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피누스 실베스트리스

바람과 함께 떠돌며

미니 스토리브릿지2022-04-14

어린 센토레아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고 있다. 나이와 경력이 쌓인 후, 센토레아는 문득 자신에겐 선택할 권한은 사라진지 오래이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떠돌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등장 오퍼레이터: 플래티넘


학창 시절을 무사히 마치고,

나, 센토레아는 인생이란 선택지를 맞이했다.

카시미어에서는 학업을 마친 학생들의 인생 선택지가 다양하다.

매년 열리는 대기업의 학원 졸업자 채용에서 전 카시미어의 우수한 인재들과 경쟁하여, 힘들지만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할 만한 일을 얻는 것.

혹은 군에 입대해 1년간의 지옥훈련을 거친 뒤, 국경 지대로 파견되어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

아, 물론 감정회를 위해 일하는 것도 전망이 좋지만, 난 그런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래서……

기사 헤드헌터

센토레아 씨, 우리 회사의 기사 오디션에 참가해 볼 생각 없나요?

그래서 로즈 미디어 그룹의 직원이 명함을 건넸을 때, 나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인사말을 건네며 명함을 받았다.

기사.

카시미어에서 기사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팬들의 찬사와 고액의 수익을 원치 않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물론, 가끔 스캔들이 터지거나 하룻밤 만에 무명 신세가 되는 기사도 있긴 하지.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활도 잘 쏘고 얼굴도 예쁜 편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회사의 방침에 기꺼이 따르기를 원하니까.

기사만 된다면 뭐, 상대를 이기지 못해도 딱히 상관없다. 나중에 에슈베리아 기사단처럼 춤추고 노래하며 젊을 때 한탕 벌어서 일찍 은퇴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


결국 나는 그해의 로즈 미디어 기사 오디션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순조롭게 꿈에 그리던 계약을 따냈다.

우승자는 금발에 온몸에서 밝은 빛이 나는 남자……

뭐랄까, 그 사람은 진심…… 카시미어 사람들이 쿠란타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 그 자체였다. 출신도 좋아서 그런지 이미 우승자로 내정된 것 같았다.

내정된 게 아니더라도 이런 오디션에서 그를 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적어도 시청자 투표에서는 절대로 이기지 못할 테니까.

관두자, 불평해봐야 소용없다.

아직도 갈 갈이 멀다. 어쩌면 걔보다 내가 먼저 기사 칭호를 받을지도 모르지.


매니저

안심하세요, 센토레아 씨. 이번에는 정말로 기사 칭호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매니저

이미 본부에 확인해 봤습니다. 당신은 지금 처리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프리랜서 기사입니다.

매니저

당분간 경기는 줄어들지 몰라도, 미디어 노출은 더 많아질 겁니다.

매니저

앞으로 몇 달만 더 기다려 기사 칭호까지 받으면, 당신은 신인 중에서도 로즈 미디어가 가장 많이 밀어주는 기사가 될 겁니다.

센토레아

그래, 고마워.

이런 약속은 처음이 아니다.

희망찬 미래, 반짝이는 별, 로즈 미디어의 전폭적인 지원.

매니저는 이미 환상에 빠져 자신이 맡은 프리랜서 기사보다도 더 그런 약속을 믿는 것 같았다.

이 매니저는 성격도 좋고 열심히 일하며 항상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뛰어다닌다.

하아, 그런데 솔직히,

난 기사가 되는 것에 이미 질렸다.

아직 기사 칭호를 얻지는 못했지만, 정식 기사가 평생 마주치는 문제를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 경험했으니까.

경기에서 져달라고 지시받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승부조작의 티가 나지 않게 연기하는 게 좀 피곤하다는 것만 빼면, 그나마 괜찮은 편이지.

적어도 지금까지 들키지 않았고, 기사 자격도 아직은 그대로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스캔들에 대응하거나, 임의로 변경되는 경기 일정을 소화하는 게 너무나도 힘들었다.

단지 내가 이번 기수의 유망주 프리랜서 기사라고 이렇게 여기저기 끌려다녀야 하나?

도대체 그놈의 기사가 뭔데?

상품? 상품은 적어도 팔리면 끝나기라도 하지.

나는?

......

그나마 좋은 소식이라면 나의 기사 칭호 신청이 감독원에 정식으로 공표됐다는 것이다.

후우…… 드디어 길었던 프리랜서 기사 생활의 끝이 보이는가.

이제 곧 기사 칭호를 받으면 나만의 엠블럼이 거리 곳곳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이 단계에서 떨어진 사람은 없었다. 즉……

눈앞의 이 경기만 끝내면 기사 칭호를 받고 정식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거지.

비록 이 경기에서 '프리랜서 기사 센토레아'의 승패는 이미 전부터 정해져 있지만……

물론 패배하는 쪽이지.

에휴……


그런데 오늘 경기의 그 쿠란타 녀석은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내가 힘이 빠진 척 심판에게 사인까지 보냈는데 왜 날 계속해서 공격하냐고?

그게 승자만의 권리인가? 자기가 승리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를 파울비스트 다루듯이 쫓아다니며 개망신을 주다니?

만약…… 만약 다친 척 연기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내가 분명……

......

하아, 아빠 말이 맞나 봐. 기사라는 건 아레나에서 치욕을 당하는 거랬는데.

그게 싫으면 망치로 이런 규칙을 만든 놈들을 전부 때려 부수든가, 아니면……

뉴스에 실려 이튿날 깔끔하게 사라지든가.


오늘은 로즈 미디어 그룹과 계약한 프리랜서 기사들이 예능에 출연하는 날이다.

이걸 찍기 위해 로즈 미디어는 아레나 하나를 통째로 빌렸고, 심지어 요즘 핫한 정식 기사들까지 불러왔다.

하지만 리허설이 시작하기도 전에 불청객이 몰려왔다.

그들은 모든 기사를 구석으로 데려가 일일이 심문했다.

그들의 호통 아래 기사들은 마치 시들어 빠진 꽃처럼 땅에 웅크리고 앉아, 행여나 아머레스 유니온에게 찍힐까 벌벌 떨고 있었다.

평소에 성격이 더러운 기사들조차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며 눈을 내리깔고 고분고분 조사에 응했다.

이게…… 기사 킬러인가.

몇몇 정신이 무너질 것 같은 기사들이 다급함에 특종 거리를 토해내자, 아머레스 유니온은 기사 한 명을 데리고 사라졌다.

덕분에 오늘 촬영은 네 시간 후에야 녹화를 뜨기 시작했다.

그 끌려간 기사가 어떻게 됐냐고? 나도 모른다. 그 후론 그에 관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으니.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위잉~ 위잉~

센토레아

후우…… 여보세요.

???

안녕, 프리랜서 기사 센토레아. 곧 기사 칭호를 받게 되는 걸 축하한다.

센토레아

이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비즈니스 건이라면 내 매니저랑 연락해.

???

지금 하는 일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나 본데? 말투가 영 지쳐 보여.

???

나라면 더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데.

???

간단한 테스트만 통과하면 바로 일을 주도록 하지.

내가 잠시 곤란해하고 망설이고 있는 사이, 단말기 너머의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아레나는 너무 좁아, 안 그래?

???

당신은 활만 가볍게 쏴도 아레나 끝에서 반대편으로 보낼 수 있잖아.

???

내가 제공하는 일자리는 급여도 기사 못지않을뿐더러,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지.

???

센토레아 씨, 당신만 원한다면 그 화살이 그랜드 나이트 영지의 밤도 꿰뚫어버릴 수 있어.

???

그럼 대답을 기대하고 있을게.

통화가 끝나자 그는 내 단말기로 주소를 하나 보내왔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테스트가 무엇인지 나는 전혀 몰랐다. 하지만……

“센토레아 씨, 당신만 원한다면 그 화살이 그랜드 나이트 영지의 밤도 꿰뚫어버릴 수 있어.”

흥, 그래도 광고 찍는 것보다는 훨씬 재밌을 것 같다.


알려준 장소에 도착하니 그곳은 꽃집이었고, 주인은 나를 보자 꽃다발을 들고나왔다.

꽃다발 위에는 주소, 몇 가지 정보, 그리고 이름이 적힌 메모가 있었다.

바로 지난번 상대였던 그 쿠란타의 이름이었다.

꽃다발 속엔 생산자나 제품 번호가 없는 군용 화살이 숨겨져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내가 그 조직의 1단계 신뢰를 얻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반대로,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미 '그들'의 초대를 받았는데, 다시 기사로 돌아갈 순 없잖아?

테스트를 통과하거나, 아니면 다음 날 신문에 실리든가.

헤드라인도 대충 짐작이 간다…… “프리랜서 기사 센토레아, 불의의 사고로 자택에서 사망”.

쳇, 애초에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비록 내가 살육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유리창 앞의 안마의자에 편하게 앉아 마사지 받는 저 녀석을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자료에는 저 프리랜서 기사의 수많은 악행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회사 방침 불복종, 돈을 받고도 멋대로 경기에서 상대를 쓰러뜨려 이사회를 곤란하게 한 것.

첫 번째 이유만으로도 녀석을 충분히 공개 처형시킬 수 있는데, 단지 녀석의 성씨 때문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네.

그 누구도 이 오래된 가문의 도련님에게 미움을 사려 하진 않으니까.

이런 이유로 카시미어에는 기사 킬러가 필요한 게 아닐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숨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하며, 활의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유리창에 구멍을 내고 이내 녀석의 미간을 뚫고, 심지어 안마의자까지 관통하여 그 비싼 원목 바닥에 꽂혔다.

만약 아레나였다면 저 녀석을 처리하는 데 꽤 애를 먹었을 것이다.

갑옷을 뚫는 것도 벅찬데, 거기다 쓸데없이 화려한 동작까지 해가며 관중들의 비위도 맞춰야 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화살을 올려놓고 시위만 당기면……

끝.

......

안마의자는 계속 돌아가고 있지만, 녀석은 다신 일어나지 못한다.

위잉~ 위잉~

센토레아

여보세요.

???

아주 잘했어, 센토레아 씨. 조사도 잘했고 임무 실행 장소의 선택도 기가 막히더라. 테크닉은, 당신 나이와 재능으로 따지면 이미 충분해.

???

오늘부로 당신은 아머레스 유니온의 일원이야.

???

로즈 미디어와의 교섭도 방금 끝났어. 그쪽에서 당신과 계약을 중지하고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도 동의했지.

???

내일 아침, 상업연합회 본부 빌딩으로 와. 전담자를 마중 보내 후속 업무 지시를 내리도록 하지.

센토레아

알았어.

센토레아

그런데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

......

???

나를……

???

플래티넘이라고 불러.


이게 바로 카시미어다.

앞길이 유망했던 프리랜서 기사 센토레아는 전화 한 통을 받고, 테스트에 합격하더니 곧바로 아머레스 유니온 플래티넘의 제자가 됐다.

덕분에 내 궁술도 더욱 향상되긴 했지.

아레나에서의 근거리 사격보다, 나는 장거리 저격에 더 능숙하다. 플래티넘도 이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아머레스 유니온으로 초대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상상도 못했던 것들도 가르쳐줬다.

관리, 지도, 배치, 지휘.

음…… 설마 나의 리더십을 발굴하여 관리직으로 키울 생각인가?

사무실에 앉아 지시만 내리고 내 손을 더럽히지 않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


3개월이 지나자, 사람들은 이미 센토레아라는 프리랜서 기사를 깨끗이 잊어버렸다.

매니저는 오디션에 합격한 다른 기사들의 매니저가 되었고,

팬들의 눈길도 이미 다른 기사의 빛에 사로잡혔다.

매일같이 얼굴 한 번 보려고 센토레아 집 앞에서 죽치던 열광적인 소녀 팬들은 진작에 다른 기사의 후원클럽에 가입했다.

심지어 자신의 옛 우상이 스쳐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마치 센토레아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빛이 반짝인 후에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

어쩌면 이게 모든 기사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머레스 유니온은 다르다. 그들은 기사들의 생사권을 쥐고 있으며, 아무리 오만한 기사라도 아머레스 유니온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가 된다.

전제는, 위에서 내린 임무를 잘 수행해야 하는 거긴 하지만.

하아…… 아무래도 상업연합회의 이사들은 보고서에서 '임무 실패'라는 네 글자를 보는 게 싫었으니까.

임무에 실패했다간 플래티넘도 연대책임을 져야 하니까.


대변인

이게 아머레스 유니온이 일하는 태도인가?

아머레스 유니온 멤버

……

대변인

몇 번이나 강조했을 텐데? 제일 중요한 건 정보다! 정보라고!

대변인

그 기사가 죽든 살든 상관없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 기사가 기밀 정보를 누설하는 것을 막지 못했잖나?

센토레아

……

대변인

타겟이 가짜 발신장치로 우리를 교란시키면서, 시체에 마이크로 발신기를 숨겨 정보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대변인

좀 더 주의하고, 좀 더 신경 쓸 수는 없나?

대변인

그자는 처리했지만, 문제는?!

대변인

내가 말한 문제를 너희들은 해결했나?!

아머레스 유니온 멤버

(입을 꾹 다문다)

센토레아

(플래티넘을 바라본다)

이 대변인이라는 거물이 이토록 욕할 시간이 충분한지, 아니면 단지 아머레스 유니온을 욕하고 싶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한 시간이 넘도록 욕을 퍼부었다.

......

뭐 욕하는 건 그의 자유지만,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다른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변인의 앞에 선 플래티넘은 어떠한 변명도 반박도 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플래티넘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그는 장시간 욕먹는 것을 견딜만한 사람은 아니다.

만약 플래티넘을 화나게 했다간 눈앞의 이 가냘픈 고급 월급쟁이는 살아남을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플래티넘은 참아냈다.

화를 참아냈을 뿐만 아니라 고분고분하게 보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단지 그가 대변인이기 때문에, 단지 이 사람이 상업연합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이번 질책 총회는 장장 1시간 36분 28초 36밀리초 동안 이어졌다.

회의 참석자는 대변인 1명, 서기 1명, 플래티넘, 나, 그리고 아머레스 유니온 멤버 7명이었다.

회의 전체를 통틀어 그 대변인만이 발언을 이어 나갔고, 우리는 하아, 말할 자격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날부터 나는 깨달았다.

기사든 아머레스 유니온이든 결국은 상업연합회에 고용된 직원뿐이란 걸. 사무실에서 굽실대며 문서를 작성하고 전화하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다.

그저 우리의 일이 더 힘들고, 돈을 더 많이 받을 뿐이다.

그게 다다.

하아……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밤, 기사 한 명을 처리한 뒤 라주라이트가 나를 찾아왔다.

'라주라이트'

페가수스 꼬마, 플래티넘을 찾고 있는데 못 봤어?

센토레아

스승님은 임무 나갔어.

'라주라이트'

그래, 하하.

'라주라이트'

무슨 임무지?

센토레아

안 알려줬어.

'라주라이트'

그렇다면 이번 목표에 의문을 품고 있다거나 하지 않았어?

센토레아

아니. 근데 난 조금 알아챘어.

'라주라이트'

……

'라주라이트'

아주 정직하구나, 페가수스 꼬마.

'라주라이트'

음, 네가 플래티넘의 비밀을 알려줬으니, 나도 답례로 하나 알려줘야겠네.

'라주라이트'

플래티넘은 이미 죽었어. 배신하고 도망치던 도중에.

센토레아

!!

센토레아

……

나는 알고 있었다. 플래티넘이 지난번 목표에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줄은 몰랐다.

'라주라이트'

문제는 갑자기 자리가 비는 바람에 나뿐만이 아니라, 다크아이언과 상업연합회 이사들도 아주 곤란해하거든.

'라주라이트'

그럼 이렇게 하자, 페가수스 꼬마.

'라주라이트'

네가 플래티넘 해, 어때?

한동안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좋다고 하면 나를 당장 죽이지 않을까? 만약 싫다고 대답해도 똑같이 죽는 거 아닐까?

나는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말을 흐렸다.

애초에 난 이 질문에 대답할 용기가 없었다.

내가 플래티넘의 제자라고 그의 뒤를 이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제자는 나뿐만이 아니다.

더군다나 플래티넘이 막 배신했는데 그의 제자가 바로 새로운 플래티넘이 된다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몇몇 베테랑 아머레스 유니온 멤버들은 기술이나 지휘 능력이 나보다 훨씬 나은데?

왜 나지?

왜 나여야만 하는 거지?

내가 넋을 잃고 서 있는 걸 보더니 라주라이트는 미소를 지으며 '플래티넘'을 상징하는 배지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라주라이트'

대답이 없으면 묵인하는 걸로 한다.

'라주라이트'

열심히 해, 꼬마 플래티넘.

말이 끝나자 그는 자리를 떴다. 플래티넘이 된 센토레아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기사를 남겨둔 채.


플래티넘이 된 후에야 나는 비로소 그 고충을 이해하게 됐다.

상업연합회의 이사들은 하루가 멀다고 아머레스 유니온에게 어려운 일을 마구 던져줬다.

라주라이트는 최우선의 임무를 직접 맡았고, 플래티넘은 라주라이트를 지원하면서도 사람을 시켜 이사들의 다른 난제들을 처리해야 했다.

관리도 해야 하고, 직접 처리하기도 해야 하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좋은 소리 못 듣는 일자리는 카시미어 전역에도 아마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가 가르쳐줬던 것들이 모두 쓸모가 있었다.

작은 실수를 몇 번 저지르고 대변인에게 두세 번 욕먹고 나니, 나도 이 일에 대해 조금 이해하게 됐고, 어떻게든 플래티넘으로서의 직책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그만둘 수만 있다면, 난 아마 망설임 없이 상업연합회에 사표를 냈을 것이다.

이렇게 힘들면서 부담이 크고 위험한 일을 누가 하고 싶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겐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하아……


플래티넘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바로 상업연합회의 전화가 언제 울릴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랜드 나이트 영지의 중심인 상업연합회의 본부 빌딩에서부터……

이동도시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섹터까지.

그것은 마치 이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처럼,

꼭 플래티넘이라는 불쌍한 사람을 찾아내서,

벨이 울리면 전화를 받아 연합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당부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플래티넘에겐 거절할 권리가 없다.

그래서……

플래티넘

여보세요.

???

안녕, 플래티넘.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기밀 임무가 있는데, 빨리 움직여 줬으면 좋겠어.

플래티넘

흥…… 말해 봐.

???

내일 열리는 상업연합회의 이사회의 말인데, 글로리어스 실드 공업의 회장이 내일 참석하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어.

플래티넘

그, 그 말은?!

???

맞아. 글로리어스 실드 공업의 그 어떤 관련 업무도 앞으로 그 사람이 일절 관여하지 못하게 했으면 해.

플래티넘

이사에게 손을 대라니, 나에게는 그럴 권력이 없는 걸로 아는데.

???

실은 이 임무는 라주라이트에게 주는 거지만, 그 사람들이 당신을 추천하더라고.

???

그래서 당신의 전화가 울린 거야.

???

임무 권한 암호는……

???

확인해 봐.

플래티넘

확인했어…… 오류 없어.

???

좋아.

???

우릴 실망시키지 말고.

일반인을 없애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상업연합회의 이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나는 라주라이트에게 연락했다.

라주라이트는 글로리어스 실드 공업 그룹 본사 빌딩의 회장 휴게실에 가서 임무를 완수하면 될 뿐이라고 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면서, 이미 다 처리했으니 아무도 나를 막지 않는다고 했다.

통신을 끊고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라주라이트조차 이렇게 말하는데, 나라고 어쩔 수 없지.

날이 밝기까지 네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퇴로를 확실히 막기 위해, 글로리어스 실드 공업 그룹 본사 빌딩으로 향하기 전 나는 아머레스 유니온 소대 하나를 이사의 자녀가 사는 주변에 배치했다.

그리고, 정문으로 건물에 들어갔다.

라주라이트 말처럼 글로리어스 실드 공업은 이미 오늘 밤을 위한 준비가 돼있었다.

건물은 활짝 열려 있었고 경비원도 없었으며, 감시 카메라마저 모두 점검 중이었다. 프런트의 가장 눈에 띄는 곳에는 임시 출입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카드는……

최상층에 있는 회장 휴게실까지 직통하는 엘리베이터 권한이 열려 있었다.


방에, 아니지, 정확히는 이 전용 휴게실 층에 도착했을 때, 글로리어스 실드 공업의 회장은 대형 단말기 앞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다.

그가 눈치채기 전에 나는 이미 그의 목을 꺾었다.

목표물의 생명 징후가 사라진 걸 확인한 후, 나는 라주라이트에게 보고했다.

일반적으로 임무가 끝나면 연합회에서 바로 전화가 온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떠나지 않았다.

어차피 전화는 받아야 하니까, 어디서 받든 똑같잖아?

나는 커튼을 열고 거대한 창문 너머로 불이 꺼지지 않은 그랜드 나이트 영지의 환한 밤을 바라보았다.


아직 학생이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기사를 동경했는데.

기사가 된 후에야 나는 기사 킬러들의 비밀을 알게 됐다.

하지만 아머레스 유니온의 간부가 되었어도 여전히 상업연합회의 말을 따라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 아이러니하게도 내 손에서 이사 한 명이 쓰러졌다.

부모님은 내 예리한 눈이 가문에 영광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본 건 대체 뭐지?

그랜드 나이트 영지 밖의 칠흑 같은 황야.

그랜드 나이트 영지를 가득 채운 네온 불빛.

도시 정중앙에 우뚝 서 있는 상업연합회 빌딩.

그리고 그 위에서 빛나고 있는 밤하늘.

볼 수만 있다면 나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높은 상업의 탑 꼭대기에서, 도시가 깔아뭉갠 땅 밑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연합회의 이사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손은 이사들을 조종해 건물 꼭대기에 계속 벽돌과 기와를 쌓아 올리며, 카시미어라는 이름의 높은 탑을 계속해서 짓고 있다.

이사들마저도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마음에 안 들면 바꿔버리면 되니까.

이 사람은 시작이 아닐 것이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그 손은 상업연합회를 거쳐 카시미어 전역으로 뻗어있다.

이 땅 위에 남아있는 한, 그 손으로부터 도망갈 방법은 없다.


플래티넘

흥……

플래티넘

멍때릴 여유조차도 안 주나…… 하아……

플래티넘

피곤하네……

플래티넘

쉬고, 싶다……