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의 조우
지마는 악몽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늘 이런 꿈을 꾼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계속 이런 꿈을 꿀 것이다.
아침, 나는 평소와 같이 내 방에서 나왔다.
소냐, 세수 다 했니? 이도 닦았고?
엄만 내가 아직도 어린 애인 줄 알아?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식탁에 앉아 조금만 기다리면, 따끈따끈한 아침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아침은 보통 죽과 빵, 그리고 햄이다. 엄마는 최근 다이어트를 한다며 살이 덜 찌는 오트밀로 죽을 쒀서 먹곤 한다.
난 딱히 무슨 죽을 먹어도 상관은 없다.
아빠는 언제나 그랬듯 경제, 정치, 국가와 같이 따분한 것들만 적힌 신문을 본다. 대체 저런 게 뭐가 재밌다고 보는 걸까.
저기에는 왜 내가 세운 업적이 실리지 않는 걸까?
소냐, 요즘 학교는 어떠냐?
또다.
매일 이 시간과 저녁을 먹을 때만 형식적으로 보여주는 관심. 정말 질리지도 않나? 아니면, 사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걸까?
……뭐 그럭저럭.
너도 7학년 씩이나 됐으면, 이젠 좀 얌전히 다녀라.
왜? 난 이제 겨우 7학년일 뿐인데.
그리고, 9학년 졸업하고 나면 뭘 할지 생각은 해 봤고?
……아직.
9학년을 졸업하고 나면 나는 계속 공부를 할지, 아니면 기술 학교로 갈지 결정해야 한다.
아빠는 내가 기술 학교에 가기를 바란다. 아빠는 이제 분명 이렇게 말하겠지.
그럼 고민하지 말고 그냥……
딸 앞에서 뭘 그렇게 무게 잡고 있어? 당신 일은?
마침 부엌에서 아침을 들고 나온 엄마가 아빠의 말을 끊었다.
……오늘 면접이 하나 있어.
실직한 이후로 아빠는 엄마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물론, 예전에도 비슷하기는 했지만.
표트르, 당신도 그렇게 체면 세우는 것 좀 고치라니까.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줄 알아?
알아. 노력 중이야, 안나.
사실, 아빠보단 엄마가 내 공부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있다. 엄마는 내가 졸업하고 난 뒤에도 계속 공부하길 바란다. 심지어 내 학업을 위해 저금까지 해놨다는 모양이다.
엄마는 늘 자기 때는 9학년까지 무상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 얘기를 할 때마다, 자신은 그나마 어느 귀족의 하녀로 일할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했었다.
여학교를 졸업했다는 것만으로, 엄마는 이런 불경기에 썩 나쁘지 않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나도 가끔은, 엄마가 원하는 좋은 아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자, 소냐. 얼른 밥 먹어. 또 지각하겠다.
나도 알아, 엄마.
아침을 먹으려고 고개를 숙이자, 그릇 바닥이 보일 정도로 죽이 조금밖에 없는 죽 그릇과, 원래 크기에 절반도 되지 않는 빵, 그리고 이상하게 뒤틀린 햄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이 이상한 것들은……
……엄마,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맨날 먹던 아침이잖아?
우리가 언제 이런 걸 맨날 먹었어?
잊었어?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갑자기 식탁 근처에 나타났다.
누구야, 왜 나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너다.
나라고? 웃기지 마. 그럼 나는 누군데?
너는 소냐지.
무슨 헛소리야.
나와 똑같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엄마와 아빠는 이상하리만치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소냐, 왜 그러고 있어? 얼른 먹어야지.
아, 알겠다. 이건 분명 악몽이야. 이러면 말이 되지. 하…… 난 꿈에서 더 무서운 것도 만나봤다고. 이번엔 그냥 기분 나쁜 음식이 나왔을 뿐이야.
아니, 그건 네가 만화나 게임에서 봤던 망상에 불과해.
예전에 넌 엄청난 힘을 가진 것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고 생각했지.
강철, 거대한 괴수, 아버지의 손…… 그런 폭력적인 것들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게 뭐 어때서? 너도 내 꿈일 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네 손에 든 음식을 잘 봐.
뭐라고……?!
그건 죽이 아니었다. 그저 쌀과 물, 그리고 잡초가 섞여 있는 무언가였다. 엄마가 만든 거랑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빵은…… 빵이긴 했지만 악취가 풍겼다. 아무래도 며칠 안 좋은 곳에 보관되었던 모양이다.
근데…… 난 대체 이 사실을 왜 알고 있는 거지?
햄은 마치 큰 고깃덩이에서 억지로 뜯어낸 것 같다. 그리고…… 비린내가…… 잠깐…… 이건…… 핏자국?
……윽.
이건 악몽일 뿐이야!
하지만 네가 꿔본 적 없는 꿈이지. 그리고 너무 사실적이잖아? 마치……
또 다른 나는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선생님은, 비웃음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에서 쾌락을 얻는 행위라고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저 녀석은 별로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어쨌든, 저 입을 막아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먹는 게 좀 엉망일 뿐이지만, 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잖아?
저 입을 막아야 한다. 조금 있으면 학교도 가야 한다고!
닥쳐!
물론, 나는 입을 막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 바로 주먹을 쓰면……!
정말 먹어본 적 있는 것 처럼 말하네?
나는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한 템포 늦어버렸다.
내 주먹은 그 녀석이 아니라 앞 사람의 얼굴에 제대로 꽂혀 들어갔다.
그런데도, 난 되려 뼈가 상대의 얼굴에 닿는 촉감에 안심이 됐다.
크악!!
너, 너무 세…… 열댓 명 정도면 해치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혼자서 전부 다……
겁쟁이들 주제에 남들 괴롭히기나 하고 말이야, 깔라면 연습이나 더 하고 와 이 *우르수스 욕설* 들아!
쳇, 가자. 동장군! 이대로 끝날 거라 생각하지 마라!
솔직히, '동장군'이라는 별명은 썩 마음에 든다.
뭐, 멋있으니까.
하지만 이놈들은 내가 낮잠을 잘 때면 늘 귀찮게 군다. 설마 내가 오후 수업은 대부분 땡땡이친다는 걸 모르나?
어…… 고마워. 동장군.
응? 아직 있었네? 내가 도망가라 하지 않았어?
이번에는 고맙단 얘길 해주고 싶었어.
이번에는?
저기, 혹시 나 모르니? 나는 발레리아라고 해. 지난번에도 도와줬잖아.
아, 그러고 보니 저 아이 머리에 있는 노란색 리본, 확실히 본 기억이 있다.
지난주였나, 지난달이었나? 어쨌든 도와준 적이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리고 내 친구들도 도와줬잖아. 우리 모두 너를 엄청 동경하고 있는걸.
그녀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역시 폼은 잡아야지.
쪽수만 믿고 남 괴롭히는 놈들이 꼴 보기 싫어서 그랬을 뿐이야.
너도 용기를 내. 용기만 있다면, 그놈들은 분명 놀라서 달아날 테니까.
응…… 그러게, 나도 용기 내볼게.
그래, 이제 가봐.
응. 고마워!
발레리아는 내게 감사 인사를 하곤, 어디론가 뛰어갔다.
응?
교실에 있는 책상과 의자, 칠판이 많이 더러워진 것 같다. 내 착각인가? 아니면 교실이 원래 이랬나?
됐어, 신경 쓰지 말고 낮잠이나 자자.
나는 의자 4개를 붙이고 그 위에 누웠다.
뭐지?
등 뒤에 뭔가 깔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뻗어 확인해보니, 노란 리본이 손에 집혔다.
확실히 눈에 익은 리본이었지만 매우 더러웠다. 심지어 한쪽은 아예 끊어져 있었다.
뭐야?!
그리고 리본의 뒤에는 찐득한… 검은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마치……
핏자국 같았다.
……케첩이겠지.
나는 리본을 다른 데 던져버리고, 계속 낮잠을 자기로 했다.
잠이 들려고 할 때, 어디선가 나 자신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중에 너는 학교의 어느 교실에서 이 리본을 발견하게 되지.
너도 사실 알고 있잖아. 그 애는 이미 죽었단 걸.
갑자기 교실 문이 열리고, 난 잠에서 깨어났다.
안경을 쓴 소녀가 책을 들고 서 있었다. 교복을 보니 우리 학교 것이 아니었다.
저기, 여기에 또 다른 사람이 있나요?
여긴 내 구역이야. 다른 사람은 안 받아.
미안해요. 친구들과 함께 숨을 곳이 필요해서……
어라, 당신은…… 소냐 아닌가요?
너는…… 안나?
안나는 전에 옆집에 살았지만, 이사를 간 뒤로 벌써 몇 년간 만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다른 교실로 가.
안나는 예의가 바르다. 우리의 관계도 나쁘지는 않았기에,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첫 번째 화재가 발생한 이후,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는 점점 더 흉흉해지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이런 일이 벌써 세 번째다.
소냐, 곤란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안나, 고작 한 명이잖아. 쫓아내 버리자.
하…… 그래, 이렇게 나와줘야지. 또 몸 좀 쓰게 생겼네.
그러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하고 다를 게 없잖아요? 안 됩니다.
……안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아참, 저기… 우리 쪽의 라다가 요리를 잘하거든? 보답으로 맛있는 걸 해줄게. 어때?
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벌써 며칠째 건빵과 통조림만 먹다 보니, 나도 솔직히 질린 참이었다.
좋아. 여기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하지만 조심해. 난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잠시만…… 혹시 그 '동장군'?!
우리 학교 사람들도 다 알아. 공립 고등학교에선 당해낼 사람이 없다면서?
설마, 그럼 우리 망한 거잖아……
나는 이렇게 치켜세워 주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안나처럼 착한 아이가 이런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하는 순간이다.
고마워요, 소냐. 방해하지 않을게요.
……쳇, 안 놀라네? 재미없게.
어쨌든 난 안나와 그 일행은 교실로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남자 몇에 여자 몇,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고, 머리도 다들 헝클어져 있었다. 딱 봐도 제대로 쉬지 못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뒤에 들어온 녀석들은……
뭐지?!
뒤에 따라 들어온 건… 뭐야?! 걸어 다니는 교복?!!
게다가 마지막으로 들어온 녀석은,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걸어 다니는 교복이라니. 자기방어가 너무 강한 거 아니야?
뭐라고? 아니, 넌 누구야!
난 너야. 그리고 이건 네 꿈이지. 이 멍청아.
어? 어… 그런가.
맞는 말이다. 이렇게 이상한 일이라니, 분명 꿈일 것이다…… 근데, 내가 왜 나한테 욕을 먹어야 하지?!
확실히 머리 없는 좀비보다야 이게 더 낫긴 하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머리 없는 좀비라니?
왜냐면 나중에 얘넬 처리하는 게 너니까.
처리라고? 내가 왜 그런 짓을 하는데?
쟤들이 널 습격할 거거든. 그렇지, 이스티나?
어쩔 수 없었어요. 저들이 먼저 손을 썼으니까.
응. 난 이유만 있다면 폭력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은 없어서 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난 항상 내가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거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조금 이상했다. 또 다른 나는 내가 이름만 알 정도로 잘 알지는 못하는 사람과 익숙하다는 듯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내 꿈속의 인물일 뿐이어야 하지 않나?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니, 난 이제 깨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또 다른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 움직이는 교복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 얼굴들은 웃는 것 같아 보이지만 웃고 있진 않았다.
그녀들은 곧 나를 둘러쌌다.
너는 우리의 리더야. 그러니까 여기 남아 우리를 이끌어야 해.
나는 또 다른 나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또 다른 나는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다.
허억……
난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늦은 밤이었고, 난 여전히 교실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안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문에 기대 다시 한 번 잠을 청했다.
다른 문은 내가 책상으로 막아 두었다. 창문도 전부 막아놓았다. 내가 기대고 있는 문을 제외하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나는 이들의 리더다. 그러니 내가 모두를 보호해야 한다.
소냐, 잠이 안 오나요?
멀지 않은 곳에서 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나 일행과 함께한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중간에 언짢은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안나는 나의 편이 되어 주었다.
어, 악몽을 꿨어.
……자책하지 말아요.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악몽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안나는 내가 꿈에서 그 녀석들을 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안나는 그 일에 대해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자신이 믿고 있던 친구들이 나를 습격한 이유가, 자신이 나를 새로운 리더로 추천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그 녀석들은 모두 내가 처리했다.
내가 보았던 수많은 자치단의 끝은 전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됐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치단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사소한 인간관계를 신경 쓰는 것보다, 주먹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걱정 마.
바스락대며 일어난 안나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건 안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지금 가장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안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 화제를 바꿨다.
안나, 전에 반장이었어?
아니요.
근데 사람들을 왜 이렇게 많이 데리고 다니는 거야?
데리고 다닌다는 말은 조금 어색해군요, 사실 라다가 계속 격려해주고 있고, 그리고 저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하하, 그러긴 해야 할 것 같네.
웃지 마세요.
전에…… 반에 왕따가 있었어요.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저는 그저 외면할 뿐이었죠.
한 방 먹여줬어야지. 너 사실 꽤 하잖아?
그렇다. 겉보기에는 얌전하지만, 안나의 솜씨는 나쁘지 않았다. 단지 그 솜씨를 선보이지 않을 뿐.
저도 당신 같은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저는 남에게 쓴소리를 할 용기가 부족해서……
아무래도 더 기가 죽은 모양이다. 쳇, 달래는 건 잘 못 하는데… 대체 뭐라고 해야 기운이 날까?
……저, 적어도 지금은 딛고 일어섰잖아.
나 방금 혀 꼬이지 않았나?!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적어도 저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뭐가 잘못됐는데?
지금 이 상황이요.
이 학교에 갇힌 지 벌써 여드레나 지났어요. 모든 것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을 뿐이죠.
처음에 일어났던 그 화재 때문이야. 그때 불만 나지 않았더라면……
불길이 식량고 하나를 태워버린 후, 제4고등학교의 귀족 학생들로 이루어진 무리는 다른 식량고를 점거하고 주변 일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선, 평민 학생들 사이에서도 서로 식량을 뺏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학교는 이미 싸움과 낙서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한밤중에도 다른 곳에선 울음소리와 고함과 비명이 울러 퍼졌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조만간 또 화재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왜? 누가 일부러 불을 지르기라도 한다는 거야?
아뇨.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생각 좀 해볼게요.
음, 그러니까… 그 화재가 몰고 오는 안 좋은 결과가 곧 나타날 것 같다는 말입니다.
더 못 알아듣겠는데.
만약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분명 비슷한 일이 일어나 우리는 지금처럼 겁에 질려있었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불은 분명 나쁜 놈들이 지른 거잖아. 그 나쁜 놈들만 없었으면……
나쁜 사람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
나는 안나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라는 말을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문명사회에서 질서와 도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우리를, 왜 악한 존재라고 하는 걸까요? 그때는 그 전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모두가 질서를 지키도록 하기 위해 용기를 냈었죠.
하지만 모든 것이 엉망으로 변해버렸고,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질서를 지키지도 못했고, 다른 사람들을 돕지도 못했어요. 만약 당신이 없었다면, 아마 친구들에게 살해당했겠죠……
전… 정말 쓸모가 없네요.
안나의 목소리에서 흐느낌이 느껴졌다.
으아아아아!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아 몰라! 사회니, 도덕이니, 질서니,이젠 다 모르겠어! 하지만 안나가 하고 싶은 말은 알겠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게 두는 편이 낫겠지.
그러니까, 너는 모두가 나쁜 짓을 할 거라 생각하는 거지? 나도 그렇고?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안나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하… 아무래도 내 질문에 말문이 막힌 건가.
나는 싸움은 좀 많이 해도, 절대 약자를 괴롭히지는 않는데!
알았어. 진정해. 내가 도와줄게.
……도와줄 건가요?
난 너희들의 리더야. 네가 좋은 일을 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도와야지.
……고마워요, 소냐.
그래, 리더가 바뀌면 자치단에도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겠지. 생각해둔 거 있어?
……'우르수스 학생자치단'으로 하죠.
그래…… 모범생의 작명 센스에 큰 기대를 걸면 안 되겠지.
뭐, 가끔은 이런 소박한 이름도 나쁘지 않은 것 같네.
좋아. 그러면 지금부터 우리는 '우르수스 학생자치단'이야. 내가 리더, 너는 참모를 해.
……네.
안심하는 것 같은 안나의 목소리에, 그때 넌 꽤 기뻐했었지.
왜냐면 뭔가를 지켜냈다고 생각했으니까. 신뢰를 받았으니 진정한 리더가 됐다고 생각했어. 무슨 소설 속 영웅처럼 말이야.
넌 누구야?
눈은 장식이냐? 나는 너야.
그래. 저 녀석은 확실히 나랑 똑같이 생겼다…… 그런데 왜 내가 나 자신한테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저 말들은 확실히 내가 속으로 생각했던 것들이긴 하지만,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근데 매번 이날 밤을 떠올릴 때면, 나 자신이 너무 웃기더라고.
잘못한 건 너일까? 아니면 나일까?
난 모르겠어. 너한테 물어볼 용기도 없고.
……
네가 틀렸다고 말할까봐 무서워.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도 무섭고.
……
문득, 난 내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 위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난, 추락하기 시작했다.
추락하는 도중, 어떤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안나, 잘 생각해봐. 소냐 혼자서는 우리 모두를 지킬 수 없어!
저쪽에 합류하는 수밖에 없다고.
비카, 소냐는 귀족을 싫어해요.
그렇다고 우리 모두의 안전을 소냐한테 걸겠다는 거야?!
저는……
그리고, 나는 어둠 속에 삼켜졌다.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린 나는 가볍게 착지했다.
정문으로 가면 놈들한테 들켜버릴 테니, 다른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나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일을 하려고 한다.
안나의 말이 이해되긴 하지만, 비카의 말도 일리는 있다. 나 혼자선 그렇게 많은 귀족들을 상대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면으로 붙었을 때 일……
늦은 밤이라면 분명 모두 잠이 들었을 테니, 이 틈을 타 기습하면 전부 처리할 수 있겠지.
좋아. 전부 처리하는 건 조금 너무하니까, 놈들의 리더를 먼저 잡도록 하자. 최악의 경우엔 처리해버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부탁이야, 한 번만 봐줘!
살려줘!!
식량 숨긴 거 전부 내놔!
우리한테도 남은 식량은 없어…… 저, 정말로 없다고!
목숨만 살려줘! 제발……
……저들을 구할 생각은 없다.
딱히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이제는 별로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
저런 일은 요즘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몇 명 구해온 바람에, 이제 교실에 있는 학생들은 안나가 사람들을 데려왔을 때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래서 안나는 비카의 제안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나는 내가 귀족을 싫어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사실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귀족을 싫어하는 것은 안나라는 걸.
첫 번째 식량고가 사라진 뒤 귀족들은 남아있는 또 다른 식량고를 점령해버렸고, 다른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남은 식량을 서로 빼앗아댔다. 그건 안나가 제일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안나는 귀족들과 함께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안나를 막을 수 없다. 그러니…… 아예 그 고민의 근원을 없애버리자.
난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다른 학생들의 절규를 무시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응? 저 나무…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대체 누가 나무를 베어 버린 거야. 헉……?!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고개를 숙여 보니, 바닥엔 부러진 표지판이 나뒹굴고 있었다. 표지판에 적혀 있는 글씨는 이미 낙서에 덮여서 알아볼 수 없었다.
쳇.
여기에 갇힌 지 열흘 남짓의 시간이 지났지만, 학교의 풍경은 벌써 몇 년이 지난 것처럼 황량했다.
군데군데 부서진 벽, 알아볼 수 없는 낙서, 쓰레기, 핏자국……
솔직히, 언제 끝날지 모를 이런 나날들에 이젠 진절머리가 난다.
난 고개를 가로젓곤,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귀족들의 본거지는 바로 이곳, 마지막 남은 식량고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았다.
넌 누구야?
나는 너야.
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제 넌 이 창고로 들어가겠지.
너는 바로 리더를 찾으려 했지만 잠입에 능숙한 편은 아니라, 저 귀족 놈들한테 발각돼 곧바로 포위당하게 될 거야.
넌 강해, 소냐. 넌 놈들의 포위망을 거의 뚫어낼 뻔했었지.
하지만……
잘 덤벙거리기도 해. 너는 그만 촛대를 엎어버렸고……
펑~
또 다른 내가 사라지고, 내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내가… 두 번째 화재를 일으켜버린 것이다.
그 화재로 인해 귀족들의 본거지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마지막 식량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었다. 안나는 그 화재 이후로 학생들 사이에선 무차별적인 혼란과 싸움이 더욱 심해졌다고 내게 말했다.
제4고등학교의 귀족들이 전부 사라졌다! 빨리 뺏어버려!
저쪽에서 귀족을 봤어! 이참에 전부 죽여버리자!
꺼져. 벌써 사흘이나 굶었다고! 방해하지 마!
지금 뭐라 그랬냐?!
나가 뒈지라고!
모든 게 화재가 나기 전보다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제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일부 자치단 멤버들은 행방이 묘연했고, 비카도 돌아오지 않았다.
죽어!
이건 내 거야!
크헉, 으윽, 살려줘……
어느날, 언제인지도 모를 어느날, 리유니온은 이곳을 갑작스레 떠났다.
하지만 애초에, 리유니온은 우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를 여기에 가두어두었을 뿐…… 학생들은 리유니온이 떠난 것도 모른 채, 계속 혼란 속에서 지냈다.
마치, 그 혼란을 즐기는 것처럼.
어이, 학교를 지키던 리유니온이 모두 떠난 것 같다.
네……
이제 나갈 수 있게 됐어. 그런데 안나, 별로 안 기뻐 보이는데.
이젠 리유니온이 있는지 없는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아.
처음 화재가 일어났던 그때부터, 리유니온의 존재는 애초에 의미가 없었던 거야.
하지만 바로 그 다음 날, 재앙이 우리가 있던 곳을 덮쳐왔다. 우리는 아직 혼란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재앙은, 모두를 두려움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모두 이곳을 떠나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 밖 세상이 학교보다 더욱 참혹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설마, 설마…… 재앙……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으아아아아악, 무서워! 무섭다고!
안나, 얼른 도망가야 해!
하지만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죠?
그 이후, 우리는 난민과 리유니온을 피해 오리지늄이 확산되지 않은 도시로 도망갔고……
……결국, 로도스 아일랜드 작전팀에 구출되어 이곳에 오게 되었다.
누구냐?!
……
학생?!
무기를 들고 있어!
……죽어.
잠깐! 우리는 난민들을 구하러 온 거야!
……뭐?
긴장하지 마라. 우리는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곳에서 나왔다. 너희는 이제 안전해.
나는 살아남았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나는 안나의 고민을 없애기는커녕, 그 애가 바라던 것을 망쳐버렸다.
소냐. 화재가 나지 않았다면, 학생들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고, 고의가 아니었어!
소냐를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앞으로 뭔가를 할 때는, 저와 상의해줘요……
나는 단지 너를 안심시키려고 했던 것뿐인데……
전 그래도 지마를 믿을 거에요.
하지만 난 너와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넌 죄인이야.
아니야.
지마 언니는 죽어버려야 해.
그럴만한 죄를 짓지는 않았어.
나를 놓아준 건 죄책감 때문이니까.
널 죽이고 싶진 않았어.
뭘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그냥 실수한 것뿐이잖아.
어떻게 생각을 안 하겠어!
당신을 증오해요.
나는……
으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
윽……
크윽……!
또 이 꿈이야.
안나, 나는……
나는……
갈색 머리의 소녀는 세면대에 기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라본 창밖의 달빛은, 하염없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