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어쩌면
빅토리아의 도시 칼라돈에 있는 가게 '그린 스파크'에서 일하며, 자신의 꿈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간 감염자 수지. 하지만 뜻밖의 사고로 희망이 무너져버렸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오리지늄 보일러의 굉음은 줄어들지 않았고, 높이 솟은 굴뚝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올랐다.
노동자들은 낡은 방호 장비를 벗어 교대할 동료에게 건네주었다.
칼라돈 시의 하루가 곧 끝난다.
1097년 11월 16일 9:50 P.M.
밤 9시는 근처 감염자 공장의 교대 시간이다.
꽤 많은 노동자가 퀘르쿠스 씨의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하지만 가게에서 그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건 별로 많지 않다.
조잡하게 만든 핀 튀김, 간이 싱거운 감자수프, 별 향이 없는 과일주가 다였다.
그런데도 이곳에 단골이 몇 명 늘었다.
건배!
건배!
하하하하! 브랜드 만세!
스파키! 한 잔 더!
여기 과일주요.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오늘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이네요?
브랜드 씨가 이번 달에 직원들한테 보너스를 주셨거든!
보너스라고 해 봤자 100펜스일 뿐이지만.
다들 죽어라 일해서 작업 기간을 맞춘 덕분에 받은 거지.
근데 늦게 들어가도 아내한테 안 혼나?
혼나기는! 내가 가장인데 자기가 뭘 어쩔 거야?
좋아, 가장을 위해 건배!
건배!
스파키! 한 잔 더 줘!
하하하…… 짐스 씨는 적당히 마셔요. 그러다 아내분이 정말 화내시겠어요.
스파키, 전에 점장님한테 들었는데 가게에 도수가 높은 술이 있다며?
우리도 좀 맛볼 수 있나?
안! 돼! 요!
퀘르쿠스 씨가 그랬어요. 도수가 높은 술은 건강에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요!
스톤 오빠, 몸 잘 챙겨야죠.
에이, 뭐 어때?
어차피 병에 걸렸으니 언젠가 죽을 건데 뭐, 죽기 전에……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시내 의사가 그랬어요, 광석병도 환자의 개인적인 상태에 따라 병세 악화 속도가 다르다고요!
뭘 그렇게 진지하게 굴어? 난 그저……
스톤 오빠!
아…… 왜 불러?
건강 좀 잘 챙기면서 살아요! 그런 말 좀 그만하고요!
음…… 미안?
그러게 왜 스파키를 화나게 해?
하아,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어라? 오늘 엄청 시끌벅적하네?
어서 오세요, 비터 루트 씨!
아이고! 비터 루트 형씨 오셨네? 자자자, 같이 마시자구!
응?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칼라돈의 감염자 지역에는 이상한 사람이 많다. 비터 루트 씨도 그중 한 명이다.
비터 루트 씨는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조직에 속해있고, 시의회의 귀족이 고용한 '전문가'이다.
그런데 감염자를 대하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태도는 이해가 안 간다.
“로도스 아일랜드는 칼라돈 시의회와 협조해 감염자를 치료할 것입니다.” 이게 그들의 공개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왜…… 심지어 외지 사람들이 감염자를 돕겠다고 나서는 걸까?
오늘 안 바빠? 어떻게 이 시간에 술 마시러 다 왔어?
글쎄, 요즘 직원을 더 채용해서 일손이 꽤 여유로워졌거든.
그래? 로도스 아일랜드 일은 할만해? 급여는 어때?
왜? 관심 있어?
됐어, 난 글도 모르는데…… 괜히 망신이나 당하면 안 되지.
처음에 감염자 지역 사람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 심지어 중증 감염자를 잡아가서 실험한다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정말 감염자를 돕고 있다는 걸 그들은 행동으로 증명했다.
광석병의 병세 진단, 광석병의 급성 발작 치료부터 작업 중에 다친 일반 상처까지 로도스 아일랜드 의료 센터에 가면 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로도스 아일랜드의 동기를 의심하는 사람이 많지만, 적어도 이 가게 손님은 그들을 믿는다.
그런데 짐스, 아까 오는 길에 자네 부인을 봤어.
뭐, 뭐라고?? 확실해?? 망했……
크, 크흠.
저기, 다들 계속 마셔. 난……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
하하하, '가장'은 이제 가시려고?
얼른 가야겠어, 다음에 또 마시자고.
짐스 씨, 조심히 가세요.
가게를 찾는 대부분의 손님과 달리 짐스 씨는 감염자가 아니다.
칼라돈에서는 감염자 지역에서 일하는 비감염자를 종종 볼 수 있다.
《칼라돈 감염자 신 법안》이 시행된 뒤로부터 일자리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감염자 공장으로 출근했다.
그중 대부분은 퇴근하면 재빨리 감염자 지역을 떠났고, 일할 때도 감염자와의 접촉은 피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감염자들은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서 비감염자 노동자를 원망하지 않았다.
반면 짐스 씨 같은 분도 있었다.
같이 술 마실 사람이 가 버렸네.
빈, 거기 멍하니 있지 말고 이리 와서 나랑 술 마시자!
귀찮게 하지 마, 신문 보고 있잖아.
무슨 기사가 났는데?
요 며칠 빅뉴스야! 온 도시에 다 퍼졌는데, 설마 모르는 거야?
신 법안 얘기하는 거지? 확실히 빅뉴스긴 해.
무슨 신 법안이지?
감염자 노동자 대우를 개선하는 법안 말이야! 넌 매일 술만 마실 줄 알지! 이건 우리랑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라고!
쳇, 난 또 뭐라고.
너도 참 순진하구나, 난 그런 헛소리는 진작부터 신경 안 썼어.
뭐? 대우를 개선해 주겠다는데도 불만이야?
귀족들이 우리 같은 감염자한테 정말 잘해줄 것 같아? 착각하지 마!
내가 장담하는데 그 법안은 분명 만장일치로 부결될 거야. 그리고 다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겠지.
그냥 보여주기식으로 이러는 거라고.
아하! 그것참 아쉽네! 근데 네가 틀렸어.
법안이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결되지도 않았어.
의회 투표가 동점으로 나왔거든. 최종 결정은 다음까지 기다려야 해.
이 일은 이대로 묻힐 거야. 근데 신문에서는 뭐라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법안이야?
잠깐만, 어디 보자…… 전에 강연 들을 때 적어 놓은 것도 있는데.
그렇지, 여기 봐봐. 법안 내용은 감염자 노동자의 하루 작업 시간이 15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공장에서는 감염자에게 비감염자와 똑같은 오리지늄 방호 장비를 제공해야 한다……
풉, 지금 나랑 농담하는 거지?
진짜 그렇게 되겠어? 이런 상황을 뭐라고 하더라? 자다가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는 거 봤어?
외지에서 온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난 칼라돈 토박이야. 귀족 영감들이 얼마나 가식적인지 평생 보고 살았다고.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인색하기 그지없는 나쁜 놈들이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너한테 줄 거라고 생각해? 꿈 깨라고.
흠, 그래도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니까.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고 10년 전을 생각해 봐. 칼라돈의 감염자 새 정책이 시행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건 다른 문제지.
공장에서 일하는 감염자한테는 급여를 반만 주잖아. 귀족들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거니까 당연히 좋아하겠지!
하긴, 게다가 돈으로 주지 않고 급여 티켓으로 숫자만 맞춰서 줄 때도 많고.
무슨 일이건 개선되려면 시간이 필요해.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된다고.
이걸 알아야 해. 칼라돈에서는 다른 도시의 감염자를 수용해 일자리까지 제공하고 있어. 빅토리아에 이런 곳은 이곳뿐이야.
전에 몇몇 현장 감독들한테 들었는데, 지금 그 정책을 '컬럼비아 모드'라고 부른다지?
컬럼비아의 도시는 다 그렇단 말인가?
그건…… 말하자면 복잡한데, 조금 차이는 있어.
됐어, 이거 말고 다른 기사는 없어?
어디 보자……
'충격! 칼라돈 시 지하에서 한밤중에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져!'
그리고 이거…… '한밤중 칼라돈 변두리의 버려진 구역에 사람 출몰, 감염자 밀입국으로 추정.'
그리고…… '치안 악화, 감염자 지역으로 잠입한 강도와 지명 수배자.'
죄다 그런 기사밖에 없어요?
일단 자극적인 제목을 뽑고, 거기에 '감염자'라는 세 글자를 끼워 넣는 거지. 《칼라돈 일보》, 이 망할 놈들은 늘 헛소리만 한다니까!
아무튼 수지 씨도 조심해. 요즘 칼라돈이 어수선한 건 사실이니까.
헤헤헷…… 조심할게요, 고마워요.
1097년 11월 17일 8:40 A.M.
핀, 감자, 양파…… 이 정도면 되려나?
아, 후춧가루도 있었지!
이걸 캘스 씨 가게에 갖다 드리면 되는 거죠?
그래,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타지 사람은 도시에서 떠나라!
감염자를 쫓아내자! 여긴 우리의 터전이다!!
썩 꺼져라!
이게 다 감염자 때문이다!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 짐꾼은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감염자 지역을 반대하는 시위는 칼라돈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4년 전, 칼라돈 시의회가 '감염자 새 정책'을 시행하자 수많은 감염자가 일하기 위해 칼라돈에 왔다.
그리고 비감염자와 감염자의 갈등은 그로 인해 되레 줄어들지 않게 되었다.
거기 감염자, 이리 와봐!
……저, 전 그냥 지나가는 길이에요.
뭘 들고 있는 거야? 어?
이건……
바구니에 뭘 담았냐니까! 어디 봐.
이건 다른 가게로 배달할 물건이에요!
이 시간이면 감염자들은 공장에 있어야 하지 않나? 왜 여기서 서성거리는 거야!
물건을 배달하는 것도 제 일이니까요……
어디서 감히 말대꾸야!
으윽……
(아파……)
스파크…… 오리지늄 아츠……
(참아…… 수지…… 반격하면 안 돼……)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잖아.)
감염자 주제에 뭘 믿고 거리에서 활보하는 거야?
너희들 때문에 칼라돈 공기까지 더러워졌다고!
버러지 같은 놈들, 당장 시궁창으로 꺼져버려.
(감염자 지역으로 온 건 당신들이잖아……)
뭘 노려봐? 맞고 싶어?
사람이 마음을 너그럽게 가져야지, 그만해.
너…… 넌 뭐야?
복면한 키 큰 남자는 필라인 여자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돌려 눈앞의 폭도를 바라봤다.
어르신이 체통 좀 지키지? 맨주먹인 아가씨를 괴롭히면 시시하지 않나?
뭐야, 그래봤자 감염자잖아!
영웅 놀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날 때리려고? 어디 때려 보시든가?
……
쓸모없는 놈.
레드 씨!
훗.
고귀한 어르신을 내가 건드릴 수는 없지.
근데 계속 때리기 전에 한마디만 할게. 내 얼굴에는 오리지늄 결정이 있어. 바로 아까 때린 곳에 말이지.
뭐…… 뭐야?……
이런, 큰일이네. 이봐, 내 입가에 피가 묻었는데 마침 어르신 손이 까졌네.
이러다 광석병에 감염되는 건 아니겠지?
뭐라고? 이런!
어서 병원에 가! 아직 안 늦었으니까 서둘러!
빌어먹을 우르수스! 두고 봐, 내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이고, 얘기 그만하고 병원부터 가봐!
저기, 레드 씨, 감사합니다.
괜…… 찮으세요?
난 걱정할 거 없어. 맞는 것도 익숙해졌거든.
너야말로 얼굴이 부었네.
전…… 괜찮아요. 돌아가서 얼음찜질하면 돼요.
요즘 감염자에 반대하는 시위가 잦아지고 있으니 다음부터는 길을 돌아가도록 해.
어디 가는 길이야? 내가 데려다줄게.
앗, 지금 근무 시간 아닌가요? 매번 폐만 끼치네요……
걱정하지 마, 나도 일이 있어서 지나가는 길이니까.
레드 씨는 근처 공장의 노동자인데 가끔 가게에 방문한다.
우르수스 이민자지만 술은 좋아하지 않고 가게에서 혼자 책 읽는 걸 좋아한다.
다른 노동자들이 레드 형씨라고 부르며 아주 존경받는 분 같다.
그런데…… 레드 씨, 아까 그 사람이 정말 광석병에 감염될까요?
그렇게 쉽게 걸릴 리가 없지, 그냥 겁준 거야.
광석병이 피를 통해 전염되기는 하지만, 아까 그 녀석은 그냥 찰과상만 입은 거였어.
그래도 겁주기에는 효과가 아주 좋지.
하하하…… 그런 거였군요.
망할 놈들, 하나같이 *욕설*같은 *욕설* 놈들이라니까!
아가씨를 다 건드리다니, 쪽팔리지도 않나?
전 괜찮으니까 화내지 마세요.
그러니까 사람을 때리고 그냥 도망간 거야? 어디로 가는지 봤어?
북쪽으로 갔어, 아마 더 보일 구역으로 갔을 거야.
앗…… 더 보일 구역이라면…… 찾기 힘들겠네.
아무튼 일단 기록부터 할게. 요즘 경비대 일손이 계속 부족하거든.
얼굴은 아직도 아파? 문질러줄까?
헤헷…… 괜찮아요. 그라니 경관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칼라돈 시가 불안정하긴 해도…… 수지까지 습격 받을 줄은 몰랐어.
그라니 경관은 칼라돈 현지의 경찰이 아니라, 현지 경비대에서 차출해 임시로 감염자 지역을 맡게 된 기마경찰이다.
칼라돈 경비대는 감염자 지역을 관리할 뜻이 없어 보인다. '인력 부족'은 그저 핑계일 뿐인 것 같다.
그러니 그라니 경관님은 현지에서 감염자를 기꺼이 도와주는 몇 안 되는 치안요원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몇 안 되는 인력으로는…… 감염자 지역의 수많은 치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물질적 피해는 없고…… 기록 다 했어.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그럼 난 가 볼게, 무슨 일 있으면 날 찾아와.
감사해요, 그라니 경관님.
내 손에 잡히기만 해 봐라, 쓰레기 같은 놈들.
진짜 네 손에 잡히면 뭘 어쩌려고?
신나게 두들겨 패 줘야지!
생각 좀 해 봐. 네가 때리면 주위 사람들이 바로 난리 칠걸.
내일 아침 《칼라돈 일보》 헤드라인이 '무고한 시민을 구타한 감염자, 날로 심각해지는 치안 문제'로 바뀌겠지.
……그건……
그 목소리 큰 녀석, 내가 알아.
한 달 전에 점프슈트 작업복을 입고 시위대 무리에 섞여서 자기 공장이 감염자 때문에 망했다고 했지.
두 달 전에는 장사꾼 무리에 섞여서 자기도 장사하는데 감염자가 물건을 싹 훔쳐 갔다고 했고.
오늘은 또 무슨 신분으로 나타났대?
'짐꾼'이었던 거 같아요.
그런 일이 있었어???
들어보니 일하는 게 더 보일 구역 갱단의 스타일 같네. 누가 고용했나? 또 어느 귀족이 우리한테 불만을 품은 거야?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염자 지역 자체가 눈엣가시 같을 거야. 새 정책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압도적으로 우세를 차지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계속되겠지.
좀 더 조심해야겠어.
그런데 망할 녀석은 수지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서 감히 우리 레드 형씨까지 건드려? 죽고 싶나……
됐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휴…… 스파키가 괴롭힘을 당했다니까 술맛이 떨어지네.
하하하, 그 정도라고요?
스파키, 이거 받아.
네? 뭔데요?
부기 빠지는 연고야. 저녁에 세수하고 나서 부은 곳에 바르면 돼.
이야, 그런 좋은 물건을 왜 난 안 줘?
이건 염국 물건이야! 엄청 비싼 거라고. 피부도 거친 놈이 이런 걸 뭐 하러 발라?
아…… 엄청 귀한 물건이네요.
받아. 술집 점원인데 얼굴이 계속 부어있으면 안 되잖아.
하하하…… 사실 여긴 술집이 아닌데요……
빈 씨,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 술은 돈 안 받을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수지, 정말 떠날 거니?
응, 엄마…… 여기 계속 있으면 모두에게 좋을 게 없어.
아니야, 수지. 엄마 말 좀 들어보렴…… 엄마가 이번 달에 또 일자리를 찾았어. 약은 다시 방법을 찾아보자!
이러지 마…… 난 더 이상 가족을 힘들게 하기 싫어. 동생들은 학교도 가야 되고, 오빠들도 아직 건강하잖아.
어떻게 내 딸 혼자 다른 도시로 보내니!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봤는데 감염자가 칼라돈에서 일하면 급여 일부분을 약으로 준대.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하다, 수지…… 엄마가 미안해.
내 몸은 내가 잘 챙길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엄마……
1097년 11월 18일 9:20 A.M.
꿈에 가끔 가족들이 나온다.
나는 빅토리아 북부 국경에 있는 작은 도시인 보쉔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아빠가 살아계셨을 때는 가족끼리 소풍을 자주 갔었다.
셰이산 산마루에 올라서면 드넓은 카시미어 평원을 볼 수 있다.
집에 못 간 지 5년이나 됐지만, 엄마는 아직도 내게 편지를 보내주시곤 한다.
내가 떠난 뒤로 집안 형편이 좀 나아졌다. 엄마와 오빠들 수입으로는 감염자 한 명에게 드는 추가 비용을 감당하긴 어려웠으니까.
가족들이 잘 지내면 그걸로 충분하다.
어서 오세요!
나야!
앗? 점장님!
수~ 지~
네 귀 좀 만지자!
하하하…… 점장님…… 간지러워요.
또 점장님이라고 부르네? 우리 사이가 이거밖에 안돼?
헤헤헷…… 퀘르쿠스 씨.
뭐?
퀘르쿠스 언니……
그렇지!
퀘르쿠스 언니는 아주 독립적인 사람인데, 이 가게의 점장이기도 하다.
다들 여길 술집으로 알지만, 사실 이 가게는 퀘르쿠스 언니의 화초 전등 공예 가게다.
많은 사람이 왜 감염자 지역에 화초 전등 공예 가게를 열었냐고 묻는다.
그럴 때면 퀘르쿠스 언니는 언제나 아주 간단명료하게 대답한다.
왜 화초 전등 공예 가게를 열었냐고요?
제가 좋아하니까요.
말은 그렇게 해도 퀘르쿠스 언니는 칼라돈 시에 없을 때가 더 많다.
퀘르쿠스 언니는 재미로 가게를 연 것 같다. 말 그대로 '좋아'해서다. 언니의 원래 직업은 전달자여서 늘 황무지를 바쁘게 뛰어다녔다. 사람들은 늘 언니를 '고도딘의 드루이드'라고 불렀다.
참고로 퀘르쿠스 언니의 오리지늄 아츠는 매우 독특하다. 가게에 이상한 식물도 많이 심고, 여기서 파는 술도 대부분 퀘르쿠스 언니가 직접 만든 거다.
나의 이 지팡이와 부표도 퀘르쿠스 언니가 선물로 준 거다. 그래야 내 오리지늄 아츠를 통제할 수 있다면서……
퀘르쿠스 언니, 이번에는 무슨 일로 돌아왔어요?
일 없으면 너 보러 돌아와도 안 돼?
하하하……
일이 있기도 하고 전에 네가 한 말 잊었어? 곧 연말이잖아!
아, 그렇네요……
올해는 내게 가장 중요한 해다.
요 몇 년간 돈을 좀 모았는데, 내 목표는 이 가게를 사는 거다.
칼라돈에 내 가게를 갖고 싶다. 뭘 하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작이 될 테니까.
퀘르쿠스 언니 말로는 마침 가게 주인이 가게를 팔 생각이라고 했다. 또한 퀘르쿠스 언니도 가게를 돌볼 시간이 별로 없다.
정말 돈을 그렇게 많이 모은 거야? 대단한데, 수지!
그런데 퀘르쿠스 언니…… 정말 괜찮을까요? 가게 가격이 너무 저렴한 것 같은데요……
벌써 몇 번째 묻는 거야? 날 못 믿어?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전 퀘르쿠스 언니를 믿어요.
다음 주에 약속 잡을 테니까, 가게 주인이랑 둘이 얘기해 봐. 믿을만한 사람이야.
다음 주요?……
1097년 11월 18일 9:56 P.M.
여기요, 마운트벨란 씨께서 주문하신 차 나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에델플래드 줄리 마운트벨란 아가씨, 우리는 그녀를 모두 마운트벨란 씨라고 부른다. 그녀도 가게의 단골이다.
마운트벨란 씨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전문가 중 한 명으로, 감염자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 방안을 시의회에 제안하는 일을 맡았다.
비터 루트 씨처럼 이곳의 단골들도 그녀와 친해졌다.
마운트벨란은 매우 유명한 가문인데, 지금 그 마운트벨란 가문의 아가씨가 감염자 지역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표정을 보아하니 오늘은 또 무슨 일로 귀족들이 널 열받게 한 거야?
마운트벨란 씨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입가가 움찔거리고 이마에는 핏줄까지 튀어나왔다.
이게 말이 돼요? 말이나 되냐고요!
제가 2주 동안 힘들게 준비한 자료를 그 사람들은 딱 한 페이지만 보더라니까요!
한 페이지!!
아무리 무식해도 정도가 있어야죠! 제 제안은 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긴급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데, 진짜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걸까요?
아직 본인들한테까지 불길이 안 번졌으니 당연히 관심 없겠지.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언젠가 불길이 번질 겁니다.
예전에 고도딘에서 리유니온이 소란 피운 일로도 정신 못 차린 걸까요?
고도딘의 리유니온은 2년 전에 섬멸됐잖아. 그러니 귀족들에겐 문제가 안 되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고요! 그 사람들은 이번 일의 핵심을 전혀 모르고 있어요! 리유니온이 악당이나 도적도 아닌데, 고작……
가게가 갑자기 엄청 더워진 것 같지 않아?
진짜 그렇네.
또 그런다. 진정해, 그러다 가게 다 타겠어.
하아…… 됐어요.
하하하, 마운트벨란 씨, 화 좀 삭이세요.
퇴근했으니까 쉴 때는 즐거운 일만 생각해야죠.
자,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이건…… 사탕?
네, 퀘르쿠스 언니가 직접 만든 바닐라 박하사탕이에요. 화가 날 때 하나씩 드세요.
하아…… 고마워요.
몇 달 전에는 시에스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거기가 좀 그립네요.
수고하셨어요, 마운트벨란 씨.
제 불평을 들어줄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로도스 아일랜드에서는 불평하면 안 되나요?
다들 일하느라 힘드니까요…… 직장에서 불평하면 사기에도 영향을 주게 되죠.
괜찮아, 우린 투박한 사람들이라 마운트벨란 씨가 한 말은 듣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거든.
그래서 귀족들은 결국 어떤 결론을 내렸어?
회의하다가 도시 전설 얘기가 나와서 그걸로 싸우더군요.
그 '도시 지하에서 울려 퍼지는 기이한 소리'나 '감염자 지역에 숨은 도적' 같은 거?
그걸 다 우리 감염자 탓으로 돌렸다고?
그렇다니까요, 다 근거도 없는 음모인데 대체 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퍼뜨리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싸움이 되어버렸죠.
그런데 감염자 지역을 지지하는 귀족도 많다던데?
감염자 지역에서 많은 문제를 해결했으니까. 최근 몇 년간 돈을 꽤 번 귀족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더 감염자 지역을 지지할 거야. 실제로 이익을 얻으니까.
게다가 감염자 지역은 더는 감염자만의 문제가 아니야. 지금은 여기서 일하는 비감염자도 많으니까, 그렇지?
그건 맞아, 나처럼 말이지.
맞아요, 도리는 그게 맞는데…… 오늘 여기서 시간 보낸다고 바뀌는 건 없겠죠. 내일 다른 일도 있으니까, 이만 가볼게요.
조심히 가.
근데 말이 나와서 말인데……
짐스 씨는 왜 감염자 지역에서 일하는 거야? 내가 이런 말을 하긴 좀 웃기지만, 감염자와 일하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잖아.
위험이라…… 하아……
솔직히 위험은 아직 알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집안 생활비 문제는 지금 바로 눈앞에 놓여있지.
최악의 상황으로 말하자면, 내가 광석병에 걸린다 해도 우리 가족은 내가 돈을 못 벌 때보다 잘 지낼 수 있어.
집에 키워야 할 아이도 둘인데 아내한테만 의지하고 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내가 머플러 파는 돈만으로는 살 수가 없거든.
우리 어머니는 천식을 앓아서 매달 꽤 많은 돈이 들어가고, 아버지는 골다공증이 심해서 걷지도 못하셔.
어쩔 수 없어. 내가 다른 일을 찾을 수만 있다면……
……휴, 나보다도 힘들게 살고 있는 것 같구나.
……
스톤,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해? 무슨 일 있어?
흠…… 짐스 씨 애들은 올해 몇 살이야?
한 명은 8살이고, 한 명은 12살이야.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다들 잘 아는 사이잖아.
스톤 오빠, 곤란한 일이라도 생겼어요?
……곤란한 일이라…… 하아.
내…… 아내가 편지를 보냈는데, 딸이랑 같이 날 보러 오겠대.
딸?? 너 딸이 있었어?!
네? 스톤 오빠 결혼했어요?
왜! 내가 결혼한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그런 뜻이 아니라, 감염자 자식은……
아, 그건 걱정할 거 없어. 나는 나중에 광석병에 감염된 거거든. 딸이랑 아내는 아주 건강해.
그럼 다행이네! 근데 왜 그렇게 죽상이야?
그러게, 광석병에 걸렸는데도 버리지 않는 아내라니, 얼마나 좋은 여자야?
하아, 지금 이 꼴로 두 사람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 모습이 어때서요?
그러니까. 넌 왜 자신을 얕보고 그래?
지금 모습으로 아내를 만나는 건 확실히 좀 이상하겠네.
적어도 이발은 하지? 머리가 산발인 모습은 좀 아닌 것 같아.
좋아요! 이발 얘기가 나왔으니……
(가위와 빗을 꺼낸다)
스파키, 이발도 할 줄 알아?
수지 얕보지 말아! 얼마나 솜씨가 좋다고.
짜자자잔!
훨씬 낫네.
머리를 이렇게 짧게 자른 적이 거의 없어서 목덜미가 썰렁하네……
허, 훨씬 깔끔해 보이네.
스톤 오빠, 평소에도 헤어스타일에 조금만 신경 쓰면 훨씬 멋있어 보일 거예요.
하아, 사는 게 요 모양인데 헤어스타일에 신경 쓸 기분이 들겠어?
아니죠!
사는 게 힘드니까 더 잘 살아갈 방법을 생각해야죠.
맞아, 감염자라고 다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고 정해진 건 아니잖아.
기운 내, 아내분도 지금의 널 본다면 분명 기뻐할 거야.
잠깐만, 일단 내 숙소로 좀 와.
깨끗한 옷이 있는데 난 입을 일도 없거든. 가져가서 세탁한 다음 맞는지 입어 봐.
아니…… 그건 좀 아니지.
우리 사이에 무슨 예의를 차리고 그래!
자자자! 술이나 마시자고!
1097년 11월 23일 10:35 A.M.
오늘이 약속한 날이다.
가게 주인과 만나기로 한 날 말이다.
내 앞에 두툼한 돈뭉치가 놓여 있다.
6천 5백 파운드,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액수다.
어렸을 때, 남동생이 실수로 집에 있는 오리지늄 등을 깨서 엄마한테 엉덩이가 부을 때까지 맞은 적이 있다.
그날 난 엄마가 그렇게 화내시는 모습을 처음 봤다…… 오리지늄 등은 엄마가 야간에 광산 갱도를 순찰할 때 꼭 필요한 도구였다.
엄마를 머리끝까지 화나게 한 비싼 오리지늄 등은 150파운드였다. 그때 당시 엄마의 한 달 수입과 맞먹는 돈이었다.
6천 5백 파운드면 오리지늄 등을 몇 개나 살 수 있을까?
난 이 독특한 냄새가 나는 '무거운 책임감'을 다시 세어보았다.
요 몇 년 동안 아껴 먹고 아껴 입으며 온갖 고생을 다 해 모은 돈이다.
6천 5백 파운드.
내 눈에 이 얇은 종잇조각들은 내가 한땀 한땀 쌓아 올린 다리이다. 다리 건너편에는 내 꿈이 있다.
수지! 정신 차려!
그저 가게 주인 만나는 거야! 그것뿐이라고!
내일부터 네가 점장이야. 네 꿈이 곧 이루어질 거라고!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았어! 수지!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힘차게 두 볼을 때렸다.
이따 가게 주인한테 어떻게 인사해야 하지?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서 반갑……”
하아, 미소가 너무 어색하잖아.
곧 꿈이 이루어지게 됐는데도 나는 마냥 신이 나지는 않았다. 도리어 잠시 후 가게로 들어올 사람과의 만남이 더 두려워졌다.
가게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감염자가 아닐까? 나한테 가게를 팔려고 할까?
가격이 너무 저렴한데 사기는 아닐까?
다른 사람처럼 날 비웃고 모욕 주기 위해 오는 건 아닐까?
퀘, 퀘르쿠스 언니도 감염자가 아닌데…… 혹시 그들 둘이 미리 짜고 날……
으앗!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힘껏 내 뺨을 한 대 쳤다.
통증으로 몰염치하고 비열한 생각을 덮어보려 했다.
이러지 마! 수지! 이건 너무 못된 생각이야.
나는 거울을 응시했고, 조용한 가게에는 '째깍째깍' 시계 소리만 울려 퍼졌다.
초조한 시간이었다.
수지! 여기 있어?
뜨아앗!!
오리지늄 아츠 조심해야지!
왜 그렇게 깜짝깜짝 놀라는 거야?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요! 좋은 아침이에요, 퀘르쿠스 씨.
(의심의 눈초리)
다크서클이 왜 이렇게 진해졌어?
잠 못 잤어?
하하하…… 조금 긴장돼서요.
안녕하세요, 수지 씨.
앗! 비터 루트 씨! 아까 못 봤어요……
어라? 지금 몇 시죠?
아, 죄송해요, 비터 루트 씨. 오늘은 쉬는 날인데 무슨 일 있으세요?
퀘르쿠스, 수지 씨한테 아직 얘기 안 했어?
응, 아직 얘기 안 했어.
?
비터 루트가 바로 이 가게의 주인이야.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
네?
뭐라고요???
비터 루트 씨가 주인이라고요?? 그럼 이전 점장님들은 모두 비터 루트 씨와 계약했던 거예요??
그건 말이지, 말하자면 긴데…… 아무튼 이 가게는 사실 로도스 아일랜드의 자산이야.
구체적인 상황은 퀘르쿠스한테 들었어. 수지 씨가 이 가게를 사고 싶다면서?
실례지만, 앞으로는 어떤 업무를 진행할 계획이지?
업무요?
아! 일 말이죠?
……
저…… 저의 아빠는 이발사셨어요.
어렸을 때 늘 그러셨죠…… 삶이 팍팍하다고 생활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 안 된다고요.
머리를 자르는 건 사소한 일 같지만, 자신을 꾸미려는 사람은 분명 여전히 삶을 믿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전……
감염자 지역에 헤어숍을 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헤어숍이라…… 감염자들의 머리를 잘라주는 건가?
좋은 생각 같네.
그럼 그렇게 하자! 이따 계약서 작성할 사람이 올 거야.
네? 이렇게 끝이라고요?
우리는 잘 아는 사이잖아, 안 그래? 수지 씨라면 문제없어.
제 가게라니…… 꼭…… 꿈만 같아요.
그럼 퀘르쿠스 씨는 이제 어디로 가실 거예요? 이곳을 떠나실 건가요?
하아,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지 마. 안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가끔 돌아올 거야. 이 도시에는 내 친구도 많으니까.
아,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수지 씨, 퀘르쿠스가 너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
선물요?
가자, 수지. 다들 기다리고 있어.
축하해!
어머, 축하해, 수지!
그라니 씨! 어떻게 여기 계세요?
우와! 스파키가 점장이 됐다! 우리가 좋아하는 술 많이 들여야 해!
축하해, 수지.
레드 씨! 지금 근무 시간 아닌가요?
휴가 냈어, 스파키가 점장이 되는 중요한 날인데 빠질 수 없잖아.
내 말이, 요 몇 년간 난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왔어. 우리 집보다 가게가 더 편해질 판이라고.
그러다 아내한테 한 대 맞겠어, 조심해.
그럼, 수지 점장님, 가게 잘 부탁해!
……
흑……
어머, 왜 울고 그래? 울지 마!
그러게, 뭘 울어?
요즘 다들 살기 힘들었는데, 모처럼 좋은 일이 생겼잖아. 안 그래?
기뻐해야지!!
아무튼 앞으로 가게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난 자주 올 거야.
하하하…… 이게 바로 그 뭐라더라? 감동의 눈물인가?
(흐느끼며) 퀘르쿠스 씨…… 전……
아이참, 울지 말라니까……
꿈……
감염자에게 꿈은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곳의 이야기다.
내 꿈은 나만의 가게를 갖고, 내 생활을 하는 거다.
더는 가족의 짐이 되지 않는 거다.
그리고 지금, 내 꿈이 이뤄지기 직전이다. 감염자에게 이건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다.
난 운이 좋은 사람일까?
1097년 11월 24일 6:35 A.M.
연기……
연기가 감염자 지역 한쪽을 뒤덮었고, 큰불이 평화로운 아침을 깨트렸다.
일단 집 안에 있는 사람부터 대피시켜!
거기, 구경은 그만! 볼게 뭐가 있다고!
여기, 여기! 아직 불이 다 안 꺼졌어!
사상자는 없는지 다시 확인해 봐, 여긴 감염자 지역이잖아!
잔여 오리지늄이랑 파손된 가전제품 같은 것도 확인해!
절대 활성 분진이 누출해서는 안 돼!
진짜 *욕설*, 빌어먹겠네. 이런 곳에 불을 지르는 놈이 다 있다니!
왜……
다른 사람들 먼저 대피시켜! 거기, 필라인! 뭐 하는 거야!
연기……
연기와 타는 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하다.
불타오르는 가죽과 목재가 남은 고온 속에 폭발한다.
지금 어딜 들어가는 거야! 죽고 싶어?
저 사람 붙잡아!
왜……
소녀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고, 두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이건 꿈이다.
이건 분명 악몽이다.
눈을 다시 뜨면 악몽에서 깨어날 거다.
그렇다, 눈을 다시 뜨면 익숙한 천장이 보이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거다. 그리고 가게도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소녀 눈앞에는 뜨거운 불길에 삼켜진 폐허만 남아있다.
'그린 스파크'라 쓰인 간판은 까맣게 타버린 조각만 남았고, 벽과 지붕은 고온에 녹아버렸다.
소녀의 눈앞에 있는 건 과거의 꿈이자 희망이고 미래의 삶이다.
그 모든 것이 폐허 속에 묻혀버렸다.
대체 왜……?
힘든 일을 겪어도 필라인 소녀를 지탱해 주던 의지는 이제 더는 그녀의 가녀린 몸을 지탱할 수 없다.
소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여전히 뜨거운 불기운이 소녀의 손과 발에 화상을 입혔고, 깨진 조각이 그녀의 피부를 찔렀다.
절망적인 폐허 속에 한 감염자는 모든 것을 잃었다.
불빛은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