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항해
데이비스 타운에서 돌아온 로라는 작전 보고서를 제출한 후 자신의 미래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저기 로라? 배런 기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아…… 미안,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책상 위에 놓인 모형을 빤히 쳐다보길래, 무슨 문제라도 있는 줄 알았네.
선배들이 저 모형은 배런 기지가 완성되고 사용되기 시작할 무렵 엔지니어링팀에서 특별히 만든 기념품이라던데……
정말 문제없는 거 맞지?
없어. 겉보기엔…… 지금 기지와 다를 바가 없는걸.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럼 계속할까?
좋아.
자 이제 집중해 줘. 우선 네 보고서를 보면…… 크흠……
로라, 은행 강도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에 어떤 행동을 취한 거지?
그때 난 엔지니어링팀과 함께 섹터 간 연결 구조의 안정성을 확인하고 있었어. 소식을 받은 후에도……
……작업을 계속하기로 선택했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설명해 봐.
내가 받은 건 섹터 연결 업무에 투입된 인원 외에 다른 팀원은 은행 강도를 추적하라는 명령이었어.
난 섹터 연결 업무에 일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우리 팀도 합류할 예정이었으니 그 업무 인원에 포함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명령대로 기존의 업무를 수행하기로 한 거야.
하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은행 강도 중에 네가 데이비스 타운에서 알게 된 친구가 하나 있다는데. 당시에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
아…… 알고 있었어.
그때 이 정보를 듣고 어떻게 판단했지?
판단이라…… 내 판단을 묻는 거야?
“두 번 얘기하게 하지 마.”
내 판단이라…… 난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았는데……
……난 블랙스틸 직원이야. 명령에 따르는 건……
내 소임이고.
(미간을 찌푸린다)……
“명령에 따라서 움직였다라. 올바른 선택을 했군, 로라.”
어때? 로라, 제법 그럴듯하지 않았어?
특히 조금 전에 “두 번 얘기하게 하지 마”라는 말은 완전 똑같았지?
……
어라…… 로라,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내가…… 너무 몰아세웠나?
아니, 괜찮아…… 그냥……
계속하자.
조금 전…… 그게 마지막 질문이었어.
로라, 하지만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겠어. 너 말이야, 데이비스 타운에서 돌아온 후로 계속 불안해하고 있잖아.
그게 특수한 작전이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어. 하필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네가 있었던 거고.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안 되지만, 계속 이렇게 긴장한 채로 지내면 안 돼.
로라, 지금 네게 필요한 건 휴식이야.
휴식……
제대로 된 휴식 말이야. 작전 보고에 관한 생각은 관두고, 긴 휴가를 신청하는 게 좋겠어.
네 말이 맞아…… 더 이상 이렇게 기운 빠진 채로 살 수는 없어.
알리자, 부탁인데 한 번만 더 해줘, 응?
로라…… 내 말을 듣긴 한 거야?
로라, 아무래도 작전 보고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이미 2주나 지나기도 했고 그 누구도 그 일을 다시 꺼내지 않을 거야.
이건 그냥 회사에 일어난 아주 사소한 사건일 뿐이야. 네가 아무리 성실하게 보고서를 쓴다고 해도 팀장은 듣는 둥 마는 둥 할 거라고.
이 친구 말대로 장기 휴가를 신청해 봐.
안 돼…… 이 보고는 꼭 해야 한단 말이야.
데이비스 타운에 도착한 뒤로 많은 일을 보고 겪었어.
작전 중에는 명령을 따르고, 작전 후에는 작전 보고를 하는 것. 이건 블랙스틸 직원의 소임이잖아. 게다가……
알리자, 내가 보고서에 기록한 내용 봤지? 그런 일이라면 더더욱 정리해서 상부에 보고해야 하지 않겠어?
로라, 난……
보고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데이비스 타운에서 일어난 일은 아주 명확하니까.
정부가 의뢰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한 블랙스틸 직원이 규정을 위반했고, 범죄 활동에 가담해 회사의 이미지와 명예를 실추시킨 거지.
로라, 이 사건이 굳이 반복해서 들출 일이 아니라는 건 다들 알고 있어. 특히…… 2주가 지난 이 시점이라면 더더욱.
우린 월급을 받는 직원이잖아. 명령만 잘 따르면 밥그릇 지키는 것 정도야 쉽다고.
그러니 너무 고민하지 마.
……
아, 아무래도 다른 사람한테 확실히 물어봐야겠어.
……
아파……
어디가 아픈데?
엉덩이…… 아파.
엉덩이가 아프다는 건, 그만큼 배운 게 있다는 거겠지.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니?
응, 엄마. 침대 밑에서 장난치면 안 되는 거였어……
근데 엄마…… 난 그 기계 부품들이 너무 좋아. 엄마가 그걸 가지고 노는 걸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이……
아직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밥 다 먹고 엄마 따라와.
우리 로라가 왜 이렇게 급하게 날 찾았을까? 무슨 일이라도 있어?
프란카의 의견을 듣고 싶어.
데이비스 타운 일 말이지?
음, 그렇게 티 났어?
평소에 분위기 메이커였던 우리 귀여운 아몬드가 돌아온 후로 잔뜩 풀 죽어 있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
데이비스 타운에서 벌어진 일을 정리해서 보고서를 썼어.
보고서라면 이미 리스캄이 냈잖아.
게다가 이미 예전 일이고.
알아. 하지만……
아, 그 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지 대충 감이 오네.
……
그 보고서를 제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려줄게.
네 보고서는 무시당할 거고, 질문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할 거야. 보고받은 사람이 언짢아한다면 처분을 받게 될지도 모르지.
어때, 간단하지?
……
2주가 지났는데도 난 아직 데이비스 타운에서 있었던 일이 종종 떠올라.
마을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다들 봤잖아. 제시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
제시카는 원래 그런 아이잖아?
……프란카, 데이비스 타운에서 나 별로였지?
어머, 우리 귀여운 아몬드의 단단한 껍질 속이 이렇게 정의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니~
이건 정의로움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는 그래도 마지막에 제시카를 찾아갈 생각이라도 했지, 난…… 그때의 난……
제시카가 위험에 빠져 있는데도 본함에서 대기하고 있었어.
난…… 그때 난…… 제시카가 남아주기를 바랐는데…… 함께하고 싶었는데.
“블랙스틸 제복을 입은 우리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 해. 못다 한 일이 있더라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리스캄이 이곳에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말을 했겠지.
그리고는 널 꼭 안아줬을 거야. 네가 이곳에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도록.
프란카, 설마……
지금 리스캄을 찾아가면 다정한 조언과 위로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뿐이야.
나한테선 듣기 싫은 말만 듣게 될 테니까.
……그래도 듣고 싶어.
우리 귀여운 아몬드, 넌 혹시 제시카를 돕지 못한 걸 후회하는 거야? 아니면 제시카의 선택을 질투하는 거야?
네가 보고서를 쓴 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너 자신이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에게 세뇌하기 위해서일까?
……
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어. 엄마는 평범한 의사였지만, 내 인생은 그렇게 자유롭지 않았지.
가족을 따라 볼리바르에서 컬럼비아로 이사를 가서, 열심히 노력한 끝에 대학교에 붙었는데, 졸업을 앞두고 광석병까지 걸렸어.
다른 과학기술 기업은 날 원하지 않았어.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블랙스틸뿐이었지.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운 건 명령에 따라 팀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거였고.
난 제시카의 선택을 질투하는 게 아니야……
다들 알잖아. 제시카는 브린리라는 성으로 많은 걸 누렸지만, 그보다 더 큰 부담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걸.
난 그 재력이 부럽지 않았어. 제시카는 짊어지고 있다는 게 많다는 걸 느낄 수 있었거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이해가 안 가. 제시카는 대체 어떻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걸까?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 후에야 갈색 머리 불포가 고개를 들고 짙게 깔린 어둠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만약 너도 우리와 함께 제시카를 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제시카에게 총을 겨눴을 거야?
……
아니.
그게 명령이라 해도?
……난……
겨누지 않았을 거야.
왜?
그건……
그 애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럼 너도 선택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그건 아니지……
왜 아닌데?
우린 제시카처럼 부잣집 출신도 아니잖아.
높으신 분들의 선택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의 선택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뿐이야.
……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안 될 것도 없잖아?
백번 양보해서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게…… 진실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솔직한 일일 거야.
진실은 중요하지 않은 거야?
어떤 진실들은 기억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할 때가 있지.
참.
이건 그냥 하는 말인데.
리스캄이랑 내가 파견된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곳은……
임무가 좀 까다롭긴 한데 복지도 좋고 사람들도 하나같이 정이 넘치거든.
혹시 어떤 귀염둥이 아몬드가, 블랙스틸의 공기가 자신의 성장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새로운 환경으로 바꿔보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겠지.
……응.
고마워, 프란카.
역시 소문대로 이런 고민 상담은 네 전문이 맞았네.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프란카가 말은 좀 거칠지만 고민이 있다면 해결해 줄 거야”라고 다들 말하던걸.
도대체 어떤 녀석이 감히 내 명성에!
……
엄마, 왜 다시…… 방으로 온 거야?
저 기계 부품들이 좋니?
응.
근데 왜 엄마한테 물어보지 않았니?
어…… 엄마한테?
그래, 엄마는 네가 저 부품들을 가지고 노는 게 싫어. 네가 네 할머니처럼 작업장에 틀어박혀 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거든.
그래도 엄마한테 물어는 봤어야지.
난 엄마가 안 된다고 할까 봐……
그래, 안 된다고 할 가능성이 크지. 그래도 물어봤다면 또 다른 가능성이나 선택지가 생길지도 모르는 법이잖아.
시도하지 않으면 영원히 다른 선택지는 생기지 않아.
저기 책상 보이지? 앞으로 저기가 네 작업대야. 침대 밑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꺼내오렴.
지금 당장.
들어와.
팀장님.
무슨 일이지, 로라?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난번에 데이비스 타운에서 수행한 임무…… 알고 계시나요?
알고 있어. 근데 무슨 일이지?
관례에 따라 임무 작전 보고서를 작성해 왔어요.
그런 관례가 있었나?
네……
작전 보고서라…… 아, 그랬지. 이제야 생각나는군.
그건 아주 막중한 임무였지. 도중에 우여곡절도 많았을 테고. 보고서로 정리하느라 고생 많았어.
아뇨, 별말씀을요……
네 보고서를 통해 이번 사건의 여러 가지 세부 사항을 알 수 있겠군.
로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녀의 보고서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보고서를 이런 식으로 쓰면 안 되지, 로라.
우리는 기술직이잖아. 보고서에 엔지니어 임무와 관계없는 내용을 적어선 안 돼.
알고 있어요. 하지만 임무 수행 중에 엔지니어링과 관련된 지식만 쌓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직접 본 걸 못 봤다고 할 수도 없는 법이고요.
……
후우.
뭐 됐다. 어차피 이 보고서는 그 누구도 읽게 될 일이 없을 테니까.
그는 보고서 마지막 장을 펼친 후 능숙하게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넌 아직 앞길이 창창해, 로라.
자신이 뭘 봤고, 뭘 보지 못했는지 판단하는 법을 배우도록 해.
……죄송해요, 팀장님. 전 일개 엔지니어라 그런 쪽으로는 아직 이해가 잘 가지 않네요.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말해봐.
새로운 교류 프로젝트에 참가할 테니 로도스 아일랜드로 파견해 주셨으면 해요.
크흠, 그럼 계속하자.
잠깐잠깐, 아직 준비가 덜 됐는데. 마음의 준비를 조금만 더 하고……
이제 됐어. 시작하자.
음…… 네 허리춤에 달린 인형은 뭐지?
허리춤에 달린 인형이라니……? 그게 면접 질문이야?
그래, 프란카한테 받은 《면접 예상 질문》에 '때로는 면접 응시자의 복장에 관해 질문하기도 한다'라고 적혀 있는데.
뭐, 그렇다면야…… 이건 엄마가 만들어준 인형이야. 늘 지니고 다니고 있지. 이 정도면 될까?
답변 시간이 약간 짧지만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게다가 넌 이미 무시무시한 시험을 치렀잖아……
프란카가 그랬지. 시험만 통과하면 면접은 가벼운 대화나 마찬가지라고. 내 생각에는 굳이 면접 준비를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럴 수는 없지. 혹시 모르잖아. 자자, 어서. 다음 질문을 해줘!
이번엔 제법 그럴듯한 질문이야……
로라! 널 보러왔어!
어머, 로도스 아일랜드 면접 준비 중이었어?
이미 생각을 굳힌 모양이네.
당연하지. 쉿, 조금만 이따 얘기해. 우선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해서.
그럼 로라, 네 미래에 대한 계획은?
내 미래?
내…… 미래……
……
엄마, 꼭 떠나야 해?
여긴 너무 위험해서 더는 머무를 수 없어. 널 전쟁의 불길 속에서 자라게 할 수 없단다.
로라, 엄마도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우리의 운명은 있지,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단다. 엄마한테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단다.
선택지…… 그게 뭔데? 잘 모르겠어……
엄마, 울지 마…… 로라가 있잖아. 내가 엄마의 선택지가 될게.
아……
그래…… 로라, 우리 아가. 네가 바로 나의 선택지란다.
가자. 우린 새로운 곳에 도착하게 될 거야. 넌 새로운 일을 겪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게 되겠지. 새로운 운명이 우리 로라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언젠가 네게도 앞이 꽉 막힌 듯 막막한, 한 치 앞을 가늠할 수조차 없는 역경이 찾아올 거란다.
그날이 오거든 계속 버텨야 한다는 걸 잊지 말렴. 그러다 보면 선택지가 보일 거란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무언가를 결정할 만한 충분한 용기가 생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