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깨어날 때
라이타니엔의 어느 마을, 유일한 급수탑을 수리하기 위해 Fuze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오리지늄 회로를 아는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한다. 두 사람은 성격이 맞지 않아 불쾌한 기분으로 헤어지게 된다.
……
낯선 사람이군. 이름을 말하도록.
……Fuze.
그 억양, 우르수스인인가?
그런 셈이지.
무슨 일이지?
마을에 급수탑이 부서져서 고치려 한다.
직접 가서 수리하면 될 텐데, 왜 나를 찾아왔지?
급수탑의 문제는 펌프의 오리지늄 회로에 있더군. 난 엔지니어링 지식이 있고, 넌 오리지늄 아츠를 잘 알고 있지. 네 도움이 필요하다.
……중무장한 복면의 우르수스인이, 라이타니엔 마을의 급수탑을 고치러 왔다?
버먼 씨……
오, 너도 있었군. 이 자가 왜 나를 찾아온 거지?
저와 비셀 씨가 강가에 물을 길으러 갔다가 니들플라이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비셀 씨가 부상을 입었는데 여기 계신 Fuze 씨가 저희를 구해주셨습니다.
비셀이 부상을 입었다고? 상처는 심한가?
아직…… 살아는 있어요. 비셀 씨의 손녀가 지금 보살피고 있습니다.
그렇군. 계속 말해 봐.
저희가 감사한 마음에 대접하려 Fuze 씨를 마을에 초대했을 때, 마을에 급수탑을 보시고선 수리할 수 있을지 알아보시더군요. 기계 구조가 아니라 오리지늄 회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시고선……
그렇군.
그,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서 너는 마을에 오리지늄 아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물어봤고, 나를 찾아오게 된 것이군.
(고개를 끄덕이며) 네가 네 주민들을 도와줬으면 하는데.
난 영주가 아니야.
저 사람 말로는 '남작님'이 수년 전 이 급수탑을 수리했었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 '남작님'이 어디 사는지 물었더니, 네가 있는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거야.
자네도 들었겠지. 날 남작님이 아니라 버먼 씨라고 부르는 걸 말이야.
……그럼 버먼 씨, 이 급수탑은 주민에게 더 나은 생활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시설일 텐데.
예전에는 모두가 강변까지 걸어가 물을 기르곤 했지. 그때는 아무도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급수탑에서 끊임없이 지하수를 끌어다 쓴 탓에, 강변에 니들플라이가 둥지를 틀 수 있는 빈 공간이 생길 줄 누가 알았을까?
난 그저 급수탑을 빨리 수리했다면, 비셀 씨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할 뿐이야.
고작 한 사람의 죽음일 뿐이지.
그의 죽음이 사소하다는 건가?
그뿐만이 아니야.
비셀도, 나도, 이 마을, 심지어 라이타니엔 전체까지……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이 쇠퇴해 가며, 결국 죽게 되겠지.
니들플라이에게 죽는 것과 노쇠하여 죽는 것, 내가 보기엔 단지 버든비스트를 타느냐, 걸어서 종점까지 가느냐의 문제에 불과해.
……궤변이군.
어딜 가는 거지?
다른 사람을 찾아야겠어.
마을에 오리지늄 회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당신을 데리고 온 사람이 분명 알려줬을 텐데.
그럼 책을 찾아봐야겠군.
왜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지?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사람보다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럼 이만.
잠깐.
이쪽 방면의 책이 필요한 거라면, 내가 어렸을 때 샀던 책이 몇 권 있어.
오래도 찾는군.
책을 찾는 것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
빅토리아에서 출판한 《오리지늄 회로의 이론과 응용》이라는 책이야. 내 집에서 라이타니엔어로 적혀있지 않은 책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복면의 우르수스인, 지금 당신의 그 빈틈없는 가면 뒤에는 의문으로 가득하겠지. 내가 왜 급수탑을 수리하는 걸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회피하면서도 당신에게 책을 빌려주고 있는지 모를 거야.
몇 가지 가정할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겠지. 급수탑을 고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말이야.
그렇게 복잡한 건 아니야. 단지 조금 궁금할 뿐이지.
너 같은 사람은 이미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중무장한 복면 쓴 외국인이, 아무 이유도 없이 어떻게든 주민을 도와 급수탑을 수리하려고 한다면, 돌멩이도 흥미를 가질 것 같은데.
수리하든지, 못하든지 단지 그뿐이다.
아니. 나는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길래, 본인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이렇게까지 집착하는지가 궁금한 거야.
Fuze 씨, 하룻밤 자고 가지 않겠어? 겸사겸사 저녁에 이야기라도 좀 나누고요.
고맙지만, 대화가 잘 통할 것 같진 않군.
……
당신 말이 맞아.
……그래도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군.
……슈랏? 왜 그래?
미안, 쾨츠. 잠시 딴생각을 했어.
Fuze가 주위를 둘러본다.
로도스 아일랜드 복도다. 익숙하다곤 할 수 없지만, 그리 낯설지도 않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엘리아스 쾨츠가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사용하는 숙소 밖의 벽에 기댔다. Blitz라는 코드네임을 가진 그 동료가 밖에 나오길 기다리는 듯했다.
슈랏, 조금만 더 기다려봐. 로도스 아일랜드의 면도기는 쓰기가 힘드네.
문제없다.
우리 방금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아, 맞다. 내가 라이타니엔에서 축제를 봤다고 했잖아.
그 축제에는 1천 명의 캐스터가 현장에 있었어.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캐스터들이 도시광장에서 조각처럼 빽빽이 즐비해 있었고 정적이 감돌았지.
그러고는 기다리고 있었어. 들리지도 않을 만큼 가느다란 음표 하나가 콘서트마스터의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는 걸 말이야. 그런 후에 캐스터들은 그제야 손에 있던 아츠 유닛을 들어 올렸지……
저기, 반응 좀 해주지 않겠어?
그런 장면은 상상하기 어려운데. 라이타니엔은 내가 아는 곳과 너무나도 달라. 생각해 보자고, 로브를 걸치고 가면을 쓴 1천 명이, 마법 지팡이를 들고 레기스탄 광장에 있는 모습이라……
레기스탄 광장?
사마르칸트의 랜드마크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그렇군, 그럼 계속 얘기할게.
1천 개 아츠의 빛이 밤하늘을 향해 가고, 아름다운 색들이 구름층 사이로 부딪치며 갈라져서 피어났지. 눈에 담을 수 있는 모든 하늘엔 찬란한 꽃의 바다가 그려졌어.
에너지 전환계 오리지늄 아츠의 응용인가?
오리지늄 아츠에 대해 잘 알고 있네?
도솔레스에서 벼락치기로 보충 수업한 성과이지.
석탄, 석유, 천연가스, 심지어 핵융합까지…… 모든 것들이 오리지늄으로 대체되었으니, 처음부터 다시 서둘러서 배워야지.
쾨츠, 왜 그러지?
면도기가 고장 났어, 잠시만……
Fuze는 펼쳐진 책 위로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단 걸 알아챘다.
쳇, 등도 아프고 머리도 어지럽군.
“왼쪽의 사진은 책의 저자가 라이타니엔에 방문 견학했을 때 목격한 축제 현장이다……”
왜 그런 꿈을 꿨나 했더니.
뭐가 떨어진 거지…… 책갈피인가?
책이랑 같이 돌려줘야겠군.
저쪽에 있는 스위치 좀 눌러줘.
반응이 없는데요.
버먼에게 책을 몇 권 빌려야 할 것 같군. 나 대신 다녀와 줄 수 있나?
Fuze 씨, 정말 죄송합니다. 버먼 씨 쪽은……
왜 그러지? 버먼이 남들에게 보여선 안 되는 일이라도 몰래 하고 있는 건가? 처음 그 집에 갔을 때, 너도 꽤 긴장한 것 같던데.
아니아니아니,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버먼 씨는 나쁘신 분이 아니에요. 다만…… 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단지 모두 별일 아닌 걸로 버먼 씨에게 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을 뿐이에요.
……됐다. 내가 직접 가지.
보자……《실용 가정 전기 매뉴얼》? 이 책은 너무 간단하겠군.
간단하다고 해서 도움이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지. 이 책으로 하겠다.
당연히 가능하지.
그런데 어떻게 우르수스에는 기계는 잘 알면서, 오리지늄 회로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지?
지금 눈앞에 있는 문제에 그건 중요하지 않지.
급수탑은 내버려 두고, 서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어때?
필요 없어.
먼저 말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내가 먼저 해도 상관없지…… 그럼 급수탑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급수탑은 남작님의 이상을 위한 첫걸음이었어.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더욱 나은 생활을 하기를 바라셨고, 이 마을을 '이상적인 마을'로 바꾸려고 했지.
안타깝게도 주민들에게 수돗물을 마실 수 있게 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남작님께서는 마을에 공장도 차리고 싶어 하셨고, 투자를 받을 수도의 큰손들도 찾고 싶어 하셨고, 또 이곳을 예술가들의 스케치 장소로 만들고 싶어 하셨어…… 결론적으로는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거나,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지.
그 분의 마지막 시도는 가장 대담했고, 또한 가장 성공과 가까웠었지…… 그분은 마을 전체를 이동 플랫폼으로 옮기려고 했어. 베두니엔의 한 공방과는 이미 이야기를 끝내고 많은 계약금도 받았었지……
그리고 여황 폐하는 그녀의 충성스러운 츠빌링슈튀르메에 행차하셨고.
지금 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내 아버지의 이야기야.
그때 난 아직 어렸어. 베두니엔에 있는 대학에서 텔레파시 감지계의 아츠 논문을 쓰고 있었지.
결국 그 시기에 내가 가장 많이 본 건 바로 '피'였어. 시민의, 귀족의, 헌병의, 선제후의 그리고 내 스승의……
제가 운 좋게나마 불에 그을린 논문을 들고 집으로 도망쳤을 때, 아버지는 처음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고, 그다음엔 그 공방이 어찌 됐냐 물으셨지…… 무사할 리가 있나?
그렇게 네 아버지는 원통함 속에 쓰러졌고, 너는 남작 직위를 계승 받지 못했던 거였군.
아니, 나 스스로 남작 직위를 포기했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아버렸거든.
……너와 네 아버지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아나?
알려 줘.
네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수돗물을 마시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했지만, 너는 그 수돗물조차도 마을 사람들이 마시지 못하게 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눈다면, 내일 네 이웃들은 다시 수돗물을 마실 수 있겠지.
그리고 너는 목표가 달성되고 나면, 잠시도 머물지 않고 떠나겠지?
라이타니엔에는 나처럼 고집 센 인간들이 많을 거야. 그쪽을 찾아보라고.
아니. 최근에서야 알게 됐어. 당신 같은 사람은 흔치 않아.
흔치 않다고?
아니야. 연구가 잘 되길 바라지, Fuze 씨.
그리고 비셀의 손녀를 만나면, 서둘러 사람을 보내라고 전해 줘.
사람을 보내라고?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여기 좋네, 여기로 하자.
여긴 충분히 어둡다고, 카테브.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오리지늄이 아니라 석유로 구동되는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는걸.
너도 어둠 속에서 향수병을 앓을 수 있는 사람이었군.
당연하지. 우리가 여기 온 그날 아직 기억해?
잊을 리가 있나. 마그넷힐 2호 실험실의 원래 위치를 조사하러 갔다가, 레이넬의 골프공 위로 나동그라졌었는데.
집 이야기 나온 김에, 네 고향 이야기 좀 해보자고. 사마르칸트에 있는…… 레기스탄 광장이었지?
맞아, 파란 하늘 그리고 빌딩의 둥근 지붕도 파랬어. 광장에 있는 사람들과 오고 가는 차량, 심지어 거대한 3개 빌딩의 무늬까지도 기억나는군.
Fuze는 책 위로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스케치를 절반쯤 그렸을 때 종종 쓰러져 잠들곤 했고, 잠이 깨면 남아 있는 꿈을 머릿속에서 떨쳐 버리려고 노력했다.
그 꿈들은 너무 선명했고 너무 현실 같았다.
심지어 아주 가끔 몇 차례, 그는 테라가 단지 한 편의 기나긴 꿈이 아닌지, 마그넷힐 2호에서 머리를 부딪힌 건 아닌지, 자신도 모르게 진지하게 생각하곤 했다.
(하아암)
지금 잠들 순 없지. 적어도 우선 급수탑으로 가봐야 해. 아니면 다시 버먼한테 책을 빌려서 확인……
그러고 보니, 비셀 씨의 손녀에게 무슨 말을 전해달라고 했었는데…… 사람을 보내라고 했었던가?
비셀을 제때 데려온 덕에 목숨은 건진 듯하군. 비셀의 손녀는 어떻게 됐지?
몸살이 났더군.
버먼, 왜 마을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을 보내라고 한 거지?
방금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봤었다. 비록 대답을 주저하긴 했지만, 결국에는 넌 줄곧 이렇게 해왔었다고 말해주더군.
그래서…… 내가 죽은 사람을 이용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건가?
많이는 아니고 조금. 만약 이전에 한 말 모두 사실이라면 말이야.
그건 또 어째서지?
사실 '쇠퇴', '죽음' 그리고 '무의미'를 입에 달고 사는 인간이 진짜 악행을 저지를 수 있으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잘못을 저지를 순 없겠지,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나를 화나게 하는 데는 성공했군, Fuze 씨.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아.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럼 한번 잘 지켜보도록. 알게 될 테니까.
또 한바탕 강렬한 잠이 쏟아져 왔다. Fuze는 다시 잠들지 않도록 자신의 혀를 힘껏 깨물어야 했다.
버먼은 그저 노인의 흐리멍덩한 두 눈을 바라보며, 짧은 지팡이의 끝 부분을 살포시 노인의 이마 위에 대었다.
지팡이 끝이 희미하게 빛난다.
(명확하지 않은 중얼거림)
러빈, 정말 너구나. 네가…… 돌아왔구나…… 네가 정말 돌아왔어……
미, 미안해하지 말거라.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자……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여기, 뒤뜰의 사과다…… 네가 떠날 때 먹고 싶어 했잖니. 하필 그 해에 열매가 하나도 열리지 않아서, 요 몇 년 동안 내가 계속 간직하고 있었단다……
Fuze는 노인이 내민 손에는 결코 사과 같은 것은 없으며, 노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버먼 한 사람뿐인 걸 지켜보고 있었다.
러빈은 누구지?
뵈제 씨의 외아들이야. 십몇 년 전에 광석병에 걸리곤 스스로 마을을 떠났지.
뵈제에게 도대체 무엇을 한 거지? 환각을 일으킨 건가?
그럴 리가.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난 단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고 편안하게 해 줄 뿐이야. 그리고 꿈을 꾸어선 안 될 시간과 장소에서 꿈에 빠지게 해 주지…… 내게 간섭할 권리는 없는, 헛된 꿈에 말이야.
마치 의사가 병원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에게 주사를 놓아 고통을 덜어주는 것과 같은, 그런 무형의 마취제처럼 들리는군.
그렇게 이해했다면, 더 할 말은 없어.
약물 남용은 사람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
슈랏…… 죽어가는 사람이 편안하게 떠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남용이라 할 수 있나?
……
Fuze 씨, 이건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야.
하지만 생각해 보았나? 만약 네가 애초에 더 일찍 그 급수탑에 뭐라도 해보려 했다면, 비셀은 죽음에 가까워지지도 않았을 거란 걸 말이야.
너의 그 보이지 않는 마취제에 가장 깊이 빠져있는 건, 죽어가는 사람이 아닌 바로 너 자신이다, 버먼.
하하하, 나라고?
어쩌면 너무 많은 비극을 봐왔기 때문일 수도 있겠군. 보면 볼수록, 나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재앙, 음모, 전쟁과 오리지늄 심지어 작은 사고들까지…… 사람의 의지와 생명은 이러한 것들 앞에서 똑같이 약해지고, 무너지지.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어. 나 역시도 죽어가는 몸이니까.
버먼이 옷을 풀자, 가슴과 복부 사이에 얼룩진 오리지늄 결정이 드러났다.
츠빌링슈튀르메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옆구리에……조그맣고 검은 돌 한 조각이 생긴 걸 발견했어. 베두니엔이 내게 남긴 이별 선물이었지.
이제 이건 곧 내 모든 걸 집어삼키겠지. 그래서 오늘 내 평생 단 한 번뿐인 범죄를 저지르기로 결심한 거야.
범죄?
정신과 신체가 건강하고 비협조적인 사람에게 내 아츠가 발동되기 위해선, 많은 까다로운 준비가 필요하지. 미안하지만, 네게 그걸 사용하게 됐고.
처음에는 그저 과묵한 행동파가 꿈속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궁금했어. 그래서 책과 책갈피에……조금 꼼수를 부렸지.
그리곤 네 잠꼬대에서 생전 처음 듣는 말을 듣게 되었지. 단 한 조각의 오리지늄도 없는…… 푸른 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오리지늄이 없는 곳에 당신과 같이 가거나, 너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지나친 바람은 하지 않아. 넌 나 같이 비현실적인 사람을 싫어할 테니까. 아닌가?
……
그래서 아츠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어…… 이 마지막 백일몽을 너와 내가 함께 완성하려면 말이야.
광석병 환자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있도록 해서 미안하지만, 난 너무 오랫동안 고독한 상태였거든.
Fuze가 어떤 반응도 할 시간도 없이, 버먼의 지팡이는 이미 그를 향했다.
극심한 졸음이 Fuze의 눈가에 몰려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조그마한 음악 소리는 낮고 세밀했으며, 바닷속 아래 암류와 같이, 해수면 위로 떠오르는 의식을 물속으로 천천히 끌고 들어갔다.
일어나, 슈랏 일어나라고!
콜록콜록……
아, 깨어났구나. 축하해, 네 뺨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네. 장비 챙겨서 여길 떠날 준비하자.
여기가 지금 어디지?
마그넷힐 2호 실험실이잖아. 진동은 이미 끝났어. 네가 머리를 부딪힌 것만 빼면, 아무 일도 없었고.
실험실 안은 이미 이상 없는 걸로 확인됐고, Doc 걔네들은 이미 철수했어. 진동이 리바이와 관련됐다 해도, 다음에 다시 와서 조사하는 수밖에.
아…… 그래.
휴가나 생각해 보라고.
휴가?
어떻게 이것도 잊어버릴 수 있지? 방금 그렇게나 심하게 부딪혔던 거야?
어디로 갈지 정해. 한동안 기분 좀 풀 수 있게, 최고로 아름다운 장소로 말이야.
사마르칸트 어때? 네가 말했었던 레기스탄 광장 말이야. 파란 하늘과 파란 빌딩 그리고 벽화, 사람들과 자동차가 있는……
그리고 나는 하루 종일 거기서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어야지.
알겠어.
그런데…… 아, 아니지…… 아직 할 일이 있는 거 같은데……
무슨 일?
나도 모르겠군. 그런데…… 그런데 오리지늄이……
오리지늄? 그게 뭔데? 방금 머리 부딪혔을 때 꿈꾼 거 아니지?
Ela, 오리지늄이란 단어…… 들어본 적 있어?
꿈에서 본 것을 다른 사람한테 들어봤을 거라고 기대해선 안돼.
미안, 그냥 단어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이제 그런 건 신경 끄고, 레기스탄 광장이나 생각해 보자고. 아마도 곧 갈 수 있을 테니까.
너희들의 캐스…… 그게 아니라 과학자, 최고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네 멋진 고향에 가서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까, 너무 즐거워서.
재앙 하나 없고, 전쟁도 없고, 비극도 없는 곳 말이야.
비극이 없는…… 곳?
기다려, 슈랏. 너 왜 그래?
오리건을 기억하나?
슈랏……
대답해, 오리건은 어땠었지?
오, 오리건? 예술가들이 가기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지. 좋은 박물관이 있고, 악단 같은 것도 있고……
그럼 바그다드는? 레바논은? 모스크바는?
……슈랏, 내 얘기 들어봐……
넌 오리지늄만 없으면……
아냐, 아니라고!!
비극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버먼 씨?
(쓴 웃음을 지으며) 그럴 리가 있나, 슈랏.
어쩌면 모든 게 오리지늄 이외의 형태로 다시 반복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죽어가는 광석병 환자에게 너무 좋게만 생각한다고 비난해서는 안 돼.
그럼 아마 방금 내가 말했던 그곳들을 너도 봤어야 했겠군. 오리지늄이 없는 그 파란 하늘 아래, 결국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필요 없어. 그곳에서 흘린 피도 베두니엔에서 그해 가을에 흘린 피 못지않게 많았을 테니까. 그렇지 않나?
땅에 스며든 피를,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로 저울질해선 안 돼.
하……슈랏, 너도 꽤나 말을 잘하게 됐군.
가 봐.
아츠는 이미 실패했고, 넌 내게 그 파란 하늘 아래 어떤 풍경이 있는지 더 이상 알려줄 수 없어. 나 역시 더 이상 네 이야기를 실감할 수 없고.
자, 내가 오리지늄 분진이 되기 전에 빨리 떠나. 그러면 내 생애 마지막이자 유일한 악행도 실패로 끝날 테니까.
왜 그러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 갑자기 할 말이라도 생겼나?
이 세계에…… 이 대지에…… 비극은 네가 생각한 것만큼 많지 않을지도 몰라.
그럼 내가 베두니엔에서 본 것은 무엇이고, 네가 방금 말한 그곳에서 겪은 건 뭐지?
혼란.
혼란은 쇠퇴와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때로는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하지.
혼란이 항상 비극으로 끝나는 건 아니야, 그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면, 그렇게 된다는 거겠지?
……
아마도 그렇겠지, 슈랏. 하지만, 이젠 너무……
너무 늦었어.
슈랏,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있다고 말했었지?
그런 이야기는 잘 모른다.
괜찮아. 단지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내가 죽은 후에 네 기억 속의 그 사마르칸트에 가서 그곳의 파란 지붕을 볼 수 있을까?
만약 원한다면……
……내가 내 의지로 그 광경을 알려줄 수는 있지.
내게 정말 그것에 대해 들을 자격이 있을까?
정말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끝내지 말라고.
초췌한 남자는 눈을 크게 뜨더니, 허약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네가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까닭은 너무 똑똑해서 일지도 모르겠어, 슈랏. 머리가 좋은 사람은 자주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든.
Fuze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가능한 자세하게 그 광장과 광장 주변 빌딩의 모습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버먼이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테이블 앞으로 실제와 흡사한 레기스탄 광장 모형이 천천히 모양을 잡아갔다.
……비슷해, 정말 비슷하군.
……그렇다면 다행이야.
이제 어디로 갈 거지?
급수탑. 네가 했어야 할 일을 대신해서 끝내야 하니, 당분간 마을에 더 남아야겠어.
그럼 가 봐. 비셀 씨를 데리고 돌아가서, 손녀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게 해 줘.
그러지. 그럼 이만.
……잘 지내라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후, 뵈제는 마지막 힘을 다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이번엔 어떠한 선율도 더 이상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는 단지 방문과 창문을 닫았을 뿐이었다.
지팡이가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졌지만, 버먼은 더 이상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파란 하늘을 떠올리며, 건축 모형의 파란 지붕을 계속 어루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