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얼음
납치된 귀족 자제를 구하기 위해 엔시오데스는 로도스 아일랜드에 의뢰했고, 박사는 그 의뢰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이 실버애쉬와의 우정의 증명이 되리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박사, 이미 알고 있겠지만, 실버애쉬 가문의 대외적인 탐구는 내 선조, 내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쉐라그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는, 할아버지께서 모험가와 모험을 떠났고, 수많은 금은보화를 가져왔다고 되어있지.
하지만 사실, 할아버지가 모험가와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바깥을 돌아다니신 건 맞지만, 값나가는 물건을 가지고 오신 적은 전혀 없었다.
책과 당시의 최첨단 도구와 도면뿐이었지.
그 물건들은 내 아버지 올라퍼에게 영향을 끼쳤다. 결국 아버지는 쉐라그 전체에서 최초로 타지에 유학을 떠난 분이 되셨지.
아버지는 빅토리아에서 유학하던 중 내 어머니 엘리자베스를 만나셨고, 그때 여러 귀족들도 알게 됐다.
이 월든 자작이라는 사람은 아버지가 그때 사귀신 친구 중 한 명이다.
나는 유학 중에 이 도시를 거쳐 가게 되던 중 월든 자작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그때 월든 자작의 자녀였던 오빠 칼과 여동생 케이트를 알게 됐지.
칼은 나와 나이가 같았는데 큰 포부를 지녔었다. 당시에 나를 라이벌로 여겨서 늘 나와 맞섰지만, 사람은 괜찮았지.
다만 안타깝게도, 내가 이곳을 떠난 후, 칼이 감염자에게 습격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칼이 죽은 후, 월든 자작은 감염자를 더 증오하게 됐고, 감염자에게 불리한 규칙을 몇 개나 제정했지.
- 빅토리아는 감염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나라라고 들었는데.
- 그리고 넌 그런 사람의 의뢰를 로도스 아일랜드에 맡겼지.
사실, 그건 모두 각 도시를 관리하는 귀족이 정하는 것이다.
카란 무역회사의 지사들은, 현지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감염자 전략을 세우기도 하지.
로도스 아일랜드의 평판은 내가 보증할테니 박사는 안심해도 된다.
네가 긴장할 필요는 없다. 로도스 아일랜드의 최근의 움직임에 대해 소문만 들었을 뿐, 네가 뭘 하려는 건지는 알지 못하니.
하지만 내 예상대로라면, 너희들이 실권을 가진 자작과 관계를 맺으면 어찌 됐든 이득은 볼 수 있겠지.
어쨌든 이번에 납치된 대상은 케이트고, 케이트를 납치한 건 또 감염자다.
이것 또한 자작이 감염자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너희들에게 의뢰하는 걸 동의한 이유 중 하나기도 하지.
월든 자작은 자기가 옛날에 한 행위가 역효과를 낼까 봐 아주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거지.
- ......
……
사이크스 카운티의 영주 월든 자작의 딸이 감염자 무리에게 납치당했고, 납치범은 20일 안에 몸값 10만 파운드를 지불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고 있어.
자작은 우리가 딸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고, 구조하길 원하고 있어.
월든은 빅토리아 서부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편인데, 몇 년 전에 장남이 감염자에게 살해당한 이후로 감염자를 극도로 가혹하게 대하고 있어.
월든 자작이 통치 중인 사이크스 카운티는 감염자에 대한 각종 법규가 다른 지방보다 엄격하고, 월든 자작 본인도 우르수스의 감염자 정책을 본받아야 한다는 공개 연설을 여러 번 했어.
더 중요한 건, 월든의 성이 캐스터라는 거야.
캐스터 가문은 빅토리아 서부에서 아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 우리가 캐스터 가문과 관계를 맺는다면 귀찮은 일이 많이 줄어들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문제기도 해.
자작은 감염자를 적대시하니까 우리에게 직접 의뢰한 것은 아니야. 실제로 이 의뢰는 중개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맡겨진 거야.
그 중개자의 이름은 엔시오데스고.
-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 우연의 일치네.
- 엔시오데스가 뭘 알아차렸든 이상할 건 없어.
정말 너와 상관있는 일이라면, 나는 이게 너와 로도스 아일랜드의 관계를 이간질하려는 시도라 생각할 거야.
엔시오데스가 이렇게 경솔할 리가 없잖아.
마침 필요할 때 의뢰가 들어오다니…… 이걸 우연이라 믿기는 힘들어.
엔시오데스를 고려하더라도 이 의뢰가 여전히 아주 매력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로도스 아일랜드가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우린 최근 빅토리아 서부의 이동도시에서 움직이고 있어.
엔시오데스가 유학했던 것과 일부 빅토리아 귀족들 사이에 남긴 명성을 생각해 보면, 엔시오데스가 아는 게 이상할 건 없지.
사실 이 일을 가장 꺼릴 만한 사람은 우리가 아닌 엔시오데스야, 하지만 엔시오데스가 꺼려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여.
너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해하는 것 말고는, 달리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군.
- 믿는다라……
- (어깨를 으쓱거린다)
- 놀리지 마.
넌 쉐라그 여행에서 확실히 엔시오데스의 '믿음'을 얻었잖아. 아니야?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나 보네.
아니면 그런 줄로 알게.
네 임무 보고서를 봤을 때, 확실히 그런 충동을 느끼긴 했어.
하지만 지금 이 의뢰가 온 것만으로도, 네 쉐라그 여행의 가치는 충분히 증명됐어.
물론, 네 인간관계에 간섭할 생각은 없어.
다만 우리가 카란 무역회사와의 협력을 멈추지 않는 이상, 엔시오데스와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조심할 필요가 있어.
네 쉐라그 여행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이익을 가져왔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너도 우리가 이어서 할 행동의 특수성을 알아야 해. 앞으로 빅토리아 관련 인물과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넘는 부분은 절대적으로 반대하겠어.
너와 엔시오데스 모두에게 위험할 거야.
박사, 도시 교외의 숲에 숨어있는 목표를 발견했습니다.
- 수고했어.
수고라니요, 슬럼가에서 알아보고 추적했더니 바로 발견했습니다.
하아, 도시가 감염자한테 엄격하기는 합니다. 이곳의 감염자들 모두 비참하게 지내더라고요.
귀족 여자애를 납치한 건 아마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규모가 꽤 큰 감염자 집단인 것 같습니다.
경비는 훈련을 받지 않은 것치고 삼엄한 편이여서 주변에서 사진을 좀 찍어왔습니다.
이게 녀석들 거점 주변의 사진들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찍은 녀석들의 대장 사진입니다.
……음?
왜 그러십니까?
……그랬던 거였군. 이렇게 된 일이었던…… 건가?
……박사, 무리한 부탁이 있다만.
형님, 비축해둔 식량이 그리 많지 않아요.
정 안되면 '샌드'를 잡아서 형제들에게 먹여.
어, 어떻게 그래요! '샌드'는 형님이 키우는 버든비스트잖아요!
사람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짐승이 대수야?
……하아.
……조금만 더 참아봐. 돈을 받으면 새로운 신분을 가지고 다른 도시로 가서 잘 살아 보자고.
알겠어요.
오빠, 내가 조용히 집에 다녀오는 건 어떨까.
바보냐? 네 재주로는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고. 여기서 얌전히 인질 노릇이나 해.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고. 광석병에 걸리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났어? 멀리 떨어져.
응……
너, 너희는 누구냐!
너희들의 대장과 얘기하러 온 거니 긴장할 것 없다.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다! 썩 꺼져라! 꺼지지 않으면 흠씬 두들겨 패줄 테다!
엔시오데스 오빠……
칼, 우리를 들여보내 주겠나?
……물러서. 들어오게 해.
하지만……
넌 녀석을 이길 수 없어.
무기도 안 가져왔고 호위도 데려오지 않았으니 안심해도 된다.
카란 무역회사의 회장 엔시오데스가 이런 누추한 곳에 찾아와 주다니, 정말로 영광이군.
저번 무도회에서 만난 지 벌써 8년이나 지났군.
그때의 너는 월든 자작의 장자로써 패기가 넘쳤었지.
그리고 네가 등장하는 순간일 때면, 모든 사람의 시선이 너에게 집중됐지.
쳇, *빅토리아 비속어*.
엔시오데스, 잘 들어. 난 너 같은 귀족의 시시한 잡담엔 관심 없어. 그런 놀이는 진작에 관뒀다.
내가 지금 궁금한 건 네가 어떻게 여기를 찾아왔냐는 것과, 고작 너와 이 후드를 쓴 사람 둘이서 뭘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야!
……감염자 폭동 때문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말 못 할 속사정이 따로 있나 보군.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냐?!
그저 조금 궁금했을 뿐이다.
엔시오데스 오빠, 만약 아버지가 보낸 거라면…… 이만 돌아가 주세요.
제가 오빠를 따라갈 일은 없을 거예요.
케이트, 이번 납치는 너와 칼이 같이 계획했을 테지. 아닌가?
그리고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런 제안을 한 건 칼이 아니라 너일 거다.
……맞아요.
오빠가 감염자가 된 후, 지난 몇 년 동안 힘들게 지냈어요. 전 늘 몰래 오빠와 오빠의 친구들을 돕고 싶었지만, 저 혼자서는 도울 수 없었죠……
그래서 네 오빠 보고 너를 납치하고, 아버지를 협박하라 한 거군.
월든 자작이 널 그렇게 아끼는데, 상심이 크실 거다.
알아요…… 저도 아버지를 슬프게 만들긴 싫어요. 하지만 오빠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케이트, 그 입 다물어!
……미안해, 오빠. 괜한 말을 했어.
엔시오데스, 네가 영감탱이의 중재인으로서 온 거라면 순순히 떠나는 게 좋을 거야.
케이트를 데리고 가고 싶다면 내 형제들에게 물어보도록 해.
둘 다 긴장할 거 없다. 네 아버지에게서 의뢰를 받은 건 맞지만, 지금은 개인적으로 와 있는 것이니.
이쪽은 내 친구다. 박사라고 부르면 된다.
……그리고 나는 너를 돕기 위해 온 것이다.
도움이라. 돕는다, 베푼다, 살핀다. 그냥 네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를 쓰는 게 나을 텐데, 아마…… 거래, 그래. 거래였지.
좋을 대로 생각해도 괜찮아.
네 눈엔 내가 아직도 그 허세만 부리던 멍청한 귀족처럼 보이겠지.
그때의 나였다면, 확실히 너와 거래할 만한 카드가 남아있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 나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엔시오데스.
나와 거래하고 싶어? 무엇으로 나의 어떤 것과 거래하겠다는 거지?
그건 이어서 할 대화 내용을 보고 결정해야겠지.
우선 여기서 일어날 모든 일은 월든 자작이 절대 알지 못할 거라고 보증하겠다.
아…… 케이트 말고 이런 진지한 대화를 하는 사람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리운 느낌이 드네.
엔시오데스, 존중받는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지만, 일단 네 방식대로 날 존중해 주려고 한 건 고맙다.
네가 여기에 당당하게 들어와서 스스로가 고귀하다는 듯한 자태로 나와 대화를 할 때, 이미 너는 나를 도울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방금 내가 왜 죽지 않았는지, 왜 영감탱이와 이렇게 된 건지 물었었지?
말해주지.
그 무도회에서 넌 모든 관심을 빼앗아 갔어. 난 그때 정말 불쾌했었지.
그날 밤, 난 미리 무도회장을 떠났어. 네가 사이크스 카운티에 있는 한 네가 있는 곳에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런 뒤,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차로 한 여자를 들이받았어.
난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치고 도망갈 정도는 아니야. 그래서 그 여자를 태우고 병원으로 갔지.
병원에 도착한 후에야 그 여자가 감염자라는 걸 발견했고, 누구도 치료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
참 재밌는 일이야. 그거 알아? 그 의사들은 영주의 아들인 나를 보고는 그 여자를 정성껏 진찰하려고 다가왔지만, 피부의 오리지늄 결정을 보더니 물러나 버렸어.
그때 이해할 수 없었어, 정말 이해하지 못했지. 광석병이 아주 무서운 것은 알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
화가 난 나는 그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왔고, 우리 집안의 주치의에게 진찰하라고 강요했어.
영감탱이는 이 일을 알고 당연히 크게 화를 냈지만, 내 고집에 결국 돌아갔어.
그 일은 좀 기억나는군. 다만 그때 난 이미 다음 도시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
그래. 네 녀석은 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았으면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버렸어. 수많은 아가씨의 마음까지 훔쳐서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나도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
광석병이 무섭지 않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다만 다른 사람이 무서워하는 걸 보고, 그 정도로 무서워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을 뿐이지.
지금은 광석병이 아주 무섭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어떤 환자는 죽고 난 후에 정말 펑 하고 폭발해 버리기도 하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만, 아주 고통스럽게 죽기도 하지. 후후, 조심해. 내가 1초 뒤에 폭발해서 너와 네 친구까지 날려버릴지도 몰라.
- 그다음엔?
- 사실 폭발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야.
응? 후드 쓴 사람의 반응은 엔시오데스와 다르네. 너도 감염자야?
- 감염자 친구가 많아서.
- 내가 진찰해줄 수 있어.
어쩐지 엄청 느긋해 보이더라니.
심심하면 내 형제들과 좀 앉아있어도 좋아.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너 의사야?
됐어. 진료비 낼 돈도 없는걸.
어쨌든, 영감탱이는 그 여자가 집에 있는 걸 허락하지 않았고, 난 그 여자를 별장에서 살게 했어.
그 여자는 꽤나 오랫동안 내가 자신을 해치려는 줄 오해했지만, 사실 난 그때 그냥 치료해 줄 생각뿐이었어.
난 그때 바보 같은 놈이었어. 나와 맞서는 사람이 있다면 끝까지 맞서 싸웠지.
영감탱이가 그 여자를 쫓아내고 싶어 한다면 나는 절대로 그 여자를 보내지 않았고, 그 여자가 자신이 내게 짐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한사코 그 여자를 잘 돌보려고 했지.
서로 사랑한 것이군.
맞아. 귀족과 평민이 서로 사랑했지만 집안 어른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결국은 아버지와 아들이 원수가 되는 뻔한 시나리오였지.
다른 점이라면 평민은 감염자였고, 아버지는 간접적으로 평민을 죽였으며, 귀족은 아버지에게 보복하기 위해 자신도 감염자가 됐다는 것이야.
그랬던 거군. 너의 '사망 소식'과 월든 자작이 갑자기 감염자를 증오하게 된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어.
그래. 큰 기대를 걸었던 장남이 감염자와 사랑에 빠지고, 자신과 원수가 됐는데, 자신이 실패한 건 인정하기 싫으니, 모든 걸 감염자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난 이미 영감탱이가 가장 싫어하는 감염자가 됐어.
엔시오데스, 내 사망 소식은 진짜야.
칼 캐스터라고 불리던 사람은 7년 전에 죽었어.
……
봐봐. 또 그런 표정을 짓잖아.
엔시오데스, 내가 몸값을 받는다고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돈을 아우들에게 나눠주고, 이름을 숨기고 다른 도시로 가서 살면 정말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여전히 감염자라는 신분 때문에 여러 가게에서 문전박대당할 거야.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어쩌면 슬럼가로 내몰려 굶주리게 될지도 모르지.
일하고 싶어도 시켜주는 사람이 없으니, 뒷골목에서 죽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
물론 이 돈은 우리에게 필요해. 이미 형제들 중에서 몇 명이나 밥을 먹지 못해 아사했어.
하지만 이 돈이 또 얼마나 쓸모 있겠어?
몇 년 동안, 감염자 형제들과 도시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알게 됐어.
감염자는 살아남을 수 없어.
리유니온이라고 불리는 조직이 감염자를 연합하고,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조직이 감염자를 구조하고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언제쯤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몰라.
내 차례를 기다리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나를 도와줄 능력이 있어. 나와 이 필사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기 때문이야.
반면 넌 모르고 있어.
오빠……
……
그러니까 엔시오데스, 지금 나를 죽이고 케이트를 데리고 돌아가서 영감탱이에게서 보상을 받던가.
아니면, 이 모든 걸 영감탱이에게 말해도 상관없으니 돌아가 줘. 무슨 상관이 있겠어?
중요한 건, 넌 날 도울 수 없다는 거야.
보아하니, 내가 괜한 일을 했나 보군.
가도록 하지, 박사.
……
- ......
박사, 물어볼 게 있다.
칼과 마주했을 때, 내가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였나?
- 아니.
- 평소랑 똑같았어.
그러면 내 평소 모습이 칼에게는 소용없었다는 거군.
……음?
저건…… 칼인가?
혼자서…… 도시 쪽으로 가려는 건가?
- ……따라가자.
- 표정이……
……
부탁드립니다. 여동생이 감염되는 걸 막을 장비가 꼭 필요합니다.
지금은 고작 이것밖에 없습니다만, 며칠 후에 돈이 생기니 안심해 주세요. 외상으로 주시면 그때 꼭 두 배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저리 가. 날마다 와서 지껄이는 게 지겹지도 않은 거냐.
며칠 후면 돈이 생긴다는 말을 누가 믿겠어, 돈 없다는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하는걸. 물건을 받고 네가 도망갈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이 말이야.
그리고 월든 어르신의 규정에 따르면, 도시에서 감염자에게 물건을 팔아서는 안 돼.
하지만 슬럼가에선 그런 장비를 팔지 않는단 말입니다!
모든 곳을 수소문해서 당신을 찾아냈습니다. 다들 당신을 선량한 분이라고 하더군요. 절 불쌍히 여겨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마음대로 가져가셔도 됩니다.
아니면 여기서 일을 해드리는 거로는 안 되겠습니까? 제가 감염자라는 건 절대로 들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됐다, 됐어. 너처럼 가난한 녀석한테 값나가는 물건이 어딨겠냐?
들어와. 네가 계속 소리쳤다간 경비병이라도 찾아올까 봐 무섭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무릎 꿇지 마. 바닥이 더러워지잖아.
- 간이 방호 슈트 여분 한 벌이 필요해.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 의외야?
조금은.
아니, 인정하지. 상당히 의외다.
이제야 조금은 이해되는군. 칼이 왜 나에게 자기를 도울 수 없다 한 건지.
……케이트, 언제까지 따라올 생각이지?
미안해요……
이런 일에 대해 알고 있었나?
네. 알고 있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요.
지금 제가 가봐야 오빠는 저리 가라고만 할 거예요.
……
엔시오데스 오빠, 이게 염치없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오빠를 도와주세요!
칼은 내가 돕겠다는 걸 거절했다.
오빠가 그저 몸값만 바란 거였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엔시오데스 오빠를 만나진 않았을 거예요…… 전 오빠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엔시오데스 오빠는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저는 믿을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없으니, 오빠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어요!
최선을 다하지.
납치 계획은 확실히 제가 오빠한테 제안한 게 맞아요.
제가 '납치'된 후에 전 계속 오빠와 오빠 곁에 있는 감염자들과 같이 살았죠.
감염자들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느낀 게 있어요.
당시 오빠는 부모님과 제 앞에서 오리지늄 한 조각을 팔에 꽂았고, 그런 뒤 문을 박차고 나갔어요.
저는 2년 후에 슬럼가에서 오빠를 우연히 발견했죠.
오빠는 애초부터 조급했던 성격이 불처럼 변해있었죠.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 오빠의 가장 큰 변화는……
살아있는데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는 거예요.
죄송해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오빠는 감염자 친구를 위해 슬럼가에서 많이 싸웠어요. 싸우다 상처투성이가 돼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죠.
방금처럼, 오빠는 남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굽신거려야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요.
하지만 오직 자신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
이번 납치도 오빠는 사실……
- 애초에 몸값은 원하지 않았겠지.
- 자기 목숨으로 뭔가 하려고 했던 거지?
맞아요……
……케이트?
아, 이런. 오빠……
엔시오데스와 후드 쓴 사람도…… 너, 너희들 다 본 거야?
케이트, 네가 이 사람들을 데려온 거야?
아니야, 오빠……
내가 널 따라온 거다, 칼.
요즘 귀족들은 미행한 것도 이렇게 당당히 말하는구나? 하!
칼.
엔시오데스, 말했었지. 넌 날 도울 수 없어.
……
너는 계속해서 높은 곳에 앉아 모든 걸 내려다봐야만 하고, 나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에게 네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돼.
그래야 나도, 그리고 너도 더 잘 지낼 수 있어.
가자, 케이트.
……응.
미안해요. 엔시오데스 오빠.
……
박사님, 필요하다고 하신 물건 가져왔습니다.
- 고마워.
……
- 어떻게 생각해?
……
어, 박사님, 지금 저한테 물어보신 겁니까?
- 그래.
음, 계속 박사님의 호위로 몰래 따라다녔으니, 모든 과정을 봤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바가 있긴 합니다. 물어보신 김에 대답해 드릴 테니, 제 말이 맞는지 한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칼에게 있어서 몸값은 그저 목적의 일부일 뿐입니다.
몸값을 받고 싶은 것은 맞지만,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고, 곁에 모인 감염자 형제들을 위해 받고 싶어 하는 거죠.
그리고 자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귀족 도련님이었지만, 스스로 감염자가 된 뒤엔 이 도시에서 거지로 몇 년간 살아왔죠.
이런 신분상의 격차가 칼이 감염자에 대한 억압을 마주했을 때 더 강렬한 느낌을 받게 했을 겁니다.
과거의 칼은 어쩌면 억압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니까요.
다른 한편으로, 과거의 칼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자 충동적으로 아버지에게 가장 비이성적인 수단을 사용해서 보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칼은 거리로 내몰렸으며, 또한 아버지가 감염자를 한층 더 억압하게 됐죠.
이 점이 계속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제 생각엔, 칼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몸값을 받은 이후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뭘 할지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의 목숨조차 귀중하다고 말을 못하는데, 저희 감염자의 목숨은 말할 것도 없겠죠.
정말 목숨을 쓴다면, 자살하거나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이겠죠.
……
- 가자.
박사, 그쪽은 칼의 야영지로 가는 방향이다.
- 길은 알고 있어.
……
그렇다면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해야겠군.
너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이 있다.
원래대로라면, 이 의뢰는 내가 중개자로서 로도스 아일랜드에 넘긴 후, 내가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상황이 좀 달라진 것 같군.
네가 쉐라그의 일에 손을 댔을 때에도, 지금처럼 난처하진 않았었지. 그건 인정하겠다.
넌 내가 1년도 더 전부터 계속 피해오던 문제에 대답해야 한다고 일깨워주는군.
{@nickname} 박사, 다시 한번 묻지. 이 문제는 너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건가?
-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해.
- 나는 모든 협력 파트너를 아주 신중하게 고를 거야
……그럼 나도 내 대답을 해줘야겠군.
- 로도스 아일랜드는 계속 로도스 아일랜드의 방법을 고수해나갈 거야.
나에게도 내 방법이 있듯이 말이군.
- 질문할게 하나 있어.
- 엔시오데스, 칼의 목숨과 무엇을 맞바꿀 거야?
……
사흘 후
……박사, 솔직히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네가 감염자를 구조하는 로도스 아일랜드 사람이라니.
난 여태 너희들이 전설 속의 존재인 줄 알았어.
그리고 너희들이 엔시오데스와 함께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 인생은 언제나 아주 기묘한 법이지.
-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하하, 그래. 인생은 언제나 아주 기묘하지.
그때 난, 엔시오데스라는 남자를 정말로 싫어했어.
하지만 엔시오데스에게 싫어할 점이 있는 건 아니었어, 그저 내가 질투했을 뿐이지.
지금도 똑같아.
다른 건 몰라도 난 널 믿고 싶어, 박사.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나중에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케이트와 내 형제들을 돌봐 줘.
- ......
엔시오데스? 왜 네가?!
설마 정말로 월든 자작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허허벌판에 와서 너와 거래할 줄 알았던 건가?
……무슨 소리야?!
자작은 내가 대리인으로서 너와 거래하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어떻게…… 케이트는 친딸이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감히 어떻게!
자작의 딸을 납치한 네가 지금 와서 무슨 자격으로 자작의 결정을 평가하겠다는 거지?
좋아…… 그래, 좋아! 아주 잘 됐어!
이렇게 된 이상, 어이! 인질을 데려와!
오빠……
돈과 인질을 맞교환하자.
너희 쪽 사람이 중간에 와서 상자를 내려놔, 그러면 인질을 놔주겠어.
문제없다.
케이트, 가.
(작은 소리로)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
오빠…… 흑……
거래는 끝난 것 같군.
형님! 상자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럼 빨리 도망가!
예?
너희들, 자작이 정말로 우릴 놔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잖아, 엔시오데스.
쳇, 형제들! 빨리 도망가자!
박사님, 어쩌죠?
자작의 경비병에게 손을 댔다간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기기야 하겠지만…… 이렇게 보기만 해도 되는 건가요?
- 저 사람들의 안전을 확보해.
- 하지만 손을 댈 필요는 없어.
난 네가 사람들을 미리 멀리 도망 보낼 줄 알았다.
사람들한테 돈을 전해줘야 하잖아. 그리고 저 정도 수준의 사람들을 먼저 도망치게 했다면, 지금쯤 네가 저 사람들을 인질로 날 위협했겠지.
전해준다라…… 그러니까 처음부터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생각은 없었다는 건가?
……
살아서?
엔시오데스, 살아있다는 게 뭐지?
심장이 뛰면 살아있는 건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의 시체가 누더기처럼 끌려가는 걸 보는 게 살아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환자들이 약이 없어서 내 눈앞에서 숨을 거두는 걸 보는 게 살아있는 건가?
엔시오데스, 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그저 내가 어떻게 죽고 싶은지를 알고 있을 뿐이야.
원래 나와 영감탱이는 오늘 여기서 죽었어야만 해.
아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말해준 뒤, 놈을 죽이고 자살했을 거야.
내 소원은 그것뿐이었어. 내 소원은 그것뿐이었다고, 엔시오데스.
넌 왜 그 작은 소원마저 들어주지 않으려는 거지?
네가 내 도움을 거절했으니, 내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 말이 맞네. 넌 그런 사람이었지.
그리고 자작은 이미 알고 있으니 그 점은 안심해도 된다.
자작이 자기 아들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공포에 질린 모습이 참으로 재밌더군.
내가 안심하고 죽길 바라는 거냐?
확실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엔시오데스, 생각이 바뀌었다. 먼저 너를 죽이고 영감탱이를 죽이러 가겠어.
그다음엔?
그때 가서 봐야지!
죽어라, 엔시오데스!
?!
깨어났군.
엔시오데스, 네가 왜……
……
왜 날 죽이지 않았지? 날 동정하는 거냐?
칼. 나한테 너를 도울 수 없다 말했지만, 사실 너는 내가 감염자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던 거겠지.
인정하겠다. 확실히 난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자작에게 돌아갔을 때, 박사가 나한테 질문했지.
내가 너의 목숨과 무엇을 맞바꿀 것인지.
오래 생각했었다. 복수, 희망, 미래 같은 대답을 내놓긴 싫었으니까.
최종적으로 지금의 결론을 얻어냈다.
네 모든 친구의 목숨과 네 목숨을 바꾸는 거지.
뭐라고?!
너를 포함한 너희 모두는 지금부터 이 도시에서 이미 죽었다.
그리고 네 친구들은 근처 도시에 있는 내 지사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지.
너도 마찬가지다. 물론, 네게 다른 생각이 있다면 네 의견을 존중하도록 하마.
……녀석들이 살아있다고?
감염자들을 잡은 건 내 사람들이다.
……하, 하하…… 넌 정말로 오만하구나.
부정하진 않겠다.
자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네 여동생과는…… 유감스럽지만 헤어질 수 밖에 없다.
……네 계획에 따르지 않더라도, 동생을 만나러 갈 일은 없을 거야.
나 같은 오빠는, 이대로 잊어버리는 게 제일 나아.
어쨌든 내게…… 생각할 시간을 줘.
이제 너에게 시간은 충분하다.
……박사.
- 꽤 괜찮은 팀워크였지.
- 나에게 감사하도록 해.
완벽하다고 할만했다.
확실히 그렇군.
이 의뢰는 원래 너에게 사과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결국 너에게 더 큰 빚을 지게 될 줄은 몰랐군.
그리고 너와 월든 자작이 관계를 맺게 해주지도 못했고.
전례 없는 망신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다.
박사, 조금만 시간을 다오. 네가 만족할 만한 보답을 해줄 테니.
임무 보고서는 봤어.
결과적으로 보면 이 의뢰는 실패야. 월든 자작과 관계를 맺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배척당하게 생겼어.
월든 자작의 루트를 통해 로도스 아일랜드가 머물 곳을 찾겠다는 계획도 불가능해졌어.
- 미안해.
- 후회하진 않아.
- 너였어도 이렇게 했을 거야.
아직 말 안 끝났어.
하지만 로도스 아일랜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넌 올바른 선택을 해냈어.
후회할 것도 없지.
어쩔 수 없는 상황만 아니라면, 나도 로도스 아일랜드가 이런 귀족과 접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방법은 네가 한 선택보다 과감했을 거야.
그래도 우리가 비슷한 결과를 얻었을 거라는 건 부정하지 않을게.
게다가 이번 일에서 수확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나였어도 이번 일이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지금 바로 판단할 수는 없었을 거야.
켈시는 말하던 중 산처럼 쌓여있는 파일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실버애쉬라는 코드네임을 가진 임시 오퍼레이터의 협력 신청 서류인 듯하다.
엔시오데스.
- 이게 무슨?!
- ……
- 엔시오데스가……
어제 도착했어.
오퍼레이터로서 로도스 아일랜드에 들어오고 싶다고 했을 때, 인사부가 얼마나 곤혹스러워했을지는 상상이 가겠지.
이 일엔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결과는……
실버애쉬는 내가 건 조건들을 받아들였고, 오퍼레이터 테스트를 완벽하게 통과했어.
- 어쩐지 방금 올 때 다른 사람들 눈빛이 좀 이상하더라.
실버애쉬가 지금 응접실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 마침 네가 로도스 아일랜드 견학 좀 시켜주면 되겠네.
- ......
- 이게 무슨 뜻이야?
- 이게 네가 말한 보답이야?!
- 실버애쉬?
내 여동생인 엔시아가 여기서 치료받으며 오퍼레이터로 일하고 있잖나. 오빠로서 걱정돼서 따라왔다.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그렇다.
심사숙고한 결과다.
성을 코드네임으로 쓰니 기억하기 쉽지 않나?
칼은 내 계획을 받아들였다. 칼과 친구들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이 지급한 이 모니터링 팔찌 말이다만, 써보니까 확실히 전에 쓰던 것보다 더 나아졌군.
대량 구매를 생각해 봐도 될 정도로 상당한 관심이 생겼다.
대화를 좀 나눠보는 게 어떤가.
- 왜 오퍼레이터가 된 거야?
- 켈시에게 전해 들었을 때 잘못 들었나 싶었어.
켈시가 작성한 불평등 조약에 사인한 거 말인가?
그건 로도스 아일랜드의 일원이 되기 위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대가일 뿐이다.
-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 왜?
- 로도스 아일랜드는 네게 어울리지 않아.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내가 로도스 아일랜드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는 거였다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겠지. 아닌가?
똑똑한 사람이니 무엇때문인지는 무조건 알아챌 수 있을줄 알았는데.
더 직접적으로 '넌 로도스 아일랜드와 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해도 된다.
이게 나에게 있어서도 대담한 시도라는 건 인정하지.
- 할 말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
-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 {@nickname}.
- 카란 무역회사의 회장이 친구가 부족한 거야?
- 우린 이미 친구인 줄 알았는데.
나에겐 수많은 비즈니스 파트너, 부하, 경쟁 상대, 적이 있지만 유일하게 없는 것이……
친구다.
너와 나 사이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다는 걸 난 믿는다.
하지만 박사, 사람이 서로 이해하는 것엔 언제나 편차가 있고, 난 마음이 통한다는 것을 믿지 않지.
누군가의 생각을 알고 싶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언제나 직접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 네 주변엔 그에 맞는 사람이 많잖아.
- 널 이해해 주는 사람도 많을테고.
예를 들면?
- 엔야.
엔야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해주고 있다.
나와 엔야는 확실히 어떤 의미로는 서로 이해하고 있긴 하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선택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박사, 엔야는 아주 좋은 적수다. 난 이렇게밖에 묘사할 수밖에 없겠군.
- 엔시아.
엔시아가 성장한 것은 알고 있다. 많은 사물에 대해 날카로운 견해를 지녔지.
나는 엔시아가 원하는 걸 모두 줄 거고, 의견도 존중해 줄 셈이다.
하지만 난 엔시아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보다, 말해줄 수 없는 게 더 많지.
- 노시스.
노시스는 능력과 성격 덕에 너희들의 연구실에서 꽤 명성이 있는 것 같더군. 노시스는 많은 걸 알고 있지만, 그건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같이 지낸 결과일 뿐이다.
노시스는 함께 감정을 나누기에 적합한 대상이 아니야. 그건 노시스가 더 잘 알고 있지.
- 데겐블레허.
나와 데겐블레허는 깊은 관계지. 데겐블레허도 확실히 많은 걸 통찰해낼 수 있다.
다만 데겐블레허는 신경 쓰지 않는다. 데겐블레허는 가능한 많은 일 밖에 몸을 두려 하고 있지. 데겐블레허는 나를 사서 고생이나 하는 사람으로 여길 뿐이다.
나도 부정하진 않고 말이야.
- 마터호른과 쿠리어.
야카와 바이스…… 난 그 둘을 믿고 많은 일을 맡기지.
상하관계가 나와 그 둘 사이에 장벽을 세운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부탁을 주고받는 관계지, 공유하는 관계가 되긴 힘들지.
너도 보다시피 말이다.
난 네가 언급한 모든 사람과 내 일부분을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도 나와 모든 걸 공유할 수 없듯이, 서로 다른 이유로 인해 모든 걸 공유할 수는 없지.
- 넌 사람들을 너무 자세하게 구분하고 있어.
- ……다들 쉐라그와 관련 있으니까.
……그건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다.
마치 그해에 누구도 나에게 가주가 되길 원하는지 묻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지.
난 이미 만난 사람 하나하나의 가치를 따져보고, 그들을 내가 나아갈 길에 위치하도록 설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내가 그들을 위해 구분해낸 영역 안에서는, 그들을 진지하게 대한다.
하지만 누구도 모든 걸 감당해낼 수는 없지.
그렇지.
내 사업의 핵심은 쉐라그다. 주위를 둘러보면, 곁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이 땅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이건 대부분의 상황에선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관련된 모든 걸 판단하고 공유해야하는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할 때, 난 그런 시각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곤 한다.
……
내 부모님이 뜻밖의 사고로 돌아가신 해에 엔야와 엔시아는 아직 어렸다.
가주의 무거운 책임을 자연스럽게 내 어깨 위에 짊어지게 됐고, 여동생과 가족을 위해서 난 이를 악물고 실버애쉬 가문을 지탱했지.
몇 년 동안 가주로 지낸 후, 쉐라그에서 가주가 된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난 쉐라그를 떠나 빅토리아에 가서 공부하는 걸 선택했지, 아버지가 그랬던 것 처럼말이야.
유학하는 도중에 일어난 일에 관심이 있다면, 나중에 꽤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거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쉐라그에 진짜로 필요한 게 뭔지 알지 못했을 거고,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겠지.
몇 년 후, 난 스스로 유학을 끝냈다. 축적해둔 자본과 인맥을 가지고 쉐라그로 돌아와 카란 무역회사를 세웠지.
이 과정은 원래대로라면 더 길었어야 했다. 유학시절 대부분 공부와 목적을 가진 사교 활동으로 차 있었지만 결코 편안하게 보낼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라는 건 인정하지.
다만 안타까운 건, 내 마음속에 늘 울려 퍼지는 경종이 내게 미리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는 카란 무역회사의 발전사로 이어지지.
카란 무역회사의 현재의 성과는 나 한 사람의 공은 아니지만, 난 회사와 이 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 그렇구나. 피곤했겠네.
- 다른 사람과 공유하길 원하는 거구나.
박사, 우리는 다른 사람을 놀리는 데에 있어서도 통하는 게 있나 보군.
내가 피로를 느낀 적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느긋함의 중요성을 모르진 않는다.
그저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해서 여기에 온 거라면…… 나에겐 박사와 친구가 될 자격이 없었겠지.
그래.
우리 같은 사람은 자신이 인정한 대가를 고생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을 거고, 그걸 나약한 핑계로 삼는 일은 더더욱 없을 거다.
반대로 난 내가 이 길에서 본 모든 것을 내가 인정한 한 명의 사람과 공유하길 바란다.
- 근데 그게 네가 로도스 아일랜드에 들어온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나는 원래 우리의 사업은 무역에만 접점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너는 나에게 네 사업은 모든 사람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알려주려 했지.
네가 날 설득했다.
쉐라그는 재앙이 일어난 적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쉐라그 사람들은 감염자에 대해 편견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지.
하지만 감염자가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것을 겪는지, 그리고 어떤 것을 겪을지에 대해.
내가 충분히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빅토리아의 법률에 따라 회사 규정을 선포했을 때, 내가 생각했던 건 관리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교에 지나지 않았지.
- 이미 충분해.
- 강요하진 않을게.
너와 친구가 되려는데, 이거로는 부족하지 않나?
하지만 우리가 친구가 된다면 너는 강요할 권력을 갖게 되지.
난 감염자와 로도스 아일랜드의 사업에 대해 더 잘 이해해야 한다.
네 덕분에 깨달았다. 이것이 카란 무역회사뿐만 아니라 내가 이 땅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하다는 걸.
그리고 너를 알게 된 후,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로도스 아일랜드, 너와 함께 행동하는 거라는 게 명백해졌다.
그래서 난 실버애쉬가 됐다.
아니면 더 단순한 이유가 있지. 친구끼리는 가끔 만나줘야 하는 거잖나?
- ......
난 거래를 통해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서로 동등한 가치를 지불해서 빚지지 않는 것 말이지.
그런데 우정, 가족애, 사랑에서의 지불은 가치로 따질 수가 없지.
그러니 나는 상대를 조심해서 골라야만 한다.
- 유학 때 뭘 경험했는지에 관심이 가기는 해.
- 나한테 거절할 권리는 없는 것 같네.
- 안목이 정말 별로구나.
난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며칠 머물 테니 시간은 충분하다.
어쩌면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이 모르는 빅토리아 귀족들의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
박사, 이 자리에 제삼자가 있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쉽게 눈치챘을 거다……
내가 오늘 온 목적은 원래 우정을 '확립'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지.
너도 품위가 있는 편은 아닌가 보군.
뭐 좋아, 박사. 너한텐 나에게 함 내의 설비를 견학시켜줘야 하는 임무가 남아있겠지.
이제 걸으면서 얘기하지.
- 문제없지.
- 좋아.
- 하……
……그리고 박사.
이번에 내 방법이 약간 갑작스러워서, 너를 곤란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건 인정하겠다.
그래도 다음에 날 만나면 분명히 기뻐할 거다.
어쨌든 나는 너의 어려운 문제 해결을 도와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이니까. 그렇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