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끝
당시 런디니움 전쟁의 그늘 아래에 있었던 고도딘에서, 함선의 정보요원이었던 퀘르쿠스는 의사로서 도망쳐 온 난민들을 치료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과거에 퀘르쿠스와 함께하다가 전사한 전우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나타나 퀘르쿠스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데……
희생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라, 그것이 너에게 살길을 가르쳐 줄 것이니.
앞으로 돌격하고, 적들을 집어삼켜라!
희생자들의 얼굴을 잊지 말라, 그것이 너에게 흔들리지 않을 용기를 줄 것이니.
올곧은 그대여, 두려워 말라!
그들의 보물로 그대들의 집을 풍성하게 만들어라.
공작을 위하여!
빅토리아를 위하여!
——런디니움의 어느 전쟁 전 연설에서 발췌
1098년 겨울
칼라돈 시
퀘르쿠스!
칼라돈 기마경찰의 마지막 명령이다, 퀘르쿠스. 넌 푹 쉬어야 해!
넌 24시간 동안 난민 캠프 출입 금지야.
그라니 기마 경관.
정말로 이런 시기에 의사의 도움을 거절할 생각이야?
얼마 전 런디니움의 난민들을 위한 간단한 의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그라니가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넌 여기에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캠프를 떠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지금은 반드시 푹 쉬어야 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지금 난민들한테 필요한 건 단지 옷이나 음식, 물 뿐만이 아니야.
도시에 있던 의사들은 대부분 소집되었고, 공작은 난민에게 신경을 쓰려고 하지 않아.
공작이 난민들을 수용하기로 한 것도 괜한 소동이라도 일어날까 봐 그런 것뿐이라고.
그건 그렇지만, 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난 대체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해?
누구한테 네 치료를 맡겨야 하냐고?
응?
이 드루이드 의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몰라.
아무튼, 나는 널 가두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널 쉬게 할 거야.
그런 식으로 나오면 오히려 잠이 더 안 올걸.
24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이 사안에 대해서 협상의 여지는 없어.
하아……
지금은 네가 영웅 행세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또 나타났구나.
이 귀찮은 녀석은 항상 이런 때에 나타나서 날 비웃는다.
네가 하루 종일 거기 있어 봤자 달라질 건 없어.
어차피 모든 사람들을 구할 수는 없거든.
내가 네 말을 들을 것 같아?
난 한 번도 내가 영웅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난 그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할 뿐……
난 평소에 골판지 위에서 꼼짝도 안 하고 누워 미동도 하지 않는 필라인이 정말 과로인지 아닌지 살펴볼 시간조차 없다.
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반대 방향으로 향하다가 마침내 대지의 포옹에 파묻혀 가는 것을.
최선을 다할 뿐이라……
그렇게 하면 네 기분이 조금은 나아져?
……
이젠 그만 닥쳐.
조용히 있는다고 날 없는 존재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여전히 너 자신의 무능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야.
넌 지금 생명들이 네 손에서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운 거라고.
마치 그때처럼 말이지.
그때와는 달라!
다르다고!
이런 녀석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내겐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퀘르쿠스?
그라니, 지금 도시 밖에서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그런 핑계로 나랑 멀리 떨어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난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거거든.
컬림비아에서 급하게 필요한 약품들을 받기로 했어. 용병이랑은 내일 아침 칼라돈 시 밖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넌 기마경찰이니까 도시에 드나들어도 수색대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을 거야.
이 약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너도 잘 알잖아.
……
알았어, 하지만 넌 여기를 한 발짝도 벗어나선 안 돼!
고도딘의 경찰들은 분명 난민 캠프처럼 위험한 곳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수시로 나타나서 난민들 사이에 섞여 있는 탈영병을 잡아간다.
거기다……
탈영병처럼 생긴 사람들까지도.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더라도 말이다.
네가 내 말을 듣기 싫어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계속 말해야겠어.
그 사람들에게도 살아간다는 건 마냥 기쁜 일인 걸까?
고통, 굶주림, 칼부림, 원한, 질투……
매일을, 매시간을, 매초를……
그런 삶에 비하면 죽음이 마냥 두려운 것만은 아니잖아?
의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정말 역겹네.
의사는 너잖아?
난 빅토리아의 군인이고.
……
난 군인 신분은 버린 지 오래야.
하지만 넌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건 아무래도 좋아.
정전이네.
……
마지막으로 이렇게 조용했던 건……
맞아, 처음에 네가 나한테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였지.
내가 그때 무슨 질문을 했었지?
축복받지 못한 생명.
그리고 두렵지 않은 죽음.
넌 나한테 똑같은 질문을 했어.
……
어둠 속에서 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포레스트?
생각났어?
그가 여기 있어.
……
포레스트!
정신 차려!
이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싸움이었다.
거기서 난 모든 전우를 잃었다.
으윽!
콜록…… 대장님……
전……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조금만 더 버텨, 지금은 이렇게 주저하거나 두려워할 때가 아니야.
이 폐허만 빠져나가면 도망칠 수 있어!
콜록…… 대장님……
포레스트 하사!
명령이다, 일어나!
내가 업어줄게!
상처가 너무 심해.
냉정한 그 녀석은 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말을 하곤 했다.
이제 됐어! 더 이상 네 말은 듣고 싶지 않아.
그 녀석은 내 부하야. 그러니까 반드시 데리고 가겠어!
데리고 간다고?
그들은 죽으면 영웅으로 불려.
화로 속의 불이 점점 더 타오르고 있어.
그리고 더 많은 아이들이 그 속으로 던져질 거야.
그런 쓸데없는 얘기나 할 시간에, 우선 부상자를 치료할 방법부터 생각해 보라고!
피는 어떻게든 멈출 수 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진 않을 거야.
네가 그 사람을 살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나도 잘 알아.
넌 그 원흉들의 가면을 부수고, 자신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똑똑히 알게 해 주고 싶은 거겠지.
그리고 독이 든 사과처럼 정성스럽게 포장된 이 영광을, 아이의 입에서 파내고 싶은 거야.
이제 그만해!
그래! 난 이렇게 이기적이야!
결국 넌 홀로 고향에 돌아가게 될 거야.
모든 불명예와 함께 말이지.
그 누구도 네 얘기를 귀담아듣지 않을 거야.
고향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아이들은 잔혹한 현실보다는 영웅의 전설을 더 좋아하니까.
술집의 남자들도 듣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네겐 그들의 눈길을 끌 만한 부분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죄인들도 듣지 않을 거야. 단지 네가 그들이 좋아하는 카펫에 불똥을 튀긴 일을 탓할 뿐이겠지.
그만! 그만! 그만!
너……
닥치라고 했지!
포레스트……
우리 형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구나.
눈앞의 사람을 보고 있자니, 나는 조금 정신이 흐릿해졌다.
이는 그가 내 목에 칼을 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그 아이와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였다.
그는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계속 이곳에 숨어 있었다.
허나 이 대지를 속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난 그라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확실해, 형의 사망 통지서를 가져왔던 건 너였어.
넌 우리 같은 사람들을 기억하지도 못하겠지만.
난민 캠프에서 널 알아본 이후로, 난 며칠 동안 계속 너를 관찰했는데도 넌 날 알아채지 못했어.
……
그래서, 넌 지금 의사야?
난 그 필라인이 눈물을 흘리며 너에게 감사하는 걸 봤고, 네가 구한 그 여자아이 얼굴에 웃음꽃이 핀 것도 봤어.
넌 행복하지?
빌어먹을! *빅토리아 비속어*!
울부짖음, 하소연, 비명……
대지의 뿌리는 이미 시들어 버렸어.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건 그것뿐이었어……
정말 숨이 막힐 정도였거든.
너 즐기고 있지, 속죄하는 느낌을?
하지만 우리 형은 이미 죽었어!
너 혼자 마음 편하게 속죄한다고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데!
무슨 짓을 한 거야?!
난 아무것도 안 했어,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대장님…… 절 죽여 주세요.
다리도 잃었는데, 어머니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절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제 동생한테도요……
게다가…… 전사자의 가족에게는 더 많은 위로금이 주어진다고 들었어요……
봐봐.
그에게 있어, 살아간다는 건 그리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야.
죽음도 두려운 것이 아니게 되었고.
……
대장님! 그……
돌아가면, 가족들한테 저의 가장 멋진 모습들에 대해 꼭 들려주세요!
하하……
동생의 나에 대한 이미지를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까요.
하, 결국은……
사람들의 귀감이 될 거야.
이 녀석은 죽고 싶어 하는 게 아니야.
계속 살아가기가 두려울 뿐……
대장님, 부탁드립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제게 이 다리가 없으면…… 전 단지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걸요.
그러니까……
이것도 나쁘지 않아요……
됐어!
그만해!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야?
잠깐만요! 대장님!
죽고 싶지 않아요!
저 집에 가고 싶어요……
생명이 영원하길.
젠장!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뭐라도 말 좀 해 보라고!
너 포레스트의 동생, 마이클이구나.
내 기억이 맞다면, 넌 고도딘 공작이 이끄는 군 소속이고, 지금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닌 런디니움의 최전선일 텐데?
그렇다면……
그래, 난 탈영병이야.
지금 날 신고해도 상관없어.
네가 날 찾아왔다는 건, 네 나름대로 판단을 했다는 거겠지.
……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당신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야.
가능하다면 나도 포레스트가 살아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다고.
하지만 난 내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그 사람을 죽인 건 너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는 너의 연민을 바랐지.
덕분에 그도 편안하게 떠날 수 있었어.
그래서 넌 그를 죽였어!
할 말은 그게 다야?
아니!
*빅토리아 욕설*!
마음 같아선 당신을 지금 당장 죽여 버리고 싶어!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체포된 탈영병들은 마이클의 동료들을 포함해서 전부 칼라돈 시 서쪽에 위치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탈영병들을 구출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했다.
난 그를 내 가게의 직원으로 위장시켰다.
꽃집의 종업원으로.
꽃집?
그러니까, 우리가 전선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동안……
그 빌어먹을 놈들은 여기서 이런 걸 하고 있었다는 거네?
축하연?
축하연이지.
*빅토리아 욕설*!
그리고 당신은 그걸 눈 감아 줬고?
……
이 꽃들을 이용하여 난민 캠프에 대한 상부의 암묵적인 동의를 바꿔왔다.
기본적인 물자를 바꿔왔다.
일부 필요한 특권을 바꿔왔다.
바꿔온 것은 한 사람의 목숨뿐만이 아니었다.
겨우 이걸로?
이게 전부는 아니지.
하지만 확실히, 이 꽃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어.
……
넌 아직도 그 가소로운 망상을 포기하지 않았구나.
난 내가 뭘 하려는지 잘 알고 있어.
난민 캠프는 그들이 알량한 선의로 아이들에게 던져준 장난감일 뿐이야.
그 사람들은 오늘 네가 사람을 구할 수 있게 하고, 또한 모두가 모래성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게끔 해 주고 있어.
하지만 그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네가 사람을 죽이도록 만들고, 모래성을 무너뜨려 모든 사람들을 모래 속에 묻어 버리게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란 걸 잊지 마.
저 난민들이 큰 소동을 일으키지 않는 한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난 의사야.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아.
하지만 다른 사람이 한다면?
그 질문은 네 스스로에게 하는 게 좋을 거야, 빅토리아의 군인으로서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럼 만약 포레스트 때처럼 누군가……
너한테 부탁한다면?
……
넌 난민 캠프에 들어온 첫날부터 불안해하고 있었어.
전쟁이 계속되는 것, 생명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
그리고 생명이 더 이상 존중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너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아.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퀘르쿠스?
……
어쩌지?!
지금 체포대가 조사를 하고 있어!
*빅토리아 욕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우중충한 분위기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로 가득 찬 이 거리에서, 이렇게 많은 꽃들을 들고 다닌다면 눈에 띄는 것이 당연하다.
당황하지 마.
그리 캐묻진 않을 거야.
하지만 체포대도 바보는 아니라, 스스로 귀찮은 일을 만들어 내진 않는다.
지금 이런 시기에, 이렇게 꽃을 잔뜩 들고 가서 파티를 즐기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음……
서둘러.
아직도 내가 널 신고할까 봐 걱정돼?
난민 캠프에서 관찰한 결과, 당신은 그럴 사람은 아니야.
그래서 지금 이런 도박을 하고 있는 거고.
……
아무 말도 할 필요 없어, 나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신뢰한다는 건 아니야.
오히려 당신이 죽을 만큼 미워.
난 네가 계속 그렇게 수상쩍게 움직이면…… 체포대한테 잡힐 수도 있다는 걸 알려 주려고 했을 뿐이야.
……
당신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모두 조용히 해라! 소리는 왜 질러!
추하게 목숨이나 구걸하는 쓰레기들이……
어라, 왠지 방안이 좀 답답하고,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 같지 않아?
게다가 조금……
어디서 무슨…… 향기가 나는 것 같은데?
이 대지가 다시 생명들을 굽어살펴 주길……
어이, 저기 봐!
통풍구다!
뭐?!
저건…… 꽃이잖아?
이 대지가 자비를 베풀어, 길을 잃은 아이들이 품속에서 고이 잠에 들게 하길……
으윽……
어떻게……
나와.
네 동료를 찾으러 가자.
이런 오리지늄 아츠는 처음 봐.
고향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일 뿐이야.
이 녀석들은……
잠깐 잠들었을 뿐이야.
네가 동료들을 구한 다음 빠져나갈 시간은 충분해.
흥……
난 그 순간 마이클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칼을 뽑지는 않았다……
그는 확실히 그의 형을 닮았다.
잘못된 사람, 잘못된 장소, 그리고 잘못된 신분까지.
마이클?!
너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너희를 구하러 왔어.
어서 따라와!
좀 하는데!
옆에 있는 그 사람은 누구고?
이 여자는……
그냥 날 도와주는 사람이야.
가자.
잠깐만!
이 망할 체포대 녀석들.
절대 그냥은 못 가겠어.
당신 뭐 하는 거야?
나랑 마이클은 당신들을 구하러 온 거야.
이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고.
*빅토리아 욕설*!
지금 이놈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아주 잘 알고 있지.
너라면, 당연히 그들이 난민 캠프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겠지.
그런데 왜 탈영병들을 막아서는 거야?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저번에 네가 나한테 따졌던 걸 생각해 봐.
그런데 지금은 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서 타인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하고 있어.
물론 그것도 공명정대, 당연하다는 이유겠지만.
……
저리 비켜!
아니.
지금 여기서 이렇게 낭비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
그럼 적어도 한 대 정도는 때리게 해 줘.
좋아.
여기에 갇혀 있는 다른 녀석들은 어쩌고?
다른 녀석들도 전부 풀어 줄 거야?
나는 감옥에 갇혀 있던 다른 사람들을 전부 풀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시를 빠져나가는 방향을 알려 주었다.
그 체포대 녀석들은 전부 감옥에 가둬 뒀다.
당신이 사람들을 구했어.
넌 왜 이 사람들을 구하는 거야?
가자.
아직 소란이 커지지 않은 사이에 빠져나가야 해.
……
그 전에 들러야 할 곳이 하나 있어.
거기에 우리가 숨겨 둔 모든 보급이랑 물자들이 있거든.
이 위치는……
네가 생각한 게 맞아.
바로 그곳이야.
역시.
이곳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다……
여긴 포레스트의 묘지야.
우리 형이 잠들어 있는 곳.
당연히 나도 기억하고 있어.
그는 내가 직접……
이곳에 묻었으니까.
난 도저히 이해가 안 돼……
……
*빅토리아 욕설*!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고!
대체 왜?!
……
당신은 난민 캠프에서 아무리 심하게 다친 사람이라도 전부 살려냈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손쉽게 체포대를 따돌리고, 봉쇄된 도시를 드나들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잖아.
심지어는 그 망할 체포대 놈들의 목숨까지 살려 줬다고, 그 빌어먹을 자식들을.
그런데 왜, 왜 우리 형은 포기한 거야!
왜 형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던 거냐고!
할 수 없었으니까.
거짓말?
그것도 나쁘지 않지.
이 녀석에게……
형의 상태가 상당히 심각했었다고 말하는 거야.
그 싸움에서 진 게 이 녀석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하거나.
이 모든 게 상부에 있는 그 망할 녀석들의 탓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말하면 이 녀석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런다고 네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
마음이 편해지니까……
그래서 거짓말을 하기로 한 거구나.
아니.
그래서 넌 사람을 죽이기로 한 거였어.
아니야.
그럼 넌 대체 뭘 한 건데?!
계속 이렇게 핑계만 댈 생각이야?!
대답해!
날 봐!
포레스트를 봐.
……
전투에서 과정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우리 군대는 나와 네 형 빼고는 전부 전멸했어.
뭐?
난 포레스트를 구하려고 했었지만, 포레스트는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
그래서 난 결국……
그에게 편안한 죽음을 선사했다.
편안한 죽음?
그 말은……
그래, 내가 그를 죽였다.
……
……
그렇게 가볍게 한마디로 정리할 게 아니잖아!!
*빅토리아 욕설*!
형을 죽였다고?
그래.
난 고통에 시달리는 그의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었어……
난 네 형이 전쟁에 시달린 미치광이의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길 바랐어.
아니야!
그건 전부 헛소리야!
가게에서 나온 이후로 마이클은 한 번도 검집에 올린 손을 풀지 않았지만, 검을 뽑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처음으로 그의 검이 검집 밖으로 나와 나를 겨누었다.
날 죽여도 상관없어.
하지만 네 형의 죽음 때문에 내가 너한테 빚진 건 없다는 사실은 알아 둬.
당신이 형을 죽였어!
자신의 전우를 죽인 거라고!
그래.
나도 내가 잘한 거 하나 없다고 생각해.
난 내 병사를 죽였으니까.
의사로서 가장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거지.
그 어떤 이유로도 내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그건 해야만 하는 결정이었어.
닥쳐!
난 당신을 절대로 용서 못 해!
그래도 난 널 구할 거야. 이건 네 형 때문이기도 해.
넌 네 형을 닮았거든.
너희 모두 그 사람을 닮았어.
……
……
마치 눈을 가린 어린아이 같아.
무언가에 쫓기고, 꾐에 넘어가기도 하지.
서로 어깨를 맞부딪치기도 하고……
연이어서 앞사람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뜨거운 가슴을 안고…… 죽음을 향해 달려 나가지.
……
죽음이 이렇게 추앙받아서는 안 돼.
축복받아야 하는 건 사람의 생명이야.
네겐 생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
이 땅은 지친 아이들을 언제까지나 안아 줄 거야.
그러니까, 난 널 구할 거야.
……
그거 알아? 형은 편지를 쓸 때마다……
무슨 일이 있든 당신의 얘기를 꼭 꺼냈어.
당신은 좋은 대장이고, 다른 사람들처럼 걸핏하면 욕하거나 그러지 않는다고……
당신이 자기를 엄청 신경 써 준다고 했어……
난 형이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 안 해……
……
난……
사실은 당신이 그런 일을 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거라고 믿어.
날 구해 줘서 고마워.
앞으론, 잘 살아가 볼게.
마이클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난 그가 지금까지 줄곧 마음속으로 억누른 감정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며칠만 봐도 알 수 있었어.
……
마이클!
뭐 하는 거야!
하지만, 그래도 난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 같아.
미안.
왜 가만히 있어?
너도 지금 가만히 있잖아?
공격이 빗나갔어.
일부러 그런 걸까?
그건 중요하지 않아.
……
넌 화도 안 나?
분명 욕을 먹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닌데 말이야.
너도 어떻게 보면 피해자에 속하잖아. 애초부터 네가 이 일에 대해서 질책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고.
그때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잘잘못을 따져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
고통, 상처, 원한, 칼부림, 질투…… 이런 것들이 우릴 대지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한 거야.
이런 상황에서는, 우린 모두 피해자나 마찬가지라고.
……
참 너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포레스트도 분명, 동생이 잘 살아가길 바라고 있을 거야.
지금 그는 새 생명을 얻어, 대지의 뿌리를 다시 찾아냈어.
만약 계속해서 서로가 서로를 박해하고……
원한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면……
결국 그들의 생각대로 흘러가게 만들 뿐이야.
그들?
그래, 그들.
그러니까……
이게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야.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어.
그래, 축하한다.
참 잘했어.
그렇게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는구나.
정말 이렇게 포기할 생각이야?
분명 의사는 너잖아.
그 전에, 드루이드의 제사장이기도 하고.
너야말로 정말 목숨을 포기할 생각이야?
……
부탁드립니다, 제발 이 아이를 돌봐주세요.
콜록콜록…… 전……
죽음은 추앙받아선 안 된다.
축복받아야 하는 건 사람의 생명이다.
엄마……
……
일단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나는 매일 다른 얼굴들을 마주하지만, 되도록이면 그들 모두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생명은 이처럼 아무런 흔적도 없이 버려져서는 안 되니까.
퀘르쿠스, 너……?!
여기 묻은 피는 다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의사를 불러올게.
내가 의사야.
과거엔 빅토리아의 군인이었고.
지금은 로도스 아일랜드의 파견 오퍼레이터이자, 고도딘 주재 정보요원이야.
고난을 겪은 이가 높이 내걸렸다.
보아라, 저것이 바로 영웅이다!
그 앞에 서 있는 호사가가 높은 소리로 말했다.
박사는 이미 런디니움으로 향했어.
분명 우리의 정보 지원이 필요할 거야.
하지만 넌……
난 괜찮아.
잠깐 난민 캠프에 다녀왔을 뿐이야.
영웅!
영웅!
아이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자신들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라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분명 엄청 캐물었을 거야.
그쪽도 아무 문제 없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자는 척하는 편이 좋으려나……
또 한 번의 황혼이 찾아왔다.
하지만 밤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퀘르쿠스!
잘 쉬었어?
퀘르쿠스 언니.
퀘르쿠스 언니를 보러 왔어요.
안녕……
콜록콜록……
퀘르쿠스 언니!
이거 봐! 또 내 말 안 들었지!
그라니, 약속했던 24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어.
그럼 24시간 추가로 외출 금지야!
지금 당장 누워!
퀘르쿠스 언니,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난 괜찮아.
맞다, 널 위해서 쿠키도 구웠어.
죽음은 죽은 자를 내버리고 산 자를 탐한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친구와 가족들만이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대지가 관용을 베풀어 주길.
생명이 영원하길.
바라건대……
퀘르쿠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