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의 생령
블랙나이트는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에서 평온하게 지내면서도 여전히 황야에서 살던 날들을 그리워한다.
하아……
- 멀베리, 블랙나이트의 안내자로서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바, 박사님. 블랙나이트 씨의 성격으로 봤을 때 아마 신청서를 내자마자 이곳을 떠났을 거예요.
- 블랙나이트를 원망하는 것 같은데.
- 그래서 넌 블랙나이트가 떠난 것에 동의해?
으음, 제 의견보단…… 박사님 의견을 듣고 싶어요.
- 됐어. 이미 여기를 떠나버린 이상 우리가 더 얘기할 것도 없지.
박사님도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네요……
- 아니야, 걱정 마.
- 크흠, 괜한 걱정 말라고.
- 그런데 블랙나이트가 왜 떠났는지 알아?
- 그나저나 블랙나이트가 떠난 이유는 궁금하네.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아…… 블랙나이트 씨가 이곳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봤을 땐 편해 보이진 않으셨거든요.
의료부에서도 블랙나이트 씨의 상태가 불안정하니 언제든 경과를 살필 수 있도록 본함 주둔 정식 오퍼레이터로 지정하자고 제안했었고요.
그때 전 블랙나이트 씨의 안내자로서 함선 구석구석을 안내해 줬는데……
그러니까…… 이 함선에선 네가 내 대장이라는 거지? 그 뻣뻣한 팔다리로 날 지킬 수나 있겠어?
브, 블랙나이트 씨에 비하면 부족한 실력이지만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제가 최선을 다해서 지켜 드릴게요.
흠, 자신 있나 보네. 기대할게.
……앞으로 여기서 너랑 같이 지내야 하는 거야?
의료부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직 블랙나이트 씨의 경과를 지켜봐야 해서요.
그래서 당분간은 언제든 건강 상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제가 같이 지낼 거예요.
혹시 여기 창문 못 열어? 바람 좀 쐬고 싶은데.
더우세요? 에어컨을 틀어드릴게요.
이제 좀 어떠세요?
으음…… 별로야.
블랙나이트 씨, 혹시 어디가 불편하신 거예요?
그럴 수도, 내 몸이 문제인 거 같아.
앗, 죄송해요. 제가 실례했어요.
잠깐? 뭐 하는 거야?
이마에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저녁 식사 후에 의료부에 가서 다시 꼼꼼히 검사받는 게 좋겠어요.
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의료부는 안 가도 되지 않을까?
정말 괜찮으신 거죠?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진짜 괜찮아.
아, 알겠어요……
참, 이걸 깜빡할 뻔했네요.
이게 뭐야?
호신 부적이에요.
그건 아는데, 너무 잔뜩 가져온 거 아니야?
그…… 부적이 많을수록…… 효과가 좋지 않을까 해서요.
미리 말해두는데, 난 그 이상한 걸 목에 걸고 활보할 생각은 없어.
갖고 다니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캐비닛 같은 데 걸어두셔도 돼요.
싫어, 향냄새가 너무 강해, 이러면 옷에 냄새 밴단 말이야.
죄, 죄송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쯧, 하여간. 너희들처럼 온실 속 화초 같은 여자애들 상대하는 건 정말 귀찮다니까.
(후, 다가가기가 정말 어렵네…… 아니지, 어쨌든 이것도 내 임무니까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
그럼……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으세요?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 넌 여기 있어, 그만 좀 쫓아와.
하지만……
됐어, 안 돼.
블랙나이트 씨, 잠시만요!
한동안은 블랙나이트 씨가 원래 친화력이 부족한 성격인 줄 알았어요. 아무래도 처음 이곳에 왔으니 낯설어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냥 이곳이 싫었나 봐요.
- 근데 그때 바로 떠나지 않았잖아.
- 왜 이제야 떠났을까?
지난달 황야에서 야외 구조 임무를 마치고 함선으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블랙나이트 씨가 정식 오퍼레이터를 그만두고 다시 협력 오퍼레이터가 될 수 없냐고 물어왔어요.
황야에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어쩌면…… 제 잘못일 수도 있어요. 저 때문에 더 이상 여기 남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 그럴 리가 없잖아. 넘겨짚지 마.
- 블랙나이트가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 날 믿어.
고맙습니다…… 박사님.
- 황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래?
솔직히 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어요. 제 입장에선 딱히 고민거리가 될 만한 일은 없었거든요. 오히려 너무 즐거운 여정이었어요.
이번 외근 임무로 블랙나이트 씨와 제법 친해진 줄 알았는데.
심지어 블랙나이트 씨가 이곳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생각했다고요.
미리 말해두는데 이번에 나가면 내 말대로 해. 괜히 짐만 되지 말고.
하지만 팀장은 저인데요?
너 나보다 강해?
그건 아니지만……
황야에서 나보다 오래 살았어?
아니요……
근데 내가 왜 네 명령에 따라야 하지?
하지만……
……풉, 푸하하핫!
블랙나이트 씨, 갑자기 왜 웃으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당황해하는 게 왠지 재미있어서.
그럼 조금 전에 한 말은……?
농담이야. 임무가 거의 끝났는데도 맨날 잔뜩 긴장한 얼굴로 텐트에만 박혀있잖아. 그래서 일부러 데리고 나온 거야.
저는 또……
근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
……네.
솔직히 말하면 예전 같으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역시 착각이 아니었네요.
하지만 그건 내 편견이었지. 너와 지내면서, 오랫동안 지켜본 끝에 알게 됐어.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미, 민망하게 왜 갑자기 칭찬하고 그러세요?
민망하긴 뭐가 민망해? 잘했으면 칭찬받는 게 당연하지. 그 할머니도 다들 가망 없다고 못 살린다고 했는데 네가 방법을 생각해 낸 덕분에 구했잖아.
모두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겸손해하지 않아도 돼. 정말 잘해서 칭찬하는 거니까 의심하지도 말고.
자, 여기. 먹어봐.
쯧,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받아?
됐고, 넌 이걸 먹어.
주, 줍지 마세요. 땅에 떨어진 과일은 비위생적이고, 먹으면 배탈 날 거예요.
배탈은 무슨. 껍질만 살짝 흠집 난 거라 먹어도 돼.
그럼 옷에라도 닦고 드세요.
……마, 맛있다! 이런 과일은 처음 먹어봐요.
전에 동료들과 길을 가다가 강가에 있는 숲을 발견했어.
근데 숲에 이런 과일이 엄청 많은 거야. 숲에서 빠져나올 때 보니까 다들 얼마나 챙긴 건지 주머니가 불룩했었지.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못 봤는데, 여기 이렇게 많이 열렸을 줄이야.
그럼 저희도 다들 맛볼 수 있게 돌아갈 때 더 챙겨가요.
오늘 널 데리고 나온 건 과일이나 따기 위해서가 아니야.
앗, 모, 몰랐어요…… 블랙나이트 씨,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전 그저 산책하러 나온 줄 알았는데.
뭘 긴장하고 그래? 됐어, 나 따라오기나 해.
으앗! 자, 잡아당기지 마세요!
여긴……
쉿, 조용히 해. 저 동굴엔 덩치 큰 놈이 숨어 있으니까, 놀래키면 안 돼.
(작은 목소리로) 왜 저를 데려오신 거예요? 너무 위험하잖아요.
(작은 목소리로) 위험? 내가 있는 한 넌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할걸?
(작은 목소리로) 전공 교수님께서 야외 임무 시에는 가능한 야생 동물을 피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작은 목소리로) 됐어, 그만해. 네 교수님이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 잘 봐, 저기 나온다.
동굴 안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고, 멀베리는 그 소리의 흔적을 찾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동굴 안을 쳐다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은 다시 고요해졌고, 오직 동굴 앞에 있는 나무만이 바람에 흔들리며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냈다.
인내심이 바닥난 멀베리가 캠프로 돌아가자고 얘기하려는 그 순간, 야수 한 마리가 동굴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단단한 몸에 매끈한 털을 가진 야수가 입을 벌리자, 사냥감의 숨통을 단숨에 끊을 정도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작은 목소리로) 어, 엄청 커요……
(작은 목소리로) 저, 이제 좀 무, 무서워요. 블랙나이트 씨……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작은 목소리로) 걱정하지 마, 거리가 멀어서 우릴 발견하진 못할 거야. 오히려 괜히 성급하게 일어났다가 녀석이 눈치챌지도 몰라.
(작은 목소리로) 하, 하지만……
(작은 목소리로) 초조해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야수의 사나운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두 팔 사이에 머리를 파묻은 멀베리가 눈만 빼꼼 내놓고 킁킁거리는 짐승을 지켜봤다.
야수는 주변이 안전하다고 느꼈는지 경계심을 풀고는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듯 그르렁거렸다.
그러자 아장아장 걷는 작은 짐승 한 마리가 어설픈 발걸음으로 비틀거리며 동굴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축축한 진흙 탓에 새끼 야수는 몇 걸음 채 걷기도 전에 넘어지며 굴렀고, 이내 앞에 있던 야수의 뒷다리에 머리를 부딪혔다.
야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그저 돌아서선 다시 일어나보라는 듯 부드럽게 새끼 야수의 머리를 핥아줄 뿐이었다.
(작은 목소리로) 아가야, 힘내! 넌 할 수 있어!
(작은 목소리로) 와아아, 혼자 일어났어요!
(작은 목소리로) 어, 엄청 귀여워요!
(작은 목소리로) 전에 먹을 걸 찾으러 왔다가 임신한 저 녀석을 발견했거든. 얼추 세어보니까 이쯤이면 새끼를 낳았겠다 싶었지.
(작은 목소리로) 정말 보기 좋아요. 저 아가는 엄마와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을 거예요.
(작은 목소리로) 어, 이제 떠나려나 봐.
(작은 목소리로) 어디로 가는 걸까요?
(작은 목소리로) 가을에 배불리 먹어둬야 춥고 기나긴 겨울을 버틸 수 있겠지.
자, 녀석들도 떠났으니 우리도 이만 돌아가자.
이런 광경은 정말 처음이에요. 아니지, 다큐멘터리에서 보긴 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방금 직접 봤을 때처럼의 이런 감동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감동? 이건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인데.
블랙나이트 씨가 예전에 살던 곳에선 자주 볼 수 있었던 광경이라 그렇게 얘기하시는 거예요.
……맞아, 이런 건 늘 볼 수 있었지.
블랙나이트 씨, 잊지 말고 적으셔야 해요.
응? 뭘 적어?
함선에 보낼 보고서 말이에요. 이건 매우 신기한 발견이니 꼭 적어주셔야 해요.
……알겠어, 적어둘게.
마지막 날까지 미루시면 안 돼요!
알겠어, 알겠으니까 어서 돌아가자. 내가 저 과일 딸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줄게. 캠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과일을 맛보여 주고 싶다며.
아마 그 말에 화가 난 걸지도 몰라요. 분위기 파악 하나 못 하고 그렇게 말한 제 잘못이겠죠. 블랙나이트 씨는 얽매이는 걸 질색할 테니까요.
하아…… 박사님, 이제 어쩌죠? 블랙나이트 씨가 떠난 지금에서야 깨달았어요. 이제 사과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는데.
- 네 잘못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
- 사실 사과보다 작별 인사를 못 한 게 더 아쉬운 거 아니야?
무슨 말이든, 이미 늦은 거겠죠.
어?!
둘이 뭘 그렇게 속닥거려? 아, 박사. 그것보다 내 신청서는 결재한 거야? 제출한 지가 언젠데 왜 아무런 소식이 없어?
- 지금 논의 중이야.
- 들어오기 전에 노크부터 해야지.
쳇, 꾸물거리기는. 하여튼 귀찮다니까.
블랙나이트 씨…… 이미 떠나신 줄 알았잖아요. 아직 작별 인사도 못 했는데……
어? 신청서에 결재가 나야 떠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고 말한 건 너잖아.
……하지만 블랙나이트 씨는 그런 규정을 싫어하시잖아요……
여기 있는 동안 규정에도 나름 일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 솔직히 아직 싫긴 한데 못 지킬 정도도 아니고.
그리고…… 어떻게 친구한테 인사도 안 하고 가겠어?
- 블랙나이트, 떠나야 하는 이유가 뭐야?
- 왜 떠나려는 거야?
블랙나이트 씨,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 거면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해결해 볼게요.
장소의 문제가 아니야.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면…… 여기 있는 사람 때문인가요? 서, 설마 제가 싫어서 떠나시려는 건……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제가 싫지 않으세요?
넌 착하고 일도 책임감 있게 잘하잖아. 내가 여기에 남아 있던 건 네가 내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여기를 떠났을 거야.
제가 블랙나이트 씨의 도움을요……?
그래, 그날 기억 안 나?
아, 블랙나이트 씨. 무슨 일이세요? 혹시 어디가 불편해서 오신 거예요?
아니. 혹시 멀베리 안에 있어?
네…… 멀베리 씨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임무를 마치고 어제 본함으로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지금껏 안 보이길래. 혹시 다친 거야?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뭐 하고 있는데?
이번 임무에서 구조된 환자가 예상보다 많아서 의료부에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멀베리 씨에게 경증 환자의 응급처치를 부탁드렸어요.
너네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방금 막 외근 임무를 마치고 온 사람한테.
원래 다음날에 와주셔도 됐었는데 본인이 어떻게든 남고 싶다고 하셔서요.
후……
많이 걱정되시나 봐요?
왜 그렇게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보는 건데?
그게 아니라…… 멀베리 씨는 블랙나이트 씨 얘기를 할 때마다 한숨을 쉬거든요. 아무래도 블랙나이트 씨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나 봐요.
그렇지 않아. 그렇게 말한 적도 없고.
그럼 다행이네요. 다들 블랙나이트 씨가 멀베리 씨를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도와줘? 왜?
멀베리 씨가 전문 분야에 있어서는 믿음직스럽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아직 어린 탓에 황야 생존 경험이 부족하거든요. 블랙나이트 씨가 곁에 있다면 아무래도 많은 걸 배울 수 있겠죠.
지금쯤이면 멀베리도 일이 끝났겠지?
아마 진작 끝났을 거예요……
음냐…… 아저씨, 다치셨으니…… 움직이지 마세요……
어머, 옷장에 기대 잠든 걸 보니, 멀베리 씨 엄청 피곤했나 봐요.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잠도 마음 편히 못 자고……
헬멧.
뀨!
푹 잘 수 있게 가서 좀 도와줘.
슈웅~
후……
그, 좀 도와줄래? 내 등에 업으려고. 바닥에서 재울 수는 없잖아.
아아, 네, 알겠습니다!
하여튼 손이 많이 간다니까.
그날 절 숙소로 데려다준 사람이 블랙나이트 씨였군요.
아니면 누가 그랬겠어. 네가 그날 푹 잘 수 있었던 것도 헬멧 덕분이라고.
제 오해였네요……
넌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
- 오해가 생긴 게 꼭 멀베리 때문은 아닌 듯한데.
- 블랙나이트, 네 말투도 오해하기 딱 좋아.
……
미안. 지금까지 상대해 온 사람들 중에 너 같은 여자애는 없었어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괜찮아요, 블랙나이트 씨. 이, 이제 오해가 풀렸으니까 여기 남으실 거죠? 제가 쌓은 지식으로 분명 블랙나이트 씨의 병세를 완화시킬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난…… 황야로 돌아가고 싶어. 거기서 지내는 게 더 좋거든.
- 그건 걱정 마, 외출이 필요한 외근 임무라면 많이 있어.
- 황야 외근 임무만 전담해도 돼.
아니, 그건 달라. 이곳엔 의식주 문제도 없고, 내 증상을 완화해 줄 약도 있다는 거 알아. 이곳에서 동료들을 사귀고 새로운 기술도 배울 수 있었지.
사람이라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하지만……
가끔 밤에 깨서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면 헛헛한 마음이 들어. 달도, 별도, 벌레 울음소리도 없어서 그런 거겠지.
난 알 수 있어. 내 직감과 마음이 말해주고 있거든.
그건 간단한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야……
난 고개만 들면 하늘이 보이는 곳에 살아야 하는 것 같아.
블랙나이트 씨…… 지금 건강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모르세요? 그 하늘이 블랙나이트 씨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전 동의할 수 없어요! 절대 신청서에 사인하지 않을 거예요! 박사님도 절대 결재해 주지 마세요!
멀베리, 내게 남은 선택지가 별로 없다는 거 알아. 그래서 신중히 고민하고 결정한 거야.
전에 내가 널 데려가 봤던 야수 기억나?
네…… 기억하고 있어요.
황야에는 그런 짐승이 정말 많아. 아주 많지.
몇 년 전에 슬럼버풋과 마주친 적이 있었어. 아주 강한 녀석이었지. 녀석을 처음 본 순간, 잘 길들여 봐야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계속 날 거부하는 거야. 나만 보면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치기 일쑤였지. 맛있는 먹이에도 포근한 잠자리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어.
그런데 한번은, 녀석이 사냥 중에 다친 거야. 그래서 난 그 아이를 캠프로 데려와 잘 치료해 줬어.
상처가 아물수록 녀석은 내게 경계심을 풀었고, 나중엔 아주 친해졌지.
난 내가 녀석을 길들였다고, 전처럼 자주 지켜볼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하루는 사냥에 나갔다 캠프로 돌아왔는데, 녀석이 이미 떠나고 없는 거야. 그 녀석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내가 떠준 모자만 남겨져 있었어.
난 화가 났어. 털실은 황야에서 아주 귀했거든…… 그때까지만 해도 난 녀석이 그 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녀석이 남기고 간 발자국을 따라가 봤지.
도착해 보니 녀석은 모래밭에서 구르고 있더라고. 얼마나 굴렀는지 정말 꾀죄죄했지. 하지만 정말 신나 보였어. 난 그 녀석이 그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은 처음 봤어.
그렇게 몸을 돌려 다시 돌아오는 길에서야 깨달았어. 녀석이 속해야 하는 곳은 내 품이 아니라 광활한 사막이라는 사실을.
저…… 저는……
- ……그렇군.
- 알겠어.
- 블랙나이트, 네 신청서 처리해 줄게.
- 지금부터 넌 로도스 아일랜드 협력 오퍼레이터야. 더 이상 본함에 주둔하지 않아도 돼.
……고마워.
꼭 떠나야겠다면…… 적어도 가기 전에 약을 충분히 챙겨가 주세요.
반년 후
빨리, 빨리 좀 연결돼라!
여보세요? 들리시나요? 오퍼레이터 멀베리입니다. 용문으로 향하는 임무 도중 거대한 모래폭풍을 맞닥뜨렸어요! 지원 부탁드립니다!
여보세요? 아무도 안 계시나요?
정말 여기까지인가? 어떡하지, 이러다……
(나 여기서 죽는 건가.)
너무 힘들어. 배도 고프고 너무 졸린데.
아무도…… 날 구하러 오지 않겠지?
흐윽…… 아빠, 엄마……
미안해요…… 더는…… 못 버티겠어요……
할짝할짝……
(누가…… 날 핥는 거지? 으아아, 간지러워……)
정신 차렸으면 어서 눈이나 떠.
(익숙한 목소리인데, 누구지? 잘 안 보여……)
왜 눈을 찡그리고 있어?
아, 눈에 모래가 들어간 건가.
(눈을 향해 후후 분다)
눈 깜빡여 봐. 괜찮아?
정말이지, 나 아니면 어쩔 뻔했어?
우와!
잠깐만, 갑자기 왜 안는 거야!
얼른 안 놔?
……보고 싶었어요.
그래그래…… 하여간, 어쩔 수 없지. 잠깐만 이렇게 더 안고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