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토
크리스틴의 비서였던 헬렌은 사리아가 총괄 자리를 이어받은 후에도 계속 비서직을 맡게 되었다. 사리아가 취임한 첫날, 헬렌은 불안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스읍…… 후우……
스읍…… 후우……
헬렌?!
너 조만간 떠날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 설마 짐을 챙기러 온 거야?
네. 음, 아니, 그게 아니라. 야라 씨가 저한테 한 달 넘게 유급 휴가를 주셨는데, 전 그게 자진 퇴사하라고 돌려 말하신 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결국 야라 씨 본인이 명예퇴직하실 줄은.
야라 씨는 여길 떠나시기 전에 저에게 식사를 대접하시면서, 앞으로도 라인 랩에서 계속 일해줬으면 한다고 말했었는데 말이에요.
너무 잘 됐다, 우리의 탕비실 동맹이 계속 이어질 수 있겠네.
전 오히려 해고되기를 바랐는데 말이죠.
왜?
……잠깐, 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이 바로 사리아 씨가 취임한 첫날이잖아. 설마, 이번에도 네가 총괄 비서 업무를 계속 맡는 거야?!
네, 점심시간 끝나면 바로 복귀해야 해요.
하하, 그러면 그렇지.
야라 씨가 널 정말 신뢰하시나 본데?
글쎄요.
제가 아는 건 그저, 크리스틴 씨 비서로 일해온 몇 년 동안, 그녀를 사무실에서 본 게 열 번도 채 안 될 거라는 것뿐이에요.
비서인데도, 뉴스를 통해 많은 일을 알게 됐어요. 이번에도 이렇게 큰 인사 변동이 있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제대로 몰랐죠……
가끔은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제가 정말 이 '라인 랩'이라는 회사에 속해있는 게 맞을까요?
당연히 속해있지! 넌 이 홀에 있는 나무가 몇 그루인지, 천장에 달린 조명이 몇 개인지, 층마다 사무용 데스크가 몇 개 있는지 전부 알고 있잖아…… 이런 것들이야말로 내부인만 아는 독점 정보라고.
그만 놀려요. 지금 심란하단 말이에요.
농담 좀 한 거야. 하지만 너 전에 총괄 비서를 맡았을 땐, 일거리가 없다고 늘 투덜댔었잖아?
사리아 씨는 유명한 실무파니까, 그분 곁에서라면 절대 예전처럼 심심하지 않을걸?
하지만 사리아 씨는 성격이 까다로우신 걸로도 유명한 걸요. 애초에 제가 왜 여기에 서 있는지 아세요?
응? 그러고 보니, 여긴 방위과로 가는 길이잖아?
사리아 씨가 원래 방위과 주임 사무실이었던 곳을 새 총괄 사무실로 쓰시겠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제 첫 업무는, 아마 신임 총괄님을 설득해서 사무실을 옮기도록 하는 거겠죠.
힘내, 좋은 소식 기다릴게.
제가 웃음거리가 되는 걸 보고 싶은 거죠?
물론. 라인 랩 역사상 사리아 씨에게 도전해서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만약 네가 성공한다면, 분명 사내 유명 인사가 될 거야.
됐어요. 하아, 이제 제 운명을 받아들이러 갈게요.
안녕하세요, 사리아 총괄님. 제 이름은 헬렌……
메이랜더 측에서 스테이시스 관련 조사에 개입하고 싶다는 요청을 제기했습니다.
스테이시스에 대한 조사 및 회수 작업은 다 끝냈나?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관련 자료는 모두 데이터베이스에 기록했습니다.
그럼 메이랜더 측에 모든 권한을 개방해 주도록 해.
예.
총괄님, 더 지시하실 일이 있으신가요?
각 과에서 진행 중이거나 곧 착수할 실험 프로젝트를 검토해 봤는데, 내가 표시해 둔 몇 가지 프로젝트들의 인원부터 수입 지출 상황까지 구체적인 정보들을 좀 정리해 줘.
링크는 방금 보냈어.
이 프로젝트들은 트리마운츠와의 협업과 관련된 것들이군요. 이 주석들은……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총괄님, 구조과 분기 결산 보고서입니다. 예산 면에서는, 3호 프로젝트의 추가 경비를 이번 분기로 앞당겨 주시길 원하고 있습니다.
신청한 걸 봤는데, 아마 문제는 없는 것 같아, 승인할게.
하지만 구조과는 지금 파르비스 주임을 잃은 이후 내외부적으로 모두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이렇게 큰 경비를 즉시 지출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2호 프로젝트 자산을 동결하고, 2호의 경비를 3호 프로젝트에 투입하도록 해.
그렇지만……
2호 프로젝트의 진행 보고서와 각종 데이터 결과를 확인했는데 조금 문제가 있더군. 2호 프로젝트 책임자에게 전해, 며칠 내로 내가 이 프로젝트의 내용을 직접 검토하겠다고.
알겠습니다.
특별구 정부 관리 쪽에서 저희 일부 구획의 시범 자격 및 현재 진행 중인 실험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총괄님과 논의하고 싶다고 합니다.
내일 회의를 잡아 줘, 내가 직접 회의를 주관해서 이 사안들을 논의할 테니까. 관련 책임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고, 특별구 관리들도 시간을 할애해서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해.
예.
……
(요청이 이렇게나 많은데…… 전부 동시에 처리하시네…… 게다가 정확하고, 효율적이야……)
(사리아 총괄님은 나한테 신경조차 쓰지 않으시는데……)
(아아, 헬렌, 지금 넌 뭘 해야 할까?)
(어라, 저스틴 주임이 면접 요청을?)
(비고란에는…… '잠재력 있는 젊은 사람'?)
사리아, 음, 총괄님 안녕하세요. 저는……
저스틴에게서 들었어, 스카이 재거. '미래의 별'이라던데.
하하, 과찬입니다.
물론, 저스틴이 말하는 미래의 별은, 트리마운츠 밤하늘의 별만큼 많긴 하지만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로 자만하고 있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전 분명……
저스틴이 네게 혹시 내 규칙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나?
네?
적어도 저스틴이 비밀 유지 업무가 뭔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군.
보호 장비 착용하고, 글러브 챙겨.
사리아는 사무실 한편의 복싱 링을 가리켰다.
에?!
엣?!
라인 랩이 네 자체 연구 프로젝트에 투자하도록 설득하고 싶어? 그러면 내 앞에서 3분만 버텨 봐.
……
왜?
면접 방식이 원래 이렇게 독특하시다면야, 제가 거절할 이유는 없죠. 다만 일부러 저를 곤란하게 하려고 이러시는 거라면, 상대를 잘못 고르셨다는 걸 알려드려야겠네요.
(세상에…… 이 사람 아무것도 모르잖아!)
(사리아 총괄님은 '강철의 육체'로 유명하신 분인데…… 왜 이렇게 하시는……)
솔직히, 저한테는 이런 방식이 오히려 더 편할지도 모르겠네요.
꽤 오랫동안, 낮엔 트리마운츠 공대 강의를 몰래 들으며, 밤엔 빈민가에서 저를 가만히 두지 않으려는 불량배들을 상대해 왔으니까요!
……
사리아와 스카이는 글러브를 끼고 링 위로 올랐다. 뒤이어 두 사람의 격렬한 격돌이 시작됐다.
헬렌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라인 랩 신임 총괄의 이전 사무실인 이곳에서,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폭력적인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임 총괄은 정말 이런 방식으로 한 젊은이의 운명을 결정하려고 하는 걸까?
라인 랩에 들어온 지 수년이 지났지만, 헬렌은 새삼 다시 확신하게 되었다. 자신은 이 회사를 이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57초.)
(……1분 32초.)
여기까지.
복싱 소리가 멎었다. 스카이라는 젊은이는 지쳐서 무릎을 꿇은 채 엎어져 있었고, 얼굴 한쪽이 이미 부어오르고 있었다.
스읍…… 얼굴이랑 어깨가……
저기, 이것도 봐주신 거죠? 심지어…… 이제서야 땀이 나신 건가요?
어쨌든, 네가 졌어.
라인 랩은 네 자체 연구 프로젝트에 투자하지 않을 거야.
……그건 제 학력 때문인가요?
자료에 따르면, 넌 트리마운츠 공과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한 것도 아닌데, 학부 과정의 공학 과목을 전부 이수했더군. 비록 그 방법이 떳떳하지는 않았지만, 성적만큼은 우수하다고 볼 수 있지.
넓게 보면, 우린 동문인 셈이야.
라인 랩은 과학을 존중하는 모든 이를 환영한다.
그럼 왜죠?
'충격 방지 항공 소재의 연구 개발'…… 네 계획서를 어젯밤에 읽어봤다.
이쪽 연구 방향은 매우 유망하지. 꽤 날카로운 감각을 지니고 있더군. 하지만 기초 공학의 실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대부분의 구체적인 구상들은 실현되기 극히 어려웠어.
그럼 그냥 불합격시키면 됐던 거 아닙니까?
체력도 있고, 실패에 굴복하지도 않아. 전문성 외에도 과학자로서 갖춰야 할 자질을 지니고 있어. 이제 진짜 연구 프로젝트를 경험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하나의 벽돌처럼 쌓아 올려져 실제로 구현되는 건지 이해하면 되겠군.
스카이 재거, 라인 랩 엔지니어링과에 합류하겠어?
……!
감사합니다.
제 추측으로는…… 에너지과인가요?
엔지니어링과야.
내스티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네요. 아니지, 분명 서로서로 마음에 안 들어 할 겁니다.
내스티라면 그에게 뭔가를 가르쳐 줄 수 있을 거야.
만족하나?
총괄님, 무슨 말씀이세요?
일부러 필수 자격 요건마저 불합격인 그런 사람을 내게 보냈다는 건, 나에게 할 말이 있어서라고 생각되는데 말이야.
하하, 사실 제가 아직 말씀 안 드린 게 있는데, 스카이는 크리스틴의 열렬한 팬이거든요.
그가 과학에 몸을 담고, 라인 랩에 들어오려 한 건, 바로 그날 밤에 보았기 때문이죠……
그 이야기를 면접에서 꺼내 동정표를 얻으려 하지 않은 건 기쁜 일이네.
물론 저도 그걸로 마음이 움직인 건 아니에요. 그 사람이 바로 새 시대의 라인 랩에 필요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라인 랩은 이미 격변을 겪었고, 앞으로도 더 많은 도전에 직면하겠지. 확실히 우리에겐 많은 인재가 필요해.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너에게 해둬야 할 말이 있어, 저스틴.
어떤 거죠?
새 시대 같은 건 없어.
어느 시대든, 학력이 없어도 지식을 갖춘 사람은 드물지 않게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과학에 필요한 존재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충분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건, 오직 지금뿐이죠.
한 가지만 더 물어보려고 하는데요, 퍼디낸드는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별다른 계획은 없어. 굳이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니까.
만약 퍼디낸드가 스스로 빠져나와서 라인 랩으로 돌아오려 하거든, 그에게 전해 줘. 자기 사무실 책상 앞에 다시 앉기 전에, 먼저 내 링 위에 서야 할 거라고 말이야.
물론, 기동 장갑을 입고 와도 된다고도.
하하, 전하도록 하죠.
……
(사리아 씨……)
(설마 샤워하시려는 건가? 지금?)
사리아가 샤워실로 들어서는 순간, 헬렌은 왠지 모르게 자신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걸 느꼈다.
그녀는 조금 기가 꺾인 채 소파에 앉았다.
라인 랩에 합류하기 전부터 헬렌은 이미 야라와 함께 몇 년간 일해 왔었고, 그녀의 초대를 받아 라인 랩에 합류한 뒤로는 이 활기 넘치는 회사에 빠르게 매료되었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워커홀릭으로 비칠 만큼 열심히 일했다. 심지어 라인 랩에서의 더 나은 업무 수행을 위해, 몇 년에 걸쳐 에너지 과학을 공부하여 학위까지 취득했을 정도로.
이는 결국 그녀가 총괄 비서 직책을 얻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설마하니 그것이 직장 악몽의 시작이 될 줄은 알지 못했다.
크리스틴의 신출귀몰한 행보 때문에, 헬렌이 참여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적어도 이런 일들에 참여하려 노력했던 헬렌이었기에, 분명히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크리스틴은 천재였으며, 라인 랩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지만, 그저 대부분의 일에 관심이 없을 뿐이라는 것을.
이 사실은 한때 헬렌을 괴롭게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회사의 리더가 오히려 자기가 만들어낸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로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아마도 오늘 사리아 씨가 보여준 태도가 크리스틴 씨와는 완전히 정반대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종종 느끼는 건데, 두 분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흡사하신 것 같아……)
(어라, 사리아 씨가 단말기를 통해 추후 모든 접견 신청을 거절하시고, 각종 회의 신청 및 문서 결재 시간을 전부 한 시간 뒤로 미루셨네?)
(혹시 쉬려고 그러신 건가……?)
하지만 사리아는 그저 링의 다른 쪽으로 걸어갔을 뿐이었다. 그곳에는 창문과 책상이 하나씩 있었고, 그 옆으로 각양각색의 화분들이 놓인 장식장이 있었다.
그리고, 사리아는 장식장에서 아직 식물을 심지 않은 빈 화분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
헬렌은 사리아의 손 아래에 있는, 검은 부스러기들 속에서 무언가가…… '자라 나오는' 것을 보며 놀랐다.
하나의 가느다란, 마치 옥으로 조각된 것 같은 첫 번째 '줄기'가 흙을 뚫고 나왔고,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그것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위쪽을 향해 서로 얽히고 뒤엉키며 자라났다. 그 모습이 마치 무형의 거장이 시간을 조각칼로 삼아, 단단한 하나의 돌을 생명의 형태로 조각하는 듯했다.
……
불과 몇 분 만에, 완전한 약 30cm 높이의 새하얀 분재의 골격이 화분 속에서 조용히 세워졌다.
줄기는 굳세면서도 힘 있는 모습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옥처럼 부드럽고 윤택한 칼슘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심지어 표면에서는 나이테처럼 극도로 섬세한 무늬도 볼 수 있었다.
(이건…… 설마 자신의 힘으로 '나무'를 만들어낸 건가?)
(그럼, 옆 장식장의 저 '분재'들도, 사리아 씨의 이전 작품인 거고?)
문득 헬렌은 사무실이 조용해졌음을 느꼈다.
사실, 이곳은 그녀가 정오에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부터 딱히 소란스러운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 헬렌은 공기 중에 무언가가 자신의 말문을 막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느낌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헬렌은 예전에 몰래 크리스틴을 따라간 적이 있었다. 총괄이 사무실에 없을 때 대체 무엇을 하는 건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크리스틴은 그저 라인 랩 본사 옥상에 올라가서는 그곳에서 장장 두 시간 동안 하늘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지금의 사리아는, 마치 그때의 크리스틴이 주었던 느낌과도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들은 분명 이 대지에서 가장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오직 이 순간에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것 같았다.
불가사의하지?
사리아가 칼슘화된 분재를 다듬는 취미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실은 우리도 좀 놀랐었어.
……도로시 주임님?! 언제 오신 거……
쉿, 사리아를 방해하지 마.
아, 네. 그런데 왜……
전에 크리스틴의 비서였지?
맞아요.
가기 전에 이곳의 장비를 조금 조정해 주려고 왔어. 너도 한번 배워봐, 혹시 나중에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알겠습니다.
이 피트니스 코너와 샤워실은 내스티가 사리아의 요청으로 설계한 거야.
사리아는 한동안 이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거든. 다행히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데이터 수집을 마쳐서, 수고를 좀 덜 수 있었어.
잠깐만요, 혹시 방금 가신다고…… 하신 건가요?
아, 네가 생각하는 그 뜻은 아니야.
그냥 곧 개척지로 출장을 가야 하는데, 꽤 오래 걸릴 것 같거든. 그래서 가기 전에 미리 해야 할 일들을 해두려고 하는 거야.
……
무슨 생각 중이야?
……크리스틴 씨가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치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분이 아니란 걸 알아요.
사리아 씨의 업무 태도는 분명 크리스틴 씨와는 정반대인데도, 저는 두 분에게서 같은 것을 보았어요……
그게 뭔데?
두 분에게 있어서, 일 또는 라인 랩은 사실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꽤 예리하구나.
그렇다면, 두 분에게 있어 라인 랩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죄송해요, 이런 걸 물어봐선 안 되는데.
스텔라리아의 그 일들이 끝나고, 우리 주임끼리 모였을 때 사리아가 이렇게 말하더라……
“크리스틴은 위대하지 않아. 여기 우리 모두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많은 결점이 있지.”
“하지만, 난 인정할 수밖에 없어. 그녀가 커다란 문 하나를 열었고, 그 문 뒤편으로 위대함이라는 이름의 밝은 빛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위대함'…… 왜 이상이 아닌 건가요?
사리아에게 '이상'은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환상이야. 하지만 '위대함'은 아니지. 그건 차갑고 단단해서, 대부분 경우엔 사람들이 숨조차 쉬기 힘들게 할 뿐이거든.
하지만 내 생각엔, 바로 이러한 빛에 이끌리는 게 과학자의 숙명이야. 사리아도 예외는 아니지.
넌 어때? 넌 또 어떤 것에 끌렸어?
저는……
헬렌은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창문을 통해 사리아의 몸 위로 쏟아졌지만, 사리아는 그저 자신의 분재를 조각하는 데 온 집중을 다하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그 모습은 언뜻 기이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성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조금 분하지만…… 어쩌면 저를 끌어당긴 건 그 빛 자체가 아니라, 그 빛에 이끌린 사람에게서 나오는 빛인 것 같아요.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
……그럴지도요.
후……
사리아, 사무실 장비들은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측정한 네 각종 수치에 맞게 조정해 놓았어.
고마워.
절차는 이미 확인했고, 문제없어. 조금 긴 출장이라고 생각하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라인 랩에서 지원해 주도록 할게.
괜찮아. 359호 기지에서의 일은 이미 마무리됐고, 나도 오리지늄 아츠 응용과 업무에 복귀했으니까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실험을 어디서 하든 다 비슷하거든.
참, 아까 뮤엘시스가 울면서 나를 붙잡고는 자기는 요즘 계속 누구를 배웅만 하는 것 같다고, 기어이 자기 본체로 나를 배웅해 주겠다고 하더라.
요즘 감정이 예민한 상태라 그래.
이 시기엔 그 정도 감성적인 게 나쁜 일만은 아니지.
그런 말은 너답지 않네.
몰랐어? 난 원래 감성적인 사람이야.
확실히 너에 대해 그렇게까지 잘 알지는 못 해.
우리가 같이 일한 시간이래 봐야 아마 주임들 중에선 가장 짧으니까.
앞으론 더 많아질 거야.
사리아, 너는 라인 랩을 어떤 모습으로 바꾸고 싶어?
나는 라인 랩을 딱히 어떤 모습으로 바꾸진 않을 거야. 라인 랩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그건 라인 랩의 자유이니까. 난 그저 라인 랩이 무너지지 않도록 책임질 뿐이야.
예전엔 내가 너를 좀 오해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무슨 뜻이야?
난 네가 자유는 크리스틴의 특권으로만 여긴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넌 사실 너 자신을 제외한 모두에게 자유라는 권리를 허락했던 거야, 그렇지?
난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아니야.
그거야 크리스틴도 마찬가지지, 안 그래?
어쨌든 잘 지내, 사리아. 이번엔 내 모든 실험 데이터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알겠어, 잘 가.
참, 그나저나 네 비서가 너한테 뭘 좀 물어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너무 차갑게 대하진 마.
……
……
저, 도로시 주임이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전 딱히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요……
아니, 그러고 보니, 아직 제 이름도 모르시죠……
기억하고 있어, 헬렌이잖아.
네…… 엣?
몇 년 전, 크리스틴이 나를 찾아왔을 때 네가 그 뒤에 있었잖아.
야라도 내게 널 언급한 적이 있어. 네가 내 업무를 잘 도울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더라.
하지만 전, 아직 아무런 도움도……
그야 오늘 처리해야 할 일들은 나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한동안 라인 랩을 떠나 있었으니, 많은 일들에 대해 너만큼 잘 알고 있진 못해. 앞으로는 널 많이 의지하게 될 거야.
(……사리아 씨, 오늘 보여주신 모습을 보면 앞으로 저에게 의지할 때가 있을 거라는 게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고요!)
예, 저도 도울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그래서, 묻고 싶던 게 뭐야?
그…… 처음엔 분명 궁금한 게 있었는데, 지금은 이 문제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어요.
총괄 사무실로 옮기지 않으시고, 왜 이 사무실을 계속 쓰시려는 건가요?
이미 답을 찾은 거야?
처음엔 크리스틴 씨를 기리기 위해서가 아닐지 생각했었어요.
그리고 중간쯤부터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리아 씨가 취임한 후의 라인 랩이, 크리스틴 씨의 재임 기간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려는 행동인가 싶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아마 그렇게 복잡한 사정 때문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해요.
맞아.
내가 사무실을 옮기지 않는 건 그저, 이 사무실의 모든 것들이 내 습관에 맞춰 만들어졌기 때문이야.
크리스틴의 사무실은 딱히 나한테 익숙하지도 않고, 내 것만큼 편하지도 않지. 단지 그뿐이다.
……확, 확실히, 라인 랩에 복싱 링이랑 샤워실까지 있는 사무실은 둘도 없을 테니까요.
휴식 시간은 끝이야. 이제 일하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