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진지하게
아미야가 런디니움으로 떠나기 전의 어느 날, 그녀를 위해 신체검사를 진행하는 와파린, 이번에는 보기 드물게 엄숙하다......
……
와파린 선생님, 제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응, 문제 있어.
네? !
또 키가 조금 컸는걸, 아미야.
으윽, 놀래키지 마세요, 와파린 선생님.
이건 아주 큰일이라고. 내 키는 이백 년 동안 그대로인데.
신체 지표 항목은 모두 정상이고, 광석병도 안정적인 편이야. 나쁘지 않네.
그래도 런디니움에 들어선 후부터는 가능한 한 반지를 빼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이렇게 말해봤자 별 소용없겠지만.
저... 와파린 선생님, 저희가 런디니움으로 가게 돼서 화나신 거예요?
화나다니? 아미야, 네 능력으로 내 지금의 기분이 어떤지 한 번 느껴봐.
……
고요하네요.
그래도 아직 나 자신의 감정까지 헷갈릴 정도로 노망난 건 아닌가 보네.
이백 년 전이라면 확실히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에 화낼 생각은 없어.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연구나 하는 게 낫지.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이요……?
예를 들자면 넌 반드시 싸우게 될 거야.
그리고 투쟁, 죽음, 원한…… 이 모든 것도 반드시 런디니움에서 일어날 거고.
하지만……
그만해, 아미야.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어. 지금까지 몇 번이고 들었으니까.
널 탓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화난 것도 아니고. 그런 거에 화를 냈다면 이미 몇백 년 전에 화병으로 죽었을걸?
이쪽으로 와봐. 피를 뽑아서 혈액이 어떤지 확인해 봐야겠어.
네……
……
그러고 보니 뱀파이어인 내가 왜 의사가 됐는지 이야기해준 적 있나?
아, 기억나요.
와파린 선생님께서 전에 그러셨죠. 과거에는 동족들과 마찬가지로, 피 냄새를 갈망했기에 호전적이었다고요.
하지만 결국 전쟁이 지겨워져 버렸다고 했죠.
말한 적 있었구나. 쳇, 과거에 뱀파이어의 영웅이었다는 이야기를 방금 막 생각해냈는데, 이건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써먹어야겠네.
믿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건 모르지, 어쩌면 로도스 아일랜드에서의 위엄 넘치는 나의 이미지를 되찾을 수 있을 수도 있겠는데.
그런 장난을 자주 치니까 멋진 이미지로 남지 못하는 거예요!
알겠어. 어차피 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도 아니고.
방금 이야기로 돌아와서, 딱 하나 얘기하지 않은 게 있어.
솔직히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 해도 백 년 정도 하게 되면 질릴 수밖에 없어.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전투에 무뎌져 있을걸.
하지만 백 년이나 한 일이라면 관습이 형성되기 마련이야. 그리고 한 종족의 모든 개체가 그런 관습을 가지고 있게 될 때에는, 그 관습이 곧 그 종족의 정체성이 되는 거지.
즉, 피와 전투에 굶주린 건 뱀파이어의 정체성이라는 거지, 아미야.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 '정체성'을 극복하지 못했어.
하지만 와파린 선생님은 함선 내에서 사고를 일으킨 적이 없잖아요.
당연하지. 난 이백 년 동안 훈련을 거친 몸이라고. 평소의 장난은 단순히 심심풀이일 뿐이야.
……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뭐, 박사를 마주할 때 통제가 잘 안되는 건 인정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로도스 아일랜드에 사람이 많아지면서, 나도 생각을 해 봤지. 실험이 더 필요하긴 하지만……
음…… 이 얘기는 접어두고, 어쨌든 의사가 된 이유는 사실 간단해. 질려서야, 전쟁이 질려서 싫증 나기 시작했거든.
게다가 난 뱀파이어 사회의 관습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했어. 내 본능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다가 자연스럽게 의학 연구자가 된 거야.
와파린 선생님과 켈시 선생님이 서로 아는 것도 그 때문인가요?
그 녀석은 비밀도 직함도 많은 사람이지만, 의사로서 솜씨는 확실하지.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하지만 아미야, 네 눈에는 켈시가 가만히 앉아서 의학 이론을 진지하게 토론할 사람으로 보여?
아니면,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 거야?
하지만 와파린 선생님과 켈시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가 아닌가요?
잠깐.
이거였나?
아니다, 이건 나중에 합작해서 낸 책이고.
이 너덜너덜한 책은 뭐였지? 아, 기억났다. 내가 발표한 첫 논문이 실린 잡지지? 폐간된 후로는 소장용으로 놔뒀었지.
아, 찾았다. 이 잡지들이다.
이건…… 수십 년 전의 의학 잡지인가요? !
당시 난 이 잡지에 기고 중이었는데,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길이의 논문을 내고선 내 이론 상의 결함을 지적하는 녀석이 나타났지.
말해두지만, 내가 틀린 건 아니었어. 하지만 그 녀석이 지적한 점은 확실히 내가 소홀히 한 문제거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긴 했지.
지기 싫었던 나는, 녀석의 생각대로 다시 실험을 해봤지. 그랬더니 정말로 최종 효과가 상승될 줄이야.
그때는 아무나 잡지에 글을 올릴 수 있었지. 하지만 그 녀석의 글은 확실히 보기 드물게 내 눈에 띌 정도로 수준 높은 것이었어.
그럼 그 사람이……
물론 켈시였지. 필명조차 짓기 귀찮아하는 여자였어.
가장 화나는 게 뭔지 알아? 그 뒤로 켈시가 올린 글에 답하려고 열몇 편의 원고를 올렸는데, 그 녀석은 전에 올린 하나로 끝이더라고!
그건 확실히 켈시 선생님답네요……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여자가 마왕 테레시아를 대표해 날 끌어들이려고 왔는데, 이 잡지를 꺼내면서 자기가 바로 그 켈시라고 말하는 거야.
아,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쫓아내고 그 잡지에는 두 번 다시 글을 올리지 않았지.
아아…… 당시 켈시 선생님이 의사를 소개해준다고 해서 두 사람이 친구인지 알았어요……
와파린, 이건 왕실에서 내린 명이다. 감히 거역할 생각인가? !
꼬마야, 내가 왕실의 잘나신 분들을 지금까지 몇 명이나 만나왔고, 그중에 또 얼마나 쫓아냈는지 알기나 해?
이건 전쟁이다. 우리 종족의 운명이 달린 문제라고!
……윽,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이곳에 10초만 더 서 있으면 혈액이 응고되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15초 뒤에는 조각상이 되겠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꺼져.
헛소리 말라, 뱀파이어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어!
그러면 몸소 체험해보든가.
큭, 왕실의 명령에 거스를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라!
그래, 그래. 그런 말도 여러번 들었지.
아아, 또 새로운 거처를 찾아야 할 것 같네. 돈도 어느 정도 모았으니 차라리 빅토리아로 옮겨야겠다.
의료기기를 전부 옮기려면 큰일인데……
어이, 와파린, 정말 사람을 조각상으로 만들 수 있어?
그럴 리가. 겁준 거뿐이야.
그랬구나. 그나저나 대단한 사람이란 건 사실이었네.
당연하지. 전부터 그랬잖아. 뱀파이어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의사라고.
뱀파이어 중에 의사가 있다는 소리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럼 왜 이런 외진 곳에 머문 거야?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곳은 카즈델 국경과 가까운 편이어서 논문을 국외로 보내기 편하거든.
……무슨 날이라도 되는 건가? 하나 보내놨더니, 또 하나가 찾아왔네.
그쪽은 누구야?
의사를 구하러 왔어.
공교롭게도 전쟁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치료하지 않거든.
와파린, 내가 대신 쫓아내 줄까?
네가? 됐어. 네 피는 남겨두고, 네 어머니한테 약이나 가져다 드려.
알았어……
이 지역에서 명성이 자자하던데.
네 명성보다는 못하지.
그래서 이건 무슨 농담이지? 정말로 나의 치료가 필요한 거야, 켈시?
치료 대상은 내가 아니라 이 아이야.
아, 안녕하세요.
……
내 규칙을 알고 있을 텐데? 켈시.
어찌 되었든 테레시아는 이 전쟁의 참여자 중 한 명이고, 넌 테레시아의 사람이야.
네가 데려온 사람이라면 누가 됐든 받을 생각 없어.
테레시아는 죽었어. 이 아이가 새로운 마왕이야, 와파린.
그때는 내 팔꿈치에 겨우 닿을 정도였는데, 몇 년 지나지 않으면 날 따라잡게 생겼어.
벌써 4년이나 지났다니.
와파린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저도 많이 놀랐어요.
내가 의사같이 않아 보여서?
……네.
뭐, 어차피 난 켈시와는 달리 쓸데없이 잘난체하는 방식에는 관심 없으니까.
당시에 켈시 선생님이 했던 말이 기억나네요. 로도스 아일랜드는 카즈델에서 철수를 준비 중이고 함내 시설들도 심각한 피해를 입어서, 치료를 위해 다른 곳으로 데려갈 거라고요.
만나게 될 의사가 뱀파이어긴 하지만, 괴짜라서 피보다는 연구를 좋아한다고 그랬어요.
게다가 의술 능력이 아주 뛰어나서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뱀파이어 왕실에서 선생님을 끌어들이려 해도 항상 거절당한다고도 했죠.
사실을 말할 줄은 몰랐네. 사실을 부풀려 날 깎아내릴 줄 알았는데.
아하하.
그러고 보니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와파린 선생님.
그 선생님이라는 표현만 하지 않는다면, 대답해 줄게.
일단 너는, 내 상사잖아.
음…… 하지만 와파린 선생님은 제 생명의 은인인걸요. 게다가 로도스 아일랜드의 의료기초도 선생님과 켈시 선생님이 함께 힘들게 다진 거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전 알고 있답니다.
아, 그래그래, 알았어. 그래서 질문이 뭐야.
와파린 선생님은 왜 로도스 아일랜드에 들어왔나요?
의학을 연구하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지.
하지만 당시 로도스 아일랜드는 지금과 달리, 카즈델에서 철수하는 것만이 목표였어요. 그런데도 켈시 선생님의 권유에 응한 건 어째서인가요?
……
아미야의 상태는 어때?
신체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지만, 정신 상태가 약간 문제네. 아마 마왕이 된 영향이겠지.
종종 헛소리를 내뱉는 데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의 감정을 읽고 힘을 제어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 평범한 의사는 어쩔 수 없을 거야.
그래서 널 찾아온 거야.
넌 어쩔 생각이야. 적어도 넌 남아서 이 아이를 돌볼 줄 알았는데, 이건 나한테 떠넘기겠다는 거잖아?
테레시아와 박사를 잃자 로도스 아일랜드의 지휘 체계가 혼란에 빠졌어. 게다가 여러 세력이 암암리에 노리고 있으니 내가 나서서 질서를 바로잡아야 해.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마왕을 데리고 그 먼 길을 거쳐 여기까지 올 줄이야.
이 아이는 마왕이야, 켈시.
테레시아도 정말 잔인하네. 이같이 약하고 어린 소녀를 자신의 후계자로 택하다니.
하지만 아미야는 테레시아가 남긴 유일한 희망이기도 해.
켈시, 살카즈에게 희망은 독이야.
너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어. 지금의 마왕을 손에 넣고서 아무 생각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차라리 이 아이가 고통 없는 꿈속에서 죽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그러면 반드시 닥치게 될 고난을 겪지 않아도 될 테니까.
……가능하다면, 나도 이 사태는 피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의사로서는 한 생명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의사로서? 포장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넌 모략가, 지도자에 한 전쟁의 공모자이기도 하다고.
부정하지 않겠어. 그렇다면 와파린, 너는?
모든 왕실을 섬기길 거부한 너는 전쟁을 떠나, 변방 마을에 몸을 숨긴 채 현지 사람들만 치료하고 있지. 블러드 선생님의 명성은 이미 빅토리아와 콜롬비아 의학계에 널리 퍼져있어.
뱀파이어의 별종이 되면서까지 신념을 지키려는 네가, 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생각해?
……
네 목적이 뭔지 알고 있어, 켈시.
그래?
너희들의 현황을 거리낌 없이 내게 알려주고 새로운 마왕의 치료를 맡겨 자신에게 패배자의 탈을 씌울 생각이겠지. 마치 이 전쟁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처럼 말이야.
내가 너희와 함께하길 바라겠지.
내 답은 그때와 같아. 꿈 깨.
……
테레시아의 이상은 처음부터 살카즈라는 종족에 국한되지 않았어.
더 멀리 바라보면서 더 큰 포부를 품었어. 그 때문에 오늘날 이 모든 게 일어난 것이긴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이상을 말하지.
테레시아는 광석병을 치료할 생각이었어.
……그 이상은 처음 듣네.
그리고 로도스 아일랜드는 이미 관련 연구의 초기 단계에 들어섰어.
……네가 한 거야?
당연하지.
……
언젠가 로도스 아일랜드가 테레시아를 위해 움직일 날이 올 거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약속하지……
네게 관여하지 않아도 될 권력을 주겠어.
켈시 선생님이 당시 그런 말을 했었다니……
착각하지 마, 그땐 동의하지 않았어. 허울 좋은 말들이야 얼마나 많이 들어봤는데, 그리 쉽게 설득당할 리가 없었지.
하지만 다음날, 너를 데리고 돌아가려 찾아왔을 때 녀석이 말했지. 괴짜 의사 와파린이 로도스 아일랜드에 합류한다는 소문을 퍼뜨렸으니, 이제 와서 거절해도 늦었다고 말이야.
바로 발끈했거든, 귀찮게 하는 왕실을 피해 몇백 년이나 도망쳐 다녔는데 이번이 뭐가 대수라고 생각했지만……
Mon3tr로 날 로도스 아일랜드에 '초청'하더라.
그……
솔직히 그때는 켈시와 테레시아가 광석병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는 걸 믿지 않았어. 켈시가 광석병에 관한 연구 자료들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남게 되었지.
야, 아미야. 왜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피를 너무 많이 뽑았나?
그건 아닐 텐데. 잠이 덜 깼다고 해도 내가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와파린 선생님은 이제 떠날 생각인가요?
아니…… 왜 갑자기 그 얘기가 나오는 거지? !
왜냐면…… 왜냐면 이제 런디니움으로 들어갈 거니까요. 와파린 선생님이 오늘 보기 드물게 진지한 것도 사실……
로도스 아일랜드가 지금 하려는 일이 선생님의 목표와 다르니 떠나려는 거죠?
아닌데?
네? !
넌 함선 내에 있는 환자들을 버릴 수 있겠어?
그럴 리가요. 지금 이 광산 작업대에 정박하는 것도 환자 때문인걸요.
아니면 함께 가달라고 강요할 생각이야?
아뇨. 대다수가 로도스 아일랜드에 남게 될 거예요. 로도스 아일랜드의 명의로 행하는 작전이 아니니까요.
그럼 내가 떠날 이유는 없잖아?
오늘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네게 있어서 런디니움은 하나의 결단이자,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이야.
그래도 과거의 주치의였는데, 선물 정도는 준비해야지.
선물이요?
이런 이야기를 한 것도 거의 백 년만인 것 같아. 켈시랑 잡담을 나눌 때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거든.
하지만 녀석은 전부 알고 있으니, 굳이 내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지.
뭐, 이왕 이야기를 꺼냈으니 좀 더 이야기할게.
아미야, 전쟁을 일으킨 자들 중에 진정으로 어리석은 자는 몇 안 돼.
오히려 대다수가 지극히 총명한 사람들이지. 그만큼 머리가 좋으니까, 자신이나 종족이 원하는 물건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법이 빼앗는 것이란 걸 알고 있는 거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 망설임 없이 자기 편이 아닌 자를 제거하고, 이 땅을 피로 물들일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마지막에 목적을 이루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면, 또 다른 목표와 포부를 지닌 자가 나타나 뒤엎는 거지.
그렇게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계속 반복되는 거야. 사실 정말 끝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
네, 알고 있어요.
하아, 오히려 잘 모르면 좋을 텐데 말이야.
으……
뭐, 됐어. 그리고 이거 하나만은 알아줘.
켈시의 말이 맞아. 난 전쟁을 '혐오'하는 게 아니야.
전쟁에서 멀어지기로 한 후로 왕실을 떠나 여기저기서 숨어 지냈어. 의사가 된 후로는 나 자신만의 규칙을 세웠지. 전쟁과 관련된 사람은 치료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하지만 내가 정말로 전쟁을 혐오하는 거라면 포부를 품은 사람들처럼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이상을 품고 전쟁에 뛰어들었어야 해.
이런 생각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난 그저 이런 생각에는 끝이 없다고 생각되는 것뿐이야.
나약한 선택이라고 생각해도 돼, 전쟁이란 존재를 묵인하고 지켜보고만 있으니까. 난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죽음을 방관했어.
하지만 좀 더 과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전쟁은 끝없는 내적 소모이고, 우리에게는 미래로 나아갈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라는 거지.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이 말은 어떤 책에서 가져온 거야. 꽤 멋지지 않아? 너도 외워두면 좋을 거야.
확실히 일리가 있네요. 어떤 책에서 본 말인가요?
……잊어버렸어.
음, 나중에 찾고 나면 가져다줄게.
네!
아, 맞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정예 오퍼레이터가 되지 않은 건 언젠가 너희가 나아가는 길이 전화에 뒤덮이는 날이 올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이게 내 최후의 선이고, 그 누구를 위해서라도 넘을 생각은 없어.
그러니 내가 화났다거나 실망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큰 착각이야.
처음부터 그런 부분은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난 로도스 아일랜드에 혈액은행을 직접 세웠을 뿐만 아니라, 로도스 아일랜드의 의료팀이 몇 안 되는 인원으로부터 오늘의 규모까지 확장된 걸 직접 봐왔고, 이제는 제약회사까지 된 걸 봐왔어.
너와 켈시가 광석병을 치료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았다고 믿는 한은……
난 로도스 아일랜드에 계속 머물 거고, 이곳의 환자를 돌볼 거야.
이게 바로 나의 선물이야, 아미야.
와파린 선생님……
약속할게요. 저는 반드시……
영원히 이별하는 것처럼 굴지 마. 약속 말고, 출발하기 전에 박사의 피를 뽑게 해주지 않을래?
그건…… 켈시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할 거예요.
쳇, 아미야. 뭐든지 녀석 말하는 대로 따르면 안 돼. 제대로 자신의 주관을 가져야지.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어요. 박사님의 피를 함부로 뽑는 건 저도 반대니까요.
역시 넌 연구 정신이 너무 부족해. 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인데, 나중에 돌아오면 여기서 한동안 실습하는 게 좋겠어.
하하하, 고려해 볼게요.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하니, 목이 다 마른걸. 아미야, 오른쪽에 있는 그 혈액 좀 건네줄래?
네? !
농담이야. 요즘 누구를 겁줄 때 종종 써먹는 말이거든.
뱀파이어에 대한 선입견을 이용해 겁주는 게 꽤 재미있어. 특히나 아이들이 얌전히 주사를 맞아주더라고.
그런 장난은 하지 마세요!
저기, 아미야.
네?
난 로도스 아일랜드에 있는 모든 환자를 보살피고 있지만,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맡은 내 첫 환자는 너라는 걸 잊지 마.
네.
그러니 살아서 돌아와야 해. 알았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