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닝 밸리의 광산
탐사원으로서 레이는 그동안 극도로 억압된 환경에서 일해왔고, 자신의 단짝 샌드비스트가 죽자 자기도 모르게 어느샌가 베헤모스를 찾는 여정을 나서게 된다.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난 그녀는 샌드비스트가 서식하는 생기 가득한 곳을 발견하게 되고, 이후 샌드비스트들에 의해 어느 깊숙한 동굴로 향하게 된다.
판잣집의 커튼은 창문보다 조금 짧다. 용광로에 불이 붙고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하며 도시가 깨어나기 전에, 이른 아침의 첫 햇살은 항상 나를 단잠에서 깨운다.
하지만 나는 커튼을 덧대지 않았다.
아직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에게 그 빛은 짧은 환각을, 큰 그림자를 보여준다.
머리를 흔들어 자신이 누구인지 떠올렸을 때 그 빛은 빨리 준비하고 출발하라고 알려준다.
일용직으로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은 일찍 광산에 도착해야 그나마 괜찮은 일을 구할 수 있다.
가자, 샌드비스트.
아, 그쪽이 아니야. 잊었어? 저 광산은 이미 전문 안전 요원을 고용했어.
……오늘은 서북쪽 광산에 가보자.
(느긋하게 등지느러미를 편다)
오, 제법 큰 녀석이네. 이 정도면 다 큰 거 아니야?
네.
탐사용 샌드비스트가 이렇게까지 크는 건 보기 드문데. 운이 참 좋나 봐.
아마도요.
이런 날에 일을 시작하려면 운이 좀 필요한데. 오늘 갱도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내가 보수를 두 배 쳐주지. 물론, 부수입은 알아서 챙기고.
좋아요. 그럼 안내해 주세요.
야, 잠깐, 정말 아무것도 궁금한 거 없어?
너, 이제 막 시작한 신참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두 배로 준다는 데 왜 아무런 반응도 없지?
얼마 전에 서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재앙과 대지진이 발생했어. 덕분에 우리 쪽 갱도에 오리지늄 결정도 증식하기 시작해서 지하는 아주 난장판이야.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거 맞지?
네, 이제 알았어요.
그 무뚝뚝한 표정을 보니 참 태평한 아이 같네.
아니면, 이런 상황에 익숙한 프로라는 건가?
프로? ……그건 아닐 거예요. 단지 최근 몇 년 동안은 탐사원 일만 했을 뿐이죠.
안전은 주의할게요. 제가 죽으면 샌드비스트를 돌봐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하긴, 전문 안전 요원이 일용직으로 전전할 리가 없지.
뭐,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다 알려줬어.
핑거리스 올리! 그만 마시고 어서 준비나 해. 안전 로프 매어 주고 내려보내.
갱도라고 하면, 과연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바위를 두드리는 소리, 축축한 곰팡내, 덥고 건조한 공기, 땀의 쓴맛…… 아마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탐사원이다. 매일 아침 채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먼저 갱도에 내려가야 한다. 갱도 안은 온통 어둠뿐이다.
승강대가 밑으로 내려갈수록 머리 위에서 울리는 소리는 점점 흐릿해지고 모든 것이 윤곽을 잃어간다. 하지만 내 감각은 오히려 날카로워진다.
나는 어두운 게 싫지만, 어둠의 감촉은 내게 가장 익숙하다.
탐사원, 상황은 어때?
샌드비스트의 등지느러미가 펴졌지만, 혈관 색깔이 변하지 않았어요.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아직은 안전해요.
평면도는 갱신한 적 있나요?
새로 판 갱도는 아직 표기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갱실은 안 변했어.
알았어요.
……
무슨 일이야?
고에너지 원석충이에요. 이미 처리했어요.
하지만,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에요.
원래 우리 광산에는 저렇게 아무 데서나 펑펑 터지는 빌어먹을 것들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밑의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한가 봐.
미리 말해 두는데, 더 밑으로 내려가면 신호가 안 잡힐 거야.
네.
밑에 문제가 있으면 돌아와서 보고할게요.
점점 어두워지네.
방수 셔터의 실링재는 아직 무사하고, 슬래그 수송 파이프도 막히지 않았어. 정상적으로 작동하네.
확인해야 할 건…… 오리지늄 결정의 증식 범위와 활성 상태.
골조의 상태, 붕괴 위험 여부.
배수 시스템 상태, 누수 위험 여부.
그리고 공기 상태, 독가스 누출 위험 여부.
샌드비스트, 조심해.
갱도 조명도 고장 났네.
헤드라이트 불빛만으로는 시야가 너무 제한 돼.
샌드비스트, 가서 확인하고 와.
통풍구가 오리지늄 결정에 관통됐어. 사방은 파편투성이고. 결정 외피가 얇은 걸 보니 방금 돋아난 결정이야.
하지만 그곳에 펼쳐진 건 오직 어둠뿐.
목판 뒤에 큰 구멍이 있는 것 같은데. 불에 타서 생긴 건가…… 아니면 갉아 먹힌 건가? 원석충이 많네.
하지만 그곳에 펼쳐진 건 오직 어둠뿐.
천장에 물이 고여 있어. 누수 흔적은 없지만, 물속에 이상한 기류의 움직임이 있네. 기포가 들끓고 있어.
하지만 그곳에 펼쳐진 건 오직 어둠뿐.
너, 등지느러미에 오리지늄 가루가 잔뜩 묻었어.
혈관 색깔이……
……
가스 누출이야.
도망치자.
갱도 밑바닥에서 지상까지 올라가는 데는 한참 걸린다.
정확히 얼마만큼의 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고개를 들고 위를 보고 있으면 된다.
이럴 때 다른 탐사원들은 품에 안은 광석을 센다. 탐사원이 가져가는 광석이 얼마나 되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다만, 임시 탐사원을 고용하는 소규모 광산은 깊이 채굴할수록 캐낸 오리지늄 광석의 가치가 높고, 대신 내부의 위험도 더 커진다.
샌드비스트, 옆에 있지?
오늘 내 품에는 광석이 없다.
아직 감염 생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무기를 거뒀다. 그렇다 해도 방수 셔터를 한 손으로 조작하는 건 여전히 힘들고 시간이 걸린다.
샌드비스트의 축 늘어진 등지느러미가 계속해서 내 팔을 찔렀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밖을 향해 달렸다.
이 아이는 내가 처음으로 산 샌드비스트였다.
2년 전에 이 샌드비스트를 샀을 때, 점장은 내게 색종이 한 장과 사진 한 뭉치를 줬었다.
샌드비스트 등지느러미의 모세혈관에 불을 비췄을 때 보이는 색깔에 따라 갱도 내 공기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방법은 확실히 도움이 됐다. 이번에 호흡이 힘들다는 걸 느끼기 전에, 나는 샌드비스트를 통해 눈에 거슬리는 보랏빛을 발견했다.
그리고 사장은 이 예민한 샌드비스트가 있으면 내가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팀장, 승강대를 올려 주세요.
샌드비스트, 지금 올라가는 중이야.
이번은 보수를 충분히 받았으니 새로 나온 사료도 살 수 있고…… 의사에게 진료도 받을 수 있어. 너는 금방 나을 거야.
예전엔 채굴장 사람들은 내게 위험을 알리지 않았고, 그저 내려갈지 말지만 물어봤다. 내가 내려갔다 돌아오면 그들은 내 호흡, 내 피만 관찰하면 됐으니까.
승강대가 위로 올라가는 동안, 바람 소리와 기계 소음으로 인해 샌드비스트의 호흡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샌드비스트는 가만히 있었고, 나도 고개를 들고 위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둠의 한가운데 한 줄기의 균열이 생겼다. 그건 오랜 시간 어둠 속에 있어서 생긴 착각도, 환각도 아니었다.
저건 햇빛이다.
넌 분명 나아질 거야.
나는 늘 그 순간만을 기다려 온 것 같았다.
지상에 올라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쬐면 분명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마치 내가 그 환각을 기다리는 것처럼.
봐, 출구야……
나는 뒤늦게 떠올랐다. 지진의 영향은 계속되고 있었고, 모래 먼지는 매우 심했다.
갱도의 출구에 햇빛이 비치지 않았다.
샌드비스트의 건강 상태를 판단하는 방법은 쉬워. 등지느러미의 박막이 충혈돼 있으면 몸 안에 독이 쌓여있다는 얘기야.
샌드비스트가 죽으면 또 새로 사야 해.
집에 사료가 두 포대나 있는데, 사람은 먹을 수 없어.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다른 쪽 광산으로 가보자.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다 좋아질 거야.
네 샌드비스트는? 죽었어?
그럼 안 되지. 샌드비스트도 없는 탐사원은 필요 없어.
샌드비스트는 어차피 죽기 마련이야. 네가 그 정도 돈에도 인색하면, 언젠가는 갱도 안에서 죽게 될 거라고.
게다가 너는 감염자잖아. 쳇, 우리도 귀찮은 일에 휘말리긴 싫다고.
왜 대답이 없어? 못 들었어? 너 설마 바보짓을 해서 샌드비스트를 죽인 건 아니겠지?
됐어, 비켜. 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샌드비스트 약? 그런 건 없어. 들어 본 적도 없고.
너도 평소에 아파도 약은 잘 안 먹잖아? 샌드비스트에게 약을 먹이는 사람은 더욱 없지.
그냥 한 마리 사. 어차피 오래 못 사는데. 건강한 놈으로 골라줄게. 적어도 갱도에 들어가기 전에 죽을 일은 없을 거야.
안 살 거면 장사 방해하지 마. 다시 말하는데, 샌드비스트 약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
그런 기본 상식도 없으면서 무슨 샌드비스트를 사서 탐사원을 한다는 거야? 죽은 게 네가 아니라 샌드비스트여서 다행인 줄 알아.
샌드비스트, 난……
……
날이 밝았다.
아침 햇살이 텅 빈 케이지의 창살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나를 기나긴 악몽에서 깨웠다.
하지만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별거 아니야.
빈 케이지야…… 내 말 들어 봐.
내가 걔를 죽인 게 아니야.
나는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갱도 탐사를 하다 보면, 가스 누출은 피할 수 없어. 샌드비스트는 애초에 공기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데리고 가는 거잖아.
갱도 안은 늘 캄캄했어……
……그런데 난, 왜 떨고 있을까?
저기, 가장 일찍 출발하는 수송차가 어느 편인지 알아?
그걸 만나러 가려고?
응. 어디서 봤는지도 아직 기억나. 그 일대에 가서 찾으면 돼.
그게 내뿜었던 빛을…… 아직도 난 기억해.
어둠 이외의 것은 어떤 감촉일까?
분명 기억날 거야.
그건…… 확실히 나를 구해줬어. 덕분에 나는 살아남았고.
그건, 진짜 존재하는 거지?
응, 존재해.
……
……샌드비스트가 눈을 떴다.
잠깐, 샌드비스트, 어디 가?
네가 찾으려던 걸 찾으러.
나도 데려가 줄래?
나 혼자서는 안 돼.
하지만, 내겐 오직 너밖에……
으악, 이거 놔!
후드, 후드가……
……후드?
이 아이, 왜 박사님의 후드를 잡고 있는 건가요!
암벽과 모래밭의 숭숭 뚫린 구멍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중앙에 고여 늪이 되었다.
착한 아이니까 놔주세요. 그러다가 후드가 찢어지겠어요……
암벽과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바위 요새가 휘몰아치는 모래폭풍을 막아주며 바람이 닿지 않는 이곳을 지켜주고 있었다.
샌드비스트는 이거 못 먹어 봤죠? 이건 당근 쿠키라는 거예요!
잡화점 주인도 말했고, 동물도감에도 쓰여 있었다. 바로 이런 곳…….
샌드비스트 한 마리가 동굴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나뭇가지 위에 샌드비스트 두 마리가 올라가 있었고, 늪에는 세 마리의 샌드비스트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네 마리, 다섯 마리, 더 많은 샌드비스트가.
등지느러미는 모두 가지런했고, 혈관 색깔도 건강했다.
이건 사워베리 파이! 그리고 이건 허브 누룽지예요!
음음…… 아무래도 박사님보다는 제가 샌드비스트랑 더 친한 것 같네요!
- 아미야, 어떻게 좀 해봐……
- ……
- 냄비 뚜껑, 정말 즐거워 보이는데……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쓰다듬어도 후드를 놓질 않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박사님. 후드는 반드시 지켜드릴게요!
앗, 그렇게 티가 났나요…… 아니 잠깐, 설마 복수하려고 냄비 뚜껑이라고 부르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
……어째서?
왜 여기에 샌드비스트가 이렇게 많이 있지?
와, 또 샌드비스트가 튀어나왔어요!
박사님, 깔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내가 해 볼게.
앗, 역시 레이 언니에게 방법이 있나 봐요!
아까 계속 샌드비스트를 쫓아다녔던 걸 보니, 레이 언니는 분명 동물을 좋아할 거라고 했거든요!
아까……?
저희가 계속 레이 씨 뒤에 있었던 걸 정말 눈치채지 못한 것 같네요……
아까 브레이크가 식을 때까지 멈춰서 휴식 중이었는데, 레이 씨가 갑자기 넋이 나간 모습으로 떠나길래 너무 걱정돼서……
……미안.
박사, 진정해. 움직이지 말고……
와……
엄청 큰 재채기! ……드디어 놨네요!
방금 그건…… 이파리를 샌드비스트의 등에 난 구멍에 넣고…… 간지럽힌 건가요?
- 고마워, 이제 머리가 다시 돌아가는 것 같네.
- 그게 샌드비스트의 숨구멍이었구나.
얘들아, 이제 괜찮아. 얼른 가.
샌드비스트들의 반응은 알기 쉬워. 등지느러미로 호흡을 보조하고, 기류와 온도에 예민하지.
……이 아이들은 인공 번식된 아이들 정도의 크기인 걸 보니, 아마 3, 4개 월정도 된 새끼 같아.
앞으로 더 클 거고, 몇 년은 살 수 있겠지.
그럼 레이 언니를 따라다니는 얘는요?
……
밝은 곳에 있으니까 잘 보이네. 털 색깔이 조금 옅어. 내가 착각했구나.
그런데, 왜 날 따라오는 거야?
야!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뭐가 이렇게 많아? 이게 다 뭐야?
샌드비스트야.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이 녀석들이……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박사, 넌 이 장치들이 측정한 데이터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지?
수치 변동이 너무 심해. 열에 아홉은 아무 일도 없는데, 이게 무슨 패턴인지 모르겠어……
- ……다들 차로 돌아가!
- 당장 여길 떠나야 해.
……응?
설마, 정말로…… 재앙이야?
전에 박사님께서 확인하셨어요. 임시로 탄 재앙정보전달자들이 쓰는 예비용 장치는 탐지 범위가 한정되어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하지만, 박사님의 판단이 어딘가에 숨는 게 아니라, 당장 떠나야 한다는 거라면……
아직 시간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렇구나, 알았어.
도망가자. 재앙이 이곳의 모든 걸 파괴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
이곳의 모든 걸……
후우, 후우…… 아까 거기까지 달려가서 상황을 알려주고, 다시 달려오기까지…… 솔직히, 후우…… 이 정도면 아마 우리 공장의 달리기 기록을 경신했을걸!
냄비 뚜껑? 혹시 시간 쟀어?
라나 언니, 혼자 달리지 말고…… 뒷사람들도 좀 기다리세요!
너희들이 샌드비스트랑 너무 오래 있어서 느림보가 된 거잖아!
나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만, 재앙은 기다려 주지 않아!
시동아, 제발 좀 걸려라……
박사, 아미야. 준비됐어?
준비됐어요! ……네?
박사님은 숨이 차서 말이 안 나오시나 봐요…… 네, 네…… 알겠어요. 박사님도 문제없대요!
좋아, 다 준비됐으면 출발한다! 잘 있어, 재앙 구름!
지금 이 속도면 문제없겠지?
당연히 문제없지. 날 따라잡을 수 있는 건 전속력으로 달리는 나뿐이야. 재앙 구름 쯤이야, 훗.
그럼 다행이긴 한데……
네?
박사님……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래……? 래에…… 래이…… 레이?
맞다, 레이 씨는요?!
레이 씨가 안 보여요!
……
뭐?!
스으……
괜찮아, 샌드비스트. 우린…… 아직 늦지 않았을 거야.
아직 재앙이 온 건 아니야. 그저 강한 모래바람 정도니까 아직 나아갈 수 있어.
내가 피난처를 찾아 줄게……
(경계하며 모래를 파낸다)
……응, 샌드비스트는 말하지 못하는 거 알아. 방금은, 그냥 환각이었겠지.
(조련용 호루라기를 불며) 이쪽이야.
시커먼 구름이 쫓아오고 있어……
이젠 앞이 거의 안 보이네.
……아니면, 내가 너희들의 피난처가 되어 줄게.
어쩔 수 없지, 모래바람이 심하긴 해도 가 보는 수밖에.
레이엘라한테 미안할 뿐이군. 처음 따라 나왔는데 이런 악천후라니.
너희들, 얘 다리 드는 것 좀 도와줘.
온몸이 뜨겁고 발바닥은 온통 물집이야. 아직은 어려서 더 이상은 걷지 못해.
……가자. 어디로 가야 살 수 있을지 결단을 내리자.
이런 피로와 절망은 내게 익숙하다. 바람과 모래에 짓눌려 시야는 어둡고 발걸음도 무겁다.
어른들에게 업힌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그들의 발걸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이건 재앙이다.
분명 알라나가 재앙이 온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이건 오리지늄 분진일까, 아니면 모래 먼지일까? 갱도의 냄새가 난다.
재앙은 암벽을 부수고 늪을 오염시킨다. 그러면 샌드비스트들은 갈 곳을 잃어버린다. 저 아이들이 재앙의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
잡아끌고, 등에 업고, 머리에 이고 호루라기를 불며 남은 샌드비스트들을 이끌어 모두의 뒤를 쫓아간다.
……그 뒤로는 격한 흔들림이 있었던 것만 기억난다.
내 몸으로 샌드비스트를 몇 마리나 지켰을까?
기묘한 뼈피리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마치 누군가가 나 대신 호루라기를 불어 이 생명들을 이끄는 것처럼.
크오오?
……응?
……크오오!
크오오!
크오오……
너희들……
잠깐,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들려 있는 거야?
날 어디로 데려갈 셈이야?
이런 피로와 절망은 내게 익숙하다.
'베헤모스'의 그림자가 내 기억 속에 떠오를 때, 그곳엔 항상 끝없는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부대를 따라 모래폭풍을 뚫고 해가 뜨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황사가 하늘을 뒤덮었고, 아침 해는 색을 잃었다…… 밝은 노란색에서 어둡고 칙칙한 노란색으로 바뀌며, 마지막엔 새까맣게 물들어 갔다.
우리는 결국 어두운 밤을 견뎌 냈지만, 또다시 어둠에 눈이 가려졌다. 짙은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다친 사람들은 신음하고 있었고, 우리는 길을 잃었다.
피와 땀이 신발을 적셨고, 물집이 튼 발바닥은 서서히 감각이 사라져갔다. 어른들은 나를 업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모래 먼지로 범벅된 냄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어렴풋이 보이는 그림자, 그리고 어둠 속의…… 빛.
……여긴 어디지?
거대하고 텅 빈 지하 동굴에서는 발광 생물이 오래된 랜턴처럼 옅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생물들이 슬금슬금 레이의 뒤를 기어다니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석궁을 집어 들었다.
작은 흙더미 몇 개가 바닥에서 돌아다니다가 서로 부딪히고, 그 속에서 샌드비스트 몇 마리가 튀어나왔다.
샌드비스트?
너희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여기는 너희들의 동굴만은 아닌 것 같은데?
샌드비스트 무리가 땅과 벽을 뛰어다니며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리켰다.
동굴 안에서는 기울어진 바위기둥이 서로 교차하여 중앙의 빛나는 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파울비스트가 쌓아 올린 둥지였다.
그리고 바닥에는 뭔지 모를 생명체가 지나간 흔적이 아래 입구까지 쭉 이어졌다.
마치 버려진 것처럼 쌓인 돌덩이는 녀석의 비늘이었으며, 높게 쌓인 진흙더미는 녀석의 썩어빠진 각질이었다.
광풍이 휘몰아치는 소리는 이미 차단되었고, 자연의 피난처에서는 기나긴 뼈피리 소리만이 메아리치며 어둠 속에 사는 수많은 생명들의 질서를 정하고 있었다.
……기억나.
그때…… 안개 속에서 그 그림자를 만났을 때, 바람이 작은 속삭임을 전해왔어. 그 속삭임이 나를 보듬었고 잠깐이나마 아픔을 잊을 수 있었어.
앞으로 나아가, 레이엘라. 이 어둠을 빠져나가.
너라면 분명……
……음?
샌드비스트…… 왜 멈춘 거야?
앞에 뭐가 있지?
더 이상 어둠에 적응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랜턴을 켰다.
……막힌 암벽이네.
여긴 길이 없어.
……내가 뚫을 수 있어. 아니, 뚫어야만 해.
아얏……!
헉……!
뼈피리 소리가 멈췄다. 대신 높이가 다른 무수한 소리와,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음절이 교차하며 울부짖었다.
레이는 재빨리 귀를 막았지만, 메아리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뭔가가 내 눈알을 파는 꿈을 꾼 거 같은데! 어처구니가 없군. 이 망할 곳에 생물은 아무것도 없는데…… 없는데…… 는데!
……이상하네.
샌드비스트가…… 또 말을 했어. 수백, 수천 마리가 동시에 말하기 시작한 것 같아.
샌드…… 비스트…… 스트?
내가 어딜 봐서 샌드비스트야…… 비스트야…… 트야?!
거참, 처음엔 긴 귀의 난쟁이들이 막대기로 내 머리를 두드리더니, 이제는 쇳덩이가 쿵쿵거리며 내 귓구멍을 쑤셔대고 있네…… 있네…… 네.
그 녀석들이 다 가고 드디어 푹 잘 수 있나 싶었는데…… 결국 얼마 못 자고 네가 또다시 나를 깨웠구나…… 구나…… 나!!
윽……
미안하군, 꼬마야. 내가 너무 흥분해서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었구나.
하지만 네가 먼저 나를 깨웠고, 내 혀를 밟은 데다 나한테 이상한 소리까지 내게 했으니…… 비긴 걸로 치자!
음……
무슨 냄새야, 이 고약한 건? ……뭐야, 이게! 어서 내 코 옆에서 썩 꺼져!
……환각인가?
환각? 이게 절대 환각이 아니라는 건 내가 장담하지. 왜냐하면 실제로 이렇게 간지러우니까……
샌드비스트…… 왜 그 식물을 뽑는 거야?
야! 그건 내 코털이란 말이다! 망할 놈들! 잡아당기지…… 에, 에취!
암벽이 갈라졌다. 어둠의 한가운데 다시 한 줄기의 균열이 생겼다.
……
……
……'베헤모스'?
내가 찾던 게, 너였어?
커다란 눈동자가 보석 같은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레이는 자신의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게, 그리고 더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사냥꾼의 딸, 어둠에서 벗어난 탐사원, 그리고 빛을 쫓아다니던 여행자……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그녀가 동시에 그 커다란 눈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
뭐?
'베헤모스'? 내가?
그것참 듣기 좋은 이름이군! 샌드비스트인지 뭔지 하는 것보다 훨씬 위엄이 있어 보여!
이번엔 잘 기억해 둬야겠군…… 저번에도 누가 내게 이름을 지어줬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그새 잊어버렸거든! 분명 눈 깜짝할 사이였는데……
뭐, 그래도 잠이 더 중요하니…… 그래, 꼬마야.
왜 나를 찾아왔지?
네가…… 날 구해 줬어.
구했다고?
내 머릿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빛줄기.
……기적. 너는 나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어.
……
……네 빛을 아직도 기억해.
옛날에는 동화 속 이야기처럼, 우리를 구한 게 황야에 사는 거대하고 착한 들짐승인 줄 알았어.
하지만, 동물도감을 아무리 찾아봐도 기억 속의 그림자처럼 거대한 생물은 없었어.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생물은 더더욱 없었고.
하지만 나는 그게 환각이 아니라는 걸 알아.
……그래서, 너를 꼭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
……미안하지만 꼬마야. 그만 해라.
보다시피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이 샌드비스트들이 내 콧구멍에서 마구 뛰어다니고, 기절할 정도로 고약한 냄새를 풍겨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이다.
나는 이렇게 계속 이 어둠 속에 갇혀 있었어.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구하고, 다른 녀석들을 구했단 말이냐?
……
하지만, 네가 아니면 또 누구겠어?
이 황야에 너 말고 또 다른 '베헤모스'가 있어?
유감스럽지만, 이곳에 내 동족은 없어. 적어도 내가 아는 이 황야에는 없지.
……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마. 고민이 있다면 눈을 감고 한숨 자 보는 건 어때?
오, 아냐. 눈을 감으면 더 어두워지고, 넌 어둠을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그래, 맞아. 나는 위로 같은 건 할 줄 몰라.
뭐 됐어. 또 졸려오기 시작했어! 얼른 여기서 나가. 이 냄새 나는 녀석들도 데려가고!
다음 순간, 곁에 있던 샌드비스트들이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하자 기묘한 뼈피리 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졌다.
레이의 눈앞은 깜깜해졌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샌드비스트들이 또 자신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알고 있는 건 그 빛에서 점점 멀어져간다는 것뿐이었다.
갑자기 '베헤모스'의 목소리가 멀어져가는 동굴에서 또다시 울려 퍼졌다……
꼬마야, 비록 내가 몸을 움직일 순 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꼼짝 못 할 정도는 아니야.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그 '베헤모스'고, 네가 찾던 그 빛이라 치자……
굉음과 함께 바위가 무너져 내렸고 대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탐사원의 석궁에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넌 무엇 때문에,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