아니, 차레브그라드 구에서 소란을 피운 것조차 엄히 다스리지 못한다면, 우르수스에 무슨 권위가 남겠는가?
친구들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네. 폭도들을 두둔한 죄도 묻지 않도록 하지. 오늘 이 자리는 없었던 걸로 하세.
……알겠습니다, 공작님.
다만 공작께서도 언젠가는 방금 말씀하신 '폭도'들을 나서서 변호하실 날이 올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제가 공작님을 찾아온 건, 어떤 귀족분에게서 공작님과 공작님의 후계자가 몰래 학생들을 선동해 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관련 증거를 확보한 사람이 있습니다. 공작님의 저택 지하실이 학생 활동의 거점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죠. 심지어 학생들이 공작님의 정원에서 연습하는 장면을 찍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흥, 헛수고일세. 아무리 허풍을 쳐도 난 넘어가지 않을 걸세.
그는 더 이상 나탈리야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천천히 일어섰다.
난 경고했네, 만약 계속 협박한다면……
명령이다! 후미는 선두로, 발맞춰 후퇴!
제가 알기로, 공작님의 후계자와 학생 조직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고, 공작께서는 후계자의 교사들에게 해당 '소문'의 확산을 막으라고 압력을 넣으셨지요.
또 공교롭게도, 동계 무도회 때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체포된 이후로 공작님의 후계자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건 그 아이가 중부로 연수를 갔기 때문일세……
물론 계속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하셔도 됩니다. 괜한 참견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전 공작님이 저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고, 그 후계자의 앞날에 생길 오점을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하아, 불쌍한 올가.
무, 무슨 짓을 한 거지?
전 그냥 여기에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공작님의 댁에서 우연히 그들의 연습 장면을 본 게 다일 겁니다.
그게 저 같은 불청객도 우연히 볼 수 있었던 거라면, 그 학생들은 도대체 공작님의 저택에서 얼마나 활발하게 활동했던 걸까요?
자네……
창밖에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로사는 눈을 내리깐 채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귀족 아가씨다운 정중한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말씀드린 대로, 저는 몇몇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다행히, 그 소문이 더 이상 퍼지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원하는 게 뭐지?
아뇨, 제가 원하는 게 아닙니다. 공작님께서 공작님 본인과 가문 전체의 앞날을 지켜야 하는 거겠죠.
이제 막 정오가 지났군요. 여기서 잠시 쉬면서 공작님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니, 아니오!
저 말은 거짓이오…… 중재자님!
트레플레프 공작?
나탈리야 로스토바가 나를 찾아온 건 사실이 맞소. 내가 파블로비치의 군비 삭감에 동의한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내 딸은 죄가 없소! 내 딸은 그놈들, 그 학생 조직 미치광이들에게 협박받았을 뿐이오!
내 딸이 오늘 출석해 용감하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나탈리야의 거짓말을 폭로할 것이오. 내 딸이 바로 다음 증인이오.
공작님, 나탈리야가 제출한 이 서한은 공작님과 다른 분들에게 정직하지 못했던 것을 사죄하는 참회문입니다.
우르수스는 우리에게 기회를 줬던 적이 없지만, 나탈리아는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나탈리야는 단지 올바른 선택을 하고 보호해야 마땅한 친구를 보호했을 뿐입니다.
누가 여기에 나서서 어떤 거짓 증언을 하든, 나탈리야는 우르수스에도, 우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네 이놈……!
정숙하세요!
10분간 휴정합니다.
서기관, 다음 증인 준비하라고 하세요……
보론초바 부인…… 이해가 안 되는군요. 이건 부인의 방식이 아닌데요.
진짜 나탈리야의 증언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증언이 조야 씨의 주장과 대치된다면, 적어도 귀족들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부인은 조야 씨가 봉쇄 구역의 상황을 진술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침묵만 하셨습니다. 몇몇 귀족이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부인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대체 뭘 기다리고 계신 겁니까?
……
……부인 뜻대로 했어요.
그래, 잘했어. 이 정도면 네 부모님께도 면목이 서겠어. 아직 늦지 않았단다.
정말 아름다운 필체구나, 나타셴카. 어디 빠뜨린 게 없는지 좀 보자……
……
……나타셴카, 너……
대체 뭘 쓴 거니? 이건 '참회문'이잖니!
네, 참회문이에요.
저는 제 계략에 속은 모든 분과,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져 고통받은 학생들에게 사죄할 거예요.
비록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 적은 없지만, 그들 모두 제 친구였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같은 우르수스인이고, 같은 운명을 공유해야만 해요.
아니, 아니야!
얘야, 제발! 대체 누가 너에게 이런 짐을 지게 한 거니? 네가 그 아이들을 속였다고 한들 그 누구도 네게 손가락질할 수는 없단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야, 절대로!
세상에, 마르샤, 어쩌면…… 어쩌면 좋지? 이 가여운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까? 나타셴카,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말거라.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누군가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죄를 짊어져야만 해요, 부인.
부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사람들이 가담한 내용과…… 제가 아는 이야기를 전부 적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게 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하시는군요.
제가 저를 돌아보는 방식이 잘못된 건가요? 아니면 저는 평생 철부지 어린애처럼 책임 따위는 외면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가요?
우리에게 너희는 언제나 어린아이란다! 나도 내 친구의 딸을…… 아니, 내 자식을 돕는 심정으로 널 돕고 싶었을 뿐이야.
철없을 때 저지를 수 있는 실수고 충분히 용서받을 수 있는 일에 누가 이런 가혹한 참회를 바란단 말이니? 난 네가 이렇게 너 자신을 괴롭게 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단다…… 나타셴카……
알아요, 부인. 전부 다 알고 있어요.
부인의 친절과 진심이 가끔은 숨이 막힐 정도로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건 부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다만 저 스스로 우러러만 보던 고귀한 분들을 직접 만나고, 그분들의 속내와 우르수스에 품은 감정을 직접 경험하게 된 뒤로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히포그리프 왕국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지금 우르수스에 있는 귀족들의 조상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이고리 대제조차 평범한 군인에 불과했죠.
히포그리프가 채찍을 휘두를 때, 그분들은 용감하게 달려 나가 노예들의 앞을 막아섰어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야 그들이 명예로운 용사의 혈통을 지녔다고 믿게 되었죠.
그런 용사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핍박받고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짓밟고, 과거 히포그리프가 휘둘렀던 채찍을 똑같이 휘두르게 된다면……
과연 그 사람들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 또한 그들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건가요?
그건…… 우리가 타고난 권리란다……
나타셴카, 안 돼……
아뇨, 부인. 이번 한 번은 거절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만약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무엇이냐고 제게 묻는다면……
그건 바로 '선택할 권리'일 거예요.
……
그리고 지금은, 부인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직 늦지 않았어요'.
제가 선택하고, 짊어지기로 결심하기에 늦지 않았어요.
……단지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이죠.
“아무리 공들여 설계한 거짓말도 직접 경험한 사실을 당해낼 수 없다.” 나타셴카는…… 선택을 한 것뿐이에요.
하지만 그 아이가 부인을 속였으니, 최소한 대가를 치르게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제가 좀 지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