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혀버린 그림자
그리닝 밸리로 향하는 길이 오리지늄 결정 더미에 막혀버려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돌아오게 된다. 스스로 로도스 아일랜드에 지원한 레이는 어린 시절 '베헤모스'와 마주쳤던 추억을 털어놓았고, 아미야는 그 이야기에서 누군가의 기억을 보게 된다.
박사님, 저는 이제 무섭지 않아요.
사람들로부터 많은 질문들을 받았어요. 이렇게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어딜 다녀왔는지, 즐거웠는지…… 저는 전부 대답해 줬어요.
하지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도 있었어요.
박사님은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요? 왜 다들 박사님께서 보고 싶어 하는 건 전부, 다시는 볼 수 없는 거라고 몰래 얘기하는 걸까요?
……왜 박사님은 저를 구해주시고, 함께 여행까지 해주시는 걸까요?
……긴 귀와 짧은 귀를 쫑긋 세운 운전기사 여러분, 이상, 6시간 이내의 배차 안내였습니다.
재앙 예보에 유의하고 안전 운행을 하며, 야생 동물에 한눈파는 일이 없도록 일찍 일을 마치고 귀가하시길 바랍니다……
자식, 나쁘지 않네.
네 마지막 운행에 내가 함께했다는 걸 다행이라 생각해. 다른 사람이었으면 너를 고칠 수도 없었을걸.
아마 대장갑포에 뚫린 구멍투성이 몸으로 황야에 버려진 채, 엔지니어링팀이 와서 쓸만한 부품을 회수할 때까지 쓸쓸하게 기다려야 했을 거야.
그리고 나는 차를 반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생 놀림을 받았을 테고.
……뭐, 원래대로라면 웃음거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 아이가 살해당할 때, 내가 이 차 밑에 숨어 있었단 걸 누군가에게 들켰다면……
뭐, 그런 일은 더 이상 없을 거야.
자,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뿐인데…… 아이언 캐럿 시티에 아는 사람이 적어서 내 사건 보고서 작성을 도와 줄 사람이 없어……
하아, 벨 좀 그만 눌러! 이 차는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다고. 잘못 찾았……
……어라, 겁쟁이?
네…… 헤헤. 아무래도 제대로 찾은 것 같네요.
그 요란한 장식들도 사라졌고, 차 안은 한바탕 싸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어쨌든, 차는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그렇다는 건, 아마 레이 씨랑 워미도 무사하다는 거겠죠……
하, 뭐 그렇지.
그, 그럼,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요……
레이 씨는 결국 레이 씨가 말하던 그걸 찾았나요?
당연히 못 찾았지!
죄송합니다! 일부러 우울한 이야기를 꺼내려던 건 아니었어요!
괜찮아, 내가 우울한 것도 아닌데.
그래도, 그 차량 강탈범은 별로 우울해 보이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네…… 그 녀석, 도중에 사라졌다 싶더니, 또 우리가 재앙을 대피하던 곳에 갑자기 나타났어.
마치 재앙의 강풍에 수천 킬로미터는 날아가 버려서, 방향도 못 찾는 얼빠진 파울비스트처럼 말이야.
어, 그럼…… 설마 찾으려던 걸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 제자리에서 돌기 시합을 하다가 쓰러져서 머리를 다친 사람도 있다고 듣긴 했는데……
머리를 다친 것보다 더 심하지. 자기는 베헤모스를 만났다고 말했으니까.
엥……
게다가 자기가 찾던 게 아니었대.
네?
마지막에 그 베헤모스는, 그 녀석이 찾던 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쐐기까지 박았다던데.
그…… 그럼 제가 괜히 더 미안해지네요.
그래? 나는 이런 걸 '납득'이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우린 계속 그리닝 밸리로 이동하긴 했어. 거기까지 어떻게 갔는데, 겨우 차량 강탈범 말 한마디에 차를 돌릴 수는 없잖아?
……
……그다음은요? 뭘 봤나요?
……대단한 걸 봤지! 안타깝지만 거긴 너무 위험한 곳이라서, 너 같은 겁쟁이는 평생 못 볼걸, 하하하!
진짜로, 절대 안 가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실력도 좋고 임기응변도 좋았기에 망정이지, 이 차로는 애초에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었어.
돌아오는 길에는 한두 시간마다 멈춰서 이놈의 열이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 조합에선 슬슬 '규범화'를 받을 때라고 하던데, 맞는 말이야.
하아, 벌써 20년이구나.
그…… 운전을 20년이나 하셨다고요?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내 실력을 '인정'해 줘서 고맙네.
하지만 내 말은…… 이 차를 만난 지 20년이란 얘기야.
아 맞아, 겁쟁이…… 내 청첩장은?
네? 어, 그게……
그, 결혼식은 이미 늦었다고나 할까요……
……크흠, 사실 지금은 신혼여행 중이에요.
……사실 신혼여행도 이미 끝났어요. 바로 10분 전에요.
원래 아이언 캐럿 시티가 종착지였는데, 관문에 들어오고 나서 알라나 씨의 차를 발견하니까 갑자기…… 또 여행하고 싶어져서요.
어…… 설마 방금 저 근처에 세운 트럭이야? 난 또 무슨 얼빵한 화물차 기사가 층수를 착각해서 물류 통로로 안 들어가고 여기 온 줄 알았지.
그런데, 이상하네……
하하, 화물차를 운전해서 온 건 맞긴 해요……
사실 그날 관문에서 나오다가 아내의 트럭을 찾아서요. 원래는 돌아가서 약혼식을 계속할까 했는데…… 어쩌다 보니 차를 몰고 등기소까지 가 버렸네요……
그리고 그대로 광장에 가서 간단한 식을 올리고, 바로 신혼여행을 떠나게 된 거예요……
*림 빌리턴 욕설*, 드디어 생각났네!
무무무뭐뭐가요……?!
그날 너랑 같이 뛰던 그 여자,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라 했는데! 역시, 이 화물차의 로고! 바로 이 얼굴이었어!
분명 구형 안전밸브를 파는 철물점이 있었던 걸로 기억했는데!
아, 그게, 아내는 자기가 가출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해서……
우리가 왜 차를 몰다가 멈췄다 해야만 했는지 알아?
죄죄죄죄송합니다! 제, 제가 아내 대신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야, 농담이야. 너희 탓이 아니야. 애초에 개조와 보수가 필요했어.
뭐, 그래도 마지막 부품을 채웠으니까 사건 보고서에 거짓말을 십여 줄은 줄일 수 있겠네.
잠깐, 저 화물차에 물건은 있어?
워미, 아직이야?
아직도…… 불꽃만 나와요……
……사용법은 금방 터득할 수 있으니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아츠 스태프를 쓰는 방법에 익숙해지면 방에서 나올게요!
잘 안되면, 저쪽에 있는 캐스터 아저씨한테 다시 가르쳐 달라고 하면 돼.
하지만, 라나 언니가 차 수리하는 법을 가르쳐 줄 때나, 아빠가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 줄 때엔 금방 배웠단 말이에요……!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고.
……알라나가 차를 반납하러 갈 때, 너도 따라가는 줄 알았는데.
안 돼요 새비지 언니. 오늘 점심 12시 전에 볼일을 다 마쳐야 언니들의 커다란 채굴선에 탈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괜찮아. 정 안되면 내 오토바이를 타고 너희를 다음 정박 지점까지 데려가도 돼.
고마워요 새비지 언니.
하지만, 저도 언젠가는 내려야 하니까요.
……
우와……
꺄악, 새비지 언니, 왜 문 앞에서 사람을 놀라게 하시는 건가요?
그건 말이지, 보안 요원으로써 어떨 땐 문을 방패 삼아 누군가를 위협해야 할 때가 있어서 그래. 습관이야……
……그런데 바람이 왜 이렇게 뜨겁지?
헤헤, 아츠 스태프 사용법을 조금 알았어요!
진짜? 대단한데!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더 가열하면 나한테 불이 붙을지도 몰라.
우린 여기 앉아서 알라나를 기다리자. 알라나가 오면 함께 본함에 가서 광석병 치료법을 찾아봐야지.
네.
의자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거, 왠지 그립네요.
정류장에도 이런 철제 의자가 있었는데, 너무 차가워서 아무리 앉아 있어도 따뜻해지지 않았어요.
만약 예전에도 오리지늄 아츠를 다룰 수 있었다면, 몰래 의자를 따뜻하게 데워서 아빠의 뼈가 덜 아프게 해 드릴 수 있었는데.
……나중에도 기회가 있을 거야. 아빠를 찾기 전에 아츠 스태프의 사용법을 연습할 시간은 있으니까.
그때가 되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런가요……
하지만 레이 언니도 결국엔 베헤모스를 못 찾았고, 저희도 결국엔 그리닝 밸리에 못 갔잖아요.
저도 아빠를 오래 기다렸지만, 결국엔……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정말 긴 여행이었어요.
후우, 어떻게든 시간에 맞췄네. 그 겁쟁이가 보고서를 그렇게 잘 쓸 줄이야.
……어머, 스태프가 너무 예쁘다. 역시 내 안목은 남달라!
어때, 냄비 뚜껑, 연습은 잘했어?
보여 드릴게요, 라나 언니!
좋아……
갑자기 너무 뜨거워진 거 아니야?!
새비지, 얘 이렇게 아츠를 써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응, 괜찮아.
그럼 됐어. 이 림 빌리턴의 공업 미학이 담긴 아츠 스태프라면 우리 냄비 뚜껑에 딱 어울릴 줄 알았어, 후훗!
어때, 이 언니 대단하지?
라나 언니 최고예요!
라나 언니…… 대단해요.
뭐, 일찍 사 왔더라도 너한테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겠지. 그리고 배송지에 '수송차'라고 적을 순 없잖아?
가자, 이제 병 치료하러 가야지.
아빠에게 튼튼하고 건강해진, 거기다 오리지늄 아츠까지 다를 줄 아는 완벽한 냄비 뚜껑을 보여 주자!
……
라나 언니, 저……
저는……
앗, 갑자기……
……아니다, 마음껏 울어.
내 옷자락 붙잡고 울어도 뭐라고 안 할게.
적어도 이번 여행의 끝에서, 너는 빈손이 아니었으니까.
출발 전에 물품 목록이나 확인해 볼까, 오리지늄 연료는 지우고, 연료는 충분하니까. 아니, 넘쳐날 지경이야.
오퍼레이터의 개인 주문은 이쪽인가…… 누가 또 전달자를 통해 이렇게 많은 당근을 주문한 거야? 요즘 주방에서 당근 냄새만 진동하는 바람에 이제는 당근의 당자만 봐도 지겨워 죽겠어, 그냥!
이건 엔지니어링부에서 주문한 정제된 용제고, 이건 클로저 씨가 새 업무에 필요한 실험 재료고. 아, 안녕하세요 아미야 씨, 박사님. 그리고 이건……
잠깐, 아미야 씨? 박사님? 왜 여기 계시는 거죠?
앗, 미안해요. 혹시 저희가 방해했나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냥…… 경치 구경이라면 갑판 쪽이 전망이 더 좋아요. 물류 통로 근처는 아무래도 좀 시끄러우니까.
아, 사실 요즘 소음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오히려 이런 시끌시끌한 곳이 더 정겹다고나 할까요……
박사님, 저희는 조금 더 구석으로 가죠.
- 검사 결과는 어때?
걱정 마세요 박사님, 각 지표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어요.
그래도 활성 오리지늄 결정 더미와 안전거리를 유지했고, 방호 조치도 충분했잖아요.
그래도, 활성 오리지늄이 바로 눈앞에서 골짜기를 더 갈라내는 걸 보니까…… 확실히 무섭긴 해요.
- '그리닝 밸리'라, 참 림 빌리턴다운 이름이야.
지금 그 이름을 들으니, 도저히 웃을 수가 없네요……
하지만 어쩌면 사람들이 그곳에 '그리닝 밸리'라는 이름을 지었을 땐, 아직 활성 오리지늄에 뒤덮이지 않은 평범한 협곡이었을 수도 있어요.
게다가 레이 씨도 어렸을 때 그곳에 간 적이 있다고 했잖아요.
다만, 최근 십여 년 동안 급속도로 증식한 오리지늄 때문에 그 일대가 레이 씨도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해버린 것 같아요.
- 그게 아쉬워?
- 그게 무서워?
네, 결국 그리닝 밸리에 도착하지 못하고 멀리서 한 번 보고 돌아와야 했던 게, 왠지……
……소풍 가는 날에 폭우가 내린 기분이랄까요……
……박사님, 웃지 마세요!
네. 만약 그날 저희가 우연히 고지에서 시야가 탁 트인 상태로 그리닝 밸리에 접근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정말로 오리지늄 결정 더미에 따라잡히거나, 그 안에서 헤매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오리지늄 결정이 감염자 몸 안에서도 이렇게 증식하는 게 아닐까, 이 땅의 수많은 감염자들이 진작에 오리지늄에 따라잡힌 게 아닐까…… 하고요.
맞다, 박사님.
레이 씨가 말했던 '베헤모스'…… 박사님은 정말 있다고 믿으세요?
- 내가 알기론, 베헤모스는 실존해.
- 그 소형 재앙을 피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비록 목적지까지 가진 못했지만, 레이 씨는 단순히 꿈을 꾼 게 아니었네요.
박사님, 박사님 앞으로 온 소포입니다.
- 나한테?
- 최근에 주문한 기억은 없는데.
아, 이건 제가 박사님 몰래 준비한 거예요.
- 무겁네……
어, 소형 비바리움인데……
그날 시장을 지나다가 문득 생각났어요. 예전에 박사님은 림 빌리턴의 여러 생명체에 굉장한 관심을 보이셨거든요.
박사님이 저를 데리고 이 함선에 돌아왔을 때, 고개를 돌려 황야를 바라보는 모습이…… 굉장히 쓸쓸해 보였어요. 비록 그때는 제가 어렸지만, 그래도 그게 고독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죠.
그래서 림 빌리턴의 모든 것을 축소하고 저장해서 박사님께 선물해 드리고 싶었어요.
적어도 당시의 저는 박사님이 고독한 이유가 이 함선이 조금 적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러니까 어쩌면 작은 동물들과 함께한다면 박사님의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죠.
……물론, 지금의 로도스 아일랜드엔 식물원도 있고, 데이터베이스에 생물 도감도 충분히 갖춰졌으니, 지금의 박사님께 아마 이런 작은 비바리움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제 어릴 적 소원을 이루고 싶었어요.
- 고마워, 아미야.
- 그때의 내 모습, 지금의 너와 비슷하지 않아?
네?
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하나도 외롭지 않아요, 박사님.
그냥 여기 돌아오니까 갑자기 기분이 무거워지는 거 있죠.
계속 빅토리아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전투, 치유, 재앙 저지, 생명 구조.
많은 정예 오퍼레이터들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추억. 그리고…… 켈시 선생님이 제게 부르지 말라고 한 그 칭호.
……예전에 누군가 제게 말했어요.
이 길은 홀로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고, 결과나 답을 위해서 걷는 것도 아니라고요.
- 내가 있잖아.
- ……
- 비관적인 모습은 너답지 않은데.
아니요. 걱정하지 마세요 박사님, 저는 괜찮아요. 감정적으로 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 길에 끝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끔 누군가의 손을 잡으려 하거나,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려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기에 생명에 한계가 있다 해도, 계속 이어지는 거죠.
가시죠, 박사님. 제가 사무실로 비바리움을 옮겨 드릴게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이 정도면 충분해요. 제가 이해하고 배워야 할 건 아직 많이 남았는걸요.
그리고, 방금 테스트를 통과한 새 오퍼레이터에게 축하해주고 싶어요.
비록 그분이 제게 물었던 질문에 대답하자면…… 로도스 아일랜드에는 탐사원이 딱히 필요 없지만.
(킁킁)
- 비바리움을 보고 있는 건…… 레이의 샌드비스트야?
네, 재앙을 겪은 뒤에 계속 품에 안고 있었던 그 샌드비스트 같네요.
……잠깐, 설마 비바리움 안에 있는 무스비스트가 샌드비스트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아니겠죠?
이리 와, 샌드비스트. 박사 걸 먹으면 안 돼……
……안녕, 아미야, 그리고 박사.
안녕하세요 레이 씨. 입사 테스트를 잘 통과했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고마워.
로도스 아일랜드 ID 태그도 받았어.
번호도 적혀 있던데.
맞아요. 그런데 레이 씨,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광부들이 갱도에 들어갈 땐 자신의 번호표를 들고 가. 그러면 누가 못 돌아왔는지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탐사원들은 임시직이라 번호표가 없었어.
이 ID 태그, 마음에 들어. 고마워.
아, 별말씀요……
기업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게다가……
……레이 씨만 원한다면, 앞으로 로도스 아일랜드를 자기 집이라 생각해도 돼요.
당신은 레이가 고개를 번쩍 들고 아미야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마치 며칠 전 거리에서 그녀와 스쳐 지나갔을 때, 아미야가 느꼈던 그 시선처럼.
맞다, 레이 씨. 그런데 왜 갑자기 로도스 아일랜드에 와서…… 탐사원을 하고 싶다고 하는 건가요?
너희들이 냄비 뚜껑을 도와줬으니까.
그래서 나도 걔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날 일은 잊을 수가 없어.
그리고……
나는 답을 찾고 있어.
어둠 속에 수백 년간 갇혀 있던 베헤모스가 일어나서, 내게 뭘 원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냥 나랑 샌드비스트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 달라고만 했어.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어. 마치 베헤모스를 본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처럼.
그래도 역시 궁금하긴 해. 그때, 내가 어째서 그 빛을 동경하게 됐을까? 내게 있어 그 빛은 도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그때요? 레이 씨, 그게……
……레이 씨, 제게 질문하고 있는 건가요? 어째서죠?
당신은 금방 눈치챘다. 레이는 아미야만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베헤모스'. 내 환각이야. 십여 년 전, 그리닝 밸리에서 만났었어.
그때 나는 사냥꾼 무리를 따라가고 있었어. 모래바람이 강하고 날도 어두워서, 오랫동안 길을 헤맸지.
그때는 키가 작아서 주변 사람들이랑 수렵용 석궁만 눈에 들어왔어. 나중엔 걸을 수 없었고. 그 뒤로 내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기억에 남는 건 커다란 그림자를 본 것뿐이야.
그리고…… 새하얀 빛줄기도. 가늘지만, 모래바람을 뚫은 빛줄기였어.
나는 휘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온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렸어.
그리고 그 순간, 내 안의 공포가 모두 사라졌지.
……어쩌면 그냥 꿈일지도 몰라. 그 뒤의 기억은 낯선 텐트에서 깨어난 것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게 꿈이라도 상관없어. 나는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어 준 그 환각을 다시 보고 싶어……
……
- ……아미야.
- 아미야?
박사님, 저……
- 레이는 이미 갔어.
죄송해요. 저, 방금……
……방금 봤어요.
- 뭘 봤어?
……발굴된 지 얼마 안 된, 천으로 덮여 있는 로도스 아일랜드를요.
거대한 그림자가 림 빌리턴의 오리지늄으로 가득한 황야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걸 봤어요.
뿔과 얼굴을 가리고 신분을 숨긴 살카즈 수송대, 그리고 대포가 실린 중장비, 공사용 아츠로 만든 도검.
부대의 긴 행렬이 로도스 아일랜드가 남긴 자국을 따라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두운 길을 헤쳐 나가고 있었어요.
그건 정말, 정말 긴 여정이었어요.
하지만…… 그 함선은 우리에게 고난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잔혹한 미래를 피하기 위한, 가장 큰 희망이었어요.
모래바람 속에서…… 수송대와 림 빌리턴 현지 사냥꾼들이 스쳐 지나갔어요……
그 사람이…… 조난당한 낯선 사냥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어요……
- 잠깐, 아미야……
- 지금…… 누구의 눈으로 그걸 본 거야?
“왜냐하면, 나는 모두에게 돌아갈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아미야. 이 함선에는 이름이 있어. 게다가,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이 이름에 처음부터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그걸 아는 사람도 여기 있어.
박사한테 물어봤다고? 아니, 그건 아니야. 박사는 네가 아직 어려서 말해 주지 않는 게 아니야.
박사는 단지,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함선의 모습을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후세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옛날에 정한 정의는 그대로 과거에 남겨둬도 괜찮아.
……적어도 나는 그 사람의 침묵 속에 이런 뜻이 있을 거라고 믿어.
왜냐하면 그 사람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니까.
지식으로 '박사'를 정의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기억 또한 '박사'를 정의할 수 없어. 왜냐하면 그 사람의 기억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이 대지에는 없으니까.
아미야, 너는 박사를 믿어?
응, 나도 그래. 그리고 내가 박사를 믿는 이유는, 그때 박사가 네게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야.
전쟁, 존속, 문명, 희망. 기나긴 시간, 불타는 별들, 정해진 미래. 그 사람에게는 너무 무거워서 판별조차 하기 어려운 생각들이 너무나도 많아.
하지만, 박사는 오히려 아주 사소한 소원을 빌었어.
그 아득한 고독 속에서, 그건 박사가 선택한 최초의 좌표야.
아미야, 여긴 너의 집이야. 어쩌면 '로도스 아일랜드'의 정의를 네가 결정하는 날이 올지도 몰라.
맞아, 두렵기도 하겠지? 비록 어려울 수도 있지만, 나는 네가 틀린 답을 내놓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 왜냐하면 이상의 길에 끝이란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누구도 홀로 걸을 수 없다는 거야.
언제든, 무엇을 위해서든, 두려움을 느낀다면 네가 가장 믿는 그 사람의 손을 잡아.
뭐? 벌써 두렵다고? 그럼, 내 손을 잡아도 돼.
언젠가 그날이 올 때까지……
……박사님, 제가 해낼 수 있을까요?
저를 믿어주실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