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4진리를 구하기 위해
세 가문이 함께 참가하는 신성한 사냥이 곧 시작되려 하는 때, 대장로와 엔야의 의견이 갈린다.
엔야, 난 네가 성녀가 되길 바란다.
……왜?
카란 무역이 쉐라그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녀가 필요하지. 이건 절호의 기회야.
……어째서?
물론 일이 그렇게 간단하진 않겠지.
다른 두 가문이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하지만 난 네가 반드시 눈의 선택을 받고 시련에 통과해 성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엔야, 너라면 꼭 해낼 수 있을 거다.
……만약 내가 싫다고 한다면?
……내가 실패한다면?
......
모든 반문과 의문에 대해, 나는 단 한마디도 답할 수 없었다.
난 이미 그의 대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엔야, 네 성이 실버애쉬이기 때문이다.
여보, 저기 봐요. 저분 엔시오데스 님 맞죠?
무슨 소리야. 당장 내일이 성녀님께 바칠 공물을 준비하는 날이라 바쁘실 텐데, 뭣하러 지금 영지에 오셨겠어?
……잠깐, 정말로 엔시오데스 님이잖아!
들어보니까, 과거에는 성산에 들어갈 때 버든비스트를 타고 가는 게 허락되지 않았대.
특히 성녀님을 뵈러 가는 사람들은, 집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합장하고 땅을 바라보며,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면서 가야 한다고 하더라고.
지금 엔시오데스 님의 모습을 보면, 그러한 전통을 따르시려는 게 아닐까?
그렇지. 그 풍습이라면 나도 들어본 적이 있지만…… 엔시오데스 님까지……?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고개를 푹 숙이며 성산에 오를 필요가 있을까?
무슨 소리야, 엔시오데스 님도 엄연한 쉐라간드의 백성인데. 설마 당신도 페일로쉬의 바보들처럼 그분께서 근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헛소리,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난 그저 엔시오데스 님을 걱정했을 뿐이야. 당신도 알잖아, 다른 두 가문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엔시오데스 님께서 대권을 성녀님께 드리겠다고 하셨을 때마저도 심기 불편한 모습을 보였다지.
두 가문은 엔시오데스 님께서 이룩한 발전을 시기해서 우리 철도까지 폭파해 버렸어. 듣기로는, 쉐라그를 아예 봉쇄해 우릴 포위시킬 생각이라던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쉐라간드께서 두 눈 똑바로 뜨고 계신데 감히 그런 짓을…… 아무리 쉐라간드라도 그런 행동은 용납하지 못하실 거야.
그 녀석들이 뭔들 못하겠어?
엔시오데스 님은 오늘 무기 하나 없이 무방비하게 거리를 돌아다니는 중이시고, 내일은 안 그래도 세 가문이 함께 병사를 데리고 산으로 사냥을 하러 가는 날이라 불안한데, 그 녀석들이 또 무슨 몰상식한 짓을 벌일지 두렵다니까!
에이, 그런 재수 없는 소리 마! 쉐라간드 신이시여, 부디 엔시오데스 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쉐라간드 신이시여, 부디 엔시오데스 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엔시오데스 님, 오늘날에도 이처럼 독실한 참배자를 만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페일 어르신. 송구합니다만 주인님께선 현재 이동 중에도 계속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셔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인사를 받을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엔시오데스 님을 대신해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괜찮다, 내가 실례를 범했군. 쉐라간드 신이시여, 부디 저의 무례를 용서하시길.
그나저나 투리쿰에서 성산까지라면 꽤나 먼 길이 되겠군. 그런 긴 여정을 떠나시려는 엔시오데스 님을 보고 있자니, 나도 주민들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주인님께서 결심한 일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희 호위대가 무사히 지켜드릴 겁니다.
그럼 됐다, 실버애쉬 가문에 쉐라간드의 축복이 있길.
어르신께도 쉐라간드의 축복이 있길.
왠지, 사냥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동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만 같네요.
어떻게 창문 밖을 내다보는 것만으로 동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걸 아는 거지?
쌓인 눈들의 기척을 들으면 알 수 있어요.
말이 나온 김에, 내일 사냥할 때 발밑을 조심해야 해.
……대장로가 왔어.
하아, 신경 써야 할 귀찮은 일들이 너무 많아요.
엔야, 준비는 다 되었느냐?
필요한 짐과 연설이라면 준비되었습니다.
안심하세요, 대장로님. 저도 대전에 처음 참여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번 대전은 이제껏 진행해 왔던 의식들과는 다르다.
엔시오데스가 쉐라간드 신을 참배하러 온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독실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이다.
실버애쉬는 얼마 전에도 수많은 신상을 세우고자 만주원에 신상을 요청한 적이 있었지. 그건 영지 내에 신상을 모시지 않고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 엔시오데스가 정말로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독실하게 변한 걸까요?
성녀님, 오직 쉐라간드만이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건 저희도 단언할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아무리 쉐라간드에 대한 믿음이 없는 몽매한 자라도, 그 찬란한 광채를 마주한다면 자연스레 쉐라간드의 위대함에 고개를 숙이게 되겠죠.
하룻밤 사이에 신앙이 깊어진 것도 결국, 쉐라간드의 위엄을 보여주는 셈이지요.
엔시오데스가 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든, 지금 그 행동에 나무랄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지금 그 행동거지가 신앙에 어긋나지 않은 이상, 성녀의 입장에선 우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쉐라그 사람은 결국 천 년의 전통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
정말로 그렇기를 바랄 뿐입니다.
엔시오데스를 제외하고, 다른 두 가문의 가주들은 평소처럼 산에 올라가 대기한다.
넌 성녀로서 세 가문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겠지만, 네가 준비해야 할 것은 그럴듯한 연설뿐만이 아니다.
사냥이나 대전 도중에 세 가문을 대하는 네 태도가 조금이라도 편파적이라면, 사람들은 곧바로 가문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균형이 깨졌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것이다.
저도 제 손안에 있는 성스러운 종의 무게를 알아요. 또 그런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미리 생각해 두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습니다. 부디 사냥에 쓸 활의 사용 허가를 내려 주십시오.
엔야, 너도 이전 성녀들의 서한을 읽어 보지 않았느냐. 성녀는 직접 사냥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사냥 시작 의식 때 사용하려는 게냐?
성녀는 직접 사냥에 나설 필요가 없죠. 하지만 사냥에 참여한다고 해서, 쉐라간드께 불경한 짓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만주원의 전통은 천 년 동안 변함없이 같은 길을 걸어왔고, 이는 성녀도 마찬가지다. 부디 자신의 신분을 고려해 주기 바란다.
성녀는 쉐라간드를 대신하여 세 가문이 바치는 사냥감을 받고, 쉐라간드의 백성들에게 음식을 내려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사냥감을 성녀가 직접 사냥한다면, 그 전통이 어찌 되겠느냐?
게다가 지금은, 네가 사냥에 나서기에 적절치 못한 계절이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천 년 이래 세 가문이 대권을 만주원에 반환하는 것 또한 처음 있는 일이지요.
대권을 넘긴다는 것은, 본래라면 긴장 상태를 완화하기 위해 행해지는 일이겠죠. 하지만 최근 들어 성산 아래에선 빈번하게 혼란이 터지고, 곧 성녀에게 넘어갈 땅조차 파괴되고 있어요.
마치 쉐라간드께서 노하시는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지금 쉐라간드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쉐라간드의 노여움을 풀어 줄 성녀다. 쉐라간드께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독실한 믿음을 보여 주는 거다.
어쩌면 쉐라간드께선, 자신의 노여움을 사람들에게 대신해서 보여 줄 성녀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죠.
……성전에선 말을 조심하도록 해라.
또 “성실한 자는 권력을 쥐고, 게으른 자는 고통을 받는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저도 세 가문이 성녀에게 권력을 주는 것은 맞지만, 실권까지 넘기겠다는 얘기는 아니란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성녀는 신앙을 지켜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다른 세 가문이 결과를 바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요. 이건 그들의 무능함을 보여 주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그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려는 거예요.
무언가를 지키는 것에 변화란 필요치 않다.
쉐라간드의 백성들은 이미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요. 그들이 쉐라간드께 바치는 물건도 천 년 전과는 다르겠죠.
그리고 쉐라간드 신 또한 천 년 전과 같은 대답을 해 주실 순 없을 겁니다.
엔시오데스 님께선 무려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와선 한 번도 쉬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오셨대요. 게다가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았다던데.
아버지, 저희가 엔시오데스 님께 물을 떠다 드리죠.
전통을 따라야 하는 이상, 지금은 음식이나 물은 입에도 대지 않으실 거야. 잠도 들지 못하고, 잠깐 쉬는 것도 불가하실 테지.
그렇지만 아버지…… 벌써 하루가 지났는걸요. 성산까지 가는 거라면, 우리 마을까지 와야 겨우 절반 온 것 아니에요?
마을에서 나가면 날도 어두워질 테고, 설원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앗, 엔시오데스 님께서 오셨네……
땅거미가 내려앉은 거리에서, 실버애쉬 일행은 묵묵히 걸어왔다. 엔시오데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합장하며 먼 곳에 있는 성산을 향해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신기한 듯 창문에서 머리를 내밀거나, 문을 열고 나와 거리 양쪽에 서기 시작했다.
아버지.
엔시오데스 님께 물을 드릴 수 없다면…… 저도 엔시오데스 님과 함께 성산으로 가 보고 싶어요.
엔시오데스 님께서 공장을 열어 제게 기술을 배우게끔 해 주셨을 때부터, 전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했어요. 지금 엔시오데스 님께서 성산에 가시려는 거라면, 저도 더더욱 따라가고 싶어요.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키고는 실버애쉬 호위대의 뒤를 따라서 설원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