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스타일'
모든 게 과거와 같다. 새비지와 아미야의, 그리고 박사까지도…… 하지만 변화도 있었다. 새비지는 변화된 자신의 생각을 당신에게 알려주었다.
후우, 박사님. 시식할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우리도 합류할까요?
어서 와!
맛이 어때? 로도스 아일랜드에 온 뒤로 제대로 만들어 본 적 없는 요리라서……
으음…… 으음…… 앗 뜨거……
천천히 먹어. 급하게 먹다가 혀 데일라.
마…… 맛있어요! 쫄깃한 치즈랑 바삭거리는 식감, 달콤하면서도 아삭한 당근의 식감…… 예전 맛이랑 완전 똑같은걸요.
(한시름 놓으며) 다행이다.
박사님, 박사님도 드셔보세요……
앗, 잠깐! 박사는 이거야.
- 으음?
박사의 입맛에 맞춰서 만들어 봤어. 양념을 다르게 써 봤는데 박사한테는 이게 더 입에 맞을 거야.
- 음…… 이런 달달한 맛, 나쁘지 않은데.
- 음…… 이렇게 짭조름한 맛, 나쁘지 않은데.
- 음…… 이렇게 칼칼한 맛, 나쁘지 않은데.
후훗, 박사는 역시 이런 맛을 좋아하는구나. 전통 조리법에 퓨전 스타일을 더한 게 박사의 입맛에는 더 맞을 거야.
- 내 입맛을 잘 알고 있네, 새비지.
그야 당연하지, 기억력이 좋은 편이거든. 예전의 박사가 가장 좋아했던 게……
……앗.
- 예전의 나도 이런 맛을 좋아했었나?
- ……
- 여전히 맛있는걸.
미, 미안. 박사, 그 일 기억 못 하는 거지?
미안해, 내 잘못이야. 실수로 그런 말을……
- 괜찮아, 아름다운 기억이 남아있는 게 사과할 일은 아니니까.
고마워, 박사……
박사님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언니. 오늘 먹은 파이는 기억 속 맛처럼 정말 끝내줬어요! 게다가 당근 향이 더 진해진 것 같아요.
몇 년 동안 계속 연습했거든. 덕분에 줄곧 솔로로 지내야 했지만. 하.하.하……
맛있는 파이를 만들어서 가족과 친구들, 이웃들에게 맛을 보여 주고 싶었어.
주변 사람 챙기는 걸 좋아하는 건 여전하네요.
음, 이 단맛은……
림 빌리턴의 특산물답게 당근 맛이 확실히 다르네요.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잘 산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일만 생각하면 화가 나. 짜증 나는 상인들만 아니었어도……
네? 무슨 일 있었나요?
로도스 아일랜드의 모두를 위해 당근 파이를 만들고 싶었어.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림 빌리턴의 당근 통조림을 구할 수 없었거든……
로도스 아일랜드에 오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가족들을 위해 푸짐한 한 상을 차렸는데, 로도스 아일랜드에 오고 난 뒤론 당근 통조림을 구할 수 없게 됐지 뭐야. 너무 이상하지 않아?
그래서 특별한 '비즈니스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했지.
- (크루아상이겠네.)
(크루아상 씨구나……)
알고 보니 빅토리아 상인들이 림 빌리턴의 당근이 노화 방지와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건 물론, 피부케어에도 도움이 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더라고.
으응? 당근을 먹으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근데 피부케어 같은 건……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전문가'가 그러더라고, 상인들이 퍼뜨린 소문을 손님들이 믿는다며.
특히 림 빌리턴의 당근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소문이 도는 바람에, 통조림 수요가 폭증하면서 가격도 덩달아 뛰었대……
이번 요리에 쓴 당근 통조림은 평소 알고 지내던 농가에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거야. 개인 식량인 셈이지.
정말이지, 어떻게 이런 괴상한 소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걸까?
이해가 안 되네요…… 하지만 상인들이 소비자의 심리를 이용하는 건 으음…… 합리적인 거니까요.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진짜 화가 너무 나더라고!
그 사람들이 소문을 이용해 림 빌리턴의 당근 통조림 가격을 높이면서, 한 해 동안의 생산량을 몽땅 사재기해버리는 바람에, 림 빌리턴에선 지금 현지 주민들조차 당근 통조림을 못 구할 지경이라더라고.
그 '전문가'가 그러는데, 가격이 많이 올라서 상인들이 림 빌리턴의 농가에 다른 작물 대신 당근을 심으라고 부추기라도 한다면……
나중에 가격이 폭락했을 때 당근을 내다 팔 수도 없을 거래.
자급자족하는 농민들의 농사 계획을 망쳐서 피해를 주면, 분노한 농민들이 외부의 상인들에게 맞설 게 분명하고……
나중엔 '울타리 사건'같은 위기가 또 찾아올지도 모른대!
근거 없는 소문을 내버려 두는 건 확실히 위험해요.
- '울타리 사건'이라면……
아! 다른 사람한테 들은 적이 있으신가요?
림 빌리턴의 유레카 자치주가 성립된 계기이기도 해요. 예전에 림 빌리턴의 세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현지 주민에게는 무척 중요한 사건이었죠.
식사 시간에 이야기하기엔 좀 긴 이야기긴 한데……
간단히 말하자면, 빅토리아의 상인들이 림 빌리턴의 광물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두 지역 사이에 있던 소형 이동도시를 이용해 일으킨 사건이야.
그놈들은 사람들을 통제하며 림 빌리턴 지역의 광물 자원을 빼앗고, 빅토리아로 가져가 이익을 취했지…… 정말 비열한 행동이었어.
그래서, 현지 주민들이 앞장서서 빅토리아 상인들이 세운 '울타리'를 걷어냈지……
그 다음엔, 보다 자주적인 유레카 자치주를 공동으로 세우곤, 도시의 통제권을 림 빌리턴에 넘겨줬어. 정말 멋지지 않아?
그때 새비지 언니가 현지 주민들을 열심히 도와줘서 림 빌리턴에선 제법 알아주는 편이었어요.
- 대단하네.
- ……
- 그런 일이 있었다니.
아니 뭐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냐. 박사의 지능과 능력이라면 그 정도 문제를 해결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거야……
- ……
- (내가 그렇게 대단한가……)
- 응, 걱정 말고 맡겨줘.
하지만 '울타리 사건'을 통해서 림 빌리턴 사람들은 자신의 자랑스러운 땅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걸 증명했는데 어째서……
맞아! 평화로운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어…… 상인들이 규정대로 올바르게 장사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거든.
하지만…… 새비지 언니의 반응을 보니까, 뭔가 다른 생각이 있었나 보네요?
후후~ 역시 아미야는 날 잘 알고 있다니깐.
전달자를 통해 고향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어,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고.
모두가 다른 작물 대신 당근을 심으면 상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셈이니, 반드시 농업 조합과 상의하라고 알려줬지. 농업 조합이 이 사태를 좌시하진 않을 테니까.
불합리한 폭리 때문에 원래의 삶이 무너져서는 안 되잖아…… 어쨌든 더는 상인들의 수작에 휘둘리지 말라고 경고해 뒀어.
와~ 역시 언니답네요.
으음…… 그러니까, 일 처리가 화끈한 게 여전하단 뜻이에요!
그거야 당연하지! 사람이란 게 어디 그렇게 쉽게 변하겠어? 이번에도 아미야와 박사가 걱정돼서 하던 일도 그만두고 바로 달려왔잖아.
확실히 그러네요……!
어쨌든 림 빌리턴의 당근 통조림을 구입한 손님들이라면,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맛을 즐겁게 맛봤으면 해.
맛있는 음식은 가짜 '명약' 같은 게 아니라 즐거움을 선사하는 존재니까!
다른 지역의 세력들이 계속해서 혼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경계해야 해. 지난번에는 오리지늄 광물, 이번에는 당근…… 다음에는 또 무슨 혼란을 일으킬지 누가 알겠어?
그놈들은 우리의 자원을 원해, 자신들을 위해 우리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하지. 하지만 난……
림 빌리턴을 떠났다고 해서, 림 빌리턴의 땅에서 놈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닌 것을 약탈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
새비지 언니……
에이, 그런 표정 짓지 마.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지금의 언니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아서요.
으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실 그렇게 많지 않아. 나, 난…… 마음속 생각을 누군가에게 들려주며, 자신의 신념을 굳게 믿도록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아미야…… 나도 이런저런 일을 겪은 어른이잖아.
내가 아는 건 때로는……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는 거야. 하지만 상황이 나빠지는 걸 바라보고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나아.
위기를 느끼면 바로 행동해야 해. 안 그러면 상황이 악화된 뒤에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이미 일어난 실수를 만회할 수 없을 테니까.
으음, 이건 내가 직접 깨달은 교훈이기도 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걸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야.
알 것 같아요.
아미야……
알 것 같아요, 새비지 언니. 왜냐면 로도스 아일랜드도 그렇거든요.
응? 로도스 아일랜드도?
네. 제가…… 아니 우리가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건,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죠.
꾸준히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결국에는 우리의 최종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고 믿어요.
맞아! 흑…… 네가 그렇게 이야기해 주니 정말 기뻐, 흐흑……
에에? 제가 말실수한 건가요? 새비지 언니, 왜 우는 거에요? 울지 마요!
그런 게 아냐…… 네 말에 감동받아서 그냥……
흐윽…… 전에 헤어질 때만 해도 꼬마였던 네가…… 이제는 이렇게 멋지게 자라다니……
으아아! 진정해요, 새비지 언니! 윽, 너무 꽉 안지 말아 주세…… 으으……
사실 언니랑 오랫동안 헤어져 있으면서 줄곧 걱정했었어요. 새비지 언니가 예전과는 달라진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그 점이라면 걱정할 것 없어, 아미야.
오늘 림 빌리턴의 당근 파이를 먹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지휘관은 그 옛날 바벨에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던 아이처럼 여전히 착하고 귀엽고, 또 겸손하고 다정해……
내 힘과 시간을 널 위해 기꺼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가장 믿음직스럽고, 날 가장 믿어주는 친구니까.
언니, 다 먹었어요.
- 정말 맛있었어.
다행이다. 당근 통조림은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으니까 잘 보관해 뒀다가 다음 파티에 또 모두에게 대접할게.
매달 림 빌리턴 요리 시식회를 여는 건 어떨까?
헤헤,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참! 박사, 방금 일은……
- 으음?
으음…… 그러니까, 예전에 관한……
……아, 먼저 가서 설거지하고 있을게요.
급하게 할 일이 있는데 박사님께서 언니랑 남은 재료 정리 좀 도와주실래요?
- 알았어.
- 어? 간다고? 갑자기?
그럼 먼저 갈게요. 박사님, 부탁드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언니랑 이야기 잘해보세요.
앗! 아미야, 일부러 이럴 건 없……
가버렸네…… 정말이지, 다른 사람 생각하는 건 여전하구나.
미안, 박사.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 안셀과 로프에게 시식해 달라고 했는데, 둘 다 늦는 바람에 지금쯤 파이를 구워야 하거든.
- 내가 도와줄게.
응. 고마워, 박사.
하고 싶은 말은…… 요리하면서 천천히 들려줄게.
- 새비지, 내 과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
조금 밖에 몰라. 내 눈에 비친 박사는……
앗, 아냐! 켈시랑 비밀 유지 계약을 맺어서 말하면 안 돼!
……사실 박사에게 이야기해도 되고,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게 뭔지는 나도 잘 몰라.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지만, 켈시랑 이야기하면서 박사의 대략적인 상황을 알게 됐어. 그래서 그동안 말실수할까 봐 겁이 나기도 했지.
하지만 아미야가 예전처럼 늘 박사와 함께 있는 걸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박사와 이 얘기를 할 거라 생각했어.
사실 박사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성격이 조금 달라진 것 말고 박사와 아미야, 그리고 나와 아미야의 관계는 여전히 변함없어. 그러니까 나와 박사도 예전과 같은 거야.
- 예전의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거지?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어!
모르는 게 거의 없었거든. 박사에게 물어보면 항상 대답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예상했던 일이 결국 실현되기도 하고, 작전을 지휘할 때는 더……
앗, 그만해야겠다…… 더는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크흠, 어쨌든…… 박사는 아미야와 나, 그리고 널 알고 있었던 많은 사람에게 '지식'을 알려줬어.
아미야에게 난 더 많은 걸 알려줄 수 없어. 어릴 때 같이 놀아주는 게 전부였지. 하지만 박사라면 다른 사람을 이끌어 줄 수 있을 거야.
앗! 박사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차라리 우리가 헤어진 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어떨까?
- 그래, 들어볼까.
다행이다. 고마워, 박사.
그해 림 빌리턴으로 돌아간 뒤로, 박사와 아미야의 소식을 더는 들을 수 없었어. 하지만 아미야가 열심히 성장할 거라고, 박사도 아미야를 도와줄 거라고 믿었지.
나중에 로도스 아일랜드를 찾지 못하고, 아미야와 박사를 다시 찾을 수 없었다고 해도 림 빌리턴 광업 회사에 더는 머물지 않았을 거야.
사실 아미야와 박사 곁을 떠난 뒤에 난 림 빌리턴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변함없이 인부들의 안전을 지키며, 구조 임무에 참여했지. 대부분의 시간을 광산에서 보냈다고나 할까?
최근 몇 년 동안 림 빌리턴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어…… 이번 당근 통조림 현상도 림 빌리턴에 생긴 이상한 사건 중 하나고.
다른 지역에서 림 빌리턴을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어.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상대적으로 평화롭던 대형 도시에서도 광산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고, 감염자 수도 감당하지 어려울 만큼 폭증했지.
하지만 사람들의 처우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었어.
나와 동족들을 화나게 하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는 걸 알 수 있었어. 회사에만 계속 머문다면 불합리한 변화를 해결하지 못했을 거야.
림 빌리턴으로 돌아온 뒤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어. 고향에서 평생 성실히 일하며 살고 싶다고 해도, 이 땅은 평화가 이어지는 걸 점점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바꿔야겠다고 결심했지.
림 빌리턴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게 되면, 림 빌리턴 사람들의 운명, 그리고…… 우리의 평화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내가 워낙 출중한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사실 여러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요청을 받았거든?
그런데도…… 로도스 아일랜드의 지휘관이 아미야라는 걸 알고선 망설이지 않고 달려온 거야.
로도스 아일랜드에 온 뒤로 이 땅에서 일어나는 많은 변화를 지켜볼 기회가 생겼어.
림 빌리턴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여러 곳에서 변화를 원해.
어쩌면 다른 지역에서 누군가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내 곁에서 노력하는 건…… 아미야와 박사 두 사람이야.
여기엔 희망이 있어. 그래서, 너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림 빌리턴을 떠나는 건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 림 빌리턴에서 나고 자란 우리로서는 고향을 떠난다는 건 새로운 땅을 개척해야 하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니까.
안정된 환경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날 이끌어준 건 나의 결심, 아미야의 결심이야……
그리고 이제는 네가 결심할 때야, 박사.
- ……
- 난 이미 결심했어.
……너희들이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든지, 또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되든지……
이제부턴 내가 너희 곁에 있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