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5불타버린 조각5
자아에 관한 이야기
등장 오퍼레이터: 12F
아.
실례합니다만, 혹시 박사님이십니까?
- 넌…… 12F?
- 넌……?
저를 아직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저를 어디에서 만난 적 있으신가요? 아니면, 제 파일을 이미 보신 겁니까?
아, 죄송합니다. 처음 뵙는 건데 아직 제 소개도 하지 않았군요.
안녕하세요, 박사님. 12F라고 불러 주십시오. 전 일반 작전팀의 오퍼레이터라 박사님을 뵐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죠.
- 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 없어!
- ……
-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어.
아뇨, 저랑 친해졌다가 사이가 틀어질지도 모르죠.
그럴 때를 대비해 예의를 차리는 편이 낫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고나 할까요?
말수가 적은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사님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지녔으니 틀림없이 성격도 많이 다르겠죠.
밖에서는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편입니다. 지금 말투에도 익숙해지니 바꾸기 쉽지 않더군요.
말실수 때문에 주먹다짐까지 벌어진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저속한 사람들은 멀리하는 편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시끄러운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거든요.
쉽지 않은 싸움이었는데…… 박사님은 잘 버텨내셨군요.
이런 전투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죠, 박사님도 그러신가요?
- (그는 두렵지 않았는지 되묻는다)
- (습관적인 침묵을 유지한다)
- (그에게 자신은 이미 이런 사실에 익숙해졌음을 말한다)
그렇게 물으신다면……
솔직히 말씀드리죠. 맞습니다. 팀을 따라 일단 오긴 했지만 여전히 겁이 납니다.
황야에서는 죽음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죠, 그곳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동도시를 짓게 된 거라 생각합니다. 살면 살았지 황야에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곳 도시 사이에서 일어난 여러 재앙은 운 좋게도 우리가 어딘가에서 도망쳤다고 생각할 때마다 스스로 또 다른 불행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거듭 증명하고 있습니다……
체르노보그 사람들은 이런 일을 겪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을까요? 절대 그런 적 없을 겁니다, 전전긍긍하며 사는 삶이 결코 행복할 리 없으니까요.
그 결과 또한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견뎌야 하는 제 자신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네요.
그런데 그 모든 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에게 닥쳐왔죠. 우리가 코어를 멈춘 지금, 체르노보그에서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모든 것들이 전 두렵기만 합니다.
박사님께선 말을 꺼리시는 것 같으니, 저도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박사님은 무엇에 익숙하신가요?
두려움? 아니면…… 전투?
전 왠지 좀 슬프군요.
안심하십시오, 박사님께 편견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건 아무래도 후자겠죠.
전투에 익숙하다…… 많은 전사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박사님은 전사가 아니지만 그들과 함께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데 익숙하시겠죠. 그렇다는 건 전투에서 남달리 추구하는 바가 있다는 뜻이겠군요?
아니면, 이런 충돌이 박사님에겐 그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전투의 피비린내, 명예 같은 것들이 박사님을…… 흥분시키나요?
죄송합니다, 박사님…… 말이 지나쳤군요.
다만 개인적으론 박사님께서 전장을 떠나시길 바랐습니다. 전장 지휘관으로서 박사님은 켈시 선생님과 막상막하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박사님께서 켈시 선생님처럼 원래 자신의 전공과 삶에 더 집중한다면 사람들에게 더 큰 힘이 되어줄 거라고 믿습니다.
문제는 현실은 우리의 바람과 항상 반대라는 거죠.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장난감 대신 무기를 들고, 희망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목숨을 잃습니다. 행복한 가정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지만 저흰 막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에 두려움을 느끼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저와 같은 부류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박사님이 저와 같은 부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박사님이 나타나신 뒤로,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셨더군요.
이기는 게 두려우십니까, 아니면 패배했을 때 무언가를 잃게 되는 것이 두려우신 겁니까?
전 애당초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멀리 도망치고 싶거든요.
어쩌면 전 박사님과는 정반대의 부류일지도 모릅니다. 전 승리조차 두렵거든요.
- (침묵을 유지한다)
- (그에게 어떤 의도인지 묻는다)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저희 팀도 슬슬 철수해야 할 것 같네요.
부디 조심하십시오, 기분 좋은 하루 되시길.
박사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거든요. 그래도 여기서 뵙게 되어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소됐답니다.
박사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닌 이상, 로도스 아일랜드에 이제 막 합류한 사람들 중에선 저처럼 박사님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답니다.
아미야 님에 대한 인상은 모두가 비슷하죠, 그녀의 그 작은 몸 안에 있는 그 강인한 의지가 그녀를 지탱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켈시 선생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전 그분을 이해할 수 있답니다. 켈시 선생님은 뭘 하시든 자신만의 원칙이 있죠. 충동적이거나 감정에 휘둘리는 일은 결코 없답니다.
이런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그런데……
박사님은 어떠신가요?
로도스 아일랜드에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모두들 그 전부터 박사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저흰 박사님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박사님은 어떤 분인가요? 저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박사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켈시 선생님께서 저희에게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박사님이 앞으로 로도스 아일랜드 지휘부의 중요 일원이 될 거라고요.
인사와 관련된 비슷한 메시지를 여럿 받아보긴 했지만 그 짧은 문장 속에 담긴 메시지에 눈길이 가더군요.
……저희 중 어떤 사람들에게 박사님은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때는 분명 그랬죠.
……박사님에게 어떤 과거가 있는지 저흰 모릅니다. 어떤 미래가 있을지는 더더욱 알 수 없죠.
로도스 아일랜드는 우리를 어디로 이끌까요? 그 여정에서 박사님께선 분명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겁니다. 전 알아요, 많은 사람이 이렇게 느낄 거란 걸요.
하지만 박사님 자신은 어떤가요? 이 모든 게……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시나요? 기억을 잃으신 데다, 이 세상 역시 박사님께 많은 사실을 숨기고 있죠.
박사님께 제 이야기를 들려드려도 될까요? 대답하시지 않아도 되니 들어만 주십시오.
어쩌면, 박사님께선 깨어난 뒤로 자신에게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고 느끼실 지도 모릅니다, 줄곧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왔으니까요.
음, 제 경험상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껏, 그리고 이 세상에 던져진 뒤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위인이 아닌 이상 저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이 말에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저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언제나 떠밀려 살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저흰 정말 선택권이 없는 걸까요?
사실 이번 체르노보그 코어 임무에 자원했습니다.
위험하단 것도, 제 신념에 어긋난다는 것도 알지만…… 온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하기보단 살고 싶습니다.
제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전문 오퍼레이터에 비하면 간신히 폐만 안 끼치는 정도랄까요?
그래도 그러기로 결심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유를 설명하거나, 이 일이 끝난 후의 상황에 대해 고민할 필요 없이요.
결정을 내릴 때는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신중히 고민한 뒤에 행동해야 하는 법이죠.
그런 점에서 박사님도 이미 선택하신 거 아닌가요?
박사님은 이미 저희와 함께 이곳에 오셨으니까요.
박사님은 여기에 계시죠.
그게…… 제 결론입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사님. 그리고 죄송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제 이야기만 했군요, 하지만 이전보다 확실히 박사님에 대해 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준비가 거의 끝났겠군요. 박사님이 안전하신 걸 확인했으니 이제 저희 팀도 철수해야겠군요.
그럼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뵙겠습니다, 박사님.
아, 참……
과거에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박사님의 선택 결과에 따라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겁니다.
전 박사님의 선택을 늘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