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7쇄빙
아크토즈는 박사의 도움을 받아 태세를 정비하고, 라타토스는 지휘권을 동생에게 넘겨주었다.
하아.
어떤가?
그 '설산귀' 놈들이 역시 가로막더군.
우리의 안전을 위해 여기에서 대기하라고 엔시오데스가 말했다나, 뭐라나.
거 보게나, 내가 진작부터 말하지 않았는가. 엔시오데스 그놈은 우리를 여기에 가둬 둘 작정이었다고!
대장로님은 혼수상태인데다, 성녀님은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도 못했지. 이런 상황에서 다른 두 가문이 반역자라고 떠드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놈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네.
쉿…… 이제 와서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원내의 일은 항상 대장로님께서 결정을 내리셨는데, 지금 상황이 이러하니 참으로 답답할 뿐일세.
그러게 말이네.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도 과연 쉐라간드의 뜻일는지……
쉐라간드께서 작금의 상황을 뜻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처한 상황을 본다면 분명 가슴이 아파하실 테지요.
서, 성녀님!
저희는…… 저희는 그저 걱정스러운 마음에……
어떤 일이 걱정스러운가요?
대장로님의 상태도 그렇고…… 지금 세 가문이 처한 상황도……
방금 여쭤봤는데, 의사께선 대장로님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만주원을 오랜 세월 동안 지탱해오셨던 분이에요, 쉐라간드께서 필히 보우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분이 분명 건강을 되찾을 수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때까지, 만주원의 과제들은 제가 대리해서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성녀님은 애초부터 이번 대관식을 통해 쉐라그를 관리하게 될 분이었습니다. 대장로님 또한 진작부터 성녀님을 후계자로 점찍어 두셨고요. 지금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이를 더 일찍 이어받는다 한들,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아니면, 장로분들께 더 좋은 대안이 있으시다던가?
시녀장 주제에……
됐네, 나는 시녀장이 잘 말해 주었다고 보네.
우리는 애초부터 성녀님의 능력을 믿고 따르지 않았나? 성녀님께서 먼저 인심을 다스리겠다 하셨으니, 오히려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
또한, 장로분들께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대전 중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엔시오데스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설령 엔시오데스가 정말로 나쁜 마음을 품었다 하더라도, 제가 있는 한 만주원은 건재할 것입니다.
신성한 사냥 때의 성녀는 그저 눈부시게 빛날 뿐이었지만……
지금의 성녀는, 그 누구도 감히 거역하기 힘들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장로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친 뒤, 하나둘 고개를 숙였다.
“그저 성녀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이만 가 보세요.
……
후아……
엔야, 방금 엄청 멋있었어.
그랬나요?
그럼. 대전에서 돌아온 뒤로 많이 실망했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 내가 괜한 걱정을 했던 것 같네.
……많이 실망한 건 맞아요.
하지만 전에 실망했을 땐,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의 저는 그 무엇도 쟁취해 낼 능력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번에는, 비록 많이 실망했지만 제가 무언가를 바꿀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렇다면, 이번에는 실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야 하겠죠. 더 이상 실망할 일을 막기 위해서.
……엔야, 정말로 많이 성장했구나.
가능하다면, 영원히 아이인 채로 남아 있고 싶네요. 하루 종일 복잡한 고민을 하는 건 참 힘드니까요……
……
하지만 키야르 씨의 말이 맞아요, 저는 성장했어요.
신앙……
……콜록, 콜록.
대장로님, 깨어나셨군요!
목소리를 낮추게.
예.
대전은…… 콜록, 어떻게 되었지? 이 늙은이는…… 브라운테일 가문의 사람을 심문하던 것까지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군. 그 이후로는 기억이 흐릿해.
대장로님께서 아크토즈 님이 건넨 독을 마시고 쓰러지신 뒤, 노시스가 나타난 탓에 일이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아크토즈 님과 라타토스 님이 손을 잡고 엔시오데스 님을 제압하려다가 오히려 역으로 제압당하고……
이 늙은이가 듣고 싶은 건 그게 아닐세.
대관 의식은? 성녀는? 엔시오데스는 약속을 지켰나?
……의식은 도중에 중단되었습니다. 엔시오데스 님은 페일로쉬와 브라운테일 가문을 정벌한 후 다시 의식을 거행하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
……엔시오데스. 콜록.
성녀는?
성녀님은…… 지금 방에 계십니다.
……
꼬마야, 삼족 의회를 처음 본 소감은 어떻느냐?
……삼족 의회가 이렇게나 지루한 것인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대장로 할아버지.
세 가주들은 자기 가문에 관련된 얘기만 하고, 각종 의식과 행사에 대한 분담 얘기에는 다들 무관심해 보였어요. 쉐라간드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고요.
후후, 똑똑하구나. 역시 이 늙은이가 널 제대로 봤어.
……대장로 할아버지, 제게 일부러 이런 것들을 보여 주신 건가요?
제대로 짚었구나.
어째서죠?
왜냐하면, 너도 언젠가는 대장로가 될 테니까.
그때가 되면 너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사람들이 말하는 신앙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네…… 만주원에 온 지 얼마나 되었나?
예? 25년 정도 되었습니다, 대장로님.
25년이라…… 콜록. 자네 생각에는 그동안, 이 만주원과 쉐라그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 같나?
그게…… 실버애쉬 가문에서 들여온 것들을 제외하면, 딱히 변한 것은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이 땅은 천 년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네.
앞으로도 변해서는 안 되지.
콜록, 이 늙은이를 좀 일으켜 주겠나?
대장로님, 아직 몸이……
이 낡아빠진 몸은, 이 늙은이가 가장 잘 안다네.
곧 때가 되겠지.
그게……
가서 성녀를 데려오게. 이 늙은이가 할 얘기가 있다고 전하도록.
두 번이나 신세를 졌군, 박사.
엔시오데스가 쉐라그로 돌아와서 카란 무역회사를 설립할 때부터, 나는 녀석의 방식을 껄끄러워했지.
쉐라그로 들어오면서 이미 녀석이 지은 무역항을 보았겠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더군.
엔시오데스가 들여온 물건들은 나 또한 써 봤다만, 확실히 좋기는 하더군. 내 부하 중에서도 쓰는 녀석이 있지,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젊은 부하 녀석들은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못 알아듣는다고 여기지만, 내가 모를 리 있겠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엔시오데스의 행위를 용납할 수는 없어. 이는 쉐라그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을 뿐이야.
쉐라간드께선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지, 이렇게 흘러가다간 결국엔 대가를 치르고 말 것이다.
때문에 나는 항상 앞장서서 녀석에게 반대했지. 하지만, 결과는 이 모양이군.
우리 페일로쉬 가문은 언제나 그런 꾀쟁이들을 좋아하지 않았지.
원래라면 발레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자네를 믿어도 괜찮을까?
박사, 라타토스가 왔다.
아크토즈? 난 네가 모든 병력을 싹싹 긁어모아서 곧바로 쳐들어갈 줄 알았는데 말이야.
박사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랬을 테지.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라……
박사, 당신이 나를 살렸어. 당신에게 보답해 줘야 도리에 맞겠지.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보답이 내 뒤에 있는 브라운테일 가문이라면,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해 줄 수가 없겠는데.
- 네 도움은 확실히 필요하다.
- (그녀의 외투 깃을 정리해 준다)
- 그런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말고.
……요 며칠간 들은 말 중에서 가장 듣기 좋은 걸.
……당신.
당신과 나는 생판 남남이야. 그리고 당신은 뭔가 큰일을 벌여 놨지…… 알려줘, 내가 어떻게 해야 의심을 품지 않게 될까?
뭐, 됐다.
아크토즈까지 이곳에 있는 이상, 너희들이 뭘 원하는지는 안 봐도 뻔하네.
먼저 말해 두지. 네 부하가 나를 찾아내기 전에, 나는 진지하게 엔시오데스에게 굴복하는 걸 고려하고 있었어.
정말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해?
- 아크토즈도 굴복을 택한다면, 필요 없을 것 같다만.
……페일로쉬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데?
- 일단, 당신들은 이미 패배했어.
- 우선, 나는 당신들의 승리를 도울 수는 없어.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민심은 이미 완전히 엔시오데스의 편이야. 대전이 끝난 뒤 나와 아크토즈의 '죄'를 공표하기만 했지, 우리들의 영지에 따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자기가 보기엔, 쉐라그는 이미 자기 거다 이거지.
사실상 그게 맞기도 하고 말이야.
박사, 자네의 지혜를 빌리고 싶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남았는가?
- 일단 가장 현명한 선택은 성녀를 구출하는 게 되겠지.
확실히, 성녀가 나서야만 형세를 반전시킬 수 있는 상황이긴 해.
엔시오데스가 만주원을 통제하는 것 또한 이를 막기 위함이겠지.
문제는, 엔시오데스가 당신의 행동을 과연 예상할지인데.
반대로 말해, 오히려 그놈이 만주원에 군사를 배치한 것도 네가 스스로 그물에 걸리러 오기를 기다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 정면 돌파는 당연히 안 되지.
- 그래서 준비가 조금 필요해.
성녀님을…… 구출한다고?
엔시오데스가 다른 두 가문을 즉각 공격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 '박사'가 페일로쉬 가문에 협력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만약…… 만약 박사님이 정말로 아크토즈를 돕는다면, 상황이 정말 난감해지겠네요.
하지만, 박사가 정말로 아크토즈의 군대를 움직여 우리와 정면으로 맞서려는 건 아닐 거다.
너희들이 말한 대로라면, 그는 아마 아크토즈가 무모하게 전면전을 일으키는 것을 막아 피를 덜 흘리도록 하는 것이 주 목적일 테지.
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지. 내가 보기엔, 페일로쉬와 브라운테일 가문을 부려 쉐라그의 또 다른 패자가 되려는 속셈을 품고 있을 가능성 또한 없지 않다고 본다.
박사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
맞아요, 비록 그럴 능력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너희들도 그렇고 엔시오데스도 그렇고, 그자에 대한 평가는 조금 놀라울 정도군.
너희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란다.
어쨌든, 그들은 아마 우리가 장악하고 있는 성산으로 올 거다.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말이야.
여론을 뒤집기 위해선 성녀의 목소리가 필수적이니까.
만약 저들이 정말로 성녀를 성산 밖으로 데려갈 수만 있다면, 엔시오데스의 계획은 성공을 코앞에 두고 무너지겠지.
그 박사라는 자 또한 이를 잘 알 테고 말이야.
그러니 그자는 분명히 올 것이다.
……아이러니하군. 저들의 눈에는 우리 실버애쉬 가문이 본가의 장녀를 겁박하는 꼴로 보일 테니까.
아닌가? 엔야 실버애쉬는 지금 우리의 인질이다.
……
그 표현이 거슬린다면 이렇게 바꾸지. 성녀는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카드가 되었다고.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지만 말이야.
……노시스 씨, 야카 형님을 더 이상 자극하지 말아 주십시오.
현실을 직시하라는 거다.
아니면, 엔시오데스의 최종 목표가 권력을 만주원에 넘겨주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 나라를 종교의 손에 맡기는 건, 그에게 있어 애초에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
엔야 실버애쉬에게 부족함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으니, 불만 또한 없지.
하지만 그녀는 성녀가 되었고 심지어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어.
그렇다면 엔시오데스에게 있어선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뿐이야. 이렇게 된 이상, 무대 위에 실버애쉬의 가주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 말이야.
……알고 있다.
당연히 알고 있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수틀리면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불필요한 페널티를 감수하지는 말도록.
묀히, 정찰은 네게 맡기겠다.
네.
좋아, 훌륭한 계획이군!
……진심이야?
- 물론.
……
병력을 돌출시켜 유카탄을 구하려는 척 상대의 주의를 끌고, 작전의 실제 목표를 숨긴다라.
전선의 부대는 상대의 착각을 확신으로 바뀌게끔 만들고.
하지만 이 모든 건 아크토즈의 부대를 성산에 접근시키기 위한 연막이고, 거기선 네 부하가 미리 침투하여 접선을 준비한다 이거지?
여러모로 불안한 계획이지만, 통하기는 할 것 같네.
데겐블레허는? 엔시오데스의 그 설산귀 흉내를 내는 부대를 물리칠 수 있다 하더라도, '진짜' 괴물을 당해내지 못한다면 엔시오데스를 상대하는 건 절대로 불가능해.
- Sharp.
이 또한 근무로 간주하나?
- 그래.
말은 참 쉽네, 정말로 자신 있어?
모르겠군. 하지만 아마 십 분 정도는 잡아둘 수 있을 것 같다.
……너 또한 괴물이구나.
……그래서,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 내가 당신을 도와줄 거라고 이대로 확신하는 거야?
- 강요하지는 않는다.
- 당신이 꼭 있어야만 하는 계획은 아니야.
가끔씩 엔시오데스처럼 행동한단 말이지.
계획을 이렇게나 가볍게 털어놓고, 이제 와서 강요는 하지 않는다니.
하지만 나는 이미 계획을 전부 알고 있지.
그런 인간을 순순히 돌려보낼 녀석이 있을 리가 없잖아.
……
됐다……
내가 대신 갈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시우루스.
먼저 거울부터 보고 얘기하지그래?
몸은 피로에 찌들어 있고, 얼굴은 창백한 데다가 눈은 죽어 있잖아.
그래서야 어떻게 너를 믿고 내 남편을 맡기겠어?
……
게다가 네가 그 방 안에서 엔시오데스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는 판에.
네가 브라운테일을 엔시오데스에게 넘겨 버리는 꼴은 가만히 못 보지!
……
뭘 봐! 또 싸우려고?
네가 맞아, 이번만큼은.
……
좋아,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 시우루스가 나 대신 네 계획을 도울 거야.
사실, 난 여전히 엔시오데스의 손에서 무언가를 되찾아 올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지만 말이야.
그저, 행운을 빈다는 말밖에는 못 해 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