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의 검사
고향에서 추방당해 타지를 떠돌던 검사는 이곳에서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대인, 이번 전투의 실패 요인은 적의 계략을 파악하지 못한 제 지휘 부족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제가 전부 지겠습니다!
제 목숨으로 죗값을 치를 수 없는 무거운 죄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인께 마지막으로 보답하고 싶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뭘 더 할 수 있지?
오늘 널 죽이거나 전장에서 죽게 둔다고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너 때문에 세상을 떠난 전사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기라도 할 수 있다는 건가? 네가 어떻게 책임을 진다는 것이지?
대체 전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대인! 저는……
아카후유, 넌 여기 남을 자격이 없다.
극동을 떠나라.
998…… 999…… 1,000……
후……
검사가 장검을 거두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지니고 있던 단검을 꺼내 벽에 작대기를 하나 더 그었다.
극동에서 쫓겨난 지 137일째. 용문이라는 낯선 도시에 머문 지는 벌써 39일째.
극동을 떠나기 전,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회사의 입사 제의를 받았다. 그들은 내게 계속 검사로 싸울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아마 주군의 묵인일 것이다.
이제 날 이곳에서 새로운 거처로 데려가 줄 접선책을 기다려야 한다. 그곳은 극동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장소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훈련을 게을리하진 않았으나, 검을 닦을 기름이 떨어졌군.
이를 어쩌지……
사람들은 홀로 남은 검사는 파울비스트만큼 약하다고 했고, 들고 있는 검이 날카로울수록 더욱 쉽게 부러진다고 했다.
극동을 떠나면서 몇 번이고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이후로는 나름 안전했지만, 이곳까지 뒤따라온 적이 있을지도 모르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약속대로 누군가 열흘마다 생필품을 문 앞에 두고 가니 괜히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늘도 딱히 특이 사항은 없는 듯한데……
잠시 머물고 있는 이 거처는 도시 외곽의 오랜 골목에 위치해 있다. 사람들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니 안전할 것이다.
간혹 행인들이 지나가거나, 매일 같은 시간에 아침 노점을 펴는 주인이 나타났지만, 그 외의 수상한 인물은 보지 못했다.
창문 너머로 이 낯선 도시의 일부를 볼 수 있었다. 용문은 고향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소문으로 들은 남조의 독특한 도시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듯했다.
식량도 다 떨어졌군. 원래대로라면 오늘 물자가 왔어야 하는데.
주변에 추격병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 무턱대고 나가는 건 위험한데……
쳇…… 짜증 나는군. 세상에 적을 피해 숨는 검사가 어딨어? 코우곤 가문의 검사가 이런 수모를 겪다니!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꼭 필요한 수행이지……
제때 식사를 챙겨 먹는 것도 그렇고……
골목 깊숙한 곳.
검사가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디뎠다. 밖으로 나온 것도, 이 공간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일도 한 달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낮은 집들 사이로 작게나마 하늘이 보였다. 문득 검사의 뇌리에 신사의 얕은 처마가 떠올랐다.
특별할 것 없는 오래된 민가인 듯하군. 건물에 잡다한 물건이 많이 걸려 있어서 저격할 곳도 마땅치 않은 것 같고.
입구가 하나라 미행이 붙으면 금세 발견할 수 있겠어. 하지만 매복이 많으면 그만큼 도망치기도 어렵겠지.
여긴 오래 머물 곳이 아니야……
……!
대장! 발리스타를 조심하십시오!
이미 매복에 빠진 듯합니다. 적수가 많아 계속 싸운다 해도……
포기하지 마라! 모두 함께 활로를 뚫는다!
우선 후퇴하십시오! 시간은 저희가 벌겠습니다!
다시 눈을 뜨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찬란한 햇빛은 눈이 내리던 그날과 같았지만, 코끝으로 전해지는 건 길가 노점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였다.
사장님, 오늘은 왜 이른 아침부터 볶음 요리를 준비하시나요?
메뉴를 한번 바꿔봤어. 요새 젊은이들은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과 점심을 동시에 해결한다고 하니, 나도 흐름을 따라야 하지 않겠나?
침착해…… 과거의 실패로 평정심을 잃어선 안 돼…… 진정하자.
거기 아가씨도 식사는 아직이지? 뭐 좀 내줄까?
아무리 바빠도 잘 챙겨 먹고 다녀야지.
(평범한 길거리 노점이야. 주인도, 손님도 위험한 기색이 전혀 없는 일반인이고.)
(여기서 끼니를 해결하자.)
메뉴가 어떻게 되지?
두유부터 꽈배기, 호빵, 볶음면까지 없는 게 없어. 손님들은 우리 집 만두가 일품이라고 칭찬하던데, 한번 먹어볼래?
나는……
(만두피에 싸여 예측하기 어려운 소와 정체불명의 양념이라.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아…… 안 돼, 조금 더 안전한 음식을 찾아야겠어.)
조금 전 그 아가씨, 대체 뭘까요? 보아하니 돈도 없는 것 같던데.
얼굴이 낯선 걸로 봐선 이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몰골이 수척한 게 한동안 음식을 제대로 못 먹은 것 같은데. 에휴…… 돈이 없으면 말을 하지. 한 끼 정도는 줄 수 있는데.
부두.
도시의 중요한 관문이자 오가는 사람이 많은 장소 중 하나다. 접선책이 머나먼 곳에서 온다면, 아마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검사는 높은 곳에 서서 멀리 내다보았다. 수많은 화물과 승객을 내리고 태우는 대형 함선은 잠시 정박했다가 다시 먼 항해를 떠났다.
저 함선 중에 극동으로 직항하는 배가 있지 않을까……
아니…… 지금은 돌아갈 때가 아니야.
패장으로서 추방된 걸로 모자라 그간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는데, 고향으로 돌아가 봤자 무슨 면목으로 주군을 뵙겠나……
저…… 죄송한데…… 제 화물 상자를 밟고 계셔서요……
아, 미안하다……
아, 혹시 생선은 안 필요하심까?
신선하고 종류도 다양함다. 전부 오늘 막 들어온 생선인데다, 바로 잘라 드리거나 회로 떠드릴 수도 있슴다.
(회라…… 익숙한 음식이군.)
(추가로 조리하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조미료도 필요 없어. 그야말로 안전한 음식이지.)
한 마리, 회로 떠주면 돼.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장사꾼에게 저런 실력이 숨겨져 있다고?)
(평범한 회칼을 이토록 완벽하게 쓰다니. 팔에 힘을 주는 방식과 생선 살에 꽂히는 칼의 각도까지, 모두 검을 다루는 이치에 들어맞는군.)
이렇게 빈틈없는 칼 솜씨라니……
이름이…… 어떻게 되지?
칼 다루는 방법은 누구한테 전수받았고, 어떤 유파지? 그 칼은 또 어디서 난 거고?
저한테…… 물으시는 건가요?
제이라고 함다. 수산물 장사꾼임다. 칼 다루는 법은 어떤 아저씨한테 배웠고……
이 칼은 회칼임다. 수산물 외에 다른 건 잘라본 적이 없슴다. 그리고 유파라면…… 셸슈림프와 생선을 자를 땐 다른 칼과 방식을 사용하긴 하는데……
폐관 수련 중인 유파였군. 힘 조절이 굉장한걸……
내가 신사에 있을 때도 매일 같이 볏짚을 베며 수련하던 검객이 있었다. 평범한 초식을 수련하던 그는 높은 경지에 올라 놀라운 위력을 뿜어냈지.
이런 실력자임에도 수산물 장사꾼이 되었다니…… 그쪽도 뜻을 이루지 못한 검사인가.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린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겠군.
앞으로의 포부는 뭐지? 누구를 위해 이 무예를 사용할 건가?
딱히…… 포부라고 할 건 없는데……
당장의 목표라면 장사가 잘돼서 돈을 많이 모으는 검다. 하루빨리 더 큰 가게로 옮기고 싶거든요……
이런 칼 솜씨로 작은 생선 따위나 자르고 있겠다고? 실력이 아깝지도 않나?
(작은 생선? 이 생선이 작아서 마음에 안 드시나?)
그게…… 큰 생선도 준비되어 있슴다. 무게에 따라 판매하니 사기 염려는 안 하셔도 됨다. 그저 손님이 다 못 드실까 봐……
(말 속에 숨겨진 뜻이 있군. 식사량으로 날 판단하겠다 이건가?)
농담도 심하군. “식사량이 곧 인내력인 법”. 생선 한 마리를 못 먹는다는 게 말이 되나? 여기서 가장 큰 생선을 가져오도록!
아…… 알겠슴다!
예약한 물건을 찾으러 왔다.
그래스 핀 한 마리와 셸슈림프 세 근.
네, 여기있슴다. 자, 받으세요.
누구냐?!
인파 속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가벼운 발걸음에 재빠른 몸짓이었다. 그 그림자는 마치 물 밖으로 튀어 오른 생선처럼 순식간에 다시 강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저 복장은…… 남조의 닌자? 여긴 어쩐 일이지?!
거기서라!
주군! 늦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네.
이렇게 끝도 없이 암살 시도를 하다니, 정말 비열한 녀석들입니다! 전장에서 정정당당하게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런 비겁한 방법을 쓰는 겁니다!
아카후유, 저들이 왜 날 죽이려 하는지 아는가?
네, 주군께서는 코우곤 가문의 중신이자 가장 용맹한 장군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두렵기에 주군을 해치려는 것이고요.
틀렸다. 그건 저들을 보낸 사람의 이유이지, 저들의 이유가 아니야.
애석하게도 쓰러진 이들은 죽을 때까지 그걸 모를 터.
아카후유, 넌 저들과 달라야 한다.
거리 위.
한참을 헤매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거리는 불빛으로 가득했다. 눈앞에는 네온사인 간판과 고층 빌딩이 끝없이 펼쳐졌고, 귓가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오늘 이 도시에 축제라도 열린 것일까?
검사는 끝없이 암초를 때리는 파도처럼 몰아치는 인파 사이에 서 있었다. 뒤쫓던 목표물은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이런 곳으로 유인하다니…… 전부 계략이었나?
번화가에서 상대를 죽이는 건 닌자 녀석들의 뻔한 수법이지…… 아무래도 여기가 주 무대인가 보군.
시가전은 전문이 아니지만, 전의를 잃은 모습을 보이면 녀석들이 자신만만해할 게 분명할 터.
대체 어딨는 것이냐……?
검 자루를 꽉 움켜쥔 검사는 시끄러운 거리에서 위험을 포착하기 위해 숨을 죽인 채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전부 소용없는 일이었다.
누구냐……!
대박! 이 장비 완전 멋진데? 진짜 같아!
아카후유가 고개를 돌리자 눈빛을 반짝이며 자신의 어깨 보호대를 만지작거리며 젊은이가 보였다.
화를 내려는 순간, 젊은이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본 검사는 기묘함과 낯섦을 느꼈다. 어떤 시민이 완전무장한 무사에게 이토록 서슴없이 다가오겠는가?
내가 무섭지 않나?
무섭지 않냐고? 왜?
《남북풍운전》 발매 예고는 오늘이라고 했는데. 옷 도안을 어떻게 이렇게 빨리 구한 거야? 아, 알겠다. 공식 홍보 모델인 거지?
이게 북조 코우곤 가문 검사의 갑옷이야? 북조 검사는 기본 스탯이 좋고, 남조 닌자는 스탯 상한이 높다고 들었어. 하지만 난 검사님 장비가 더 멋지다고 생각해!
그게 무슨……
닌자? 혹시 닌자를 봤다는 건가?
응, 저길 봐.
청년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아카후유는 현란한 불빛에 눈앞이 핑 돌았다. 그녀는 노력 끝에 겨우 게임 샵의 거대한 스크린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게임 캐릭터는 자신과 똑같은 갑옷과 장검을 든 채, 자신이 절대 연마할 수 없는 초식을 펼치며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스크린 속 사람들은 처참하게 죽어가며 괴로워했고, 스크린 밖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
투명한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마치 우스운 이종족 같았다.
문득 검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런 곳에서 살다니, 정말 행운아네.
앞으로도 저런 걸 두려워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지……
하지만 명심해. 저런 건 멋진 게 아니야.
아카후유 씨?
그 로고는…… 로도스 아일랜드?
오는 길이 생각보다 순탄치 않아서, 조금 늦었어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곳 생활은 괜찮으셨어요? 귀찮은 일은 없었죠?
묘한 곳이긴 한데, 나름 흥미로웠어……
잠깐, 혹시 우르수스인?
앗, 혹시 몰라서 변장까지 했는데…… 말투에서 티가 나는 건가요? 맞아요. 전 우르수스인이에요.
극동과 연락하고 우르수스인을 고용하다니……
'로도스 아일랜드'는 대체 어떤 곳이지?
평화로운 곳이죠.
그곳엔 우르수스, 극동, 카시미어, 라이타니엔 사람이 모여 있어요.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사이좋게 지내라는 건 아니지만, 증오와 폭력에 기반해 일을 처리하진 않죠.
하지만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계속 검사로서 싸울 수 있다고 들었는데.
물론 가능하죠. 로도스 아일랜드에는 당신처럼 뛰어난 전사들이 많아요. 우리가 의료기업인 건 맞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싸워야 할 때도 있거든요.
하지만 대체로 다들 평범하게 일하고 싶어 하죠.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싸우는 상황을 피할 방법을 고민하곤 해요.
흠……
흥미롭군. 한번 둘러보고 싶어.
오, 생각했던 것보다 다가가기 어려운 분은 아닌 것 같네요.
혹시 정리할 짐이 있나요? 아니면 바로 출발하실까요?
이 검만 있으면 돼. 가자.
주군, 저는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전투의 의미를 이해하고, 검 끝이 향해야 할 곳을 찾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