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일
실버록 블러프스 전투가 끝난 후, 시즈 일행은 증기 기사가 남긴 흔적을 발견하게 되고, 시즈는 '사명'을 언급했던 사람과 함께 거닐었던 황금빛을 추억하게 된다.
외곽의 이 버려진 땅만 정리하면 파라곤 부대가 런디니움의 성벽 아래에 도착할 수 있다.
우리가 실버록 블러프스의 요충지를 돌파하자 정면의 나흐체러르 군대는 전장에서 바로 퇴각했어. 본래 우리는 버려진 땅에 살카즈가 매복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하지만 지금 보니…… 아무도 없군.
하늘의 그 기이한 붉은색도 사라지기 시작했어.
아직도 좀 공포스러워. 요 며칠 동안의 전투는 정말이지 꿈을 꾸는 것 같았어.
이번 승리는 전장의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이번 쟁취해 낸 거야. 비록 힘들고, 어려웠지만……
이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함께 일궈낸 승리야.
우리 집이 이미 근처에 있어.
속도를 높이자, 어서……
갑자기 커다란 굉음이 울리며, 건물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건물에서 그나마 온전하다고 할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창문마저 전부 산산이 부서지고, 건물 깊은 곳에서 괴상한 굉음이 들려왔다.
내가 그렇게 쉽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다른 소대가 우리 쪽으로 접근하고 있어……
……이 굉음은, 증기 소리?
비나, 설마……
“빅토리아.”
……
다른 소대에게 이 건물에서 즉시 철수하라고 전달해. 전투 경계 등급은 최고로 하고. 엄폐물을 찾아서 방공에 주의한다.
본 소대는 방어 진형으로 계속 전진한다. 가능한 모든 기습을 염두에 두고 주의하도록.
비나, 너희 모두 증기 기사가 왕의 안식처에서 나온 후부터 미쳤다고 했지!
하지만 실버록 블러프스 전장에서는 우리를 도와줬잖아? 모두들 빅토리아의 영광이 돌아왔다고 했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다. 시즈는 자신이 위로 받쳐 올려졌던 순간과 갑옷에서 들려오던 음습한 울부짖음을 기억한다.
“영광…… 빅토리아!!!”
시즈는 갑옷에서 나는 소리가 왕의 안식처에서 들었던 소리와 다른지는 구분할 수 없다. 강철 투구와 갑옷은 속에서 나는 소리를 모두 비슷하게 들리게 한다.
또 다른 가능성은 없나? 지금 갑옷 속에 있는 게……
시즈는 고개를 저으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떨쳐냈다.
자신의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한 그 용기가, 어떤 일방적인 환상으로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
가자.
녀석과 다시 만나게 되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녀석은 분명 여기에 있어. 적어도 온 적은 있겠지.
벽과 바닥은 화염과 칼날의 흔적으로 가득했고, 거대한 상처 자국은 건물 깊은 곳에까지 이어졌다.
이 흔적들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니다. 왕의 안식처의 커다란 문 앞, 선왕의 조각상이 세워진 길……
빅토리아인의 찬가에서 증기 기사의 칼날이 내뿜는 것은 불굴의 의지.
지금은 어떠한가?
여기 살카즈 시체가 있어, 하나뿐만이 아니야.
살카즈들이 마지막 증기 기사를 이곳에서 포위해 죽이려고 했던 것 같아.
시즈는 소름이 돋았다. 들어본 적 있는 말이다.
한 손이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시즈.
다그다는 시즈를 바라본다. 그녀들은 함께 왕의 안식처 지하에서 같은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영광의 무덤.
녀석은 마지막 증기 기사야.
만약 그가 런디니움 때처럼, 우리의 적이 되어 앞을 막는다면……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알고 있어, 언젠가 우린 녀석과 맞서야 한다는 걸.
……다그다.
녀석에게는 자신의 사명이 있어. 우리에게도 우리의 사명이 있고.
“사명.”
누군가가 이야기한 적이 있다. 런디니움에서 그녀의 모든 삶은 그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함일 뿐이었다고.
…… 그래.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걸 인정하지 않기로 결심한 지 오래였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사명'을 내려놓고, 녀석을 구하면 돼. 간단하지.
그런데 우리한테…… 그럴 권리가 있나?
머뭇대는 것보단 저지르고 다시 생각하는 게 나아.
가자.
시즈는 키 작은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헝클이고는 곧바로 앞장서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이 검게 그을린 시체야. 그리고 이건…… 증기 기사의 갑옷 파편이고.
이건 제대로 된 매복이라기보다는, 조우전에 더 가까워. 살카즈들도 이렇게 성가신 적을 여기에서 만날 줄 몰랐던 거야.
확인 끝. 여기에 숨이 붙어 있는 살카즈는 없어.
이제 안에 있는 공간 하나만 남았어.
무너진 벽의 뒤, 방의 남은 절반이 짙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다.
아무런 소리도, 어떠한 숨결도 없다. 마치 조금 전의 증기 분사음이 환각이었던 것처럼.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언제든 철수할 수 있도록 준비해.
시즈는 방 안 깊숙한 어둠 속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어쩌면 그 증기와 하얀 연기가 다시 뿜어져 나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화염으로 된 장검이 갑자기 번쩍하며 얼굴을 비출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즈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한다. 어쩌면, 가장 긍정적인 가정이라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친구가 거대한 증기 갑옷에 기댄 채 곤히 잠들어 있다거나.
……
……
어때, 비나?
……아무것도 없네.
증기 기사는 이미 떠났어. 우리가 방금 들었던 증기 분사음과 붕괴 소리는, 아마도 녀석이 벽을 뚫고 나가면서 난 소리겠지.
녀석은 이미 런디니움 성으로 돌아갔을지도 몰라.
외곽 부대에 알려. 경보를 해제하고 10분 후 출발한다.
알겠어. 내가 연락할게.
모두 한시름 놓는다.
그러나 시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나 씨……?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시즈는 방금 본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걸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어.
아니면 모든 것이 이미 증명되었을지도.
파라곤 부대, 예정된 시간에 위치에 이미 도착했습니다. 런디니움의 성벽이 가시거리 내에 있습니다.
이제 외곽 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북동쪽으로 계속 전진하겠습니다. 각 차량은 좌표를 확인……
……
사악한 기운의 붉은빛이 걷히자, 아름다운 석양이 보였다. 하지만 시즈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다.
시즈는 이 금색의 석양빛을 보면서, 선생님의 아름다운 갈기와 자신의 손에 들린 전설이 깃든 장검을 떠올렸다……
그리고……
비나 씨, 뭘 보고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시즈는 약간 당황해 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가, 이내 자조적으로 웃었다.
…… 정말 나답지 않지, 안 그래?
시즈는 몇 초간 망설이다가 손가락을 폈다.
가장자리에 탄 흔적이 있는, 붉은색 천 조각이 시즈의 손에 놓여 있다.
요 며칠 계속해서 불던 매서운 바람에 천 조각이 나부꼈고, 델핀이 날아가는 천 조각을 다급히 잡으려 했지만, 시즈는 그저 내버려 두었다. 천조각은 순식간에 멀리 날아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건?
버려진 땅에서 발견한 거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옷 조각일지도 몰라. 아니면 애초에 증기기사가 가져온 게 아닌, 원래 그곳에 있었던 걸지도 모르고.
(붉은색 옷……)
알레데일 컴버랜드가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해?
……
난 많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를 원해. 하지만 이런 바람은 그저, 내가 여전히 노포트 구의 길거리 건달이길 바라거나, 이 모든 일이 없었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어.
어느 자경단 단원 말로는 예전에 알레데일 컴버랜드가 자기들 리더였는데, 왕의 숨결을 얻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우리를 위해 희생한 거야.
글쎄, 정말 그렇진 않을 거 같은데. 맞지?
……
당신은 내가 예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을 거야.
런디니움에 있을 때 내게 가장 필요했던 건 살카즈의 동향을 제외하면, 바로 나 같은 '정보원'과 '염탐꾼'의 정보였어.
컴버랜드 공작의 작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그 후계자는 여전히 런디니움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지. 이게 뭘 의미하는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어.
비나 씨,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당신 마음이야. 하지만 빅토리아의 거물 사이에, 이유 없는 선의와 도움은 없어. 결국……
알레데일은 목적을 갖고 내게 접근했던 거야.
나도 알고 있어. 마지막에…… 아주 솔직한 대화를 나눴거든. 알레데일은 캐스터를 위해 일했어. 캐스터가 왕의 숨결을 얻도록 도우려는 목적이었지.
그런데도 당신은 알레데일이 살아있기를 바라는구나.
나는…… 여전히 알레데일을 친구라고 부르고 싶어.
……그건 아주 위험한 감정이야, 비나 씨. 군대에는 규율이 있어야 기강이 잡혀.
알아, 델핀. 이건 돌이킬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는 죄라는 걸. 나도, 알레데일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힘이 부족했단 이유로 알레데일과…… 다른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것이 후회돼.
……난 컴버랜드와 직접 만나본 적은 없고, 런디니움에서도 그저 멀리서 봤을 뿐이야. 하지만 적어도 컴버랜드가 자기 체면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건 알아.
그걸 위해 컴버랜드가 치른 대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지.
이렇게 말하면 매정해 보이겠지만, 난 컴버랜드 같은 사람을 여럿 봤어. 이 나라에서는 이게 바로 게임의 룰이야.
컴버랜드는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내가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당신들을 만난 덕분일 거야.
난 당신들 덕분에 그 더러운 타성에 휘둘리지 않고, 거물들의 연회에서 불행한 조연 역할을 맡는 선택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하지만 당시 컴버랜드는 고립무원의 상태였지.
알레데일…… 나는 알레데일이 당당하게 운명을 직시했고, 굴복을 택한 실패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델핀. 이 비극을 항상 잔혹한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건, 일종의 나태함이 아닐까?
습관이 되어버린 나태함 말이야.
……비나 씨, 노력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아주 많아. 우리가 거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운명'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이 거스를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야.
훗, 전에 얘기했던 '더러운 타성'처럼?
암묵적 규칙을 깬 사람들은 손쉽고도 과감하게 말살당하지, 증기 기사들처럼 말이야.
그리고…… 내 아버지, 알리스테어처럼.
비나 씨……
걱정하지 마. 아버지 때문에 불평할 생각은 없어. 솔직히 별로 잘 알지도 못하고.
말하자니 우습네. 양부모님은 항상 내게 내 친아버지 '알리스테어 폐하'의 일을 지지치도 않고 계속 이야기해 줬지만……
그랬던 두 분도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난 그 이야기들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거든.
나중에 알레데일이 다시 내게 그 황제 얘기를 꺼내고 나서야 겨우 드문드문하던 기억 일부를 떠올릴 수 있었어. 무모하고, 야심도 많으면서, 전심전력으로 대업을 이루려고 했던……
하하, 나와 아버지 사이에 혈연관계 외에 도대체 무슨 닮은 점이 있는지 모르겠어. 아버지는 개혁에 실패해 처형당한 군주인 데다, 거의 모든 귀족의 미움을 샀잖아.
하지만 난, 노포트 구의 건달이지. 내게 가장 익숙한 장소는 술집, 복싱장이 아니면 경찰서뿐이고.
나와 아버지는, 서로가 '빅토리아'라는 성을 공유하긴 하지만, 그뿐이야.
……우리 윈더미어 공작가는 빅토리아와 라이타니엔의 경계를 지키는 역할을 줄곧 도맡아 왔지. 그래서 런디니움에서 발생한 정치 투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확실히 어머니께선, 그 쿠데타와 알리스테어 폐하에 대해서도 별로 언급하지 않으셨지.
마치 일부러 회피하는 듯했어. 그래서 내가 당시 상황을 보고 혼자서 분석한 적이 있지만……
윈더미어 공작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건 나도 알아, 델핀. 네가 내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이게 바로 빅토리아의 게임 규칙이잖아. 이 모든 건 바람 하나 없는 정적 속에서 진작에 결정 난 일이야.
……
당시 어머니의 생각이 어떠했든 간에, 난 무언가를 바꾸려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우리도 바꾸고 싶어 하잖아, 안 그래? 다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뿐이야.
맞아.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들 뭐가 문제인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이 전쟁이 빅토리아를 새롭게 만들고 있는 건 확실해.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걸까?
너, 나 그리고 우리 팀원들이 바라는 미래…… 우리는 정말 그 미래에 가까워지고 있는 걸까?
우리는 막 웰링턴이 입장을 바꾸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대공작들이 주저하는 것도 봤어.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과 똑같이.
델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모든 일들, 우리의 국가가 겪은 이 모든 일들이…… 대체 왜 발생했다고 생각해?
……진짜 내 의견을 듣고 싶어?
간단해. 교활하고 흉악한 살카즈들 때문이야. 놈들이 우리를 기만했으니까.
빅토리아는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저택에 앉아 신문이나 보는 귀족들과 똑같은 결론 정도는 나도 쉽게 낼 수 있어.
하지만 우리는 이미 직접 봤잖아.
이 '영광스러운 조국'은 근시안적이고, 오만하고, 경솔하지. 탐욕스러운 귀족, 무능한 관료, 나약한 의회, 착취에만 온통 정신이 팔린 지주와 공장주로 넘쳐나고……
문제는 말이야, 비나 씨. 어쩌면 사람들 눈에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그 시대에도, 빅토리아는 마찬가지로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는 거야.
……이 모든 것은 바로 빅토리아 과거 영광의 근원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경멸하는 그 타성 자체이기도 해.
……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부대가 생겼어, 어쩌면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때가 된 걸지도 몰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나와 내 아버지 사이에 비슷한 점이 하나 더 있어.
우리의 적이…… '빅토리아'라는 것.
아버지는 너무 경솔했어. 물론 내가 아버지보다 더 낫다고는 할 수 없으니, 어쩌면 우리의 결말은…… 결국 같을 수도 있지.
하지만 적어도 시도할 가치는 있다고 봐, 그렇지 않아?
……
비나 씨…… 아니, 알렉산드리나 비나 빅토리아.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지금 우리에게 동료가 생겼고, 파라곤 부대가 전쟁에서 기적을 만들어낸 건 사실이야.
하지만…… 지금 이 모든 건 런디니움이라는 결국 이 도시와 그 주변에 국한된 것뿐이야! 빅토리아 전체에 도시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이 전쟁에 참여한 병사와 군관들은 당신을 영웅이라고 생각해, 그 이유는 대공작들이……
대공작들은 자신의 실패를 덮어줄 영웅이 필요하지. 나나 우리 모두, 결국엔 놈들이 앞세운 상징에 불과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러면 또 어때.
우리는 이미 여기에 있어.
이 빅토리아를 움직이는 '타성', 영광에 대한 미련, 찬란함에 대한 숭배, 제왕, 공작, 높고 낮은 직위의 귀족들, 꼭두각시로 전락한 의회……
이제 전부 끝낼 때가 온 거야.
이 모든 것들을 바꾸고 싶어?
고작 바꾸는 걸로 그치진 않아.
나는 놈들과 싸울 거야.
당연히 쉽지 않겠지. 맞서야 하는 것들이 어쩌면 이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것, 심지어 우리 자신이 될지도 몰라. 그 과정도 10년, 20년 이상의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하지만 오늘 런디니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더는 재연되지 않도록 하려면, 이게 남은 유일한 선택이야.
과거의 빅토리아를 깨부숴야 해. 카운트 다운이 끝나고, 결국 링 위에 마지막 한 사람만 남을 때까지.
……나는……
……
그건 너무 멀고 험난한 길이야. 아니, 이성적으로 말할게. 거의 실현 불가능해.
이 나라엔 개혁가나 혁명가가 부족했던 게 아니야. 누군가는 실패했고, 누군가는 승리했지.
하지만 예외 없이 그 모든 노력은 런디니움의 안갯속으로 사라졌고, 빅토리아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비나, 이곳을 링으로 삼겠다고?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맞닥뜨리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어퍼컷'을 날리는 것뿐이야.
……하아.
미리 말해둘게. 난 당신과 같이 링 위에 설 생각은 없어.
하지만…… 만약 당신이 멋지게 한 방 날린다면, 기꺼이 박수갈채를 보낼게.
그래.
그러면 우선 런디니움 시민들에게 파라곤 부대가 자기들 편에 섰다는 걸 알려야겠군!
우리가…… 돌아온 거야.
시즈는 곁눈질로 스쳐 지나가는 금빛 그림자를 언뜻 보았다.
양아버지가 기대에 차서 그녀의 선생님이 바로 빅토리아의 상징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가 보좌하고 함께한다면, 그녀는 영광 속에서 더 이상 어떠한 고통도 없을 때까지 국가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발걸음은 늘 빨랐고, 그의 등장은 항상 예상할 수 없었다.
그의 황금빛 갈기는 가장 추울 때 언제나 바람을 막아주고 따뜻하게 해 주었다.
그의 몸에는 태양의 숨결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몇 년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잠깐만, 선생님!”
……
비나.
손이 시큰거려, 관이 너무 커. 어른들이 도와줬어도, 이걸 묘지까지 들고 가는 건 힘들었을 거야.
양아버지의 묘지는 양어머니의 옆이었다. 그들은 같은 묘비를 썼다.
내가 아직 어릴 적, 놀러 오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오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마도 이미 포기한 거겠지. 어쨌든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선생님.”
“이제…… 어떻게 해야 돼?”
너는 이미 지식을 습득하는 법과 전투하는 법, 그리고 생존하는 법도 배웠다.
더 이상 네게 가르쳐줄 건 없다.
“하지만……”
선생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황금빛 갈기가 내 얼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늘 그렇듯, 햇빛의 냄새다.
하지만, 정작 너는 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구나.
나에게 배운 것들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고 있어.
“……”
“다들 내가 선생님을 볼 수 있는 건, 내가 '사명'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어.”
아니, '사명' 같은 건 없다.
네게도, 내게도.
사명은 속박당한 사람이 자신을 옭아맨 사슬을 부르는 말일뿐이다.
언젠가 네가 발걸음을 내딛는다면……
그때는 나도……
잠깐, 새로운 통신이 왔어......
알겠어. 계속 조사해 줘. 필요하면 로도스 아일랜드에 협조를 요청해.
무슨 일이지?
방금 기술자들이 우리를 도청해 온 신호를 추적했다고 보고해 왔어.
공작인가? 아니면 살카즈?
이상하게도 둘 다 아니야.
신호 분석 결과는……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런디니움 도시 사람인가 봐. '밀스카'라고 불리는 듯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