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8여정 위의 선언
엔시오데스는 카란 무역회사에서 사임하고, 노시스는 카란 무역회사를 대표해 빅토리아와의 모든 협력을 중단한다. 캐롤린은 정보를 넘긴 후 빅토리아에 의해 제거당할 뻔하지만, 다행히 메이랜더 재단의 손에 구출된다.
텅 비어 있는 사무실.
노시스는 이런 느낌에 익숙하지 않았다. 책상 앞으로 다가가 보니, 책상 위에 있는 컵에서는 갓 따른 커피가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엔시오데스의 서명이 있는 서류 하나가 깔려 있었다.
'위임장'.
회사에서 작별 인사도 안 하는 건가……
……서명했다.
위험성에 대해선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광산과 토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우리는 만주원을 제치고 외국과 직접 합자 광산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지.
그렇게 되면 앞으로 귀찮은 일이 많아질 거다.
지금 그 대가를 지불하고 격차를 좁히지 않으면, 미래에는 요구받는 게 더 많아질 거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가다.
다소 낙관적인 결론이군, 엔시오데스.
넌 무슨 일이든 나보다 낙관적이었던 적 없어.
이건, 대부분의 상황에서 네가 나보다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다는 뜻이지.
……
하지만, 그 '낙관적인'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어둠 속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을 거다.
후훗.
네가 남을 치켜세워주다니, 정말 오랜만이군.
가서 다음 계획을 완성해라, 노시스.
……
중간급 이상의 직원들은 다 모였고, 녹화도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시작하지.
네, 집행관님. 이번 회의의 안건은 무엇입니까?
오늘 이렇게 모두를 소집한 건 중대한 인사이동 사안을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부로 엔시오데스 실버애쉬는 카란 무역회사의 사장, 그리고 CEO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다.
최근 발생한 사고에 대해, 엔시오데스 본인이 책임지고 사퇴한다는 의견을 밝혔으며, 이사회 역시 승인했다.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앞으로 내가 엔시오데스의 모든 직무를 승계할 것이다.
그렇기에, 난 이 자리에서 이사회를 대표해 이곳에 있는 모든 동료와 쉐라그 국민에게 새로운 카란 무역회사의 첫 번째 성명을 발표할 것이다.
……
카란 무역회사는 앞으로 빅토리아와의 모든 협력을 종료할 것이다.
과거 엔시오데스가 독단적으로 체결한 여러 계약은 전부 잠정 보류할 것이며, 이사회의 추가적인 판단을 기다릴 것이다.
특수한 상황인 만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각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쉐라그의 발전을 최우선으로 하여 남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길 바란다.
……
쉐라그에는 우리가 필요하다.
어이, 일어나, 교대해야지.
……일찍도 온다.
처음이잖아. 좀 헤맸어.
일은 어떤데?
다른 사람들은 됐고, 저 늙다리만 잘 지켜보면 돼.
누구?
만주원에 늙다리가 또 있냐?
모두가 폭소를 터뜨린 후, 당직 경비병 2명만 남겨두고 다들 흩어졌다.
……말을 좀 가려서 하면 안 되나. 자기도 쉐라그인이면서 장로님께 어떻게 그렇게 예의 없게 말하지?
아직도 그 작자의 편을 드는 거냐? 그놈들이 *쉐라그 비속어* 우리를 이렇게 만든……
닥쳐, 죽고 싶냐?
2명의 경비병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감방에 단정히 앉아 있는 아드소 장로를 바라봤다. 장로는 손에 든 두꺼운 경전에 집중하며 생각에 잠긴 듯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아이고, 다행이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수백 년 동안 허풍만 떤 만주원이 이제 와서 뭔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다들 쉐라간드의 대리인이야, 장로님은 존중하지 않더라도 쉐라간드는 존중해.
난 원래부터 이런 놈이었어. 그리고 만주원에 존중이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우리 어머니가 아팠던 적이 있어, 그때 수도사가 어머니께 풀을 따서 먹이고는 나한테 풀을 보며 기도하라고 했지. 쉐라간드께서 보호하실 거라고 말하면서.
결국엔 카란 무역회사의 의사한테 갔어, 근데 수도사 때문에 병이 심해졌다고 하더라고, 하루만 더 늦었어도 살릴 수 없었을 거라고 했지.
만약 대리인을 논하려면, 그건 엔시오데스 님이어야 해!
……“지식인이었던 유르겐은 그분을 열과 성을 다해 섬겼고,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허나 악한 무리가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유르겐이 관청 창고의 은화를 훔쳤다고 모함하였고, 그렇게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손발을 무거운 쇠사슬로 결박당한 유르겐은 밤에 병사들의 칼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유르겐은 걱정했고, 괴로워했다.”
이건……
하, 어떤 늙다리인지 딱 알겠구먼.
경비병은 곤봉을 들고 곧장 아드소의 감방으로 걸어가 철책을 세게 두드렸다. 그러자 아드소가 낭독을 멈추고 담담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이, 늙다리, 감옥 들어왔으면 입 다물고 있어.
네가 지은 죄는, 쉐라간드를 봬도 다 갚지 못할 거다.
……
“우러러보아도 빛이 보이지 않는 감옥에 헛되이 갇힌 유르겐은 거적 위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애원하였다……”
“정의로우신 쉐라간드께 묻습니다. 전 당신의 이름으로 선을 베풀고, 당신의 이름으로 진리를 구했습니다.”
“허나, 당신의 나라는 정직한 자가 재난을 당하고, 의롭지 아니한 자가 구원받는 곳입니까?”
“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어찌하여 저들의 황당한 거짓 맹세를 듣는 것입니까? 제가 구해준 이들은 어찌하여 침묵하는 것입니까?”
……
*쉐라그 비속어* 반역자 주제에, 감히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해?!
아주 혼쭐을 내주지……
경비병은 곤봉을 한쪽에 내려놓고 감옥 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꺼냈다. 하지만, 분노로 인해 오른손을 덜덜 떠는 바람에 자물쇠에 열쇠를 꽂는 데 몇 번이나 실패했다.
……“쉐라간드시여! 저의 육신은 옥에 갇혔으나, 저의 영혼은 여전히 당신의 동정을 바라고 있나이다.”
“아직 제 눈이 보이고 있을 때, 제 귀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부디 저에게 정의의 손을 내밀어 주소서!”
오늘을 《쉐라간드》를 보는 마지막 날로 만들어 주마!
……
내, 내가 무슨 짓을……
내가 동료를 해치다니……
잘했네.
신성한 짐이란, 삼족이나 성녀와 만주원만 지니고 다니는 것이 아닐세.
쉐라그인이라면 누구든 언제나 그분의 의지를 실천해야 하지.
방금처럼 말일세.
그건…… '참회자 유르겐'입니까.
어렸을 때 설산에서 길을 잃고 의식을 잃기 직전, 한 수도사님께서 저를 구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버든비스트 위에서 자기 옷을 벗어서 저를 꼭 감싸주셨고, 유르겐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그리고 쉐라간드께서 죄 없는 모든 백성을 구원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어디에 갇혀 있지?
모두 근처에 있습니다.
기회를 봐서 모두 풀어주게, 다들 도망쳐서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게끔.
전쟁이 설산 속에서 무르익고 있다네. 만주원이 폐허 위에 모든 것을 세울 것이네.
내가 '참회자 유르겐'의 결말을 자네에게 들려주겠네.
멈추십시오!
대장로님, 저희가 무기를 쓰게 하지 마십시오. 누구도 여기에서 탈출하게 둘 수 없습니다!
……내가 자네 쪽으로 가겠네.
자네가 신의 뜻을 거역하고 그 화살로 자네의 심장을 겨냥하겠다면 그렇게 해보게.
장로님……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경비병들이 두 줄로 늘어섰으나, 서로 얼굴만 살필 뿐이었다. 이내 더 많은 이가 무기를 거두고 좁고 긴 통로를 내주었다.
아드소가 고개를 숙인 채 경비병들을 지나쳐 눈밭에 얕은 발자국을 남겼다.
……
“유르겐의 말이 끝나자마자, 온 감옥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감옥의 모든 틈새로 눈보라가 몰아쳐 들어왔다.”
“신도를 가둔 벽이 썩은 나무처럼 부서져 가루가 되었고,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신도의 몸을 에워쌌다.”
“무기가 부러지고 병사들이 사방으로 넘어졌으나, 병사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들은 유르겐의 발치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였다.”
“'참회자 유르겐'은 삼족의 영토를 두루 다니며 평생 이 기적을 전파하였다. ”
“그렇게 쉐라간드께서는 자신을 부르는 자에게 손을 내밀어 의를 행하였다.”
뼈 마디마디의 감각이 점점 사라졌고, 신발은 거듭 푹신한 눈밭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쉬지 않고 다리를 움직이며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하아…… 하아……
……하아, 누구냐……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눈앞이 핑핑 돌아 그게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당신들은……
캐롤린 씨, 명령을 받고 모시러 왔습니다.
계획대로라면 동행이 있어야 할 텐데요.
……
그 사람은 쉐라그인에게 붙잡혔어.
정보는 무사하겠죠?
……공작님께 가서 쉐라그의 뒤에 숨겨져 있던 힘이 사라졌다고 말해.
천체 물질이 떨어지는 걸 관찰하고 기록했어. 그 뒤에 이어진 재앙이 내 판단을 검증해 줬고.
에너지장으로도, 베헤모스 가설로도 쉐라그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어.
이 파일을 가져가. 쉐라그의 몇몇 가설에 관해 진행한 내 연구 내용이 전부 들어있어.
……뭐야?!
유감입니다, 캐롤린 양.
몰래 메이랜더 재단과 접촉한 사실을 여태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죠?
그래서 공작님께서 자료만 가져오라고 하시더군요.
공작님께서는 분명 쉐라그의 가호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기뻐하실 겁니다.
당신들……
……
하늘에서 온 방문자, 베헤모스 전설……
내가 본 이 대지 곳곳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기적들이 가득했어.
하지만 당신들은 사기, 절도, 살인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
쉐라그에서 탈출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당신 같은 인간들이랑 손을 잡았겠어!
당신의 불만은 제가 공작님께 그대로 전달하죠.
그럼 안녕히, 캐롤린 양. 국가에 '복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누구를 안타까워하는지 모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막탄?!
기습이다! 엄폐물을 찾아 흩어져!
밤의 어둠에 뒤덮인 연기와 총포 소리가 섞여 눈밭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때 검은색 오프로드 차량이 짙은 연기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 뒤를 따라 나온 빅토리아 특수요원들이 점점 멀어지는 차량을 향해 총을 쏘았지만, 헛수고였다.
놀라셨죠, 캐롤린 양.
빅토리아인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시간을 꽤 많이 들였습니다.
물건은 잃어버리지 않으셨죠?
……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가져온 자료 중 '천체 물질'이라고 표시된 파일을 꺼내 앞줄에 앉은 특수요원에게 건넸다.
……연구는 언제 시작할 수 있지?
서두르지 마십시오. 제 상관께서 이야기부터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캐롤린 양의 연구 과제에 관심이 많으시거든요.
저희와 오랫동안 함께 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캐롤린은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렸다.
빅토리아에 넘겨야 했던 '쉐라그 보고서'를 미처 넘기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차창을 열고 찬바람이 안으로 들어오게 했고, 쉐라그에서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논문들을 1장씩, 주저 없이 밖으로 던졌다.
밤하늘 아래, 종이들은 마치 황야에 새로 내리는 눈처럼 하얗게 보였다.
종이는 눈보라 속에서 빙빙 돌며 회전했고, 정치인들이 일으킨 소용돌이 속에서도 회전했다.
이건 돌려줄게, 빅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