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ST-2등산 철도
성녀와 엔시오데스는 파티에서 날카롭게 대립했지만, 외부인에 대해서는 함께 대항했다. 파티가 끝난 후 아쉬움이 남은 자작은 데겐블레허에게 진심을 털어놓는다. 카란 무역회사 본부 로비에서 세 친구는 잡담을 나눈다.
나 왔어.
……
리스번, 뭘 그리 두리번거려?
아무것도 아니야.
아, 기억났다. 투리엘 씨 따님이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던데. 빠져나갈 핑계를 찾는 거구먼?
공적인 일로 사심을 채우다니.
원래 이 근처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했던 사람이잖아. 도와달라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됐다. 그나저나 왜 음식이 나오질 않는 거지?
잠깐 실례, 혹시 요리는 아직인 건가?
죄송합니다.
주문받은 요리가 너무 많아서요. 주방에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계시는데도 바쁘네요.
그렇다면 내가 도와주지!
그러실 필요 없어요.
당신은……
성녀님의 시녀장, 키야르랍니다. 인사 받으시죠.
아, 우리는 그냥 병사들일 뿐이니까, 예를 갖출 필요는 없어.
리아.
네.
수행 시녀들에게 조를 짜서 교대로 주방 일을 도우라고 해.
반드시 파티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게끔 해.
네.
그……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자작님께서 이 파티를 주최하신 건 맞지만, 그래도 여긴 쉐라그고, 성녀님에겐 여러분은 손님이야.
자작님께서 성녀님을 초대하셨으니 하인으로서 여러분을 돕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기분 나쁘게 듣진 말고, 무기를 드는 데 익숙한 여러분의 손으로 그릇을 옮기면 오히려 방해될 수도 있거든.
어……
그래, 리스번. 시녀장님 말이 맞아. 우리가 정말 도와드려 봐야 접시만 수없이 깨트릴지도 모르는 거잖아.
……알겠어.
하지만 힘쓸 일이 있으면 편하게 말해줘, 시녀장님.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주방에 식재료를 운반할 사람이 부족한 것 같던데, 혹시 괜찮으면……
내가! 내가 가겠어!
……고마워, 시녀장님.
별 말씀을.
이제 문제는 해결됐으니 여기 계신 분들께 방해되지 않게 나가도록 할까.
……돌아왔습니다.
리아, 부탁할 게 하나 더 있어. 가서 이 재료들이 있는지 보고, 있으면 주방에 요리를 하나 더 해달라고 해.
그…… 과일 치즈 부리토를 부탁할게.
그런 가정식을요?
하지만 성녀님은 평소에 손도 대지 않으시잖아요?
괜찮아, 그냥 내 말 들어.
카란 무역회사 직원들도 하나둘씩 도착하고 있는 것 같아.
네. 자작님이 성녀님과 엔시오데스 님 말고도 만주원의 장로들과 카란 무역회사의 직원들을 초대하셨어요.
역시 빅토리아의 자작답게 정말 통이 크네요.
게다가 확실히 능력도 있는 것 같아요. 버든피크 호텔의 메인 주방장인 투리엘 셰프까지 모신 거 있죠.
성질이 워낙 고약해서 웬만한 돈에는 안 움직이시는 분이잖아요.
쉐라그에 있는 한 달 동안 우리 주민들과 잘 지냈다는 뜻이겠지.
음?
마셔! 건배!
꺼억…… 마셔, 마셔!
꿀꺽……
좋아. 당신네 설산 사람들, 진짜 잘 마시는데……
하지만 난 더 마실 수 있다고. 헤헤.
자 다음은 누구냐!
와, 이런 곳에서까지 술 대결을 하다니……
심지어 벌써 몇 병이나 마셨어요.
키야르 씨, 어쩌죠?
……후우.
잘 지내는 건 좋은 일이지만, 너무 잘 지내면 좀 성가시단 말이야.
저러면 다른 사람들이 골치 아파지는데 말이지.
노시스 님, 설산귀 소대가 각자 위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파티에 아무나 함부로 못 들어오게끔 앞뒷문을 순찰했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라.
발레, 설산귀 한 소대를 데리고 주방에 가서 좀 도와줘.
알겠습니다.
이 한 병을 통째로 원샷, 어떻나?
이, 이건 제일 독한 녀석이잖아. 이걸 네가?
두려운가?
하하, 좋아. 간도 큰 녀석이네, 원샷!
한 번 더.
그래!
너…… 제법인데……
……해장국은 있나?
리아.
여기요.
고맙군.
앗, 노, 노시스님?!
정신이 드나?
네, 네!
아까 있던 술을 잘 마시던 그 병사…… 집행관님이 쓰러뜨리신 겁니까?
그렇다.
……대단하십니다.
오늘은 그만 마시고 가서 쉬도록.
가, 감사합니다!
……
카란 무역회사의 수석 기술 집행관이 이렇게 술을 잘 마실 줄이야.
독한 술을 두 병이나 마시고도 안색 하나 안 변하고, 티도 안 나는군.
젊었을 때 연습한 쓸데없는 재주일 뿐이야.
젊었을 때도 이런 자리에 자주 다녔나 봐?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파티가 곧 시작될 테니, 카란 무역회사 직원들도 같이 도우라고 하지.
당신은 대화에 참여 안 하려고?
……
아직은 그럴 필요 없다.
지금은 저 사람들의 시간이니까.
……
……
음, 두 분……
엔시오데스 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하시죠? 혹시 기분이 안 좋으신가요? 아니면, 파티에 와서 컨디션이 안 좋으신 건가요?
평소 유창했던 말솜씨는 다 어디로 간 건가요?
그렇게까지 관심을 보여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성녀님.
그저 성녀님과 한 테이블에 앉아있다는 게 너무 황송하여 선뜻 성녀님보다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엔시오데스 님은 신실하신 분이군요. 아무래도 제가 잘못 봤나 봅니다.
황송할 따름입니다.
황송하다뇨. 후훗, 이 세상에서 엔시오데스 님이 황송할 일이 있을까요?
하하, 오늘 날씨가 정말 좋군요. 파티하기 딱 좋은 날입니다.
자 그러면, 두 분은……
과찬입니다. 저 또한 두려운 일이 있는 법이니까요.
곧 있을 쉐라간드 동상 낙성식만 봐도, 카란 무역회사의 모두가 단결해야 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어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엔시오데스 님은 좀 더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쉐라간드 동상 낙성식은 쉐라그에 의미가 큰 데다가 이번에는 빅토리아에서 '축하하러 온' 우리 친구들이 있으니,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을 거예요.
맞는 말씀입니다.
성녀님께서 신성한 일을 잘 아시고, 낙성식 준비가 완벽하고 세심한 건 실로 쉐라그의 행운입니다.
다른 문제들은 카란 무역회사가 만주원과 함께 분담할 것이니 안심하시지요.
아아, 두 분 다 젊고 훌륭한 분이시네요!
이번에 저희가 이곳에 온 건 축하 말고도 협력에 대한 얘기를 나누……
그 정도로 유창하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이미 대략적인 계획을 갖고 계시나 보군요.
엔시오데스 님께서 요새 워낙 활발하게 움직이신 덕에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일이 드문 저조차도 카란 무역회사의 각종 소식을 들을 수 있더군요.
하지만 잊지 마세요, 엔시오데스 님. 쉐라그는 지난 천 년간 공리와 무모함이 아닌, 근면과 실용성에 의존해 우리의 터전을 오늘날까지 발전시켰단 것을요.
백성을 향한 쉐라간드의 교훈을 실버애쉬는 잊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쉐라그 사람들이 근면 성실하다 해도, 모험 정신이 부족했던 적이 없단 것은 성녀님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대외적 발전에 대해서는 그런 예리함이 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예리함이 당신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를 기도하죠.
하하, 젊은이들은 늘 예리함이 있죠. 하지만 성녀님 말씀이 맞습니다. 안정적인 게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죠.
제가 두 분을 초대한 건……
성녀님께서 그렇게 걱정해 주시니 감동입니다.
안심하시죠. 반드시 잘 처리하겠습니다.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쉐라그의 모든 건 결국 쉐라간드의 뜻을 여쭈어야 하니까요.
믿음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저는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
……
……그 나쁜 버릇, 전혀 나아지질 않았군요!
피차일반입니다.
어…… 저기 두 분, 무언가 쌓인 게 있다면 좋게 말로 푸시지요. 화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게…… 다시 협력에 관한 얘기를 하자면……
엔시오데스 님의 머리는 가장 순수한 오리지늄 얼음 결정처럼 꽉 막혔군요.
성녀님도 만만치 않으십니다. 오랜만에…… 솔직하게 말씀하시는군요.
엔시오데스 님에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그런데 우리 엔시오데스 님께서는 지난 몇 년간 본전을 지키는 법을 배우지 못하신 모양이에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설마 그 나쁜 습관 때문에 뒤는 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쏟아부은 건가요?
리스크는 언제나 보상과 비례합니다.
엔시오데스 님이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는 일이 부디 없길 바라죠.
이젠 아무도 당신의 베개 밑에 몰래 용돈을 넣어주지 않으니까요!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지만 동전 때문에 잠자리가 불편해 잠에서 깰 이유도 없어지겠죠. 게다가 사탕이나 간식을 산 후에, 이자까지 더해서 세 배로 갚지 않아도 되고요.
아무도 갚으라고 한 적 없어요!
저, 저기, 두 분……
자작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
……
아아, 음, 그러면 제가 먼저 한잔하지요……
성녀님, 엔시오데스 님, 저는 두 분의 사적인 일에 끼어들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녀님이 쉐라그의 현재 상황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가 있으시다면……
공작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보다 좋은 선택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성녀님, 제가 쉐라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게 뭔지 아십니까?
말씀해 보세요.
레온이라는 한 목자에게 진찰하러 간 적이 있는데, 목장에 있는 한 어린 버든비스트가 방목 도중 사라졌죠.
저는 그때 찾는 걸 돕겠다고 했지만, 그 목자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저더러 저녁까지 있다가 식사를 하고 가라고 말을 했죠.
그래서 계속 머물렀습니다.
진찰을 마친 뒤 레온 님과 함께 풀밭에 냄비를 놓고 불을 피웠습니다. 레온 님은 좋은 치즈를 하나 가져왔고, 냄비에 치즈를 넣자 지글지글 소리가 났죠.
낮은 의자에 앉아서 어린 버든비스트에 대한 생각을 하던 중, 멀리서 앳된 울음소리가 들려오더군요.
쉐라그인에게 있어 이런 광경은 익숙한 것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린 짐승이 석양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목장으로 돌아와 어미 곁에서 어미와 몸을 비비는 모습,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버든비스트는 가족의 냄새를 안다고, 특히 어린 버든비스트는 어미의 냄새에 매우 민감하다고 레온 님이 말해줬습니다.
길을 잃어도 냄새로 어미를 찾는다고 하죠.
이런 핏줄 사이의 연결은, 쉐라그인들이 자신의 땅을 바라보는 견해와 비슷합니다.
엔시오데스 님이 빅토리아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결국 쉐라그로 돌아오신 것처럼요.
자작님은 엔시오데스 님을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 것 같네요. 사업으로 꽤 큰 것들을 이룬 건 맞지만……
마치 그때의 어린 버든비스트처럼 '쉐라그'라고 하는 '어머니'에 대한 미련 때문에 쉐라그로 돌아왔다는 거라면, 조금 농담처럼 들리는군요.
하지만 캐스터 가문은 엔시오데스 님이 보여준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감동하여 카란 무역회사에 투자한 겁니다.
게다가, 공작님께서도 믿고 있습니다. 엔시오데스 님이 자신의 몸에 흐르는 쉐라그의 피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마 나머지 절반의 피인…….
캐스터의 피도 분명 중요하게 생각하겠죠.
성녀님,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분쟁을 일으키려고 온 게 아닙니다.
다만, 카란 무역회사가 막 첫발을 내디딘 때, 캐스터가 엔시오데스 님께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죠.
그리고 지금, 엔시오데스 님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이자를 일부 돌려받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이번에는 사탕으로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엔시오데스 님.
……
그렇게까지 복잡하진 않습니다. 공작께서 원하시는 건 성의일 뿐이죠.
공작님은 엔시오데스 님, 카란 무역회사, 심지어 쉐라그의 성의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캐스터 공작에 대한, 빅토리아에 대한 성의 말이지요.
그런 성의만 있다면, 앞으로의 협력은 더 긴밀해질 겁니다.
만약 그런 성의가 없다면요?
……
해럴드는 포크를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눈과 함께 순식간에 방안으로 밀려 들어왔고, 방에는 난로가 타오르고 있었음에도 추위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창문을 바로 닫았다.
하하, 죄송합니다.
성녀님의 날카로운 질문에 왠지 창문을 열고 바람을 좀 쐬고 싶어졌군요.
따뜻한 실내에 오래 있었더니 밖이 얼마나 추운지 깜빡했습니다.
……
그렇다면 자작님이 초대했어야 하는 건 엔시오데스 님 아닌가요? 어째서 저를 초대하셨나요?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여기서 잘 먹고 잘 마셨습니다. 오늘 아침에 검사해 보니 혈당은 좀 높아졌지만, 혈압이 내려가 있었죠.
여기에서 1년 정도 더 있어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다만 공작께서 재촉하셔서 말이지요.
이제 카란 무역회사는 쉐라그의 기둥이 됐습니다. 그리고 성녀님과 엔시오데스 님 사이에는 또 하나의 혈연관계가 있죠.
두 분을 초대해서 툭 터놓고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성녀님, 저를 대신해 엔시오데스 님을 좀 설득해 주십시오.
……자작님,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모든 일의 시작을 얘기하려면, 결과도 봐야 하죠.
지금의 쉐라그는 카란 무역회사의 덕을 본 것이 사실이지만, 성녀로서 이 모든 것에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라면 그건 책임 회피밖에 되지 않겠죠.
제가 이 나라의 지도자라는 걸 인정하신다면, 쉐라그의 현재 상황에 제 책임도 있어요.
그리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죠. 과거의 길은 잘못됐습니다.
엔시오데스 님은 언제나 쉐라그를 위해 지금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계셨죠.
그러나 지금까지 쉐라그의 모든 건 쉐라그인이 함께 내린 결정이에요. 저도 그중 하나일 뿐이고요.
엔시오데스 님 또한 지금의 쉐라그를 부정할 권리는 없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아직 입맛이 있을 때 쉐라그 음식을 많이 먹어야겠군요.
두 분, 따라오시죠.
오늘 자작님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음식이 두 분 입맛에 맞으면 좋겠네요. 제가 특별히 투리엘 님에게 부탁해 만든 쉐라그의 향토 음식입니다……
아, 이 치즈 부리토는 정말 맛있어 보이는군요!
치즈 부리토? ……과일까지 들었네요……
……확실히 현지 가정식이긴 합니다.
마음껏 드세요.
엔시오데스 님, 드시죠.
……그럼 기꺼이.
……그 맛이네요.
엔시오데스 님 기억하세요?
물론입니다.
……노시스가 왔을 텐데. 어디 있지?
회장님, 방금 몇몇 빅토리아 군인들이……
군인?
……알겠다.
성녀님께서 직접 빅토리아의 군인들 앞에 나타나는 건 조금 불편하시려나요?
……저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한 대로 하세요.
그럼 저도 성녀님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
진짜 그 맛이네요.
하아……
적어도 이제 '회색 모자'가 나더러 아무것도 안 했다곤 못하겠지.
해야 할 일도 했고 낙성식도 코앞에 다가왔으니, 돌아갈 일도 생각해야겠어.
아참, 시간 내서 아내와 딸에게 기념품을 사야 해. 절대 잊으면 안 되지.
그리고……
……
음, 역시 쉐라그 여행에 미련을 남길 순 없지.
……
쯧.
여기 계셨군요, 데겐블레허 님!
여긴 정말 위치도 좋고, 깨끗해서……
어, 저기요, 잠깐만요! 어딜 가세요?
중재할 사람을 찾는 거면 엔시오데스한테 가 봐. 노시스에게 가도 괜찮고.
난 너희들 일에는 관심 없어.
아,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이렇게 맛있는 술이 있는데, 다른 얘기를 하면 너무 흥이 깨지잖습니까?
자, 한잔하시겠습니까?
난 됐어.
앗? 설마 술을 못 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술 권하는 사람을 처리하는 게 더 능숙하거든.
보여줄까?
하하하,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 릴리의 상태는 좋습니다. 데겐블레허 님이 제때 잘 처리해 주셨더군요.
추가적인 조치를 취해뒀습니다. 릴리의 아이들도 아주 건강해요.
레온 씨가 데겐블레허 님에게 직접 이름을 지어달라 부탁하려고 한 마리를 남겨둘 거라더군요.
……무사하다니 다행이네.
이름 짓는 건 됐어. 난 그런 거 잘 못하니까.
하하, 그렇다면 제가 대신 해야겠군요!
걱정하지 마시죠. 빅토리아에서는 작명이 하나의 학문인데, 제가 마침 그쪽에 조예가 좀 있거든요!
그 한 마리는 암컷이니까, 올리비아 턴바텀 미셸 크레이개번이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요!
제 성에, 중간에는 제 아내의 성을, 그리고 제 할머니의 이름을 쓰면, 제 딸처럼……
생각이 바뀌었어. 돌러라고 하자.
콜록…… 콜록, 콜록!
데, 데겐블레허 님, 아직 말이 안 끝났는데……
돌러라고 해.
하지만 엘리피아는……
돌러.
……아, 알겠습니다!
돌러, 음. 귀여운 이름이네요. '건강하고 튼튼하다'는 뜻, 맞죠?
전 여전히 올리비아 턴바텀 미셸 크레이개번이 더 좋은 것 같지만……
그래도 쉐라그의 아가씨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니 레온 님이 좋아할 겁니다.
데겐블레허 님, 무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부탁이 또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공무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개인적인 일에서만큼은 추억을 좀 남기고 싶단 말이죠.
기차역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데겐블레허 님의 열렬한 팬이라서요. 혹시 사인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넌 기사 스포츠에 빠질 사람 같진 않은데.
저를 너무 좋게 평가하시는군요. 평범한 사람인 제가 기사 스포츠에 빠지지 않을 순 없죠.
기사 스포츠는 전장과 다르지만, 그 우승자는 항상 저마다의 출중한 면이 있기도 하고요.
확실히 심심풀이로 괜찮은 취미입니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니 마음에 담아두진 마세요.
사실이긴 해.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제가 내민 카드를 받고 이 불쌍한 해럴드를 위한 사인은 해주지 않을 생각인가 보군요.
이건 제가 오랫동안 간직한 스페셜 카드입니다. 데겐블레허 님이 처음 우승하셨을 때 판매한 한정판이죠. 그리고 그 후에는 기사 카드가 한 번도 출시된 적 없었고요……
데겐블레허 님의 호감을 사지 못하다니, 정말 아쉽군요.
그러고 보니 이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랫동안 궁금했던 게 있습니다. 물론 언짢으시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데겐블레허'는 본명인 겁니까?
크레이개번, 대담한 질문이군.
제가 재능은 부족하지만 배짱은 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거지?
팬으로서의 작은 호기심을 채워주는 거죠.
처음 우승하신 후로 데겐블레허 님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고 있으니까요. 어둠의 기사의 출신과 행방…… 모두가 주목하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카란 무역회사와의 계약이 곧 끝나지 않나요?
데겐블레허 님을 빅토리아에 초대해도 될까요? 공작께서도 분명 환영하실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할 수도……
훗,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였나?
듣고 싶은 게 그것뿐이라면, 대답을 듣고 나선 앞으로 귀찮게 하지 마……
나는 쉐라그에서 10년을 보냈어.
난 쉐라그 사람이야.
앞으로도 여기에서 머물 거야.
이제 충분해?
아……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이긴 하네요.
예상한 대답이지만 실제로 직접 들으니 감회가 새롭군요…… 심지어 현지인같이 옷을 입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셨잖습니까!
넌 굉장히 특색 있게 입었네.
그 털은 어디서 난 거야?
아, 제가 좋아하는 기념품 가게에서 산 건데, 꽤 따뜻합니다.
자, 시간도 늦었고 이 파티도 끝날 때가 되었으니 더 귀찮게 굴진 않겠습니다.
사인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엔시오데스 님, 발밑 조심해.
엔시오데스 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고맙군, 아저씨.
저택으로 돌아가실까요?
본부로…… 가지……
엔시오데스 님?
노시스 말대로 해. 나도 마침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체스터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성녀님.
이런 데서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엔야. 잘 지내는 걸 보니 안심이 됩니다.
아저씨야말로 건강하셔서 마음이 놓여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성녀님, 엔시오데스 님.
그래요.
자작님.
말씀하시죠.
이유야 어쨌든, 쉐라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키야르 씨.
응.
가서 시녀들에게 뒷정리를 도우라고 하세요.
아, 그럴 필요 없어.
병사들이 뒷정리도 도와주고, 남은 음식도 다 가져갔어. 파티에 오지 못한 감염자 병사들에게 가져다준다고 하더라고.
……자작님은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네요. 왠지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 드는군요.
엔시오데스 님은 이런 기분이 익숙하시겠죠.
과찬입니다.
날이 곧 어두워지니 조심히 돌아가세요, 엔시오데스 님.
성녀님도 살펴 가시길.
성녀님.
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쉐라간드의 이름으로 저와 성녀님 사이엔 늘 갈등이 있었지만, 쉐라그는 결국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쉐라간드께서 지금의 쉐라그를 보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저희를 탓하실까요?
……
두려우신 건가요?
물론 아닙니다. 3년 전의 그 기적은 쉐라그인 모두의 마음속에 영원히 새겨져 있으니까요.
저도 쉐라간드께서는 이 땅의 뿌리라는 걸 인정해야만 하죠.
우린 그분의 몸 위에서 노는 아이들일 뿐입니다.
글쎄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쩌면 그분도 대답을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고요.
도착했군, 이제 됐다.
혼자 갈 수 있어.
흠, 정말인가?
……
……작은 실수일 뿐이야.
잠깐, 조금 쉬게 해 줘.
문제없다.
아니, 정문 말고, 그 옆에 있는 문으로 가 줘.
뭘 신경 쓰는 거지? 다른 사람이 볼까 봐서 그런가?
야근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누가 이 시간까지 야근을 한다는 거지?
나.
그리고 너도.
애초에 야근비 정산 안 해줬다고 불평하는 건가?
알았다, 노시스. 앉아라. 아무도 술에 취한 수석 기술 집행관의 추태를 보진 못할 테니까.
내 생각엔 자기 이미지에 대한 네 요구 수준이 너무 높은 것 같다만.
넌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지더군, 엔시오데스.
그리고 넌 데겐블레허에게 빚진 야근비가 더 많아.
심지어, 나한테 목숨도 몇 번이나 빚을 졌지.
이젠 일일이 따지기도 귀찮은 정도야.
카란 무역회사의 두 리더가 야밤에 체불 임금을 따지기 위해서 회사 본부 로비에 쪼그리고 있는 건가?
노시스가 너 대신 불평을 토로하던 중이다.
술에 취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너 대신 불평을 토로한 적은 없…… 우웩.
……
데겐블레허가 엔시오데스를 바라보자, 엔시오데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꼴사납네.
데겐블레허는 손에 든 물을 엔시오데스에게 건넸고, 엔시오데스는 자연스레 손을 뻗어 건네받았다.
지난 10년간 비슷한 일이 수없이 일어났다.
……월든, 기억나나?
누군데?
네가 처음으로 나랑 노시스를 업고 돌아갔던 그날.
그 파티 말이다.
아.
노시스는 술에 취해 뻗었는데, 넌 멀쩡해서 더 힘들었던 그날 말이지.
그러고 보니 노시스는 주량이 그때보다 더 늘었네.
적어도 지금은 정신은 있잖아.
정신이 있는 게 확실해?
너희 둘, 코앞에서 남 험담하기 전에, 우웩……
숙취해소제 좀 먼저 주지 않겠나?
계단에 앉아 있는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쁜 친구들을 향해 힘없이 손을 내밀었다.
데겐블레허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노시스의 손에 쥐어줬다.
그리곤 상대가 능숙하게 약을 꺼내 물로 삼키는 걸 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낫군.
그런데 이 약, 왠지 예전에 먹던 거랑은 완전히 다른 거 같군.
그거 숙취해소제 아니야.
내가 만든 독약이지.
엔시오데스가 만들라고 시켰어.
응, 맞아.
그렇군. 아직 안 죽은 걸 보니, 약효가 없나 본데.
시시하군…… 질리지도 않나?
별로.
예전에 진짜 믿어서 토해내려고 했을 때가 재밌었지.
……
몇 년 전 일을 말하는 거냐.
하지만 이번엔 진짜 약을 바꿨나 보군?
예전이랑 달라 보이는데.
라일리가 보낸 거야.
최근에 빅토리아 사람들이랑 술 대결을 자주 했는데 이게 더 효과가 좋았다고 하네.
엔시오데스, 데겐블레허가 우리 셋 중에 쉐라그인들한테 인기가 제일 많은 것 같단 말이지.
역에 있는 그 버든비스트에게 걸린 광고마다 어둠의 기사 홍보 그림 있는 거 봤나?
그것도 다 손으로 그린 것이더군.
불만이라도 있어?
전혀.
지난 몇 년간 바빠지면서 소홀히 한 게 꽤 많다.
일이 좀 안정되면 나랑 노시스도 더 자주 돌아다녀야겠지.
확실히 그렇네.
자주 나타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오히려 네 사생활에 관심을 가질 거야.
최근에는 네가 다른 일로 마음의 상처를 입어서 일에 몰두하는 거란 설이 도는 것 같던데.
여러 버전이 있는데 들어 볼래?
……
하하하하…… 쿨럭, 쿨럭…… 윽……
토하면서 웃다가 사레들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노시스.
평소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다면 회사 사람들도 널 그리 무서워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콜록. 걱정 마라. 사레들리면 네 신발에 토해줄 테니까.
오늘 대화는 어땠지? 잘 합의됐나?
쉐라그의 문제에 관해 나와 성녀 사이에는 원래 큰 이견이 없었다.
그럼 너랑 엔야 사이에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여야 얘기할 가치가 있지.
몇 번을 다시 해도 나는 내 선택을 바꾸지 않을 거다. 그 녀석도 그걸 계속 마음에 두진 않겠지.
속으로는 다 알고 있어.
속으론 다 알아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잖아.
노시스, 너도 비슷해.
너희 둘 다 똑같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해야 할 말을 결코 하는 법이 없지.
……
……
그리고 이럴 땐 죽은 척하고 말이야.
늦은 밤에도 불이 켜져 있는 회사의 로비, 난방이 꺼져 있었기에 찬바람이 침묵과 함께 실내에 마구 휘몰아쳤다.
잠시 후, 노시스가 다시 헛구역질을 했다.
데겐블레허, 약 좀 더 줘.
머리가 아프군.
……나도 두 개만 줘. 나도 좀 취했나 보군.
두 사람이 동시에 데겐블레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당당한 태도에 데겐블레허는 왠지 손이 근질거렸다.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여전히 많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는 감출 필요도, 무리할 필요도 없다.
데겐블레허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그 두 손을 한 대씩 때렸다.
윽……
음?
둘 다 일어나. 취했으면 가서 잠이나 자라고.
여기에 쭈그려서 앉아 있지 말고.
내일 할 일도 많잖아.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