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석
이야기꾼은 어느 한 화가에 대한 '비참한 진실'을 듣게 되고, 그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한다.
등장 오퍼레이터: 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가지 마세요.
이미 당신이 사기꾼인 걸 알았는데 제가 더 들어야 할 말이 있나요?
완선생이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은 아니지만, 가장 뛰어난 점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 정교한 기교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확실히 완선생의 기교를 따라 한 것 같으나, 먹선은 바르지 못한 데다가, 그 특유의 기교 또한 반영되지 않아 전반적인 표현력마저 엉망인데, 이것을 어찌 진품이라고 우기는 겁니까.
잠시만요, 잠시만!
듣기 싫어하실까 봐 이 비참한 진실은 털어놓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건 그 사람의 진품이 확실해요!
비참한 진실이요? 그 사람이 이 도시에 살고 있고, 돌아 돌아 동향 사람이라 이렇게 이용해 먹는 건 아니고요?
다시 말하는데, 얼마나 비참한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완선생 작품이 이렇게까지 조악할 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 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
절대 거짓말이 아니에요! 완선생은 눈이 멀었어요. 그래서 이 그림이 나온 거고요!
완선생이 어릴 때부터 눈병을 앓고 있다는 얘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죠. 눈이 멀었다 한들 이런 졸작을 세상에 내놓아 자신의 명성을 더럽힐 리가 없습니다.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완선생의 눈병은 해마다 심해졌어요. 그리고 결국엔 작은 글씨는 눈앞까지 갖다 대도 읽지 못할 정도가 되었죠.
그런데도 완선생은 그 자존심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죽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쁜 놈 하나가 이 사실을 알고는 감언이설로 선생을 속여 신뢰를 얻고는 잘 설계된 계약서를 내밀어 서명하도록 했어요.
서명을 한 후 완선생은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눈병도 감출 수 없게 되었어요.
그 후 몇 달을 더 앓더니 눈이 완전히 멀어버렸다고 하더군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악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안될 것도 없는 세상이죠.
일이 이렇게 완선생이 간계에 넘어간 것뿐이라면, 저도 '비참하다'는 말까진 안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후 완선생은 슬럼프에 빠졌고, 빚을 갚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요?
맹인이 된 후 그림 실력이 크게 떨어지는 바람에 전문가의 눈에 들지 못했고, 언젠가부터 주변 부자들을 모아 그림 그리는 걸 보여주면서 '맹인 작화'라는 허울로 돈을 받기 시작하더군요.
솔직히 이젠 그 사람이 그린 그림 자체로는 몇 푼 받지 못합니다. 아마 부자들이 쥐여주는 돈만큼도 안 될 테죠. 지금 이 그림도 그 사람들에게서 산 겁니다……
어? 어디 갔지?
완선생, 정말 대단하구먼. 이 초상화 속 아이는 내 손자와 많이 비슷하다네! 담묵으로 처리한 머리는 손자의 정수리를 그대로 옮긴 것 같고 말일세! 정말 눈이 먼 게 맞는가?
……맞습니다.
하긴 그렇겠지. 눈이 먼 게 아니라면 그 큼지막한 글씨로 쓰인 계약서 조항도 제대로 못 봤을 리가 없지, 하하.
……하.
이건 그림값이네, 받아두게나. 난 먼저 가보겠네.
전당포 사장 말이 정말 사실이었군요. 완선생이 저런 비참한 상황에 있을 줄이야.
누구냐?!
그저 일개 이야기꾼입니다.
……이야기꾼?
선생께서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풍경 앞에서 3일 밤낮을 꼼짝않고 있을 정도로 꼿꼿한 작가 의식이 있었던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스스로 우리에 갇힌 구경거리가 되고 싶어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
같은 길을 가시는 분이 특별히 여기까지 와서 내게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라면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뜻이 있을 뿐이지요. 저는 지금 빛을 잃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다만 길에서 죽지 않고 목숨을 연명할 뿐이죠.
롼, 롼!
당신은……?
엊그제 아침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왔던 사람이잖아, 벌써 잊었어?
아…… 추 씨군 그래.
그래!
이 《화우도》 대체 뭐야?
파울비스트의 발톱은 조각조각 부러진 것 같고, 꽃잎의 채색도 얼룩덜룩한 것이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물감을 엎지른 줄 알겠어!
내가 이 그림을 미술계 사람에게 보여주며 이건 무슨 화법이냐, 기교은 어떠하냐 물었더니 뭐라고 했는지 알아?
선생의 꼿꼿했던 “기교”은 아첨 떠는 “미교”가 된 지 오래고, 그림도 삐뚤빼뚤해서 몇 푼 주기도 아깝다고 하더군!
아첨을 떤다고?!
……
……추 씨, 처음부터 말했잖나? 얼마가 되든 상관없으니 그림값은 알아서. 대신 나중에 딴말하지 않기로.
이런 줄 진작 알았으면 그림값은커녕 돈을 쥐여준대도 안 가져갔을 거야! 오늘 내 그림값 돌려주지 않으면 신고할 거니까 알아서 해!
추 씨, 사전에 서로 합의를 한 일이니 관청에서는 관여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무슨 상관인데 끼어들어?
관청에서 나서지 않으면 나도 다 방법이 있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늙은이한테서 내 돈을 토해내게 할 거야!
그 '다른 방법'을 쓴다면 관청에서 더욱 귀찮아할 텐데요.
뭐야?!
……흥, 그럼 내가 손해 보는 셈 쳐야겠군.
남자는 수중의 그림을 들고는 그것을 찢으려는 듯한 몸짓을 보여주었다.
뭘 할 생각이냐?!
그는 손에 힘을 주더니 그림을 북북 찢었다.
위로 높이 던져진 종잇조각들이 눈송이처럼 날리면서 완선생에게 떨어졌다.
어이, 롼! 그따위로 살면 빌어먹지도 못할 거야! 그 사람들 말이 맞았어, 완전 아첨꾼 같으니! 천한 놈아!
내가……아첨꾼? 천한 놈?
이 말에 대해선 반박할 말이 없군요.
……아, 아니야!
'아니'라고요?
말끝마다 눈이 멀었다고 하는데, 정말 시력을 완전히 잃은 거 맞습니까?
그런 술책으로 돈을 버는 것도 비참하지만, 그 술책이 완전한 진실도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 그게 무슨 뜻이지?!
아이의 정수리 그림 말입니다. 방금 저 추 씨라는 사람이 그림을 찢으려 했을 때도 선생은 그림이 찢어지기 건에 이미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선생은 확실히 시력을 반쯤은 잃었을 것이고, 그래서 종이 위 글씨는 물론이고 색깔도 잘 구분하지 못하게 됐을 겁니다. 그래서 그림 실력이 형편없이 떨어졌겠죠.
그렇지만 눈이 완전히 멀었다고 말하고 다니는 건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동입니다.
……
선생…… 잘 보셨군요.
어디로 가십니까?
마지막 거짓말조차도 들켜버렸는데 무슨 낯짝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어디 조용한 장소에 가서…… 끝내면 될 것을. 그럼 깔끔할 겁니다!
깔끔하다고요?
지금 죽어버리면 완선생은 영원히 아첨이나 떨던 천한 인간이 되어 버릴 겁니다. 그게 뭐가 깔끔하다는 겁니까?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뭘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눈이 완전히 멀었다 해도, 그걸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는 겁니까? 하물며 당신은 눈이 완전히 멀지도 않았죠.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는 것이냐고요?
……
그럴 수도…… 어쩌면 그릴 수 있을 수도……
……나의 무지함을 용서하십시오. 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듣는 것이 선생이 듣는 것과 다르고, 제가 만지는 것이 선생이 만지는 것과 다르며, 제가 맛보는 것이 선생이 맛보는 것과 다른데 제가 어떻게 선생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듣고…… 만지고…… 맛본다?
흠.
오늘은 피곤하군요. 선생이 스스로 해 보시지요.
……
선생?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절 부른 건가요?
이젠 더 나눌 말이 없습니다만.
그럴 리가요! 선생의 은혜는 마음 깊이 새겨두고 있습니다!
흠, 흥미롭군요.
무슨 은혜를 말하시는 겁니까?
선생이 내게 듣고 만지고 맛보는 화법을 가르쳐 준 덕분에 지난 몇 달간 착실히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사실 동료들을 초대해 신작에 대한 품평을 들으려고 했는데, 여기서 선생을 만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이야말로 제 그림의 첫 번째 비평가로서 가장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것보다 전 선생께서 뭘 듣고, 뭘 만지고, 뭘 맛보셨는지가 더 궁금하군요.
그날 선생이 가신 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자들은 날 비웃고, 장사치들은 날 욕하는데 선생은 날 이끌었습니다……
잘 보이지 않으니 들은 형상이나 모양을 종이에 옮기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손의 감각은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선생에게 들리는 난 어떤 모습입니까?
선생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키가 크고 자의식이 강한 중년 남성일 겁니다. 옅은 콧수염이 있고, 두 눈은 형형히 빛나고 있겠지요.
그 정도는 별거 아니죠. 선생은 아직 시력이 남아 있으니 내 체형 정도는 알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두 눈을 감고 자세히 들어보면, 언뜻 차가운 듯 마음은 따뜻한 여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크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네요,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오히려 흥미롭군요.
그럼 뭐가 만져집니까? 맛은 어떻죠?
만지는 것이 이 몇 가지 중 가장 쉬웠습니다. 그리고 싶은 것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세세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물건이 큰 경우엔 화탁을 아예 옆으로 옮겨와 물건을 만지고 생각하면서 그리기도 했답니다.
맛보는 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먹물이나 안료의 맛을 대충 다 확인해 봤습니다.
한 가지 안료의 맛을 보는 걸로는 충분치 않더군요. 그렇기에 전에 그렸던 경험을 되살려 안료를 섞고 사람들에게 비교를 요청했죠. 색이 딱 알맞게 되었을 때 몇 방울을 입에 넣어 맛을 마음속에 새겨 넣었습니다.
선생은…… 중독이 두렵지 않았나요?
붓을 다시 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 안료에 좀 중독되는 게 뭐가 두렵겠습니까?
……
그렇군요, 선생께서 그런 각오로 그린 그림이니 분명 나쁘지 않을 테지요.
바쁘실 텐데 어서 가보시지요.
설마…… 여기서 계속 절 기다리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바람도 쐴 겸 나왔다 멀리서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당신의 모습이 보여 보러 온 것뿐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동료들로부터 제 그림의 부족한 점을 많이 지적받았습니다…… 그게 답니다.
그게 다란 말이죠?
시력을 잃은 후 진지하게 그린 첫 작품이 아닙니까? 부족한 점이야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데 뭘 이렇게까지 의기소침해하십니까?
네…… 별일 아니긴 하죠.
더 이상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
하등품…… 이라.
그 말이 맞아.
정곡을 찔렸어!
하등한 인간의 작품이 하등품인 게 당연하지,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이 그림이 얼마나 질 떨어지고, 정확히 어디가 저급한지를 나 같은 반맹인이 이해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오래 걸릴까?!
……됐다. 이제 아첨꾼의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이 된 것 같구나.
지쳤어. 진작에 끝냈어야 했어.
그 선생께는 미안하지만…… 난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화가는 탁한 두 눈으로 머리 위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탁자 옆에는 그가 몇 달 전 결심했을 때 산 비단 몇 필이 놓여 있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출발하기 전 그는 다양한 장면을 상상했다. 따스한 환대, 냉담한 외면,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시선 등, 그는 긴장감에 진땀이 흘렀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직면한 것은 그가 수토록 상상해 오면서도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장면이었다. 사람들이 한참 동안 그의 그림과 그를 번갈아 보았고, 고요함 속에서 누군가 무감정하게 '하등품'이라는 말을 내뱉은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이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보태 위로하려 했다. 그러나 위로를 한 후에도 '하등품'이라는 평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비단엔 자신의 그림이 필요치 않았다. 이 자체로 상등품이니.
화가는 몸을 일으키더니 비단 한 필을 대들보 위로 던졌다.
완선생, 당신은 이미 많은 진전을 이뤄냈어요. 왜 자꾸 죽음을 생각하는 거죠?
……선생은 왜 또 절 찾아오신 겁니까?
그림의 좋고 나쁨은 화가 자신이 가장 먼저 평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선생이 절 격려하기 위해 이러한 말을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은 저를 비웃는 것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군요.
비웃는다?
완선생, 하나만 물읍시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 어떤지 정말 보고 싶지 않습니까?
전 이미 지쳤어요. 돌아가 주십시오.
대답해 주세요.
……보고 싶지 않을 리가 없잖습니까?!
네, 그럼 됐습니다.
제 말만 들으시면 오늘 밤 유시가 지나고 내일 진시가 되기 전까지는 눈이 밝아질 겁니다.
……
선생의 호의는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의 지연책은 저를 잠시는 구할 수 있겠지만, 제 평생을 구하지는 못합니다.
유시가 되어도 제 눈이 여전히 흐릿하다면 선생은 또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제 눈병은 태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갖은 약과 침을 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선생의 말 한 두 마디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다면 세상에 이보다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선생은 제가 무슨 명의라도 되는 줄 아시나 봅니다.
말씀드리죠. 선생께서 오늘 밤 눈이 정말 밝아오기를 바란다면 내일 진시엔 두 눈이 완전히 멀게 될 것입니다. 흐릿한 것이 아니라 칠흑 같은 어둠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선생 자신만이 알 수 있겠지요.
그걸 원하시면 지금 바로 잠자리에 드십시오. 유시가 되면 자연스럽게 깰 것입니다. 그리고 하룻밤의 빛이 끝나 내일 진시가 되면 선생과 빛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질 것입니다.
만약 원치 않으시면 잠들지 않으면 됩니다. 집에 틀어박혀 앉아 있어도,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가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당신의 두 눈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요.
그게……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자세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선생께서 자고 싶으면 자고, 깨어 있고 싶으면 깨어 있는 것. 누구도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죠.
화가는 대들보 위에서 펄럭이는 하얀 비단 한 필과 탁자 위 그림 두루마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신발은 벗고 옷은 입은 채 침대에 누웠고 곧 잠이 들었다.
빛이 돌아온 후 자신의 그림을 보면 비하당한 건 선생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 선입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될 겁니다.
그러고 나서…… 눈에 새겨 넣으세요.
책을, 그림을, 그리고 이 밤의 경치를.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이 짧은 하룻밤 사이 모든 것을 다 눈에 담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요.
하룻밤 사이에 하나의 온전한 꿈을 꾸는 것조차 이루기 힘든 일일 테니까요.
선생에게도, 내게도, 시간은 너무나도 짧군요.
……
시간이 늦었군요. 전 한 시도 허투루 보내고 싶진 않습니다.
한 시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시간이…… 기다려 주지 않네요.
이건……
유시군. 지금이 유시가 맞아!
화가는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 탁자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하급품이라고 비웃음당했던 자신의 그림을 펼쳐 초조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 선은 삐뚤어졌고, 여기 표정은 자연스럽지 못해. 여긴 좀 요란한 색을 썼고……
이런 것들은 모두 떳떳하게 지적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그 사람들은 왜 단숨에 '하등품'이라고 평했을까?
이 그림은 내가 두각을 나타내던 20대 때 그린 그림과 비슷한데, 어째서 하등품이 된 거지?
가서 물어봐야겠어……
아니야……
안 돼!
내겐 오늘 하룻밤뿐이야……내겐 오직 이 하룻밤뿐이야!
석양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실내는 어두웠지만 화가의 눈에는 모든 불빛 하나하나가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고, 그 모든 불빛이 눈이 부셔서 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였다.
그 눈부시게 빛나는 빛이 그의 눈을 찔렀고, 그의 눈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이 빛을 빌려 자신의 그림을, 진귀한 작품을, 그림 밖의 아름다운 산수와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건 단 하룻밤뿐이었다.
그는 대들보에서 비단을 끌어 내려 한 자락을 화판에 고정했고, 서둘러 붓을 씻고 먹을 갈고 안료를 섞었다.
뭘 그려야 하는지 생각이 끝나기도 전, 그의 손은 고운 붓을 집어 들고는 익숙하게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깜깜한 어둠이 자신을 집어 삼기키 전 도망치려는 것처럼.
마치 붉은 태양이 천천히 떨어지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쫓으려는 것처럼.
선을 따라 초상이 이뤄지는 동안 그는 문득 오래전에 들었던 야사가 떠올랐다.
어둠의 장막이 내려오고, 어느 한 남자는 석양을 쫓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동안 땀은 비 오듯 흘러내렸고, 타는듯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개울을, 호수를, 강을 다 마셨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왜냐하면 그에게 남은 건 단 하룻밤뿐이기 때문이었다.
화가는 마치 그 남자가 된 것마냥 갈증을 느꼈고, 수중의 필세통을 꽉 쥐었다.
통 안에는 붓을 헹군 물이 뒤섞여 이미 엉망인 상태였다.
그는 검은 물을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곤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에게 남은 건 이 하룻밤뿐이기에.
동쪽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화가에게 여유가 남아 있었다면, 그림자 안에 숨어 밤새 조용히 그를 주시하고 있던 이야기꾼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더 이상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 그렸어.
내가 그렸어……
겹겹이 색을 입힌 비단 위 그림 속 완선생은 탁자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뭐가 있는 걸까?
그림 속 완선생의 눈을 본 그림 밖 완선생은 깨달았다. 그곳엔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의 모든 빛이 있었다.
……
그는 완성된 그림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더니 익숙한 가구에 의지해 발을 내디뎠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선생?!
그림 표구를 도와드리죠.
제 친구가 여기 살고 있습니다. 절 여기까지만 데려다주시면 됩니다.
그분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그마저도 믿을 수 없다면…… 이 마을에서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완선생, 이 그림은 이미 아름다움과 멋을 모두 갖춘 완벽한 작품입니다. 꼭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 만족하시겠습니까?
(가벼운 웃음소리)
결국 전 아첨하는 근성은 버릴 수 없나 봅니다.
(작은 목소리로) 이제와서…… 아첨하는 근성이라고?
완선생, 어쩐 일인가……
어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 사람이 있다!
아치, 어서 의원을 불러와!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이런 거냐고?
난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몇 마디 한 것뿐이라고!
뭐라고 했는데?
놈은 성격이 안 좋잖아. 그림이 사실적인 게 뛰어나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자화상이라니, 이건 자화자찬이나 다를 바 없잖아……
그리고 아까 이 마을 화가들 사이에서 명망 높은 장 선생님이 오시더니, 나한테 조용히 이렇게 말하고 가셨어.
장 선생님은 목소리를 낮춰서 말씀하셨는데, 당신이 그걸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거야?!
아니야! 그냥 마음속으로만 생각했어. 대놓고 말했을 리가 없잖아! 내가 말한 건 단지, 이 그림이 그저……
하등품 치곤…… 아주 잘한 편이라고.
……하등품 치곤 잘한 편?
그렇군, 그래, 하등품 치곤 아주 잘한 편이라!
이 마을엔 더 머물 가치가 없겠어.
……내가 이런 음흉하고 흉악한 아이를 그려내다니.
……
뭐 좋아, 따지고 보면 네가 음흉한 게 아니라, 아야오에 비해 생각이 많고 잠도 부족한 탓에 이런 험한 꼴이 된 거겠지.
……
이제 너를 '뚜'라고 부르기로 할까?
이제 가봐!
새 이름을 얻은 묵량은 휘청휘청 몸을 흔들며 뒤돌아 걸어갔다.
원래 그곳에 모여 있던 아야오와 샤오차오는 두려움을 느꼈는지 쏜살같이 달아났다.
발소리?
(낮은 목소리로) 저 할아버지, 꽤 발걸음이 빠르네……
(낮은 목소리로) 그저 자기 그림 속에서 붓질 두어 번 더하는 건데, 이렇게까지 참견할 일인가?
선생?
어머, 당신은 그 노인이 아니잖아……
당신은…… 완선생?
20년도 넘게 흘렀는데, 아직 살아 있었던 건가?
선생님 덕분에 살아는 있었지요.
앉아.
아닙니다.
차가운 산의 한기는 이 늙은이의 몸에 무리가 될 수 있어서요.
산?
(낮은 목소리로) 그래, 그의 눈은 이미 멀었지.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해……
(낮은 목소리로) 그럼 선생은…… 대체 어떻게 내 그림 안으로 들어온 거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요?
무슨 중요한 말을 하신 건 아닌지, 제가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아니, 아니야.
단지, 당신이 지난 20년간 어떻게 지내왔는지 궁금하네.
지내왔다기엔 우습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날 깨어나니 의원이 내 목숨은 이미 반이 날아가 버렸으니 앞으로는 안정을 취하고, 화를 내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저 자신도 무기력해져 이름도 버리고, 붓도 내려놓고, 집안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빚을 갚은 후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 심혈을 기울인 그림조차도 싼값에 모두 내다 팔았지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제 쓰러지면 그냥 그곳에 묻히겠다고요.
……그 말을 들으니, 그때 난 선생을 내버려 두는 편이 더 나았을 수도 있었겠네.
선생님이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언제 사과했다는 거야?
숨기고 싶으시겠지만, 그때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듣는 법은 지금까지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켁, 켁.
그 이후, 여비는 금방 떨어져 버렸는데,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은 탓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붓을 들었지요.
지금은 일부러 귀한 분들이나 부자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종이와 붓을 들고 거리에 앉아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사람들을 기다리곤 합니다.
또 '맹인 작화'를 하는 건가?
하하, 이번엔 정말 맹인이 그린 그림인걸요. 다만 그려달라고 한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
말하지 않은 거야?
사람들은 그림에 만족하면 되잖습니까. 화가가 맹인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을 테지요.
종종 제 그림에 만족하였는지 자신의 마당에 있는 무생물을 그려달라는 사람이 있곤 합니다. 그땐 어쩔 수 없이 맹인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고, 다들 놀라곤 했죠.
……
듣자하니, 선생은 여전히 타인의 칭찬에 우쭐해지는 것 같네.
……제게 한 선생님의 그 많은 질문 중, 가장 훌륭한 질문이십니다.
산바람이 불어왔고 방 안 가구에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은 '아첨꾼'이라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잊어버린 적은 없지.
저는 당시 사람들의 인정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마냥 인정을 갈구했습니다. '아첨꾼'이라는 단어는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고, 아첨을 떨어서라도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과 아첨을 떨어야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건가라는 생각에 전 어느 하루 편히 잠든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그 후 집을, 그 좁은 세상을 떠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첨이란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첨하거나 아첨을 받습니다.
일체 체면을 차리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전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어려선 부모의 말에 따르고, 젊어선 자신의 뜻을 굽혀 연인의 뜻에 따르며, 장년이 되어선 세속에 물들고, 늙어선 거꾸로 자식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죠.
끊임없이 아첨하여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정으로 내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요.
전 걱정할 것도 걱정을 하는 사람도 없는 홀몸이니 누군가 칭찬해 주면 기분이 좋고, 비난을 받으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한숨 자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타인의 말은 마치 연기처럼 덧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늦게나마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깨달음을 얻고 나니, 제 안의 아첨꾼의 기질도 그저 제 마음에게 제 자신을 위한 아첨이었습니다.
……
선생의 말을 들으니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군.
이 순간엔 언니가 옆에 없는 게 참 아쉬워.
선생의 선답은 고마운데, 내가 줄 수 있는 게 없네.
밖까지 바래다줄게.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시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선생님께 큰 은혜를 입었는데 제가 감히 뭘 또 바라겠습니까.
……
선생님 옆에 뭔가 기척이 느껴집니다.
바람에 날리는 두루마리 같기도 하고, 살아 있는 것의 움직임 같기도 하고, 선생님의 마음 소리 같기도 하네요.
선생님께 입은 은혜는 어떻게 해도 갚을 수 없겠지만, 제가 그것을 그려서 선생님께 선물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화가의 붓질은 몇 번뿐이었다. 그것은 공필화도, 사의라고도 부를 수 없었다.
이 그림은 어떻습니까?
정말, 정말 닮았어.
하하, 그럼 됐습니다!
나오실 필요 없습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내 그림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더 있을까? 게다가…… 눈도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
세상에 이런 이들만 있다면 어느 누가 잠들고 싶어 할 것이며, 어느 누가 깨어 있고 싶어 할 것인가?
요 며칠 날 잡아서 잠을 좀 자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응?
조금 전 화가가 붓질을 했던 종이는 다시 하얗게 변해 있었고, 시 옆에 있던 아야오는 어느새 두 마리가 되어 있었다.
(서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똑같은 모습을 한두 마리의 아야오는 서로를 한참 바라보더니, 상대가 동족임을 확인한 듯 행복한 발걸음으로 나란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