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평범한 석양

평범한 석양

오퍼레이터 레코드브릿지

재앙이 지나간 후, 한 화가의 꿈이 무너졌다. 떠나려고 했던 츠키노기는 그에게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

등장 오퍼레이터: 츠키노기


???

저기다! 내 집이 바로 저쪽에 있다!

???

속도를 더 낼 수 없겠나!


츠키노기

재앙이 이미 가까워졌어요. 조금만 더 서둘러 주세요.

데블린

재촉하지 마! 내가 꾸민 방이니 화구가 어딨는지 똑똑히 알고 있어. 챙겨서 바로 출발하면 돼!

데블린

이 캐비닛 아래에 있……

데블린

없어!

데블린

분명히 여기 뒀는데! 어디로 간 거지?!

데블린

젠장, 그렇게나 급하게 도망친 건가? 내 그림 도구까지 밀쳐 넘어뜨리다니!

데블린

위대한 걸작을 망치다니! 이 죄 많은 녀석들!

츠키노기

진정하세요. 혹시 같이 사는 분이 계셨나요?

데블린

다른 사람이라…… 집주인 페리 부인이 살고 있지. 예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석양을 보면 계란 프라이를 떠올리는 사람이야.

츠키노기

대피를 했는지 명단을 확인해 봐.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알겠습니다.

데블린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기에 연락처가 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는군……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데블린 씨, 통신 장비에 새 메시지가 왔어요! 자, 여기요!

데블린

“데블린 씨, 재앙이 다가오는데 집에 없길래 돌아와서 바로 대피할 수 있도록 물건을 캐리어에 담아 문 앞에 뒀어요.”

데블린

“부디 무사하시기 바랍니다…… 페리”

데블린

살았다! 감사합니다, 페리 부인!

츠키노기

이게 그 캐리어인가요? 제가 가지고 갈게요.

데블린

맞아, 어서 가지.

데블린

차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야.

츠키노기

서두르자.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네.

데블린

저쪽으로 가 주게. 좁아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잖나!

츠키노기

데블린 씨, 이러시면 차에서 떨어질 수도 있어요.

데블린

아앗, 안 돼! 내 도구들이!

데블린

예술도 모르는 이 어리석은 여자가! 무슨 짓을 한 거냐!

데블린

캔버스가 엉망이 됐잖나! 게다가 붓이 물감에 빠져서…… 색이 전부 섞이고 말았어! 이러면 쓸 수가 없단 말이다!

츠키노기

그냥 그림일 뿐이잖아요. 다음에 또 그릴 기회가 있을 거예요.

데블린

아니…… 아니야!

데블린

내가…… 오랫동안 힘들게 재앙을 쫓아다닌 건 전부 그 무상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광경을, 나의 붓으로 이 캔버스 위에 그리기 위해서였단 말이다……

츠키노기

데블린 씨……

데블린

그림, 꿈, 인생, 내 전부가…… 물거품이 되어버렸어.


데블린

귀찮게 굴지 마라!

데블린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잖나?

데블린

지금이 몇 시인지 아나? 벌써 해가 졌단 말이다!

데블린

카운슬링 따윈 필요 없어. 난 죽지 않았다고! 적당히 좀 해라!

데블린

마지막 경고다. 한 번만 더 귀찮게 굴면 확 그냥……

데블린

너는…… 왜 여기에?


츠키노기

안녕하세요, 데블린 씨.

데블린

아…… 그래, 기억나는군. 그때 재앙 경보를 알리러 왔었던…… 어디 보자…… 무슨 아일랜드였는데……

츠키노기

로도스 아일랜드, 저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오퍼레이터예요.

데블린

……응? 그게 끝인가?

츠키노기

자기소개는 처음 만났을 때 이미 했잖아요. 어머, 같이 차까지 타고 왔으면서 제 이름을 잊으신 거예요?

데블린

그, 그럴 리가. 자네는……

데블린

츠키노기 씨잖나?

츠키노기

그래도 제가 나쁜 인상을 남기진 않은 모양이네요.

츠키노기

자, 그럼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휴식을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요.

츠키노기

요즘 몸은 좀 어떠세요?

데블린

……덕분에. 원래도 별문제가 없긴 했지만.

츠키노기

다행이네요. 정신적으로 힘드신 점은 없으시고요?

데블린

똑같지, 뭐. 그림도 그릴 수 없게 됐는데 여기에서 더 나빠질 게 뭐가 있겠나?

츠키노기

그러셨군요. 그럼 지내면서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요? 방문객을 전부 거절하신 것 같아서요.

데블린

불편한 점이라…… 그냥 그 '친절한' 이웃들이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데블린

난 '이재민 정신 보건 상조회' 따위엔 관심 없어. 죽상을 한 다른 사람을 보는 것도 싫고, 방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쓸데없는 질문에 대답하는 건 더 질색이지.

츠키노기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데블린

질문은 끝났나?

츠키노기

원하신다면 언제든 끝내드릴게요. 데블린 씨가 불편하시다면요.

데블린

……그나저나 재앙정보전달자는 재앙이 끝나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던데, 왜 여기 있는 건가?

츠키노기

다른 재앙정보전달자를 보셨어요?

데블린

아…… 아니, 그냥 책에서 읽었지.

츠키노기

재앙정보전달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답니다. 몇몇은 직책 외의 것까지 신경 쓰는 사람도 있고, 또 간혹…… 후후, 아예 재앙정보전달자 자체를 그만두는 사람들도 있죠.

츠키노기

전 여기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어요. 이를테면 데블린 씨 상황에 관심이 있다던가……

데블린

……그런 농담할 시간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더 챙겨줘. 밤마다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얼마나 끔찍한지 모르겠다니까.

츠키노기

그것도 다양한 이유 중 하나일 뿐이랍니다. 그러니 그냥 이곳 풍경이 좋아 남은 사람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츠키노기

참, 이 근방에는 멋진 풍경이 많아요. 저기 있는 언덕에서 바라보는 황혼이 정말 예술이랍니다.

츠키노기

라이타니엔 최고의 풍경화 대가 레온 씨의 제자이자…… 젊은 나이에 이름을 떨치고 빛과 그림자가 있는 곳이라면 세상 끝까지 가겠다는 뛰어난 화가에겐 흥미가 생길 법한 풍경이죠.

데블린

날 조사한 건가?

츠키노기

그림 애호가로서, 뛰어난 화가의 소문은 대체로 입에 오르내리는 법이니까요.

츠키노기

라이타니엔을 떠나기 전에 남기신 풍경화를 봤어요. 섬세한 붓 터치로 석양이 지는 순간을 담아내셨죠. 정말 인상 깊은 작품이었답니다.

데블린

그 쓰레기는…… 재앙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츠키노기

꼭 그림을 그릴 목적이 아니라도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기분 전환이 될 거예요.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데블린

안 가, 관심 없어.

데블린

잘 들어, 츠키노기 씨. 동료와 함께 재앙으로부터 날 대피시켜 준 건 고맙지만, 내 그림이 엉망이 된 것도 사실이야.

데블린

그때 길을 막고 강도질을 하던 폭도들을 조금만 더 빨리 처리했다면……

데블린

페리 부인이 짐을 챙겨두기 전에 집에 도착했을 거고, 내 화구도 그 지경이 되지 않았을지도 몰라.

데블린

이렇게 돼 버린 이상, 자네들의 관심 따윈 필요 없어. 뭘 하든지 상관없으니 제발 귀찮게 굴지만 말아줘.

데블린

우리가 만나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군.

츠키노기

어쨌든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즐거웠어요, 데블린 씨.

츠키노기

참, 가기 전에 선물을 하나 드릴게요.

츠키노기

업무 차원에서 드리는 건 아니고, 그림 애호가로서 진심을 담아 드리는 선물이니 약소하더라도 꼭 받아주셨으면 해요.

데블린

……

츠키노기

여기 두고 갈게요. 그럼 좋은 꿈 꾸세요.


텅 빈 캔버스에는 아무런 색도 칠해져 있지 않고, 오직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었다.

데블린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캔버스 가장자리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혼돈처럼 부서지는 빛과 그림자가 있었다.

갑자기 그는 주먹을 휘둘렀고, 화판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데블린

그릴 수가 없어……

데블린

젠장, 도저히 못 그리겠단 말이야!

데블린

재앙처럼…… 웅장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과 그림자라는 음표와 색채의 협주는……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데블린

이제 붓조차 쥐지 못하는데…… 무슨 그림을 그리겠다고!

데블린

……

데블린

선물……

데블린

그림 도구와 물감인가. 누가 봐도 그날 일을 만회하려는 듯한 선물이군.

데블린

내가 이 브랜드의 물감만 쓰는 건 어떻게 알았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설마…… 물감의 질감으로 알아챈 건가?

데블린

안타깝게도…… 쓸 만한 물건은 없군. 역시 기대하지 말 걸 그랬어.

데블린

응? 이건…… 극동의 목판화인가?

데블린

풍경화잖아……

데블린

난생처음 보는 기법이야…… 선도 깔끔하고 표현력도 뛰어나.

데블린

게다가 이 거침없는 색감 처리까지…… 기존의 틀을 깬 덕분에 특별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어.

데블린

이런 식으로 그릴 수도 있는 건가……


데블린

밤이 깊었군.

데블린

요즘 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울음소리가 제법 줄었어.

데블린

내게 그림을 준 그 여자는…… 아직 이곳에 남아있을까?

데블린

지금은 바쁘다! 잠시만 기다려!

데블린

간다, 가! 그만 좀 두드려!


데블린

너희가 말한 '리로케이션 페스티벌'에는 안 간다고 했을 텐데……

츠키노기

안녕하세요, 데블린 씨. 또 뵙네요.

데블린

넌……

츠키노기

컨디션은 좀 좋아지셨나요?

데블린

……

츠키노기

안색이 많이 좋아진 걸 보니 푹 주무셨나 보네요.

데블린

왜 또 온 거지? 지난번에 분명히……

츠키노기

쉿, 여자의 아픈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건 좋은 게 아니랍니다.

츠키노기

방금 바쁘다고 하시던데, 혹시 그림을 그리고 계셨나요?

데블린

……새로운 기법을 시도해 본 것뿐이야.

츠키노기

반가운 소식이네요.

츠키노기

오늘은 질문하러 온 게 아니라 드릴 게 있어서 온 거랍니다. 보세요.

데블린

꽃?

츠키노기

네, 황혼 무렵 그 언덕에서 따온 거예요. 아직 이슬도 맺혀 있죠.

데블린

색감이 단조롭고 모양도 투박하군…… 이렇게 아름답지 않은 꽃에는 관심 없어.

츠키노기

구경하라고 드린 게 아니에요.

데블린

그게 무슨……

츠키노기

이 꽃의 정물화를 그려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데블린

이런 보잘것없는 꽃은 그릴 수 없어.

츠키노기

극동의 작품들은 마음에 드셨나요?

데블린

……

츠키노기

전 극동 출신이에요. 어린 시절, 가족과 산에서 내려와 도시에 갈 때마다 저택 앞에 모여 앞다퉈 높은 사람에게 작품을 바치는 화가들을 봤죠.

츠키노기

그래서 명화를 자주 접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그림 보는 눈을 키울 수 있었답니다.

츠키노기

극동을 떠나기 전에 작품 몇 개를 챙겨왔는데 혼자 감상하려니 흥이 안 나더라고요. 그런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츠키노기

그렇지 않나요?

데블린

……꽃을 주게. 그려줄 테니까.

데블린

아직 할 게 남았나?

츠키노기

그림을 부탁드렸으니 꽃을 놓을 위치까지 제가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데블린

방이 어수선한데……

츠키노기

날이 정말 춥네요. 계속 이렇게 밖에 세워두실 거예요?

데블린

……들어오게.


츠키노기

으음…… 말씀하신 대로 정말 어수선하네요.

츠키노기

꽃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요.

데블린

불필요한 물자를 지급받아서 그래. 임시로 묵는 곳이니 굳이 시간 들여 치우고 싶지 않았어.

츠키노기

그러시면 안 돼요. 주변이 깨끗해야 차분해지는 법이랍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우선 편안한 상태여야 해요.

츠키노기

그럼…… 데블린 씨가 더 멋진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제가 방 정리를 도와드릴게요.

데블린

그럴 필요 없어.

츠키노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려나……

데블린

잠깐만!

츠키노기

어머, 이게 다 뭐예요?

데블린

그건 그냥 둬, 내가 할 테니까!

20분 후

데블린

그 스케치들은 그냥 거기 둬, 부탁이야.

츠키노기

보세요. 이렇게 금방 깔끔해졌잖아요. 이제야 사람 사는 곳 같네요.

데블린

정말 귀찮게……

데블린

화판의 방향과 선반의 높이, 그리고 저 꽃까지……

츠키노기

전에 데블린 씨 집에 갔을 때, 깔끔하게 정돈된 방을 봤었죠.

츠키노기

그 기억을 되짚어가며 방을 정리했어요. 아쉽게도 벽에 걸려 있던 그 꽃 정물화만 없어서 거기에 제가 가져온 꽃을 놓아 보았습니다.

츠키노기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데블린

없어…… 재앙이 다가오기 전과…… 정말 비슷해.

데블린

매일 밤 연습을 마치고 돌아와 불을 켜면 이런 풍경이 날 반겼지. 가끔 페리 부인이 아래층에서 끓이는 고깃국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왔어.

데블린

한 번도 먹어본 적은 없지만……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지.

츠키노기

이곳에서도 편안하게 지내시면 좋겠어요.

츠키노기

그런데 저 스케치들은…… 못 보던 것들이네요.

데블린

원래 페리 부인에게 치워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다른 짐과 함께 캐리어에 챙겨둔 모양이야.

데블린

쳇, 이 쓸모없는 스케치까지 넣는 바람에 내 화구가 엉망이 됐지.

츠키노기

한번 봐도 될까요?

데블린

마음대로 해. 어차피 연습할 때 그린 습작이라 쓰레기나 다름없어.

츠키노기

그럴 리가요. 산, 바다, 초원, 그리고 붉은 석양까지…… 전부 아름다운걸요.

데블린

페리 부인도 아마 그런 생각으로 그림을 챙겼겠지. 결국 일을 그르쳤지만.

츠키노기

그렇지 않아요. 황혼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셨잖아요. 데블린 씨가 아카데미에 기증한 작품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뛰어난걸요.

데블린

그 정도는 아니야.

데블린

그나저나 넌…… 재앙을 여러 번 봤겠지?

데블린

그럼 재앙 앞에서 아침노을이든 황혼이든…… 이 땅의 모든 풍경이 빛을 잃는다는 걸 알고 있겠군.

데블린

그때 난 라이타니엔에서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 냈지.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색을 조합해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순간을 그림에 담았지만……

데블린

놈들은 그러면 안 된다며 그것을 부정했어!

데블린

그들은 섬세하고 우아하지 않다는 둥…… 같잖은 핑계를 대며 내가 작품전에 참가하지 못하게 막았어.

데블린

그 말에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나는 열심히 연습하고 또 연습했지. 레온 선생님에게만 인정받는다면 다른 비평 따위는 상관없었어.

데블린

노력 끝에 황혼 풍경화를 완성한 나는 선생님께 작품을 보여드렸지. 그런데 그분께서 뭐라고 했는지 아나?

데블린

“지금의 네 그림은 날 감동시키지 않아.”였어.

데블린

그 후에 깨달았지. 내 실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런 그림을 그리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데블린

솔직히 어제 자네가 준 그림을 보고 잠시나마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던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어. 하지만 붓을 내려놓자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됐지.

데블린

난 못 해…… 어떻게 변하든 그런 평범한 풍경은 그릴 수 없어. 난 그걸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니까.

데블린

내 그림 실력은 충분히 뛰어나. 하지만 더욱 마음을 뒤흔드는 풍경을 그려내고 불멸의 걸작을 탄생시켜야 그들도 날 이해할 수 있을 테지.

데블린

석양이라…… 하, 그딴 것에 무슨 가치가 있지?

데블린

붓을 든 그날부터 난 화가의 길을 걸으며 죽는 그 순간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그릴 운명이었어. 그게 바로……

데블린

재앙이야.

츠키노기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데블린 씨.

데블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지. 부탁받은 그림을 완성하면 난 바로 이곳을 떠날 거야.

츠키노기

다음 재앙을 찾아가시는 거예요?

데블린

그래.

츠키노기

그럼 이 스케치들을 제가 가져도 될까요?

데블린

마음대로 해. 불태워 버리면 더 좋고.

츠키노기

그럼 먼저 가볼게요.


데블린

소란스럽네…… 대체 밖에 무슨 일이……

데블린

이 익숙하고도 맛있는 냄새는……

데블린

페리 부인의 고깃국 냄새야!


페리 부인

데블린 씨, 일어났구나!

데블린

이게 대체…… 뭐 하는……

페리 부인

'리로케이션 페스티벌'이야. 츠키노기 씨의 '이재민 정신 보건 상조회'에서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려고 개최한 기념일이거든.

페리 부인

데블린 씨 그림 덕분에 파티 분위기가 한층 더 살아났어.

데블린

내…… 그림?

고개를 들자 공중에서 휘날리는 무명실이 보였다.

선은 두 지붕과 수많은 판잣집 사이를 잇고 있었다.

그 선에 걸려 있는 스케치들이 바람결에 펄럭였다.

그건 자신의 그림이었다.

페리 부인

멋진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싫다고 하더니.

페리 부인

츠키노기 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모두가 그림을 볼 수 있게 돼서 너무 좋네.

데블린

아니…… 어서 떼줘……

데블린

저 쓰레기들은 그림이라고 할 수조차 없다고!

페리 부인

왜? 난 저 그림들이 마음에 드는데.

데블린

그건 페리 부인이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야! 놈들이…… 그놈들이 이걸 본다면 바보 취급을 할 게 뻔해.

페리 부인

그림에 일가견이 없는 건 맞지만, 난 데블린 씨의 그림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페리 부인

그리고 난 꼭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그림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데블린

그게 무슨……

페리 부인

저 그림들을 보면 우리 집이 떠올라, 아쉽게도 이미 재앙으로 폐허가 되긴 했지만.

페리 부인

괴롭긴 해도 저 아름다운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페리 부인

조금만 더 힘을 내 하루빨리 이곳에 적응하면 주변을 둘러볼 시간도 생길 테고, 어쩌면 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데블린

말도 안 돼!

페리 부인

어머,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주위를 좀 둘러봐봐.

수줍은 여자

저거 봤어? 저 그림 속의 백양나무숲…… 저런 숲에 가서 산책도 하고, 피크닉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정한 남자

이곳 생활이 적응되면 어떻게든 저런 아름다운 곳을 찾아내 볼게. 그때 같이 가자.

장난꾸러기 아이

엄청 빨간 계란 프라이다~ 아빠, 나 배고파~

차분한 남자

저건 계란 프라이가 아니라 숲 너머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해님이란다. 정말 아름답지?

장난꾸러기 아이

해님! 나 해님 좋아해!

페리 부인

다들 데블린 씨 그림에 감동한 모양이야. 엄청 좋아하잖아.

페리 부인

요즘 이런저런 일을 겪고 삶의 터전까지 잃었으니 다들 싱숭생숭할 거야.

페리 부인

츠키노기 씨가 제일 고생이 많았지. 내 냄비까지 고쳐줬으니까. 어쨌든 덕분에 다들 기운을 되찾고 있어.

페리 부인

게다가 오늘 이런 파티까지 열어줬잖아. 어떻게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

데블린

그 사람은……

페리 부인

참, 얘기를 들어보니 데블린 씨한테 사과해야겠더라.

페리 부인

대피할 때 화구를 마구잡이로 챙겨둬서 정말 미안해. 사과의 뜻으로 뭘 해주고 싶은데……

페리 부인

참, 내가 끓인 고깃국 좀 먹어 볼래?

데블린

츠키노기 씨…… 페리 부인, 혹시 츠키노기 씨가 어딨는지 아나?

페리 부인

데블린 씨가 물어보면 남쪽에 있는 언덕에 간다고 전해달라고 했어.

페리 부인

잠깐, 뭐가 그렇게 급해? 아직 할 말이 남았어.

데블린

뭐지?

페리 부인

지금 가봤자 거기 없을 거야. 아마 데블린 씨가 언제 가야 할지 알 거라면서 꼭 화구를 챙기라고 덧붙였어.

데블린

……알았어.

데블린

페리 부인, 그럼 고깃국 한 그릇만 주겠나.

데블린

곱빼기로 부탁하지.


데블린

때맞춰 온 것 같군.

츠키노기

와주셨네요, 데블린 씨.

츠키노기

전에 이곳 풍경이 멋지다고 알려드렸잖아요.

시선이 가닿는 끝에 거대한 황금빛 구체가 내려앉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심장처럼 낮의 생명을 이어 나가려는 듯했다.

지평선이 그 구체를 삼키고 있었고, 구체의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온 대지에 노을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은 기어이 물밀듯 밀려왔다.

츠키노기

정말 아름답죠?

츠키노기

극동을 떠나던 그날에도 창밖으로 저런 석양이 펼쳐졌답니다.

데블린

대체…… 왜 그런 거야?

츠키노기

데블린 씨는 왜 직접 스케치들을 버리지 않으셨나요?

데블린

……익숙하지 않으니까.

츠키노기

앉으세요, 데블린 씨.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게요.


츠키노기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 신사에 한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어요.


츠키노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미래를 짊어지게 됐죠. 여러 높은 사람들과 만나야 했던 아이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의식과 춤을 배웠답니다.

츠키노기

하지만 아이는 이런 허울뿐이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행위를 끔찍이도 싫어했어요.



츠키노기

그래서 어른이 된 후 집을 떠나 재앙정보전달자가 되었죠.

츠키노기

재앙정보전달자가 되어 재앙으로부터 사람들을 대피시켰지만, 가족과의 교류는 거의 전무했어요.



츠키노기

그러던 어느 날, 고향 근처에서 재앙이 일어난 거예요. 주민 대부분을 대피시켰지만 집을 떠나지 않겠다는 가족 앞에선 속수무책이었죠.

츠키노기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가족과 소통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츠키노기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권력자들은 설득했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가족이 비극을 겪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데블린

슬픈 이야기네.

츠키노기

데블린 씨라면 아실 거예요. 필사적으로 꿈을 좇느라 주변의 경치를 놓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요.

츠키노기

석양과 재앙이 다르긴 해도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감동적인 풍경은 여행자가 얼마나 눈여겨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법이죠.

츠키노기

그러니 가끔은 멈춰 서서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세요.

데블린

아…… 기억나는군.


데블린

그때 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어. 매일 밤, 술집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석양이 지는 풍경을 그렸지…… 귀로에 오른 파울비스트의 흩날리는 깃털과 분주한 사람들의 노을 속 그림자까지.

데블린

술을 마시던 노동자들은 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 내 곁에 몰려와, 지는 해가 꼭 둥근 계란 프라이 같다며 큰 소리로 웃었고, 난 더 비슷하게 그리겠다고 답했지.

데블린

난 한 번도 스케치들을 버린 적이 없었고, 그걸 술집 벽에 붙여놓으면 마음에 드는 손님이 와서 동전 몇 개를 지불하고는 그걸 가져갔어……


데블린

그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지.

데블린

그러던 어느 날, 뒤에서 내 그림을 보고 계시던 레온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

데블린

“아이야, 난 네 그림에 감동했다.”


데블린

……그런 것이었나.

데블린

하지만…… 지금의 내가 아직도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데블린

재앙만 쫓는 두 눈과 붓을 쥘 수 없는 이 손으로……

츠키노기

저한테 빚진 그림이 있다는 걸 잊으신 건 아니죠?

츠키노기

지금 그려주세요.

데블린

아……

츠키노기

춤추는 제 모습을…… 그리셔도 돼요.

점점 사라지는 빛 아래에서 노을과 아름다운 춤이 어우러지고……

섬세한 붓 터치에 의해 찰나의 순간이 영원해진다.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역시 츠키노기 씨네요. 조사에 따르면 대피 후 주민들의 생활 만족도가 역대 최고점을 찍었고, 심리상태도 안정적입니다.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이러면 앞으로의 이주 작업이 훨씬 더 수월해질 겁니다. 주민들이 하루빨리 이동도시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졌으면 좋겠어요.

츠키노기

정말 다행이네요.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츠키노기 씨, 재앙이 일어난 후에 항상 남는 이유가 이거 때문이었어요? 현지 주민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요.

츠키노기

네, 위험에서 벗어난다고 끝이 아니니까요. 마음을 다잡고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이번에 츠키노기 씨가 도와준 화가가 라이타니엔에 보낸 신작을 보고, 그림의 대가 레온 선생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선생님이 수십 년간 다른 작품을 평가한 적이 없었던 터라 지금 예술계가 엄청 떠들썩한가 봐요.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소문으로는 그 사람의 개인전을 위한 준비가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해요.

츠키노기

후후, 원래 그림을 잘 그렸거든요.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솔직히 말해주세요, 이번에도 또 새로운 여자아이 이야기를 했죠?

츠키노기

어땠을 것 같나요?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저야 모르죠…… 어쨌든 츠키노기 씨가 하는 이야기는 다 진짜 같아요.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츠키노기 씨가 재앙 이후 처음으로 남게 되었던 계기는 뭐였나요?

츠키노기

전…… 그저 슬픈 게 너무 싫었을 뿐이에요.

츠키노기

자, 이제 그만하죠. 아직 해야 할 임무가 남았잖아요?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헤, 츠키노기 씨는 이번에도 바쁘시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