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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퍼레이터 레코드브릿지

사가는 우연히 길을 잃은 상촉 아가씨 소옥을 만났다. 소옥은 천사부에 은혜를 갚으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지만, 소옥을 데리고 백조를 향해 가던 사가는 점점 소옥의 말이 모순됨을 알아차린다. 은혜와 원한, 진실과 거짓…… 이것들은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등장 오퍼레이터: 사가


극동의 객승 사가는 그날, 백조를 떠나 남서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백여 리를 지나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염국 도성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해가 점차 저물어가자, 남쪽에서 숨겨져 있던 집들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폐허가 된 마을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집들은 무너져 내렸고, 풀과 덩굴이 뒤엉켜 자란 데다가, 우물과 수로는 진흙에 막혔으며, 대문 앞엔 이끼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사가

그래도 이 집은 그나마 멀쩡한 편이군…… 작은 정원도 있고.

사가

비록 지금은 마을이 황폐하지만, 예전엔 길이나 집들이 잘 정돈되어 지어졌었던 것 같네. 꽤 부유했던 마을이었겠어……

사가

그런데 어찌 이리 황폐해졌을까…… 재앙? 항로? 치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봄날의 밤바람은 부드럽지만 약간의 한기를 품고 있었다. 쌍둥이 달에서 나온 차가운 달빛이 낡은 창을 통과하여 사가의 앞을 비추자, 창살에 드리운 그림자의 무늬가 또렷해지면서 좀 더 흐릿한 나무 그림자와 뒤섞여 이내 얼룩덜룩한 하나의 그림자가 되었다.

창가에 기대앉은 사가는 자연의 섭리와 인간사의 흥망성쇠에 대해 생각하다가, 무심코 손을 뻗어 그 그림자를 툭툭 건드려 보았다. 손끝이 바닥에 닿자마자, 갑자기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손가락 밑의 그림자도 함께 떨리는 것 같았다.

사가

……아, 집만 쳐다보고 있었더니, 배 속이 빈 것도 잊고 있었군.

사가

백조 사람들은 음식에 정말 진심이지. 건량만 해도 종류가 이렇게나 많으니, 색다른 맛에 욕심이 앞서 필요 이상으로 사 버렸군. 그럼 뭐부터 먹을까……

사가

제일 평범한 조미 건량마저 향이 이렇게나 좋다니. 게다가 오색 곡물 분말, 진공 두부 말이, 자열 건조 버섯 밥까지……

사가는 중얼거리며 벽 너머에서 나는 기척에 귀를 기울였고, 몸을 창 아래에 바짝 붙인 채 조심히 방문 쪽으로 몸을 옮겼다.

막 문 너머를 들여다보려던 찰나, 똑똑 두 번 문 두드리는 소리에 사가는 행동을 멈췄다……

???

실, 실례합니다……

사가

……아니오, 괜찮소. 이 집에서 문과 창이라고 해봐야 겨우 틀밖에 남지 않았으니, 시주께서 소승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 주시오.

담장을 사이에 두고, 발소리가 잠시 멈췄다.

이윽고 한 손이 문틀을 짚자, 달빛이 그 새하얀 손목을 비추었다. 이내 치맛자락을 사르르 울리며 문 안으로 한 필라인 소녀가 들어왔다. 살구처럼 둥글고 큰 눈매에 까만 머리를 한 소녀는 얼굴에 불안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소녀가 들어온 순간, 사가는 완두콩 꽃의 향기를 맡았다. 미처 몰랐는데, 이토록 황폐한 정원에서도 여전히 콩 넝쿨이 자라고 있던 것인가……

필라인 소녀

저기…… 스님, 혹시 백조에서 오셨어요?

사가

음……

사가

맞소. 소승은 극동 출신인데, 현재는 염국을 유랑 중이고, 며칠 전에 막 백조를 떠나왔소.

사가

혹시 시주께선…… 이 집의 주인이시오?

필라인 소녀

네? ……한눈에 봐도 오랫동안 폐허였던 것 같은데, 제가 어떻게 여기 주인이겠어요.

사가

소승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소. 보통 사람을 현혹하려거든, 폐가를 전각으로, 이슬을 음식으로, 바람 소리를 음악으로 둔갑시키지 않소이까?

필라인 소녀

현혹이라니, 그게 무슨……

필라인 소녀

잠깐, 저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저, 저는 멀쩡한 집안의 딸이에요! 그냥 지나가다 스님처럼 하룻밤 묵으려고 들어온 거라고요!


사가

그렇군…… 시주께서는 상촉 사람이고, 백조 쪽으로 가다 길을 잃어 이곳을 배회하고 계신 거였구려?

소옥

맞아요. 저는 대대로 촬강봉 아래서 살아온 원씨 가문의 사람이고, 이름은 '옥'이에요. 편하게 소옥이라고 부르세요.

소옥

제가 이번에 상경한 건, 천사부에 가서…… 우리 가족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천사님을 찾아뵙기 위해서예요.

사가

그러니까, 소옥 시주께선 은혜를 갚기 위해 상경했다는 말이오?

소옥

은혜를 갚는다고까지는…… 음, 뭐랄까…… 우리 집이 부유하다 보니 한번은 도적의 표적이 된 적이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시던 천사님께서 우리 가족을 구해주셨거든요.

소옥

부모님 모두 의를 중요시하는 분들이라, 천사님께 감사를 전하고, 또…… 새해 인사도 할 겸 편지랑 특산품을 보내셨어요.

소옥

그런데…… 중간에 분실된 건지 소포를 보낸 뒤로 아무런 소식도 없었어요. 가뜩이나 부모님께서 연로하신데 이런 일로 마음 쓰시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제가 직접 백조에 가서 천사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려는 거예요.

소옥

그런데 설마하니 백조 근처까지 다 와놓고 성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할 거라고는……

사가

그랬구려. 이번 달 백조는 순항 중이니, 소옥 시주께서 길을 찾지 못한 건 아마도 정박지를 헷갈려서 그런 것 같소만? 소승도 과거 강제에 갈 때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소.

소옥

순항……? 음, 이제 막 백조에서 떠나온 스님께 이런 질문드리기가 너무 죄송하지만…… 실은 제가 처음으로 고향 밖을 나온 거거든요, 저 혼자서는 백조가 어디 있는지 찾기가 너무 힘들어요……

소옥

혹, 일정에 지체되지만 않으신다면…… 스님께서 저를 백조의 천사부까지 데려가 주시길 부탁드려도 될까요…… 백조에 도착만 한다면 제 모든 걸 털어서라도 반드시 사례할게요……

사가

(소옥 시주, 과연 상촉의 규수로군. 점잖게 말을 잘하네…… 염국에 갓 도착했었을 때의 소승이었더라면, 무슨 말인지도 이해 못 했을 테지……)

사가

지체될 게 뭐가 있겠소. 소승은 사방을 떠도는 중이지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오. 백조를 벗어난 지도 겨우 며칠밖에 안 됐으니, 다시 따라잡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소. 소승이 기꺼이 시주의 상경을 도와드리리다. 따로 사례는 하지 않아도 되오.

소옥

어찌 그러겠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배웠어요. 만약 스님께서 동행해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아마 이 황야에서 길을 잃고,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소옥

그런 은혜를 입는다면, 당연히 성심껏 보답해야죠.

소옥

스님은 좋아하시는 거 없으세요? 아니면 여행 중에 필요한 물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사가

여행에 필요한 물건은 모두 갖추고 있어 지금 당장 따로 필요한 것은 없소.

소옥

자꾸 사양만 하시고…… 혹시, 제가 보답하겠다는 걸 믿지 않으시는 건가요?

사가

아니, 그게 그런 게 아니라…… 소승은 늘 혼자 다니다 보니, 필요한 건 이미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오……

사가

(……왜 소옥 시주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소옥

혹시…… 스님은 저를 믿지 못하시고, 여전히 제가 페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사가

……

사가

시주, 그게 무슨 말이오. 소승은 전혀……

소옥

흑…… 그럼 스님은 지금, 제가 괜한 걱정을 한다고 나무라시는 건가요……

사가

아니 소승은……아, 그럼 백조에 도착하거들랑 시주가 절 위해 밥 한 끼 사주시오…… 그거면 충분하오……

소옥

스님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시는군요. 그러고 보니 아까 스님께서 백조에서 가져온 건량을 세시는 소리도 들었어요.

사가

그건 소옥 시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걸 듣고……

소옥

그, 그걸 들으셨나요! 그렇다고 제 앞에서 그걸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정말……

사가

……

소옥

스님, 왜 갑자기 말을 안 하세요?

사가

……또 말실수할까 봐 그러오.

소옥

……풉, 미안해요, 제가 나빴어요. 전 어렸을 때부터 남 말꼬리 잡는 걸 좋아해서, 이웃 동생도 자주 뭐라 했었거든요. 한번은 제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제 물건을 던질 뻔한 적도 있어요…… 그 물건이 뭐였더라……

소옥

얘기가 샜네요…… 아무튼, 스님께 사과드릴게요.

사가

그, 사과까지는……

사가

……그나저나 소옥 시주, 이 건량 좀 드시겠소?


며칠 후

소옥

스님, 저 발이 좀 아파요……

사가

괜찮소, 마침 점심 무렵이기도 하니, 여기서 좀 쉬었다 갑시다.

소옥

네…… 백조에 도착하면, 무사히 천사부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사가

소옥 시주에겐 정당한 사유가 있으니, 그저 절차대로 등록하고 알리기만 하면 되오. 소옥 시주가 그 천사님도 마음씨가 곱다고 했잖소. 아마 문전박대는 안 당할 것이오.

소옥

……네. 하지만 저는 전달이 잘 안될까 봐 걱정이에요. 아니면 이런 자질구레한 일 따위는 애초에 전하지 않을지도 모르고요……

소옥

제게도 스님 같은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며칠간 동행해 보니, 스님께선 마음씨도 인자한 데다가, 무예도 뛰어나서 정말 부러워요.

사가

……무예는 단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익힌 것일 뿐이오. 세상엔 힘으론 해결 안 되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더 많소.

소옥

그건 스님처럼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저희 같은 평범한 사람은 힘이 조금이라도 더 있기를 바라요. 그래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해결책이 조금이라도 더 생기니까요.

소옥

만약 제가 그때 그렇게 어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힘이 있었다면 어찌…… 어찌하여 천사님의 우연한 선의에 기대어서야 겨우 가족을 지킬 수 있었겠어요……

사가

(소옥 시주의 집이 도적의 습격을 받았던 건, 어린 시절의 일이었던 건가……?)

사가

소옥 시주의 말씀을 듣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소.

사가

시주께서 그 천사님과 인연이 있고 또 그 능력을 동경하신다면, 어째서 천사부의 시험에 응해보지 않은 것이오? 천사의 무예를 익히신다면, 지켜낼 수 있는 건 비단 가족만이 아닐 텐데.

소옥

……제, 제가요? 제가 감히 어떻게……

소옥

아, 실례했네요…… 스님의 귀한 말씀, 마음에 새겨 잘 생각해 볼게요……

소옥

으음, 물통이 비었네요. 이왕 쉬는 김에, 물 좀 끓이고 출발하면 어떨까요?

소옥

스님, 혹시 불 좀 피워주실 수 있을까요? 이런 말씀 드리기에 뭐하지만, 저는 늘 불이 무서워요. 야외에서 돌아다니려면 불이 꼭 필요한데도……

소옥

대신 제가…… 물을 길어올게요. 아까 개울 하나를 지나왔던 게 기억나서요.

사가

소옥 시주, 이제 발은 아프지 않은 거요?

소옥

그럼, 스님의 귀를 한번 만져봐도 될까요? 어릴 적 오라버니랑 나들이를 갈 때면, 제가 힘들어서 울고 떼쓸 때마다 오라버니가 자기 귀를 만지게 해줬었는데, 정말 효과가 있는 것 같았거든요.

사가

아, 그건 조금……

소옥

후훗, 장난도 못 치겠네요. 다녀올게요.


소옥

이 개울가엔 민들레도 있네…… 조금 따 가야지. 모처럼 불도 피웠는데, 물만 끓여서 뭐 하겠어.

소옥

건너편에도……

소옥

좁긴 해도 발 디딜만한 돌이 있으니까……

소옥

이 돌…… 어째서 움직이는 거지?!

소옥

앗? 엄청나게 큰 글룸핀서잖아?!

소옥

살, 살려주세요…… 스님……!

???

아가씨, 당황하지 마세요!!

???

……잠깐, 당신은……?

???

모르겠다! 일단……

???

아아아, 내 발!!!!

소옥

아아아, 그그그게 당신 발을 집었어요!!


낯선 소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

사가

별것 아니오. 그런데 소형제, 이 글룸핀서의 사체는 왜 끌고 온 거요……?

낯선 소년

네? 아직 신선할 때 빨리 뱃살과 집게살을 발라서 먹어야죠, 안 그러면 아깝잖아요! 하하!

소옥

에? 이렇게 큰 글룸핀서도…… 먹을 수 있나요?

천사 학생

그럼요. 아, 아직 인사도 안 드렸네요. 저는 이씨 성을 가진 천사 학생이고, 지금은 천사부 농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천사 학생

이 글룸핀서가 크긴 하지만, 글룸핀서의 구조는 다 비슷하죠. 작은 놈의 껍질을 벗겨 살을 발라 먹듯, 큰놈도 마찬가지예요.

천사 학생

물도 이미 끓였잖아요. 저는 당신들이 불을 피우는 연기를 보고 다가간 건데, 마침 이…… 아가씨가 위험에 처한 걸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소옥

천, 천사님……?!

사가

이 천사님이셨구려, 실례했소. 소승은 사가라 하고, 극동에서 와서 지금은 염국을 유람 중이오.

소옥

저는…… 원옥이고, 상촉 사람이에요. 상경하는 도중에 길을 잃었는데, 다행히 스님께서 동행해 주고 계세요.

천사 학생

오……

소옥

이 천사님……지금 백조로 가시는 중이신가요? 그렇다면 혹시 천사부로 돌아가시려는 건지……?

천사 학생

어…… 네, 맞아요. 저는 희귀한 샘플을 채취하러 나왔다가 이제 돌아가는 길이에요. 어차피…… 백조로 가는 거라면, 같이 가실래요?

사가

소옥 시주, 정말 운이 좋구려. 걱정하던 일을 이 천사님께 한번 부탁해 보는 게 어떻겠소……

천사 학생

음? 무슨 일이요……?

소옥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소한 일이에요. 백조에 도착한 뒤 말씀드릴게요!

소옥

이 천사님이 아까 말씀하신 '샘풀'이라는 건, 혹시 천사의 법보인가요? 어릴 때부터 천사님들은 수많은 신통력과 온갖 보물을 지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요……

천사 학생

하하, 법보까진 아닌데, 저도 천사부에서 지낸 지 꽤 됐지만, 이렇게나 온전하게 자란 건 본 적이 없어요……한번 보여드릴게요!

소옥

어머, 저, 저는 그냥 천사의 법보를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죄송해요……

사가

소옥 시주가 이렇게 덤벙이는 건 보기 드문 일이구려.

천사 학생

괜찮아요, 괜찮아요! 이 가방 안엔 사실 법보 같은 건 없어요. 있는 거라곤 이것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진짜 좋은 물건이에요……

사가

……

사가

이, 이건…… 곰팡이 핀 귤이 아니오……?

천사 학도

맞아요! 이 곰팡이 좀 보세요, 얼마나 건강하고, 얼마나 아름다워요……

천사 학도

이거라면 선배의 논문도 잘 해결될 거예요……


사가

……소옥 시주.

소옥

……어, 저, 저는……

사가

소옥 시주 손에 든 건, 이 천사님의 가방 아니오?

소옥

……

소옥

돈을 훔치려던 건 아니에요. 그냥…… 물건 하나만 빌리려던 거였고, 나중에 다시 돌려드릴 생각이었어요……

사가

소옥 시주는 천사부 출입증을 '빌리려'고 하는 것이오?

소옥

……

사가

사실 소승은 일전에 왜 소옥 시주가 이 천사님께 이번 상경의 목적을 밝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소. 감사가 전달이 안 될 걸 걱정한다면, 이 천사님께 찾아달라 부탁하는 게 분명 더 좋을 텐데 말이오?

사가

아무래도 소옥 시주는 천사부에 직접 들어갈 생각인 것 같소. 심지어는 이 천사님의 물건을 훔치면서까지……

사가

내 묻겠소. 소옥 시주께선 천사부에 가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 했던 게요?

사가

찾으려는 그 천사님은, 시주께 어떤 사람이란 말이오?

소옥

……스님께서 이렇게 묻는 걸 보니, 이미 다 눈치채셨나 보군요…… 그러면서 굳이 또 물어볼 필요가 있으신가요?

사가

……세상사 가운데 사람이 자기 목숨까지 걸게 만드는 건 몇 가지뿐이지 않소.

사가

은혜를 갚으려던가, 아니면……

사가

원수를 찾는 것이겠지요.

소옥

……

사가는 말없이 손을 뻗어 소옥의 미간에 손을 대었다.

사가

시주, 부디 신중하게 생각하시오.

소옥

……스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시니, 분명 어떻게든 절 막으려 하시겠죠. 하지만 제 가족은 모두 그 천사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제가 살아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반드시 원수를 갚아 가족이 눈을 편히 감게 해주기 위해서예요!

사가

……

사가

소옥 시주, 염국 법률은 매우 엄중하오. 만약 그 천사님이 정말로 사람을 해쳤다면, 삼법사에 고발하면 되지 않소. 염국의 율법이 분명 시주를 대신해 엄벌을 내릴 텐데, 굳이 자신을 구렁텅이 속으로 떠밀 필요가 있소?

소옥

전…… 사실 그 천사의 성도 이름도 알지 못해요. 그런데 어떻게 고발하겠어요……

소옥

게다가, 관리와 백성은 다르잖아요. 이야기책에도 나오는 그 많은 미제 사건들에는 전부 기인이든 영웅이든, 청렴한 관리든 아는 사람이 있지만, 전 혼자예요. 그런데 어떻게 천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겠어요?

사가

소옥 시주의 말은 틀렸소. 한 집안이 몰살된 일은 분명 중대한 사건이오. 설령 범인의 이름을 모른다 한들, 삼법사가 어찌 그런 걸 눈감아준단 말이오? 증거만 있다면 천사라도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거요.

소옥

증거…… 그런데 전 증거도 없어요……

사가

그렇다면 어떻게 천사가 범인이라고 단정하는 게요?

소옥

저…… 전 기억해요! 그녀의 모습을 기억해요……

소옥

그리고…… 피투성이의 땅…… 제 발 아래 흐르던 피……

소옥

제가 깨어났을 땐…… 잔해 아래에 깔려있었어요. 집은 다 무너졌고, 가족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죠…… 그 모든 건 제가 그녀를…… 그녀를 본 이후였어요……

소옥

천사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그런 신통력을 가졌겠어요? 그 천사가 우리 가족을 해친 게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그랬다는 거죠?!

사가

……소옥 시주는 그 천사의 이름을 모른다고 했소. 그렇다면 그 천사를 본 건 언제, 어디였소? 어린 시절이오? 아니면 성인이 되고 나서인 게요? 폐허였소? 아니면 집 안이었소?

소옥

그건…… 그건…… 아마도……

소옥

하지만 전 알아요! 전 그냥…… 안다고요!

사가

직접 그 천사가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신 게요?

소옥

……

소옥

하지만 분명 제가 그녀를 쫓아갔을 때…… 죽은 사람들을 봤어요…… 너무나도 많은…… 살아남은 건 오직 저 하나뿐이었어요……

사가

조금 전엔 분명 가족 시신조차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소?

소옥

시신…… 맞아요…… 아니, 아니지……

사가

……아아, 소옥 시주 당황할 것 없소. 소승이 너무 급하게 물어봤나 보오. 사람은 큰 충격을 받으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게 정상이거늘……

소옥

……우리 집 식구가 몇이었더라?

소옥

열하나……

소옥

……아니면 오백?

사가

……


사가

소옥 시주…… 꽤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이제 좀 정리가 된 거요?

소옥

저……

사가

소승이 무례를 무릅쓰고 묻겠소. 소옥 시주…… 진정 어디 출신이시오?

소옥

……또 저를 페이로 여기시는 거죠?

소옥

저, 저는 원 씨고, 촬강봉 아래에 살았어요. 부모님과 오빠, 새언니, 그리고 친언니가 있었고…… 창가의 파초에 잎이 몇 장이나 돋았는지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어요! 제 출신이 이렇게 분명한데, 어떻게……

소옥

하지만 그 피바다가 된 황야는…… 대체……

소옥

스님! 저 좀 만져 보세요. 저는 따뜻하고, 심장도 뛰어요. 배고픔도 목마름도 알아요. 그런데 그런 제가…… 이야기책 속 귀신일 리가 없잖아요?

사가

……소승도 그간 여러 기이한 일을 겪어보았지만, 괴담 속 황야를 떠도는 귀신 같은 건 실제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이 대지에 귀신은 확실히 없는 것 같소.

사가

소옥 시주…… 시주께서는 줄곧 분명히 기억한다고 했소. 한데 도대체 무엇을 기억하고 계신 게요?

소옥

……저는 가족과 흩어져서, 그들을 쫓아갔지만…… 피바다가 된 곳만을 볼 수 있었던 게 기억나요……

소옥

제가 기억하는 건…… 제가 촬강봉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가족 모두 저를 많이 사랑해 준 것, 그리고 어릴 때부터 아무런 걱정 없이……

소옥

제게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걸 좋아했고…… 이웃집 여동생이랑 자주 놀았어요…… 그 애는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았고, 그 아이가 아홉 살이 되던 해의 5월 5일에 제가 다섯 가지 색 머리끈을 선물하기도 했어요……

소옥

그리고 제가 아끼는 물건이 하나 있었는데…… 서쪽 창 아래에서 길렀고, 책상 위, 거울…… 옆에 둔…… 그건…… 그건……

천사 학생

……

천사 학생

하……

천사 학생

혹시 콩 하나인가?

'소옥'

……


이씨 성을 가진 천사 학생은 한숨을 쉬며 노란색 부적 한 장을 꺼내어 '소옥'의 가슴에 붙였다. 그러자 부적에 쓰여 있는 글자에서 미세한 빛이 일렁였다.

'소옥'

이건…… 뭐 하시는 거죠?

천사 학생

부적이 반응하는 걸 보니 넌 분명 천사부의 물건이구나.

천사 학생

바로…… 콩 병사.


완두꽃 향기.


'촬강봉' 아래.


소옥

……어렸을 때부터 전 말꼬리 잡는 걸 좋아해서, 이웃 동생들도 자주 뭐라 했었거든요. 한번은 제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제 물건을 던질 뻔했어요…… 그 물건이 뭐였더라……


소옥

……저는 늘 불이 무서워요……


사가

……소승도 전후 상황이 다소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설마 '콩 병사'였다니……

천사 학생

천사가 사용하는 '콩을 뿌려 병사를 소환한다'는 술법이에요. 농가가 바쁠 때 가끔 콩 병사를 불러 일을 돕게 하곤 하거든요.

천사 학생

그렇지만…… 콩 병사의 모습은 보통 다 똑같고, 자아도 없는 데다가, 움직이는 시간도 짧아요. 더욱이 자신에게 가족이나 출신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건, 더 말이 안 되죠.

천사 학생

물론 부적으로 확인한 만큼 의심할 여지는 없지만…… 소옥 씨는 아마도 알 수 없는 다른 일을 겪어서 지금 같은 모습이 되었고, 이런 뒤섞인 기억까지 생긴 것 같아요.

사가

'뒤섞인 기억'……? 소옥 시주의 기억이 확실히 뒤죽박죽이긴 했지만, 소승은 그저…… 어떤 충격을 받아서 그런 줄로만 알았소……

천사 학생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너무 크다 보니, 저도 진작에 잠이 깨서 하시는 이야기를 거의 다 들었어요.

천사 학생

농업천사가 콩 병사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건 꽤 괜찮은 방법이죠. 하지만 이름이 '콩을 뿌려 병사를 소환한다'는 술법인 만큼, 원래는 전쟁에 쓰이던 거예요……

천사 학생

소옥 씨가 한 말 중에 “가족과 헤어졌다.”라는 이야기는 아마도 술법을 사용한 천사가 병사들을 부를 때 소옥 씨를 빠뜨린 걸 거고, 소옥 씨는 본능에 따라 쫓아간 거겠죠……

천사 학생

피바다라고 한 건 아마 그 병사가 도달해야 하는 전장의 모습이었을 거예요. 아마 늦게 도착해서, 이미 엉망이 되어버린 현장만 본 거겠죠…… 전장의 피 냄새에 충격을 받아 다시 콩의 모습으로 돌아간 걸 테고요.

천사 학생

보통은 며칠 후에 술법이 풀리면, 콩 병사도 진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에요.

'소옥'

……

천사 학생

근데 어쩌다가 원씨 아가씨의 손에 들어간 건지…… 혹시 전장을 정리하던 사람이 주워서 준 걸까요?

천사 학생

그 아가씨가 어떻게 널 돌보아 줬길래, 콩 속 술법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서, 네 의식에까지 영향을 준 걸까……

천사 학생

들어보니 네가 계속 이야기책 얘기를 하던데, 혹시 이야기책을 좋아하는 원씨 아가씨가 너한테 매일 이야기책을 읽어줬던 거 아니야?

'소옥'

……

천사 학생

네가 꼭 상경하고 싶었던 것도, 이야기책 속에 그런 내용이 자주 나와서 그런 거지?

'소옥'

……아니요. 정확히 말하면…… 나중에 이웃집에 시집을 간 소옥이, 남편이 시험에 합격하자 그를 따라 상경했기 때문일 거예요……

'소옥'

전 단지 그 사실을…… 계속 잊고 있었던 거였고요.

천사 학생

오오오! 말이 되네! 소옥 아가씨, 이야기를 만드는 데 소질이 있네. 기억이 들쑥날쑥했어도, 결국엔 그 많은 일들을 하나로 잘 엮어 냈잖아!

'소옥'

……

'소옥'

그럼 전…… 왜 지금 소옥의 모습이 된 거죠? 콩 병사에겐…… 자아가 없지 않나요?

천사 학생

그보다 나는 더 신기한 게, 이미 다시 콩으로 돌아간 네가, 어떻게 겨우 한 소녀의 보살핌만으로 다시 인간 형태를 띨 수 있던 거지? 게다가 이렇게 오랫동안 활동하고, 이런 뚜렷한 자아까지 가지다니……

천사 학생

만약 부적으로 네가 천사 술법의 산물이라고 확인하지 않았다면, 겉모습과 행동만 봤을 땐 오히려……

천사 학생

으음, 아무것도 아니야. 이건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사가

(……'촬강봉'이라, 내 기억이 맞다면 지난번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시 씨와 리 씨를 만났던 곳을 말하는 것 같군……)

천사 학생

종합해 보면, 넌 아마도 자신을 그 원씨 아가씨라 믿었고, 여러 기억을 섞어서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었어. 그렇게 자신이 큰 원한을 품었다고 생각해서, 오직 복수를 하기 위해 상경한 거야.

'소옥'

저는……

'소옥'

……그럼 저는…… 진짜도 아닌 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소옥'

……그럼 이 원한이라는건, 애초에 갚을 대상도 없는 거였네요?

천사 학생

그거참 잘된 일이잖아!

사가

……

사가

이 천사님께, 소승이……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소.

사가

만약 소옥 시주의 출신이 그러하다면…… 천사부에서는 그녀를 어떻게 할 작정이오?

천사 학생

……사가 스님, 무슨 말씀 하시려는지 알아요.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천사부의 물건입니다. 또 여러 가지 특이점이 있으니, 절대 밖에서 멋대로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어요.

'소옥'

……

'소옥'

……이 천사님, 저…… 한 가지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천사 학생

또 뭘 부탁한다는 거야? 네가 한 이야기…… 방금 다 정리해 줬잖아. 그런 일은 애초에 없었고, 그냥 네가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걸 가지고 상상한 것뿐이라니까.

'소옥'

다른 뜻은 없어요. 다만…… 천사부로 가기 전에, 누굴 좀 만나고 가면 안 될까요……?

'소옥'

비록 제 상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허구는 아니에요.

'소옥'

이 천사님도 말씀하셨잖아요. 그분이 저를 돌봐주지 않았다면, 저는 진작에 피바다 속 진흙 덩이가 됐을 거라고…… 지금 제가 여기 이렇게 서 있는 이상, 그 일만은 절대 거짓일 리 없어요……

'소옥'

그런데 전…… 아직까지 그분과 단 한마디 말도 나눠본 적이 없어요.

천사 학생

……

천사 학생

지금 이 모습으로 그 사람을 만나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은데…… 꼭 그렇게까지 집착해야겠어?

'소옥'

모습도 숨기고, 제가 누구인지도 말하지 않을게요. 그저……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소옥'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라고도 하잖아요……

천사 학생

……

사가

……

사가

이 천사님, '사람이 목석이 아닌데, 그 누군들 감정이 없겠는가'라지 않소. 소옥 시주에게는 이제 단 하나의 소원만 남았는데…… 사람이 목석보다 무정해서는 아니 되지 않겠소?

사가

소승도 부탁드리오.

천사 학생

흠…… 이거 참……

천사 학생

알겠습니다.


'소옥'

……

'소옥'

'현비 원옥의 묘'……

'소옥'

그랬군요…… 벌써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흘러서……

'소옥'

그래서 눈을 떴을 때, 그 집이 그렇게 폐허가 되어 있었던 거예요……

'소옥'

적어도 한 가지는 내가 만들어낸 망상이 아닌 줄 알았는데……

'소옥'

실은, 그마저도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던 거였네.

사가

소옥 시주……

'소옥'

스님, 고마워요.

'소옥'

결국 전…… 누구의 은혜도 갚지 못했네요.

말이 끝나자, 은은한 빛이 번졌다. 사가는 딱히 눈이 부시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손바닥 위에는 단단하고, 옥처럼 빛나는 콩 한 알이 놓여 있었다.

천사 학생

……

사가

이 천사님, 묻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소.

사가

우리…… 정말로 우연히 마주친 게 맞소? 천사 학생은 누구나 그런 부적을 늘 가지고 다니는 게요?

천사 학생

……후. 천사 술법의 산물이 백조 근처에 다가왔는데, 설마하니 천사부에서 아무 검사도 안 하겠어요?

천사 학생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소옥'과 우연히 만난 것이니, 안전히 여정을 마치도록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둘이 헤어지고 난 뒤에, 제가 조용히 천사부로 데려갈 생각이었죠……

사가

그럼 혹시 '원옥'이라는 자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요?

천사 학생

그건 아니에요. 단지 '소옥'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었어요.

천사 학생

왜냐하면 상촉에서의 전쟁에 천사가 출정한 건 이미 백 년 전 일이거든요.

천사 학생

원래 콩 병사는 자아도 기억도 없는 존재지만, 이 콩 하나만은 의식을 얻어서 기묘한 인연도 만나고, 복수를 위해 발악까지 했죠……

천사 학생

수많은 고생 끝에 상촉에서 어찌저찌 백조까지 왔지만, 결국 마지막에 깨달은 건 자신이 한낱 허상이었다는 사실 뿐이었죠.

천사 학생

대체 무얼 위해 그렇게까지 한 건지.

사가

……예전에 어떤 분이 소승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소. “그림 속 사람을 보며 나는 '진짜 사람'이 '가짜 사람'을 본다고 여기지만, 어찌 우리가 그림 속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일생도 어떤 이의 붓끝에서 그려진 순간적인 즐거움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 라고 말이오.

사가

소승은 그 말을 자주 떠올리곤 하오…… 오늘도 그러하지요.

사가

이 천사님은 방금 '소옥' 시주가 헛된 고생 끝에 깨달은 건 자신이 한낱 허상이었다는 사실 뿐이라고 하셨소.

사가

하지만 소승은……

사가

그것이 꼭 무의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천사 학생

……어떻게 흘러가든, 결국 이 결말은 바뀌지 않아요.

천사 학생

그런데 스님께서 뭘 더 하실 수 있겠어요?

사가

소옥 시주는 자신에게 이야기를 주었고, 그 이야기를 위해 천 리를 걸었소. 소승이 그녀와 함께 걸어온 길이 있는 만큼……

사가

소옥 시주를 위해, 소승은 이 이야기를 꼭 기억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