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업무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보기 드문 지질학자로 혼자서 상당 부분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어스스피릿. 그런 그녀의 휴식을 '직접' 방해하는 일은 가능한 한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부분은 리듬이 흐트러지네.
건반이 무거워서 후반 템포가 빨라지면 따라올 수 없으려나?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해 볼게요.
많이 연습하면 될 거예요.
오늘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해.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어. 계속 이런 잘못된 자세로 연습하다간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어.
쉬도록 해.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어.
하지만 다음 수업을 언제 할 수 있을지 몰라서……
어스스피릿 선배님처럼 언젠가 반드시 멋지게 피아노를 치고 싶어요!
재능이 있으니 분명 그런 날이 올 거야.
안녕, 어스스피릿!
박사가 나더러 널……
으응? 에피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아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중이야.
네 보류 스킬이라고 생각했는데……
굳이 안 쓸 필요는 없지.
어째서?
음악 학원이 몰려 있는 라이타니엔에서도 음악을 배우라고 강요하진 않아.
게다가 우린 로도스 아일랜드에 있잖아. 악기를 다루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로도스 아일랜드엔 라이타니엔인에게 맞는 오락 시설 같은 게 없어. 하지만 여가 시간에 악기를 배우면 힐링도 되고,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과 평안함을 느낄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라이타니엔에서 음악적 소질을 가진 사람은 교양인 취급을 받을 수 있다고. 밀집 지역에 사는 감염자로서는 쉽게 가질 수 없는 대접이랄까……
(음악을 배워두면 라이타니엔에서 감염자라는 정체를 숨기는 데도 도움이 될 테니까.)
(어스스피릿 선배님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못 알아듣겠어!)
앗, 간지러워! 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아델을 가르치는 건 앞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 걸릴 시간을 체크하기 위한 일종의 사전 테스트인 셈이야.
하지만 에피는 금방 배우는 것 같은데.
지난번에 돌아왔을 때가 얼마 전이었더라?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제는 제법 그럴듯하게 칠 줄 아는 것처럼 보이던데.
오늘이 겨우 세 번째 수업이야. 가울어로 명명된 《문라이트》를 더듬더듬 칠 수 있을 정도지.
아델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는지는 나도 몰랐어, 부러울 정도야.
아름다운 음악은 지금과 같은 세월 속에서도, 남은 생애에서도 다소나마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지.
음악은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전에 부모님께 배운 적 있는데, 이것과는 전혀 다른 라이타니엔의 악기였어요.
하지만 이 건반은 묵직해서 속도가 빠르면 쫓아갈 수가 없어요!
멋진데, 전통적인 피아노와는 전혀 다른 음색이야.
들을 때마다 전율이 느껴져.
프로방스 씨! 있잖아요. 이 악기는 원래 엄청 커요.
연주해본 적은 없지만, 어머니가 가르치는 학교에서 본 적 있어요.
예배당의 한 면을 다 차지할 만큼 엄청나게 커요!
지금의 것은 전통 악기를 개조한 거야.
음색을 최대한 복원하고 크기도 줄여야 해서, 제작할 때 많은 점을 타협해야 했지. 건반이 묵직한 것도 그 타협의 결과물이기도 해.
이 녀석의 진짜 소리를 들으면 분명 전율하게 될 거야.
그렇다는 건, 날 네 고향으로 데려가 준다는 거지?
엄청 기대돼!
내 고향은 라이타니엔의 외진 마을이라 이런 건 없어.
참, 하마터면 본론을 깜빡할 뻔했네.
박사가 널 찾아가 이걸 건네주라고 했어.
흐음…… 또 귀찮게 됐군.
손에 쥔 건…… 작성해야 할 지질 분석 보고서인 건가?
어디 보자…… 로도스 아일랜드 전방의 항로에 관한 지질 보고서랑…… 최근 주변 지역의 기상이변 발생 가능 보고서……
그리고 또 지질 샘플 5종에 대한 분석, 샘플이 속한 시대와 광물에 대한 감별 작업……
박사가 언제까지 달라고 그랬지?
모레.
모레까지?
전문가 셋으로 이루어진 팀에서 처리해도 최소 이틀은 걸릴 텐데.
로도스 아일랜드에는 지질 전문가가 그리 많지 않아.
게다가 로도스 아일랜드는 의료 기업이라서, 앞으로 지질 실험실을 세울 계획도 없고……
결론적으로 우린 인력도, 설비도 부족해. 게다가 오랫동안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할 거야.
선배님, 어스스피릿 선배님! 저도 도울게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있는 한 문제 없을 거야. 아델, 걱정은 내게 맡기고 넌 즐겁게, 여유롭게 지내도록 해.
어스스피릿 선배님, 오늘 이 정도면 추, 충분히 쉬었어요!
모레, 발티랑 같이 외근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푹 쉬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함께 하지 못할 것 같은데, 네 보청기 상태는 어때?
로도스 아일랜드의 실내 환경에서는 별문제 없었어요.
실외에서도 괜찮기를 바라야죠.
그럼 됐어. 외출 시에는 지원 장비가 필요할 테니까 다른 선배한테 이야기해 봐.
그 녀석이 일벌레긴 하지만 전부터 널 지켜보고도 있었지.
네…… 하지만 {@nickname} 선배는 언제나 바쁘셔서 혹시나 방해하는 건 아닐까 해서요.
괜찮아요. 출발하기 전에 준비해야 할 건 모두 확실히 준비할 테니까요.
응, 나도 오늘은 한숨 푹 잘 생각이야. 힘을 비축했다가 내일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는 거지.
일손이 부족하진 않아? 그렇게 해서 시간 안에 끝낼 수 있겠어?
충분한 휴식과 충분한 즐거움은 업무 효율을 100% 보장해 주지.
특히 이런 연구 직종에서는 30분만 집중하면 해결될 문제도, 심신이 고단할 때는 며칠 밤을 새워도 진척 없는 경우가 다반사거든.
물론 정상 근무에 야근까지 해야 하니까, 야근 수당은……
박사가 야근 수당은 규정대로 주겠다고 큰소리 땅땅 치던데.
그렇다면 나야 좋지. 어쨌든 별도 작업이 없으면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다행인걸. 마침 나도 보고서가 필요했는데!
너……
헤헤, 그럼 부탁할게! 어차피 야근하는 김에!
이번에는 또 뭐야?
뻔하지 뭐.
재앙정보전달자 업무에 참고할 지질 분석 보고서.
샘플은?
네 샘플 보관함에 이미 넣어놨어.
그건 또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데?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말은 쉽지.
재앙정보전달자라면서 로도스 아일랜드에 머무는 경우가 별로 없잖아.
돌아올 때마다 내게 일거리만 잔뜩 안기고.
동료 말고도 우리가 친구라는 걸 잊은 거야?
어쩔 수 없잖아, 재앙정보전달자의 일이라는 게 이런 거니까.
이번에도 잠시 들른 것뿐이야.
벌써 가려고?
응, 일이 아직 덜 끝났어. 돌아와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다 쓰면 또 가야 해.
필요한 건?
이 보고서를 보게 될 사람이 포기할 만큼 최대한 어리둥절한 내용으로 부탁해.
전문적으로 해 달라는 거군, 문제없어.
뭐가 어리둥절하다는 건가요?
재앙정보전달자 전용 보고서인데, 대개의 경우 우리가 보려고 작성하는 게 아니거든.
주로 고용주나 현지 관리들을 위한 보고서지.
재앙정보전달자가 학자와 함께 다양한 데이터를 분석하면, 상대가 데이터를 가지고 재앙을 피해 이전할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거야, 이것 역시 일종의 업무 방식이지.
이렇게 해서 오보에 따른 리스크를 판단을 내리는 상대에게 넘기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도시 이전에 따른 경제적 손실에 대한 책임을 재앙정보전달자에게 떠넘길 수 없게 되지.
재앙정보전달자 역시 평범한 사람이니까. 평범한 사람처럼 느끼고, 평범한 사람처럼 실수도 해.
일부 재앙정보전달자는 단 한 번의 오보로 자신감을 잃고, 자신을 의심하다가 결국 이 일을 포기하기도 하지.
실수하는 건 정상이야. 하지만 재앙정보전달자라는 직업은, 한 번의 실수로 져야 하는 책임이 막중하니까……
리스크를 전가하는 방식 역시, 재앙정보전달자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거지.
하지만 이렇게 하면 데이터 분석이 필요한 작업량은 늘어나게 돼.
게다가 왔다 갔다 하는 데 시간도 걸리는 터라,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재앙정보전달자를 돕는 수밖에.
그것도 괜찮은걸, 로도스 아일랜드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을 테니까.
네가 예전처럼 재앙정보전달자와 지질학자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면 우리 일 년에 몇 번 만나지 못했을 거야.
그게 네가 만날 기회를 마구잡이로 쓰는 이유인 거야?
글쎄~
그렇게 히죽거리지 마!
애초에 나한테 그렇게 하자고 말한 건 너잖아!
맞아, 바흐만 선생님의 비극이 또다시 재연되는 건 싫거든.
앗, 구르크 사립 학원의 바흐만 교수님 말인가요? 라이타니엔에서 유명한 지질학자이자 음악가이신 분이 어스스피릿 선배님의 스승이셨던 거군요!
어머니께서 그분과 아는 사이세요.
어릴 적, 제 생일 때 저희 집에 오신 적 있어요.
물론 그날이 제 생일인 줄 아셨던 건 아니에요. 그냥 일 때문에 어머니를 찾아오셨던 거죠.
제 생일이라는 걸 아시곤, 생일 선물이라며 멋진 연주를 들려주셨어요.
무척 아름다운 곡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분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야.
바흐만 교수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지방 귀족이 교수님을 재앙정보전달자로 고용하자, 교수님께선 전문 분석을 내놓으셨지.
바흐만 교수님도 재앙정보전달자인 건가요?!
지질학자나 음악가처럼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분도 재앙정보전달자야.
귀족은 바흐만 교수님에게 최종적이고 명확한 답을 내놓으라고 했어. 재앙이 일어날지……
……주민들을 이전시켜야 할지 말이야.
바흐만 교수님께선 순수한 의미의 라이타니엔 학자시지. 연세는 많은 편이지만 세상 물정에 그리 밝으신 편은 아니야.
교수님께선 가장 보수적인 방식을 고려하시곤 해. 그래서 현지 지질 환경을 분석한 뒤에 사람들을 당장 이전시키는 게 좋다는 결론을 제시하셨어.
하지만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어.
사람들이 원래 살던 곳에 돌아왔을 때는, 힘들게 기르던 작물이 모두 밭에서 썩고 있었어.
남은 양식을 귀족에게 넘겨야 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배고픔을 피할 수 없게 됐지.
식량을 수확하던 귀족은 울먹이며 구걸하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어……
“이건 모두 그 바흐만이라는 자의 잘못이다. 제대로 된 분석을 내놨다면 너희가 대피할 일은 없었겠지.”
“바흐만이 너희를 이렇게 만든 거다.”
“모두 바흐만의 잘못이다.”
그 말은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어.
그들은 한밤중에 바흐만 교수님을 습격했지. 돌로 내리쳐서 기절시킨 뒤에 밧줄에 묶어 화형에 처하겠다며 말이야.
!!!
바흐만 교수님마저도……
그래서 넌 그 비극이 다시 재연되는 걸 원치 않는 거지.
폭력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 사람을 지키려는 거야.
선배님이 지질학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인가요? 지식으로 사람들을 지키려는……
아니, 그런 건 아냐.
지질학을 배우게 된 이유는 간단해. 너와 달리 난 아츠 쪽으로 영 꽝이거든.
광석병에 감염된 후 오리지늄 아츠를 다루는 실력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재능이 나아지지는 않더라고.
오리지늄 아츠 쪽으로는 서툴거든.
너무 겸손한 거 아냐? 그런 게 서툰 거라면 난 말도 안 되게 멍청한 건데.
뒷말은 맞는 것 같은데.
내 재능으로 오리지늄 아츠를 배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 쓸모없는 짓일 뿐이야.
어릴 때 제법 똑똑했던 내게 부모님은 큰 기대를 거셨지.
어릴 때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오리지늄 아츠과 이론에 대한 온갖 지식을 배우기 시작했어.
주위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말했어. 부모님께선 입성할 만큼 가문의 위상을 내가 높여줄 거라고 기대하셨고.
하지만 점점 자라면서 배워야 할 것도 점점 복잡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똑똑함'만으로는 쓸모없는 거였어.
설령 이론에 훤하다고 해도 재능이 없는 건 없는 거야.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지질학은 달라. 내가 열심히 공부하면 여기서 날 찾을 수 있었어……
부모님의 기대를 한껏 받던 그때의 나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질학을 공부하게 된 거야?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바흐만 교수님의 지질학 수업은 절망에 빠진 내게 구원이었어. 날 구해주고, 날 받아줬지.
그때부터 지질학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어. 작은 성과를 거두며 점점 사랑하게 됐지.
그건 날 받아주는…… 집이었던 거야.
하지만 지질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따분한걸.
반대야. 이 땅의 모든 책을 쌓는다면 아마 끝이 없을 거야.
지질학은 끝이 보이지 않는 책장과도 같아.
현지답사에 나설 때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찾아내고, 모든 곳의 역사를 알 수 있어.
마치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아……
지질학은 끝이 보이지 않는 대자연의 도서관이라고 말이야.
그런 점에서 지질학은 따분하지도, 외롭지도 않아.
그렇다면 넌 여기에서 일하는 게 꽤 기쁜 거지?
그렇지 않아요, 프로방스 씨. 실내 검사와 연구만으론 지질학이라고 할 수 없어요.
다른 재앙정보전달자가 가져다주는 흙과 진흙에서 성분을 분석하고,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을 분석하는 것도 지질학이라곤 할 수 없어요.
어스스피릿 선배님은 간단한 기능만 있는 휴대용 장비를 사용하고 있어요. 그건 현지답사 때 사용하는 거죠.
나와 내 장비들이 요새 연구실에만 머물렀던 건, 재앙정보전달자들과 로도스 아일랜드에 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요새 업무량이 좀 늘어난 것 같아. 잘 모르는 재앙정보전달자들마저 보고서를 달라며 찾아오기도 하고.
재앙정보전달자들은 예측이 틀리면 엄청 스트레스받는다고.
네 보고서는 예측 결과를 대략적으로나마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되거든.
일반적으로 이런 보고서는 학자에게 부탁해야 해. 전문 지식에 대한 내용은 둘째치고, 보고서에 등장하는 내용이 업무상 필요한 게 아닌 경우가 종종 있어.
넌 뛰어난 지질학자이기도 하지만, 엄청 잘나가는 재앙정보전달자이기도 하잖아.
그래서 설령……
설령 고용주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도, 참고할 만해.
앗, 그래서 작업량이 늘어난 건가? 그런 원인도 있었다니.
헤헤, 내 덕분에 재앙정보전달자 사이에서 네 명성이 자자해진 것도 있다고!
모두 너를 '프락투어의 마스터'라고 부르던데. 엄청 멋지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그동안 내게 시켰던 게……
이유 없는 야근……
앗, 그러고 보니 나 씻으러 가야겠다. 서류는 일단 여기에 놔둘께……
거기 서!
앗, 다리 저려!
선배님, 제가 쫓아갈까요?
됐어, 조금 움직이면 괜찮아질 거야. 넌 쉬고 있어!
다리…… 아앗…… 다리 저려……
프로방스, 거기 서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