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길
진료소의 모든 사람들을 조치한 뒤 오른 갑판에서 금발의 카시미어 기사를 보게 된 헬라그는 어느 흐릿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
……얼마 동안 서 있었죠?
코어…… 이젠 거의 안 보이네요.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 가서 쉬도록 해.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아시잖아요……
아미야 일행이 하루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그래.
지도자를 걱정하는 마음은 나쁘지 않군. 로도스 아일랜드의 단합력을 증명하는 셈이니까. 허나 자신을 몰아붙이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것 같네만.
심지어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하는군, 젊은이. 동료에게 상처를 숨기려 하지 말게. 척 보면 아니까.
앗? 당신은…… 헬라그 씨?
헬라그 씨의 말이 맞습니다. 언젠가 헬라그 씨가 필요한 순간이 오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닙니다.
상처가 낫는 대로 저흰 다시 싸울 겁니다.
헤에…… 저 같은 게 감히 빛의 기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다니요? 너무 띄워 주시는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특수 상황이니 선내에 머무셔야 할 것 같네요, 헬라그 씨……
알고 있네. 네온과 다른 아이가 아직 검사 중이라, 끝나는 대로 직접 만나볼 생각이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저 같은 부상자를 데려가봤자 짐만 될 뿐이니까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두 분 모두 조심하세요.
시야가 트인 여기서라면 통제 불능에 빠진 도시가 보이겠군.
시력이 좋으시군요.
눈 하나는 늘 좋았다네.
자네들이 엄호하던 부대들이 체르노보그를 밟았다지? 의사에게 들었네, 그 두려움 없는 계획에 대해.
하지만 전장에서 두려움 없는 결단, 용맹함 같은 보기 드문 인품은 종종 희생을 수반하지.
두려움을 모른다고 해서 무모한 건 아닙니다.
자네들이 그런 전사일 거라고는 미처 알지 못했네.
아무리 훈련이 잘된 병사라고 해도 …… 사막 폭풍과 광선을 이용해 아군을 엄호하는, 그런 기상천외한 기습 작전은 수행하기 어렵거든. 대단하다고 생각하네.
헬라그 씨가 스카우트 씨의 마지막 유물을 로도스 아일랜드에 돌려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로도스 아일랜드 사람들은 모두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모든 오퍼레이터가 그렇다고 단정할 순 없겠죠…… 저만해도 스카우트 씨와는 생각이 다를 테니까요.
다만 모든 오퍼레이터…… 지금 이 순간 감염자를 위해, 그리고 로도스 아일랜드를 위해 싸우는 모두는, 용감히 싸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저마다의 이유로 싸운다네.
……그래서 지나치게 거창하거나 심지어는 모든 소원을 이룰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을 접하게 됐을 때, 오히려 거센 물살에 휘말려 들고 말지.
리유니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두 똑같네.
헬라그 씨, 코어로 향한 오퍼레이터들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녔습니다.
전 그 믿음을, 그들의 믿음을 믿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건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당시 체르노보그의 상황은 무척 위험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스카우트 씨의 마지막 통신 장비를 가져다주신 점에 대해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쉽지만 그 전사와는 일면식도 없다네.
그의 희생에 전사들이 크게 감동한 걸 보곤, 그의 신념이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지.
하지만 '희생'이라는 단어는 과거의 것이 아니야, 지금도 진행 중이지. 로도스 아일랜드는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은 걸 희생해야 할지도 모르네.
희생보다는 희생을 통해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곳을 지키며 그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정의라는 결실을 기다리는 게 제 역할입니다.
……자네 같은 카시미어인을 여럿 본 적 있다네, 젊은 기사여. 하지만 그들은 많은 점에서 부족하더군.
오퍼레이터들이 자네를 빛의 기사라고 부르던데, 그동안 자네가 보여준 활약은 확실히 인상적이긴 했네……
지금의 카시미어에서 칭호를 가진 기사들은 모두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을 지닌 영웅들이라고 알고 있네만…… 그런 자네가 왜 고향을 등진 건가?
지금의 카시미어는 기사의 의미가 전과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헬라그 씨도 우르수스를 떠나셨죠. 모두들 저마다의 이유로 싸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빛의 기사, 자네 이름이 뭔가?
이름은 마가렛 니어, 코드네임은 니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네를 '니어'라고 부른 거군.
W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하필이면…… 왜 이럴 때 자리를 비운 거냐고!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거야? 가르상이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잖아!
너……
헛소리 작작해! W든, 탈룰라든 무슨 꿍꿍이인지 아는 건 하늘뿐이니까.
우린 돈 받고 목숨 파는 용병이야. 감염자 따위한테 휘둘리지 마. 놈들이 원하는 건 자기들의 미래지,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눈앞의 적을 쓰러뜨린 뒤에, 살아남는 쪽을 따르자는 게 내 삶의 방식이다!
말해봐! W와는 연락 두절이고, 탈룰라는 우리를 버렸어. 두 사람 중에서 누구든 우리에게 다시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우린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거지?!
어떻게 된 거야? 살카즈 용병들이 어째서……
아!
놈들이 혼란에 빠진 틈에 서둘러 지나가는 게 좋겠어요. 서둘러요…… 들키지 않게…… 계획을 성공시켜야 해요……
……?!
넌, 할 수 없다.
?!
아직도 그날 밤 바클라이의 표정이 잊히지 않네. 실버랜스 페가수스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도 그런 복잡한 표정을 짓진 않았을 걸세.
실버랜스 페가수스 말고도 자신들에겐 금발의 호적수가 한 명 더 늘었다고 하더군.
금발. 금발의 페가수스.
이제 막 두각을 드러낸 신예 지휘관이 몇 시간 만에 기습으로 무너진 기사단들을 재조직해, 협곡에서 죽기 살기로 거의 석 달을 버텼다네.
그에게 예상 밖의 피해를 입은 우르수스군이 부득이하게 고속 군함을 배치하는 바람에, 기존 진형이 변경되고 동계 작전 규모도 축소될 수밖에 없었지.
카시미어는 니어 가문을 영웅으로 기려야 마땅하거늘.
그 피를 이어받은 후손을…… 카시미어에서 추방하다니?
다 지난 일일 뿐입니다…… 헬라그 씨가 마음 쓰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이 땅에 있는 한, 니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길 겁니다.
할아버님께선 강녕하신가?
……지난번에 가족과 연락했을 땐 병중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세월…… 세월이라는 건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군. 전쟁은 영웅도, 상처도 남기곤 하지.
우르수스를 증오하나?
헬라그 씨…… 전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우르수스가 수많은 끔찍한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수많은 카시미어인도 우르수스인을 증오하죠. 아직도 말입니다……
증오를 부정한다라…… 전쟁에서 가족과 고향을 잃은 사람들에게 증오하지 말라고 하는 행동은 끔찍한 형벌에 가깝지.
헬라그 씨는 군인이지만…… 전 전쟁에 나가는 출정 기사가 아닙니다.
자넨 여전히 카시미어인이지.
그 사실을 부인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의 전 아미야의 꿈을 위해, 감염자를 위해 싸우고 싶을 뿐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카시미어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자넨 아직 젊다네, 빛의 기사.
그래…… 자넨 아직 젊어. 자신과 이 모든 걸 바로잡을 기회가 자네에겐 아직 있다네.
마…… 말도 안 돼…… 메, 메피스토가……
이게 뭐지? 돌연변이? 이봐, 내 말 알아듣겠어?……으윽……
헉…… 크흑…… 도, 도망…… 쳐……!
탈룰라가 우릴 배신했다!
말도 안 돼! 진짜 배신자는 패트리어트야. 놈을 해치워! 놈은 살카즈이자, 웬디고, 그리고 우르수스의 군인이라고! 그런 놈의 어디가 믿을 만하다는 거야?
칫, 이제 우리 차례인가.
뭐라고? W가 주둔 명령만 내리고 사라져 버렸다고? 탈룰라한테 죽은 건 아니겠지?
다른 부대는……?
연락 두절이야. 지금 감염자 놈들이 패트리어트를 포위한 채 공격하고 있어.
……하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혼란한 상태야. 놈들은 군인이 아니니 그럴 수밖에…… 이번 사태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쿠데타보다도 급작스러워……
패트리어트의 부대를 찾아 합류할까?
……살카즈라면 차라리 살카즈랑 붙는 쪽을 원할걸. 그게 철칙 아냐?
게다가 상대는 불드록카스티잖아.
체르노보그.
여전히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것 같군.
그곳에서 오래 지내셨습니까?
그리 긴 편은 아니었네. 불행히도 내 목숨이 보통의 우르수스인보다는 긴 편이지만.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곳에서 지냈던 건 사실이네.
한때 놀이동산이나 백화점, 인공호수를 모두 가진 이동도시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나?
지금 코어는 천재지변으로 파괴된 폐허 지역을 버리고, 몇 세대에 걸쳐 쌓아 올린 걸 쉽게 포기해 버렸네.
심지어 코어는 끔찍한 음모를 위해 자신을 바쳤지.
체르노보그는 그리 아름다운 곳이 아니네. 공장 때문에 대기가 오염됐거든.
하지만 그곳에는 수많은 무고한 우르수스인들이 살아가고 있다네. 사건을 일으킨 배후 세력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들이 있을 것 같나?
아무도 없다네.
분노가 그들의 눈을 멀게 했을 겁니다.
모두를 속인 거라면 우리도 예외는 아닐 걸세.
지금 내게 보이는 건 도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삶이 무너지는 걸 동력으로 삼아, 야심에 조종된 채 폭력을 행사하는 기계일 뿐이네.
그들은 사람들의 삶의 의지를 이용했지. 감염자의 생존권을 빼앗은 것을 시작으로, 끝내 그들의 의지마저 약탈할 생각이야.
그곳의 진료소는……
……내가 세운 건 이미 여러 번 무너졌었지. 하지만 네온 일행이 무사하기만 하면, 설령 폐허가 됐어도 파괴된 건 아니라네.
네온 일행이 무사하다면,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치료해 줄 거야. 나로서는 그게 유일한 위안인 셈이지.
그들을 잘 지켜 주셨습니다. 안 그러면 리유니온 때문에 마비가 된 체르노보그를 무사히 빠져나온다는 건 절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녀들을 잘 지켜 주고 싶을 뿐일세.
우르수스의 장군이라는 직위마저도 버리셨잖습니까.
그래…… 하지만 우르수스는 여전히 날 뒤쫓고 있지.
체르노보그가 움직이는 걸 볼 때면, 가끔은 헷갈리곤 한다네. 우르수스가 날 뒤쫓는 건지, 아니면 날 멀리 내치려는 건지……
……우르수스와 적이 되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우르수스…… 그 부패한 몸뚱어리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장의 늪에 빠져들기 전까지, 이 땅의 누구도 혹은 그 무엇도 우르수스와 척을 져선 안 돼.
한때 우르수스에 목숨을 바치며, 전쟁은 군인의 본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네. 내 신념에 따라 직무를 수행했었지.
하지만…… 하지만 이젠 그 늪에서 빠져나와 내가 살았던 그곳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됐네……
……자네처럼 말이야, 빛의 기사여.
카시미어인, 사미인, 용문인…… 그들은 이 땅에 지대한 영향을 준 역대 황제의 가르침을 어떻게 생각할까?
우르수스와의 전쟁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나?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다고 했지? 자네는 아직 젊어. 이런 문제를 외면할 권리도 있지. 하지만 그 답을 우린 이미 잘 알고 있네.
전쟁엔 답이란 게 존재하지 않아. 전쟁은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네.
……폭력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폭력이라…… 맞는 말이네.
선황께선 우르수스를 빛나게 하셨네. 우린 그걸 위해 평생을 바쳐 싸우겠다는 신념을 지녔지. 그분의 말씀처럼 우르수스는 그분의 두 손이 연장된 것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그분이 정말로 우르수스의 모든 사람을, 우르수스의 일부로 여겼을까?
그건……
패트리어트가 죽었다!
우르수스의 스파이가 죽었다! 그를 믿지 마라. 탈룰라가 감염자를 승리로 이끌 것이다!
탈룰라가 이곳의 모든 의지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걸, 탈룰라와 그 어리석은 측근들에게 똑똑히 알려주는 거다!
놈들을 고통 속에서 울부짖게 만드는 거다! 배신자는 노역자들의 방패에 짓밟힐 것이니, 그 누구도 우릴 막지 못해!
대위님을 위해! ……패트리어트를 위해!
……패트리어트…… 그 웬디고 말인가? 불드록카스티?
놈이……
패트리어트가 죽었다!
패트리어트가 죽었다!
……기다리게.
저건, 코어의 사령탑이네……
불타고 있군.
윽……
아미야…… 아미야 일행이……
이건 시작일 뿐이네.
리유니온을 이끄는 지도자는 평범한 감염자가 아니야. 겉으로 드러나는 전술이나 전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 리유니온의 배후에 도사린 거대한 그림자가 날카로운 마수를 드러냈네.
모두 조심해야 할 걸세. 그들의 음모가 성공하면 로도스 아일랜드, 용문, 감염자 그 누구도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고 말 테니까.
……아미야가 어떤 적을 상대하게 될지 짐작도 안 가는군요.
로도스 아일랜드의 지도자는 자네보다도 젊어.
리유니온이 선동한 감염자 폭도들, 그 속에 숨어든 막후 인물, 또 어쩌면……
……그들은 패트리어트를 상대하게 될 걸세.
패트리어트.
그의 이름을 되뇌어 보게. 그는 명실상부한…… 순수한 혈통의 웬디고이자, 우르수스의 군인이지.
북툰드라 감염자 부대의 지도자, 불드록카스티……
그가 로도스 아일랜드와 리유니온 사이를 막을 최후의 보루일 걸세.
……긴급 임시 회의에서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있습니다. 닥터 켈시가 그렇게 신중하게 상대하는 적은 거의 본 적 없었습니다…… 그것도 적군 하나 때문에.
……유난히 신중하게 굴어도 될 만한 자라네.
두 분이 아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한때 전우였지, 패트리어트는 진정한 전사야.
패트리어트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공훈이나 신분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네.
……웬디고를 우르수스인이라고 부르는 게 의외인 건가?
아닙니다.
신분과 신념이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건 이미 익숙해졌습니다.
로도스 아일랜드의 승산이 낮다고 생각하시나 보군요?
……꼭 그렇진 않네.
불드록카스티는 자신이 그린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 패트리어트의 이상…… 패트리어트가 믿는 이상을 위해.
로도스 아일랜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탈룰라를 참수하기로 했네. 무모하지만 절충안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해.
하지만 패트리어트는 달라…… 감염자와 저항 세력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내세운 것도 모자라, 그 이미지가 확대되도록 내버려 두고 있지.
리유니온은 패트리어트로 인해 동력을 얻을 걸세. 또 그로 인해 패트리어트의 가장 큰 약점이 될 거고.
무슨 말씀인지……
……
체르노보그의 사령탑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헬라그는 붉게 물든 하늘을 멀리서 바라보며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선이 향한 곳은 우르수스였다.
그곳은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자,
스러진 환영이었다.
……
운명이 패트리어트를 사지로 끌어들였네. 패트리어트는 일찌감치 깨달았지만 절대 무릎을 꿇지 않을 걸세.
패트리어트는 끝까지 싸울 테고.
그리곤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