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2달콤한 이웃
엔시오데스는 압박을 견디며 국면을 유지한다. 한편, 서재에서 재앙의 원인을 찾던 엔야는 대장로의 조언으로 순례를 시작해 민심을 안정시키기로 한다.
……
“겨울이 무척 길었던 옛날, 그분께서 산속으로 들어가 씨앗을 찾으셨다……”
……아냐, 이 구절이 아니야.
고대 쉐라그어에는 '재앙'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어. 이게 정말 쉐라그에 재앙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일까?
옛날 사람들이 재앙과 다른 재해의 차이를 몰랐다면, 다른 방식으로 기록해 두지 않았을까……
“쌓였던 눈이 녹아 농지와 목장을 덮쳤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한파가 농작물을 죽게 했다……”
아냐, 이것도 아니야…… 이건 재앙에 관한 기록이 아닌 것 같아.
다른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서 들은……
“차디찬 겨울이 카란의 심장을 얼리자, 먼 곳에 있던 적이 빙판 위를 건너왔다.”
“손에 무기를 든 전사가 매일 경계를 섰다. 그러던 어느 황혼 무렵, 그는 거울 같은 빙판 위에서 무서운 괴물을 보았다…… 라드손이었다.”
“전사가 급히 돌아와 주민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지만……”
“괴물은 오로지 전사에게만 보였기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전사는 매일 불안에 떨었다.”
아드소 장로님? 언제부터……
오늘 새벽 기도를 드린 이후부터 계속 여기 있었다. 방해가 될까 봐 가만히 있었는데…… 익숙한 경전 구절을 읽길래 참지 못하고 끼어들고 말았구나……
성녀님을 놀라게 하다니, 면목이 없군.
아니에요…… 전 대장로님께서 지금쯤 정무를 보고 계실 줄 알았어요……
방 안의 흐릿한 조명 아래, 높은 사다리 위에 앉은 엔야의 눈에 대장로의 로브는 나무 바닥과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대장로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장로직을 받으신 지 얼마 안 돼서 많이 바쁘시죠? 잘 되어가고 있나요?
성녀님에게 미안할 따름이라네. 이 늙은이는 반평생을 이 서재에서만 보냈지 않았는가, 정무는 물론이고 만주원 밖의 사람들과 만날 기회도 많이 없었다네……
근데 나이 하나로 장로가 됐으니,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겸손하시군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대장로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부끄럽군…… 경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내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게 된다네. 그분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에 불과하지.
성녀님이 서재에서 벌써 이틀이나 밤을 새웠다는 소식을 들어서 온 거라네. 혹시나 내가 성녀님의 근심을 함께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마침 저도 대장로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었어요. 제 의혹을 해소해 주셨으면 해요.
그녀는 경전을 덮어 차곡차곡 포개고는 몸을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
높은 곳의 지식과 침묵하는 바닥을 이어주는 오래된 나무 사다리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엔야는 경전을 품에 안은 채 비좁은 책장 사이를 빠져나와 큰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책상 위에는 경전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
이게 제가 이틀 동안 정리한 거예요……
문헌에 나오는 쉐라그의 모든 특이 재해를 다 모아봤지만, 쉐라그의 과거 천 년 동안의 역사에서 실제로 재앙이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재앙이 왜 하필 지금 일어난 건지 설명이 안 돼요. 대장로님도 아시다시피 올해 겨울은 예년과 똑같았잖아요.
소녀는 경전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대장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노인은 앞에 놓인 경전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 고개를 늘어뜨리고 침묵할 뿐이었다. 새하얀 귀밑머리 아래서 축 늘어진 눈이 천천히 가늘어지며 가느다란 곡선을 그렸다.
……대장로님께서는 제 노력을 그리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 같네요.
아닐세…… 이 늙은이가 어찌 그런 짓을……
자네는 재앙의 진실을 찾고 있지. 눈앞에 닥친 그 거대한 재앙, 그 표면적인 공포 말일세.
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듯…… 성녀님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합리적인 일이라네.
하지만 쉐라그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되짚어보며 단편적인 기록 속에서 모든 변고와 재난의 흔적을 찾는 건…… 정말 고된 일일세. 그건 눈 덮인 들판에서 촛불 하나에 기대 소금 알갱이를 찾는 거나 다름이 없는 고행이지.
그런 고생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전 이 재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야만 해요……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성녀님의 불안한 마음은 나도 이해한다네. 쉐라그를 걱정하고 이재민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그리고 어떤 다급한 마음이 자네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도 느껴지니까.
하지만, 그 조급함이 오히려 성녀님의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것 같군.
……
아드소 대장로님, 제가 사적인 자리에서 여쭌 적은 없었습니다만……
쉐라그에서 일어난 재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아는 게 많지 않아 이번 재앙의 원인을 설명하지는 못하겠구나.
하지만 며칠 전, 성녀님이 했던 말에는 동의한다네……
쉐라간드께선 우리 백성들을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어.
사실 쉐라간드께서는 그 어떤 약속도 우리에게 하신 적이 없지. 경전에서는 오히려 '기적'으로 그분의 존재를 시험하려 들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고……
우리가 그분을 믿는 이유는 그분이 선이자 미덕의 화신임을 믿기 때문이지. 우리는 그분의 길을 따라가며 더 나은 '우리'로 거듭날 거다.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해요……
하지만 걱정도 돼요. 이런 해석을 사람들이 들을 것 같지 않아서요……
그래. “이성의 숭고함과 통찰력은 금으로 만든 신발 한 켤레와 같아 너희를 멀리 가게 해주지만, 그 신발에 맞는 발이 있어야 한다.”
언젠가는 자네가 걷는 진리의 길이 통하는 날이 올 걸세.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이 늙은이도 답을 줄 수가 없다네.
그나저나, 방금 성녀님이 읽은 건 '라드손' 이야기였지…… 함께 그 이야기를 끝까지 보지 않겠나?
책상 위에 펼쳐진 책에는 수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어느 문명에서나 있을 법한 아주 흔한 이야기였다. 대장로는 손을 뻗어 책 아래 깔린 다른 책을 꺼냈다.
먼지와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며 피어오르는 은은한 연기가 뒤섞여 마치 굳어버린 호박 덩어리처럼 공기 속에 머물렀다.
“전사는 사방을 돌며 괴물에 맞설 방법을 구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괴물'은 쉐라간드조차 없앨 수 없었다.”
“그분은 얼어붙은 호수에 전사를 데려와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괴물을 볼 수 없기에 맞설 수 없다. 그러나 너는 볼 수 있기에 그것을 멸할 방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전사는 깨달았다. 그리하여 카란의 심장은 녹아내렸고, 봄은 그렇게 겨울을 몰아냈다.”
“쉐라간드는 백성에게 마지막 축복을 내렸다. 그분의 눈물에 적들이 얼어붙어 영원히 눈 덮인 산봉우리 3개가 되었다.”
《쉐라간드》의 터전 구축 편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예요. 역대 학자들 모두 이 이야기에 대해 저마다 다른 해석을 내놨죠.
이야기 속 '카란의 심장'이 지금의 은심호를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쉐라간드의 계시를 받은 전사가 사실은 성녀의 기원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어요.
그리고, '빙판을 건너온 적'에 대한 의견도 다양해요. 이야기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괴물' 같은 경우는……
……'라드손'.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단어, 그리고 잠자기 전 듣는 쉐라그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지.
부모들은 더 놀고 싶은 아이들이 잠들기를 거부할 때면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아이에게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고 말이야.
너무 광범위하게 사용되다 보니, 쉐라그인의 대다수는 '라드손'이 일종의 주문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내뱉는 말이 아니라, 명확한 의미가 있는 단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지.
수많은 단어가 기나긴 세월 속에서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죠.
그 '라드손'이라고 하는 건, 천 년 전에 쉐라그에 유입된 외래어인 것으로 추정돼요. 그 어원은 '재앙'과 같아요.
제가 기억하는 게 맞는다면, 본래의 의미를 잃은 외래어를 번역하는 게 서재에서 대장로님께서 주도하신 일이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운 좋게 연구로 알아낸 게 있긴 하다네.
그 '라드손'이라는 단어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네. 앞의 간결한 '라드'와 발음이 더 거칠고 혓소리가 필요한 '손'.
벽난로의 불빛이 날뛰었다. 대장로의 손가락이 책장을 훑으며 세로선을 그렸고, 살짝 팬 곳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수수께끼의 괴물은 그렇게 반으로 쪼개졌다.
'손'은 어려운 단어가 아니야. 대략 '어떤 무서운 것', '미지의 괴물' 정도의 뜻을 갖고 있지.
우르수스의 고어에서 유래되어 현지 우르수스 사투리를 거치며 조금씩 바뀌었고, 일부 노인들은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네. 비밀을 탐구하는 우리에게는 기준점과도 같은 존재지.
반면 '라드'는 빅토리아어에서 유래했다. 현대 빅토리아어의 '라들리트'와 어근이 같지. 라들리트는 '맹목적인, 근시안적인'이라는 뜻이야.
약 500년 전, 힐록 카운티 출신의 유명 극작가가 그의 대표작 《샤의 장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지.
'라들리'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곳'이죠.
그래. 그 필사본을 읽어본 모양이구나, 거기 적힌 주석도 봤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당시의 나는 어렸고, 지식도 경험도 많이 부족했다. 학자라고 불리기 어려운 수준이었다네.
그 후,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했다. 그리고 그제야 과거의 실수를 알아채고 바로잡을 수 있었지……
조용한 방 안에서는 펜과 종이가 만들어내는 마찰음만이 들렸다. 마치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너무 작아서 쉽게 알아챌 수 없는 소리였다.
펜이 움직여 종이 위에 긴 단어를 적었다. '라드손'이었다. 기원이 다른 두 어근은 떨어져 있었으며, 그중 '라드'에만 둥근 원이 쳐졌다.
정말로 '보이지 않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으며, 인간이 스스로 탐구할 수 없는' 장소. 그곳은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라드손'은……
인간 마음속의…… 두려운 존재군요.
……그렇다네.
전사가 호수에서 본 건 자신의 마음속 괴물이었던 거네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건, 자기 마음속 공포를 다른 사람은 볼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쉐라간드도 어쩔 수 없었던 거고요. 마음속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이니까요……
정말 무서운 재난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괴물이지, 보고 느낄 수 있는 재난이 아니군요……
정말 지혜로운 생각이군, 성녀님.
천 년 전의 선현들도 깨달은 이치지…… 지금 일어난 이 재앙도 쉐라그에만 보이는 '라드손'이라고 할 수 있다네.
……
하지만 쉐라간드께서는 더 이상 길 잃은 전사를 인도해 주지 않으세요……
……그럴 리는 없다네.
쉐라간드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괴물을 대신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네. 그분이 지극히 선한 존재이기 때문이지. 그분께는 인간적인 결함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과 같은 그늘 또한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분은 수많은 생명 중에 성녀를 선택해 성녀에게 '라드손'에 맞설 수 있는 권력을 넘기셨지.
성녀만이 쉐라간드의 곁에 머물며 두 눈을 눈 녹은 물로 씻고, 단단한 얼음의 시련을 성심껏 받지. 그리고 쉐라간드의 인도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는 걸세.
오직 성녀만이 얼음과 흙을 파헤칠 수 있고, 쉐라그인을 위해 마음속 미로의 출로를 개척할 수 있고, '쉐라간드'께서 모든 이에게 돌아갈 수 있게 하지.
수천 년 동안 쉐라그의 백성들은…… 오직 성녀만이 쉐라그인과 쉐라간드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속죄할 자격이 있다고 믿어왔다네.
대장로는 그렇게 말하며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건 간청하는 자세였다.
만주원의 성녀가 촛불 건너편에 있었다. 촛불은 춤을 추고 있었고, 불에 타버린 심지는 더 길어졌다.
대장로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순례'인가요.
정오 기도 시간이 되었군. 성녀님, 이 늙은이는 먼저 물러나도록 하겠네.
아드소 장로님, 잠시만요.
성녀님……
방금 말씀하신 것 중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요……
대장로님은 쉐라간드께서 백성에게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고, 기적을 통해 신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도 않았다고 하셨죠.
설마 대장로님은…… 쉐라간드께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나요?
……
그렇지 않다네……
쉐라간드께서는 분명 존재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쉐라그의 풀과 나무, 벽돌과 기와, 산과 바위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것. 이 모든 게 '쉐라간드'의 존재를 보여주는 흔적일세……
물론 어떤 이들은 신이 직접 나타나 자신의 믿음에 더 큰 확신을 주길 바라겠지.
하지만…… 구하는대로 이루어주는 '신'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걸 어찌 신앙이라 부를 수 있겠나?
저는……
성녀님, 이건 신자되는 사람이 처음부터 알아야 하는 이치라네. 지금 와서 이런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건……
저는……
아니에요…… 실언이라 생각해 주세요.
대장로는 아무 대답 없이 예를 차려 인사한 후 뒤돌아 떠났다.
그는 마치 책장 위의 먼지가 흩날리듯, 조용히 문 너머로 사라졌다.
……
벌써 와있었군.
오늘 두 가주가 날 부른 건 최근 발생한 이재민 구제 때문이겠지?
엔시오데스, 이게 뭐냐?
아크토즈는 빅토리아 대표 문장이 찍힌 소포를 탁자 위로 던졌다.
이건 보급 상자다. 한 사람의 하루치 레토르트 식량과 응급 의약품이 들어 있지.
시치미 떼지 마! 왜 지금 같은 시기에 빅토리아 사람이 이렇게 많이 쉐라그에 들어왔는지를 묻고 있잖아!
빅토리아 기자들이 사방에서 입을 놀려대고, 노동자 차림을 한 병사들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어. 내가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본 빅토리아 사람만 해도 농장에 있는 버든비스트 수보다 훨씬 많았다고!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는 하지 마,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이 빅토리아에서 온 물자들, 카란 무역회사에서 나눠준 거라며!
아크토즈, 만주원은 빅토리아인에게 쉐라그 출입 금지령을 내린 적 없다.
그리고 지금은 빅토리아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받고 있는 중이지.
만약 우리가 지금 시점에 아무 이유 없이 한 국가의 도움을 거부하거나, 외국인 관광객을 쫓아낸다면, 쉐라그의 국제적 이미지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
도움 같은 소리 하네! 그 위선자들의 도움이 없으면 쉐라그가 이번 재앙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거냐?!
진동으로 인해 탁자 위에 놓인 찻잔에서 잔물결이 일었다. 잔 밖으로 넘친 찻물이 나무 탁자 위로 퍼져나갔다.
세 가주의 실루엣이 물 자국 위에 비쳤다. 세 사람의 모습은, 높이가 다른 3개의 산봉우리를 연상시켰다.
게다가 빅토리아인들이 뭔 도움을 주겠어?
아, 그래…… 생각났다. 그 해럴드라는 놈, 예전에 우리한테 '도움'을 주긴 했었지!
그때는 매일 우리 쪽 사람들이랑 술을 마시며 이야기도 나누고, 틈만 나면 버든비스트 우리에 드나들면서 새끼도 받아주고, 병도 치료해 줬지. 버든비스트가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르는데, 정말 지극정성이더군.
사람들이 다 그랬지. “빅토리아인이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라고.
근데 결국은 어땠지? 은심호 축제에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무슨 짓을 벌이려 했는지 기억하나?
엔시오데스, 나는 네가 똑똑한 놈인 줄 알았는데. 그때의 교훈은 벌써 다 잊은 거냐?
……
내가 오늘 이렇게 온 건 할 말이 있어서야. 실버애쉬 가문과 브라운테일 가문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부로 페일로쉬 가문 영지에 빅토리아인은 한 사람도 발을 들이지 못해.
너희들의 '정치적 목적'이니 '국제적 명성'이니 하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나는 신경 안 써. 나는 빅토리아인들이 다시 쉐라그에서 소란 피우게 놔두지 않을 거다!
진정해, 아크토즈. 외국인과의 교류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우리끼리 먼저 싸우면 어떡해?
그럼…… 라타토스, 네 생각은 어떻지?
난롯불은 여전히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라타토스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 밑에 드리운 다크서클은 며칠 동안 이어진 피로와 분주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나도 아크토즈와 같은 생각이야.
엔시오데스, 너는 빅토리아와 제일 많이 교류했으니까 그 녀석들이 쓰는 수법도 제일 잘 알고 있겠지. 하물며 지금 같은 시점에……
빅토리아가 쉐라그에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 리가 없어. 지금은 호의로 보낸 원조가 언제 복병으로 변할지 모르는 일이야.
한번 되짚어 봐. 최근 쉐라그에서 일어났던 소동 중에 '외부인'이 관여되지 않은 일이 있는지…… 너도 어떤 위험이 숨어있는지 잘 알 텐데.
라타토스, 나도 네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도 잊지 말아야 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제일 안전해 보이지만, 결국 자신을 서서히 죽이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빅토리아가 이 시기에 사람을 보낸 것 자체가 일종의 시험이다. 그들은 우리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바라고 있지.
쉐라그는 고통스러운 변혁을 거쳐 지금의 성과를 얻었다. 만약 우리가 이 시점에 다시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근다면, 지난 수년간의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겠다는 것과 같아.
엔시오데스, 너는 빅토리아 사람들과 계속해서 교류할 생각인가?
너희 두 가주에게 약속하지.
카란 무역회사가 다른 국가와의 교류를 책임지고 있는 만큼 쉐라그와 빅토리아의 관계도 잘 처리하겠다고.
그걸 어떻게 보장할 수 있지?
네가 말했다시피, 빅토리아는 여전히 쉐라그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탐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뜻대로 된 적이 있었나?
또 그 표정이네…… 모든 게 손안에 있다고,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표정.
쉐라그는 변하고 있어. 여기엔 네가 일으킨 변화 말고도 재앙으로 인해 생긴 변화와 세월이 가져온 변화도 포함돼 있지.
변하지 않는 건 없어, 과거에 했던 네 성공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치면 저 거들먹거리는 대국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쉐라간드 신이시여, 부디 네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깨달았으면 좋겠어……
멀리서 만주원의 저녁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낮고 힘 있는 종소리가 한참을 맴돌며 여운을 남겼다.
엔시오데스 님.
강당으로 오라는 성녀님의 분부입니다.
뭐? 성녀님이?
……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비록 우리의 의견은 다르지만, 지금 쉐라그의 대외 개방 정책 결정권은 만주원에게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이 시기에 누군가 월권을 한다면, 그건 만주원에 대한 반역이자 성녀에 대한 반항이나 마찬가지인 일이다.
흥…… 지금 그 얘기로 나한테 겁을 주려는 건가?
나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지. 그 누구도 절대 내 눈앞에서 쉐라그에 혼란을 일으키는 걸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쉐라그를 지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엔시오데스, 너도 잊지 마. 네 결정은 네 영지와 네 카란 무역회사뿐만 아니라, 쉐라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네 오만함의 대가를 쉐라그가 치르는 일은 없기를 바랄게……
쉐라그인들이 하나로 뭉쳐있는 한, 그 누구도 쉐라그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없다.
……
음……?
그럼 이만.
성녀님,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세요.
제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성녀님.
……
……
성녀님, 저를 찾으셨다고……
급한 일은 아니고, 엔시오데스 님께서 강당에 안 오신 지 꽤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 불경함을 꾸짖으시는 거라면 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군요.
이 시기만 잘 넘기고 나면, 매주 이곳에 와서 성녀님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저도 물론 엔시오데스 님이 얼마나 바쁜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지친 모습은 보기 드문데요.
……안색을 보아하니 산 아래의 사정 때문에 꽤나 골치가 아프신 것 같군요?
성녀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재앙이 일어난 후로부터 민심이 계속 흔들리고 있습니다. 해결해야 할 일이 정말 많죠.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라면, 만주원도 더 바빠졌을 게 분명하니…… 성녀님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엔시오데스는 손가락 하나를 펴서 천천히 눈 아래를 가리켰다. 엔야는 곁눈질로 그 동작을 보았으나, 못 본 척 침묵을 지켰다.
벽난로의 불꽃이 타올랐다. 따뜻한 열기가 실버애쉬 남매의 속눈썹과 콧잔등까지 일렁이며 창백하면서도 닮은 듯한 두 얼굴에 따스한 색을 입혔다.
그들의 시선은 서로가 아닌, 장엄하게 서 있는 조각상을 향해 있었다.
오늘 아크토즈 님을 만났습니다. 인사를 하는데 낯빛이 어둡더군요. 라타토스 님조차도 평소와 달랐고요.
세 분께서 자주 싸우시긴 하지만 이 정도 상황까지 온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냥 세속적인 일들입니다. 성녀님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엔시오데스 님, 대답해 주세요…… 지금 쉐라그를 괴롭히는 '세속적인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빅토리아 사람들이 원인인가요?
그렇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빅토리아는 재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쉐라그에 구조대를 파견했습니다. 규모가 대단하더군요.
컬럼비아도 관측소에서 일어난 소동을 알고 있습니다. 자국 연구원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철수 준비를 위해 쉐라그에 군대를 주둔시키겠다고 위협하더군요.
모두가 각자의 입장에 서서 이번 재앙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쉐라그를 더 잘 파악하고 있었군요…… 이 재앙이 쉐라그에 어떤 의미인지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정치인들은 쉐라그가 혼란에 빠졌음을 눈치챘습니다. 그들에게 이건 쉐라그의 세력을 뻗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죠.
우리는 빅토리아가 여태 쉐라그에서 해온 일들이 다 같은 맥락이었다는 걸 압니다. 지금은 그저 본색을 드러낸 것뿐이고요.
저는 빅토리아의 이런 움직임이 누구의 지시에서 나온 건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의 본능이라고밖에 할 수 없겠지만, 그 여자의 속셈이 훤히 보이더군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이건 반드시 둬야 하는 수였을 겁니다……
제가 엔시오데스 님의 이런 모습을 가장 싫어한다는 걸 아시잖아요.
……만주원의 성역에서 실언을 했습니다.
엔시오데스 님은 왜 늘 본인을 전략가의 위치에 올려놓고, 주변의 모든 것을 말이나 패로 취급하시는 거죠…… 설마 그런 게임을 즐기고 계신가요?
하지만 그게 쉐라그의 진짜 처지입니다. 그 어떤 문명의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진실은 가릴 수 없죠.
쉐라그가 강한 자주 국가가 되려면, 나아가 이 게임판에서 대국들과 대등한 위치가 되려면, 반드시 이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하아……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게 정말 황당한 부분 아닌가요?
미덕과 선함을 믿는 건 쉐라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정치인들 또한 본인의 나라에서 리더나 스승의 역할을 하고 있죠.
그들은 교활하고 위선적이지만, 백성들에게는 성실하고 정직하라고 가르쳐요. 자기들은 끝없이 탐욕을 부리면서 백성들에게는 온순하고 선량해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엔시오데스 님은……
성녀인 제가 쉐라그 국민들에게 강조하는 미덕과 경전 속의 교리가 허무맹랑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나요?
……엔야.
불꽃이 팍하고 갑자기 튀어 오르더니, 속까지 다 타버린 장작 하나가 두 동강 났다.
오랜 세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그 이름이 실버애쉬의 입에서 다시 한번 흘러나왔다.
엔시오데스…… 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오늘 제가 성녀의 신분으로 당신을 부른 게 아니라면, 당신이 먼저 저를 찾아오는 일이 있었을까요?
……
쉐라그는 지금 전례 없는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한 걸음이라도 잘못 내디뎠다가는 쉐라그 전체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지도 모릅니다.
쉐라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결해야 합니다. 지금은 성녀님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엔시오데스 님께서 드디어 신앙이 쉐라그에서 하는 역할을 인정하신 것 같군요.
여태까지 부정했던 적은 없습니다.
쉐라간드를 향한 믿음은 쉐라그의 일부입니다. 이걸 빼놓고는 쉐라그를 논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많았죠.
하지만 실리적인 관점으로 신앙을 논하면서, 천 년 동안 재앙이 오지 않았던 쉐라그의 역사가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지금 기적의 진위를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버든비스트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민심을 달래는 일뿐입니다.
그래도 그 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같군요.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성녀로서 '순례'를 시작하려고 해요.
뭐라고……?
저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겁니다. 오늘 저녁 식사가 끝나면 이 소식이 쉐라그 전역에 퍼지겠죠.
……
만주원의 결정입니까?
제가 내린 결정입니다.
전통을 따르더라도, 순례는 봄과 가을에만 거행되어야 합니다…… 성녀가 한겨울에 순례를 떠났던 선례가 있었습니까?
하지만 쉐라그에 재앙이 내렸던 적도 없잖아요.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요.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실 텐데요……
당연히 알고 있죠.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백성들이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 수 있죠? 또 어떻게 사람들이 쉐라간드께서 '죄'를 사해줬다고 믿게 만들 수 있을까요?
수행원도, 재물도, 수레도, 휴식도 없을 겁니다.
오로지 걸어서 쉐라그의 영토를 한 바퀴 돌 겁니다. 성녀가 그렇게 쉐라그 전체를 대신해 속죄하고, 쉐라간드께 용서를 구할 겁니다.
순조롭다면 3달 정도가 걸리겠죠. 물론 성녀가 순례 중에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걸 알면서 왜 그렇게까지……
오라버니.
소녀의 말이 잠시 멈추었지만, 이내 유창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마치 눈이 녹아 시냇물을 이룬 뒤, 마터호른봉을 따라 흘러내리는 듯했다.
어린 시절, 따뜻함 때문에 함께 졸았던 겨울의 오후, 그때와 같은 따스함이 두 사람을 감쌌다.
아득하고 희미한 지난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찾아와, 이제는 커버린 아이들의 얼굴을 알아보고자 시절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실버애쉬 가문의 엔야로서, 전 오라버니가 그때 내린 결정을 용서한 적 없습니다.
하지만 쉐라그의 성녀로서는 아직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죠.
……
저도 알아요…… 쉐라그에 필요한 건 신앙의 인도뿐만이 아니죠. 아니, 오히려 우리는 신앙에 대한 오해 속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어요.
하지만 공장, 철도, 무역…… 그리고 하늘을 탐구하는 관측소, 이것들은 쉐라그를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할 틈을 만들어줬어요.
쉐라그에는 이런 변혁이 필요해요. 그러니 이 모든 것을 멈추지 마세요.
제가 할 일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사람들이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며, 지금 겪는 고통은 구원받을 수 있는 고통임을 믿게 하는 거예요.
쉐라그인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구원만이 존재해요. 그리고 그 구원을 짊어질 수 있는 사람도 한 사람뿐이죠……
저는 쉐라그의 성녀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는 그 결정을 알리기 위함이었군요.
맞아요, 물론 엔시오데스 님의 의견을 구할 생각은 없었어요. 당신에게는 저를 막을 이유도, 그럴 능력도 없으니까요.
하나 더 있어요. 제가 만주원에 없는 동안에는 삼대 가문의 정무는 각 가문에서 처리하게 될 거예요. 문제가 생기지 않게 미리 준비하길 바랄게요.
그리고……
제가 없는 동안 엔시아를 잘 돌봐주세요. 무서워하지 않게요.
엔시아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런 일로 무서워하진 않을 겁니다.
엔시아보다 걱정되는 건……
엔시오데스 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그만 준비하러 가보시죠.
……
손님을 쫓아내는 겁니까?
알아들으셨으면 얼른 움직이시죠.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엔시오데스는 몸을 숙이고 뒤로 물러나 성녀에게 예의를 갖춰 작별 인사를 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리, 기다려!
퍽…… 농가 벽에 부딪혀 튕겨 나온 공이 소년의 발밑으로 굴러왔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달려오는 소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빨리 와! 항상 기다리게 만든다니까.
그가 공을 몇 미터 밖으로 차내자, 소녀는 투덜대며 멀리 굴러간 공을 쫓아갔다.
아이들에게 흔치 않은 자유 시간이었다. 산자락 아래에 위치한 겨우 20가구 남짓한 마을, 아이들은 어른들이 바쁜 틈을 타 마을 한가운데에서 놀고 있었다.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 성녀님께서 우리 쉐라그인을 위해 순례를 떠난다고 합니다. 우리 마을은 성녀님이 산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거쳐 가는 곳이 될 겁니다.
그러니 제가 알려드린 규율에 맞게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그리고 성녀님이 보이더라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수도사님, 성녀님께서 정말 다시 쉐라간드를 부를 수 있을까요?
제 아내가 도시에서 일하고 있는데, 재앙이 내린 후로 소식이 없습니다. 이웃 마을에서 온 사람 말로는 엔시오데스 님이 현장을 봉쇄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더군요.
걱정 마세요, 바우어. 성녀님이 떠나시는 게 바로 이 일 때문입니다. 쉐라간드께서는 어느 쉐라그인도 버리지 않습니다.
이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버려진 사람 아닌가?
카란 무역회사가 이것저것 일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젊고 건강한 사람 중에 여기 남아 농사나 지으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나? 그나마 바우어가 어릴 때 다리를 절게 되어서 그렇지……
아드님이 도시로 간 뒤로 저와 수도사님이 보살펴 드렸잖아요? 좀 좋게 말씀하실 수 없나요?
재앙이 일어난 이후부터 아들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는데, 내가 무슨 기분으로 말을 좋게 하겠나?
자, 그만하시죠. 오늘만큼은 성녀님을 생각해서라도 좋게 지냅시다.
바우어, 이따가 카를 씨의 병세를 좀 확인해 주세요. 전에 기어서 나오는 한이 있어도 성녀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하셨는데, 저 대신 잘 타일러 주세요……
(큰 소리로) 수도사님, 성녀님을 봤습니다. 곧 도착하실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빨리 오시다니…… 일단 길가로 가서 기다립시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다들.
마을 주민 수십 명이 마을 중앙의 길가에 늘어서서 먼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수도사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불안함에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문질렀다. 20여 년 전, 만주원의 파견을 받아 이 마을로 온 그는, 초상화에 그려져 있는 모습을 제외한다면, 이 새로운 성녀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벼운 발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수도사는 성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자 애써 안면 근육을 통제했다.
퍽!
아야!
(작은 목소리로) 사고 치면 어떡해! 이 바보야!
아…… 이런, 저 둘을 깜빡했군.
서,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놀라진 않으셨습니까?
말리! 이리 와서 성녀님께 사과드려!
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공이잖아요. 맞아도 전혀 아프지 않아요.
꼬마 친구들, 저는 의식을 계속해야 하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부모님은 여기 계시나요?
저, 성녀님……
저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사원에서 살고 있어요.
……
수도사님, 저 먼저 가도 되죠?
(목소리를 죽이며) 어서 돌아가. 또 말썽을 부리면 경전을 베껴 쓰게 할 줄 알아!
으으……
성녀님, 이런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마을에 이런 아이들이 얼마나 있나요?
지금 제가 거둔 아이가 9명입니다. 부모가 세상을 일찍 떠난 아이도 있고, 부모가 도시로 일하러 가면서 제게 맡긴 아이도 있지요.
하지만 재앙 이후로…… 부모들에게서 소식이 끊겼습니다.
……
……성녀님! 성녀님께서는 이번 재앙이 왜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제 아내는 언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
바우어, 제가 아까 뭐라고 했죠?
설마 쉐라간드께서 정말 우리를 버리신 겁니까?
그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힘들 때일수록 우리는 그분의 선함과 의로움을 믿어야 합니다.
제 힘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해 여러분과 쉐라그인의 기도가 다시 그분께 닿게 할 겁니다.
쉐라간드 신이시여. 부디 저를 믿어주세요.
……쉐라간드 신이시여. 그분은 저희를, 그리고 성녀님을 지켜주실 겁니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마을 주민들은 수도사를 따라 함께 고개를 숙여 성녀에게 예를 표했다. 그들은 믿음을 택했다.
성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리 보이는 설산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