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흘러가는 구름
아르투리아는 숲에서 이별에 관한 선율을 연주했다. 그녀의 연주는 뜻밖의 청중을 불러들였고, 연주가 끝나자 예상치 못한 손님이 그녀를 찾아왔다.
……
늦가을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첼로 소리는 떨어지는 낙엽을 따라 숲 전체를 휘감았다.
아미야는 첼로 소리를 따라 걸었다. 오른손을 살짝 쥐자, 나무 사이로 비친 햇살에 반지가 반짝였다.
……
……숲속 공터에는 자신의 첼로를 끌어안고 연주에 몰두한 흑발의 산크타가 있었다.
아미야가 도착했음에도 첼로 소리는 바람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아주 부드러운 소리였다.
아미야는 걸음을 멈추고 움켜쥔 손을 천천히 풀었다. 주변의 나무와 먼 곳의 구름이 점차 물줄기가 되더니 이내 하늘과 발치에서 찰랑거렸다……
아르투리아 씨.
이렇게 함부로 방에서 나오시면 안 돼요. 게다가 오늘은……
산크타 여성이 천천히 눈을 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아미야는 상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아미야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별빛과 파도가 먼저 그녀를 감싸안았다. 수없이 펼쳐진 흐릿한 풍경 사이로 수많은 낯익은 형체들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아미야는 자신이 마치 한 권의 책이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첼로 소리는 감정의 가장 깊은 곳을 펼쳐보는 손인 듯했다.
페데리코는 모두에게 그녀의 첼로 소리를 멀리할 것을 경고했다.
하지만 아미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오직 그녀만이 아르투리아를 감싸고 있는 신비한 베일 아래의 모습은 물론, 아르투리아 본인을 느낄 수 있었다.
아미야, 뭘 보고 있어?
앗?
아미야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달빛처럼 새하얀 한 여성이 늘 그렇듯 다정한 눈빛을 한 채 서 있었다.
아미야는 상대방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눈을 살짝 덮는 앞머리를 한 채 갑판 구석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아미야, 갑판에 한참 앉아 있었잖아. 뭘 보고 있는 거야?
아…… 해가 지려나 봐요.
조금 전에 엔지니어링부 아저씨한테 사탕을 받았어요. 테레시아 씨, 오늘의 업무는 다 끝난 건가요?
응. 끝났지. 부모님 생각 중이었어?
예전에, 아빠는 엔지니어링부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저를 안고 옥상으로 올라갔어요.
해 질 무렵에는 기온이 빠르게 떨어졌지만, 아빠의 넓은 품 덕분에 오랫동안 옥상에 있을 수 있었죠.
그때 말이죠, 하나둘 나타난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곤 했었는데……
지금은 박사님이, 켈시 선생님이, 그리고 테레시아 씨가 절 지켜주고 있네요.
그냥……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예전만큼 부모님이 그렇게 자주 생각지 않는다는 생각.
……
박사는 너희가 1년간 이 대지 곳곳을 누비던 때, 사람들을 격려해 준 게 너라고 하던데.
박사가 네게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야. 로도스 아일랜드가 네 집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난 너무 기뻐.
네.
죽음이 가장 힘든 이별은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가장 잔인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인 건 분명해.
그리고 넌 이미 죽음에 용감하게 맞설 수 있게 됐어.
어쩌면 넌 앞으로 더 많은 이별을 겪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명심해. 이별은 끝이 아니야.
무언가를 느끼고, 연결하고, 잇다 보면 모든 것이 얽히는 곳에 네가 있을 거야. 그리고 그건 네 미래가 되겠지.
……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야?
돌아가려고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젠 더는 멈춰있지 않을 거예요.
기억 속의 테레시아가 흐릿해졌다.
'마왕'은 타인에게 환영을 선사하고, 기억과 아츠뿐만 아니라 감정과 지식까지 전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미야는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양면 거울같이 생긴 문, 아미야는 그 투명한 문을 열어젖혔다.
……문 너머로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이곳은 막 비가 내렸는지 좋은 냄새가 났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성당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모든 사람이 떠난 그곳에는 한 어린 산크타만이 묘비 앞을 지키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는 소녀의 볼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
그래서 아르투리아 씨, 이 선율의 주제는 '죽음'인가요?
슬프신가 보네요, 아르투리아 씨. 보세요, 저도 오랜 시간, 많은 이들과 만난 후에야 부모님을 떠올릴 때 괴롭지 않게 됐어요.
슬픔뿐만이 아니군요. 의심…… 분노도 느끼고 계신 건가요?
무엇을 향한 감정인가요? 이미 떠난 사람들? 아니면 '죽음' 그 자체에 이런 감정을 느끼시는 건가요?
아르투리아는 그녀를 보지 않고 있었다. 어린 산크타는 한참을 과거의 세월 속에 서 있었다.
……
엄마, 엄마는 큰 용기를 낸 끝에야 비로소 한 걸음 내디딘 거잖아.
그런데 왜 죽음은 엄마의 인생을 이렇게 급히 끊어낸 걸까?
왜 죽음은 사람의 몸을 빈 껍데기로 만들고, 한순간에 복잡하고 깊었던 감정을 사라지게 만드는 걸까?
왜 우린 저 구름이랑 비슷한 걸까?
자유롭고 아름답지만, 바람이 불면 사라지는 것처럼.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하는 갖은 노력을, 죽음은 이렇게 단숨에 새로운 아쉬움으로 만들어 버리네.
있잖아, 엄마는 죽을 필요가 없었어.
코라, 당신은 죽을 필요가 없었다고.
여왕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당신에겐 떠날 기회가 많았잖아.
아르투리아. 금잔화 골목에서도, 루트비히스 대학에서도, 포타워 극장에서도, 넌 내게 마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거야? 하지만 너도 알고 있었잖아. 내가 네 첼로 소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걸.
비비아나가 귈데네스게사츠의 단서를 통해 당신의 존재를 깨닫길 바라며 몇 번이고 뜻을 전하려고 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난 당신의 선택을 바꾸고 싶지 않았어. 바꿀 수도 없고.
그렇구나. 넌 누구보다 잘 알았던 거야. 내 인생에서 아쉬움이 남지 않았던 건 죽는 순간뿐이었다는 걸.
아쉬움이 남은 쪽은 너지. 안 그래?
……
엠마누엘 선생님의 장례식에서 우리가 만났던 일은 평생 기억할 거야. 석양이 저무는 여왕의 쌍둥이 탑 앞에서……
난 네 첼로를 조율해 줬고, 넌 내게 오는 길에 만난 이들과 겪었던 일들을 들려줬지.
사실 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첼로 소리는 확실히 들렸어. 아주 감동적이었지.
코라, 당신은 당신이 느끼는 아쉬움과 거기서 우러나온 신념을 내게 보여주었어. 내게 다가와 마음의 소리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한 건 당신이 처음이야.
……당신은 내 기나긴 여정 속에서 만난 몇 없는 친구야.
난 당신을 이렇게……
하지만 내 감정과 지금껏 경험한 모든 일이 정말 저기 흐르는 구름처럼 사라질까?
나의 친구 아르투리아, 날 위해 연주해 줄래? 네 첼로 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
난 그게 첼로의 음색이 짊어진 의미라고 믿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어.
은은한 첼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겪어보지 못한 수많은 광경이 아르투리아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장면들과 소리들은 하나의 강이 되어 삶에 있는 미지의 장소로 흘러갔다.
아르투리아는 흐르는 강을 건넜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어떻게 뭍으로 올라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눈을 떴을 땐 이미 문 앞에 선 채였다.
긴 여정이었지?
……
여긴 수도원인가?
이동 섹터에 세워진 수도원이야. 암브로시우스 수도원과 똑 닮았지?
나와 함께 벌써 몇 년째 이 대지를 누빈 이 아이도, 지금은 두 달 하고도 보름째 이곳에 멈춰 있어.
낡아서 고장 난 거냐고?
아니, 내가 아픈 것뿐이야.
난 예정대로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
그렇게 볼 필요 없어. 이곳엔 나 혼자고, 다른 누가 찾아올 일도 없거든.
여긴 라테라노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야. 어느 정도냐면 '라테라노 선언'을 위해 각 대지를 누비는 만국 전달자조차 오지 않을 정도로 멀어.
……
네가 뭘 묻고 싶은 건지 알아, 아르투리아.
이상은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기에 이상이라고 불리는 거야.
난 많은 곳을 가봤어. 여러 도시에 머물기도, 많은 생명이 이곳저곳 흩어져있는 황야나 빙원, 사막에도 갔지……
전쟁이 잦았던 곳, 사람들이 잊어버린 대지의 끝자락에도 갔어……
그렇게 길고 긴 여정 속에서도 난 이 첼로를 내려놓은 적이 없어.
다양한 사람들을 위해 첼로를 연주했지.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강한 마음, 숨김없는 이해, 순수하고 진실한 나눔…… 그런 미래에 다가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머네.
하지만 넌 이 외지고 무너져가는 수도원에서 죽게 될 거야. 죽음은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걸 물거품으로 만들 테고.
지금 쥐고 있는 첼로로 네 죽음을 연주할 생각이야? 두려움과 무력감, 분노와 슬픔을 담아서?
과거의 너처럼 말이야.
……
창밖에 다시 구름이 모였네.
뭐라고?
우리는 구름을 붙잡을 수 없어. 하지만 우리가 그려야 하는 건 하늘이잖아?
위대한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언젠간 죽어. 같은 길을 걷는 사람도 언젠간 우리 곁을 떠나겠지. 죽음이라는 결과를 바꿔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죽음은 우리의 인생을 끊어내고 육신을 빈 껍데기로 만들지. 어떠한 사상도 느낌도 담을 수 없을뿐더러 새로운 내용이 탄생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게 우리가 한때 가졌던 복잡하고도 깊은 감정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야.
초월할 수 없는 죽음이 존재하기에 난 계속 연주해야만 해. 그래야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감정을 계속 느끼고,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거든.
이게 그것의 진정한 의미 아닐까?
아르투리아, 조금 전에 본 게 네 미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안 해봤어?
……
난 그것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진심으로 기뻐.
……
……
숲에서는 여전히 현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산크타가 천천히 첼로를 케이스에 집어넣었고, 카우투스 여자아이는 상대가 자신을 바라보기를 기다리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어라, 아미야 씨?
내 선율에 휘말리게 했다면 미안해……
아르투리아 씨, 로도스 아일랜드에 오신 후로 정식으로 인사드릴 기회가 없었네요.
의도적으로 정한 만남보다는 이런 만남이 첫인사로는 더 좋은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정말 특이한 능력이네. 악기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도……
마치……
양면 거울 같죠?
단순히 수많은 자신을 엿볼 수 있는 거울 같은 건가.
당신도, 이 로도스 아일랜드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롭네.
아르투리아 씨의 연주도 흥미로웠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당신도 그런 감정들을 접하는 거야? 당신, 내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거야?
네.
하지만 저희는 완전히 달라요, 아르투리아 씨.
안타깝네.
하지만 우리가 함께할 시간은 많으니까.
그럼요, 우선 저와 함께 돌아가요.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도망칠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무단으로 본함을 떠난 지는 한참 되셨는걸요.
게다가 마침 라테라노에서 귀한 손님이 오시기도 했고요.
그래서 아르투리아 씨를 찾아다닌 거예요……
그랬구나. 정말 미안.
저기, 아미야 씨. 함선에 돌아간 후에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정식으로 내 연주회에 초대해도 될까?
평범한 청중 그 이상이 될 것 같은데.
그럼요, 물론이죠. 전 로도스 아일랜드에 호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환영이랍니다.
내가 호의적이라고 생각해 주는 거야?
아뇨, 아르투리아 씨의 생각이 선악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만큼은 약속드릴 수 있어요.
누구도 조금 전 일어났던 일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 곡이 끝난 후 연주자와 청중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경치네. 하지만 이곳에 더 머무를 수는 없겠지.
자, 이만 가자.
……어머, 당신은.
정말이지 '귀한 손님'이었네.
아미야 씨는 내 생각보다 훨씬 수완이 뛰어난 것 같은걸.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교황님.
조금 전 뛰어간 감염자 아이들에겐 그저 '라테라노의 사탕 할아버지'일 뿐이야.
'교황' 같은 게 아니라 말이지.
원하시는 대로.
아르투리아 잘로. 우리가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인 듯한데.
그런데도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군 그래.
라이타니엔에서 했던 여정으로 많은 경험도 쌓고 견문도 넓힌 모양이군.
저와 연관이 있으면서도 로도스 아일랜드 담당자가 직접 자리를 마련해야 할 정도라면…… 대단한 인물일 거라고 예상했을 뿐입니다.
다만 그 장소는 교황님께서 금기를 어긴 위험인물을 판결하시는 대성당 홀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흠, 공증소의 기록을 확인해 보니 너와 관련된 사건이 수상할 정도로 많더군.
페데리코가 너를 라테라노로 데려가면, 교황청은 제1청, 제5청, 제6청, 제7청 관련 사건을 공동으로 조사할 테지.
물론 율법에 따라서 말이야.
'율법'이라.
그러니 그전에 한 번 만나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그 만남은 로도스 아일랜드에서만 가능한 일일 테고.
……
아르투리아, 죄 많은 아이야. 지금 이 순간 네 숙소는 임시 고해실이나 마찬가지다.
지금부터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을 것이며, 추후 인정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각오는 이미 되어 있어요.
의식도, 증인도 없을 테지만, 이것도 괜찮겠지. 너는 원래 누군가의 칭송을 바라는 부류도 아니니 말이야.
그럼 이 자리에서 라테라노를 대표하여 아르투리아 잘로 그대를……
차기 '성도'로 임명한다.
……
흠, 아무래도 교황님의 뜻은 아닌 듯하네요.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 율법이 선택한 데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는 거니까.
페데리코가 교황님을 로도스 아일랜드로 모시고 온 거죠?
오시는 길에 우리 귀여운 성도에게 자신이 체포한 도주범이 성도로 임명된 경위를 어떻게 설명하셨을지 궁금하네요.
아니면 혹시……
페데리코는 아직 이 일에 대해 모르고 있어.
하지만 내가 부탁한다면 이해해 줄 테지.
어찌 됐든 난 네 행동을 진심으로 용인하거나 용서하는 것이 아니니.
전 율법의 용서나 이런…… 칭호에 연연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짜증 나네요.
교황청에서 절 이용할 일이 더 있다는 건가요?
……아이야.
아직 깨닫지 못한 것뿐이다. 너의 경험과 행동, 이념뿐만 아니라 아츠에 담긴 고집은……
모두 산크타를 향한 산크타의 수없는 해석이지.
네 천부적인 재능과 유일무이한 아츠가…… 율법의 의도적인 발현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아르투리아, 누가 뭐래도 너는 머리 위에 광륜이 있는 라테라노의 산크타다.
……
라테라노에 흰 돌담이 세워진 이 길고 긴 세월 동안, 네가 유일한 '이단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지. 아, 물론 나도 이 단어를 그리 좋아하진 않아.
하지만 우리의 빛나는 율법은 늘 그랬듯 내게 해답을 주었지.
교황님, 그 애매모호한 '해답'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건 뭔가요?
그건……
……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빛도 어둠처럼 고요해지는 날이 있다.
그것 또한 예외는 아니겠지.
연로한 교황이 재치 있게 머리 위의 광륜을 가리켰다.
아르투리아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산크타의 모든 게 '그것'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라고 해석되어도 말인가요?
교황은 대답 대신 거침없이 다음 질문을 던졌다.
너는 무엇이냐?
제가 뭐냐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 고집과 오만, 죄악이 사라진다면 너는 무엇이지? 너는 무엇을 할 것이고, 무엇을 우리에게 가져올 수 있지?
얘기해라.
아직 찾는 중이에요, 교황님.
여기서 거짓말은 의미가 없겠죠. 하지만 광륜이 사라지면…… 산크타는 신앙과 아늑한 보금자리를 잃게 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게 되면 라테라노는 다른 지역과 똑같아질 뿐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이해'와 '감정', 숨기는 것 없이 순수하고도 솔직한 '소통'은……
당신이 말씀하신 것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요. 아주 조금도 말이죠.
……
……그런데도 율법이 저를 '성도'로 임명하라고 하던가요?
흠…… “그렇다”라고 해야겠지.
생각보다 훨씬 그럴듯하게 대답하는 걸 보니 문서에 기록된 것보다 라이타니엔에서 훨씬 더 힘든 일을 겪은 모양이구나.
……제가 성도 자리를 거절한다면요?
아니면 이건 당신이 계획한 '속죄'이고, 제겐 애초부터 선택할 권리가 없던 건가요?
아이야. 선택권은 너에게 있다.
난 그저 내가 받은 경고를 라테라노의 한 시민에게 전달하는 것뿐.
성인 유적의 정점에 오르신 분이 일개 죄인에게 선택권을 주시는 건가요?
너도 알다시피 교황은 교묘하게 신탁의 문구를 비틀고는 하지. 이를테면 차기 성도의 이름을 바꾸는 일 같은 것 말이야.
……
오해하지 말거라. 너를 협박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찌 됐든 페데리코가 잘 처리할 것이다.
이미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대체 왜……
……하지만 해가 질 무렵에는 네 생각이 좋은 처방이 될지도 모르지.
'성도'는 산크타가 위태롭다는 신호, 그렇기에 갖은 방법을 총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네가 일으킨 비극은 네 자신의 비극이기도 하지.
산크타, 라테라노, 신앙, 교감, 소통, 우리의 사회. 이것들이 너와 네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거다.
그렇다면 어떤 교황이 이것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심사숙고 끝에 내가 직접 너를 종착지로 인도하기로 했다, 어린 성도여. 네 사명을 다한 이후에 말이지.
난 너희들이 누려야 할 미래로 너희를 인도해야 한다.
그곳은 어떤 종착지인가요?
글쎄. 내가 무슨 대단한 선지자는 아니라서 말이지.
……물론 지금 상황으로는 네가 눈부신 미래를 맞이하게 되리라곤 얘기할 수 없을 거다.
이 결정을 내리느라 많은 부담을 떠안으신 것 같네요. 교황님.
어쩌면 우린 내기를 걸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구나.
아르투리아,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럼……
성도의 청중이 되어주시겠어요?
음악에 문외한이긴 하나, 잠깐만 기다려줄 수 있을까……
너무 오래 서 있었군. 로도스 아일랜드의 안락한 응접실에 한 번 앉아볼까?
가면서 들으셔도 돼요.
좋아, 그렇게 하지. 읏차.
이제 시작해도 된다. 개인적으로 '라테라노' 풍의 곡이었으면 좋겠군.
창밖에 보이는 낮의 꼬리는 필사적으로 하늘에 흔적을 남기려 했고, 그렇게 찬란한 석양이 펼쳐졌다.
그녀는 문득 츠빌링슈튀르메의 저녁노을과 지금껏 들렀던 수많은 도시의 구름이 떠올랐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발밑에선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 함선은 곧 어둠 속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윽고 함교에도 불이 켜졌다.
그럼……
그리고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