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로이
계획에 따라 '라주라이트 로이'라는 신분을 벗어던지려 하는 마지막 순간에, 로이는 자신처럼 카시미어 도시 내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두 젊은이와 마주치게 된다.
내가 아머레스 유니온에 가입한 이유가 뭐냐고?
이상하군, 이건 당신 조직이잖아. 들어가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그러니까, 이건 면접 같은 건가? 듣기론 도시에 있는 기업들은 모두 이렇다던데, 이후에 들어올 신입들한테도 이럴 거야? 그럼 당신을 사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
하아,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내가 보기엔, 암살 조직이나 기업이나 다를 건 없어. 어차피 다들 출근하고, 야근하고, 다른 녀석들 야근 배정해 주고 그럴 뿐이지.
굳이 이유를 찾아야겠다면, 역시 돈이겠지. 내가 혼자 파울비스트를 사냥해서 버는 것보다 훨씬 큰돈을 벌 수 있으니까.
어차피 하는 일은 똑같이 조준하고 쏘는 것뿐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더 많이 버는 쪽을 택하는 편이 낫지.
그렇지 사장님? 다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일하는 거잖아.
아머레스 유니온의 암살자들이여,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이제 와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피의 기사 같은 유명인이라면, 당연히 모든 게 주시 대상이겠지.
물론 당신은 충분히 조심했겠지만…… 결론적으로, 여기까지 조사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만 있는 건 아냐.
……
당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그리고 우린 가장 먼저 당신을 찾아내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지.
시간이 급박하니, 부디 우리의 성의를 믿어 줬으면 좋겠어.
……너희를 믿으라고?
웃기고 있군, 아머레스 유니온의 입에서 신뢰라는 말이 나오다니.
필요하다면, 우린 아머레스 유니온을 그만둘 수도 있어.
……
……암살자여, 이게 너희 부하가 내 손에 죽는 걸 방관한 이유인가?
너희들은……
쉿, 간파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말아 줘.
피의 기사님은 언제나 현명했었잖아.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
우리의 작은 부탁을 들어 주고, 탈출할 기회를 얻는 거야. 분명 남는 장사일걸.
이걸로 서로 윈윈해보자고…… 알겠지?
아머레스 유니온의 라주라이트, 어때? 듣기만 해도 굉장하지?
사실 버는 돈도 많아. 어떤 의미로는 스포츠 기사와 비슷하지. 모두 목숨 걸고 버는 거니까 말이야.
돈을 빠르게 벌고 싶다면, 어느 정도 대가와 리스크는 감수해야겠지, 안 그래?
하지만 이 일도 벌써 십몇 년 동안 하다 보니, 이제 거의 끝이 보이는 것 같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결단력 있게 빠지자, 뭐 그런 간단한 논리야. 시대의 흐름을 역행해 가며 발버둥 칠 필요가 뭐 있나? 더 좋은 돈벌이 수단이 있다면, 목숨을 바쳐가며 일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타이밍 봐서, 딱 손을 씻는 거지.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게, 스스로 사장이 되는 것보다 편하지 않겠어?
수술은 두 시간 후야, 잊어버리지 마.
내일부터 넌 요엘 타이렐이야. 회사 쪽에선 이틀 뒤에 우리에게 얼굴을 비추라고 할 테니, 실수하지 마.
그리고…… 연합회 측에선 아직 우리가 피의 기사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믿지 않는 모양이야.
쯧, 조사 나온 사람들은 아직 완전히 철수하지도 않았어. 그런데도 아머레스 유니온에서는 새로운 라주라이트 후보자를 정했더라고.
아무튼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가능한 밖에 돌아다니지 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이봐, 듣고 있는 거야?
음? 아,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사장님, 가장 비싼 세트로 부탁해요.
먹고 갈 거니까 포장은 안 해도 됩니다. 아, 맵기는 최고로요!
음, 그래서 모니크 님~ 방금 뭐라고 하셨죠?
……죽어 그냥.
그럼 안 되지. 내가 죽으면, 불쌍한 타이렐 부인은 바로 과부가……
……음, 끊는 속도가 정말 빠르군.
(보아하니 아직까지는 순조로운 것 같네. 이사회가 이제 와서 의심해 봤자 이미 늦었고. 피의 기사…… 머리가 좋은 녀석이라면, 이 시기에 튀어나오진 않겠지.)
(다들 자기 보신하기 바쁠 테니, '도구' 몇 개쯤 사라진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
(다크아이언 쪽은 내가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그렇다면 남은 건 얼굴을 바꾸고, 신분을 교체……)
(……)
(이제 곧 이 얼굴과도 작별이군.)
(새 얼굴이 괜찮을지 모르겠네. 어찌 됐든, 지금보다 잘생길 수는 없을 텐데.)
(하아, 아쉬운걸.)
전직 라주라이트는, 길거리 네온 사인의 그림자에 몸을 감춘 채 서 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희미한 시선으로 도시의 화려한 거리를 훑었다.
빌딩 외벽에 설치된 커다란 디스플레이에서는, 때마침 최근 가장 주목받는 뉴스들이 보도되고 있었다.
거리의 모든 크고 작은 모니터에선 마치 전부 동일한 내용이 보도되는 듯하다. 소음과 번잡한 모니터의 빛들이 어지럽게 뒤섞인다.
피의 기사가 숨어 있던 시골 마을의 은신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에게 습격당했습니다. 현장엔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현재 현장에서 확인된 피의 흔적은 피의 기사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현장에서는 습격자들의 시체가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전문가 분석에 따르면, 이런 격렬한 전투에서 피의 기사가 살아남았을 확률은 극히 낮다고 보고 있으며, 현장에 남겨진 대량의 혈흔이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까지 나온 가장 합리적인 해석에 따르면, 전 챔피언은 돌아온 빛의 기사에게 패배한 뒤, 마지막 힘을 소진하여 습격자와 동귀어진했으리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후속 프로그램을 통해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피의 기사 습격 사건의 진상은! 채널 고정!
웃기고 있네! 전부 개소리야!
피의 기사가 고작 암살자 따위에게 죽을 리가 없어! 피의 기사는 분명 부상을 입은 거고, 사건이라면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거머리 같은 매체들 앞에 서기가 싫었던 거야……!
비열한 암살자 녀석들! 음침한 벌레 같은 놈들! 피의 기사는 절대 이렇게 쓰러질 리가 없어!
잠깐. 말하는 건 좋은데, 팔을 그렇게 휘두르지는 말라고…… 아이고, 내 머리야!
……앗!
미,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나 봐. 괜찮아?
씁…… 내가 재수가 없는 거지…… 됐어.
거기 형씨, 당신은 안 맞았지?
……
저기? 괜찮아? 정말 머리에 맞은 건 아니겠지?
음…… 응? 아, 미안, 나한테 물어본 거야?
야밤에 이런 곳에 쪼그려 앉아 길거리 음식이나 먹는 게 우리 셋밖에 더 있어?
그렇네. 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난 괜찮아. 뉴스에 너무 집중해서 말이지.
뉴스에서 나온 건 전부 개소리야!
저 피 냄새 맡고 몰려든 거머리 같은 언론 녀석들은, 사실 피의 기사의 생사 따위 관심도 없다고. 저 녀석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멋대로 떠들어 대는 거야!
“빛의 기사에게 패배 후, 과거의 챔피언이 저지른 끔찍한 사건!”
쯧쯧, 제목만 자극적으로 만들어 놓으면 며칠 동안 조회수 걱정은 없겠어. 누구라도 궁금해서 들어가 볼 테니까. 완전 로또나 다름없네 그래.
피의 기사는 결코 이렇게, 이렇게…… 소비되어선 안 돼!
좋은 표현력이야, 정확해.
우리 회사엔 기사 스포츠와 연결된 사업들이 있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그분을 뵌 적이 몇 번 있었지. 그런데 요 며칠 뉴스가 나간 뒤, 우리가 진행하던 프로젝트들도 완전히 물거품이 됐어.
휴…… 개인적으로도 피의 기사를 꽤 좋아했었는데, 무사했으면 좋겠군.
……흥, 말 잘했어. 내가 한 잔 사야겠군!
어?
방금 전 실수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어때? 나 같은 감염자가 사는 술인데, 마실 수 있겠나?
난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
에라,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그럼, 어디로 갈까?
간도 크군…… 당신도 같이 가겠어?
나도?
난 이따 볼 일이 있어서……
……하지만 이것도 인연이니, 거절하기는 미안한걸. 좋아, 그럼 어디로 갈까?
좋아, 나를 따라와!
푸하, 건배!
건배!
……너희들, 이제 그쯤 하지. 나 이제 돈 얼마 없어.
사실 나 당신이 누군지 알아. 오늘 경기에 나왔던, 그……
철완의 기사지!
난 오늘 철완의 기사 팔에 머리를 맞은 거였군……
하하하하! 맞네, 그렇네!
흠, 난 사과했다!
그래!
오늘은 진짜 안타까웠어. 간발의 차이였거든. 만약 상대한테 그 보급 패키지만 없었어도 네가 이겼을 거야!
난 그때 네가 이긴다에 걸었어!
……나한테 걸었다고? 어째서지?
배당률이 높아서지. 다른 이유가 있겠어?
……뭐 ……그건 그렇네……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나 같은 감염자 기사에게 베팅하면 안 된다는 걸 말이지. 녀석들은 우리가 이기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거든.
나도 한 번 덤벼 봤었지만, 역시 실패했지. 아마 이번 배후에 있는 그 녀석은 앞으로 나를 더 눈엣가시로 여길 거야.
와아, 듣다 보니 무섭네.
만약 나한테 피의 기사 같은 실력이 있었다면……
하지만 피의 기사도 빛의 기사한테 졌잖아? 아, 미안, 이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겠지.
……
그러고 보니, 형씨는 뭐 하는 사람이야?
설마 형씨도 무슨 기사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 난 이제 막 도시에 올라온 시골 사냥꾼일 뿐이야. 평소엔 파울비스트 같은 걸 사냥하고, 가끔 좋은 가격에 팔리면 그거에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이지.
하지만 요즘은 생활이 좀 어려워져서, 뭔가 돈이 될 만한 게 있을까 싶어 도시로 올라왔어.
스포츠 기사는 어때? 이길 수만 있다면 큰돈을 빠르게 벌 수 있잖아.
음, 별로 그렇지도 않을 것 같은데. 기사 나리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치고받는 일은 내 전문도 아니고 말이지.
현명한 선택이야, 스포츠 기사들의 화려함에 현혹되지 마. 진짜로 돈을 버는 기사는 손에 꼽을 정도지. 기사가 될 생각은 접어 둬.
나도 다른 길이 있었다면, 이딴 일을 택하지는 않았을 거야.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는걸, 형씨.
그렇네. 난 그저 도시에서 좀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만약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몇 년 전으로 돌아가서 스스로에게 말해 주고 싶어. 무슨 대기사인지 뭔지가 되는 건 때려치우고 얌전히 집에서 일이나 하라고 말이지.
평생 농사만 짓는다 해도…… 아마 지금보다는 나을 거야.
돈을 벌 수 있는 건 항상 소수의 사람들뿐이지. 맞는 말이야.
스포츠 기사의 수입은, 그 배후에 있는 기업들이 버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딸꾹.
취했군, 형씨.
아닌데? 나 하나도 안 취했어!
당신들이 좀 알려 줘 봐…… 만약 내가 지금 감염된다면, 내일 출근할 필요도 없겠지?
……
맞아. 내일뿐만이 아니라, 정말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평생 출근할 필요가 없겠지.
됐다, 못 들은 걸로 해 줘…… 딸꾹, 후우. 정말 취했나 보군.
미안, 좀 어지럽네. 정말…… 어지럽군.
괜찮아. 형씨가 얼마나 힘든지 대충은 알 것 같거든. 그래서 흠씬 두들겨 패 주고 싶은 마음도 참을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래도 앞으로 그런 농담은 하지 마…… 또 그런 소리를 했다간 오늘 밤은 병원 응급실에서 보내게 될 거야.
하아…… 다시는 안 할 거야.
사실, 난 어릴 적에 기사가 되고 싶었어.
스포츠 기사 말고, 더 오래된 그거…… 우리 할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이 좋아했었던 그런 거 말이지.
얼마 전에 도시에 입성한 출정 기사들 말하는 거야?
나도 내가 기사가 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하아.
너무 마음 쓰지 마. 치고받고 하는 그런 건 이미 구식이야. 용맹함을 내세운 싸움의 결과는 사실 보잘것없는 거 다 알잖아.
누가 아니래.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싸워야만 해.
후우…… 사장님, 한 잔 더!
내가 보기엔 다들 좀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있을 뿐인 것 같은데, 그럼 기업 같은 곳에 들어가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싶네.
기업에 들어가고 싶다고?
나는, 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가능하다면 대기업에 가고 싶네. 사무실에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그런 곳에 가 보고 싶어. 영업사원 같은 것도 괜찮겠는걸. 그런 쪽으로 나도 꽤 재능 있는 것 같거든.
들어 보니 대기업은 우수 사원에게 보너스도 준다던데. 안정적으로 월급도 받고, 얼마나 좋아!
하하, 듣고 보니 괜찮네……
……순진해!
에?
대기업에서 일하는 건 당신네들 상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음…… 그냥 달콤한 꿈 얘기나 해 본 거야. 대기업에 들어가는 게 어렵다는 건 당연히 모두 알지.
들어가는 것도 힘들긴 하지. 근데 그건 사실 가장 쉬운 단계일 뿐이야. 들어가면 비로소 진정한 고통이 시작되지.
형씨가 정말 대기업에 들어가게 된다면, 거기서 나올 수가 없어. 그거야말로 정말 힘든 일이지……
……
사실…… 난 오늘 무단결근했어.
휴가를 쓰고 싶었는데 올해 남은 연차가 없더라고. 그래서 그냥 무단으로 결근했지.
그럼 하루 종일 땡땡이쳤다는 건데, 회사에서 연락 안 왔어?
전화기도 배터리가 나갔어. 어제 충전을 깜빡했거든.
대단한 녀석이네.
너 말이야…… 문제 생기는 거 아냐?
당연히 문제 있지, 그것도 꽤 큰 문제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 태연하군.
하…… 하하, 태연한 건가?
나는 지금 이미 혀가 마비된 느낌인데다, 위도 텅 비어 있는 것 같아. 뇌는 음, 이 두 가지가 합쳐진 상태랄까.
아, 방금 술을 마셨으니 위장엔 술이 들었겠군. 뇌에는 아마 물이 찼을 거야.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 대사, 난 꽤나 마음에 들어. 독특한걸.
아무튼, 난 지금 기분이 좋아. 벨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런 문제도 없는 척하면서 있을 수 있으니까.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겠지. 결국 잠깐의 평화일 뿐이야.
전화기를 충전하고 나면…… 후, 상상하기도 싫은걸.
…… 그만해, 갑자기 소름 돋잖아.
나까지 속이 쓰려지려고 하는군.
맘대로 하라고 해. 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나 같은 직원은 얼마든지 널려 있지. 능력 있는 경력 사원이든, 힘이 넘치는 신입 사원이든, 그럼 사람들은 어디든 널려 있다고. 나 하나 때문에 달라질 건 없어.
그냥 힘들어서…… 하루 쉬고 싶었을 뿐이야.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휴일을 즐기고 싶었어.
만약 이 일 때문에 잘린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스스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거니까.
진짜 괜찮은 거야? 무섭진 않아?
……농담이지. 당연히 무서워. 집 대출도 아직 많이 남았거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면 밤새 경위서를 작성할 생각이야. 내일 부장 녀석한테 주면서, 어제는 열이 너무 심해서 하루 종일 기절해 있었다고 말해야지. 전화기는 떨어뜨려서 부서졌다고 하고.
흠, 너무 티 나는 거짓말인걸.
완전 거짓말 같잖아!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구실이 필요할 뿐이지……
됐어,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그만 마시자.
사장님, 계산…… 으헉, 당신들 정말 사양하는 법을 모르는 구먼. 이렇게 비싼 것만 마시다니!
고맙네. 이야, 어렵사리 도시에 들어왔더니 이렇게 한턱 쏴 주는 친구도 만나고, 완전 운 좋은데.
……
오늘 한턱 쏴 준 보답으로, 조언을 하나 해 주지.
어떤 조언?
오늘 밤엔 그냥 이 술집 안에 계속 있는 게 좋을 거야. 보니까 이 술집은 밤새도록 영업하는 데다, 사람도 꽤 많아 보이네.
그리고 날이 밝거든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 아무튼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어.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해, 난 먼저 갈게.
이렇게 간다고? 무슨 말인지 설명도 안 해 주고……
음, 그냥 나도 집에 가야겠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저 녀석 말처럼 진짜 밤새 마실 거야?
난……
후에 영감은 나에게 말했다. 자신은 다크아이언이고, 내겐 라주라이트가 될 재능이 보인다고.
그는 정말 지독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나도 만만치는 않았다. 하아, 사장과 다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라주라이트가 되라면 그냥 되자.
영감이 나를 막 주웠을 때…… 아니,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지. 난 혼자서도 잘 살고 있었으니까, 영감이 굳이 주워 줄 필요는 없었어.
아무튼 그때 난 파울비스트 두 마리를 막 사냥한 참이었다. 깃털을 벗겨내고 피를 뽑은 후, 피워 놓은 불에 구워 먹으면 될 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영감이 한 마리 반을 먹어 치웠고, 대가리 두 개와 한 쌍의 발, 그리고 넓적다리 한 개만이 내 몫으로 남았다.
다 먹고 난 뒤에, 영감은 어느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달인처럼 입을 열곤 내게 말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가르침도 도구도 없이, 노련한 사냥꾼조차 까다로워하는 민첩한 파울비스트를 사냥해 내다니. 천부적인 소질이 있군.
어떤가, 젊은이. 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은가?
……당연히 하고 싶지. 그게 왜 싫겠어.
……
완전히 취했었나 봐. 녀석이 한 말을 그대로 믿다니, 시간이 너무 지체됐는걸.
곧 낡도 밝을 테니…… 역시 집으로 가자.
으으…… 춥다.
이 시간의 그랜드 나이트 영지는 이런 모습이군. 사람이라곤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고, 사방엔 쓰레기에 버려진 기사 포스터라니……
하, 전부 쓰레기뿐이야……
……누구냐?!
너희들은……
철완의 기사.
넌 연합회와 협조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았지.
피의 기사는 이제 너희를 지켜줄 수 없다.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여정이 길어질수록, 나는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지.
기사라는 건 그들이 창고에 쌓아 놓은 상품이고, 암살자는 그들의 손에 쥐어진 무기지. 여론? 여론처럼 조종하기 쉬운 것도 없지. 녀석들은 그런 걸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자금, 권력. 카시미어에서 이 두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
하아, 꼭 대부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냐. 하지만 너도 보라고.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역시 그들의 무리에 들어가야만 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한층 한층 올라가고 있지. 하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야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러니까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자고. 여건만 된다면, 되도록이면 더 나은 삶을 위해 편해질 수 있는 선택을 하면 되는 거야……
적어도 이제부터는 전화 한 통 때문에 누군가를 죽이지는 않아도 될 거고, 실수로 부상을 입었다 해도 사장한테 변명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렇지?
됐어, 얼굴은 문제없어. 눈 떠봐.
……으음……
자꾸 그렇게 재수 없게 얼굴을 만지면, 패 버릴 거야.
아야. 그러지 마세요, 모니크 님.
얼굴을 온통 붕대로 감싼 느낌이라. 음, 신선해.
도나, 난 도나 타이렐. 넌 요엘 타이렐.
곧 의사가 올 거야, 실수하지 마.
아, 그럼 호칭도 좀 바꿔야겠군. 우린 이제 부부니까 말이야. 안 그래?
……
부끄럽기라도 한 거야?
눈이라도 삐었어?
그렇게 화내지 말고. 이런 설정은 좀 그렇긴 하지만…… 음, 그래도 괜찮은걸.
게다가 얼굴도 예뻐졌으니까 걱정 말라고.
……정말 눈이 잘못된 모양이군.
깨어나셨군요. 어떻게 좀 익숙해지셨나요?
물론 아츠를 통해 진행한 수술이라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고, 여러 번에 걸쳐 수술을 진행할 필요도 없었지만, 긴급하게 진행했기에 나름의 리스크는 있습니다.
우선 한동안은 붕대를 풀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가능하면 한 달에 한 번은 관리받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야 최대한 안정이 될 테니까요.
고마워요, 효과가 좋네요.
하지만 관리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흠……
저희가 알아서 해결해 볼게요.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깔끔한 언변인걸. 시체는 네가 알아서 해.
어쩔 수 없지, 아무한테도 들키면 안 되니까. 좀 진부하지만,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말이 있어……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말이야.
그러고 보니, 혹시 연합회에서 피의 기사를 추종하는 감염자 기사 무리를 제거하는 중인 거 알아?
나도 어젯밤 한 명을 만나서 잠깐 확인해 봤는데……
들어 본 적은 있는 것 같네.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너도 신경 꺼, 그리고 잊지 마. 이제 우린 아머레스 유니온이랑 관계없어.
뭐, 맞는 말이야.
이제 우리와는 관계없지……
그래,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겠지. 이제 어떻게 할까? 판매원이 된다면…… 정말 가서 영업이라도 뛰어야 하나?
그렇게 하고 싶어도, 다크아이언이 허락하지 않을걸.
네가 고객들을 내쫓지만 않아도 감사할 일이지.
혹시 모르지, 나한테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제 뭐든지 다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나 한가해?
조금. 아니면 같이 사냥이라도 하는 건 어때? 우선 시골에 가서 별장을 하나 사는 거야. 내가 파울비스트 사냥법을 알려줄게. 이건 나보다 잘하는 사람 없을걸.
옛날에 숲속에서 사냥으로 먹고살았을 적에는 이렇게 잘 풀리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야.
예전엔 여유가 없었지만 이젠 아냐. 시간이 넘쳐나니까 어떤 일이든 마음껏 해 볼 수 있어.
그렇게 한가하면 혼자서 가.
난 휴가를 떠날 거야. 시골 말고, 아마 도솔레스나 시에스타 같은 곳으로 말이지.
그렇게 공을 들여서 간신히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쟁취해 냈는데, 결국 동심이나 쫓겠다고?
무슨 꿍꿍이야?
……글쎄.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봐야겠다 싶었을 뿐이야. 아직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쯧, 만약 어느 날 네가 맛이 가서 산속에 은둔하고 싶어지면, 남은 재산은 내 앞으로 돌려놔. 계좌번호는 나중에 보내줄게.
하하. 지금 우리 신분 대로라면,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재산은 아주 자연스럽게 너한테 돌아가게 될걸.
그것도 그렇네. 지금 바로 해 볼까?
매정하긴. 이런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그럼 내가 남은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방금 얘기한 휴가를 같이 떠나는 거야. 어때? 생각 있어?
……어디로 갈지 말해 봐, 같이 가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