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정
한 작은 마을에 머물면서 전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던 엘리시움에게 위기가 소리 없이 닥쳐오는데……
등장 오퍼레이터: 엘리시움
사장님, 편지는 여기에 둘게!
오후에 시내에 다녀올 건데, 다들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제가 출발하기 전까지 이 쇼핑 리스트에 적어둬. 늦으면 안 기다릴 거니까!
아이고, 답장이 벌써 왔나 보네! 고마워, 엘리시움!
또 시내에 가는 거야? 그 뭐냐…… 발신기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정식 이름은 일체형 송수신기야!
중고라 발신 범위가 넓진 않지만 이 케이스를 봐. 색상이 내 스타일이랑 잘 어울리지 않아?
네 패션 취향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젊은이, 시내에 나가거든 담배 좀 사다 주게나. 지난번과 같은 걸로 부탁하지.
시내에서 유행하는 고데기를 갖고 싶은데, 혹시 부탁해도 될까?
그래, 신상 고데기 말하는 거지? 기억했어.
젊은이, 내 것도 잊지 말고……
음? 지난번에 가족에게 담배 산 걸 들켜서 용돈을 전부 빼앗긴 게 누구였더라? 다 기억하고 있어.
내 기억력으로는 적어도 사오십 년은 지나야 그 일이 잊힐 거야.
……기억력이 너무 좋은 것 아닌가!
쯧, 하여간 요즘 젊은이들은 간섭도 잔소리도 심하다니까.
저 사람 말은 신경 쓰지 마! 의사 선생님이 아무리 담배를 끊으라고 해도 절대 안 끊으신다니까.
자, 고데기 비용이야. 그럼 잘 부탁해.
걱정하지 마. 제일 멋진 모델로 골라올 테니까.
그럼 다녀올게.
고향을 떠나온 지 벌써 몇 년째일까?
3년? 아니. 3년째 되던 해에는 컬럼비아에서 계속 북쪽으로 향해 사미에 도착했다.
더 북쪽으로 가려다가 빙설 지역에서 제사장에게 가로막히는 바람에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건강한 성인이 오리지늄 아츠도 다룰 줄 아니, 너무 까다롭게 굴지만 않으면 크게 고생할 일이 없었다.
여비가 바닥나면 현지에서 일하고 돈을 모은 다음 다시 출발했다. 그렇게 여행하며 엘리시움은 소원대로 곳곳을 둘러보게 되었다.
아주 부유한 곳도, 찢어지게 가난한 곳도 있었다.
이 마을에 묵게 된 것도 별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너무 오래 걸은 탓에 조금 쉬고 싶었을 뿐……
신상 고데기랑…… 음, 담배 한 갑 정도는 건강에 별문제 없겠지.
이제 발신기 부품 하나만 더 찾으면 되겠네. 이런 증폭기는 찾기가 어렵다니까.
……착각인가?
하늘이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하늘이…… 뭔가 심상치 않군.
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걸출한 사람의 안목은 대개 비슷하다더니.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거든.
그나저나 행색을 보니 일반인은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전 이 가게를 털고 도망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어. 당신이 무슨 장사를 하든 오늘은 많이 못 팔았을 것 같아.
……참견하지 마. 어차피 여기도 일반적인 가게는 아니니까.
어, 그런데 저거 상품 아니야?
저건……
저건 홍보를 앞둔 예방약이야.
예방약? 대단한데? 설마 광석병 예방약은 아니지?
정말 약효가 있는 예방약은 어마어마하게 비싸서, 부자 말고는 필요해도 살 수가 없대. 시중에 팔리는 약은 대부분 효과가 없고.
흠, 근데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보거든. 당신들이 가짜를 팔 것 같진 않은데, 설마 진짜야?
……
들려?
말이 정말 많네.
이건 열정이 넘치는 거라고.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선 열정이 필요하잖아.
특히 당신들처럼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더더욱 그렇고. 예를 들면 정체불명의 예방약 같은 봐서는 안 될 물건을 봤다거나……
이따 때리려거든 살살 좀 부탁해. 적어도 저기 복면을 쓴 형씨는 정이 많은 사람 같거든.
……그럴 리가. 얼굴에 주먹을 날려주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솔직해지라고.
하지만 아직까진 가짜 약 사기단이나 밀수단처럼은 안 보여.
그야 아니니까.
우린…… 제약회사야. 감염자 문제 해결을 맡고 있어.
감염자를 해결한다는 거야, 아니면 문제를 해결한다는 거야?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물어봤겠지만, 난 두 사람을 믿어.
너 진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왠지 네 입은 맞으려고 달려 있는 것 같으니까.
폭력은 옳지 않아……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이만 가봐야겠어.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은 프런트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니까 사람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
괜한 참견 말고 가기나 해!
……
받아.
으아앗! 갑자기 암기로 공격을…… 어? 이거 예방약인가?
나 주는 거야? 이러면 좀 미안한데.
3타렐이야.
역시 돈을 받는구나?! 물론 비싸진 않지만……
리더……
방금 그 녀석, 혼잣말한 게 아니죠? 설마 대장님과 대화한 거예요?
……
하지만 대장님은…… 이건 말이 안 되는데?
……
……
미안해, 손님. 당신이 얘기한 그 증폭기는 이미 품절이야.
말도 안 돼! 사장님은 내 마지막 희망이었다고!
정말 없어? 창고 구석에 너무 오래 처박힌 탓에 못 찾았을 가능성은…… 없을까?
찾을 수 있는 곳은 전부 찾아봤어. 게다가 출납부를 꼼꼼히 기록하고 있어서 애초에 그럴 일도 없다고.
알았어.
하아.
우리 상점에 처음 온 게 아닌 것 같은데, 지난번에 고치고 싶다고 했던 그 기계 때문인가?
맞아! 이것 봐, 일체형 송수신기야! 내가 직접 개조했어.
이쪽 분야에 관한 지식이 전무했는데, 독학하며 개조하다 보니 생각보다 잘 되는 거야! 아니, 나도 내 습득력에 놀랐을 정도였어!
적당한 증폭기만 찾으면 송수신기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장님, 내가 전달자가 되면 어떨 것 같아? 마침 오리지늄 아츠도 잘 다루고, 이런 인재를 그냥 낭비하는 것도 아까운 일이잖아.
하하, 전달자는 발신기를 조립할 줄 안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참, 시험도 봐야 한댔지? 사장님, 실은 고향에서 내 별명이 학계의 벼락치기 4대 천왕 중 하나였어……
그게 무슨 뜻인데?
시험 하나는 자신 있단 소리지.
……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진지하게 얘기할게.
당신이 찾는 건 잘 사용되지 않는 모델이야. 하지만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다면 물건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봐 줄 수는 있어.
좋아. 당분간은 근처 마을에 머물 예정이거든.
약속한 거야. 그럼 나중에 다시 올게……
……속보, 속보입니다.
시민 여러분께 실시간 속보를 전달해 드립니다.
……어?
……
누구 편지길래 그렇게 열심히 읽어?
조용히 해 봐. 방해하지 말고……
……
됐다! 성공이야!
어? 뭘 성공했는데?
흥, 분명 엘리시움 그 젊은이와 관련된 일이겠지. 봉투에 적힌 서명을 보니 전에 대도시로 발령받은 전달자님 같더구먼.
재앙 정보 전달자님이야!
엘리시움이 우리 마을에 온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잖아. 돈도 제법 드는데, 언제까지고 셋방에서 살게 내버려 둘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편지로 여쭤봤더니, 전달자님께서 엘리시움이 본인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어!
……웬일이래?
전달자님이라니?
우리 마을엔 전달자가 없었잖아? 지난번에 엘리시움이 어쩌면 자기가 이 마을 첫 상주 전달자가 될 수 있다고 그러던데.
실은…… 한때 우리 마을에도 전달자님이 있었어.
다들 전달자님이 마을에 남아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 방까지 나누어 드렸거든.
하지만 전달자님들이 어디 이런 작은 마을에서 머무르려 하겠나? 얼마 후에 떠나고 말았지.
생각하니 또 화가 치미는군. 됐어, 난 이만 가겠네.
……하아.
그렇다고 그들을 탓할 수는 없지. 대도시의 보수는 이런 누추한 마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으니까. 간다는 사람을 말릴 수도 없고.
괜찮아, 갈 거면 가라지 뭐. 우리가 아쉬울 것도 없고! 게다가 지금 마을에는 엘리시움 그 녀석이 있잖아.
전문 전달자의 첫걸음은 멋진 코드네임을 짓는 거라면서 벌써 이름까지 지었으니 농담은 아니겠지?
하하, 그러길 바라야지.
……
잠깐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
어이! 큰일 났어! 어서들 나와 봐!
하, 하늘이 변했어!
도시 재앙 정보 전달자의 관측에 따르면 향후 몇 시간 내 우리 시 남서쪽에서 재앙운이 형성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것은 지역적인 돌발성 재앙으로 국지적 범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이번 돌발성 재앙은 크게 위협적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나, 안전을 위해서라도 며칠 동안 외출을 삼가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남서쪽 지역 방문 계획이 있는 시민 여러분께서는 안전을 고려하여 일정을 변경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
남서쪽은 상품 출고 지역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어.
당신의 상품은 무사할 거야……
사장님, 증폭기 돈은 우선 여기 두고 갈게! 찾으러 올 테니까 꼭 입고해놔!
어어, 잠깐! 왜 뛰어가는 거야?
안 뛸 수가 없잖아! 이건 그야말로 재앙과 달리기 경주를 해야 하는 거니까!
지금 돌아가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엘리시움은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마을과 이 정도로 애틋한 사이인가?
그건 아니었다. 적어도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몇 달 동안 묵은 작은 마을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곁에서 관망하다가 모든 풍파가 잠잠해진 후에 뒤늦게 행동하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으로선 정신을 집중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엄마, 하늘에 왜 저렇게 큰 구름이 떠 있어? 무서워……
거, 겁먹지 말렴. 당장 아빠를 찾으러 가자!
방금 지진이 일어난 건가?! 이제 어쩌지?
누가 이 나무판 좀 치워줘! 갑자기 떨어지는 바람에 다, 다리가 깔렸어!
기다려! 도와줄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재앙, 이건 재앙이야!
지난번에도 똑같았어! 어서 도망쳐! 최대한 멀리 도망치란 말이야!
앗!
조심해!
휴……
방금 완전 히어로 같았어. 내가 심사위원이었다면 조금 전 몸을 돌리는 액션에 10점 만점을 줬을 거야. 안 그래?
엘리시움……! 다, 다쳤잖아!
여긴 어쩐 일이야, 시내에 간 거 아니었어?!
걱정하지 마. 살짝 긁힌 거니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게 느껴졌거든…… 사실 이쪽에서 재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온 거야.
어때, 의리 넘치지?
너, 너, 이 멍청아! 너 바보야? 이럴 때 돌아오면 어떡해!
잠시만,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래?
농담은 이쯤 할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잖아.
모든 주민에게 지금 바로 떠나야 한다고 알려야 해…… 이런 돌발성 재앙은 무섭게 몰아치기 때문에 지금 피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게 될 거야!
하지만 피할 곳이 있을까?
날 믿는다면 나한테 맡겨!
내가 또 야생 생존 전문가잖아.
모두 날 따라와!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재앙 상황에서는 대기 중 오리지늄 농도가 급격히 상승할 뿐만 아니라 강풍에 활성 입자가 날아올 수도 있어! 모두 상처가 나지 않도록 피부를 꽁꽁 감싸!
하지만 방금 네 상처는……
걱정하지 마. 내겐 비밀 무기가 있거든.
(그때 그 약을 쓸 일이 생기다니. 생각지도 못했어.)
(가짜 약이 아니어야 할 텐데.)
모두 조금만 더 힘을 내!
목적지는…… 바로 저 앞이야!
위쪽의 이 문만 닫으면…… 됐어, 일단은 안전할 거야.
여긴 지하 대피소인가?
맞아, 오래전에 버려진 대피소야.
이런 곳이 있는지 전혀 몰랐네. 여길 찾아내다니……
자랑이 아니라 내가 길눈이 좀 밝은 데다 주변 지도를 그리겠다고 이 근방을 직접 발로 뛰어다녔거든.
그러니 내가 모르는 곳이 없는 게 당연하지. 오래전에 폐기된 대피소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이제 나 좀 칭찬해 줄래?
어? 으음…… 엘리시움, 정말 대단해!
바로 그거야! 사실에 기반한 멘트, 아주 좋았어!
……
크흠, 저, 정말 고마워.
그럼 이제 여기서 계속 기다리면 되는 거야? 다들 급하게 대피하느라 빈손으로 왔는데…… 얼마나 더 버텨야 해?
적어도 재앙이 끝나고 외부 환경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는 여기 있어야 해.
걱정하지 마. 이런 돌발성 재앙은 금방 끝나니까.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안 가.
별말씀을.
하지만 앞으로 위험한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을 차원의 대책이 필요해. 이 대피소는 여기저기 노화돼서 안전성이 떨어지거든.
만약 이번 재앙에 지층에서 위로 향해 자라나는 결정 현상이 동반되었다면, 죽어도 여길 선택하지 않았을 거야.
허…… 역시 재앙 앞에선 뾰족한 수가 없구나.
미리 소식을 알았더라면 준비할 시간만큼은 벌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비관하지 마.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내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던 거잖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나저나 아까부터 뭘 그렇게 만지작거리는 거야?
기계를 테스트하고 있었어. 주변 몇 킬로미터 내에 '여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어요'라고 외치려 한다고 생각하면 돼.
아직은 쓸 수 없지만 미리 준비해 두면 좋잖아.
땅이 흔들리고 있어. 너무 무서워. 얼마나 더 버텨야 해?
헉! 방금 그건 무슨 소리지?
뭔가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보고 올게.
리베리는 인파를 헤치며 지나갔다. 어둑한 피난소는 마을 사람들로 북적였다.
꼬마는 갸웃거리며 넋이 나간 어머니 품에 꼭 안겨 있었고, 노인들은 찌그러진 조각상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따금 낮은 흐느낌이 들렸다. 이곳에 있는 마을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적었다. 엘리시움은 이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굉음이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자 대피소로 들어왔던 문이 보였다. 진동 소리와 함께 케케묵은 먼지가 엘리시움의 얼굴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손을 뻗어본 리베리가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조사 끝에 엘리시움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바깥으로 향하는 문이 무너져내린 바위에 가로막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갈 수 없다고?! 말도 안 돼……
허둥대지 마! 문이 막혔을 뿐이라고. 함께 힘을 모아 땅을 파서 나가면 돼!
……
다들 진정해. 내게 이 발신기가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지? 조금 전에 성공적으로 구조 신호를 보냈으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
정말? 잘됐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증폭기가 없어서 발신 범위가 제한적이야……)
(방법을 찾아야 해.)
(약을 쓸 타이밍을 놓쳤더니 다친 팔이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어.)
(게다가 계속 오리지늄 분진 환경에 노출되어 있어서 그런지 옷을 걸쳤는데도 격리 효과가 떨어지네.)
(이렇게나 재수가 없을 줄이야.)
(……)
(이런 상황에선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라……)
밖이 잠잠해진 것 같아.
다행이야. 재앙이 지나갔나 봐.
아직 소식이 없나?
아직은, 하지만 다른 좋은 소식이 있어. 내 노력 덕분에 발신 범위가 더 확대됐어! 이제 재앙도 끝났으니 곧 구조될 수 있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
엘리시움, 상처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 네가 말한 비밀 무기는 어딨어?
아, 그게…… 아직은 쓸 때가 아니야.
걱정하지 마. 필요해지면 꼭 쓸 거니까.
……
미치겠네! 위에 모래가 얼마나 쌓였는지 구멍을 파낼 수가 없어!
물도 음식도 없는데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어!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거야?!
진정해.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우선 체력을 아껴두는 게 좋아.
어떻게 진정하라는 거야! 신호를 보낸 지 한참 되었지? 그런데도 아직 응답이 없잖아!
누구도 우릴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결국 우린 이곳에 갇혀 서서히 굶어 죽게 될 거라고!
……
방법이 있어. 근처에 있는 이동도시에 연락이 닿는다면 구조대가 올지도 몰라.
하지만 그 고철 덩어리로 어떻게 이동도시까지 신호를 보낸단 말이야?
그래서, 이 멋쟁이 엘리시움만의 비법이 필요하단 거지.
그런데 한 가지 주의사항이 있어.
지금부터 모두 내게서 멀리 떨어져.
멀리 떨어지라고? 대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돼.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너무 가까이 오진 마.
벌써…… 며칠째지?
아, 안 되겠어…… 더는 무리야……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발신 범위가 점점 확대되고 있어. 조금만 더 버텨! 곧 성공할 것 같아!
이젠 다 틀렸어, 모두 끝장이라고……
위에 남겨진 이들도, 아래로 내려온 우리도 전부 끝이야……
김빠지는, 콜록, 말은 하지 마.
(이럴 시간이 없어…… 조금만 더 빨리!)
(감염자 문제 해결을 맡고 있다던 제약회사가 사기꾼 집단이 아니어야 할 텐데!)
콜록, 콜록콜록……
(상처가 부었어. 어쩌면 곪았을 수도 있고. 지난번에 림 빌리턴의 선반에 깔렸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야…… 아니, 역시 그때가 더 아팠었어.)
(오리지늄 아츠가 점점 강해지고 있어…… 사용할 때마다 고통이 수반되고 있지만.)
(이게 바로 광석병에 감염된 느낌일까?)
(어렵게 예방약을 챙겨왔는데 결국 쓰지도 못했네.)
……
무슨…… 소리지……
……잠깐만!
응답이 왔어!
……응답……
맞아! 응답이야! 한 기지국에서 내 신호를 포착하고는…… 답을 보내왔어!
다들 들었지? 구조대가 온다니 조금만 더 버텨!
여기 맞아?
어떻게 콕 집어 우리한테 신호를 보낸 건지 모르겠네……
로도스 아일랜드가 이렇게 유명했나?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
대장님, 아래에서 생체 반응이 대거 확인되었습니다.
구조 준비 완료, 언제든 진입 가능합니다!
어서 오…… 아, 엘리시움이구나.
다들 오랜만. 한동안 못 본 사이에 여긴 벌써 복구가 끝났네? 정말 다행이야!
응, 맞아…… 모두 네 덕분이야.
……
내 노력이 헛되지 않은 걸 보니 뿌듯하네!
우선 간단히 비바람을 피할 곳을 마련했어. 이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까.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나? 왠지 악당 같이 생긴 착한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치료받았는데, 욕을 진짜 진탕 얻어먹었어.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무서우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니까.
네 병은……
우선 앉아. 가, 가서 음료수라도 내올게.
그럴 필요 없어. 몇 마디만 하고 갈 거니까.
이제 마을을 떠날까 해. 오늘은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거야.
떠, 떠난다고? 하지만 넌……
아, 미안. 여기 남아 전달자가 되겠다던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아무래도 난 더 많은 곳을 둘러보고 싶은가 봐. 자유의 날개는 절대 묶어두어선 안 되는 법…… 방금 어땠어? 당신이 소장한 시집 구절을 인용한 건데, 좀 있어 보였어?
……
……
안 돼, 엘리시움. 아, 아직 제대로 고맙단 인사도 제대로 못 했잖아.
맞아. 그저 병에 걸린 것뿐이잖아. 그러니까…… 별거 아니야.
감염 때문에 떠나려는 거라면……
쉿, 그만해. 여러분의 마음은 잘 받았어.
하지만 마을에 감염자가 눌러앉게 되면 다들 놀라자빠질 거야.
우린 아니야!
알아. 아는데, 위험할 수도 있잖아.
하지만……
그런 표정 짓지 마. 차라리 잘됐지, 뭐.
로도스 아일랜드, 기억해? 우리를 구조해 줬던 그 회사 말이야. 앞으로 그 회사랑 함께하기로 했어.
장기적인 치료도 제공해 준다고 하니 얼마나 좋아!
완치될 수 있대?
그건…… 잘 모르겠어.
그, 그럼 다시 돌아올 거야?
걱정하지 마. 시간이 나면 꼭 다시 모두를 만나러 올 테니까!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음, 아직 못 정했어.
우선 로도스 아일랜드 사람들과 같이 다녀보려고. 왠지 멋진 여정이 될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