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아주 오래전
새로 태어난 왕자는 전설 속 '검은 고양이'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과연 어떤 운명이 이 왕자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대지에는 '검은 고양이'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다.
전설에 따르면 선택받은 자만이 그 존재를 볼 수 있으며, 그 존재는 사랑과 행복을 가져오고 악행을 저지른 자를 벌한다고 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검은 고양이'가 불길한 존재라 믿으며, 사람들에게 불운을 가져온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검은 고양이는 제 마음 가는 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피곤하면 아무 곳에나 멈춰서 잠을 잘 뿐이었다.
야옹~
(나른하게 하품을 한다)
(느긋하게 기지개를 켠다)
야오옹…… 쿨…… 쿨……
쿠울……
그런데 오늘, 이 존재는 별안간 울려 퍼지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낮잠을 방해받았다.
으아앙……!!
으아아앙……!! 으아아…… 아앙!!!
……!
세상에, 왕자님이에요, 왕비님께서 왕자님을 낳으셨어요!
어서, 어서 국왕님께 말씀드리고, 밖에서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도 알려야지. 사랑스럽고 건강한 왕자님이라고!
며칠이 지나자, 하인들은 궁전을 꽃으로 장식했고, 곧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가 막을 올렸다.
왕과 왕비는 햇살 속에서 귀빈들의 축복을 받았다.
검은 고양이는 낮잠을 자던 창틀을 떠나며, 온전히 행복에 잠겨 있는 눈동자 한 쌍을 보았다.
오…… 사랑스러운 아이야, 또 만났네.
이건 여전히 우리만의 작은 비밀인 거, 맞지?
야옹~
그리고 또 한 쌍, 행복 속에 약간의 근심이 섞여 있는 눈동자도 있었다.
……
(아직도 나에게 그 존재가 보인다니…… 부디 내 아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서, 다치지 않기를……)
왕의 마음속에 있는 씁쓸한 근심이 검은 고양이를 이끌었고, 검은 고양이는 고개를 돌려 술잔을 높이 들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하하하하, 축복, 축복이로다! 함께 잔을 들어, 우리의 왕과 왕비 그리고 새로 태어난 왕자를 위해, 이들의 삶이 오랫동안 행복하길 축복합시다!
으앙…… 으앙……
으아앙……!!
검은 고양이는 두 개의 꼬리를 흔들며 살포시 아기의 요람 위로 뛰어올랐다.
왕과 왕비는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그 존재를 볼 수 없는 듯했으나, 포대기에 싸여 울음을 터뜨리던 왕자는 이내 꺄르르 웃기 시작했다.
왕자가 손을 뻗어 검은 고양이의 늘어진 두 꼬리를 잡으려 했다.
(침을 흘리며 웃는다)
(꼬리를 입에 넣으려 한다)
야옹?
(멀리 뛰어 물러선다)
……응? ……“야옹”!
……“냐아”……“냐옹”!
아, 그 전설이잖아, '검은 고양이'에 관한 전설……
왕자님께선 전설 속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생물을 볼 수 있으신가 봐, 선택받은 자만이 볼 수 있다는 그 존재를 말이야!
그 존재가 부디 왕자님께 사랑과 행복을 가져다주기를……!
십여 년 후.
……아니! 그럴 리 없어!
아버님께선 신과 같이 위대한 왕이신데, 어떻게 갑자기 차가운 관 속의 시신이 되어 누워계신단 말인가?
숙부님, 숙부님! 제가 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어머님께선 크나큰 슬픔에 빠져 쓰러지셨어요.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세요! 왜 아버님께서 이렇게 되신 거죠?
……사랑하는 조카야, 나도 너처럼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구나. 의사 말로는, 정원에 있던 어떤 사악한 독충의 독이 형님의 생명을 앗아갔을 수도 있다고 하더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네가 형님과 마지막 작별을 할 수 있도록,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마련해 주는 것뿐이구나.
너무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조카야. 나는 이만 바깥사람들에게 왕궁의 상황을 알리러 가야겠다…… 먼저 나가보마.
……네, 가보세요……
흑…… 아버님, 아버님……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누가 좀 알려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왕이셨던 형님께서 막 세상을 떠나셨으니 온 나라가 슬퍼해야 할 때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도 생각해야 합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왕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존재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그 기묘한 '검은 고양이'를 손으로 만질 수도 있다고 하죠.
전설 속에선 '검은 고양이'가 사랑과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하지만, 여기 누구 그걸 직접 본 사람이 있나요? 만에 하나 이것이 불길한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 국왕이 꾸며낸 이야기였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여기선 사실만을 논해야 하기에 전 이런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그 존재를 본다는 불길한 아이가, 그의 아버지에게 비통한 죽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 걸까……?
정말 왕자님이 불길한 사람인 거야……? 국왕님은 갑자기 돌아가시고, 왕비님도 혼수상태에 빠지셨는데, 오직 왕자님만 무사하잖아. 게다가 자꾸 '검은 고양이'를 본다고 말하니……
아, 봐봐, 왕자님이 나오셨어!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아버님을 해친 게 아니다. 어머님은 너무나 큰 상심 때문에 쓰러지신 것뿐이야……!
모두 제발 믿어줘. 내가 반드시 진실을 밝혀낼 테니!
냐아?
아, '검은 고양이'……
나타났구나…… 너는…… 대체 무엇을 가져다주는 거지……?
(언제나처럼 침묵한다)
여러분! 이 나라에는 통치자가 필요합니다.
왕자는 아직 어린 데다가, 왕비는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저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해 주십시오!
……이 파렴치한 작자 같으니, 감히 대중 앞에서 내 아들이 불길하다고 공표했다지!
내가 의식을 잃고 왕자가 아직 어린 틈을 타서 당신이 새 국왕이 되었다 한들, 난 변함없이 널 경멸할 것이다! 왕관을 훔쳐 간 도둑놈인 널 말이야!
'검은 고양이'는 절대 불길한 징조가 아니야. 내 아들 역시 절대 불길하지 않고, 자기 아버지를 죽인 건 더더욱 아니라는걸, 난 분명히 알고 있어!
쉿, 조용히 좀 하지. 지금 당신의 모습은 전혀 왕비라고 볼 수 없군. 그저 실성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야. 남편의 죽음에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들의 잘못까지 감싸려 하다니!
난 이미 새로운 왕이고, 이젠 내가 하는 말이 곧 진리야!
이 수치도 모르는 놈! 네 형이 죽은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형의 왕좌에 올라 형의 아내를 모욕하고, 그 아들까지 모함하다니…… 반드시 고발할 거야, 국왕을 죽인 게 바로 너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이 뭘 봤다고?!
네가 즉위하던 때, 나는 그이의 무덤을 파헤쳐서 관을 열었어. 그제야 네가 왜 그토록 급하게 그이를 묻으려 했는지 알게 됐지……
그이의 가슴엔 단검으로만 만들 수 있는 상처가 있었어. 네가 감히 그걸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아아!!
……날 죽이면 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해?
어머님, 어머님!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어. 내 아이가, 곧 이곳에 올 거야……!
어머님, 어머님……
후후, 네겐 내 시신을 옮길 기회 따윈 없을 거야.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반드시 내 아이가 직접 확인하게 할 테니까……
아들아, 여기란다!
젠장!
……어머님! 어떻게 된 거죠, 대체 왜 어머님께서 이렇게 되신 거예요?!
혹시 모두 저 때문인가요? 제가 그 '검은 고양이'를 볼 수 있어서, 제가 정말 불길한 존재여서? 저 때문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이제는 어머님까지……!
아니, 아니란다……
검은 고양이는 두 개의 꼬리를 흔들며 옆에 웅크려 앉았다.
그 존재는 슬픔을 맛보았다. 거기에는 아들에 대한 한 어머니의 애틋함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아들아, 이건 꼭 말해주고 싶구나. 너는 결코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았어. 네가 본 '검은 고양이'도, 결코 네 숙부가 말한 것처럼 불길함을 상징하는 존재가 아니란다.
왜죠? 어머님, 어떻게 그리 확신하실 수 있는 거예요……?
아들아…… 내가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꽃과 축복 속에 몸을 실으며, 너의 아버지와 결혼식장을 향해 걸어갈 때, 나는 분명히 그 존재를 보았단다.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의사를 불렀을 때, 의사는 내 뱃속에 네가 있다는 걸 말해주었지. 그때에도 나는 분명히 그 존재를 보았어……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순간마다 나는 그 존재를 봤단다…… 그 존재의 푸른 두 눈을 보았고, 편안하고 작은 그르렁거림을 들었지……
저는……
아들아, 부디 믿어주렴. 그 존재는 행복의 상징이자 사랑의 사자이며, 악한 자를 벌하는 존재야…… 그 존재를 볼 수 있는 너도 분명,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아이란다……
왕비의 손이 점점 아래로 늘어지며, 힘없이 아들의 손을 붙잡았다.
검은 고양이는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가, 왕궁 창틀 위로 뛰어올랐다. 왕비는 그 존재의 시선이 저 멀리 왕궁 밖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야옹.
왕자는 이 모든 것을 아연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생명을 붙들고 싶었고, 어머니가 계속해서 그의 곁에 남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아들아, 어서 도망치렴! 멀리멀리 떠나야 해……
네 숙부가 날 죽였다고 해도, 지금 너는 너무 어린 데다 세력조차 미약하니 상대가 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왕좌의 도둑이자 흉악한 살인자로부터, 네가 맞설 수 없는 자에게서 도망쳐야 해……!
어서, 어서 가렴……! 어서……
……어머님, 싫어, 안 돼요, 어머님……!
왕비의 손이 땅에 떨어져 이내 핏속에 잠겼다.
왕자는 핏속에 쓰러진 어머니를 끌어안은 채 침통하게 창틀 위로 시선을 던졌고, 검은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곤 왕좌를 훔친 자이자 어머니를 해친 자인 자신의 숙부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이미 용모를 단정히 한 채, 미소를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카야.
무슨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나도 당최 알 수가 없구나. 소리가 나서 급히 달려왔더니, 이런 상황이었단다.
불쌍하고 가엾은 조카야. 나는 네 불길함도, 네가 가지고 온 불운도 신경 쓰지 않는단다. 나 스스로 모든 불행을 억누르고 없앨 수 있다고 믿고 있거든. 하여 나는 네가 나의 아이가 되어주길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완벽한 왕과 그 후계자가 될 수 있겠지. 어떠니?
당신……!
검은 고양이는 높은 궁전 위에 서서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어째서…… 왜 이렇게 된 거지?
하지만 아무도 그의 질문에 답해주지 않았고, 돌아오는 건 오직 침묵뿐이었다.
사락사락, 그는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들었다.
푸드덕푸드덕, 파울비스트가 바깥에서 날개를 퍼덕였다. 그 날갯짓은 밤안개를 헤치며 그가 숨어 있던 곳으로 달빛을 비추었다.
절망과 슬픔, 복수심에 가득 찬 왕자는 더 이상 쏟아지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축축하고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
아버님…… 아버님……? 으흑…… 아버님!
정말 아버님이세요? 제가 꿈을 꾸는 건가요, 아니면 아버님의 영혼이 정말 제 앞에 나타난 건가요?
나는 세상을 떠도는 영혼이 되었고, 오직 어두운 밤을 통해서만 네게 이 숨겨진 비밀을 전할 수 있단다.
내 말을 잘 들으렴, 아들아. 고작 울음으로 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된다……
만일 누군가가 네게 내 목숨을 앗아간 원인이 독충이라고 말한다면, 절대 그 사람을 믿어선 안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날 죽인 범인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
……해가 뜨고 아침이 오는구나. 내겐 속하지 않는 기운이 느껴지니, 아들아, 나는 이제 가야 한다……
내가 했던 말을…… 절대 잊지 말거라……
역시… 역시 그랬던 거야! 이젠 누구에게서 증거를 얻어야 하지? 내가 어떻게 더 확인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발밑 석판에 새겨 넣어 영원히 잊히지 않도록 하고 싶어. 숙부가 아버님과 어머님을 해쳤으며, 이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렸다는 사실을 말이야……!
검은 고양이는 어느새 그가 숨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와, 높은 창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야옹?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검은 고양이는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두 꼬리를 흔들며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왕자님, 국왕 폐하께서 금은보화와 호화로운 옷 그리고 허기를 달래줄 성대한 식사까지 보내셨습니다.
부디 꼭 받아주시고, 폐하의 제안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은 목소리로)……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작은 목소리로) 아버님은 돌아가셨고, 대신들과 백성들은 내가 불길하다고 믿고 있어. 어머님께선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멀리 도망치라고 하셨지. 내가 복수할 힘이 없다는 이유로……
(작은 목소리로)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부모님께서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모르는 척하면서, 그 사람의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건가?
(작은 목소리로) 아니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칼을 뽑아 그 사람을 죽일까?
(작은 목소리로) 어떻게 해야 하지? 누가 내게 알려주고, 답해줄 수 있을까?
(작은 목소리로) 어쩌면…… 어쩌면……
왕자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문고리를 잡았다.
검은 고양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꼬리로 창틀을 두드렸다.
(작은 목소리로) ……난……
또한 국왕 폐하께서는 왕자님에게 본인을 '아버님'이라고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아버님'이라고?
……'아버님'?!
왕자는 손을 홱 거두었다.
'아버님'이란 단어는 왕자에게 '신'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이며, 절대 그 남자에겐 쓰일 수 없는 호칭이었다!
왕자는 냉소를 지으며 검을 뽑아 들었고, 단칼에 방문을 쪼갬과 동시에 문 뒤에 있는 사자의 손에 들려 있던 화려한 옷과 보물마저 갈라버렸다.
검은 고양이는 몸을 일으켜 검을 뽑은 왕자를 흥분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존재의 눈은 모처럼 빛나고 있었고, 그 푸른 빛은 마치 밤하늘 같았다.
……아니, 더는 생각하지 않겠어!
네가 정말 사랑과 행복의 사자이든, 아니면 불길함과 불운의 상징이든 더는 신경 쓰지 않아!
내가 찾는 답은 네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있으니까!
난 그 파렴치한을 죽여야겠어!
사자는 도망친 지 오래였다. 문 앞 바닥에 떨어진 화려한 옷가지와 보석 아래, 새 국왕이 왕자의 거절에 대비해 준비한 쇠사슬과 쇠구슬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사람은 이 쇠사슬과 쇠구슬로 내 손과 발 그리고 남은 생을 묶으려 했겠지. 그렇다면 난 이 쇠사슬과 쇠구슬로 그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리겠어.
바로 지금!
검은 고양이는 창틀에서 뛰어내리며 처음으로 관심을 드러냈다. 이른 아침 햇살이 내려와 그 존재의 그림자를 커다랗게 드리우자, 마치 왕자를 안내하는 길처럼 보였다.
그 길은 왕궁을 향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왕자가 왜 칼을 든 채로 뛰쳐나오는 거야? 어디로 가려는 거지, 어서 막아!
이럴 수가, 대체 어디서 저런 힘이……?!
왕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달려 나가는 데 집중했다.
몸을 숨기던 작은 방을 뛰쳐나와, 어린 시절 놀던 정원을, 부모와 함께 검술을 연습하고 시를 읊던 화원을, 부모가 목숨을 잃은 전당을 지나갔다.
이윽고 그는 왕좌를 훔친 숙부 앞에 다다랐다.
왔구나, 나의 아이야. 내 뜻에 동의하기로 한 것이냐?
아니, 그 검은, 너……
……죽어라!
쇠사슬은 원래 왕자의 두 손을 묶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는 그 쇠사슬로 왕좌에 있는 도둑의 목을 단단히 감았다.
쇠구슬은 원래 왕자의 두 발을 묶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는 그 쇠구슬로 화려한 옷을 입은 살인자의 가슴을 세차게 내리쳤다.
눈앞의 사람이 거짓과 악의로 왕자의 운명을 더럽혔으니, 왕자는 그 거짓과 악의를 그 사람의 운명에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왕자는 검을 그 사람의 몸에 깊숙이 꽂았다.
아, 아! ……사람을…… 불러…….!
……빨리…… 와라……!!
어서, 국왕님을 보호해라!
국왕님을 보호해라!
죽어라!!!
아무도 꽁꽁 얽힌 쇠사슬을 풀어낼 힘이 없었다. 새로운 왕은 끝내 목이 졸려 부러지고 손발과 가슴이 짓이겨진 뒤에야 비로소,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왕좌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그제야 왕자도 손을 놓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 하……
하지만 뒤이어 그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피를 만지게 되었다……
병사들의 무기가 이미 그의 가슴과 손발을 꿰뚫었고, 그의 피는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왕자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야옹.
그는 다시 한번 그 검은 고양이를 보았다.
그의 귓가에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고양이'야. 그 '검은 고양이'가 왕자를 홀려 미친 사람으로 만들었어…… 부모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자길 입양하려던 숙부까지 죽였다니까!
하지만 왕자님이 말했잖아? 지금의 국왕님이 선대 폐하와 왕비님을 죽였다고. 왕자님은 정당한 복수를 한 거야!
그게 진짜인지 누가 알겠어? 어쩌면 왕자가 갑자기 미쳐서, 조금이나마 마음 편해지려고 이런 말들을 지어낸 걸지도 모르지. 자기가 불러온 불행에 핑계를 대려고 말이야.
하지만 어찌 됐든, 왕자님도 이제 죽을 거야…… 선대 폐하와 왕비님 그리고 지금 국왕님까지, 모두 죽어버렸잖아.
이제 와서 이런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래,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야옹.
검은 고양이는 가볍고 느린 걸음으로 걸어와, 그의 옆에 웅크려 앉았다.
왕자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 존재를 바라보았고, 그 푸른 눈을 쳐다보았다.
……말해줘 ……
……내가 한 이 모든 일이,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검은 고양이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한 이 모든 일이,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루시안은 각본을 덮었다.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생물은 멀리 창가에 앉아 햇볕을 즐기고 있다가, 루시안이 마침내 각본에서 고개를 드는 걸 보았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호기심 어린 눈길만을 보냈다.
야아옹?
……의미가 있는 걸까?
루시안은 고개를 떨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는 뒤에 있는 극단을 바라보았다. 어제 강에서 자잘한 돌에 긁힌 상처가 날카로운 고통을 일으켰다. 그건 실패한 도망이었다.
그의 목구멍에서 억압된 열정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미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운, 마지막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겠다는 선택이었다.
아픔이 이렇게나 생생한데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결국은 하나의 대답일 뿐이야.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어. 누구도 그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지.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장난감을 드디어 얻은 듯,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생물이 갑자기 일어나 흥분으로 두 꼬리를 떨었다.
그녀의 눈은 오랜만에 빛나고 있었고, 그 짙은 푸른빛은 마치 밤하늘 같았다.
야옹!
그녀는 가볍게 루시안의 책상 위로 뛰어올라, 평소와 달리 친근하게 자신의 머리를 루시안에게 비비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집요한 광기와 억눌린 증오가 뒤섞인 것이, 마치 난잡하지만 꼭 맛보고 싶은 캣닢이나 복슬복슬한 실뭉치 같았다. 그녀는 이런 대답과, 이런 감정을 아주 좋아했다.
이번 이야기와 눈앞의 인간은, 과연 그녀에게 어떤 맛있는 감정을 가져다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