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8-1어제, 이삭이 갈라져 버린
과거를 버린 공작의 딸은 외딴 산골짜기 마을에 숨어 살며, 어느 순박한 가족을 알게 된다.
등장 오퍼레이터: 첸
드디어 왔구나.
훼이지에.
훼이지에에게
연일 내린 폭설로 산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어.
산딸기가 아직 싹도 틔우지 못한 걸 보니, 이러다 영영 봄이 오지 않는 건 아닐까 싶을 지경이야.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여기에 갇힌 채 눈이 녹기만을 기다리려니 하루하루가 따분해 죽겠어.
아무래도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여태껏 뭐 하나 잘 풀린 적이 없었어. 아무리 좋은 상황도 내가 끼어드는 순간 꼬이고……
어쩌면 용문 사람들 말처럼, 내가 화근이라서 내 주변에 사고가 끊이지 않는 걸지도……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일이 떠오르네.
아무래도 네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 안 그러면 마음이 계속 불안할 것 같아.
12월 14일
검은 뱀으로부터 벗어난 지 3년째 되는 해
우르수스의 어느 작은 마을
어여 와! 탈룰라!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할머니도 참, 늘 잔소리시라니까. 지금 들어가요.
이 할미가 몇 번을 얘기혀! 아직도 그걸 입고 있는 게야? 그 옷 입으면 벌레 꼬인대도!
시커먼 데다 독이 있어서…… 한번 물리면 농작물이 다 말라 죽는다고 했냐 안 했냐!
평소에는 평범하게 입고 다녀요. 요 며칠 일이 있어서 잠깐 갈아입은 게 전부예요.
이 옷을 입고 있어야 옷을 보내주신 멋진 분이 절 기억해 주실 테니까요.
그분과 다시 만난 건 분명 운명일 거예요. 나중에 할머니랑 할아버지 제가 꼭 호강시켜드릴게요.
아서라! 지난번이랑 말이 또 다르니 이거야 원……무슨 애가 입만 열면 거짓말을 술술 쏟아내는 건지……
할머니도 참……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대충 비슷하게 말하지 않았어요?
저번에는 네 애비가 생일선물로 보내줬다매?!
네 애비가 길가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외국인에게 강도를 당하는 바람에, 피 묻은 옷 입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막 그러더만!
그 이야기는 뭐고, 이건 뭐 또 뭐냐…… 어째 매번 얘기가 달라져?
어머, 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요? 우리 할머니, 기억력도 참 좋으시다니까.
듣기 좋은 말로 어영부영 넘어갈 생각이나 하고…… 곧 있으면 죽을 늙은이를 매번 속이고도 부끄럽지도 않어?!
죄송해요, 할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얼른 앉아! 옷이 입고 싶으면 그냥 입는 거지 거짓말이나 하고… 그 옷 입은 채로 반성해라!
와서 밥이나 먹어. 점심에 돌아온다더니만 이 봐봐 이거, 해가 다 질 때 되서야 와 가지고!
니 온다 그래서 스프 끓이다가 다 졸아버렸잖어. 이렇게 된 거 그냥 저녁으로 때워!
아이고, 폐하…… 이 아일 어쩌면 좋겠습니까……
어여 먹어. 안 그래도 할애비가 아까 니한테 볼 일 있다고…… 아니 이 영감탱인 또 어딜 주정부리러 간 겨? 얘야, 아무래도 네가 가서 찾아와야것다.
네, 알았어요.
쯧쯧…… 생긴 건 예쁘장하게 생겨 가지고는 입만 벌리면 그짓말이 자동으로 나와…… 듣기 좋은 소리만 늘어놓는 성안의 사내놈들이랑 똑같다니까!
나도 젊었을 땐 그 고~약한 놈들한테 속아 넘어갈 뻔했는데……
그만하세요…… 하도 들어서 귀에 딱지 생기겠어요.
쯧, 하여간 말하는 거 하곤! 어서 접시 챙겨! 빵도 얼른 먹고!
천천히 먹어 이것아, 그러다가 사레걸리겠다.
그날 네가 피범벅이 된 채로 나타났던 일만 생각하면……
하이고……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벌렁거린다니까. 탈룰라, 네가 못된 아이였으면 영감이 널 가만 안 뒀을 거다.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데요?
네가 여기에 나타났던 날은 유난히 어두운 밤이었지. 사방에 쫙 깔린 짐승들이 쉬지도 않고 계속 울어 재끼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게다가, 네가 들고 있던……
억, 푸흡…… 쿨럭, 쿨럭!
그 칼…… 그렇게 큰 건 또 생전 처음 봤지 뭐냐!
그건 칼이 아니라…… 검이라고요! 그걸로 산 타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쓰기도 불편한데……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신 안 하기로 했잖아요. 할머니, 자꾸 그러시면 저 화낼 거예요.
에구머니나! 내 정신 좀 봐, 하여간 입이 방정이지…… 폐하, 다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이 늙은이를 부디 용서해 주십쇼……
그러지 마세요, 할머니. 사치와 향락에 취한 황제는 다음 주에 먹을 감자도 없는 우리한테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할머니는 지금 황제가 누군지도 모르시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덜 말어!
수프가 좀 싱겁네…… 집에 소금 없어요?
없어 이것아! 안 그래도 어젯밤에 소금이 다 떨어졌다, 너랑 영감은 어찌 그리 짜게 먹는 건지…… 그렇게 짜게 먹다간 온몸이 소금에 절어질 게다!
한 번 나가면 며칠동안 감감무소식이믄서! 게다가 돈도, 식량도 없이 매번 빈손으로 돌아오니……
알았어요, 가서 바꿔오면 되잖아요.
사지도 멀쩡한 게 부지런하면 을마나 좋아!
됐다, 알리나한테 얘기해 뒀으니 곧 가져다줄 게다…… 쯧쯧, 한심도 하지!
알리나 좀 봐라, 얌전하니 을마나 좋아? 차분한 데다 공부도 잘하고, 손재주도 좋은데 넌 어찌 된 게 바느질 하나 못하니……
어차피 각자도생인데……
응? 그건 또 뭔 소리냐?
사람마다 정해진 길이 다르다고요.
길? 길은 무슨 길이여,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 꾸리면 그만이지. 일하기 싫음 말어! 니 일하는 거 기다리다 모쏘앗이 다 썩겠다.
농사일이라면 매년 돕고 있잖아요.
거 몇 년이나 했다고……
할머니, 탈룰라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알리나, 네가 쟤 좀 붙잡고 말해보렴. 계속 이렇게 살다간……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아, 네가 왔으니 이제 할머니도 좀 조용해지시겠네.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어디서 난 건지도 모르는 제복을 걸치니까 무슨 귀족이라도 된 것 같아? 하여간 겉멋만 잔뜩 들어선, 그런 건 어디서 배워온 버르장머리야!
난 일하러 갔다 올라니까 알아서들 먹거라. 알리나도 요기 좀 하고. 탈룰라, 혼자만 먹지 말고 알리나도 챙겨줘.
네, 네……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할머니
탈룰라, 소금 가져왔어. 소금 장수는 다음 주에 온다니까 그때 꼭 사둬.
고마워, 알리나. 네가 없었다면 귀가 딱지가 생길 때까지 잔소리를 들어야 했을 거야.
다 들린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는 거야?
그냥 나가서 바람이나 쐬려고. 자, 네가 부탁한 풍경화.
아, 기억하고 있었구나. 고마워!
……
붓터치를 보면…… 이 근방의 화가가 그린 것 같지 않은데?
슈미르 마을의 늙은 화가는 거칠게만 그려서 섬세한 붓을 쓸 줄 몰라. 털끝이 부드러운 걸 보니 이건…… 탈피하지 않은 나이트아이의 꼬리털이 분명해.
성에 다녀왔구나.
……넌 속일 수가 없다니까.
날 속여서 뭐 하려고? 난 헌병도, 세리도 아닌데.
위험한 일 같은 건 넌 몰라도 돼.
그렇다는 건, 네가 위험하다는 뜻인 거야?
……
눈앞의 사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백발의 드라코는, 알리나가 모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게 최선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알리나, 너도 신경 쓸 필요 없어……
크, 큰일이야!
뭔 일인데 문을 그렇게 냅다 박차고 난리법석이여? 그러다가 문짝이라도 부서지면 어쩌려고……
가, 감염자 감시팀이!
영감님이 싸움에 휘말리셨어요.
으응?!
탈룰라! 어디 가?
앗, 칼! 알리나, 탈룰라한테 칼 쥐어주면 안 돼!
다시 한번 말한다, 늙은이. 계속 방해한다면 이 자리에서 다리를 분질러 주지!
다녀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나타난 거냐! 이제 세금 낼 돈도 없다! 언제까지 괴롭히려는 게냐!
정기 감찰이다! 그동안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2년마다 반드시 받아야 해…… 안 그러면 우리까지 매질을 당할 테니까.
근데 너흰 분명……
돈도, 장신구도, 먹을 것마저 없는 사람들한테 뭘 더 뺏으려는 게야! 아무것도 안 준다, 아니 못 준다!
아직도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정기 감찰이다, 모두 비켜!
어이쿠 선생님, 제발 한 번만 봐주십쇼! 이젠 정말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습니다요. 드릴 것이라고는 이 목숨 밖에……
비키라고 했을 텐데!
흐윽!
다, 다리가……
무슨 짓이냐?
뭐야? 어디서 굴러먹던……
……너, 그 옷 어디서 났지? 서민 주제에 이런 옷을……
……
무슨 짓이냐고 물었을 텐데?
뭐, 뭐야?
저, 저리 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헉…… 누구 하나 죽일 눈빛이로군!
……죽고 싶은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